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도입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아마도 '아우라(Aura)'가 아닌가 싶다. 이 개념은 2절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원작으로서의 '진품성'과 관련하여 처음 제시되는데,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그러니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논제 자체가 이 아우라와 상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니 아우라는 이 논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라란 개념이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3절에 가서인데, 여기서는 그 한 문단을 읽어보려고 한다(이 문제적 텍스트를 완독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건 이 대목이 오래 전에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궁금해하던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참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분명하게 해두고 싶어서이다. 읽을 부분은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108-110쪽이며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는 203-4쪽이다. 거기에 덧붙여 강유원 등이 옮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http://www.armarius.net/ 에서 참조할 수 있다)도 필요에 따라 인용할 것이다(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와 있으나 모두를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건 번거롭기에 이 세 종에 국한하기로 한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두번째 문단이다.

"(...)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가 있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108-9쪽)

여기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반성완 역에서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강유원 역에서는 "먼 것 -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가까이 있다 해도 - 의 일회적 현상"으로 옮겨졌다. 내겐 반성완 역의 정의가 더 친숙하지만 정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영역본에서는 "the unique apparition of a distance, however near it may be'로 옮겨졌고, 독어 원문은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다. 우리말 '현상(나타남)'에 상응하는 영역본의 단어로 'apparition'이 쓰인 게 눈에 띄는데, '환영'이나 '(뜻밖의) 출현'을 뜻하는 단어다.

원래 '아우라'는 그리스어로 '공기(air)'나 '숨결(breath)'을 뜻한다고 하고 반성완은 이에 따라 처음에 원어를 병기한 이후에는 '분위기'라고 옮겼지만 '아우라'란 원어 자체가 이미 상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아우라'로 고쳐서 인용하겠다.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은 이어서 벤야민이 들고 있는 아우라의 예이다(처음 읽을 때부터 좀 뜻밖의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에 대해서 나는 좀더 드라마틱한 예를 기대했던 것일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반성완)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어느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강유원)

비교해서 읽어보면 세 번역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먼저 반성완본은 직역이라기보다는 역자가 적극적으로 의역하면서 윤색한 경우이다. 일단 이 대목만 한정하면 가장 정확한 번역은 강유원본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에서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 모두로 돼 있지만 일단 액면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한가?). 여름날 오후면 그림자도 길지 않을 때인데 먼 지평선의 산맥의 그림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에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본 모두 강유원본과 마찬가지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로만 돼 있다.

그리고 최성만본에서는 '따라갈 때'라고만 돼 있는데, 의미상 모호한, 불충분한 번역이다. 똑같이 독어본을 번역한 반성완본과 강유원본이 보여주듯이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바라보는 것'이라고 해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시선'이 번역에 포함돼 있다(영역으로는 "To follow with the eye"로 돼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강유원본에서처럼 '바라보는 것=숨쉬는 것"이 등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그렇게 돼 있다). '따라갈 때'나 '바라볼 때'란 표현보다 직접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묘사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여 화제를 다시 대중과 기술복제 문제로 전환하는데, 사실 나는 '이러한 묘사의 예'에서 무엇이 쉽게 이해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보다 정확하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로선 벤야민이 들고 있는 예가 어떤 경험적 '직접성'과 관련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면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최성만)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 마지 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반성완)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현대 대중의 충분히 열정적인 갈망이고, 또한 그것의 복제의 수용을 통해 모든 소재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현대 대중의 갈망이다."(강유원)

이 대목의 번역은 세 종 모두 대동소이하다. 다만 문체상으로 최성만본과 강유원본이 보다 직역에 가깝고 반성완본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어서 그러한 대중의 성향/갈망을 부연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다시금 번역본들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像) 속에, 아니 모사(模寫) 속에, 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영화가 제공해주는 복제영상들은 상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최성만)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날로 켜져 가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 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반성완)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으로, 오히려 모사로, 복제로 소유하려는 욕구는 날마다 거부하기 어렵게 일어난다. 그리고 화보가 [많이]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영화]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강유원)

가장 큰 차이는 '자기 옆에 가까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성만/반성완본에서는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모사나 복제를 통해 전유/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욕망이라고 옮기고 있는 반면에 강유원본은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 등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라고 옮겼다. 어느 쪽이 맞는 번역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후자 아닌가. 그림/모사/복제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뿐일 리는 없는 것이니까(바로 곁에 있다면 왜 아이돌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를 굳이 벽에다 붙여놓겠는가?!). 이 점은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대조해봐도 확인할 수 있다(비록 텍스트의 제2판까지 수록해놓고 있어서 유익하긴 하지만 가장 최근의 번역에서 이런 오류들이 나오는 것은 유감스럽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는 독어의 'Bild'를 어떻게 옮기느냐인데, 최성만본은 '상(像)'이라고 옮겼고, 반성완/강유원본은 '그림'이라고 옮겼다(참고로, 영역본은 'image'라고 옮기고 'Bild'를 병기했다). 'Bild'는 물론 사전적으로 '형상'이란 뜻을 갖기 때문에 '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우리말 쓰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적합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상'은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여기서는 대중들의 소유 대상이기도 하므로('전유'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Bild'가 '그림'보다 광의의 뜻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런 정도로 옮겨지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는 대동소이하다. 이 절의 결론은 이렇게 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낼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가 나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현상이 직관(Anschauung, 표상)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맞추고(정향하고) 대중이 현실에 맞추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최성만, 109-10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 후반부는 반성완본과 일치한다. 둘다 'ein Vorgang'(영어로는 'process')을 '발전과정'이라고 옮긴 점이 특이한데 내가 참고한 다른 모든 번역본들에서는 그냥 '과정' 정도로만 번역하고 있다. 이 문단에 대한 검토는 몇 해 전에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참조하시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각과 직관의 문제'(http://blog.aladin.co.kr/mramor/706805)라고 좀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페이퍼이다...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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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1-0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아이돌스타는 소피 마르소이군요 ^^ 그나저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아우라에 대해...." 이 문구로 시작하는 직접적인 3줄 남짓한 대목을 적어둔 노트가 보이지 않네요. ㅠㅠ 지금 찾아 보니 '산책자', 나 '인식론에 관해, 진보 이론'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고, 그 장들이 아닌가??ㅠㅠ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로쟈 2008-01-02 23:04   좋아요 0 | URL
브로마이드 스타의 원조이기도 하죠.^^ 덧붙이자면, 영화 <구름 저편에>에는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에 대한 오마주 장면도 들어가 있습니다.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해서 겸사겸사 엮어넣었습니다...

어부 2008-0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첫번째 인용문에 대한 질문인데요. '숨을 쉰다'의 주체가 번역문마다 조금씩 다른것 같습니다. 반성완본에선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의미인데 최성만본에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아우라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체험적 의미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부분에 있어 반성완본은 부적절한 번역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유원본은 숨을 쉰다는 술어에 대한 주어가 생략되어서 오문까지는 아니지만 문장 자체가 모호하게 읽히구요. 아우라에 대한 첫번째 사례의 핵심적 분위기를 옮기는데는 최성만본이 오히려 더 정확히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가요?

로쟈 2008-01-03 23:20   좋아요 0 | URL
강유원본이나 영어본, 러시아어본을 보건대, "-바라본다는 것은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이다, 정도입니다." 모호하진 않구요, 우리가 -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아우아를 숨쉬는 것이다, 가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