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구판절판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 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비파를 타고 싶어도 손이 곱았고, 노래하고 싶어도 열 때문에 목이 부어 있다. 그러나 얄팍한 늑골과 낱말이 끓어 올라, 파도처럼 바람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흐느낌 같기도 한, 호수의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맑디맑은 한기를 자극하여, 시간의 흐름까지도 얼어붙게 한다. 병풍 곁의 낡은 이불에 기어 들어가 있는 중년 남자의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이 된, 현재의 나다.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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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구판절판


"생각해보면 평범해진다는 것은 특별해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야. 나는 늘 생각을 해. 어떤 것이 평법함일까.평균 키를 가지는 것? 평균적인 얼굴을 가지는 것? 평균적인 행동을 하는 것? 평균적인 성격과 직업을 가지는 것? 하지만 평범함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 왜냐하면 애당초 평균적인 삶이란 게 없기 때문이야. 못났건 잘났건 사람들에겐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모양이 있는 거지. 그러니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친절히 굴고, 평범하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아주 난해한 일이야. 게다가 그런 삶에는 사랑도, 증오도, 배반도, 상처도 그리고 추억도 없지.무미건조하고 무색무취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이 좋아. 나는 너무 무거운 것들은 못 견디거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역시 까다로운 작업이지. 책에 나와 있지도 않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거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또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삶을 살려고 하니까. 내가 원하는 평범함이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삶을 가지는 것이지. 나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삶이 좋아.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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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구판절판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건물의 특질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소유하고 있지 않을까? 끌로 불 규직하게 깍은 돌에 연한 회반죽을 발라 쌓은 담을 두른 오래된 농장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라면, 손으로 장식한 타일에 비치는 촛불 빛의 장난을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닥에서 천장까지 쌓여 달콤한 먼지 냄새를 풍기는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바닥에 누워 복잡한 투르크멘 바닥깔개의 매듭이 다린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각기 인내와 안정에 관해, 부드러움과 달콤함에 관해, 지성과 세속성에 관해, 회의와 신뢰에 관해 뭔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열광하는 사람은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대상에 구현된 가치를 자신의 온 삶에 녹여내려고 노력할 것 같다.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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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품절


우연(억지로 꾸며 낸 것이라 해도),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와 뜻밖에 마추지는 것, 살구의 맛, 한참 찾았던 책을 발견하는 것, 1년 중 이맘때의 황혼녘, 굴뚝을 타고 스며드는 바람 소리, 잠들기 전의 지극한 고요와 어둠,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예상치 못한 행복의 순간들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행복한 순간들도 있다. 별 일이 없는, 특별한 생각이 없는, 아무런 유쾌한 감정도 들지 않는. 원인 따위에는 아랑곳 않는 느낌. 조용히, 느닷없이, 압도해오는 느낌.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는 이런 잔인한 변화에 화가 치민다.나이가 들수록 변화가 일어나는 속도는 빨라진다. 친구들이 사라지고, 풍경이 어질러진다. 친구들이 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27쪽

-먼지를 털어내다 책에서 떨어진 종이 조각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오늘 밤 내 침대 옆에 있는 책
-내가 좋아하는 도시
-멈춰진 시간이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
-떠날 수 없는 장소를 다룬 작품
-도달할 수 없는 장소를 다룬 작품
-순전히 거기에 깃든 일화 때문에 갖고 싶은 책들로 꾸며보는 '감상적인 도서관'-32쪽

내게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북>에 대해 처음 말해준 사람은 실비아 오캄포였다. " 마음에 들 거야. 목록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까."-227쪽

...불면증을 주제로 글을 엮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얼핏 몇 가지가 떠오른다.
-"그는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불면증환자들이 이쪽저쪽, 두 쪽뿐인 자세를 시도해본 후 셋째를 열망하게 되는 그 참담한 밤에조차." 나보코프<닌>......-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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