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다시' 읽는 재미에 대해서 조금 적었다.  

 

한겨레(11. 03. 19) 제대로 된 모비딕 ‘다시’ 읽으며 

허먼 멜빌의 걸작 <모비딕>을 다시 읽고 있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춘 다이제스트판이 아니라 완역판으로는 처음 읽는 것이지만 ‘고전’이기에 ‘다시’ 읽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탈로 칼비노의 말대로 고전이란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유명하기에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 고전이다. 창피하니까. 하지만 뒤늦은 독서에 이유가 없진 않다. 그간에 발췌·표절 번역본은 많았지만 확실한 추천 번역본은 없었다는 점. 그런 가운데 장인적 솜씨를 담은 새 번역본이 나온 것이 불과 지난해의 일이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란 1인칭 화자의 말이 서두이지만 멜빌은 그보다 앞자리에 고래의 ‘어원’과 고래에 관한 문헌 ‘발췌록’을 배치하고 있다. 고래, 혹은 ‘거대한 바다 괴물’에 대해 수많은 민족과 세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노래했는가를 미리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단 이것을 ‘진정한 고래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충고한다. 만약 그런 게 이미 존재한다면 멜빌은 따로 <모비딕>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진정한 고래학’으로서의 <모비딕> 말이다.

지갑도 바닥나고 뭍에서는 더이상 흥미를 끄는 것이 없기에 이슈메일은 포경선을 타려고 항구를 찾는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고래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컸고 고래잡이 항해가 어쩌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룻밤 유숙하게 된 여인숙에서 뜻밖에도 식인종 작살잡이와 방을 같이 쓰게 된다. 항유로 처리한 원주민의 두개골을 팔러 돌아다니는 ‘야만인’ 작살잡이의 이름이 퀴퀘그. 이슈메일은 낯선 식인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지만 곧 “이 사람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란 생각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 아니 두려움이 가시자 예의바른데다가 감수성까지 예민한 자신의 동숙자를 예찬하기까지 한다. 



젊은 시절 직접 포경선을 타고 남태평양을 누비다 식인종들과 한 달 동안 같이 살기도 했던 멜빌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차별적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멜빌과 마찬가지로 이슈메일도 문명의 위선과 간사한 허위 따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선량한 야만인’에게 오히려 친근감을 느꼈다. 높은 설교단에 올라가서는 사다리를 끌어올려서 설교단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드는 예배당 목사님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기독교적 우애란 허울뿐인 예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대신에 이교도 퀴퀘그와 담배를 같이 피우며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러고는 퀴퀘그의 우상 숭배 저녁 기도에 동참한다.

엄격한 장로교회의 품에서 태어나 자란 어엿한 기독교도인지라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이슈메일은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관대하고 고결한 하느님이 하찮은 나무토막에 질투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스스로 반문한다. 물론 그건 같은 나무토막끼리라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숭배란 무엇인가? 이슈메일 생각에 그건 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 “이웃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웃에게 해주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다. 그런 생각으로 이슈메일은 퀴퀘그의 예배에 동참하여 우상 앞에서 두세 번 절을 하고 우상의 코끝에 입을 맞춘다. 이후에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워서 더욱 돈독해진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은 물론이다.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피쿼드호를 타고 출항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이지만, <모비딕>은 그런 우정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전으로서 값을 했다.  

11. 03. 19.   

P.S. <모비딕>은 교양강의차 읽고 있는 것인데, 다른 번역본들 외에 더 참고하고 있는 책은 멜빌을 전공한 신문수 교수의 <모비딕>(살림, 2005), 김옥례 교수의 <모비딕>(신아사, 2005), 그리고 호손과 미국소설학회 편, <모비딕 다시 읽기>(동인, 2005)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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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19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2단 세로조판이었고 두께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것도 완역이 아니었군요. <백경>이란 제목이었죠 아마. 김석희 선생 번역이면 읽어볼 만하겠는데요. 별고 없으시죠? 요즘은 공연히 사람들에게 별일 없는지 묻게 되네요...

로쟈 2011-03-19 00:44   좋아요 0 | URL
완역본이 없었던 건 아니구요, 저도 동서문화사판은 새로 구해서 갖고 있습니다. 다만 강추번역본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 저야 무고한데, 시절은 하수상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을 처음 읽었을 땐 눈에 안 들어왔지만 나중에 퀘이커 교도에 관심이 생기면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그러면 선원들의 종교적 성향에 초점을 두고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3-19 18:23   좋아요 0 | URL
그것도 한가지 독법이겠네요...

yjsohn 2011-03-20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딕하면 스타벅스 커피전문점이 항해사의 이름(스타벅)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떠오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0 16:28   좋아요 0 | URL
오...방금 제가 그 일화에 대한 페이퍼를 썼는데요...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일본의 대지진에 관한 뉴스 속보를 들으면서 쓴 글인데, 당장에 떠오르는 '천지불인'이란 말에 분량을 더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기분이었다. 위로의 말도 사치스러워 그냥 '행복할 자격'만을 문제 삼았다.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이후, 2010),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난장, 2010) 등이 뉴스를 들으며 내가 펼쳐놓았던 책이다. 사망자가 사만 명이 넘어설 거라고 하니 입이 떼지지 않는다...   

   

경향신문(11. 03. 15) [문화와 세상]누가 행복할 자격 있나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수천명의 시신이 해안에서 발견되고 있고, 한 어촌마을에서 30년 동안 쌓은 거대한 방조제는 흉물스러운 쓰레기로 변해버렸다. 원자력발전소까지 폭발한 가운데 피해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 오른다.

이미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고 했다. 제물로 만들어진 지푸라기 개는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동안에는 숭배의 대상이지만 의식이 끝나면 바로 내팽개쳐진다. 인간의 운명 또한 한갓 지푸라기 개와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런 처지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 원조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는 ‘잘사는 것’ ‘잘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어떤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주어진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체적인 ‘활동’이라는 게 요점이다.

그래서 그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소나 말, 그 밖의 다른 동물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른과 같은 활동, 가령 시민으로서의 실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어린이’란 말은 그저 소망의 표현일 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이를 좀 먹어야 한다.

어떤 활동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자신의 탁월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이다. 훌륭한 장군이라면 자기 부대를 잘 지휘하는 일, 좋은 제화공이라면 훌륭한 구두를 만들어내는 일이 ‘잘사는 것’이고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인간의 삶이 일시적인 운에 많이 좌우된다 할지라도 행복은 긴 생애와 관련되기에 행복한 사람은 변덕스러운 운을 견뎌낼 것이며, 결코 비참하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진과 같은 재앙은 그런 어른의 행복이란 것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보이게 만든다. 버텨낼 수 없는 불운이 닥치기도 하며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의 첫 경험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란 깨달음이 아니라,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말했다. 어른들이 무능력하다는 뜻이다. 정곡을 찌른 듯한 이 말을 풀이하면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마술뿐이라고 지적한다. 무엇이 마술인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지혜에 따르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정령을 병속에 잘 가둬놓아야 하고 집에는 황금동전을 낳는 당나귀나 황금알을 낳는 닭 한 마리쯤 있어야 한다. 행복은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의 호두나무나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에 달려 있다. 혹은 지진이 나느냐 안 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일본의 지진에 대해 원로목사님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신앙적으로 볼 때’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웃 나라의 불행에서 신앙의 동기를 찾는 것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믿음과 멀지 않아 보인다. 천지가 어질지 않은 마당에 인간에게서 어짊을 찾는 것은 무리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누구도 행복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 운명에 겸손할 수는 있다. 인간도 소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11.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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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1-03-1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 이름으로' 서문이던가에 이런 지적이 있더군요. 3대 악의 축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392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번달에 고른 주제는 '공정한 사회'이고, 김승식의 <공정한 사회란?>(고래실, 2010)과 김진철의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밀리언하우스, 2010)을 관련도서로 읽었다.   

책&(11년 3월호) 공정한 사회란? 

‘친서민’과 함께 ‘공정사회’는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현 정부의 양대 국정지표이다. 덕분에 ‘공정사회’란 말이 5공화국 시절 ‘정의사회’만큼이나 많이 회자되고 있다. 더불어 어떤 사회가 공정한 사회인가란 의견도 분분하다. 김승식의 <공정한 사회란?>에 눈길이 간 이유이다. 증권 관련 업종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저자가 ‘공정한 사회’의 그림을 그리는 데 발 벗고 나선 것은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공정한 사회의 개념을 정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그래서 붙인 부제가 ‘역사적 고찰로 살펴본 공정사회의 이념논쟁’이며 책의 대부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에 할애돼 있다. 그러한 역사적 고찰에 기대어 저자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완전한 보완관계’를 이루는 사회를 공정한 사회의 모델로 삼는다.  

무엇이 공정한 사회인가? 저자는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본다. 먼저 공정한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사회, 즉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이고, 다음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재활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70%가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만큼 공정한 사회라는 국정지표는 방향을 바로 잡은 것이긴 하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일 것이다. 이때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계층 간 격차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공정사회는 “몇 %의 정부지출과 사회복지지출 국가로 갈 것인지의 문제”이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공정사회 개념이 기회균등은 강조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선택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지상주의 공정의 개념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서구의 정치경제사에 대한 개관은 “공정한 사회란 결국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의 가치가 자유 우선에서 평등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우리의 소득불균등을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시장개입 정도는 매우 열악한 수준이다. 흔히 정부가 시장에 너무 많이 개입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살펴보면, 2007년 기준 한국의 GDP대비 사회지출규모는 7.5% 수준으로사회복지를 지향하는 국가군과는 비교할 것도 없고,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OECD 국가군 평균인 19%에도 훨씬 못 미친다. 결국 “우리 사회는 세계최고 수준의 자유지상주의(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공정한 사회가 공염불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보다 실질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한편 불공정 사회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이 정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일간지 경제부 기자 김진철의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은 언론과 시민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 일러준다. 일단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된 경제기사, 정의롭고 용기 있는 경제기자”도 절실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시민 독자들이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망상인가. 현 정부 초기에 고환율 정책이 별다른 저항 없이 이어졌던 것은 원화 약세로 수출이 늘어나면 경제가 성장하고 ‘나’에게까지 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고,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와 비자금 조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편드는 이들이 있는 건 삼성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는 착각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헛된 믿음과 착각을 주입하는 것이 주로 언론이라는 데 있다. 힘 있는 자들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언론 본연의 역할은 내다버린 지 오래고, “광고주의 돈, 정부의 회유, 신문사주의 이익에 기자들이 복무”하고 있는 것이 저자가 비판하는 우리의 언론 현실이다. 이권과 결탁한 현혹적인 경제기사들을 통해서 전문적인 경제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들의 인식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경제기사를 읽되 주의해서 읽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고 경제부 기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방책은 없는가? 애초에 신문사도 기업이기에 이윤을 추구한다. 미디어라는 사회적 역할 수행과 함께 기업으로서 이윤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 언론의 딜레마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언론으로서 자기 역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하는 것이 그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조성되는 일이겠다. 그리고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출입처 중심주의나, 기자단의 배타주의, 보도자료 기생주의 등의 구태를 벗고 전문성을 갖춤과 함께 기자로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까칠한 의심’의 태도로 경제기사를 대하는 독자의 자세를 보탤 수 있다. 이 경우엔 독자가 아닌 기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이면서 비판적인 기사 읽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속지 않을 수 있으며, 힘 있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 것이 또한 공정한 사회로 가는 중요한 걸음이다.  

11. 03. 13. 

P.S. <공정한 사회란?>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게 된 책인데, 세계최고 수준의 자유지상주의 시장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 지적이 흥미로웠다. 대신에 "2000년의 인류역사에서 만인평등의 의한 자유가 부여된 역사는 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다."(99쪽) 같은 대목은 뭔가 아마추어리즘적이란 인상을 갖게 한다. '2000년의 인류역사'란 표현이 두어 번 나오는데, 저자는 '인류'를 어떻게 정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게다가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면 좀 과도한 '어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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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3-1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저 공정은 공허하게 정의가 실종된...의 약자가 아닐까요.

로쟈 2011-03-16 08:35   좋아요 0 | URL
그럴 듯하네요.^^;

비로그인 2011-03-15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公正이 公定으로 읽히는 건 낱말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지배권력의 담론으로 쓰이는 이상 空井이기 때문이겠죠...

로쟈 2011-03-16 08:35   좋아요 0 | URL
우물이란 비유도 아깝습니다.^^;

꼬마요정 2011-03-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위 사회지배층의 입장에서 공정사회겠죠.. 돈과 권력의 경중에 따라 대접받는..

로쟈 2011-03-16 08:36   좋아요 0 | URL
한때 정의란 말이 그랬듯이, 공정이란 말도 의미가 변색될 거 같아요...

雨香 2011-03-1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레이코프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경제부문에서의 공정은 '신자유주의'가 그 프레임을 차지한 것 같습니다. 경제전문신문이나 경제주간지가 모두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이니까요. 그나마 이코노미 인사이트가 출간되긴 했습니다만 처음 몇 달 이후 이제는 힘이 쭈욱 빠진 느낌입니다.

로쟈 2011-03-18 11:40   좋아요 0 | URL
경제에 관해서는 '인사이트'를 원하지 않는가 봅니다...
 

한겨레 출판면의 고참기자 고명섭의 서평집이 출간됐다. <즐거운 지식>(사계절, 2011). 서평집으론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에 이어지는 것으로 저자의 지속적이고도 일관된 책읽기와 관심사를 보여준다. 서평집으로도 앎과 사유의 두께를 만들어낸 경우다.   

  

한겨레(11. 03. 12) 책 읽는 기쁨에 빠져 보세요

‘책 탐닉’이란 말을 그 스스로는 싫어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적 항해’라는 말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770쪽 두툼한 분량에 4년 남짓 까다로운 안목으로 골라 읽은 인문 지식의 첨단이 담겼다. “게걸스럽게 지식을 물어뜯었음”을 자백하고 있거니와, 앎을 향한 그 항해의 나침반은, 세이렌의 유혹을 넘어 난바다를 건넜던 저 오디세우스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림제목도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가 아닌가.

<즐거운 지식>은 <한겨레> 책 담당 기자로 있는 고명섭씨가 2006년부터 써온 신간 리뷰 기사를 묶은 책이다. 오디세우스에게 세이렌은 “앎의 유혹”이었으니, 그 유혹에 넘어가면 과거와 현재의 지식을 얻을지언정 “그 자신은 미래를 저당잡히고 끝내 삶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지은이는 인지하고 있다. <즐거운 지식>의 항해에 또다른 나침반은 니체다. 니체에게 앎은 “유혹과 위험과 공포 사이를 질주하는” 항해다. 지은이의 주 관심사는 서양 철학, 또는 지금 세계 읽기를 감행하는 정치사상이다. 책은 사상, 인문, 교양 ‘세 바다’로 짜였는데, ‘사상의 바다’로 가는 항구에는 지젝, 네그리, 가라타니 고진, 데리다, 바디우, 랑시에르, 샌델, 아렌트, 칸트, 니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포진해 있다. ‘인문의 바다’에는 괴테, 밀턴, 톨스토이, 베버의 삶과 함께 프로이트와 융의 분투가 넘실댄다. 지은이에게 니체와 오디세우스가 그랬듯이, 여기 실린 187편의 책 리뷰는 ‘지식의 즐거움’에 기꺼이 가닿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든든한 나침반 구실을 해줄 것 같다. 

11. 03. 13. 

P.S. 개인적으론 추천사를 쓰기 위해 책을 미리 읽어봤는데, 이미 지면에서 한번 읽은 글이 많았지만 모아놓으니 한결 '세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책에 관한 책’을 두 권 냈지만,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내게도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이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두려움을 안긴다.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디쯤 읽고 있는 것일까란 물음에 한번이라도 붙들려본 독자라면 ‘일등 항해사’의 고마움을 알 수 있으리라. 그 바다의 유혹과 폭풍에 맞서 ‘두려움을 모르는 자’ 고명섭 기자는 오랫동안 내게 그런 ‘일등 항해사’였다. 서평을 일삼아 쓰면서도 그는 ‘앎의 기쁨’과 ‘배움의 즐거움’을 항상 누리고자 했고 전달하고자 했다. 덕분에 나도 기쁘고 즐거울 때가 많았다. 『즐거운 지식』은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그러모은 선물 보따리이자 묵직한 도전장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그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프로블레마’다. 이 갑판 위의 씨름이 한 번 더 흥겹고 즐겁다. 문제를 사유하는 자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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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3-17 20:52   좋아요 0 | URL
고명섭기자의 글을 독서의 가이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항상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지식의 발견은 연재당시 즐겨찾기에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고 매기사를 등록시켜 두었을 정도로 관심깊게 보았었습니다. 또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아주 좋으 가이드북이 되겠네요.

로쟈 2011-03-18 11:38   좋아요 0 | URL
네, 가이드북으로 요긴합니다...
 

'올해의 발견' '가장 빛나는 데뷔작' 등의 평판을 듣고 보게 된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이다. 초저예산으로 이런 완성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대사, 연기, 촬영, 모든 것이 뛰어난, 손에 꼽을 만한 데뷔작(이런 영화는 왜 학생단체관람을 하지 않는 걸까?). 두번째 영화가 잔뜩 기대된다. 간단한 리뷰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씨네21(11. 03. 02)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한 10대 소년의 관계 <파수꾼>

아들이 자살했다. 자살의 이유를 모르는 아버지(조성하)가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아들의 이름은 기태(이제훈). 학교에서 짱으로 불리던 기태에게는 희준(박정민)과 동윤(서준영)이란 친구가 있었다. 희준은 기태가 죽기 몇주 전 전학을 갔고, 동윤은 기태가 죽은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희준과 동윤이 학교를 떠난 이유가 기태와 관련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하지만 희준과 동윤의 기억이 드러내는 것은 기태가 아닌, 그때 자신에게서 터져나온 뜻밖의 잔인함이다.

이러지 말자. 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뭘 그만해? 소년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핵심적인 정보가 없다. 설명하기도 민망한 사소한 오해가 갈등을 일으킨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쪽은 말에 진심을 담는 방법을 모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할 쪽은 상대의 진심을 알려는 태도보다 자존심과 분노를 먼저 앞세운다. 마치 연인들의 싸움과 흡사한 대화의 피로감이 영화가 전하는 비극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파수꾼>은 누군가가 먼저 태도를 달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파수꾼>은 10대 소년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의 관계는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하다. 자신을 빼놓고 다른 친구들이 나누는 시선에 분노하고, 본의 아닌 말로 상처를 주고는 후회하며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된다”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엄두가 안 날 고백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파수꾼>과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일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이들이 환기하는 것은 그 시절의 소년들에게 있었지만, 잊었거나 지워버렸던 사랑의 단면이다.(강병진)   

한겨레(11. 02. 28) 소년들의 폭력 속 그 무엇

어두운 공터에 슬금슬금 기어든 쥐들처럼 소년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한다. 인정투쟁이 끊이지 않는 작은 왕국. 이 익숙한 풍경이 없는 소년들의 성장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정작 무엇을 인정받기 위한 폭력일까. 수많은 영화들이 말해준 것처럼, 그저 그건 수컷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반복되는 것이거나 이유 없는 사춘기의 분노거나, 그도 아니라면 불우한 가정사에 대한 반항일 따름일까. 윤성현의 <파수꾼>을 보며 문득, 폭력에 다쳐가는 소년들에게 지금껏 단 한번도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파수꾼>은 관습화된 답을 밀쳐내며, 영화 전체를 그러한 질문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단짝 친구였다. 기태는 일명 학교 ‘짱’이지만, 동윤과 희준의 관계에서만큼은 그 어떤 권력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기태도 동윤과 희준의 집은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그러나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은 일을 계기로 기태와 희준의 관계가 멀어진다. 단지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짐승의 위계가 들어선다. 삼각형의 한 변이 무너지자, 남은 두 변은 버티지 못한다. 희준은 전학을 가고, 동윤은 기태에게 등을 돌리고, 어느 날 기태는 죽어버린다. 소년의 죽음. 그것은 영화의 엔딩이 아니라, 실은 영화의 시작이다. 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만난다. 



영화는 기태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마다 소년들의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거듭되는 플래시백으로 영화의 구조가 쌓아 올려질수록, 우리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신에 휩싸이게 된다. 그 플래시백들이 살아남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기억이 상대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점점 기태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로부터 멀어지고, 이 복잡한 구조의 어디에도 반전이나,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알기 어려운, 애처로운 어긋남들이다. 그러니 <파수꾼>의 형식은 그 자체로 소년들의 관계의 결처럼 보인다.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영화가 그렇게 끝날 무렵, 살아남은 소년이 현재의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서 죽은 친구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 영화의 본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절 소년들이 서로에게 애타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그 마음, 집착과 폭력과 애걸로 돌변하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소년들의 잔혹함, 그것은 감정이 없어서도, 넘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도 아니라,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외롭게 내팽개쳐진 마음이 짐승이 되어 울먹이는 소리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년들의 폭력을 무심한 오해 속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남다은_영화평론가)  

11.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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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2011-03-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고 싶기도 하고, 보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영화평이 인상적입니다.

로쟈 2011-03-13 22:43   좋아요 0 | URL
영화 자체가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