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6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화제가 되고 있다는 스테판 에셀의 정치 팸플릿 <분노하라!>(2010)와 관련된 기사와 칼럼을 몇 개 모아놓는다. 그리고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본문 13쪽의 전체 30쪽짜리 책이라는데, 우리의 경우라면 300쪽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종의 분노의 시대, 분노를 부추기는 시대에 부치는 '격문'이다.   

한겨레(11. 01. 06) '분노하라!’ 프랑스 뒤흔든 ‘30쪽의 외침’

30쪽짜리 작은 책 하나가 프랑스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앵디녜 부!>(Indignez vous!). 우리말로 ‘분노하라’는 제목의 소책자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스테판 에셀(93·왼쪽)이다.

지난해 10월 초판 8000부가 출간된 이 책은 석달 새 무려 60만권이 팔려나갔고, 크리스마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데 힘입어 새로 20만권을 증쇄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3일 전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레지스탕스 영웅은 이 책에서 프랑스인과 다른 모든 세계인들에게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고 촉구한다. 광고문구와 주석을 뺀 본문은 13쪽에 불과해, 책이라기보다 격정적인 정치 팸플릿(레드북)에 가깝다.

다분히 선동적인 이 책이 판매부수 2위의 소설책보다 8배나 많이 팔릴 만큼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은 단지 3유로(약 4500원)라는 저렴한 책값과 읽기에 부담 없는 분량 덕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독창적이거나 깊이 있는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장에 대한 맹신과 자본의 폭력에 ‘분노’하라는 칼칼한 외침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은이와 출판사는 “시장독재와 은행가들의 보너스와 재정위기가 전후 복지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대에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민감한 신경을 정면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노 신드롬’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해석되는 이유다.

에셀은 신년 메시지에서 자신의 책이 성공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이) 1940년대에 나치즘에 맞섰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도 정치·경제·금융 권력의 공모에 맞서, 2세기에 걸쳐 이룩한 민주적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노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프랑스에선 미묘한 정치적 파장까지 일고 있다. 지은이가 일깨운 프랑스적 가치인 ‘레지스탕스’(저항)가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의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책의 한 대목은 이렇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조일준 기자)    

한겨레(11. 01. 10) [한겨레 프리즘] 분노의 시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드롬이 되는 문화엔 그 사회의 당대 정신이 녹아 있다. 지금 세계를 휩쓰는 코드는 ‘불안’과 ‘분노’다. 미국이라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록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펑크록 밴드 그린데이의 동명 앨범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2009년 초연 땐 작은 뮤지컬에 불과했지만, 미국의 깊은 불안을 드러낸 “아메리칸 레퀴엠”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음악을 하다 마약에 빠진 젊은이와 9·11 이후 애국심에 떠났던 이라크 전장에서 한 다리를 잃은 또다른 젊은이, 그리고 우울증에 빠져 집에서 꼼짝 않는 또다른 친구. 1950년대 미국의 비트 제너레이션이라면 마약과 섹스에서라도 구원을 찾겠지만, 21세기 이들 세대에겐 출구가 없다. 싸울 줄도 분노할 줄도 모르고 하강하기만 하는 이들 청춘은 한국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의 절망을 닮았다.

프랑스에선 이런 절망감에 놀랍게도 올해 93살의 레지스탕스 출신 노인이 분노의 불을 붙였다. 스테판 에셀의 13쪽짜리 본문의 소책자 <분노하라>(Indignez-vous)는 지난해 10월 영세출판사에서 8000부를 찍은 데서 시작해 현재 80만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새로운 시대의 ‘선언문’이 되기엔 독창성도, 깊이있는 분석이나 날카로움도 부족하다고 지적되는 이 책의 폭발적인 인기 배경엔 극적 에피소드들이 작용했을 수 있다. 유대인 출신 작가 아버지와 자유로운 정신의 화가인 어머니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줄 앤 짐> 원작의 모델이었다거나, 에셀 자신이 1944년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 직전 숨진 프랑스인과 신분증을 바꿔 가까스로 탈출했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인물이란 점 등이 그렇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금융위기 이후 사람들의 절망에 대해 전세계 좌파들이 무능하게 대응할 때 “자신의 내러티브를 가진 ‘찬사받는’ 좌파인물의 등장은 울림이 크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삶과 말이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제 이제 프랑스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모토로 하던 그 나라가 아니다. 최근 53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프랑스는 응답자의 61% 이상이 2011년 경제를 어둡게 전망해 가장 ‘비관적인 국가’로 꼽혔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야만적인 이민자 정책, 복지 축소 등에 프랑스를 프랑스로 존재 가능케 했던 ‘평등’과 같은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각국 언론들은 이 책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서구사회에 번져가는 대중적인 불안과 분노의 정서를 건드렸다고 말한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 안젤름 야페는 <죽을 때까지 빚진: 자본주의의 해체>에서 “2008년 붕괴는 단순히 재정위기가 아니라 문명의 위기”라고 지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던 대한민국은 어떤가. 독주와 불통은 임계치를 넘고 모든 복지 주장은 이성적인 논의도 해보기 전에 포퓰리즘 딱지부터 붙는다. 전세금을 1억원씩 올려달라는 요구에 고민하는 사람들 얘기가 주변에선 끊이지 않는데, ‘전세보증금 증액 상한제’를 담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은 2004년 이후 번번이 국회에서 무산되고 있다.

어떻게 선진국과 비교하냐고? 1970년대 이후 수십년간 이런 논리는 반복돼왔다. 하지만 복지는 부유할 때 나눠주는 ‘자선’이라는 사고가 박혀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복지는 자본의 팽창 욕망을 따라잡을 수 없다. 다시 에셀을 읽는다. “그들은 감히 우리에게 국가가 더 이상 시민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감히’라고 국가에 당당히 일갈하고 분노하라고.(김영희 국제뉴스팀장)   

경향신문(11. 01. 15) [목수정의 파리통신] 분노하고 행동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2011년이 열리고 나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은 <분노하라(Indignez Vous!)>다. 가장 많이 지면에 등장한 인물은 이 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이다. 올해 그는 한국 나이로 95세에 이른다.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전후에는 외교관으로, 말짱한 정신과 몸을 가지고 한 세기를 살아온 이 다복한 남자는 단 13페이지의 짧은 책을 써서 3개월 만에 60만부를 팔아 치운 경이로운 사회 현상의 한가운데 서 있다.

연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던 30여분 남짓, <분노하라>를 급히 사가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목격하면서 범상치 않은 사건이 프랑스 사회에 조용히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년 들어 프랑스의 모든 언론들이 <분노하라> 특집을 앞다투어 다루면서 바야흐로 2011년은 분노의 시대로 정의되고 있었다. 

이 책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입속에 삼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연금파괴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의 프랑스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이를 관철시킨 사르코지 정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지난 시대에 자신들이 건설해 온 사회체제를 망치로 때려 부수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지금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감정은 바로 ‘분노’다.

그러나 차마 사람들이 그것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그 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어린 아이가 그의 벗은 몸을 거침없이 비웃던 것처럼, 한 세기를 살아낸,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이 당당한 노인이 거리낌없이 말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이 당신들의 분노를 끄집어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프랑스를 구해낼 때라고.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국민연금과 사회보장제도,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사회체제는 전후 프랑스 사회를 이끌어간 레지스탕스 정신의 산물이라고.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사회를 지켜야 하며 이민자를 축출하고,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며, 언론은 한 줌 권력집단에 장악당해 있는 이런 사회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그 사회가 아니라고. 과거 그가 나치에 저항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지켜야 할 모든 사회적 덕목들을 훼손시키는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더 많은 정의와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프랑스 지성의 산실 에콜노말에 입학했던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독일군에게 잡혀있다가 탈출한다. 전후에는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외교관의 안락한 삶은 그를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보수적인 삶으로 주저앉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노동자 교육협회를 창설하고, 인권자문위원회에 참여하며, 교회를 점거한 이주노동자와의 협상중재에 나서는 등 끊임없이 그를 분노케 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사건에 동참하면서 역사의 한 흐름을 지켜왔다.

우리에게도 점령당했던 역사와 그 치욕에 항거하여 몸을 불사른 용맹스러운 레지스탕스(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과 함께 역사의 주역이 되지 못했고, 그들의 진취적인 정신은 해방공간을 차지하는 시대정신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집권한 해방 후 이 땅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친일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이들이 벌여놓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3·15 부정선거는 청년들의 분노를 샀고,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거리로 나섰다.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을 마주한 청년들은, 눈 멀고 귀 먹은 이 식물 대통령에게 이 나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민주주의 말살 행위를 고한다. 이 때 이승만은 “나라에 이런 부정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청년들이 들고 일어서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했다.

해방 이후 잘못 끼워진 단추의 비극은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한 역사의 질곡에 붙들어 매고 있지만, 거기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분노하고, 행동하는 청년들의 열정이었다. 그 분노와 행동은 눈먼 자에게도 한줄기 정의를 일깨울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분노할 일은 넘치고, 행동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 2011년의 초입이다. 

11. 01. 16.  

P.S.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 6장에서도 분노의 문제가 다뤄지는데, 슬로터다이크의 <본노와 시간>에 대한 논평을 겸하면서 지젝은 '분노 자본'의 축적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분노 자본이 한번도 충분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 민족적 분노이건 문화적 분노이건 다른 분노를 더 끌어오거나 결합시켜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때문에 필요한 것은 분노의 국지적, 간헐적 표출보다는 '분노의 전지구적 은행'이라고 말한다. 분노의 시간은 분노의 축적과 폭발이란 두 계기를 포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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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6 15:04 
    프랑스의 노(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소책자<분노하라>(돌베개, 2011)가 번역돼 나왔다. 원저가 20여쪽 분량이라고 하니까 '책'으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제목에 80%는 들어가 있는 '전언'이다. '부당한' 대학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가 마침 촛불로 번져가고 있는 즈음에 '분노하라!'는 전언은 더없이 강한 울림을 갖는다.경향신문(11. 06. 06) 분노하라, 전세계 뒤흔든 외침“젊은이들이여, 주위를 조금만 둘
 
 
자꾸때리다 2011-01-16 19:3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프랑스에서 학생 시위는 흐지부지 끝난 모양이네요.

로쟈 2011-01-16 20:19   좋아요 0 | URL
겨울은 시위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죠. 방학도 있고...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아침 일찍 보낸 글인데, 마땅한 글감을 찾다가 요즘 강의차 다시 읽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몇 마디 적었다. 서두에서 인용한 백석의 번역시는 <근대서지>(제2호, 2010)에 자료로 실린 것이다.  

   

한겨레(11. 01. 15) 번역본 4종이 선사한 즐거움이란 

한겨울은 러시아문학의 고전을 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시간에 두툼한 책장을 넘기며 이내 밤을 새우고, 어스름하게 비치는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는 일은 이런 계절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런 밤에는 백석의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읊조려 보고, 그런 아침에는 그의 푸시킨 번역시 구절을 음미해 봐도 좋겠다. ‘아침 날 눈 위를 미츠러지며/ 부산떠는 말이 달리는 데 맡기어/ 찾아가자, 사랑하는 벗아, 빈 벌판을/ 어제런 듯 풍성하던 그 수풀을,/ 그리고 정다운 나의 강가를.’(<겨울 아침>)

나타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소설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지만, 세계문학전집 출간 열풍 속에서도 아직 ‘무풍지대’로 남아 있어서 내가 펼쳐든 책은 <안나 카레니나>다. 강의시간에 주로 범우사판을 사용했는데, 요 몇 년간 3종의 새 번역본이 더 출간돼 읽을 만한 여건은 충분하다. 자세히 읽고 싶은 대목이 나오면 네 종의 번역본을 비교해서 살펴볼 수도 있다. 유명한 첫 문장만 하더라도 번역은 제각각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민음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대로 불행하다.”(작가정신) 가정 문제와는 사정이 달라서 번역이 제각각이라고 하여 독자가 불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엇비슷하다면 번역본의 존재 의의가 상실될 것이다.(베낀 번역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알다시피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는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난 오빠 오블론스키 집안의 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동생 안나가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전에 소설은 또다른 주인공 레빈을 등장시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미리 알려준다. 키티에게 청혼하러 온 이 노총각 시골 지주가 먼저 만나는 이는 친구이면서 키티의 형부인 오블론스키다. 사무실로 찾아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고 돌아간 부유한 지주 레빈의 처지를 부러워하며 오블론스키는 부하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게다가 얼마나 팔팔하냐 말이야!”(범우사) 다른 번역자들은 레빈을 어떻게 봤을까? “게다가 얼마나 생기가 넘치나!”(민음사) “게다가 또 얼마나 발랄하냔 말야!”(문학동네) “건강은 또 어떻고.”(작가정신) 해서 우리가 그려보게 되는 레빈은 팔팔하고 생기가 넘치는데다가 발랄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하지만 키티의 어머니 공작부인은 그런 레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더 젊고 부유하며 잘생긴데다가 시종무관으로서 앞날도 창창해 보이는 브론스키가 훨씬 더 나은 사윗감이라고 여긴다.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주 집에 드나들며 브론스키가 한창 키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즈음에 나타난 레빈이 달갑지 않다. 딸이 레빈에 대한 ‘성실성’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걱정한다.   

“레빈에게 한때는 호감을 품었던 것 같은 딸이 필요 이상의 성실함으로 인해 브론스키를 거절하지나 않을까.”(문학동네) 이 대목의 ‘성실함’을 다른 번역본들이 ‘브론스키의 성실함’이라고 본 것은 착오이다. 성실은 ‘가정생활’을 모르는 브론스키와는 거리가 먼 덕목이다. 그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끌려 키티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하지만 브론스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간 기차역에서 곧 안나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될 것이다. 

11. 01. 14.  

P.S. '대학 강의실에서 읽는 <안나 카레니나>'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조주관 교수의 <러시아 문학의 하이퍼텍스트>(평민사, 2005),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예담, 2009), 그리고 오종우 교수의 <백야에서 삶을 찾다>(예술행동,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러시아문학의 하이퍼텍스트>는 러시아문학 '작품사전' 성격의 책이고,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는 <안나 카레니나> 이후 후기 톨스토이에 대한 이해의 조감도를 보여준는 책이다. <백야에서 삶을 찾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 세 작품에 대한 '자세히 읽기'를 시도한다. 그 '자세히 읽기'가 '편안한 읽기'이면서 '친철한 읽기'이기도 하다는 게 미덕이다. "매시간 눈물이 핑 돌도록 감동받았던 최고의 강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살의 모토를 배웠다."는 학생들의 강의평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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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1-1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문학동네 판을 읽었지만 첫구절은 어쩐지 다 마음에 들지 않네요. "행복한 가정들의 행복은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들에게는 각기 다른 불행이 있다." 이건 어떨까요? ㅎㅎ 러시아어를 모르는 제가 번역된 문장을 통해 이해한 내용을 한국말로 써봤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美는 비교적 균질하지만 醜는 훨씬 다양하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생각과도 비슷한 듯 합니다.

로쟈 2011-01-16 08:33   좋아요 0 | URL
영역본도 여러 종인데, 노튼 비평판에선 "All happy families resemble one another, but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라고 옮겼네요. 아무래도 한국어보단 러시아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페크pek0501 2011-01-1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범우사)
저는 범우사의 책으로 읽어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모습이 다르다.'로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바다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근심없고 평화롭고 사랑이 넘쳐나는 것이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가난해서 불행하거나, 부자인데 암환자가 있어서 불행하거나, 아니면 불륜의 사건으로 불행하거나 해서 각기 다를 것 같아요.
그런데 로쟈님의 이 글은 글이 중간에서 끝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서 아쉬워요. ㅋ

로쟈 2011-01-16 08:34   좋아요 0 | URL
8.5매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 다 쓴다는 건 가능하지도, 가능해서도 안되는 일이죠.^^;

단비스 2011-01-16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부터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책중에 하나인데,
다양한 번역판이 선택을 힘들게 하네요...^^
로쟈님이 위 번역서중에 하나를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책을 조금 더 나을까요?

로쟈 2011-01-16 08:36   좋아요 0 | URL
번역본은 제각각이고, 각자의 색깔을 갖고 있는 것인지라, 취향에 맞는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 권한다면, 두 종 이상의 번역으로 읽으시면 더 좋겠다는 거구요.^^;

착한발바닥 2011-01-1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이맘때, 선생님께 러시아 문학강좌를 들었을때는, 미처 수업은 못듣고, 책만 남았었는데, 요즈음에야 안나 까레니나를 다시 펼쳤습니다. 우연인듯 싶지만, 아무래도 계절탓이었나 봐요.

로쟈 2011-01-23 13:2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긴 겨울밤에 읽기에 좋지요...

털세곰 2011-01-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다들 이해하시지만 막상 이거다 하는 번역문은 잘 안 나오네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다들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에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도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만...^^

요즘은 겨울에 한국에도 러시아만큼 눈이 내리니 그닥 이질감(?)이 좀 덜듭니다. 괜히 눈을 보니 닥터 지바고를 다시 읽어줘야겠다 싶은데, 오늘 저녁 그냥 영화로 때울까 합니다. ㅋ

로쟈 2011-01-23 13:25   좋아요 0 | URL
<닥터 지바고>도 새번역본이 나온다고 해서 고대하는 중입니다.^^
 

교양과학서 가운데 아마도 가장 활발하게 소개되는 분야는 뇌과학이 아닐까 싶다. 거의 분기별로 리스트를 뽑아도 될 정도다. 이언 맥길크리스트의 <주인과 심부름꾼>(뮤진트리, 2011)이란 책이 흥미를 끌어서 검색해봤지만(내겐 '오늘의 책'이다), 책소개 말고는 뜨는 정보가 없다. 주로 분할뇌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소개는 이렇다.   

두뇌는 왜 분할되었는가? 그동안 수많은 연구와 추측이 있었지만, 신경학자들은 좌뇌와 우뇌라는 반구 간 차이를 이해하고자, 그 차이가 인간의 생각과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고자 분투했다. <주인과 심부름꾼>의 저자인 이언 맥길크리스트는, 두 반구는 그저 다른 특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하지만 옮겨놓을 리뷰가 아직 없어서(실물은 이따가 서점에 들러 찾아봐야겠다) 그냥 '뇌과학' 읽기 리스트만 만들어놓는다. 최근 수개월간 나온 책들 가운데 관심을 끄는 책 다섯 권만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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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뇌에 관한 과학적인 보고서- 인간은 왜 지금의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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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1-08 20:08   좋아요 0 | URL
제가 의대 들어갈 때 인지신경과학 같은 것 해볼까 했었는데 신경해부학 교수 수업 듣고 절망했슴다.... 수업은 안 하고 에릭슨이니 융이니 동양사상 최면이니 하면서 ㄱㄸ철학만 전파하셔서... 시험 때는 뭔 뜻인지도 모를 족보집만 외우고 그 후엔 모두 잊어버리고...ㅜㅜ 머릿 속에 있는 거라곤 브로드만 number....ㅠㅠ

로쟈 2011-01-10 10:58   좋아요 0 | URL
신경해부학에서 융도 다루나 보군요...

자꾸때리다 2011-01-10 14:04   좋아요 0 | URL
신경해부학이 다루는 게 아니라 그 교수님이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강의 시간을 채운 것이죠 .ㅜㅜ

진실에다가가 2011-01-08 20:21   좋아요 0 | URL
- 다소 빗나간 얘기인지 모르겠지만,ㅠ
<뇌과학> 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어서 댓글 달아봅니다~ㅋ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된 <사랑을 위한 과학>이라는 책인데요,,,
그 책을 알게 된 경로는 네이버 지식 in 서재에서 이동진 기자님께서 추천하시던 책이어서 알게 되었습니다..(근데,부끄럽게도,사두고,서재에,고대로,모셔두었습니다ㅠ읽어보지는,않았습니다)

이 페이퍼를 보시거나,하실 알라디너분들이나,
로쟈님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댓글 달았습니다~REVERSE~PEACE~^^~

로쟈 2011-01-10 10:57   좋아요 0 | URL
네, 참고하겠습니다.^^

handsomedino 2011-01-09 00:29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뇌과학에 문을 두드리셨군요... 반갑습니당~~

로쟈 2011-01-10 10:57   좋아요 0 | URL
원래 관심분야이긴 합니다. 생리학보단 윤리적, 철학적 함축에 관심이 있는 쪽이지만요...

2011-01-09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문학신간 중 관심도서는 돈 드릴로의 <마오 Ⅱ>(창비, 2011)이다(처음엔 <마오 1>이 어딨는지 찾았다!). 중국 관련서를 몇 권 읽어야 할지도 모르는 터여서 내겐 적절한 타이밍에 출간된 책이기도 하다. 드릴로의 책은 <화이트 노이즈>(창비, 2005)만 구해놓고 아직 손대지 못하던 참인데, 시작은 <마오 Ⅱ>부터 해야겠다...

 

한국일보(11. 01. 08)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문학의 위상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74)는 동년배 작가인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 포스트모던소설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소비자본주의, 미디어와 이미지, 문학과 예술의 위상, 테러 등 현대 미국 사회를 다각도로 탐구해 온 지성파 작가인 그가 1991년 발표한 장편소설 <마오 Ⅱ>는 이듬해 펜/포크너 상을 받으며 그의 문학적 명성을 굳힌 작품이다.

89년의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레바논 베이루트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해 이란의 종교ㆍ정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폄훼했다며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사망했고, 레바논에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이 절정을 맞아 테러가 난무했다. 이런 격동기를 배경으로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던 유명 소설가 빌 그레이가 베이루트에 인질로 억류된 스위스 시인을 구출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과정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이 소설은 그러나 서사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고, 그 의미 또한 상징적, 은유적이다. 주인공 빌을 비롯, 그에게 초상사진 촬영을 의뢰받는 사진작가 브리타, 치밀한 전략으로 빌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비서 스콧, 런던에서 베이루트 테러 단체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죠지 등은 저마다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적 지점들을 대변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작가 드릴로는 특히 세계적 규모의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문학의 무기력과 왜소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데 공을 들인다. 빌의 비극적 죽음은 곧 문학의 죽음으로 읽힌다. 뉴욕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20년 넘게 세 번째 소설의 문구를 다듬는 자폐적 삶을 살던 빌은 브리타와의 만남에서 자극을 받고 내처 런던으로 건너가 납치된 시인의 구명에 나선다. 그러나 그를 덮친 것은 기자회견장에서의 폭탄 테러와 불의의 교통사고. 중상을 입은 그는 시인 대신 인질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레바논행 배를 탔다가 그곳에서 죽고, 종내 신분을 증명할 소지품마저 도난당한다.

그러나 스콧은 빌의 실종을 되레 그의 상품가치를 높일 호기로 여긴다. 상업주의에 포섭돼 독자적 가치를 잃어버린 문학에 대한 드릴로의 강도 높은 냉소로 읽힌다. 나아가 그는 호메이니의 장례 인파, 양키스타디움의 통일교 합동결혼식, 마오쩌둥(毛澤東)의 5,000만 홍위병 등을 강렬한 스냅사진처럼 작품 곳곳에 삽입, 테러리즘 시대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ㆍ정치적 집단주의를 인상적으로 폭로한다. "미래는 군중들의 것이다"(30쪽)라는 문장이 묵시록의 한 대목처럼 읽힌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방점을 찍을 대목은 무력할지언정 문학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빌의 고투일 듯싶다.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 이름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243쪽) (이훈성기자) 

11. 01. 08.  

P.S. 기사의 서두에 토머스 핀천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국내에는 작품보다 연구서가 더 많이 나와 있는 듯싶은 그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묵직한 분량으로 나올, 올해 가장 기대가 되는 타이틀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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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1-01-08 15:18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민음사에서 번역된 <브이를 찾아서>까지 세면 핀천의 소설이 2권 번역돼 있죠. 일본에선 핀천의 전집도 간행중이라고 하던데요.
<중력의 무지개> 기대되네요.

로쟈 2011-01-08 15:41   좋아요 0 | URL
네, <브이>도 세계문학전집으로 곧 다시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획회의(28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작년에 쓴 마지막 리뷰가 지면에는 새해 첫 리뷰로 실렸다. 20대 블로거 박가분의 '블룩'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거리로 삼았다. 예상보다 독자의 반응이 없는 책인데(언론리뷰도 거의 뜨지 않았다), 분석이야 저자나 출판사의 몫이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올해도 단독 저서와 공저들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조만간 주목받게 되리라고 본다.  

기획회의(11. 01. 05)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혁명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을 위한 인문학!’ 뒷표지에 박힌 문구다. 두 가지가 강조돼 있다. 저자가 ‘20대 젊은 블로거’라는 사실과 그가 ‘혁명을 위한 인문학’을 제안한다는 점. 그리고 의도와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제안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까지도 아우르는 듯싶다. 2006년에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고 하니 저자는 아직 새파랗다. 그때부터 4년간 블로거 활동을 하며 올린 글들을 책으로 갈무리한 결과라고 하니 얼핏 ‘치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책은 저자가 제때 대학에 들어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정치한 문제의식과 탄탄한 내공을 뽐낸다. “입발린 소리를 잘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문학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이 잠재해 있다고들 말하지만 나와 같은 20대에게 인문학의 미래는 ‘저임금 시간강사’이다.”라는 현실 고백이 엄살로 들릴 정도다.   

블로그 활동(혹은 블록질)이 일상화된 시대인 만큼 ‘20대 블로거’야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인문학 오타쿠’(인덕후)라고도 지칭되는 블로거는 많지 않다(알고 보니 나도 그런 별칭으로 불린다). 언젠가 네이버 블로그 ‘붉은서재’를 알게 됐고, 주인장 ‘박가분’의 활동에 주목하게 됐다. 그가 20대이고 (당시에) 군복무 중이란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보다 더 이후였던 듯싶은데 박가분은 내가 활동하던 다음 카페 ‘비평고원’에도 자주 출몰하여 글을 올리곤 했다. 개인적으론 그를 한 계간지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다. 생각보다 왜소한 체구에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는데(그래도 사병보다는 장교 스타일의 머리였다), 말년 휴가를 나왔다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에도 한두 번인가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책이 언제쯤 나오느냐고 물었고 그는 조만간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박가분 본색’이라고 할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이다.  

책은 ‘인문독서 후기’ ‘문화비평’ ‘인문적 사유’ ‘시사비평’ 네 부로 구성돼 있는데, 실상은 전체가 인문독서 ‘후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란 ‘읽어내기’이고 현재의 정세와 삶 속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자가 독서에서 비평과 사유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면서도 자연스런 경로라는 말이다. 서문에 적고 있지만, 전체 26편의 글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도 않고, 논조 자체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공평무사한 시선과 멀다.” 그것은 “나름대로 인문학을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방식으로 읽어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관심사가 드러나는 대목인데, 인문학 전공이 아니고 전문적인 인문학 연구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가 인문학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 ‘정치성’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적인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전히 인문적 사유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사상적으로 ‘예고’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내가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 특히 정치철학에 경도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경도’는 개인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세대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블로그 출판의 사례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예로 들면서 이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서 찾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경험의 세대성이다. 그는 소위 ‘인문학 대중화’의 수혜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 이건 40대 독자로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흥미로운데, 저자의 고백은 이렇다.  

“내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할 당시에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푸코, 들뢰즈에 관한 유행이 여전히 한창이었고, 유학길에 올랐던 젊은 연구자들이 돌아와 속속들이 현대 철학분야의 최신 번역서들을 내놓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알라딘의 서재꾼 로쟈의 도움도 매우 컸다.”  

‘서재꾼 로쟈’도 거명돼 멋쩍긴 하지만, 20대 시절의 내게는 그런 ‘가이드’가 없었던 걸 고려하면 분명 다른 환경이다. 실제로 저자의 ‘인문독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최신 번역서들’을 통해서 접한 현대 철학자들이다. 푸코와 들뢰즈 등을 비롯하여 가라타니 고진을 경유한 칸트와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자크 라캉, 자크 랑시에르, 그리고 발터 벤야민 등이 주요 탐독 대상이자 정치적 이론과 입장을 창출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흔히 386세대(지금은 486세대)가 사회과학서적에 몰입하던 세대였다면 2000년대 대학생 세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저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 서클 내부의 학회들만큼 최신 인문철학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의 논리구성 자체가 사회적으로 ‘사상적 힘’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지만, 그럼에도 특정 인문학 저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그 안에서 가능한 주체적 자율성에 관한 희망을 담지하는 한에서”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나마 그런 힘을 가졌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모색이 ‘그 일부 학생들’에 속하는 저자의 화두이다. 그가 ‘88만원 세대’ 문제나 ‘김예슬 대자보’ 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래서 모든 유형의 ‘탈정치화’ 전략과 세태에 비판적이다. 가령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통해 ‘88만원세대 새판짜기’를 시도한 우석훈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젊은이들의 탈정치화 현상을 부추기는 공범”이라는 혐의를 제기하며, “결국은 세대모순조차도 수많은 자본주의적 모순의 상이한 측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통치전략 안에서 생성된,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안에서 강제되는 ‘개인성’과 과감하게 작별할 것을 요구한다. 같은 세대 20대에게 던지는 저자의 강령적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20대에게서 가능한 정치적․저항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 외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외부의 권력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20대 자신의 책임을 호명하는 고유한 방법과 수단들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기성세대의 경제적․정치적 재생산 구조에서 젊은이들이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학교로부터의 독립, 나아가 관료사회와 대기업 노동시장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그가 복학 이후 정치철학 세미나를 주도하면서 좌파 대학생들 간의 생활공동체, ‘공동생활전선’을 꾸리고 있는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혁명가이고자 한다.  

11. 01. 08.   

P.S. 작년초에 나왔던 인터뷰집 <요새 젊은 것들>(자리, 2010)에는 박가분과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아울러 그가 '박원익'이라는 본명으로 낸 공저로는 <아바타 인문학>(자음과모음, 2010)이 있다. 그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nhn?blogId=paxwonik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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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1-01-0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너무 없네요^^어부지리로 일등 놀이! 저도 박가분님 블로그에 가끔 들렀던 독자여서요.

로쟈 2011-01-10 12:51   좋아요 0 | URL
상품이 없어서 죄송한데요.^^

jobonzwa 2011-01-1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 동지와 함께 공동생활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동생활전선 공식카페로 퍼가겠습니다^^

로쟈 2011-01-11 22:09   좋아요 0 | URL
네, 얼마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