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 수요일에 신촌에서 한 시간 남짓 인터뷰에 응한 결과물이다. 멋쩍은 사진도 하는 수없이 같이 올려놓는다. 참고로 기사에는 내가 인터뷰에서 한 말과 책에 쓴 내용이 버무려져 있다.
경향신문(09. 05. 23) 지식 나눔 통해 즐거운 계몽 추구
로쟈(본명 이현우·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42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in.co.kr/mramor)’은 21일 오전 현재 총 76만6218명이 방문했다. “뜻하지 않게 ‘대표적 인터넷 서평꾼’에다가 ‘인문학 블로거’ 행세를 하게 되었다”는 그가 2600여편의 글 중 문학·영화·예술·철학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를 냈다.
지난 20일 서울 신촌에서 만난 로쟈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그가 블로그 소개 사진으로 올린 검정 티와 청바지, 덥수룩한 수염의 ‘슬라보예 지젝’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지젝의 이미지 컷과 달리 사진 기자의 촬영을 어색해했다.
인터넷에서 당대 최고로 꼽히는 ‘인문학 블로거’는 ‘첫 책’에 대한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책은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인 블룩(blook)이고, 문학·영화·예술·철학에 대한 ‘진지한 잡담’ ”이라며 “책 구성 제안에 ‘손 안 대고 코 푸는 심정’으로 적극 동의했다”고 말한다. “출판사에서 과장 광고를 해 책은 좀 팔려야 할 것 같고, 판촉을 위해 덩달아 (언론)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고…”라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학문의 바다를 종횡무진 섭렵하며 보여주는 지성의 풍경과 지식의 계보도는 ‘경이’ ”라는 평을 듣는 인문학자의 겸양은 과한 듯하면서도 솔직해보였다.
로쟈는 자신을 ‘곁다리 인문학자’로, 글을 ‘기생적 텍스트’라고 규정했다. “ ‘파라(para)’라는 접두어는 기생자·곁다리 의미도 있지만 ‘비사이드’ ‘어게인스트’ 의미가 있어 매력적이죠. 인문학을 옹호·광고하는 의미도 있지만 어깃장을 놓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책으로 묶기 거북했지만 내칠 수도 없는 (기생적) 텍스트”를 묶은 첫 책에 대한 애착은 크다. 책과 글쓰기 이야기에 들어가자 느릿한 말이 빨라졌고, 힘이 들어갔다. 어색한 표정이 풀리며 ‘즐거운 말하기’가 시작됐다.
‘돈도 안되는’ 블로그 글쓰기에 왜 몰두했을까. 백수 시절 그의 아내는 남편의 블로그 중독을 막기 위해 한때 인터넷 전용선을 끊었다.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잡담 늘어놓을 기회가 있네 싶어 하루 공부나 생각을 블로그에 올려놓았습니다. (인문학자들의 블로그가) 많이 생길 줄 알았는데, 대부분은 입다물고 있더라고요.”
겸양은 계속됐지만 독서와 글쓰기에 생각은 확고했다. 로쟈는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고, 그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라며 “리뷰는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라고 했다. 이 ‘베풂’은 박식한 자의 무지한 자들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 지향을 가진 ‘나눔’의 철학에 기반한다. “제가 경제적으로 나눌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지식이나 정보를 많이 공유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덜 속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여론이나 정부가 선동, 거짓말을 많이 하니까요.”
로쟈는 “미국의 좌파 이론은 첨단을 가지만 보수적 사회가 개선 안 되는 건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보다 발견된 지식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아 문제도 생산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편중돼서 생기는 문제고, 지식도 공유되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공유에 바탕을 둔 일상적 커뮤니즘(*코뮤니즘)’과 시민 의식의 함양, 교양의 양생을 위한 ‘새로운 계몽주의’, 즉 ‘즐거운 계몽주의’를 추구한다. “인문학을 존중하는 사회도 있을 수 있고, 무관심한 MB식 마인드도 있을 수 있는데 지금 한국 사회는 무시하는 쪽으로 가려 하고 있다”며 “유감은 없지만 (그 무시의 결과로) 무얼 얻게 될 것인지는 알고 가자는 취지로 글을 쓴다”고 했다. 정치적 좌표에 대해 “지젝 식의 급진적 좌파와 고종석 식의 자유적(*자유주의적) 포지션 중간쯤에 있다”고 했다.
다시 그의 ‘독서론’을 들어보자. 로쟈에게 책 읽기는 ‘즐거운 도망’이자 ‘즐거운 저항’이다.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로쟈의 책과 블로그는 안목을 기르는 경유지나 근거지로 최적이다.(김종목기자)
09. 05. 22.
P.S. <로쟈의 인문학 서재> 관련기사를 옮긴 김에 한겨레에 실린 '잠깐 독서'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05. 23) 인문학, 악착같이 즐겁게 읽자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 ‘학이’ 편의 첫 구절이다. 이 고전적인 금언을 웹2.0 시대에 맞게 온몸으로 즐기고 확장하는 사람이 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블로그를 꾸리고 있는 이현우씨다. 인문학 독자들에게 ‘로쟈’는 이미 전설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는 칸트, 니체, 베냐민, 루카치, 롤랑 바르트, 데리다, 들뢰즈, 지젝 같은 사상가에서부터 쿠스투리차, 레오 카락스, 김기덕, 황혜선 같은 예술가들까지 다 모여든다. ‘곁다리 인문학자’를 자칭하는 그는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전방위 지식과 경쾌한 문체로 인문학의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동네 미용실 안의 풍경에서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를 읽어내는 솜씨는 예술이다. 니체의 마초주의와 니힐리즘에 붙은 오해도 유쾌하게 전복된다. 그의 ‘저공비행’에 편승해 인문학의 드넓은 숲을 조망하는 재미는 그야말로 짜릿하다. 이 짜릿함은 저항과 탈주의 쾌락이며, 책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동시에 내장된 향락이다. 책에 실린 대다수 글들은 “다른 텍스트 읽기에 기대어 생산된 텍스트”들이다. 숲길이 보이고 갈래가 보인다 싶어 나무들까지 들여다보고 싶어질 즈음이면, 아득한 심연에 두려움이 싹틀지도 모른다. 겁낼 건 없다.
지은이는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으며, “이런 종류의 글을 너무 쉽거나 말랑말랑하게 느끼는 독자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주의점 한 가지. 항로를 벗어나거나 불시착하지 않으려면, 무지와 불성실로 점철된 인문학 번역에 대한 지은이의 개탄도 유념하시라.(조일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