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8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작년에 쓴 마지막 리뷰가 지면에는 새해 첫 리뷰로 실렸다. 20대 블로거 박가분의 '블룩'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거리로 삼았다. 예상보다 독자의 반응이 없는 책인데(언론리뷰도 거의 뜨지 않았다), 분석이야 저자나 출판사의 몫이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올해도 단독 저서와 공저들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조만간 주목받게 되리라고 본다.
기획회의(11. 01. 05)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혁명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을 위한 인문학!’ 뒷표지에 박힌 문구다. 두 가지가 강조돼 있다. 저자가 ‘20대 젊은 블로거’라는 사실과 그가 ‘혁명을 위한 인문학’을 제안한다는 점. 그리고 의도와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제안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까지도 아우르는 듯싶다. 2006년에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고 하니 저자는 아직 새파랗다. 그때부터 4년간 블로거 활동을 하며 올린 글들을 책으로 갈무리한 결과라고 하니 얼핏 ‘치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책은 저자가 제때 대학에 들어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정치한 문제의식과 탄탄한 내공을 뽐낸다. “입발린 소리를 잘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문학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이 잠재해 있다고들 말하지만 나와 같은 20대에게 인문학의 미래는 ‘저임금 시간강사’이다.”라는 현실 고백이 엄살로 들릴 정도다.
블로그 활동(혹은 블록질)이 일상화된 시대인 만큼 ‘20대 블로거’야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인문학 오타쿠’(인덕후)라고도 지칭되는 블로거는 많지 않다(알고 보니 나도 그런 별칭으로 불린다). 언젠가 네이버 블로그 ‘붉은서재’를 알게 됐고, 주인장 ‘박가분’의 활동에 주목하게 됐다. 그가 20대이고 (당시에) 군복무 중이란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보다 더 이후였던 듯싶은데 박가분은 내가 활동하던 다음 카페 ‘비평고원’에도 자주 출몰하여 글을 올리곤 했다. 개인적으론 그를 한 계간지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다. 생각보다 왜소한 체구에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는데(그래도 사병보다는 장교 스타일의 머리였다), 말년 휴가를 나왔다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에도 한두 번인가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책이 언제쯤 나오느냐고 물었고 그는 조만간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박가분 본색’이라고 할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이다.
책은 ‘인문독서 후기’ ‘문화비평’ ‘인문적 사유’ ‘시사비평’ 네 부로 구성돼 있는데, 실상은 전체가 인문독서 ‘후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란 ‘읽어내기’이고 현재의 정세와 삶 속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자가 독서에서 비평과 사유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면서도 자연스런 경로라는 말이다. 서문에 적고 있지만, 전체 26편의 글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도 않고, 논조 자체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공평무사한 시선과 멀다.” 그것은 “나름대로 인문학을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방식으로 읽어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관심사가 드러나는 대목인데, 인문학 전공이 아니고 전문적인 인문학 연구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가 인문학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 ‘정치성’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적인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전히 인문적 사유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사상적으로 ‘예고’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내가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 특히 정치철학에 경도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경도’는 개인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세대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블로그 출판의 사례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예로 들면서 이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서 찾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경험의 세대성이다. 그는 소위 ‘인문학 대중화’의 수혜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 이건 40대 독자로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흥미로운데, 저자의 고백은 이렇다.
“내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할 당시에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푸코, 들뢰즈에 관한 유행이 여전히 한창이었고, 유학길에 올랐던 젊은 연구자들이 돌아와 속속들이 현대 철학분야의 최신 번역서들을 내놓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알라딘의 서재꾼 로쟈의 도움도 매우 컸다.”
‘서재꾼 로쟈’도 거명돼 멋쩍긴 하지만, 20대 시절의 내게는 그런 ‘가이드’가 없었던 걸 고려하면 분명 다른 환경이다. 실제로 저자의 ‘인문독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최신 번역서들’을 통해서 접한 현대 철학자들이다. 푸코와 들뢰즈 등을 비롯하여 가라타니 고진을 경유한 칸트와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자크 라캉, 자크 랑시에르, 그리고 발터 벤야민 등이 주요 탐독 대상이자 정치적 이론과 입장을 창출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흔히 386세대(지금은 486세대)가 사회과학서적에 몰입하던 세대였다면 2000년대 대학생 세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저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 서클 내부의 학회들만큼 최신 인문철학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의 논리구성 자체가 사회적으로 ‘사상적 힘’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지만, 그럼에도 특정 인문학 저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그 안에서 가능한 주체적 자율성에 관한 희망을 담지하는 한에서”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나마 그런 힘을 가졌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모색이 ‘그 일부 학생들’에 속하는 저자의 화두이다. 그가 ‘88만원 세대’ 문제나 ‘김예슬 대자보’ 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래서 모든 유형의 ‘탈정치화’ 전략과 세태에 비판적이다. 가령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통해 ‘88만원세대 새판짜기’를 시도한 우석훈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젊은이들의 탈정치화 현상을 부추기는 공범”이라는 혐의를 제기하며, “결국은 세대모순조차도 수많은 자본주의적 모순의 상이한 측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통치전략 안에서 생성된,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안에서 강제되는 ‘개인성’과 과감하게 작별할 것을 요구한다. 같은 세대 20대에게 던지는 저자의 강령적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20대에게서 가능한 정치적․저항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 외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외부의 권력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20대 자신의 책임을 호명하는 고유한 방법과 수단들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기성세대의 경제적․정치적 재생산 구조에서 젊은이들이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학교로부터의 독립, 나아가 관료사회와 대기업 노동시장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그가 복학 이후 정치철학 세미나를 주도하면서 좌파 대학생들 간의 생활공동체, ‘공동생활전선’을 꾸리고 있는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혁명가이고자 한다.
11. 01. 08.
P.S. 작년초에 나왔던 인터뷰집 <요새 젊은 것들>(자리, 2010)에는 박가분과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아울러 그가 '박원익'이라는 본명으로 낸 공저로는 <아바타 인문학>(자음과모음, 2010)이 있다. 그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nhn?blogId=paxwonik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