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그의 독자들에겐 연말 선물이 될 만한(하지만 돈주고 사야 하는 선물이다) 책이 출간됐다.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집약하고 있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시대의창, 2007)이 그것인데,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여지껏 나온 그의 책들 가운데는 최대 부피와 최고가를 자랑하지 않나 싶다. 물론 원서는 496쪽으로 그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책값도 더 저렴하고. 어느 걸 구입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다(번역본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기에). '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이란 원제가 <촘스키, 사상의 향연>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같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즐겨라, 란 뉘앙스도 되기에. 일단은 리뷰나 챙겨둔다.

문화일보(07. 12. 07) “현대 교육은 자본주의의 노예” 촘스키가 본 민주주의와 교육

“대중심리의 통제와 벌이는 싸움이란 하루에 5시간을 보는 텔레비전과 영화산업과 책과 학교와 그밖의 모든 것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다.”(촘스키)

‘생존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노엄 촘스키(79)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글과 대담, 강연, 인터뷰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의 편집자인 오테로(UCLA대) 교수는 촘스키의 제자로, 그동안 스승의 책을 주제별로 묶는 작업을 해왔다. 번역서의 제목이 원제목(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을 어느 정도 살리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900쪽이 넘는 이 책만으로 촘스키의 사상체계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향연’도 어울린다. 더구나 촘스키의 다른 책에 비해 아주 수월하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민주주의와 교육은 따로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촘스키가 계승하는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정치란 대기업이 사회에 던지는 그림자”란 말이 함축적으로 촘스키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촘스키는 언어학자로 발판을 다진 사상가다. 그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선천적이며, 다른 행동 형태와 마찬가지로 반복과 훈련, 보상과 징계 등의 조건형성을 통해 개발되는 습관의 시스템이라고 본다. 이같은 언어관은 그의 심성이론과 사회를 보는 시각으로 확장된다. 즉, 인간의 심성(영혼)에 언어기관이 선천적으로 들어있듯이, 도덕적 계율을 지키려는 소질 역시 선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방해하고, 앞서 얘기한 인간의 선천적인 창조성을 왜곡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즉 현대의 교육 자체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인간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벌어 소비를 잘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게 촘스키의 기본적 교육관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현재 교육이 일 자체를 즐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가져올 보상을 강조하는 조건 형성의 교육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동의 본질적 가치는 모른 채 교환가치만 알도록 만든다고 본다. 그러면서 촘스키는 정부, 기업, 언론,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소위 ‘가짜 지식인’들은 이같은 사회구조에 맹목적으로 편승하고 있으며 그들은 결국 권력을 잡아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겠다는 것이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12. 07.

P.S. 보다 자세한 한겨레의 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13.html 참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욕심을 부릴 만한 책은 벤야민 선집으로 나온 세 권의 책이다(사실 가을에 나올 예정이었으니까 약간 늦어진 셈). 계획대로 10권의 선집이 완간된다면 '벤야민 수용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 이번 선집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론 그의 문학론들을 얼른 구경해보고 싶다. 관련 리뷰를 옮겨놓는다(역자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27.html 참조). 아래는 영역본 선집의 표지.

 

경향신문(07. 12. 08) 감성은 섬세, 사유는 견고한 산문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의 사유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뛰어난 사상가가 흔히 그러하듯,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첨예하게 현실분석적이면서도 비의적이며, 이런 형이상학적·신학적 요소는 다시 ‘현재적 인식 가능성’ 속에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쓰인 글의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적 문예이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유물론적 문예론의 재구성이나 매체미학, 지각이론이나 비평론 등으로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인식의 방법이나 현대성의 이해, 자본주의 체제 분석과 상품사회론, 문화정치론과 도시학 나아가 글쓰기의 실천성도 이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적어도 역사를 조화로운 동질적 시간이 아닌 ‘억압과 야만의 연속사’로 보는 한, 그래서 이 재앙의 보편사가 비판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거나, 또 현대적 삶의 근본특징이 경험의 파편화에 있다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새로움이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의 영원한 반복’일 뿐이라거나, 이런 반복성은 상품물신주의에서 온다든가, 혹은 사진이나 영화, 연극과 같은 현대예술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고 이때의 영향미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또 좀더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글과 기억과 행복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한, 우리는 벤야민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벤야민의 글은 무척 까다롭다. 그것은 직설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문장과 문장의 논리는 자주 비약하며, 그 때문에 의미는 마치 비늘처럼, 부채살처럼 응축되어 있다. 사상의 지형은 체계적이기보다는 비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다. 이것은 그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초현실주의자와의 교류를 통해 폐허나 꿈의 가치, 몽타주 기법 등을 배웠고(영향관계), 유대인 지식인이자 재야비평가로서, 또 국적상실자로서(1933년 이후) 나날을 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실존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전기적 사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이 반듯하게 발표될 수 있었겠는가. 또 체계란 파시즘적 일사불란함이기도 했다.(이른바 ‘체계강제(Systemzwang)’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여기에서 배운 것이다.) 이 땅에서 그의 번역이 지체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온 이유는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의 벤야민 번역서는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최성만 교수 등 세 명의 벤야민 전공자가 해낸 것이고, 특히 오랫동안의 준비와 기획 아래 전체 10권 선집(원전은 총 14권이다) 중 첫 성과물로 나온 까닭에 더욱 기대된다. 각 권은 그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주요 글 또는 주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고, 각각의 해제 아래 관련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없이 퇴고를 거쳐야만 정갈하게 되는 벤야민의 우리말 육성을 좀더 온전한 전도(全圖) 아래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권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는 정치적·성찰적 비평에세이고,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매체미학과 관련된 글 모음이다. 3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는 문학적·자전적 에세이다.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번역자가 첫 권으로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를 택했다는 점이다. 기술복제나 역사철학에 관한 문제적인 글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보들레르나 프루스트 등에 대한 글이고, 이런 문학론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사유 이미지’와 같은 글이다. 거기엔 개인의 내밀한 사연 이외에 엄혹한 시대적 상황 또한 스며 있다. 벤야민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자주 숨을 멈추어야 한다. 한 문장 문장씩 음미하듯 읽어야 하고, 읽는 도중 자주 책장을 덮어야 한다. 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벤야민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사유적으로 견고했던 사람인가를,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산문가임을 생각하게 된다. 강령이나 테제 없이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작가는 희귀하다.



벤야민 수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갈 미래의 길은 여러 단계다. 우선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고, 이런 번역서를 바탕으로 믿을 만한 안내서가 여러 권 나와야 한다. 그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이 있어야 하고, 좋은 단행본도 쌓여야 한다. 학위논문이 아닌, 더 보편적인 이론지평에서 재해석한 우리말 단행본 저서는 아직 없다. 그와 같은 문예이론가는 이 후에 나올까? 한국에서의 벤야민 완성은 그때가 될지도 모른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07. 12. 07.

P.S. 재작년에 작성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는 로드맵'(http://blog.aladin.co.kr/mramor/1177541)은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새로운 도로가 개통됐으니 말이다.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ryu8737 2007-12-07 19:3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벤야민 선집이 나왔군요. 오래전부터 나온다는 소문만 들었던터라 더 반갑네요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도서관에서 대충 봤었는데, 간만에 구매욕구가 올라오네요 ^^

로쟈 2007-12-07 21:02   좋아요 0 | URL
네, 완결판이라면 투자해볼 만합니다...

람혼 2007-12-07 20:26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때아닌'ㅡ니체적 의미에서의 'unzeitgemäß'ㅡ벤야민 르네상스가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반갑고도 설렙니다. 이러한 흐름들이 잘 모아져서 좋은 성과들이 있어야 할 텐데요, 이 역시 고대하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선집 출간 소식을 접하고 로쟈님께서 한 말씀 남겨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7-12-07 21:03   좋아요 0 | URL
'때아닌' 건 아니고 몇년 전부터 예고되긴 했었죠. 감사야 제가 받을 일은 아니고요.^^;

람혼 2007-12-08 03:31   좋아요 0 | URL
아, 물론 그래서 '때아닌'이라고 썼던 것임은, 물론 아시겠지만...^^;

딸기 2007-12-07 21:48   좋아요 0 | URL
너무 어렵다... 이름만 들어도 지겨워... 나랑 인연없어... 라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왜 이런 소식을 자꾸 전해주시는 겁니까! 왜! 왜! 왜!

결국 또 질러야만 하는 것인가요... ㅠ.ㅠ

암튼 지르게 되면, 로쟈님께 당근 땡스투를 날려드려야겠지요. ^^

로쟈 2007-12-07 22:39   좋아요 0 | URL
제가 링크된 페이퍼나 리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땡스투가 불가능할 텐데요.^^

kontree 2007-12-08 11:47   좋아요 0 | URL
<...비애극> 역시, 최성만-김유동(아도르노 김유동이 아닙니다.^^;) 선생이 공역중이고,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선집 기획에서는 빠졌으나 한길사에서 따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더불어 벤야민의 박사학위 논문인 <독일낭만주의의 예술비평개념> 도 번역중이라고 하네요. ^^

책사랑 2007-12-12 07:29   좋아요 0 | URL
이번 "발터 벤야민 선집"(제1차분, 전3권)을 낸 도서출판 길입니다. 9월이나 10월중에 출간하려고 했으나, 편집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려 늦었습니다. 아울러 "독일 비극의 원천"의 경우에는 이미 제가 한길사에 있을 때 최성만 선생님과 번역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이번 선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좋은 역자에 의해 출간예정이니 기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제2차분 "보들레르와 현대"(제4권), "역사철학테제 외"(제5권), "번역~"(제6권)은 이번 달 말까지 전체 원고가 들어올 예정이며, 2008년 4~5월경에 한꺼번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제3차분(전4권)도 2008년 중하반기에는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발터 벤야민 전공자인 김영옥, 최성만 교수의 본격적인 연구서 2권도 준비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올해초에 출간한 게오르그 짐멜 선집(제1차분, 전3권), 그리고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와 함께 발터 벤야민은 모더니티와 관련 20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짐멜 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프리스비에 의하면) 모더니티의 3대 거장을 "발터 벤야민, 게오르그 짐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꼽더군요.
도움이 되실런지요...

로쟈 2007-12-12 22:43   좋아요 0 | URL
짐멜과 벤야민에 대해서는 꽉 잡고 계시군요.^^ 크라카우어도 소개가 되는 건가요?..

책사랑 2007-12-13 08:26   좋아요 0 | URL
크라카우어 건이 좀 걱정입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어서...

로쟈 2007-12-13 08:37   좋아요 0 | URL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 전시회 소식은 지난주에 전한 바 있는데, 한겨레 관련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55305.html). 모처럼 대규모의 러시아 미술전이 개최된 참인지라 주요 화가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혹 페이퍼로 올려놓을 계획이다.

한겨레(07. 12. 07) '인민’과 함께 한 혁명전야

아이바조프스키, 보그다노프-벨스키, 바스네초프, 먀소예도프, 페로프, 수리코프, 크람스코이, 레핀…. 금시초문이라고 부끄러워 말라. 아직 우리가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스키’ ‘프’자 돌림이니 물론 러시아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인들과 비슷하게 러시아 제정 말기 혁명전야를 살았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유학파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반면 러시아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다("러시아문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한 1908년 최남선이 <소년>지에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미술인들이 배운 것이라야 유럽 야수파, 인상파에 국한됐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 이후도 마찬가지. 냉전시대를 건너 한국을 찾아온 한-러 수교 5돌 기념전은 칸딘스키, 말레비치처럼 서유럽 미술사에 편입된 아방가르드 유파가 주인공이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02-525-3321)에서 내년 2월27일까지 열리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은 딱하게도 칸딘스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를 훑는 91점의 끄트머리에 달랑(?) 넉 점만을 소개하고 있는데도…. 이해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미술은 칸딘스키 외에는 전인미답이기 때문.

이 전시회는 사회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간 화가들의 세계를 들춰봄으로써 러시아 혁명전야를 통째 복원해 볼 수 있으며, 한때 ‘브나로드’(인민 속으로)를 외치며 농촌으로 스며들었던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마음 풍경을 엿볼 기회다.

전시의 중심은 1870년 먀소예도프, 페로프, 사브라소프, 크람스코이 등이 세운 ‘이동예술전협회’ 회원들. 졸업작품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시로는 반역적인 주장과 함께 왕립 페테르부르크미술아카데미를 자퇴한 이들은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취지로 이동예술전협회를 결성해 전국을 누비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정부 후원 없이 오랫동안 큰 큐모로 존속하며 인민들과 교감했다. 1880년 레핀, 수리코프 등 2세대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인상파의 빛과 색, 외광의 눈부심을 수용하면서 미술계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구호는 미술판 브나로드인 “미술을 인민에게”.

이들이 즐겨 그린 소재는 혁명전야의 실상.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유형지에서 갓 돌아온 언니와 겁을 먹고 경계하는 동생들의 눈초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먀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는 허름한 농민들이 의회 담벼락에 기대 허기를 끄는 반면 실내에서는 지주들이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을 즐기는 순간을 잡아 지방자치회가 허울임을 폭로한다. ‘유형수들의 휴식’(야코비), ‘익사한 여인’(페로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레핀), ‘임시숙소’(마코프스키), ‘노부모의 상경’(레베데프), ‘농가의 깃털 작업장’(키브셴코), ‘암산’(보그다노프-벨스키), ‘방앗간 주인’(크람스코이) 등도 가슴을 울린다.

또 다른 중심은 기업인 후원자. 91점 가운데 41점은 국립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온 것으로,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을 세운 부유한 상공인이자 미술애호가인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콜렉션이다. 크레티야코프는 “돈을 벌게 해준 사회에 유용한 시설을 남겨 환원하고 싶다”며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는 구두쇠였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아무리 비싸도 돈주머니를 털었다. 평소 누구한테나 콜렉션을 무료로 개방했던 그는 죽기 6년 전 40년동안 수집한 3천여점의 작품을 모스크바시에 기증하고 큐레이터를 겸직했다.

또다른 후원자는 철도왕 마몬토프(1841-1918).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1870년 모스크바 근교 자작나무 숲에 자리한 아브람체보 영지를 구입해 예술가 마을을 만들었다. 이 공동체에서 레핀, 바스네초프, 수리코프, 세로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마몬토프의 조카 ‘타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레핀)이 그 증거. 아내를 관장으로 앉히고 생색을 내는 우리나라 기업인들과 대비된다.

이밖에 작가 마이코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의 초상은 당대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잘 보여주며, 풍속화, 풍경화에서는 작가들의 조국애가 흠씬 묻어난다. 리얼리즘 회화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작품은 오히려 덤처럼 느껴진다. 부나비처럼 유행을 따라다니는 한국 미술판에 ‘러시아 거장전’은 신선한 충격이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주목거리(*듣자 하니 아직까지는 별다른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닌 터인데).(임종업 기자)

07. 12. 0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꾸때리다 2007-12-0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근처에서 하니 한 번 가봐야겠네요

로쟈 2007-12-07 10:51   좋아요 0 | URL
좋은 동네에 사시는군요...
 

컬처뉴스에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754). 강의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완독을 겨울방학으로 미뤄두었는데(하지만 방학땐 '계절학기' 강의가 있다!) 곁들여 읽어야 할 책도 많다는 걸 리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컬처뉴스(07. 12. 05) 마르크스가 불러온 데리다의 유령'들'

“선생님의 저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난해하다’, ‘도통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요? 만약 정말로 제 글이 이해가 안 된다면 당신의 한국어 번역작업이 어떻게 가능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소장학자들과 작가들에게서 때때로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글들을 봅니다.”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제 글이 지극히 난해해서 이해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글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니요?”

국내의 한 일간지(<조선일보>, 1997년 1월 20일자)에 실린 이 대담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참 웃긴 대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 대담은 일종의 ‘징후’였다. 자크 데리다(1930~2004)가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징후.(*참고로, 이 대담은 김성도,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 수록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996년 『그라마톨로지』(1967)와 『입장들』(1972)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이후 데리다의 국역본들은 끊임없는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번역과 쉬운 용어선택으로 번역의 전범을 보여줬다”(<조선일보>, 1996년 2월 9일자)던 『그라마톨로지』마저 오역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퇴출’된 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화젯거리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데리다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유령’ 취급을 받아왔고, 3년 전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국역된 데리다의 1993년작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렇게 우리와 인연이 끊길 뻔한 데리다(의 유령‘들’)를 성공적으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진태원이라는 소장학자의 도움으로. “자네는 학자야, 그것에게 말을 걸어보게.”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재출간(원래 이 책은 지난 1996년에도 국역된 바 있다)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이 책이 ‘읽을 만하게’ 다시 소개됐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의 유령이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함께,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돌아왔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 덕택에 우리는 이제야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반겨야 할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할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였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시기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에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호출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출을 “데리다가” 수행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면/받아야 한다면 그건 명확히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약 72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책들 중 아무 것이나 지금, 이 시기에, 매끄럽게 국역된다고 해서 (예상컨대 1994년작 『우정의 정치학』이라면 예외겠지만) 주목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데려왔다면, 한국에서는 마르크스가 데리다의 유령‘들’을 불러온 셈이라고나 할까.

왜 마르크스인가(혹은 왜 마르크스의 유령‘들’인가)? 무엇보다도 그건 데리다로 하여금 마르크스의 어떤 정신/유산을 불러오게 했던 바로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열 가지 재앙들’이라고 말한 대규모 실업, 무자격 시민들(홈리스, 망명객, 무국적자, 이민자 등)의 집단적 배제, 무자비한 경제전쟁, 자유시장의 무능력, 외채 누적, 군수산업과 군수무역, 핵무기의 확산, 종족/인종간 전쟁, 마피아 같은 환영국가의 권력 증대,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한계들이『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됐을 때보다 훨씬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열 가지 재앙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꼭 마르크스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를 단지 지나쳐버릴 수는 없으며,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기나긴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보는 있다. 복수(複數)로 표기된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 특정한 유령/정신(들)을 선별해야만 한다.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데리다가 이 유령‘들’을 떼어내야 한다고/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는(옮긴이의 생각과는 달리) 좀 불분명하지만, 이 유령‘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데리다가 5장에서 다루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2부의 ‘마르크스-슈티르너 논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1부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선별작업을 만끽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먼저 『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4장에서 주로 다뤄지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은 여러 종의 국역본이 존재하며 번역 상태도 양호하다.

그리고 5장에 도전할 때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1993) 국역본 2장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여담이지만, 발리바르는 현존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그 사유방식이 가장 데리다와 비슷하다. 그러니 데리다의 마르크스 애도 작업, 혹은 데리다 식의 마르크스 읽기의 이론적 효과를 만끽하고 싶은 분들은 발리바르를 같이 읽으시면 된다(이런 점에서 추천할 만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저서는 얼마 전 국역된 『대중들의 공포』이다).

마지막으로, 왜 데리다의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인가? 우리가 맨 처음 알게 된 데리다는 ‘문학비평가’(특히 ‘예일 마피아’의 숨은 대부)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의 데리다는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창기의 저작들, 그도 아니면 적어도 『다른 곶』(1991)부터 데리다는 충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데리다가 정치에 대한 사유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드러낸 것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데리다(혹은 데리다의 또 다른 유령)가 있으니 그건 바로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이다. 특히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공포와 전율』(1843)을 꼼꼼하고 읽고 있는 『죽음을 선사하기』(1999) 전후의 데리다가 그러한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만큼이나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역시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이런 데리다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과 더불어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에게 도착한 책 중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를 엿볼 수 있는 텍스트는 1997년작 『환대에 대하여』인데,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은 읽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유령이 하나가 아니듯이, 데리다의 유령 역시 하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말에 따라 선왕의 유령에게 말을 건 호레이쇼에게 마셀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존엄한 혼령인데, 우리가 너무 난폭하게 대한 것 아닐까?”(『햄릿』, 제1막 1장). 우리에게 그것은 누구/어떤 유령일까?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이에 대한 대답은 충분히 데리다를 읽지 않았던(그런데 그 누구가 데리다를 충분히 읽을 것인가) 우리가 우리 몫의 애도 작업을 충분히 수행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데리다를 따라서, 데리다의 유령‘들’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까지 얘기할 수 있을 때에 말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06.

P.S. '윤리학자' 데리다는 물론 레비나스를 읽는/읽은 데리다이다. 두 사람을 다룬 표준적인 책은 사이먼 크리칠리의 <해체의 윤리학: 데리다와 레비나스>(2판, 2000)이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은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데리다가 <죽음을 선사하기>에서 말을 건네고 있는 철학자는 체코의 얀 파토치카(1907-1977)이다. 지난 겨울 영역된 그의 책 몇 권을 구해놓고 번역을 주선해볼까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윤리학자 데리다의 유령과 함께 파토치카의 유령도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ade 2007-12-07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르크스의 유령들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100페이지도 못가서 포기했어요... 역시 내공부족은 어쩔수 없나봐요 ㅡㅜ

로쟈 2007-12-07 08:45   좋아요 0 | URL
제가 관심을 갖는 독자 유형이시네요.^^; (아주 많지는 않으실 거라고 보지만) 인문/이론서를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주는 책들(?)이, 혹은 서포터들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아르바이트'를 저도 가끔씩 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방책은 못되구요.--;

릴케 현상 2007-12-0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유형인데^^ 관심 좀 주세요. 퐁쥬 시가 좋길래 별 생각없이 '시네퐁쥬'를 읽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네요

로쟈 2007-12-07 11:48   좋아요 0 | URL
데리다도 자신의 분류를 따르자면 '신계몽주의자'가 될 텐데, 난해하기만 한 철학자로 치부되는 건 불운한 일입니다.--;
 

며칠전 '프란츠 파농 읽기'란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오늘이 그의 기일이라고 한다.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에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를 다루게 된 연유이다. 우연찮게도 엊그제 책의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타이밍을 잘 맞춘 듯하다. 파농은 개인의 행방으로서의 '존재의 탈식민화'도 역설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탈식민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고 당위이다.    

한국일보(오07. 12. 06) [오늘의 책<12월 6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태생의 흑인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 독립투쟁을 이끈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이 1961년 12월 6일 36세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 삶과 사상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민권 운동과 탈식민주의 운동, 흑인 운동의 길잡이였다.

파농, 하면 떠오르는 책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이다. 한국에서는 당초 1979년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사람'과 '자(者)'라는 단어 하나 차이지만 한층 선명한 제목으로, 번역됐었다. 서구 제국주의ㆍ식민주의가 제3세계에 가하는 야만적 폭력, 물리적 폭력은 물론 인간을 사물화시키는 경제적ㆍ문화적 폭력을 정신병리학자의 임상체험을 통해 고발하고 탈식민화를 위한 '정화'로서의 혁명적 폭력을 역설한 파농이즘이 담긴 이 책은 한국 젊은이들의 필독서가 됐다.

이 책에 장문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제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파농을 통해서였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식민지나 제3세계,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말들이 낡아빠진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 파농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2002년 프랑스어판 서문을 쓴 알리스 셰르키(파농과 함께 알제리 독립투쟁에 참여한 여성 정신분석학자)는 이렇게 묻고 답하고 있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지금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파농의 삶과 사상은 여전한 현재적 가치를 갖는다.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라 일컬어지는 시대를 넘어서, 지금처럼 경제의 세계화와 주체의 상실이 지배하는 시대에, 젊은 시절 파농이 외친 한 마디, 요컨대 그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끌어간 한 마디, '내 몸이여, 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라는 절규는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의 정신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언어와 출신지의 경계를 넘어서!"(하종오기자)

07. 12. 0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7-12-06 08:31   좋아요 0 | URL
전 올해 마음의 길잡이를 못 찾아 헤맬 때 파농을 다시 읽었어요. 난 알리스 셰르키의 서문은 오히려 사족이라고 봐요. 여전히 가슴 떨리는 건 파농, 그리고 사르트르죠.

로쟈 2007-12-06 12:32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 유감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