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서평을 옮겨오기 위해서 교수신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챙기게 된 기사는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 대한 '확대서평'이다(확대서평? 아마도 자세한 서평이란 취지인 듯하다). 필자는 지난달에 '노무현과 탈정치 리더십'(http://blog.aladin.co.kr/mramor/1751979)이란 페이퍼를 올리면서 알게 된 안병진 교수다. 그는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무페의 이론적 입장을 정리하고 지난 대선 결과와 연관짓고 있다. 초점이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에만 너무 맞춰진 게 아닌가 싶지만(게다가 국역본에 대한 서평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31)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무페의 책 서평 청탁 전화를 받으면서 번역의 적절한 타이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993년에 출간된 이 철학서적은 바로 2007년 한국의 선거 과정 및 더 나아가서는 참여정부 5년 실패의 핵심을 마치 예언하듯이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ABR’(Anything But Roh)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 양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2007년의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그가 상고출신이거나 자수성가 스타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여의도 바깥의 아웃사이더로서 한나라당을 접수해, 이후 열린우리당 혹은 386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특권층’과 선명한 대립각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농축된 ‘욕쟁이 할머니’ 등의 일련의 정치광고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눈물’ 광고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1993년 출간된 책이 2007년을 예언하다
반면 이른바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동영 후보의 ‘가족 행복 시대’나 ‘개성 동영’은 대립각이 불분명하고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는 ‘합의주의적 정치’ 방식의 구현이었다. 그는 이후 뒤늦게 전투적인 리버럴인 문국현 후보의 ‘진짜 경제 대 가짜 경제’ 프레임을 차용했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캠페인에 그치고 말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동영 후보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합의주의적 정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간 5년간 노무현 정부의 부분적 특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필자가 경악했던 것은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천진난만한 기대와 발상이었다. 이는 이후 합의주의적 관점이 강한 울리히 벡에 대한 대통령의 열광, 합의주의 기대의 절정으로서 대연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그 강요된 합의주의적 정치의 틈새를 뚫고 홍준표 의원의 부동산 정책 같은 보수적 포퓰리즘이 득세한 바 있다. 

바로 위의 정치지형이 무페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의식이다. 무페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의 정치를 꿈꾸었던 노 대통령이나 정책에서 정치의 적출 수술을 꿈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비웃기나 하듯 정치적인 것에서 적대성은 영원히 제거가 불가능한 존재조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것은 놀랍게도 파시즘의 이론가 슈미트의 인생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이를 역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활력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자유주의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는 활력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급진 민주주의자인 그의 자유주의 틀에 대한  존중이 많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가 때로는 모욕적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는 한국의 기이한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 학술회의에서 참여정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가 한 정부인사가 보수적 집단으로 매도라도 당한 듯이 정색을 하고 항의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무페조차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유주의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는 혁신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 급진적인 스펙트럼의 지젝 같은 학자는 무페의 시도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결국 포섭된다는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의 스펙트럼 넓히기 시도는 자유주의에 대한 제한된 상상력에 갇혀있는 서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나 좌파 정치진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페가 하버마스나 롤즈 등의 합의주의적 정치관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대화와 타협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집단적 정체성간의 투쟁과, 사실은 냉정한 배제에 기초한 ‘구성된 합의’를 마치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로 포장하려는 관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리주의적 탈정치관의 지배는 의도하지 않는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점이 무페의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 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무페는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흔한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들고 있다.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비판적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은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무페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이론들이 대중적 욕망에 근거한 파시즘의 현상을 단지 병리적인 예외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페의 이론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 한국에서 그 대안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한다. 즉 미국의 에치오니의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운동은 모두의 합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특정한 공동선의 관념을 주창한다.

하지만 무페가 보기에 이는 경합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탈정치적 관점의 변종들이다. 반대로 그는 선험적 공동선의 존재 대신에 상호 헤게모니의 충돌 속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에 의해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루고, 이는 곧 부단히 도전받아 새로운 갈등적 합의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공동선이란 부단히 추구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에 불과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하는 진보적 공화주의 철학의 공공선 개념과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호노한 등의 현대적 공화주의 이론은 공동체주의나 전통적인 시민공화주의와 달리 공동선의 선험적 규정이 아닌 민주적 구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호노한은 무페의 구성적 외부의 두려움에 대항하는 시민 공동체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호 의존된 시민 간의 동료관계 같은 보다 포괄적 규정으로 한 발 더 이론적으로 진전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무페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서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혁신을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자유주의 정치진영이 선거에서 참패한 한국의 맥락은 더 큰 적실성을 가진다. 현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역설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혁신의 장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탈정치적인 CEO 정치론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는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이론적 고민의 과제를 던져준다. 무페의 책은 그 성찰의 여정으로의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안병진/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08.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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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1-02 16:20   좋아요 0 | URL
아래 홍기빈 박사의 칼럼과 더불어 새 해를 맞는 포스트로써 적절해보입니다. 어떤 방향타처럼 말입니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로쟈님께도 2008년이 좋은 한 해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로쟈 2008-01-02 17:50   좋아요 0 | URL
네, 섬나무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krinein 2008-01-03 09:52   좋아요 0 | URL
글 가져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3 11:22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한동안 뜸했던 영화소식이다. 연말에 개봉된 영화들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나는 판타지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외적인 영화라면 리들리 스콧의 신작 <아메리칸 갱스터>가 있다. 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 감독이지만 '갱스터 무비'는 그가 처음 손대는 것이며 그만의 독특한 갱스터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평을 읽은 바 있다. <아메리칸 갱스터>를 계기로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들을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대해서는 평으로만 접했는데, 이것도 '미드'로 수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겨레(07. 12. 31) 갱스터, 바로 당신의 두 얼굴

제목부터 과감한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극히 미국적인 갱의 초상을 그려낸다. 흑인 갱단 보스 프랭크 루카스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 마인드’로 생각하는 갱이다. 단지 이익을 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혁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가히 ‘미국의 갱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몽상가의 꿈을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어낸 벅시 같은 갱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갱단의 세계야말로 가장 비열하면서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관철되는 곳일 것이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걸작 갱스터 영화들이 갱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내적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낸 이유도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갱스터의 캐릭터는 우리와는 다른 악인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르로 완벽하게 정착한 갱스터 영화는 현실을 예리하게 담아내는 거울로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이 된 <대부>(1972)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삼형제의 막내였기에, 자신이 보스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큰형이 죽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마이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대부’가 된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 마이클은 그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누구나 마이클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이클이 조직의 보스가 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냉혈한이 된다. 그것이 마치 그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마이클은 완벽하게 탈바꿈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마이클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거짓과 폭력 그리고 음모를 이용한다. 거기에는 한 치의 후회나 망설임도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원하는 대부가 되기 위해서, 마이클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그것은 바로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방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반면 <좋은 친구들>(1990)의 헨리 힐은 마피아 동네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라 자연스럽게 갱단 일원이 된다. 헨리에게 가장 성공적인 미래는 마피아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트럭 화물을 훔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악행을 일삼던 헨리는 마침내 마피아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였던 헨리가 간부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헨리는 그저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남의 물건과 돈을 훔쳐 흥청망청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향락을 즐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위대한 갱스터가 되기에는, 헨리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에프비아이에게 잡힌 헨리는, 조직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헨리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헨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결국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스타를 꿈꾸지만, 대부분의 종착점은 소박한 시골역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갱은, 영화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소프라노는 뉴저지 북부를 관장하는 조그만 조직의 보스다. 그의 고민은 가정과 조직, 즉 두 개의 패밀리다. ‘급격한 클라이맥스나 사건 없이, 보편적인 삶의 리듬과 맞아 떨어진다’는 분석처럼, <소프라노스>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마피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해야 하고,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고민해야 하고, 한편으론 애인도 돌봐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에 끼어들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여전히 도둑질이나 도박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과 가족 때문에 고민을 하는 여느 가장과 마찬가지로 토니 소프라노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 상담까지 받는 소프라노는 그저 친근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때로 다정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그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같은 일상에 ‘범죄’라는 사업이 하나 더 끼어들어 있는 것뿐이다.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태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게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랭크 루카스 역시 가족을 위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원산지에서 직접 마약을 입수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순도는 두 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제품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그것만 본다면 프랭크는 탁월한 사업가다. 미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혁신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그리고 토니 소프라노의 고민이 두 개의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프랭크의 고민은 어떻게 시장을 장악하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였다. 프랭크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갱스터나 보통 사람들이나 목적은 하나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성공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하나인 것이다. 갱스터 영화를 볼 때, 폭력과 범죄의 향연 속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08. 01. 02.

P.S. 역시나 '가족'과 '사업'을 다룬 '코리안 갱스터'로 <우아한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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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심각한 갱스터 영화관련 페이퍼를 보면서 저는 에널라이즈 댓과 디스라는 꽤 코믹스럽게 만든 갱스터 영화 생각하면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8-01-02 14:31   좋아요 0 | URL
'가족'만 아니면 얼마든지 코믹해질 수 있는 장르죠.^^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도입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아마도 '아우라(Aura)'가 아닌가 싶다. 이 개념은 2절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원작으로서의 '진품성'과 관련하여 처음 제시되는데,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그러니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논제 자체가 이 아우라와 상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니 아우라는 이 논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라란 개념이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3절에 가서인데, 여기서는 그 한 문단을 읽어보려고 한다(이 문제적 텍스트를 완독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건 이 대목이 오래 전에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궁금해하던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참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분명하게 해두고 싶어서이다. 읽을 부분은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108-110쪽이며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는 203-4쪽이다. 거기에 덧붙여 강유원 등이 옮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http://www.armarius.net/ 에서 참조할 수 있다)도 필요에 따라 인용할 것이다(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와 있으나 모두를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건 번거롭기에 이 세 종에 국한하기로 한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두번째 문단이다.

"(...)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가 있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108-9쪽)

여기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반성완 역에서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강유원 역에서는 "먼 것 -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가까이 있다 해도 - 의 일회적 현상"으로 옮겨졌다. 내겐 반성완 역의 정의가 더 친숙하지만 정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영역본에서는 "the unique apparition of a distance, however near it may be'로 옮겨졌고, 독어 원문은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다. 우리말 '현상(나타남)'에 상응하는 영역본의 단어로 'apparition'이 쓰인 게 눈에 띄는데, '환영'이나 '(뜻밖의) 출현'을 뜻하는 단어다.

원래 '아우라'는 그리스어로 '공기(air)'나 '숨결(breath)'을 뜻한다고 하고 반성완은 이에 따라 처음에 원어를 병기한 이후에는 '분위기'라고 옮겼지만 '아우라'란 원어 자체가 이미 상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아우라'로 고쳐서 인용하겠다.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은 이어서 벤야민이 들고 있는 아우라의 예이다(처음 읽을 때부터 좀 뜻밖의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에 대해서 나는 좀더 드라마틱한 예를 기대했던 것일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반성완)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어느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강유원)

비교해서 읽어보면 세 번역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먼저 반성완본은 직역이라기보다는 역자가 적극적으로 의역하면서 윤색한 경우이다. 일단 이 대목만 한정하면 가장 정확한 번역은 강유원본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에서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 모두로 돼 있지만 일단 액면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한가?). 여름날 오후면 그림자도 길지 않을 때인데 먼 지평선의 산맥의 그림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에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본 모두 강유원본과 마찬가지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로만 돼 있다.

그리고 최성만본에서는 '따라갈 때'라고만 돼 있는데, 의미상 모호한, 불충분한 번역이다. 똑같이 독어본을 번역한 반성완본과 강유원본이 보여주듯이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바라보는 것'이라고 해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시선'이 번역에 포함돼 있다(영역으로는 "To follow with the eye"로 돼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강유원본에서처럼 '바라보는 것=숨쉬는 것"이 등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그렇게 돼 있다). '따라갈 때'나 '바라볼 때'란 표현보다 직접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묘사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여 화제를 다시 대중과 기술복제 문제로 전환하는데, 사실 나는 '이러한 묘사의 예'에서 무엇이 쉽게 이해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보다 정확하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로선 벤야민이 들고 있는 예가 어떤 경험적 '직접성'과 관련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면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최성만)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 마지 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반성완)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현대 대중의 충분히 열정적인 갈망이고, 또한 그것의 복제의 수용을 통해 모든 소재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현대 대중의 갈망이다."(강유원)

이 대목의 번역은 세 종 모두 대동소이하다. 다만 문체상으로 최성만본과 강유원본이 보다 직역에 가깝고 반성완본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어서 그러한 대중의 성향/갈망을 부연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다시금 번역본들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像) 속에, 아니 모사(模寫) 속에, 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영화가 제공해주는 복제영상들은 상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최성만)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날로 켜져 가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 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반성완)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으로, 오히려 모사로, 복제로 소유하려는 욕구는 날마다 거부하기 어렵게 일어난다. 그리고 화보가 [많이]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영화]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강유원)

가장 큰 차이는 '자기 옆에 가까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성만/반성완본에서는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모사나 복제를 통해 전유/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욕망이라고 옮기고 있는 반면에 강유원본은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 등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라고 옮겼다. 어느 쪽이 맞는 번역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후자 아닌가. 그림/모사/복제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뿐일 리는 없는 것이니까(바로 곁에 있다면 왜 아이돌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를 굳이 벽에다 붙여놓겠는가?!). 이 점은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대조해봐도 확인할 수 있다(비록 텍스트의 제2판까지 수록해놓고 있어서 유익하긴 하지만 가장 최근의 번역에서 이런 오류들이 나오는 것은 유감스럽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는 독어의 'Bild'를 어떻게 옮기느냐인데, 최성만본은 '상(像)'이라고 옮겼고, 반성완/강유원본은 '그림'이라고 옮겼다(참고로, 영역본은 'image'라고 옮기고 'Bild'를 병기했다). 'Bild'는 물론 사전적으로 '형상'이란 뜻을 갖기 때문에 '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우리말 쓰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적합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상'은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여기서는 대중들의 소유 대상이기도 하므로('전유'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Bild'가 '그림'보다 광의의 뜻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런 정도로 옮겨지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는 대동소이하다. 이 절의 결론은 이렇게 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낼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가 나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현상이 직관(Anschauung, 표상)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맞추고(정향하고) 대중이 현실에 맞추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최성만, 109-10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 후반부는 반성완본과 일치한다. 둘다 'ein Vorgang'(영어로는 'process')을 '발전과정'이라고 옮긴 점이 특이한데 내가 참고한 다른 모든 번역본들에서는 그냥 '과정' 정도로만 번역하고 있다. 이 문단에 대한 검토는 몇 해 전에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참조하시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각과 직관의 문제'(http://blog.aladin.co.kr/mramor/706805)라고 좀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페이퍼이다...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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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1-0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아이돌스타는 소피 마르소이군요 ^^ 그나저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아우라에 대해...." 이 문구로 시작하는 직접적인 3줄 남짓한 대목을 적어둔 노트가 보이지 않네요. ㅠㅠ 지금 찾아 보니 '산책자', 나 '인식론에 관해, 진보 이론'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고, 그 장들이 아닌가??ㅠㅠ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로쟈 2008-01-02 23:04   좋아요 0 | URL
브로마이드 스타의 원조이기도 하죠.^^ 덧붙이자면, 영화 <구름 저편에>에는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에 대한 오마주 장면도 들어가 있습니다.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해서 겸사겸사 엮어넣었습니다...

어부 2008-0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첫번째 인용문에 대한 질문인데요. '숨을 쉰다'의 주체가 번역문마다 조금씩 다른것 같습니다. 반성완본에선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의미인데 최성만본에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아우라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체험적 의미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부분에 있어 반성완본은 부적절한 번역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유원본은 숨을 쉰다는 술어에 대한 주어가 생략되어서 오문까지는 아니지만 문장 자체가 모호하게 읽히구요. 아우라에 대한 첫번째 사례의 핵심적 분위기를 옮기는데는 최성만본이 오히려 더 정확히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가요?

로쟈 2008-01-03 23:20   좋아요 0 | URL
강유원본이나 영어본, 러시아어본을 보건대, "-바라본다는 것은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이다, 정도입니다." 모호하진 않구요, 우리가 -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아우아를 숨쉬는 것이다, 가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해가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책읽는 습관까지 바뀌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 어느 한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보다 좋은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정상(혹은 필요상) 여러 권의 책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최근의 발견이라 할 만한 책이지만('한비자의 발견'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어서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서도 몇 페이지, 그리고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서도 몇 페이지를 읽는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무페의 책은 어제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기사 '최장집 교수의 대선 후 진단'("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를 읽은 탓에 다시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 어제 귀가길에 최장집 교수 등의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 2007) 를 찾았지만 이젠 어지간한 서점들에서는 구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늘에야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등과 함께 주문했다.

 

 

 


나는 시간착오적인 기대이지만, <어떤 민주주의인가> 같은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책들과 <한비자, 권력의 기술> 같은 책을 5년전쯤에 노대통령이 미리 숙독할 수 있었더라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마저 든다(나중에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개혁이란 건 결국 실패한 것 아닌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 정부의 '정실주의 인사'니 '코드 인사'니 하는 걸 한비자라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뛰어난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애정으로 대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다른 사람이 애정을 베풀어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애정으로써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자는 위태로우며,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에 기대는 자는 안전하다."(<한비자, 권력의 기술>, 160쪽에서 재인용)

저자가 이 대목에 대해서 이런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의 충성을 기대하는 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충성을 다 바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지겟작대기나 똥장군도 왕 노릇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충성스러운 신화와 관료조직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리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더는 전혀 충성스럽지 않은 이들을 데리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크게 부족한 것은 한비자의 이런 냉철한 시각이다. 지도자가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들어 쓸 때는 최선의 인재를 발탁할 수 없다. 신하 또는 부하의 충성을 기대하지 않을 때, 리더는 되레 사람을 능력 본위로 바라보고, 능력 본위의 인사를 할 수 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사람을 등용하는 인사는 저잣거리의 필부도 할 수 있는 인사다."(160-1쪽)

 

 

 

 

저자가 한비자와 묵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만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건, 그가 이끄는 조직을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이나 타닥타닥 타는 작은 모닥불 수준으로 만드는 일이다. 광야는 바위와 흙과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티끌과 나무와 풀과 숲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광야인 것이며, 바다는 모든 개울과 내와 강의 흙탕물과 폭우가 씻어 온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인 것이다."(164-5쪽) 정치인 노무현은 결국 노사모의 탁월한 리더였을 뿐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평가 인터뷰에 이어서 실린 시사IN의 정치면 기사는 흥미롭게도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선을 주된 화제로 삼은 것인데, 이에 대한 기자의 분석은 이렇다.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은 전임 대통령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 라이벌로 통하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사 스타일 면에서도 정반대였다. YS는 마음에 둔 인사라도 언론에 사전 노출되면 취소해버리는 '깜짝쇼'를 즐겼다.(...) 반면 DJ는 언론의 하마평을 중시했다. 측근이나 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가급적 언론에 거명되게 하려고 애썼고, 이 때문에 '언론 검증'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두 사람에 비하면 시스템주의자였다.(...) '국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여론의 천거를 받은 점도 노무현식 인사의 특징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스타일상 양김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좀더 많다. 자기 판단을 믿으며, 한번 맡기면 주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당선자는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 역사적 평가 같은 가치 기준보다는 실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친다.(...) 일로 평가하고 일을 잘하면 다음 일을 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당선자 주변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평생을 바친 가신도, 정치적 동지도 없다. 서로 쓰고 쓰이는, 그야말로 '용인(用人)' 관계다." 그리고 이런 점이 "새로운 정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한 한나라당 의원은 지적했다 한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이라면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참모가 거의 없"는 상황에다가 김유찬, 김경준 두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전력이 있어서 이 당선자에게 '배신 콤플렉스'까지 있다는 점. 경험적으로 이 'CEO형 정치인'은 "애사심과 충성심을 논하지 말라"는 한비자식의 인사관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에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용인술 혹은 인사 스타일의 효과이다(고려대 인맥이 대거 움직일 거라는 소문은 나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측근정치와 가신정치로부터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다시 <한비자, 권력의 기술>의 저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게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떤 놈이 진짜 충신인지 간신인지 모르겠는 상황, 누가 이중 첩자인지 어떤 연놈이 산업스파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체의 리더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비자의 답은 간명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기대하지 마라. 대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것은 신하들이 또는 부하들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다."(159-60쪽)

   

이명박 리더십이 과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이 될 것인지는 다시 5년후에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자폐적 정실주의'(강준만)의 그늘에서는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당선자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사항을 피력하면서 냉정하게 지난 대선에 대한 평가 두 가지를 인용한다.

먼저 최장집 교수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공저한 박상훈 박사: "우리 유권자들,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불러들인 것은 노무현 정부다. 민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나쁜 조합을 만들고 정당화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 결과가 큰 정치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추구한 것이 '신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층 배제적인, 중산층 위주의 민주주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보수적 민주파의 형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민주파 내부의 기득권층이다. 보통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특별히 혜택받은 것이 없는데 왜 정권 교체에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시사IN 인터뷰)

그리고 한겨레21에 실린 홍기빈 박사의 칼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니 희망찬 새해를 시작해봐야겠다...

한겨레21(07. 12. 27)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NEVER SAY DIE. 죽는 소리 마라. 당신 12월19일 저녁에 술 마셨는가? 국민들 원망했는가? 대한민국이 실망스러운가? 한국의 운명이 어찌될꼬 하면서 <중경삼림>의 진청우(금성무)처럼 애상에 젖었는가? 혹시, 이민갈까 하는 소리까지 했는가? 

온갖 감정적, 논리적 호르몬의 막가는 분출을 잠깐 누르고 돌아보자. 5년 전에는 ‘노란 바람’이 있었다. 10년 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있었고, 이회창씨가 김영삼 허수아비를 불사르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민자당 합당의 사생아로 나온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온 국민이 달려들어 물과 불에 목숨을 잃어가며 만들어준 절체절명의 ‘어시스트’를 김씨 성 가진 두 양반이 죽을 쑤어 개를 준 바 있다. 그래,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버텼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007이든 747이든 대통령이 된들 별일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은 좀 쓸데없이 간장만 혹사하는 게 아닐까.



나태와 안일을 털어버릴 때
아니다.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50% 더하기 13% 정도가 한목소리가 되어 “꺼져라, 진보 개혁!” 하고 외친 셈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압도적인 숫자가 대선에 나온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두렵다. ‘우리’는 이제 왕따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참에 한 큐에 다 쓸어버리자고 막갈 기세다. 이 정도라면 지난 20년간의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에서도 보지 못한 초유의 사태다. 이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나는 또 어디로 갈까. 그러니 어찌 취하지 아니하리오….

근데 잠깐 물어보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에 대연정 운운할 때 당신은 무얼 했는가? 김대중 정권이 IMF 핑계로 사방을 마구 ‘잘라’댈 때 얼마나 몸으로 버텼는가? 김영삼 정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한다고 나댈 때는 뭐라고 할 생각이나마 했던가? 우리는 그저 코스닥에 열광했다가 부동산에 열중했다가 중국 펀드로 몰려갔다가 우리 애들 특목고 못 들어갈까봐 핏대를 올리며 살지 않았나? 그러면서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시민운동을 정권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혼자 고고한 듯 떠들지 않았는가? 그런 ‘호세월’이 얼마나 가기를 기대했던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나?

그래서 말인데, 정말 잘됐다. 이제 우리는 지난 십 몇 년간의 온갖 나태와 관성과 안일을 털어버릴 준비를 할 기회를 만났다. 흙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잊어버릴 뻔한 소주병 쑤시는 법을 기억해내고, 보도블록을 어떻게 쓰다듬어줘야 해체되는지도 다시 떠올릴 때가 되었다. 진짜 상대를 만났다.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독재자의 딸’ 어쩌고 ‘차떼기’가 어쩌고를 안주 삼아서 또 5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다. 정동영이 되었으면 ‘좌파 신자유주의’를 논하며 또 시대의 아이러니를 핑계 삼아 담배와 술만 작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은 돈을 알고 비즈니스를 알고 5년·10년짜리 계획을 세울 줄 알며, 만인을 ‘성공시대’로 몰아칠 줄 아는 분이다. ‘최선진 금융기법’도 알고 한반도를 쭉 째서 물을 흘릴 계획도 세우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본 축적과 경제성장률로 연결되는지를 또 아는 분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 꼭 맞는 ‘한국형 신자유주의’ 파라다이스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실행력을 가진 분으로 보인다.

5년 동안 우리는 무척 바쁠 것
나태와 안일에 젖은 우리 시민들을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당신, 지난 몇 년 혹은 몇십 년간의 우리의 늘어져 있던 삶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인 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되짚어 나를 너를 우리 전체를 함께 새로 젊게 만들 에너지를 아직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서울 게 무언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자. 이건 최고의 기회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만세. ‘삶의 허무와 권태’ 따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최소한 5년간 우리는 살아남으랴 개개랴 어쩌면 또 한편으로 싸우랴 무척 바쁠 테니까.(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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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x3 2008-01-01 23: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곳을 즐겨찾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 글 덕에 한동안 회의적이고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2 09:5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로이73 2009-06-18 10: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 가을 '셰익스피어 저작 논쟁'에 관한 페이퍼 "썼느냐 안 썼느냐, 그것이 문제로다"(http://blog.aladin.co.kr/mramor/1578491)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딱 이 주제와 관련된 책이 출간됐다. 버지니아 펠로스의 <셰익스피어는 없다>(눈과마음, 2008)가 그것인데, 이 책이 올해 구입한 마지막 책의 한권이면서 동시에 첫 2008년의 책이다(출간일이 2008년 1월 30일로 돼 있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자연스레 2008년으로 건너뛰게 되었다.

아직 아무런 소개기사도 떠 있지 않아서 출판사의 소개글을 참고하면,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문호이자 천재적인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존재 여부와 그가 남긴 작품들의 진위 여부를 다룬 책이다." 저자인 버지니아 펠로스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둘러싼 비밀들에 매료되어 연구하다가 그가 '셰익스피어'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책은 그 탐색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 원제는 '셰익스피어 코드'이다. 소개의 글을 마저 옮겨놓는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영국의 유명 연극배우ㆍ연출가 287명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의 진짜 원작자가 셰익스피어 본인이 아니라는 내용의 ‘합리적 의심 선언’을 발표했다고 영국 BBC 방송이 보도했다. 이 선언문에는 연극배우 데렉 자코비 경, 마크 릴랜스(런던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 전 예술 감독) 등 영국의 대표적인 배우들과 연출가들이 서명했다. 또한 이들은 과거에 같은 의문을 제기했던 마크 트웨인과 찰리 채플린 등 유명 인사 20명의 이름도 선언문에 포함했다.  

 

이들은 16세기 영국의 지방 도시에서, 게다가 문맹 부모 밑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궁중 생활과 이탈리아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한 점 등을 의심의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원고료를 받은 기록이 전혀 없고, 유서에 작품 언급이 없다는 점 또한 꼽고 있다. 셰익스피어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론자들은 희곡 작가였던 에드워드 드 비어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등,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 진짜 원작자라고 주장한다.  

 

이 책, <셰익스피어는 없다>에서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셰익스피어 역할을 했을 법한 인물인 가난한 연극배우 ‘윌 샥스퍼’의 삶에 대한 흔적과 베이컨과의 관계, 베이컨이 왜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에 숨어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의 출생 비밀과 연계시켜 설명하며, 실제 원작자인 베이컨의 재산이 줄어들수록 윌 샥스퍼의 재산이 타당한 이유 없이 급속도로 늘어갔던 점 등, 기존의 어느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근대 철학의 선각자이자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세계 문학사에 가장 위대한 유산을 남긴 셰익스피어. 각각 사상과 문학에서 천재로 군림해온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들 개인사의 질곡들이 상당 부분 부정확하거나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들의 전기 작가들을 곤혹스럽게 한 부분인 동시에 이 책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베이컨의 출생과 죽음에 얽힌 비밀은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인 반면,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관여된 일이니 당연하다) 셰익스피어의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황당할 정도로 정보 자체가 부재하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스트랫포드는 인구가 적은 소촌임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작가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의 고향 마을에서조차 그의 생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출생과 그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작가인 버지니아 펠로우 이전에 셰익스피어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을 갖고 연구했던 오웬과 그가 이용한 ‘사이퍼 휠(Cyper Wheel)’을 통해 밝혀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진위 여부를 연구하는 이 매혹적인 미스터리에 헌신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 촉망받는 젊은 외과 의사였던 오빌 오웬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숨겨진 코드를 해독하기 위한 암호 해독기, ‘사이퍼 휠’을 발명하여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원작자가 말하고자 했던 비밀을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 독특한 장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웬 이후, 역시 장시간 이 문제를 연구해온 이 책의 저자는 오웬의 사이퍼 힐을 직접 입수하여 연구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녀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치열한 고민과 연구 끝에 <셰익스피어는 없다>를 집필하였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다!

베이컨은 표면적으로 1561년에 니콜라스 베이컨과 앤 베이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조작된 사실이며, 셰익스피어의 암호에 대한 비밀이 시작되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암호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베이컨은 1561년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서 태어난 뒤 당시 대법관을 맡고 있던 니콜라스 베이컨의 집으로 옮겨졌다. 즉, 프랜시스 베이컨은 당시 영국을 통치하던 처녀 여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것이다. 이제 음모론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며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와 문예부흥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영국민의 숭배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여왕,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베이컨은 궁정에서 유독 자신을 관심 있게 대하는 여왕의 눈길을 느낀다. 그런데 여왕과 그녀의 총신 레스터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베이컨뿐이 아니었다. 여왕과 레스터 백작의 차남이자 베이컨의 동생인 에섹스 경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친형제인 베이컨과 에섹스, 그리고 베이컨 부부의 실제 아들인 앤서니 베이컨, 이 세 사람은 정통 사가(史家)에서 배제된 슬프고도 은밀한 역사의 한 장을 이 책 속에서 엮어간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함께 읽는다!

국내에서도 셰익스피어는 잘 알려져 있고, ‘귀납법’ 하면 절로 따라오는 베이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유명세와는 달리 좀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것이다. 의외로 제대로 된 번역서가 부족하다는 이유에다 장르가 희곡이라는 영향도 있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을 모른다고 해서 불편할 것은 없지만, 안다면 일상에서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이들의 이름이나 작품으로 지적이고 흥미로운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읽기 힘들고 건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은 희곡이나 철학서를 읽자니 부담스럽다면 이 책이 안성맞춤이다.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방식과 정보를 위주로 전달하는 이 책은 쉽고도 흥미롭게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를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반대로 접근하는 셰익스피어를 통해 베이컨이라는 위대한 사상가의 숨겨진 삶과 엘리자베스 치하 영국사의 일면까지 보여주는 정보와 지식이 책 속에 맛깔스럽게 담겨 있다. 


07. 12. 31.

 

P.S. '셰익스피어 코드'란 제목의 영화도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nbA9tkWE2wM). TV 시리즈물의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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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 두 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6 22:15 
    셰익스피어 관련서 두 권이 눈길을 끈다. 이젠 '셰익스피어 산업'도 성장 동력이 떨어질 만한데, 계속 나오는 걸 보면 거의 '화수분' 수준이 아닌가 싶다. 여유가 된다면 몇 권을 모아서 읽어봐도 좋겠다. 연합뉴스(09. 05. 04) 40대 하숙생이었던 셰익스피어의 모습  1612년 5월11일 월요일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 웨스터민스터 소재 소액청구재판소에 계류 중인 한 소송기록에 서명을 남겼다.
 
 
깐따삐야 2007-12-31 22:55   좋아요 0 | URL
저희 지도교수님이 셰익스피어 전공하셨는데 새해선물로 이 책을 드리면 정말 깜딱선물이 되겠는걸요. ㅋㅋㅋㅋ
로쟈님! 새해에도 좋은 글들 많이 올려주시고 가끔씩 열정적인 자작시도 보여주세요.
저도 성실한 알라디너가 되겠사와요.^^;

로쟈 2007-12-31 23:35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 전공자라면 싫어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열정적인 자작시'라고 하시니까 열쩍은데요.^^; 내년엔 깐따삐야님의 활약을 기대해봐야겠습니다.^^

다락방 2007-12-31 23:34   좋아요 0 | URL
앗, 로쟈님.
정말 잘 읽었어요.
별찜도 하고 보관함에도 넣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셔요!
:)

로쟈 2007-12-31 23:35   좋아요 0 | URL
저야 옮겨놓았을 뿐입니다.^^

qualia 2007-12-31 23:43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사실을 현대의 최첨단 유전자 검사법 혹은 고고학적 DNA 검사법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십만년 전에서 4만~1만년 전까지 생존했던 맘모스(mammoth, 매머드)까지 다시 복제해서 되살려 낼 수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베이컨이 진짜 셰익스피어였는지 증명하는 일은 영국 정부와 영국 과학계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로쟈 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07-12-31 23:35)

로쟈 2008-01-01 00:1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나 베이컨이나 모두 영국인이니 영국으로선 손해볼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리고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는 건 셰익스피어가 쓴 걸로 알려진 작품들의 실제 저자가 베이컨이란 뜻입니다.^^

qualia 2008-01-01 00:09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군요^^ 제가 과학적으로 오독했군요. 셰익스피어는 그럼 실존 인물이었던 모양이죠?

로쟈 2008-01-01 00:12   좋아요 0 | URL
물론이죠!..

qualia 2008-01-01 00:40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프랜시스 베이컨이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레스터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인가요? 저는 그 설이 역사적/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유전자 검사법으로 증명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가 봅니다.^^ 이 생각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무지가 겹쳐 위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드렸던 것이군요. 잘못을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1 00:43   좋아요 0 | URL
네, 그건 '과학적' 검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yoonakim 2008-01-01 10:24   좋아요 0 | URL
친애하는 로쟈님의 독서량은 익히 알지만 늘 족탈불급임을 확인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부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올 한해 평안하시고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원만하게 그리고 원하는 시간안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로쟈 2008-01-01 10:56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게 다 '빈곤한' 독서량을 카바하기 위한 방책인 걸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언제 한번 '면담'이라도 가져보도록 하지요.^^

순오기 2008-01-01 17:27   좋아요 0 | URL
대단히 흥미로운 기사군요, 더불어 책도 봐야겠단 끌림이 강력합니다! ^^ 찜!
님의 서재에 들러보지만, 어쩐지 댓글 남기기가 어렵더라는... ^^
새해에도 님의 활동 기대하며 새해 인사 드립니다!

로쟈 2008-01-01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접대'에 좀 서툴러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댓글은 자주 남기셔도 좋습니다.^^

라로 2008-01-01 18:09   좋아요 0 | URL
저건 Dr. Who라는 영국의 TV 시리즈물 맞아요. '셰익스피어 코드'도 찾아서 봐야겠어요.
로쟈님이 모르시는 것도 있다니! 갑자기 로쟈님이 다정하게 느껴져요~.^^;;;
새해에도 변함없는 서재 활동을 해주시길 바라며 새해 인사드립니다.

로쟈 2008-01-01 18:26   좋아요 0 | URL
네, Dr. Who시리즈라고 뜨긴 하는데, 인기시리즈인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드라마는 안 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