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뜸했던 영화소식이다. 연말에 개봉된 영화들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나는 판타지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외적인 영화라면 리들리 스콧의 신작 <아메리칸 갱스터>가 있다. 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 감독이지만 '갱스터 무비'는 그가 처음 손대는 것이며 그만의 독특한 갱스터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평을 읽은 바 있다. <아메리칸 갱스터>를 계기로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들을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대해서는 평으로만 접했는데, 이것도 '미드'로 수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겨레(07. 12. 31) 갱스터, 바로 당신의 두 얼굴

제목부터 과감한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극히 미국적인 갱의 초상을 그려낸다. 흑인 갱단 보스 프랭크 루카스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 마인드’로 생각하는 갱이다. 단지 이익을 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혁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가히 ‘미국의 갱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몽상가의 꿈을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어낸 벅시 같은 갱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갱단의 세계야말로 가장 비열하면서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관철되는 곳일 것이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걸작 갱스터 영화들이 갱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내적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낸 이유도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갱스터의 캐릭터는 우리와는 다른 악인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르로 완벽하게 정착한 갱스터 영화는 현실을 예리하게 담아내는 거울로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이 된 <대부>(1972)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삼형제의 막내였기에, 자신이 보스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큰형이 죽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마이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대부’가 된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 마이클은 그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누구나 마이클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이클이 조직의 보스가 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냉혈한이 된다. 그것이 마치 그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마이클은 완벽하게 탈바꿈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마이클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거짓과 폭력 그리고 음모를 이용한다. 거기에는 한 치의 후회나 망설임도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원하는 대부가 되기 위해서, 마이클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그것은 바로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방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반면 <좋은 친구들>(1990)의 헨리 힐은 마피아 동네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라 자연스럽게 갱단 일원이 된다. 헨리에게 가장 성공적인 미래는 마피아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트럭 화물을 훔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악행을 일삼던 헨리는 마침내 마피아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였던 헨리가 간부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헨리는 그저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남의 물건과 돈을 훔쳐 흥청망청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향락을 즐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위대한 갱스터가 되기에는, 헨리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에프비아이에게 잡힌 헨리는, 조직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헨리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헨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결국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스타를 꿈꾸지만, 대부분의 종착점은 소박한 시골역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갱은, 영화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소프라노는 뉴저지 북부를 관장하는 조그만 조직의 보스다. 그의 고민은 가정과 조직, 즉 두 개의 패밀리다. ‘급격한 클라이맥스나 사건 없이, 보편적인 삶의 리듬과 맞아 떨어진다’는 분석처럼, <소프라노스>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마피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해야 하고,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고민해야 하고, 한편으론 애인도 돌봐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에 끼어들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여전히 도둑질이나 도박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과 가족 때문에 고민을 하는 여느 가장과 마찬가지로 토니 소프라노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 상담까지 받는 소프라노는 그저 친근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때로 다정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그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같은 일상에 ‘범죄’라는 사업이 하나 더 끼어들어 있는 것뿐이다.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태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게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랭크 루카스 역시 가족을 위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원산지에서 직접 마약을 입수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순도는 두 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제품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그것만 본다면 프랭크는 탁월한 사업가다. 미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혁신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그리고 토니 소프라노의 고민이 두 개의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프랭크의 고민은 어떻게 시장을 장악하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였다. 프랭크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갱스터나 보통 사람들이나 목적은 하나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성공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하나인 것이다. 갱스터 영화를 볼 때, 폭력과 범죄의 향연 속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08. 01. 02.

P.S. 역시나 '가족'과 '사업'을 다룬 '코리안 갱스터'로 <우아한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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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심각한 갱스터 영화관련 페이퍼를 보면서 저는 에널라이즈 댓과 디스라는 꽤 코믹스럽게 만든 갱스터 영화 생각하면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8-01-02 14:31   좋아요 0 | URL
'가족'만 아니면 얼마든지 코믹해질 수 있는 장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