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관심도서 중 하나는 미국의 법학자 앨런 더쇼비츠의 <선제공격>(바이북스, 2010)이다. 이미 주문해놓은 책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미국 최고 수준의 법학자가 '선제공격'이란 걸 어떻게 정당화하는지가 관심거리. 의외로 언론리뷰에선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듯한데, 예외적인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10. 10. 09) 잠재적 테러주의자 체포 법적으로 과연 정당한가 

최근 유럽의 도시들은 알카에다의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프랑스에서 테러가 발생한다면 파리의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등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프랑스 경찰은 최근 마르세유, 아비뇽, 보르도 등에서 알카에다와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10여 명을 체포했다. 여기에서 법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가 발생한다. 테러 예방 차원에서 이들을 체포, 구금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문제다. 저자는 이 같은 테러 대책을 ‘선제(preemptive) 공격’의 일종으로 본다. “테러 계획이 있었는지 그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특정 용의자를 예방 차원에서 일정 기간 구금하는 것을 지지하겠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미국 하버드 로스쿨 역사상 최연소 교수 발탁 기록의 주인공인 저자는 세계사에 나타나는 ‘선제공격’의 예를 든다. 1967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6일 전쟁’이 그 하나다. 두 차례의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게릴라의 근거지가 된 시리아에 먼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판단에 따라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공격했다는 게 이스라엘의 주장이었다.

9·11테러를 당한 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공격을 가한 것과, 알카에다를 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역시 테러를 막기 위한 선제적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1981년 이라크의 핵무기 원자로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또 다른 선제공격의 예로 들었다. 이 사례들에서도 쟁점은 이 같은 선제공격이 과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6일전쟁 때는 전 세계가 대부분 이스라엘이 취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라크 핵 원자로에 대한 공격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서 보듯 선제공격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국제사회는 경우에 따라 예방적 차원의 선제공격을 비난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무장을 막지 못한 유럽 국가들에 대해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법률가인 저자가 이 같은 사실들에서 이끌어내는 핵심 주장은 “각 나라가 이런 예방적 또는 선제적인 행위를 지배할 만한 협의된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논의를 전개시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협이 닥치면 필요에 따라 대처할 게 아니라 합의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테러의 위협이 일상화되고, 아동 성폭력 같은 강력 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 이 같은 저자의 문제 제기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선제공격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 그 결과 강대국 편에 기운 채 논리가 전개되는 점은 눈에 걸린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도 이런 사실을 의식한 듯 국내 법학자의 ‘반론’을 부록으로 실었다. 반론에서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타인을 침해하는 행위는 엄격한 요건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예방’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국가 간에 정당방위를 이유로 선제공격이 이뤄진다면 상대국의 수많은 시민은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 간의 관계에서보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는 공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금동근 기자) 

10. 10. 09.  

P.S. 아마도 '로스쿨 관련서'로 묶어야 할 듯싶은데, 더쇼비츠의 책은 절판되긴 했지만 <최고의 변론>(이미지박스, 2006)이 출간된 바 있고, <미래의 법률가에게>(미래인, 2008)도 그의 책이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는 그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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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10-10-09 16:27   좋아요 0 | URL
기사 마지막 문단이 눈에 띄네요. 관계자-_-에게서 이 시리즈 전반에 나름의 색깔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색깔이 원색일지 무채색일지는 시리즈가 더 나와보면 밝혀지겠네요.

로쟈 2010-10-10 09:19   좋아요 0 | URL
네, 이 시리즈는 딱 1년에 한권씩만 책이 나오네요...

2010-10-09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모 라피엔스의 사랑과 결혼

격주간 <기획회의>(281호)에 실은 전문가리뷰를 옮겨놓는다(잡지는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매달 원고지 16매 분량의 서평을 싣고 있는데, 현재 정기적으로 쓰고 있는 서평이나 칼럼 가운데는 가장 긴 편에 속한다. 마감이 닥치면 부담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마음대로 고른 책에 대해서 비교적 충분한 분량을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이번에 고른 건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로 라피엔스>(이후, 2010)로 원고는 지난달 연휴기간에 쓴 듯싶다.    

기획회의(10. 10. 05) 우리시대 쇼펜하우어의 제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서구식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인물 이반 카라마조프는 ‘휴머니즘’에 대해 “멀리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보다 엄밀하게 규정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휴머니즘’을 의문에 부친다는 점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그의 정직한 고백은 휴머니즘의 한계에 대한 자인으로도 읽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한 서구식 휴머니즘과 대비시키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가 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합리적․무신론적 휴머니즘 대신에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내세웠다. 요컨대, 휴머니즘에도 ‘나쁜 휴머니즘’과 ‘좋은 휴머니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저자 존 그레이에겐 그러한 구분 자체가 미심쩍게 여겨질 만하다. 런던 정경대학에서 유럽사상 교수로 재직한 그는 휴머니즘을 아예 통째로 부정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로서 휴머니즘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그것은 책의 원제 ‘짚으로 만든 개(Straw Dogs)’에 극명하게 반영돼 있다. ‘짚으로 만든 개’는 <도덕경>에 나오는 ‘추구(芻狗)’의 번역이다. <도덕경> 5장의 문구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에 나오는 것으로,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물을 가리킨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는 최고의 예우를 받지만 제사가 끝나면 바로 내팽개쳐지는 존재다. 그렇게 내팽개침은 천지의 ‘어질지 않음(不仁)’에서 비롯한다. 영어로는 ‘무자비하다(ruthless)’로 번역된다.  

‘만물’은 물론 인간과 동물을 구별 없이 가리킨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동물’ 혹은 ‘예외적인 동물’로 간주하려는 것이 휴머니즘의 기본 태도이지만, 그것은 인간만의 착각이고 오류이다. 더불어, 그러한 휴머니즘의 핵심이라고 할 ‘진보에 대한 믿음’ 또한 한갓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발달하는 과학지식이 주는 새로운 힘을 사용해서 동물은 벗어나지 못하는 제약을 벗어 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얼핏 탈종교적으로 보이는 이 믿음은, 그러나 ‘과학에 대한 신념과 종교적 희망의 혼합품’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인간만이 자기 삶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신념을 과학 결정론과 결합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기독교를 경험한 문화권에서만 있는 일”이라고 꼬집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휴머니즘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며 인류가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신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반휴머니즘은 기독교적 세계관 비판을 더 급진화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변장한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의 세속 버전으로서 휴머니즘과 맞세우는 것은 역사에 대한 고대적 견해다. 즉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과정”이라고 보았던 통념적 입장이다. 인류도 ‘인간이라는 동물(human animal)’에 불과함을 입증해보인 다윈의 가르침과 함께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레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론을 든다. 그가 ‘가장 철저한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부른 가이아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삶이 곰팡이 균의 삶보다 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구에 더 유해한 암종으로 분류된다. 현재 60억 명인 세계인구는 2050년까지 적어도 72억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는데, 지구는 이러한 인구 증가 추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가이아는 파종성 영장류 질환이라고 칭할 만한 상황, 즉, 인간이라는 유해 동물의 이상 대량 발생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진단은 더이상 과장이 아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새로운 테크놀로지 개발이 방안으로 떠오르지만, 저자의 생각은 비관적이다. 인류가 테크놀로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애당초 테크놀로지란 것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이러한 판단에는 깔려 있는데, 그는 ‘약탈하는 자’란 뜻을 갖는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라고 불러 마땅할 만큼 유독 파괴적인 종이 지구를 책임지는 것만큼 대책 없는 일도 없다고 본다. “지구를 아끼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지구 자원을 세심하게 살피는 인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렇듯 비관적인 인간론의 출처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러한 입장을 저자는 ‘비관적 견해’라기보다는 ‘제몫 찾아주기’로 간주할 듯싶다.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라고 한다면, 인간이란 동물에게서도 다른 걸 기대할 수 없다는 쪽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몫’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인격체(person)’이며 우리의 행동은 저마다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다. ‘의식’과 ‘자아’와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과학적으로 지지되지 않는 기만일 뿐이다. 가령, 신경과학에선 ‘0.5초 지연’ 현상이라는 걸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는 내부의 충동은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0.5초 전에 일어난다. 즉 의식적으로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먼저 행동할 준비를 갖춘 다음에 우리는 그 행동을 경험한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의식의 대역폭이 적기 때문인데, 일상생활에서 초당 1,400만 비트 정도의 정보를 처리한다면 의식에 감지되는 것은 그 백만 분의 1에 불과한 18비트 정도다.   

우리는 자신을 통합적이고 의식적인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최근의 인지과학과 고대 불교는 통상적인 자아 개념이 환상이라고 일러준다. 우리의 자아도 ‘생명 조직상의 패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가 ‘인간 종 중심주의’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더불어,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도 다른 동물의 욕구가 추상적인 모습을 취한 것일 뿐이란 사실을 직시하도록 해준다. 시인 브로드스키를 인용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대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진리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 삶이 아니라 삶의 비극적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삶이다. 그것은 목적 없는 삶,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들”을 그저 바라보는 삶이다. ‘우리시대 쇼펜하우어’의 제안이다. 

10.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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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0-0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예쁜 여학생을 따라서 <보건의료진보포럼>이란 곳을 갔죠.(염불보단 잿밥ㅋ) 그 쪽에선 꽤나 유명하다는 하종강이라는 분이 강연을 하는데 말미에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이제 다윈 탄생 200주년이죠. 과학적으로도 세상이 진보한다는 건 증명되어 있습니다.' 하시더군요. 씁쓸한 웃음이 나왔죠. 오히려 과학적으로 세상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면 진보 정치를 어떻게 할 수 있냐는 고민을 해야할 상황일텐데...

자꾸때리다 2010-10-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재미있던 건 아무도 그 이야기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는 사실... 명색이 의대생, 간호대생인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ㅋㅋㅋ 더군다나 나름대로 인문 사회 쪽에 관심도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물론 구태여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고 말해봐야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요.

로쟈 2010-10-1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도 신앙이니까요.^^

드팀전 2010-10-1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노>에 보면 마지막에 배신하는 양반이 있습니다.첨부터 노비들을 속이기 위한 음모였다지요.그가 마지막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며 한 말이 '냄새'였습니다. 너희들의 냄새가 역겹다는...전 그 장면을 볼 때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말한 '모든 혐오감은 접촉에 대한 혐오감이다'라는 말과 까라마조프의 이반이 말한 '멀리 있는 휴머니즘'을 생각했습니다.
책의 향기는 거부감이 없어 책읽는 사람들은 다들 좋아하지만 사람의 향기는 늘 그런 것 만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어디를 더 향해야 할지는...
새 책을 사봐야할텐데...10월은 눈코뜰새없군요. 늦었지만 새책나온거 축하드려요

로쟈 2010-10-12 08:4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모든 접촉이 혐오감을 낳는 것은 아닌데(에로스적인 접촉도 있으니까요), 여하튼 가장 어려운 건 이웃사랑이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그레이의 책이 잇따라 번역된다는데 좀 더 만나볼 일입니다. <호모 라피엔스>는 제겐 거부감을 일으켰던 책이구요.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녹색평론> 쪽에서 에콜로지를 중심으로 소개했던 터라 공감할 부분이 많았지만요.

로쟈 2010-10-16 08:55   좋아요 0 | URL
저는 진보나 휴머니즘에 낀 거품을 빼는 책으로 좋게 읽었습니다. 그레이의 책은 두 권이 나와 있었는데, 더 나오나요? 기대가 되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6 21:57   좋아요 0 | URL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환상]이 이미 번역되어 있군요? 절판되었지만요.

책 뒤 날개를 보니 [Black Mass]가 근간이라 적혀 있네요.

2010-10-16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1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의외로 재밌더군요. <악의번영>이라는 책과 같이 읽고 있는데, 서구중심적인 개념에 대한 탈피의 모색이랄까요? 특히 과학자들도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많았다는 지적이 흥미로웠습니다. '가이아에게 인류는 파종성영장류질환'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네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에 관한 기사를 오랫만에 옮겨놓는다. 이유야 물론 한글날 맞이다. '남의 말' 대신에 '우리말'로 학문하자는 주장에 직접 공감하기보다는 '외국어' 대신에 '한국어'로 학문하자는 정도로 눅여서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여하튼 '학문어'의 문제에 대해선 관심과 자각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한겨레(10. 10. 07) “남의 말 아닌 우리말로 학문합시다” 

우리 역사에서 말과 글이 일치했던 시기는 해방 뒤 지금까지 단 두 세대 동안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우리 생활에 오래 뿌리박은 한자어와 일본어의 영향으로 말글의 일치를 제대로 이뤄냈다고 자랑하긴 어렵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지식으로 삼아왔던 학문 영역이 특히 그렇다. 개념을 가리키는 말들은 외래어투성이고 이를 해석하고 풀이한 말들은 한자어투성이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난 5일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 소속 네명의 학자들을 만났다. 2001년 만들어진 우학모는 ‘남의 말’을 우리말로 고쳐 그 뜻을 제대로 새기고, 우리말에서 비롯되는 학문을 펼치기 위한 노력을 주로 기울여온 단체다.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최봉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철학과 한국학을 접목한 새로운 인문학 찾기에 몰두해왔으며, 전 회장인 정현기 세종대 교수(국문학)는 우리말로 된 비평이론을 연구해왔다.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그리스어)는 국내에 독보적인 그리스 연구가로서 학문의 주체성을 강조해왔으며,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철학)는 철학이란 말을 ‘슬기 맑힘’으로 풀이하는 등 우리말로 된 개념어 찾기에 초점을 맞춰왔다.

우리말로 학문하기에 대한 이들의 고민은, 단지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한국말을 써야 한다’와 같은 당위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말은 생각을 규정하는 프로그램과 같기 때문에, 말을 따지는 문제는 학문의 본질을 따지는 문제와 맞닿는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제나라 말을 바탕으로 삼아 생각의 세계를 묻고, 따지고, 풀어서 학문의 세계를 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이 만든 것을 받아서 쓰느라 제 나라 말로써 생각을 다듬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봉영 교수는 “남의 말로 할 때에는 흐릿하던 생각이, 우리말로 할 때에는 뚜렷해지기 마련”이라며 ‘배울 학’(學)을 사례로 들었다. ‘배우다’라는 말이 ‘배다’(스며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따진 뒤에야, 학문·학습 등 추상적이기만 한 한자어의 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말은 독창적인 생각을 다듬게 한다.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아내는 행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껍데기를 ‘깨어서’ 본질에 ‘닿는다’는 뜻으로 ‘깨닫다’라는 탁월한 표현이 있다. 독창적인 우리말인 ‘화병’이 서양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던 것처럼, 우리말에 바탕을 둔 생각들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말로 학문하기는 학문의 주체성 회복과 연관된다. 그리스어로 박사 논문을 쓴 유재원 교수는 “말은 ‘누구를 위한 학문이냐’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인 자신이 그리스어로 쓴 논문은 그리스어를 생활어로 쓰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 되지만, 한국어로 쓴 논문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한문이 지배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가 제국주의를 위한 학문으로 쓰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자어나 일본어가 아직도 우리 학문언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정현기 교수는 “우리 학문이 우리말을 생활언어로 쓰는 민중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라며 “기득권층의 노예의식을 깨야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말을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우리말에 대해 ‘개념어가 빈약하다’, ‘학문에 적합하지 않다’ 등의 왜곡된 평가를 내리는 습관 역시 그런 노예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지금 우학모의 가장 큰 걱정은 우리 사회에 몰아닥치고 있는 ‘영어 광풍’이다. 영어로 쓰여진 국제학술지 등재 논문이 아니면 아예 제대로 취급도 하지 않는 국내 학계의 풍토가 학문어로서 우리말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란 걱정이다. 대학사회에 영향력이 큰 <조선일보>가 영국의 대학평가 회사인 큐에스(QS)와 함께 지난해부터 펼치고 있는 대학평가의 내용을 보면, 한국어 논문은 아예 점수를 받지 못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유재원 교수는 “영어를 쓸 줄 아는 지배계층과 그렇지 않은 피지배계층이 나뉘고 있다”며 “조선시대 한자를 아는 사대부와 그렇지 않은 민중들이 갈렸던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했다.

구연상 교수는 “영어로 쓰는 논문은, 학문 자체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을 평가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진정한 국제화를 바란다면, 영어로 논문을 쓰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 학문과 그에 걸맞은 번역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말 강조를 국수주의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통해 누굴 위해 어떤 학문을 할지 돌아보자는 얘기다. 또 지난 9년 동안 우학모가 스스로의 공부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대중적으로 우리말 학문의 확산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우학모는 9일 한국외대에서 ‘한글날 기림 말나눔잔치(학술대회)’를 연다. 우리말의 힘과 생산성을 주제로 삼아, 학술어와 일상어 그리고 외국어가 제대로 어울리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최원형 기자) 

10. 10. 09.  

P.S. 전에 한번 다룬 적이 있는데,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에서 펴낸 책은 세 권 정도인 듯싶다. '사무침'에서 '고마움'을 거쳐 '용틀임'까지. 다음 차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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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0-09 00:22   좋아요 0 | URL
전 가끔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일종의 언어적 순혈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철학이란 단어를 슬기 맑힘으로 쓰자는 식의 주장은 오히려 학문을 일반 대중과 소통 불가능하게 몰아넣는 아이러니를 연출할 수 있지 않은지

자꾸때리다 2010-10-09 00:31   좋아요 0 | URL
의학도 돌창자니 빈창자니 하는 용어로 공부하다 보면 배우는 사람도 골치아프고 일반인에게도 그저 생경하죠. 그냥 차라리 jejunum, ileum 쓰고 말지. 그리고 병원에서는 어차피 공장, 회장이라고 환자에게 설명할 거면서.

로쟈 2010-10-09 08:03   좋아요 0 | URL
이공계에서 한국어는 이미 학문어의 역할을 상실한 거 같고, 인문사회과학쪽도 절반은 그래 보입니다. 저는 '우리말'보다는 '한국어'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2010-10-09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귀가길에 들른 서점에서 '테이크아웃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나온 고골의 <외투>(생각의나무, 2010)와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생각의나무, 2010), 그리고 조정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2010)과 윤대녕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푸르메, 2010) 등과 함께 손에 든 책은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이다(당초엔 <인권의 철학>(새물결, 2010)까지 얹으려 했으나 책값이 너무 비쌌다. 대신에 지만지 고전선집 두 권을 추가했다). 다리언 리더는 몇달 전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가 '대리언 리더'란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는 바로 그 저자다. 영국의 라캉주의 정신분석가.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번역된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출간은 뜻밖이다. 책은 목차도 보지 않고 계산을 치렀는데, 마침 리뷰기사가 올라와 있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10. 09) 그림의 ‘표면’이 아니라 그림의 ‘이면’을 봐라    

우리가 미술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을 더듬어보자. 미술이란? 아름다운 것, 새로운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것, 현실을 재현하는 것(구상), 작가의 자유연상을 옮겨놓는 것(추상), 그럼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 그래도 뭔가 조금 부족하다. 고대 동굴벽화로부터 피카소의 큐비즘까지 미술사를 관통한 근본적인 원리는 무엇일까? 이 책의 해답은 유아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언어와 법이 지배하는 상징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그 뒤에 남겨진 욕망, 무의식, 공허의 자리에 들어선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듯이 이 책은 정신분석이론의 관점에서 미술을 정의하려 시도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술사가가 아닌 정신분석가임을 감안하면 미술사를 설명하기보다는 난해한 정신분석이론을 미술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본래 의도일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다리안 리더는 라캉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더불어 라캉 이론을 대중문화와 고전의 사례에 적용하는 재기발랄한 글쓰기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도난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사건의 전말부터 살펴보자. 1911년 8월21일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 걸려있던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날은 미술관의 정기휴일이기도 해서 그림이 사라진 사실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알려졌다. 루브르에는 즉각 60명이 넘는 경찰수사본부가 차려졌고 언론은 희대의 미술품 도난사건을 1면에 도배했다. 이전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이 그림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 심지어 많은 관람객이 한때 그림이 걸렸던 빈벽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유명해진 그림은 초콜릿상자와 우편엽서, 간판에 등장하면서 불멸의 작품이 됐다. 


루브르 미술관에 있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그림이 있던 텅 빈 자리를 보려고 몰려든 군중들.

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 너머의 빈벽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라진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효과와 관련이 있다. 평소 거들떠보지 않던 물건이 잃어버린 이후에야 아쉬워진다. 부모나 연인의 진가를 알아차리는 것도 그들과 이별한 다음이다.

좀더 정신분석적인 용어로 설명해보자. 프로이트는 문명 안에 들어가려면, 즉 인간이 되려면 신체의 일부(성기)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눈썹, 손가락, 귀 등 신체의 세부를 추가하면 할수록 칭찬을 받지만 그 그림에 성기를 그려넣는 순간, 어른들의 반응이 썰렁해지는 예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억압되는 것은 쾌락의 욕망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잔여물을 성적 본능이라고 보았지만, 라캉은 ‘물(物)’이라고 부르는 텅빈 장소로 가정했다.

그렇다면 문명의 세계(상징계)에 진입하는 것과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양육자(엄마)와의 시선 교환이 중요하다. 아기는 스스로 보기 전에 누군가에게 먼저 보여진다. 엄마의 시선을 느끼고 반응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형성한다. 타인의 시선이 내 시선 안에 들어와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 모습이라기보다 타자가 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여기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위해 일종의 스크린을 친다. 슈퍼맨이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클라크 켄트라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 필요한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연기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은 스크린 앞에서 그럭저럭 영위되지만 이 스크린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자는 사라진 ‘모나리자’ 뒤로 나타난 빈벽을 라캉이 말했던 ‘물’에 비유하면서 스크린으로서 회화의 성격을 화가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라우리는 공장지대를 그린 무난하고 유쾌한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사후 끔찍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10대 소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의 숨겨진 작품 속에서 소녀들은 도끼로 목이 잘리거나 칼로 난자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해서도 색다른 설명이 주어진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꼈고 그것을 가리는 방패로써 복수의 시점을 가진 큐비즘의 대표작이 나왔다는 것이다.

회화는 라우리나 피카소의 경우처럼 상징계 뒤안의 ‘물’과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것인 동시에, 관객에게는 ‘물’의 존재를 일깨운다.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이야기는 그림의 본질을 알려준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너무나 진짜처럼 그려서 새들이 몰려들게 하자 파라시오스는 그를 불러 자신의 걸작을 가린 베일을 걷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제욱시스는 베일 자체가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제욱시스의 승리는 베일이 미술의 본질임을 말한다. 베일 뒤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사용가치에 비해 턱없이 비싼 그림을 마구 사들인다.

다시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돌아가보자. 2년 뒤에 잡힌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 빈첸조 페루지아였다. 루브르 미술관에 페인트칠을 하러 왔던 그는 그림을 액자에서 떼어내 외투 밑에 감추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벽장에 숨겨놓았다가 팔기 위해 내놓는 순간, 한 화상의 신고로 붙잡혔다. 그러나 그의 부적절한 행동은 ‘모나리자’의 진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림이 갖는 스크린으로서의 기능을 알려주는 적절한 사례를 제공했다.(한윤정기자) 

10. 10. 08. 

 

P.S. 다리안 리더의 다른 책으론 심신문제와 우울증을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우울증에 관한 책으론 조지 보나노의 <슬픔 뒤에 오는 것들>(초록물고기,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슬픔의 심리학'이 부제로 돼 있다. 어제 주문해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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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2-03 14:00 
    <공간>(1월호)에 실은 북리뷰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택배 사고로 잡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게 됐는데, 그냥 초고를 옮겨놓는 것이다(편집과정에서 약간 수정됐을 수 있다). 책은 지난해 '올해의 책'의 하나로 꼽기도 했을 만큼 흥미로웠다. 공간(11년 1월호) 모나리자 훔치기“왜, 예술은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책의 제목이 <‘모나리자’ 훔치기>인 것은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실마리로 삼고
 
 
헌내 2010-10-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리안 리더라..
브루스 핑크, 지젝하고 3대 라캉 연구자로 꼽히는 사람으로 알고있는데...

라캉 만화책도 썼더군요..^^;

로쟈 2010-10-09 08:05   좋아요 0 | URL
'대중성'이 강점이죠...

카스피 2010-10-0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흔히 모나리자하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 작품만을 생각하는데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그거외에도 몇 작품이 더 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10-10-10 09:26   좋아요 0 | URL
패러디도 무척 많더군요.^^
 

2010년 노벨문학상이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게 돌아갔다. 언론에서는 '로사(Llosa)'라고 표기해주고 있는데, 곧 정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오래 전부터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혀왔던 작가인지라 의외의 수상은 아니다. 다만, 시인과 비유럽권 작가에게 상이 돌아갈 거란 전망 때문에 고은 시인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가 이번에도 고배를 마신 것이 아쉽다. 남미 최고의 이야기꾼의 한명인 바르가스 요사의 작품이 덕분에 좀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게 될 듯싶다. 나도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리스트는 <새엄마 찬양>(문학동네, 2010) 출간시에 만들어놓았지만(변동사항이 없다, 가 두 권이 추가됐다), 노벨상 수상 기념인 만큼 한번 더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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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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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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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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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07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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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0-10-07 21:36   좋아요 0 | URL
음.. 오랜만에 비유럽권 작가가 받은 것 같군요...

로쟈 2010-10-07 23:44   좋아요 0 | URL
스페인어권이라고 생각하면 사정은 또 다르죠...

헌내 2010-10-08 22:53   좋아요 0 | URL
......ㅠ_ㅠ

2010-10-07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7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10-10-08 04:53   좋아요 0 | URL
정말 '요사'였군요^^ 반갑기도 하고 처음엔 혹시 제가 모르는 '로사'가 있는 건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 어느 정도 소개가 된 셈이니 큰 혼란은 없어도 될 듯하네요.

로쟈 2010-10-08 08:45   좋아요 0 | URL
'로사'라고 처음 보도한 기자들은 좀 뜨끔했을 거 같아요...

비로그인 2010-10-08 17:18   좋아요 0 | URL
'로사'라고 표기한 기자들은 "고유명사의 오역 대죄"로 '로쟈'님께 혼나야 합니다.

비로그인 2010-10-08 17:11   좋아요 0 | URL
동네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새엄마 찬양> 을 발견하고 낼름 대출받았답니다.^^* // 대한민국 문학작품은 언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

로쟈 2010-10-09 08:05   좋아요 0 | URL
그래도 10년 내로는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