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식 코뮤니즘과 즐거운 계몽주의

장례 기간 동안 연기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 관련 일도 많이 밀렸다. 이벤트 결과발표도 오늘중으로 해야 하고 2쇄 발간을 위한 점검도 해야 한다('지속가능한 글쓰기'를 위해서도 가까운 시일 안에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아직 독자 리뷰들은 별로 접해보지 못했지만('블룩'이란 책의 성격상 리뷰의 가닥을 잡기가 좀 어려울 듯도 싶다. 오늘 알게 된 것인데, 국립국어원에서 발표한 '블룩'의 우리말 순화어는 '누리글보따리'다. 이건 뭘 해도 '보따리 장사'로군!), 언론리뷰는 조금 더 눈에 띈다. 일단 부산에서 발행되는 국제신문에 실린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기사의 타이틀이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소풍'인 것이 눈길을 끈다. 아, 매일같이 서재로 소풍을 가다니!..  

국제신문(09. 05. 30) 넘나들고 통합하는 지성…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소풍 

'로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터넷 서평꾼'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서재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의 주인장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는 하루에 1000명 정도가 꾸준히 접속해 로쟈가 적어놓은 인문학 관련 신간 소식과 지적 흐름을 엿듣는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오프라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로쟈의 새로운 글쓰기다.

왜 새로운 글쓰기인가.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쓴 글이지만 대부분의 글을 다시 손봤기 때문이다. 온라인 버전과는 제목과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다. 1997년부터 2009년까지 블로그에 올려둔 글들 가운데 알맹이만 골라 편집해 만든 책으로, '블룩'(blook·blog+book)이라고도 칭한다. 이 책에서 새로운 출판 문화의 한 단면을 읽을 것 같다.

부제를 통해 저자 스스로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말한 부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내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들까지도 건드리다 보니 부득불 딜레탕트에다가 곁다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정색하고 정통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읽고 말하는 고식적인 태도가 아닌 '제멋대로 읽고 기우뚱하게 쓰는' 경쾌한 시선이 돋보인다. 만화나 리빙, 자기계발서 분야의 도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식 분야를 넘나들고 통합하는 저자의 능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는 문학과 영화, 예술,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에세이와 지젝 읽기, 그리고 번역비평에 대한 주요 글들이 망라돼 있다. 부제에서 암시하듯 '본격적인' 인문학과는 좀 거리가 있는 글들이다. 저자는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글을 너무 쉽거나 말랑하게 느끼는 독자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문학 독자층'을 넓히는 데 일조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욕심인 것이다. 



책은 다섯 개의 서재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을 다룬 네 번째 서재가 눈길을 끈다. 지젝을 즐겨 읽는 이유와 함께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어떤 것인지 살짝 드러내줄 수 있는 글이 몇 편 실려 있는데, 앞으로 본격적인 '지젝론'을 쓰겠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저자가 오래 전부터 지젝의 글을 꾸준히 올린 덕분에 지젝은 이제 한국 '지식장'에서 현대 철학 혹은 '통합 지성'의 일반명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로쟈의 예술 리뷰'라는 부제가 붙은 두 번째 서재는 재미있다. 미술 에세이 한 편을 제외하면 주로 영화에 대한 글을 모았으며, '생명복제 시대'의 예술로서 영화 텍스트 깊이 읽기다. 이 가운데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빈집'에 대한 비평은 압권이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그의 무능력이 아니라 고집스런 불성실과 아집, 그리고 부정직이다. 대충 얼버무리고, 황당한 것 갖다 붙이고, 자신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가는 태도 말이다." 저자는 다섯 번째 서재에서 우리나라의 잘못된 번역 문제를 아프게 건드린다. 서늘하고 신랄하게 번역의 윤리 문제를 거론하는 그는 "독자가 무서운 줄 안다면, 함부로 대충 번역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이면에는 아름다운 책에 대한 숭배와 '제대로 된' 번역자의 고통과 노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진하게 묻어 있다.(강춘진 기자) 

09. 05. 31. 

P.S. 대학신문의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하나의 책을 다른 책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내고 분석"하는 일은 사실 책읽기의 기본임에도 로쟈의 특징으로 주목받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다루는 리뷰들에서 주로 '박학다식'이 화제에 오르는데(대개 '소문'을 밑천 삼아 책소개를 하는 탓이리라), 이번 책은 '비평적 에세이'와 '텍스트 읽기'를 모은 것이다. 나중에 따로 묶으려고 하는 '서평집'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블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블룩적'이지도 않다. '블룩'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는 나도 더 생각해봐야겠다...   

대학신문(09, 06. 01) The Reader: 책 읽어주는 로쟈

인터넷 블로그의 글이 지면의 활자로 재탄생한 ‘블룩(blog+book)’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달 18일 출간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이현우씨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인터넷 서평꾼이다.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들며 박학다식을 자랑하는 그가 블로그에 자유롭게 써 온 ‘책 이야기’ 중 고갱이를 추려 다시 책으로 엮어낸 셈이다.

책은 문학·예술·철학 영역에서의 비평으로 시작해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인 지젝의 저서를 둘러본 뒤 번역비평으로 끝을 맺는다. 저마다 다른 주제의 글들이 이어지지만 대중지성을 희망하는 저자의 시각에서 비켜나가지 않고 있다. 로쟈는 세상에 대한 ‘즐거운 저항’인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포르노보다 더 음란한 포퓰리즘의 정치를 경계한다. 또 지식의 오만에서 비롯된 오기(誤記)를 비판한다.

로쟈의 서평이 주목받는 점은 하나의 책을 다른 책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내고 분석한다는 데 있다. ‘니체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그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니체와 여성’을 제각각의 관점에서 다루는 다른 저자들의 책들과 함께, 니체의 다른 저서  『선악의 저편』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학문의 경계를 초월한 그의 지식의 종횡무진함은 바로 이러한 책읽기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지식인과 대중 간 거리를 좁히는 방법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꼽는다. “블로그는 그 빠름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 세대에만 유용한 데 비해, 느린 활자는 모든 세대에게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블로그가 대중지성의 지적 보고 중 하나로 각광 받고 있다 할지라도, 지식 공유의 폭을 확장시켜 사회적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활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느리지만 넓고 깊이 있게 모두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활자이고 책이다. 대중은 책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며 지성인으로 자라나고 세상을 변하게 한다. 대중의 시대는 왔을지 몰라도 로쟈의 시각에서 볼 때 ‘대중지성’의 시대는 아직 뻗어나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뻗어나감을 돕는, 지식인의 겸손과 대중지성의 도래를 돕는 징검다리로 놓여 있다.(김빈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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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31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새 2009-05-3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의 `후불제민주주의`와 허지웅의 '대한민국표류기'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를 갈등하면서 책방에 들렀다가 눈에 띄어 언급한 두권을 제쳐
두고 구입해서 열독하고있는중입니다.

로쟈 2009-05-31 14:51   좋아요 0 | URL
흠, 제 주변 말고도 독자들이 있네요!^^

건조기후 2009-05-3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국제신문에서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는데.. 이 곳에서 마주치니 반갑네요.ㅎ 저도 조만간 일이 끝나면 꼭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

로쟈 2009-05-31 23:38   좋아요 0 | URL
부산에 계셨군요.^^

에피쿠로스 2009-06-0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6/1 pm 10시 39분에 일독 했습니다.처음에는 재미 있었는데 지젝읽기는 좀 어려웠습니다.아마 지젝 책은 한번도 안 읽어 생소 해서 그런가 봅니다.번역에관한 비평도 흥미 진진했는데 번역이 잘못됐다고 말하니 알겠는데 원서도 안보고 볼일도 없는 사람에게는 잘 됏는지 잘못 됐는지 자체도 모르니.....원 참...전에 뉴레프트리뷰인가 로쟈님이 지적한 번역오류가 고쳐졌느지 모르겠네요...비싼돈 주고 샀는데 그말 듣고 책 덮었습니다.
다음 책은 비평이나 서평이 아닌 한가지 주제에관한 단행본으로 책이 나왔으면 합니다.아참 한가지 김규항에관한 비평...저는 김규항도 로쟈님 지적한 문제도 있지만 나름대로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로쟈님 지적도 좋았습니다.한마디로 이상하지만 둘다 공감이 갑니다.어쟀든 오늘 한권 떼니 기분이 좋군요.다음번엔 더 좋은 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로쟈 2009-06-02 00:27   좋아요 0 | URL
데리다부터 지젝까지는 그냥 지나치셔도 되는 부분인데요. 그래도 일독하셨다니 반갑습니다. 거의 첫 (완독)독자가 아니실까 싶어요.^^ 다음번 책은 흠, 두 종류가 다 될 듯싶습니다...

비로그인 2010-03-13 06:12   좋아요 0 | URL
저는 이런 책 너무 좋아요.. 다음번에도 다음에도 계속 나왔으면 좋겠어요.
책에도 영혼이 있다면 이런 책이 아닐까 합니다.

무얼 번지게 하는데 그게 아주 랜덤하거든요..
제 생각엔 어렵지도 않고 신선하기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번져나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죠.. 이것도 21식 혁명사업에 복무하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는 얼마전에 출간된 <고전의 미래>(길, 2009)의 부제다. 저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이자 고전학자인 살바토레 세티스. 200쪽 남짓하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관심에서 제쳐놓고 있었는데, 책을 번역한 김운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일단 스크랩해놓는다. 고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도 들어가 있는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시길.    

교수신문(09. 05. 25) 古典은 우리 안에 있는 他者 … 고유 개념 정립 필요 

중학교 시절 ‘고전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몇몇 친구와 함께 어쭙잖게 학교 대표로 선발됐고 선생님께서는 두툼한 책 몇 권을 읽으라고 나누어 주셨는데, 처음 몇 장을 넘기다가 재미없고 장황하고 지루해서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내팽개친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로 고전은 나에게 지루하다는 이미지와 연결됐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인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덤벼든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도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살바토레 세티스(Salvatore Settis, 1941~)의 짤막한 저술 『고전의 미래』를 번역하면서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한 어떤 명쾌한 해결책을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는 전문가들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전의 총체적 역사를 더듬어보면서 고전이 우리의 현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조망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논의를 뒤따르다 보면 고전이 너무 많은 것을 가리키고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그는 ‘고전’의 의미가 방대하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따옴표 안에 넣어 사용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고전이라는 말이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용된 사례들과 의미들에 대한 설명도 고전의 의미를 확장시킬 뿐 개념의 단순화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고전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그것은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예술, 사상, 제도 등 모든 문화 현상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 그렇게 포괄적인 고전의 개념을 정의하려면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용어의 어원과 원래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고대 로마의 시민들 중에서 최고 부자 납세자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최고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을 지칭했다고 한다. 이후의 용법에서 약간씩 상이한 함축 의미들이 덧붙여졌지만, 고전의 속성이 그러한 가치를 토대로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아니했다. 무엇이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고유의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있으며, 그 가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의 일정한 시기마다 반복되는 재탄생 과정을 통해 증명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티스는 ‘복귀’와 ‘재탄생’의 역사들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과거의 사실로서 시간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이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거나 또는 활용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띠고 새로운 의미로 충만해질 수 있다. 세티스가 인용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례들은 모두 고전이 마치 불사조처럼 죽었다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가 그렇고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그렇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고전은 영원히 살아 있다.

세티스가 강조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고전의 문화적 상대성 관념이다. 그러니까 서양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권들에도 나름대로 고유의 고전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지배적인 서양 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고전이라 하면 그리스 로마의 고대를 먼저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문화의 가치는 상대적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산발적인 언급에 머무르고 있지만, 중국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의 예들을 인용하고 상호 비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많다. 그리고 각 문화권 고유의 고전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외부 관점이 아닌 내부적이고 토착적인 의미에서의 고전 개념을 정립할 필요도 있다. 서양 문화의 패러다임은 분명 훌륭하고 멋진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지만, 서양의 고전 개념이 다른 문화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고전이란 바로 우리의 내부에 있는 ‘他者’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질화됐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서양의 고전 문화는 “고대에 이미 다른 문화들과의 접촉에 의해 강하게 혼혈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은 동질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고전을 되살린다는 것은 바로 이질적인 것에서 동질적인 것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티스의 말에 의하면 “고전을 회상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다른 것들, 즉 다른 문화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걸음이 될 수 있다.”

요즘처럼 서로 다른 문화들 사이의 충돌과 교류, 뒤섞임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다문화에 대한 논의와 대비책이 필요한 시기에 우리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공존의 삶을 위해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전이 시간의 차원에서 공간의 차원으로 확장되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윤리적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가치로서의 고전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특히 ‘글로벌화의 수사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고전의 의미와 역할을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세티스는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부터 시작해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시대를 넘나들고,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며, 건축과 예술에서 문학, 제도, 사상,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위해 관련 문헌을 찾아보고 부지런히 인터넷을 뒤졌다. 하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보기에는 여전히 용어 선택이나 맥락의 이해에서 부족해 보일지 모른다. 번역의 길에도 고전처럼 끝이 없는 모양이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이태리어) 

09.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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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평일에는 자주 찾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주말에는 사볼 수가 없다. 동네 편의점 등에서 갖다 놓질 않기 때문이다(아니면 너무 적게 갖다놓거나). 해서 오늘자 리뷰란에 실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에 뒤늦게 올라온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삼인, 2009)에 대한 것이다. 김규항의 <예수전>과 함께 얼마전에 읽은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김영사, 2008)을 바로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다. 그러고 보니 표지도 비슷하다.   

한겨레(09. 05. 30) “이명박을 클릭하니 한국교회가 보이더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언뜻 보면 꽤 과격한 제목을 지닌 이 책에서 한국 교회란 한국 개신교를 말한다. 이 책을 쓴 김선주(43)씨는 개신교 신자로, 신학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한 대학의 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인 “예비 목회자”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번져 나가고 있는 데는 한국 개신교가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눈앞의 이해관계만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지은이가 기독교 정신에서 멀어진 개신교 주류 교단을 들여다보는 열쇳말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 교회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이콘이다. 이명박을 클릭하면 한국 교회의 은폐된 내부가 보인다.”

지난 대선에서 개신교의 주류 교단과 대형 교회 목사들은 노골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 소망교회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를 지지한 목사들은 ‘하느님의 뜻’이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부자 감세를 밀어붙이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한 정책에는 무관심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엔 한국 교회의 목회자 상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에서 지울 거야”라고 했던 전광훈 목사를 두고 지은이는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는 권리를 하느님이 아닌 목사가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곧 하느님이란 것”이라고 비판한다.

한국 교회 목사들의 배타적 권위주의와 정치·이념을 앞세우는 태도는 뿌리 깊은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정권과 이를 지지했던 기독교인으로부터 수세에 몰렸던 일부 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월남하여 교회 장로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친미 반공세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1966년 박정희 정권 때는 김준곤 목사의 주도로 대통령 조찬 기도회가 시작됐고, 1980년에는 광주학살의 지휘자 전두환 대장을 위해 개신교 지도자 23명이 기도회를 열었다.  

지은이는 기독교의 본디 정신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아나키즘, 곧 무권위주의(무정부주의)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원시 기독교의 신학적 기틀을 잡았던 바울의 사상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투쟁을 통해 기독교를 보편 종교로 발전시킨 데는 경계를 넘어서는 아나키즘 정신이 있었다고 지은이는 힘주어 말한다.

현실의 한국 교회는 이와는 동떨어져 있다. 1975년 김준곤 목사는 “나라를 위해서는 순국을, 주님을 위해서는 순교를, 공산주의자들의 도발에는 육탄으로 맞설 것”을 역설했다. 국가와 주님과 반공이 하나의 의미로 동일시되는 것이다. 지금도 주류 교단은 반공과 국가주의를 내세워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제를 반대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총무인 최희범 목사는 올 2월 “국가 없이는 신앙도 없다”며 이명박 정부의 대체복무제 보류를 환영했다. 

지은이는 개신교회 내부의 일곱 가지 문제점으로 △신도 앞에 권위로 군림하는 목사들 △복음보다는 이념에 발목잡힌 교회 △상품화된 설교와 영성 △형식화된 복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앞세운 잘못된 전도 방식 △윤리 없는 헌금을 지목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그것이 ‘죄악’인 것은 성경이 말하는바 복음으로부터 빗나간 교회는 그 자체로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은 본디 정신에서 멀어진 교회를 예수 스스로 버리겠다는 선언이며, 지금의 한국 교회는 그 심판의 메시지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은이는 말한다.(허미경 기자) 

09.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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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5-30 22:40 
    [책]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 via 로쟈
 
 
노이에자이트 2009-05-31 15:24   좋아요 0 | URL
김준곤!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이끌던 인물!

로쟈 2009-05-31 15:32   좋아요 0 | URL
지금도 명예총재로 돼 있네요...

baxtan 2009-06-22 11:45   좋아요 0 | URL
틀린 얘기는 아닌듯 싶네요. 그러나 판단이나 비난 역시 주님께서 금하신 일이지요. 심판은 주님의 몫이니까요. 은밀히 골방에서 이 문제에 대한 기도를 합시다.

환상범 2011-07-27 23:08   좋아요 0 | URL
주님께서 판단이나 비난을 금하셨다고요?
에이... 거짓말...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께서 하셨겠죠.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을 퍼부으시며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말한 것 등으로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받았죠.
그리고, "깨어 있어라" 이 상황에도 너희는 잠이 오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판단이나 비난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돈을 쫒는 목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당 신부님은 연말이면 하시는 말씀이 "교무금은 공동체 내에서의 각자의 몫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뒤에 하시는 말씀은 "낼 수 있으면서 안내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무금이 부담스러워 주님을 멀리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ㅋㅋ

개신교도들이 자꾸 성당으로 와서 요즘은 성당이 미어터지려해요. 개신교가 하루 빨리 깨끗해져야 쾌적한 우리 성당 지켜나갈 수 있을텐데...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왜들 교회에 가서 찾는지... 나야 의무를 소홀히 하면 안되니까 그러는 거고... 하하... 제가 좀 이기적이죠? ㅋㅋ(웃자고 한 말에...)
 
빈곤대국 아메리카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두 권의 여행기에 대한 리뷰를 챙겨놓는다. 정확하게는, 각각 한국 작가와 일본 저널리스트의 미국 '횡단기'이다. '유재현의 미국 사회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거꾸로 달리는 미국>(그린비, 2009)은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그린비, 2009) 같은 그의 아시아 기행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싶다. 아시아에서는 걷고 미국에서는 달린다는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아시아인에게 적대감부터 보이는 경찰과 자본주의의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두려워할지언정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나라, ‘미국’의 초상을 읽는다"고 하니까 말이다. <아메리칸 버티고>(황금부엉이, 2006) 같은 프랑스 철학자의 미국 기행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한편, 작년에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리틀북스, 2008)린 첵으로 이름을 알린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는 <아메리카 약자혁명>(메이데이, 2009)에서 신랄한 고발서였던 전작과는 달리 아직 '미국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이유'를 살핀다. 곧 "미국 전역을 직접 발로 뛰면서, '보도가 전하지 않는' 미국 사회의 약자들의 변화를 위한 갈망과 행동 속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있는 희망을 건져 올린다." 미국 사회의 두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1930년대 새크라멘토의 ‘후버빌’. 1929년 대공황을 맞은 미국에서는 직장과 집을 잃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거리로 내몰렸다. 미국 전역에 급조된 빈민촌이 양산되었다.

세계일보(09. 05. 30)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 사라진 ‘빈곤 대국 

“‘베트남전쟁. 미국의 가장 긴 전쟁,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미국의 병사들이 여기 잠들어 있다.’ 미국 곳곳에 산재한 전쟁 기념비에는 대부분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미국은 20세기 내내 전쟁을 벌여 왔다. 워싱턴DC의 바로 옆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와 링컨기념관 인근에 있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미군 51만7000여명과 유엔군 6만2000여명의 영혼을 상징한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미화함으로써 애국주의를 고취하거나 전쟁을 찬양하는 기념비만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 어디에서도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이 미국을 횡단했다. 한 명은 한국의 소설가 겸 여행작가 유재현씨이고, 또 한 명은 일본 여성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 유씨는 미국 산업의 상징인 자동차로 62일간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쪽 끝까지 2만5000㎞를 여행하며 미국의 추락상을 증언하고, 이를 제3세계의 정치, 역사와 연관해 설명했다. 고속도로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들을 통해 미국 운수노조인 팀스터의 쇠락과 미국 노동운동의 씁쓸한 현실을 짚어보기도 하고, 텍사스 등지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인한 멕시코의 비극을 돌아보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20층에 있는 증권회사에서 일하다 건물이 붕괴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한 츠츠미는 그 후 저널리스트로 변신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글과 강연으로 미국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9·11로부터 2년 후, 테러 후유증과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또다시 미국에 가서 내가 만난 것. 그것은 보도가 전하는 잔악한 이미지와 정반대의 또 다른 미국의 얼굴이었다.”  



먼저, 유씨의 증언. “아시아인이 처음으로 북미 대륙에 발을 내디딘 곳은 미국의 서쪽 끝인 태평양 연안이었다. 18세기 중엽, 중국의 빈농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아시아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들의 삶은 차별과 멸시로 점철된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유씨는 오리건 주를 지나다 ‘라이스 밸리’라는 지명을 발견한다. 한때 중국인들이 벼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벼농사를 정착시킨 사람들은 일본인 이주민이었다. 중국인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그들은 힘들게 모은 돈으로 농지를 구입해 벼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2차대전이 발발하자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모두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 만행을 저지른다.  

◇캘리포니아 온타리오의 ‘부시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 속에 집을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 미국인들은 공유지를 점거하고 텐트촌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이 텐트촌에 부시빌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실 미국의 역사는 아시아인들에게만 ‘배제’의 잔혹함을 보인 것은 아니다. ‘배가 고파요’라고 쓴 팻말을 들고 앉아 있는 흑인 홈리스들은 미국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다. 한때 미국 서부 지역에서 진보운동의 성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는 이제 홈리스만 가득할 뿐이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멕시코였다. 현재 미국 영토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 네바다, 애리조나의 전부와 와이오밍과 콜로라도의 상당 부분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다.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를 22번째 주로 편입시킨 미국은 이후 노골적으로 멕시코에서 영토를 노리기 시작해, 1846년 전쟁으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영토의 55%를 미국에 뺏긴다.” 

2008년 미국을 강타한 모기지론 사태는 미국 속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미국 대도시 강변에 이번 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텐트촌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텐트촌의 원조는 대공황 때 나타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버의 이름을 붙인 ‘후버빌’이다. 최근 나타난 텐트촌은 ‘부시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가져온 빈곤의 풍경을 고발한다.   

◇세계 부(富)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극빈자가 3000만명이 넘는 ‘빈곤 대국’이기도 하다.

다음은 츠츠미의 증언. “9·11 참사 이후 부시 정권이 ‘대테러전쟁’과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잠시 미국사회 ‘밖’을 주목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미국 사회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미국사회 ‘안’이 문제였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사실은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뉜 양극화사회이며, ‘빈곤대국’이라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계 부의 4분의 1 이상을 점유하면서도 31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고 있고,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4500만명을 넘으며, 2억3000만정이나 되는 총기가 나돌아다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란 점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은 없고 ‘빈곤대국’만 남게 됐다.”

츠츠미는 그러나, 언론 보도가 전해주는 미국사회의 현실에만 기대서 절망하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약자들의 변화를 위한 갈망과 행동 속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있는 희망을 건져 올린다는 것. “전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비즈니스를 계속하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경제적으로 구석에 몰려 고통 끝에 조국을 위한 버리는 말로 쓰이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 아들들을 전쟁에서 잃은 가난한 어머니들이나 무력한 마이너리티 젊은이들, 그리고 영웅이라 부릴 줄 알았던 노상에 잠든 노숙인의 귀환병들”이 바로 그들이고, 험난한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고개를 들고 일어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심히 해내는 그들 속에서 츠츠미는 아직은 남아있는 미국 사회의 희망을 본다.

유씨의 시선에 들어온 미국은 사실 오늘날 남한사회의 풍경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유사 미국’을 지향하는 남한에서도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닥칠 일이다.” 그러면서 유씨는 “우리는 미국이 아니라 이미 미국화를 완성한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한다”고 일침을 놓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츠츠미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 갇힌 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지적한다.(조정진 기자) 

09.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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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31 20:40   좋아요 0 | URL
루즈벨트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넣은 사건은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동정하는 사람이 없던데 역시 유재현씨는 다르군요.

로쟈 2009-05-31 23:40   좋아요 0 | URL
네, 그런 '팩트'들은 역사책에도 실어주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6-01 00:29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사건에 대해서 시간 내서 페이퍼에 한 번 써야겠군요.

로쟈 2009-06-01 23:59   좋아요 0 | URL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한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국민장이 치러지는 기간이었고, 애도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개인적으론 몇 편의 원고를 억지로라도 써야 했던 한주였다. 주말이라고 한숨 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감정은 추스리고 기력은 다시 곧추세워야 할 시간이다(요즘은 피로도 만성적이 돼가는 듯하다). 넋을 놓고 있기엔 다급한 일들이 너무 많고 고인의 뜻을 계승하는 일도 앉아서 되는 일은 아닐 것이기에. 주말이면 북리뷰 기사들을 정리해서 올려놓곤 했는데, 이 주에는 휴업해도 좋을 정도다(개인적으론 두어 권 정도만 관심도서로 머릿속에 입력해놓았다). 대신에 향후의 과제를 짚어보는 기사와 칼럼을 하나씩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21의 특집기사 가운데 '시스템의 노무현 죽이기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023.html' 등도 참조).    

경향신문(09. 05. 30) 민주주의 완성·국민 통합 ‘노무현이 남긴 꿈’  

‘그’는 떠났고, 이제 ‘우리’가 남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는 29일 그가 떠남으로써 우리 안에서 부활했고, 그 꿈은 미완인 채로 ‘산 자’들의 어깨에 남겨졌다.‘바보 노무현’이 남긴 과제는 무엇인가. 이는 결국 ‘민주주의의 완성’과 ‘국민 통합’으로 요약된다. 인권·민주화를 가치로 평생 권위주의와 지역의 벽에 맞서고 ‘균형 발전’을 꿈꿨던 ‘노무현 정치’의 궤적 때문이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란 어릴 적 출발점부터 대통령 퇴임 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구까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필생의 신념 ‘민주주의’
노 전 대통령이 생의 마지막까지 고민한 화두는 ‘민주주의’였다. 퇴임 후 참모·학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위해 만든 인터넷 카페는 그 고민을 모색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여기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며 ‘진보의 미래’를 모색하는 작업을 했다. 퇴임 후 그가 믿었던 인권과 탈권위주의의 ‘정치 개혁’이 허물어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우향우’ 현상에 대한 고뇌가 배경이다.

국민에게 돌려준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독립성은 다시 흔들리고, 참여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된 정경유착과 권위주의 청산도 여전히 허약하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이라던 사회적 약자의 정치·경제적 ‘인권’에 대한 가치도 부정당하고 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계승해야 할 노 전 대통령의 정신은 세 가지”라며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 보호다. 이는 다름아닌 민주화 시대의 가치고 여전히 미완”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법은 그가 늘 “새 시대의 맏형”이고 싶었던 것처럼 ‘대결과 대립의 민주주의’가 아닌 대화와 타협의 ‘협치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내 뜻을 관철하는 방법이 아니라 내 맘대로 못하는 걸 배우는 것, 내 마음에 다 들지 않지만, 그러나 일보 진전했다는 걸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을 배워나가는 과정”(2006년 4월3일 제주특별자치도 보고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South Korean opposition lawmaker Baek Won-woo (R) is blocked by security guards

◇필생의 과업 ‘국민 통합’
대통령 재임 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인 과업은 정치개혁과 함께 국민통합이었다. “격차는 갈등을 불러오고 갈등은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진다. 분열한 역사는 모두 망하거나 엄청난 불행을 초래했다”(2005년 3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는 인식이 출발점이다.

이는 네 차례나 낙선하면서도 끊임없이 부산에서 영·호남 지역주의에 도전한 것처럼 ‘지역주의 타파’와 이를 위한 ‘균형 발전’, ‘남북 평화’에 대한 희원으로 표출됐다. 또 ‘외국인정책기본법’ 제정 등 “우리나라 국민이 아닌 사람에 대해 인권을 존중하고 이를 확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진보”(2006년 5월 외국인정책회의)라는 지역·계층·성별·세대·인종을 넘어선 통합과 공존에 대한 바람이었다.

경기대 손혁재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지역대결 구도의 화두를 가장 붙잡고 싸운 분”이라며 “흡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지만 분권과 균형 발전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과거청산 작업을 시작한 것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수진영의 전원책 변호사는 “우리사회에서 이념·정책을 달리하는 측에서 우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연정’까지 이야기했지만 문민정부 이후 4기 동안 내내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다. 원인은 패거리 정치”라며 우리사회의 소통 노력과 파당적 정치의 혁신을 주문했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우리사회가 변화해야 하고, 사회적 변화는 이성적 과정이어야 한다”면서 “슬픔에서 벗어나 내 박탈감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제도권에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시민이성’과 ‘시민권력’의 성장을 당부했다.

경희대 도정일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한 사회는 언제든 무너진다”면서 권력기관 중립화 등 제도적·법률적 개혁의 복원 필요성을 제기했다.

중앙대 강내희 교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종식시키고, 그 흐름에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는 게 노무현 정부가 못다 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유지를 강조했다.(김광호·송윤경기자)     

한겨레(09. 05. 30) 문명사회는 아직 멀었다

마음이 몹시 아프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아무것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기는 선물로 받은 시계를 수사가 시작될 때 버렸다는 참으로 치욕스러운 얘기까지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 저 모욕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아무리 꺾어버리고 싶은 정적(政敵)이라도 그렇지 자신의 전임자에게 이런 모질고 야만적인 공격을 해댄다는 게 과연 문명한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결국, 우리 사회가 문명사회로부터 멀다는 얘기인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적어도 인간사회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절과 법도마저 무너져버린 것이 분명하다. 하여튼 이 사회가 정말로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만무하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음이 확실하다.

노일전쟁 때의 일화다. 노일전쟁의 영웅으로 지금도 일본인들이 기리는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는 자신의 두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병사의 희생 끝에 여순 함락에 성공했을 때, 러시아군 지휘관 스테셀의 항복을 받는 자리에서 적장(敵將)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패장이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고 회담장에 들어오도록 배려했고, 러시아군의 용기와 전술의 훌륭함을 아낌없이 칭송했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스테셀 장군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노기 대장은 파리 주재 일본 무관을 통해 스테셀 구명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엄혹한 상황에서, 게다가 자신의 아들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상대에 대한 예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정신적 기율이야말로 인간을 드높이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인문적 교양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균형감각 역시 그러한 축적 없이는 불가능한 자질이다. 지금 특히 평범한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꼈던 전직 대통령의 비상한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말과 글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지식인들에 의한 공식적인 추도문은 공정하고 균형 잡힌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고인에 대한 추모의 감정이 간절할지라도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공적 인물에 대한 추도문이라면 충분한 예를 갖추되 그 생애와 업적에 대한 묘사는 엄정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A hearse, second from top, containing the body of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Roh Moo-hyun

사실 공적 인간의 죽음을 기록하는 방식은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가리키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서구 선진사회의 언론들이 주요 인물의 부음을 전할 때 거의 반드시 짧지 않은 추도문을 게재하여 그 인물에 대한 때로는 냉정하기까지 한 평가를 기술하는 것은 공적 공간에서의 인간 행동이 갖는 의미의 무거움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노무현과 그의 이상은 여러모로 매력적이고 찬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지도자로서 그는 좀더 신중하고 지혜로워졌어야 할 대목이 많았다. “대통령 하기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거나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본심이야 어쨌든 그는 서툴고 경솔한 일처리 방식으로, 아마도 역사상 최악의 정권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큰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고, 그 때문에 마침내 자신도 희생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09. 05. 30. 

P.S. 기사에서 '시민이성’과 ‘시민권력’의 성장이 요청된다는 대목, 칼럼에서 '인문적 교양'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국민통합'은 선결과제들의 해결 이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하루 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더 바삐 움직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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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30 12:43   좋아요 0 | URL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과제들을 돌아봐야 할 시간인 것 같네요... '노무현의 재평가'는 아마도 중요한 화두가 되겠지요.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노무현 전대통령도 많은 실수와 실책을 범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죽음 이전에는 이 실수와 실책에 대한 좌우를 막론한 과도한 비판이 긍정적인 부분까지 압도해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긍정적인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악의 정권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높은 정권의 탄생'에 그가 기여했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우선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의 원인을 노무현 일인에게만 돌리는 특이한 담론 구조에 대판 비판적 성찰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30 19:13   좋아요 0 | URL
'특이한 담론 구조'를 낳은 어떤 '특이점'도 있지 않을까요?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민은 그를 지지하고 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죠. 그의 의지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개인적으론 궁금합니다...

자유새 2009-05-31 13:09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한계도 무시하기 어렵지만,내부의 적- 당시 여당과 지지세력들이 지녔던- 한계와 극복방안에 대안 성찰이 더욱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성인 혹은 절대자로 추앙하는 예수조차도 부활이라는 수단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로쟈 2009-05-31 14:37   좋아요 0 | URL
저로선 그 '지지세력'의 한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궁금합니다(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었지요). '무능한 정권'이란 수구언론의 프레임이 결국은 먹히도록 만든...

자유새 2009-05-31 15:12   좋아요 0 | URL
"왕좌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속된 말이 떠오르는군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동력이 비단 그의 삶의 궤적이나 개인적 매력만이 아니
었던것처럼 제가 판단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적,정책적 과오 역시 그의 책임
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그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당의 한계와 지지세력의 한계의 성격을 동일선상에 놓는 건
아닙니다.

우선 `여당`의 한계를 지목한 것은 열린우리당내의 다양한 세력들의 입지로
부터 기인한,그리하여 그의 발목을 잡은 분열상을 지적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지세력의 범주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비판적
지지자들의 한계를 지칭했다기보단 소위 노빠라고 일컬어지는 맹목적인 지지자
들의 과도하게 온정적인 행태를 지적한 것입니다.

로쟈 2009-05-31 15:22   좋아요 0 | URL
아, '분석'은 자유새님에게 요청한 건 아니구요, 앞으로 그런 분석이 나오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죄송.

자유새 2009-05-31 15:19   좋아요 0 | URL
뻘쭘~ @,.*

베네치아 2009-06-02 17:38   좋아요 0 | URL
독야청청 홀로 완전한 듯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또아리 튼 녹색평론의 김종철 씨의 글은 참으로 안타깝군요. 정치라는 거치른 들판에 서보지 못한 아니 서보려고도 하지 않는 온상의 수목이 어찌 거치른 들녁의 푸르른 소나무이고자 하는 자의 고뇌와 고통을 짐작이나 하겟습니까? 멀리 안전한 곳에 앉아서 관전평 쓰기란 뛰고 있는 선수들의 땀에 대해 결코 냉정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현장에서 뛰고 있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 아닐까요?

로쟈 2009-06-02 22:26   좋아요 0 | URL
김종철 선생도 '활동가'입니다. '인간 노무현'과는 달리 '대통령 노무현'은 사실 좌우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었지요. 일부 정책에 대해선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도 반대했습니다. 적어도 당시엔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했죠. 지난 대선 결과가 말해주듯이. 그의 '진의'가 좀더 빨리, 더 잘 소통될 수 있는 방도는 없었을까란 뒤늦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멋진빤스 2009-06-02 18:06   좋아요 0 | URL
항상 감사히 읽기만 하다 노무현을 사랑하던 사람으로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여당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왜 '실패'하였는가에 대해 변명 한 번 달아보려 합니다.
노무현에게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김대중의 민주당이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노무현이 추진하려던 많은 개혁정책들이 여당의 확실한 지원사격을 받았었나
챙겨보셨으면 싶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도 노무현 대통령은 무척이나
원하였고 지원사격을 했음에도 다수여당이 통과시키지 못하였지요.
또하나 열린우리당 자체의 태생적 한계도 있습니다.
당이 만들어지고 다수당이 되고 나서의 당원단합대회였나 거기에서
(알고보면 열린우리당 내의 소수인) 유시민 의원이 울부짖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끝내선 안된다고... 당의 정체성이나 나아갈 길에 대한 더욱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로쟈 2009-06-02 22:21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사정들이 보다 자세하게 기술되고 분석된 책을 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