연세대학원신문 5월호에 기고한 글이지만 내부 사정으로 신문이 나오지 않게 된 바람에 붕 뜨게 된 원고를 옮겨놓는다(나중에라도 나오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혁명'을 키워드로 한 '당신 서재의 나침반'인데, 그냥 김규항의 <예수전>(돌베개, 2009)과 몇 권의 책을 거명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은 <예수전>(돌베개, 2009)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이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이 영성이다. 김규항이 보기에 영성 없는 혁명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 없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개인의 심리적 평온뿐이다. 마르코복음 읽기를 통해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의 참모습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그리고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혁명을 꿈꾸었다고 그는 적는다.  

그렇게 보자면, 개인의 자발적인 변화를 도외시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즉 사회주의 패망이 말해주는 것은 ‘영성 없는 혁명’의 필연적인 실패일 뿐이다. 우리에겐 아직 시험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이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된 한 ‘시골 청년’이 꿈꾼 ‘하느님 나라’이고 새로운 세상이다. 그것은 어떤 세상인가?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모든 억압과 착취,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그것이 아무런 과정이나 절차 없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오는가? 가령,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문제로서 ‘정치적인 해방’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김규항은 마르코복음 5장에서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게 하여 호수에 빠져 죽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또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돼지 같은 로마군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려 모조리 물에 빠져죽게 했다는 것이 로마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이 이야기의 숨겨진 메시지이자 익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예수의 정치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각이나 태도로 볼 때 그가 로마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좀 허전하다. 로마는 예수의 분명한 적이었을 테지만 정작 이 로마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김규항은 진정한 변화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적어놓긴 했다. 그는 혁명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대신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분노는 주로 ‘위선자’ 바리사이인들을 향한다. 그러한 예수의 방식을 따라서 김규항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은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를 표어를 내걸고 활동한다. 이들은 배운 만큼 배운 사람들로서 나름대로 안정된 경제력을 갖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 정도에 머문다. 이들은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적대세력으로서 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비판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김영사, 2009)를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으로 ‘완고한 신앙’을 가진 대다수 한국 교회도 포함해야 할 듯싶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믿사오니’를 외치는 예수 신자로서 예수 ‘믿으미’는 많아졌으나, 그의 명령을 올곧게 따르는 예수 ‘따르미’는 적어진 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사다. 물론 이러한 왜곡이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역사적 예수’는 증발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만 더 강화된 기독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주요 개신교 교파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판국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의 힘과 조직의 힘을 숭배하며, 그런 교회일수록 예수의 이름을 크게 외치지만 실상과 이름과 현실이 따로 노는 위선적인 행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잘못된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온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진정한 혁명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변화를 창출할 수 있을까? ‘자발적인 변화’와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시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것은 근대 혁명의 원점으로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걸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프레시안북, 2009)를 참조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라고 이 혁명가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평가되는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에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9)에서 이러한 파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1963년작 <혁명론>(한길사, 2004)에서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르벨은 1970년에 펴낸 <마르크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법문사, 1972)에서 20세기의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 곧 ‘혁명 없는 혁명’이 바람직한 혁명의 조건이라면 ‘자본주의 혁명’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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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9-06-1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뭔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문제였는데 핵심적으로 연결하고 배치하고 설명해주셨네요.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책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읽고 있죠. 그럼 건필하시길.......

로쟈 2009-06-13 08:26   좋아요 0 | URL
'건필'은 보시는 대로입니다.^^

꼬마요정 2009-06-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큰 생각은 못 하고... 명박이라도 내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우리 역사를 볼 때 언제나 우리의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면 얼마 뒤 다시 빼앗겨 버리는 게 일쑤라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청산 없는 혁명은 (혁명이라는 뜻 안에 대안과 청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못 쓰겠네요..) 혁명이 아니라 그저 전복일 뿐이겠죠.. 아.. 짧은 지식으로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ㅠㅠ 사회주의 혁명이니 자본주의 혁명이니 다 좋지만,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13 08:29   좋아요 0 | URL
'혁명'이란 말도 하도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자체만으론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그걸 좀 분명하게 해두는 게 좋을 듯해요...

2009-06-15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란 가사로 시작하는 '새마을노래'는 아직도 귀전에 생생하다. 초등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 새마을운동에 대한 생활사적 연구서가 출간됐다.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 2009). 바우만의 '액체근대'에 견주자면, 한국식 '고체근대'에 관한 한 가지 보고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한겨레(09. 06. 11) “새마을운동은 농촌 몰락의 시작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성공한 농촌 근대화운동으로 미화하든 농민에 대한 억압적 동원체제로 비판하든, 정부 정책에 초점을 둔 국가중심적 접근이란 점에선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이란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어요.”

<그들의 새마을운동>(푸른역사)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첫번째 연구서라는 점 말고도, 민중의 경험세계를 통해 사건에 접근하는 생활사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새마을운동 시기 모범 마을로 선정돼 두 차례나 포상을 받은 경기 이천군의 작은마을 아미리와,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돼 <대한뉴스>에까지 보도된 농촌운동가 이재영씨가 책의 주인공이다. 책을 쓴 김영미(42) 국민대 연구교수의 논지는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마을’과 ‘새 농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미리는 1930년대 일제가 펼친 농촌진흥운동에서도 모범 부락이었습니다. 과거부터 근대화를 위한 자발적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던 곳입니다. 이재영씨 역시 1950년대 서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애향청년회라는 계몽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던 농촌운동가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런 자발적 흐름이 박정희 정부 시기 가시적 결실을 맺게 된 데는 정부의 물질적 지원과 평가, 포상이 모두 마을 단위로 이뤄짐으로써 마을공동체의 자치력과 마을간 경쟁심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당시 마을공동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신구세력간 권력 갈등이다.

“이농이 본격화되기 전이라 당시 농촌마을에는 중등교육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 근대성을 내면화한 청년 주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연장자 중심의 마을 권력과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발전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충일된 청년들과 손잡음으로써 운동의 자발적 주도 세력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유신체제를 마을로 이식한 존재들이기도 했다. 연장자 중심의 마을공동체를 움직이기 위해선 국가의 권위와 행정력을 등에 업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청년들은 자기 마을을 박정희 정부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실을 했다는 얘기다. 물론 여기엔 3선개헌을 계기로 뚜렷하게 하락한 도시지역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농촌을 체제 유지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의 의지 또한 작용했다. 이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동원 방식은 소외계층의 욕망을 자극해 체제의 자발적 동조자로 포섭한 파시즘의 대중 동원과도 유사하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농촌 마을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발전과 부를 성취했을까? 김 교수는 말한다. “거주 환경이야 나아졌죠. 문제는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앞다퉈 고수익성 작물 재배에 뛰어들었는데 설비투자 비용은 물론 불투명한 판로와 널뛰는 가격 탓에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던 것이죠. 80년대가 되면서 청년들은 더 빠른 속도로 고향을 등졌고, 농촌은 희망이 사라진 노인들의 휴식처로 전락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농촌 피폐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세영 기자) 

09. 06. 11 

 

P.S. 같은 저자의 책으로 <동원과 저항 -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푸른역사, 2009)에도 덩달아 눈길을 주게 된다. 저자는 역사 대중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도 기획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작업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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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오후 5시에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6·9 작가선언’이 발표된다.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이며 188명의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문인들이 참여할 예정이다(확정된 인원인지는 모르겠다. 나도 이름을 올려놓았다). 선언문은 9일자 한겨레와 경향신문에도 게재될 예정이며 발표장에서는 참여자들의 '한줄선언'도 낭독될 것이다. 선언문은 내일 공개하기로 하고 일단은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교수님 지지합니다” 성균관대 교수들이 8일 교내 호암관에서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나오자 학생들이 복도에서 손팻말을 들고 응원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경향신문(09. 06. 09) 문인·법조계도 시국선언… 정치색 없는 작가 대거 참여

대학 교수에서 시작된 이명박 정부의 국정 독주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문인과 법조계 등 각계로 확산되고 있다. 188명의 시인·소설가·평론가 등 문인들로 구성된 ‘6·9 작가선언’은 9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8일 밝혔다. 작가선언은 진보 성향의 작가단체인 한국작가회의와 별개로 정치적 색깔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자유주의 성향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미리 공개한 선언문을 통해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참담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다양한 문학적 지향과 정치적 입장을 지녔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선언을 함께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의 현실이 작가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 주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밝혔다. 작가들은 선언문과 함께 188명 개별 작가들의 목소리를 담은 ‘한 줄 선언’을 낭독한 후 시청 앞 광장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작가회의(이사장 최일남)도 같은 날 문학평론가 염무웅·도정일, 소설가 현기영·구중서 등이 참여한 가운데 현 정권 실정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법조계도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시국선언 움직임에 가세했다.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변호사·법학교수 모임은 10일 오전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박재승 전 대한변협 회장,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등이 주도한 시국선언문에는 법률전문가의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 이후 인권과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비판과 요구 사항이 담길 예정이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이날도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계속됐다. 성균관대 교수 35명은 정부의 무리한 공권력 사용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요구했다. 선언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학생들이 비민주적 정치 행태를 보고 실의에 빠지거나, 저항하다 희생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신대·우석대·인천대 교수들도 현 시국에 우려를 표명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이영경·김보미기자) 

09. 06. 08.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명 

09.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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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신랑의 생각
    from bt22d's me2DAY 2009-06-09 11:04 
    [알라딘서재]6·9 작가선언
  2.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6-09 11:25 
    6·9 작가선언 — via 로쟈
  3. 오월아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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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4. 0609 Korean writers&#8217; declaration &#8216;this&#8217;s People speech&#8217;
    from Astraea's Say about,,, 2009-06-09 13:42 
    이것은 사람의 말 from. Land Hanalee 6·9 작가선언 from. 로쟈의 저공비행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
  5. 작가선언 6.9 북콘서트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27 12:55 
    문학 단신기사를 옮겨놓는다. "'작가선언 6·9’는 오는 30일 오후 7시 30분 서울 홍대 앞 이리카페에서 용산 참사 반년에 즈음한 ‘북콘서트’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예술인들도 동참하여 시낭송, 용산 현장 인터뷰, 슬라이드 상영, 용산참사에 관한 작가의 말, 노래 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작가선언 6·9’는 문학적 지향과 정치적 입장이 다양한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결성한 모임으로 지난 6월 9일 ‘한줄선언’의 형식으로
  6.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06 08:00 
    '작가선언 6ㆍ9'에서 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이 출간됐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 근간예정이란 소식은 아감벤에 관한 페이퍼 말미에 적어둔 적이 있다. 표지는 검은색과 노란색, 두 가지 시안 가운데 노란색이 선택된 듯하다(나도 바라던 바다). 예상보다 두툼한 책이 출간됐는데, 2009년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상처이자 사건으로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과 분노가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다행
 
 
꼬마요정 2009-06-0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름..돋았어요...

로쟈 2009-06-09 16:48   좋아요 0 | URL
네, 작금의 현실을 다시 보게 됩니다...

비로그인 2009-06-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찾기도 하고, 못찾기도 했습니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이름들.

로쟈 2009-06-09 16:47   좋아요 0 | URL
단기간에 의견 수렴을 했기 때문에, 거부 의사를 밝힌 분들도 있지만 미처 동참하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비로그인 2009-06-0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정지아 작가는 없네요.
뭐 물론 이름이 들어있음은 어떤 의미가 있겠으나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빠져있다고 해서 실망스럽다거나 그렇지는 않네요.:)
더구나 정지아 작가이니.

비로그인 2009-06-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멋있습니다, 저 글쟁이들.

로쟈 2009-06-09 16:46   좋아요 0 | URL
미처 연락이 안 닿은 분들도 있을 거예요...

nanousee 2009-06-0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계야말로 국립현대미술관장,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인사미술공간 등등 구체적이고 노골적 표적감사로 인해 '처분'을 당해왔지만 뭐 저들도 잘 해내겠지 기회를 주자 식의 심정이었는데 한예종까지 일관된 마감처리?하는 거 보고 더 이상 방관하기 어렵다는 결론인거 같아요. 그래서 급하게 성명서 준비하고 연락들 취하고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연락이 안되는 사람들도 생기고..제 걱정은 바로 위의 반응들처럼 이름빠져 있는 걸로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비로그인 2009-06-09 18:46   좋아요 0 | URL
앗, 혹시나 제 덧글보고 오해하실까봐 한마디.
제 덧글은 '이름이 빠져있음으로 해서 판단하지 않겠다.'라는 요지랍니다.
:)

2009-06-10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anon 2009-06-1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로쟈님이 시인이나 소설가나 평론가로 등단을 하신 적이 있으신 건가요?

로쟈 2009-06-10 23:53   좋아요 0 | URL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면 '평론가'라고 부르더군요. 인문학과 문학 관련으로 잡다하게 글을 쓰는 '잡종평론가'입니다...

게슴츠레 2009-06-1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컴퓨터로 놀고 있던 와중 로쟈 님의 한줄 선언에 웃음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ㅎㅎㅎ "너 어쩌자고 그렇게 사는가? : 이현우(로쟈)"

로쟈 2009-06-13 08:26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참여하니까 다양한 멘트가 필요하겠단 생각은 했지요...
 

'휴일 우울증'이란 게 있다면 나도 그런 우울증 환자인 듯하다. 휴일이면 피로와 무기력의 공세에 매번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책도 읽고 번역도 하고 원고도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울적하다. 머리만 무겁다. '편두통'이라도 있으면 핑계라도 삼으련만. 그런 울적함에 젖어 있다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에 이어서 쓴 시도 뭔가 '대변'해주는 듯싶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맛을 내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이미 오랫동안 가슴속에
파이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소중한 파이맛.
사과파이는 당신의 입술에 가 닿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가슴속 파이맛을 모두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
당신의 맛있는 사과파이가 되고 싶었다, 당신만의.

사과파이는 너무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다. 거품이 되어버린 파이맛이
사과파이를 끓어오르게 한다, 사과파이 편두통을 앓는다.
사과파이는 텅 빈 당신의 입술을 닮아간다.
사과파이는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
사과파이는 시큼한 파이맛을 모두 먹어치운다.

아작아작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사과파이 텅 빈 입술만이 게걸스럽게 남았다. 탐스런
사과파이,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 

 

09. 06. 07. 

P.S. 이미지를 찾다 보니, 내가 먹던 사과파이와는 수준이 다른 파이들이 눈에 띈다. 울적함 이전에 군침이 먼저 돌게 만드는! 시작 메모를 보니 1995년 6월 10일에 쓴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취하면서 취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은 대개 빵으로 때우던 때이다. 이날 아침에 편의점에 갔더니, 사과파이가 모두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그걸 시로 쓴 것이다. 또 '파이'란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있다고 한 건 '파이다'란 말이 '나쁘다'란 뜻의 방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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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6-0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 ㅎㅎ 시작메모를 보지 않았으면 그냥 저 사과파이 사진에만 현혹될뻔 했어요 ㅜㅠ 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로 편의점 자주 애용하는데 흑 ㅠ

로쟈 2009-06-08 00:49   좋아요 0 | URL
가끔은 비싼 걸로 먹어주셔야 합니다.^^

L.SHIN 2009-06-0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하핫, 빵 시리즈인겁니까? ^^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빵집에라도 데려가 드리고 싶군요.(웃음)

로쟈 2009-06-08 00:51   좋아요 0 | URL
빵집은 요즘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사진의 사과파이는 못 봤지만요...

다락방 2009-06-0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2
자작시 종종 올려주세요.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저 밑의 글을 읽긴 했으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사진속의 사과파이는 먹음직스러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ㅎㅎ 너무 달아 보이기도 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히고 싶고 먹고 싶은 사과파이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ㅎㅎ

전 주말이면 평소 출퇴근시에 들고다니기 어려운 무거운 책들을 읽어줘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데 요즘엔 야구가 자꾸 방해를 --;; 역시 사랑은 나뉠 수없는 걸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양다리 걸치시는군요.^^

Joule 2009-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가 정말 맘에 들어요. 과연 저 정도는 돼야 사과파이에 대해 뭔가 쓸 수 있겠군 하는 기분이 든달까.

로쟈 2009-06-08 23:56   좋아요 0 | URL
먹다 보면 정이 들지요.^^

드팀전 2009-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었습니다. 둘째 아이 태어나는 시점에 본 책이지요. 즐거운 시간이있었어요.^^ 제가 로쟈님을 알게된게 2006년쯤이었으니..그 전 글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최근 페이퍼에 비해 모스크바에서 훨씬 유머가 많으셨더군요.^^
물론 이 글을 통해서 드러난 정치적 로쟈와의 입장에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제게는 니체의 <짜라> 구절 중 '몰락'에 대한 공통된 정서의 공유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전 무슨 책 읽기의 경험때문은 아닌데 어디서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되었는지..

마지막 장에 있는 릴케의 시가 좋더군요. 첫 줄 해석에서 반종교적이며 도킨스를 좋아하시는 로쟈님의 관심까지 읽힙니다.반종교적이시잖아요.ㅋㅋ 나머지 줄은 지젝의 '실재'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인 듯 합니다. 로쟈님이 '대문자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처럼. 사실 언젠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누군가에게 했는데...다른 차원으로 해석된 탓이겠지만..'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주의적'이라는 댓글을 받았습니다.'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전 도달할 수 있다가 오히려 근본주의적 유토피아같은데...그 때 했던 이야기 중에 시오랑- 시오랑은 문학에 과문한 저로서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 에필로그를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이 했다는 '무언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이다'라는 비슷한 뉘앙스의 말도 제가 첨부했었는데...너무 확신에 차있는 토론자이다 보니..결국 '그래 다음으로 넘아가자구'가 되어버렸습니다.ㅋㅋ 제 르상티망인가 봅니다.ㅋㅋ

하여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뷰도 써야할 터인데. 홍보성리뷰로다가 ㅋㅋ
한 인터뷰 기사에서 인문학에 무심한 MB라고 말하셨는데..만약 MB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통치성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제2명박산성은 하지 않았겠지요.그런면에서 윤리적이지도 못하며 무식하기까지 한 거지요.
역설적이게도 그게 큰 위안이고 역동성의 틈새가 되는 듯 합니다.

로쟈 2009-06-09 07:26   좋아요 0 | URL
득남(?)을 축하합니다.^^ 기대되는 리뷰인데요.^^

드팀전 2009-06-09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득남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새로운 형태의 리뷰 형식을 생각했었는데...아직 한 번도 알라딘에서 본 적 없는...ㅋㅋ 그냥 아이디어여서 실행 과정의 복잡성과 기대효과를 생각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일단 유보했습니다. 집에 어른들도 와계시고 이제 첫째는 제가 전적으로 전담마크해야 되다 보니...쯥
 

문득 오래전에 쓴 시가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2005년 말에 쓴 한 페이퍼에 끼워넣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시만을 따로 독립시켜 놓기로 한다. 시는 1995년 6월 4일에 쓴 걸로 적혀 있으니 딱 이맘때이다. 메모를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쓰게 됐다고 한다.   

 

말랑말랑한 빵에게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09. 06. 07.      

 

P.S. 시에서 내가 맘에 들어하는 대목은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같은 구절이다. 내게 말랑말랑한 빵맛 같은 걸 전해준다. 시작 메모로 더 적어놓은 걸 옮겨보면 이렇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tangible'이 있다. '만져서 알 수 있는'이란 뜻을 한 단어로 나타낸다. 탱탱한지, 딴딴한지는 만져봐야 알 것 아닌가. 그런데 '먹어봐서(야) 알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는 없는 모양이다. 고작 'edible' 정도이다. '먹을 수 있는'이란 뜻. 이게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정도가 중요해서였겠지. 하지만 대학에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는 나에겐 앎이란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같은 걸 두세 음절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우리말에 있었으면 싶다(영어로는 'edangible'쯤 될까?).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하다. 그러니 믿음도 부족할 밖에. 말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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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조를 붙여서 부르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07 20:07   좋아요 0 | URL
곡조를 붙이려면 '-이다'는 다 개사해야겠는데요.^^

라로 2009-06-0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한건 사실이지만 그 많은 영어의 어휘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잖아요~.^^(그냥 인사 댓글 남기고 싶어서,,,님의 책 구매했는데 참 좋아요~.^^)

로쟈 2009-06-07 20:09   좋아요 0 | URL
'먹어서 알 수 있는'은 영어 단어에도 없지요...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푸른바다 2009-06-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는 표현에 눈길이 가는 군요^^ 논리적으로는 '빵이 말랑말랑해지기 위해서는 살짝 구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 것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요^^ 이 시에서는 '말랑말랑하다'는 속성(느낌?)이 굽는다는 행위 자체를 제약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는 물에 가라앉는다'와 유사한 패턴으로 도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치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인 느낌이 매력적이네요^^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비약이 일어나기 때문이겠죠^^

이 시의 주제는 헤겔의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랑말랑하다', '먹어보면 안다'는 등 몸의 느낌과 결부됨으로써 헤겔류의 추상성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제점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존재의 빵집'이라면 '먹을만하지 않은 빵'도 '먹을 만한 빵'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결국 몸의 느낌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만이 먹을 만하기에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지속할만 한 존재'가 무엇인 지에 대한 판별은, '비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듯이 이성적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결국 먹는다는 행위, 즉 체험과 실천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네요^^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연상되는 군요. 베르그송의 '지속'과 함께^^ 결국 한마디로 줄이자면 '중용'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랑말랑한 빵이라는 친근한 느낌을 통해 표현하신 것이 정감이 갑니다^^

로쟈 2009-06-07 20:10   좋아요 0 | URL
대단한 '해몽'이신데요.^^ 약간 에로틱한 면도 고려해주시면 '에로스 형이상학'이 될 거 같습니다.^^

게슴츠레 2009-06-0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우유식빵을 사서 손으로 뜯어가며 먹고 싶어지는군요ㅎㅎ덕분에 하루를 '말랑말랑'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6-07 20:11   좋아요 0 | URL
'딱딱한 빵'과는 아무래도 어감이 다르죠.^^

비연 2009-06-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빵 먹고 있는데, 급말랑말랑빵 먹고 싶어지네요...ㅋㅋㅋ

로쟈 2009-06-07 20:12   좋아요 0 | URL
^^

L.SHIN 2009-06-0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라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은 어쩐지, 로쟈님이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로쟈 2009-06-07 20:13   좋아요 0 | URL
저도 나름대로 말랑말랑합니다.^^;

다락방 2009-06-0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전 이부분이 특히 좋은데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도 종종 그랬어요. 한 문장을 다 끝낸뒤에 '정말 그렇다'라고 또 한문장을 덧붙이는거죠. 제겐 그런 문장들이 그렇게 매혹적일수가 없더라구요. 로쟈님의 '정말 다른 빵이다' 이 표현이 근사해요, 제게는!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새로운 지적이세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09-06-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빵은 갓 구운 식빵이에요..^^;;
오늘 점심 때 동네 제과점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든 잼(물론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요^^)에 발라 먹었습니다. 무려 세 개나!!!

저 시를 '해몽'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말랑말랑한 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빵집들이 '광고'로 써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