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에 서점에 들렀지만 구하지 못한 책의 하나는 막스 베버에 관한 비판적 입문서로 출간된 키어러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2010)이다. (뒷담화들 덕분에) 입문서 가운데에서는 가장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다. 올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새 번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뒤르켐, 마르크스와 함께 고전사회학의 3대 창시자로 불리는 베버에 대해서 본격적인 재평가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듯싶다.      

세계일보(10. 02. 27) ‘막스 베버’ 키드에게 보내는 편지 

먼저 상상을 해보자. 만일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큰 사고를 치거나 엄청난 위선자로 밝혀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할 것이다. 물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추종자라면 그래도 맹목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이번 주에 번역돼 나온 키어런 앨런 아일랜드 더블린대학 사회학과 교수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박인용 옮김, 삼인)을 보면 딱 그런 상황에 빠진다.

막스 베버가 누군가. 고전 사회학의 초석을 다진 거두로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에서 청교도주의가 행한 역할을 탁월하게 밝힌 학자, 사회학 방법론과 정치 카리스마에 대한 정교한 논의로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 현대사회의 관료제 문제에 대한 냉정한 분석으로 위상이 퇴락한 마르크스를 대신해 오늘날 더욱 각광을 받는 학자가 아닌가.

저자는 책의 부제로 ‘독일의 승리를 꿈꾼 극우 제국주의자’라고 달았다. 저자에 의하면 고매하고 점잖을 것만 같은 베버는 “이 전쟁은 지도의 변화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일이 필요로 한 것은 쉽사리 절망에 빠지기 쉬운 수사적 호언장담이 아니라 분명한 전략적 목표”라며 제1차 세계대전을 찬양하고 동양인과 흑인을 덜 떨어진 인종이라고 비웃었으며, 히틀러 못지않게 게르만의 영광을 꿈꾼 제국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베버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문화가 없으며, 식민지배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봤다.

이쯤 해도 입이 떡 벌어지고, 머리를 저을 것이다. 그럴 리가…, 하면서 말이다. 나아가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일제국과 게르만민족의 패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심지어 준(準)군사 전략가로 중부와 동부 유럽을 독일의 패권 아래 두면서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벨기에는 볼모로 활용하면서, 주된 적국인 러시아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고 ▲패전의 기운이 역력한데도 끊임없는 전국적 게릴라전을 역설했으며 ▲관료제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며, 우매한 대중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관료주의 문제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을, 민족주의적 카리스마에 대한 호소로 돌파하려 한 대목에선, 나치 파시즘과 히틀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의회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 제도에 불신을 드러내기도 한 베버는 또한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독일의 정치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자는 베버가 말하는 정치교육이란 “독일제국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에 학문이 종속된다고 본 셈이다. 이는 분명 존경받을 학자의 태도는 아니다. 베버의 명성과 진실을 다시금 재고해야만 하는 이유다.(조정진 기자) 

10.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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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2-28 09:08   좋아요 0 | URL
<막스 베버 이사람을 보라>와 비교 독해가 필요할 것 같네요. 아울러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참고는 막스 베버 본인의 글들이겠지만. 이른바 3대 고전 사회학자 중 맑스를 제외하곤 뒤르켐, 베버 모두 체계적이고 권위있는 한국어 번역이 없는 지라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사람에겐 다양한 측면이 있어서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결국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구체적인 이해는 독자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로쟈 2010-02-28 12:50   좋아요 0 | URL
베버 전공자라면 다 알 만한 내용일 텐데, '베버리언'들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람 2010-02-28 11:15   좋아요 0 | URL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하긴 보수인 그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일 여지는 다분히 있었겠지요.
그것이 일정 선을 넘어서면 위험하지만.
그 시절 엘리트 백인의 시각에서 흑인과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
지금 이런 얘기하면 완전 또라이 얘기 듣겠지만, 하지만
아직도 백인들 뇌 속엔 이런 생각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시절 교수인선에서 보인 그의 행동
(대학은 좌우파교수가 모두 필요하다며 좌파교수를 지지한 면)은 참 좋게 보였는데...

한 사람의 여러 모습을 보는 것은 대상을 입체적으로 보는 기쁨을 주겠죠.
저도 구입하여 읽어 볼 생각입니다.

로쟈 2010-02-28 12:51   좋아요 0 | URL
네, 다양한 시각이 '입체감'을 부여해주죠...

노이에자이트 2010-02-28 21:09   좋아요 0 | URL
베버가 제국주의의 옹호자라는 사실은 이미 80년대에 번역된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 전 10권(중원문화사 번역) 중 제 9권에 나와 있었습니다.이 책에선 아예 베버의 가치자유의 개념을 사회과학에서의 매춘이라고 해버렸더군요.

로쟈 2010-03-01 23:25   좋아요 0 | URL
재간된 세계철학사는 너무 비싸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3-02 16:58   좋아요 0 | URL
중원은 재간했다 하면 너무 비싸게 오르죠.내용은 똑같으면서...헌책방에서 산 게 다행이에요.헤겔이나 마르크스 철학(소비에트 철학 포함)좋은 걸 꽤 많이 번역한 출판사지요.

푸른바다 2010-03-01 00:22   좋아요 0 | URL
아마 베버에게 그러한 측면들이 분명히 강하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서구 중심주의자였고 서구의 장점과 그 기원을 밝히는 데 그의 학문적 이력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의 방대한 종교사회학적 연구도 서구의 상대적인 우수성을 밝히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로쟈님이 말했던 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를 제국주의자라거나 서구중심주의자라고 비판하는 건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막스 베버가 동양 사회에 대한 아마추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구성한 내용을 아직도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는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동양중심주의로 맞서자는 것도 아니요 서양 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초극하는 내용이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는 아직 텅빈 기표일 뿐 아직 제대로 내용을 갖추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근대 사회, 관료제, 리더십, 정치 학문 등등에 대한 통찰은 분명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단순히 제국주의자로 규정하는 건 그를 단순히 정신병자(베버의 사이콜로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로 규정하는 것 만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쟈 2010-03-01 23:26   좋아요 0 | URL
네, 목욕물과 함께 다 갖다 버릴 건 아니고, 갖다 쓸 건 갖다 써야겠죠...

노이에자이트 2010-03-01 15:0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 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근대를 어떻게 넘어야 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지요.넘어서려면 기존의 사회과학의 고전에 대한 소화가 필요하지만 이것도 어렵고요.

로쟈 2010-03-01 23:27   좋아요 0 | URL
원초적으로 가능한지, 얼마나 가능한지 의문이기도 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3-02 16:59   좋아요 0 | URL
요즘은 우리나라도 근대성에 대한 탐구를 꽤 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매월 두 차례 발간되는 기획회의(265호)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전문가 리뷰' 코너의 인문분야 서평을 한달에 한번씩 연재하게 됐는데, 첫번째로 고른 책이 도널드 폴킹혼의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학지사, 2009)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면서도 비교적 주목받지 않은 인문서를 다루려는 의도에서 선택했다. 배송사고인지 잡지를 받아보지 못해서 아래의 글은 편집본이 아닌 최종 원고이다. 편집본을 확인하고 몇 마디 덧붙이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원서는 기한이 다 되어 오늘 반납했다.  

기획회의(10. 02. 05)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대형서점 서가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건진 책이다. “이 책은 Donald E. Polkinghorne이 집필한 Narrative Knowing and the Human Sciences(1988)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역자 서문’에 적혀 있다. Polkinghorne을 ‘폴킹혼’으로 옮기지 않고 영문 알파벳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짐작에 교육학계의 ‘관행’인 듯싶다. 하지만 본문에서 다른 고유명사는 ‘시모어 사라손(Seymour Sarason)’이란 식으로 병기해주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좀 튀는 관행이다.   

도널드 폴킹혼이란 저자명은 생소하지만,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부제는 한술 더 떠서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따로 구한 원서에는 부제가 붙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국역본의 부제는 역자들의 기대를 적어놓은 것인 듯싶다. 역자와 저자의 서문을 참고해보면, 이 기대는 어떤 문제의식과 연관돼 있다.  

이 책을 “인간 존재의 문제에 주목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새로운 렌즈로 어떻게 학문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라고 평하는 역자는 지금까지의 인문사회과학이 ‘양적인 연구방법’에 치중해왔으며 ‘연구와 실찬 간의 분리’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것이 “인문과학 연구들의 빈약성 혹은 방법론의 부적절성”을 낳고 있으며 인문과학에 대한 신뢰를 점점 떨어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반면에 심리치료사, 카운슬러, 조직 컨설턴트 등 다양한 실천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어떤 차이 때문일까? 다름 아니라 “실천가들이 내러티브적 지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 곧 ‘내러티브’가 핵심이고 변수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연구와 실천에 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저자 폴킹혼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저자의 강점은 그가 상담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임상의학자라는 데 있다. ‘학문적인 연구자’와 ‘실천적인 심리치료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해오면서 그는 임상의학자로서의 경험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학문적 연구 결과를 찾을 수 없었다는 문제점에 봉착한다. 인문사회과학에 거액의 공공자금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도 ‘인간에 대한 학문’의 연구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때문에 그는 자연과학의 모델이나 수리적 형식과학의 방법론이 인문과학에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에 대해 좀 더 특별히 민감한, 추가적이고 보완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생물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영역이 그것이다. 인간의 물질적 속성은 다른 비인간 물체들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가령,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사람은 다른 물체와 똑같은 가속도로 낙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기체적 기능 또한 다른 생물체와 다른 특별한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바로 이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의미 영역과 관련하여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보다 한 단계 진전된 생각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의미의 영역이 어떤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점이다. 의미 영역에 대한 철학적 혼란은 대부분 의미를 실체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집짓기와 글쓰기가 어떤 수행이지 실체가 아닌 것처럼 활동으로서의 의미 영역도 명사가 아닌 동사의 형태로 기술된다. 그러한 활동에서 “마음의 정신적 영역을 통해 만들어진 의미의 한 유형”으로서 내러티브는 “특별한 성과를 내는 사건들의 기여에 주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창안해내고,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적인 에피소드 속으로 잘 배열하여 의미를 형성하게 한다.”  

의미 영역이 물질 영역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면 의미 영역에 대한 연구 또한 물질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이때 새로운 참조점이 돼주는 것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다. 이들 분야는 언어 표현을 통한 의미의 영역, 특히 내러티브를 연구하는 절차와 방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이제라도 자연과학보다는 그런 쪽으로 더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내러티브를 매개로 하여 역사/문학 이론과 인문과학의 만남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이때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문과학은 주로 ‘심리학’이다. 때문에 역사학과 문학이론 분야에서 내러티브 연구의 성과를 개관하는 ‘역사와 내러티브’ ‘문학과 내러티브’ 두 장에 이어지는 것이 ‘심리학과 내러티브’이다. 이러한 검토를 바탕으로 폴킹혼은 인문과학을 위한 내러티브 이론의 종합을 ‘시간성’과 ‘행위’ 그리고 ‘자아’와 내러티브의 관계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며, 심리치료의 이론적 기초를 타진하는 ‘실천과 내러티브’로 마무리한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내러티브 형식의 설명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그것은 구성 구조 속에 시간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범주화하는 형식적 구성과는 매우 다르다. 자아 이해를 위한 시간 질서의 중요성은 아직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러티브는 도처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생성하고 구성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이제 겨우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을 찾아서 인내심을 갖고 따라온 독자에겐 다소 불만스러운 대목이다. 바로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의 역할에 관한 의식은 최근에야 인문과학에서 부상했다. 이러한 의식은 인문과학이 의미 영역을 향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으며 미래의 연구를 위한 초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는데, 그 ‘최근’의 시점이 1988년이다! 유감스럽게도 20년도 더 전인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에서건 고전적인 저작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 의의를 갖지만, 어떤 이론서나 학술서가 20년의 세월을 버텨낸다는 건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이 그러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가. 인문과학의 ‘내러티브적 전환’을 가리키는 저작 정도가 아닐까. 참고로, 저자도 인용하는 월리스 마틴의 <내러티브에 관한 최근 이론(Recent Theories of Narrative))>(1986)이 <소설이론의 역사>(현대소설사, 1991)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게 벌써 20년쯤 전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내가 궁금한 건, 그리고 읽고 싶은 건 그 20년 후의 이야기이다. 서사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책이 소개될 때가 됐다.  

10. 02. 27.  

P.S. 국내에서는 소강상태이지만, 서사학(narratology) 관련서는 영어권에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개인적으론 다윈주의 서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찾아보니 국내에도 소개된 미케 발의 입문서는 작년에 3판이 출간됐다. 번역본이 좀 부실한데, 이 참에 재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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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10-03-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로쟈님께서 소개해 주시니 반갑네요^^ 몸 담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각 분야에 따라 이 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겁니다. 20년이나 된 책이지만 제 생각엔 내러티브와 인문학의 관계를 이 만큼 포괄적으로 다룬 책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 책 이후에는 내러티브와 개별 학문 간의 각개 전투만이 난무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 글을 보니 로쟈님의 독서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가늠이 안 되네요^^

로쟈 2010-03-01 22:39   좋아요 0 | URL
역사학과 문학이론쪽의 서사학을 다룬 장들은 솔직히 식상했습니다. 별로 새로운 게 없어서요.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에겐 그 다음이 궁금한데, 책은 거기까지 다루지 않더군요.--;

비로그인 2010-03-0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다윈주의 서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선생님 글을 읽다보면.. 제가 깜짝놀랄일이 많네요^^ 기상천외한 애니메이션을 오래전에 구상한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다윈주의 서사학이라는 걸 방금 알았거든요..

언제쓰여질지 모르지만 제가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거니까 언젠가는 쓰여질날이 있겠지요..ㅎㅎ^^

그리고 로쟈의 인문학서재 읽고 있는데 선생님 책 세계최고예요^^ 눈이 높은 제가 감동을 받고 있으니까요..

로쟈 2010-03-05 00:39   좋아요 0 | URL
제가 세계최고의 독자를 만났군요.^^
 

어제는 '그 겨울의 끝'이라고 할 만한 날씨였다. 연체된 책들을 잔뜩 양손에 들고 가 도서관에 반납한 후에 다시 강의와 관련한 책들을 가득 담아 나르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는데, 돌아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잠시 에어컨이 틀어질 정도였다(만원 버스이긴 했다). 겨우내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만시지탄이다. 남은 10개월을 위해 구두끈을 조일 따름(일에 관한 한 아마도 가장 바쁘고 중요한 해가 될 듯싶다). 주말엔 연체된 일들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와 셰익스피어와 소비사회에 관한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 소비사회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윤리적 소비'에 관한 책 두 권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전/현직 기자들이 쓴 <윤리적 소비>(메디치, 2010)와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의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윤리에 대한 의견차가 눈길을 끈다.   

서울신문(10. 02. 27)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

대형마트들이 가격 경쟁을 벌인다. 이른바 마트 전쟁이다. 소비자라면 당연히 보다 싼 가격에 눈길이 가기 마련. 그런데 소비자에게 이로울 것 같은 마트 전쟁이 납품업체의 큰 피해를 부른다면? 축구공 한번 야무지다. 세계적인 브랜드치곤 싸다. 어린이들이 형편 없는 일당을 받고 하루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바느질을 해서 만든 것이라면? 겨울철에 먹는 칠레산 포도. 맛도 나쁘지 않다. 한국까지 오는 동안 냉장 보관을 위해 수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면?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내 피부에 딱 맞는 것 같다. 사람 눈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토끼를 상대로 실험을 했다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우리는 배웠다. 가격과 품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소의 비용으로 가장 만족도가 큰 제품을 선택하라고. 그게 합리적인 소비다. 그런데 이제 합리적인 소비를 뛰어넘어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를 논하는 시대가 왔다. 생산에서부터 유통, 소비는 물론 이후 처리와 재생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지갑을 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합리적인 소비는 동물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착한 소비는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것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소비는 단순하게 개개인의 착한 소비 생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업에 윤리적인 변화와 행동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 아동 노동력을 쓰던 나이키도 전세계 소비자들의 압박에 무릎을 꿇고 노동자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하청 업체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지 않았던가.  

전·현직 기자들이 함께 쓴 ‘윤리적 소비’(박지희·김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는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개념과 역사,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공정 무역에서부터 공정 여행까지 우리 삶에 폭넓게 파고든 윤리적 소비를 접해볼 수 있다.

저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견줘 국내 상황도 짚어보며 소비가 더이상 개인의 행복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도구로 바뀌어가고 있고, 더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인용한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쇼핑에 도덕성이 개입되고 있다.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이다. 쇼핑객들의 새로운 종교는 윤리로 무장한 소비자 보호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홍지민기자)   

시사IN(10. 02. 25) 공정무역 실체는 역겨운 장삿속

<녹색평론> 같은 매체를 통해서 천규석 선생의 글을 간간이 읽어온 터이지만, 눈썹에 힘을 주고 저서를 정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자의 강단 있는 언어와 추상같은 비판, 현실과 미래의 문명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제기되는 불편한 진실 가운데 역시 논란이 되는 것은 공정무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생산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기 위해 소비자와의 국제적인 직거래를 통해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식품을 소비하는 공정무역 운동이 우리 사회에도 퍽 낯익은 것이 되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오로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커피나 설탕산업에 비해, 공정무역의 형태로 생산자의 소득을 더 많이 보전해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여러 형태의 시민단체나 생협을 중심으로 공정무역 상품이란 것이 출시되고, 윤리적 소비를 의식하는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천규석 선생은 그런 공정무역의 확산이 전혀 윤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공정무역이란 결과적으로 보면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까지 (자급 대신) 세계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데 그런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역겹다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은 다른 제조업도 그러하지만, 커피나 사탕수수 같은 대규모 단작농업에 의존하는 기호식품 생산이 유럽의 식민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토착 지역의 자급 구조를 붕괴해 오늘과 같은 수탈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일단 토착 지역의 자급자족구조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동시에 국내의 시민단체나 생협이 공정무역에 앞장서기보다는 도농 간의 농산물 직거래라는 원래 취지를 상기함으로써, 농업의 자급구조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도농 직거래가 원거리 거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지역의 마을공동체 또는 농촌공동체와 노동조합들이 노·농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최근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시작한 노동자 생협이 그러한 모델에 해당될 것이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 가능케 하는 토대
선생은 최선의 윤리적 소비는 자급자족을 촉진하는 소비이며, 자급자족 구조의 내실화만이 생태적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급자족이 단지 먹을거리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 토대라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거꾸로 오늘날의 세계분업적 무역체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가라는 존재는 이 토대를 붕괴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반인간적 체제라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다만 윤리적 소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가공할 압력을 거슬러 민중이 스스로의 삶과 민주주의를 보존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이 책에는 거듭 제기된다. 혹자는 이 책에서 제기되는 주장들을 현실성 없는 ‘근본생태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곰곰 읽어보면 백척간두에 선 문명의 임박한 파국에 대한 이유 있는 경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명원_문학 평론가)  

10. 02. 27.  

 

P.S.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에 관한 책들이 부쩍 늘어났는데, 이 또한 하나의 '트렌드'일까?    

도화선이 된 건 작년초 한겨레21의 기사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카카오 농사를 짓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란 표지기사였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58.html). 공정무역이 어떤 것인가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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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e 2010-02-27 01:32   좋아요 0 | URL
공정무역 좋아요, 라는 댓글을 달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기사를 보니 전혀 다른 견해가 새롭습니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 두가지 모두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국내 문제도 많은데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는 뭐하러 돕나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사실 국내 농산물 직거래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는데 제대로 된 채널을 마련하는게 급선문 같습니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처음 십 년'이라는 생태신문 창간호를 보았습니다. 거기서도 생협 얘기가 나왔는데 소비자가 쉽게 찾을 수 있는 매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창간호 특집 1면 기사는 성미산 마을극장 대표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는데 읽으면서 아무래도 성미산 마을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체 가이드도 있다고 하네요.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신문도 있군요.^^;

sophie 2010-03-01 01:39   좋아요 0 | URL
아.. 네.. 댓글이 좀 길었죠? ^^;;

노이에자이트 2010-02-27 21:09   좋아요 0 | URL
녹색평론에 실린 글이나 <유목주의~><소농버리고~>를 읽어봤는데 천규석 씨 글은 좋은 주장이구나 하다가도 너무 내치고 까는 글이라서 좀 읽기가...반대진영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찌르는 느낌...특히 명망있는 시민운동가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더라구요.물론 그것도 글쓰는 개성이라면 할말이 없겠습니다만...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꼬장꼬장한 성격이신가 봅니다...

사량 2010-02-28 15:26   좋아요 0 | URL
천규덕 선생의 새 책에 대해선 몇 주 전 <한겨레>에 실린 서평도 한번 보세요. 더 자세하고 인터뷰까지 있어서 유용하답니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4523.html
 

관심을 끄는 철학신간은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음, 2010)이다. 헤겔 전문가에다 공동체주의 철학자 정도로 자림매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그러한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도 흥미를 끈다.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라니? 소개글의 일부는 이렇다.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찰스 테일러의 철학적 작업과 정치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서구 사회가 약 400년에 걸쳐 겪어온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문화적 변화와 그 상상적 기반을 재구성하고 있다. 찰스 테일러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상상’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실존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식, 사람들 사이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통상 충족되곤 하는 기대들, 그리고 그러한 기대들의 아래에 놓인 심층의 규범적 개념과 이미지들이다. 사회적 상상은 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고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도록 한다. 일단 사회적 상상 안에 안착하게 되면, 그 상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의 토대는 생각보다 연약하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급하게 읽어보고픈 욕구를 부추긴다. 테일러의 책은 그간에 몇 권이 출간됐고, 대표작인 <자아의 원천들>(1983)도 어쩌면 번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른다. 몇 권의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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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적 상상- 경제·공론장·인민 주권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 / 이음 / 2010년 3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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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Social Imaginaries (Paperback)
Charles Taylor / Duke Univ Pr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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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Paperback)
Charles Taylor / Harvard Univ Pr / 1992년 3월
73,000원 → 54,750원(25%할인) / 마일리지 55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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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와 현대문명- 다산기념 철학강좌 6
찰스 테일러 지음, 김선욱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3년 11월
20,000원 → 20,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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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 2010-02-26 03:09   좋아요 0 | URL
듣고 있는 수업에서 찰스 테일러의 A Secular Age를 읽어보라고 해서 조금 읽고 있는 도중에 이 포스팅을 읽으니 반갑네요. 교수님 말로는 최근에 나온 종교와 근대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거의 900쪽에 육박해서 번역본으로는 나오기 힘들것 같네요...

로쟈 2010-02-26 09:26   좋아요 0 | URL
생각했던 것보다 대저로군요. 두 학기 동안 읽으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10-02-27 21:11   좋아요 0 | URL
독일사상 연구가 취약한 영어권에서는 유명한 헤겔 학자이지요.광주 전남대에 강연하러 오기도 했구요(요건 최근에 알았습니다.2002년에 왔더라구요).그의 주저인 <헤겔>이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는 것 같아요.

로쟈 2010-02-28 12:49   좋아요 0 | URL
독일보단 취약하단 말씀인가요?^^ <헤겔>은 분량도 방대해서 나오기 어렵겠죠. <자아의 원천>은 번역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28 15:08   좋아요 0 | URL
<이성과 혁명>은 워낙 독일 관념론에 대해 영미권 지식대중들의 이해가 빈약해서 마르쿠제가 그들에게 읽히려고 집필했다고 나와 있더군요.앨빈 굴드너<두 개의 맑시즘>역자 해설에는 미국사회학자들이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도 소화를 못한다는 일화가 나와 있구요.아무래도 영미권의 철학이나 사상은 유럽대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습니다.
 
윤치호와 친일청산의 방식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대로는 다가오는 3.1절도 고려해서 고른 책이 박지향 교수의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2010)다. '과거는 낯선 나라'란 말도 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윤치호의 내면과 우리시대의 많은 초상들이 겹쳐지는 걸 느꼈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후기에 덧붙여 놓았다.   

한겨레21(10. 03. 01)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펴냄)는 서양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주창하며 내놓은 저작이다. 기존의 친일청산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이젠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범적으로 시도한 것이 ‘윤치호 다시 보기’다. 일제 시기 대표적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1865-1945)의 사상과 내면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영어 일기를 통해 재구성하고 재평가하고자 한다.   

윤치호는 어떤 인물이었나? 젊은 시절 오랜 유학생활과 교사생활을 거친 윤치호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국제적 배경에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사상으로 저자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를 꼽는다.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인식을 일생 동안 견지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떠 전사적 정신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에게 어떤 민족이 약한 것은 그 민족의 죄이지 다른 민족의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유와 정치적 독립은 만세운동으로 가능하지 않았고, 제 힘으로 싸워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적 다윈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명 수준이 앞선 나라가 뒤진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고,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가르치면서 범한 일부 범죄는 ‘필요악’으로 용인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윤치호에게 그 백성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1천 명 가운데 채 한 명도 신문을 읽지 않는 무지한 대중이 ‘강건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윤치호는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에는 첫째로 국민이 지성과 부와 공공정신을 갖추고, 둘째로 국제정치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독립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을 우선시했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는 너무 엄격한 잣대로 사회발전과 대중의 수준을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론 동족에 대한 불신과 이민족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가게 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마치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한 것처럼 조선도 당분간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이 현실주의자로서 그가 ‘저항’ 대신에 ‘협력’을 선택한 논리다.  

 

협력이란 ‘조국을 배반하고 적과 협조하는 것’을 뜻하지만, 저자는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의 탈신화화와 협력행위에 대한 재평가를 사례로 들어 저항과 협력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협력과 저항 모두 자립을 목표로 하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친일 민족주의자’라는 새로운 범주의 도입까지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혹 윤치호는 ‘친일 민족주의자’였던 것일까? 

“윤치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일생 지녔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에필로그에 적었다. 윤치호의 입장을 내재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도 읽힌다.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까. 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그에게 호감과 지지를 내보이는 심리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02. 24.  

P.S.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이었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해서.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서양 근대문명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윤치호가 영국과 미국에 실망했으면서도 여전히 영미식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은 해방 후 그가 쓴 서한에서도 드러난다.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 데 내겐 마치 6세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만이 세계에서 민주주의로 성공한 유일한 나라들입니다."(199-200쪽)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유교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 것인데(둘다 기생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점은 음미해볼 만한 게 아닌가 싶다.  

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쿄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에 볼셰비즘이 창궐하는 이유는 기생주의라는 습성 외에 일본 정책이 조선 사람에게서 먹고살 수단을 빼앗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상태,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143쪽) 

'공산주의=기생주의'라는 주장이라면 크게 놀랍지 않은데, 놀라운 것은 그가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아직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최고 수준의 협조적 문명"을 획득한 국민에게나 가능한 것인데 조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앵글로색슨인들조차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해방후에도 윤치호는 공산주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사발전 단계론에 대한 그의 점진주의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몇몇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영국이 고도의 정치력과 노련한 지혜를 가지고 서서히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유도해 가고 있다 하더라도, 대한조선이 어떻게 진짜 사회주의의 ABCD도 모르면서 인민공화국체제를 경영할 수가 있겠습니까?"(143-4쪽) 

인용문은 모두 해방후에 윤치호가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써서 보냈다는 서신 '한 노인의 명상록'에 들어 있으며, <좌옹 윤치호 서한집>(국산편찬위원회 편, 1995)이 출전이다. 절판된 책인데, 기회가 되면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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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인의 묵인을 캐내는 것은 레지스탕스를 거국적으로 했다는 신화깨기의 핵심입니다.신화깨기를 자세히 살핀 게 <비시 신드롬>인데 우리가 이 문제를 차분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감정적인 인신공격성 욕설이 난무하겠지요.너 친일파 아니냐 너 빨갱이지...하는 식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흠집내려는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박지향이나 이영훈의 문제제기도 정정당당히 평가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10-02-28 12:45   좋아요 0 | URL
윤치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근대사와 한국사회의 많은 대목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태도가 많더군요...

비로그인 2010-03-04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채호 전집(전집이 있는지 모르겠네)을 읽어보고 싶어요..

청소년 용으로 나온 책중에 용이야가 나오는 책이 있는데 익숙치는 않았지만 꽤 재미있고 활달해지더라구요.. 제가 무협지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쩐지 엄청.. 배꼽이 아플정도로 웃었다는.. 거기다가 메세지도 만만치 않고..

로쟈 2010-03-05 00:41   좋아요 0 | URL
윤치호와 유길준에 대해 몇 권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이들면서 왜 점점 읽을 책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체력은 떨어지는데요.^^;

2010-03-05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