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억지로 꾸며 낸 것이라 해도),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와 뜻밖에 마추지는 것, 살구의 맛, 한참 찾았던 책을 발견하는 것, 1년 중 이맘때의 황혼녘, 굴뚝을 타고 스며드는 바람 소리, 잠들기 전의 지극한 고요와 어둠,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예상치 못한 행복의 순간들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행복한 순간들도 있다. 별 일이 없는, 특별한 생각이 없는, 아무런 유쾌한 감정도 들지 않는. 원인 따위에는 아랑곳 않는 느낌. 조용히, 느닷없이, 압도해오는 느낌.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는 이런 잔인한 변화에 화가 치민다.나이가 들수록 변화가 일어나는 속도는 빨라진다. 친구들이 사라지고, 풍경이 어질러진다. 친구들이 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