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장자 읽기'에 이어서 '노자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 리스트의 배경을 짚어주는 것인데, 교수신문의 서평과 담비의 리뷰를 관련자료로 옮겨온 것이다. 교수신문의 서평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번역서인 최재목 교수의 <노자>(을유문화사, 2006)에 대한 것인데, 이 책은 오늘 손에 들었지만 상당히 공을 들인 역주서로 흡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전문가의 서평을 미리 읽어두기로 한다.

그리고 담비의 리뷰는 노자의 사상이 親유가적인가, 反유가적인가, 하는 오래된 쟁점을 다시 다루고 있는데(이와 비슷한 스케일의 쟁점으론 '주역, 유가의 사상인가 도가의 사상인가'라는 게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재목 <노자>의 서평 필자이기도 한 조민환 교수의 <유학자들이 보는 노장철학>(예문서원, 1996) 외에 두 사상의 뿌리를 다룬 방동미 교수의 <원시 유가 도가 철학>(서광사, 1999)도 참고삼아 읽어볼 수 있겠다.

 

교수신문(07. 02. 05) '죽간본' 최초 완역서 - 노자사상의 本意 꿰뚫어

우리가 노자사상을 유가사상과 관련지어 말할 때 일반적으로 한대 사마천(史馬遷)이 ‘사기’에서 “노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유학을 배척하고 유학을 배우는 자도 노자를 배척한다(世之學老者, 則絀儒學, 儒學亦絀老子)”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노자는 유가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연구가들이 ‘노자가 과연 그랬을까’ 하고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지만, 현행본 81장으로 된 ‘노자’를 보면 유가와 대척점에 선 노자의 모습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노자’ 연구 가운데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노자’라는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이며, ‘노자’ 장의 구분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는지, 또 ‘노자’가 과연 한사람의 저작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노자신한열전(老子申韓列傳)’에서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고 이름은 이(耳)이며, 시호는 노담(老聃)이다”라 하는데, 중국고대의 위대한 사상가 중에 존칭을 나타내는 ‘자(子)’자를 붙인 경우 성이 다른 인물은 노자 한사람 뿐이다. 노자사상을 연구할 때 이미 사마천이 ‘사기’에서부터 제기한 노자라는 인물과 ‘노자’라는 책과 관련되어 제기된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73년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비단에 쓰여진 ‘노자’(일명 ‘帛書老子’)의 발굴과 1993년 8월 중국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초나라 무덤에서 기원전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 경으로 추정되는 죽간(竹簡)에 쓰여진 ‘노자’(이하 ‘竹簡本老子’로 함)의 발굴은 이같은 의문점에 대한 최소한의 답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죽간본노자’의 발굴은 무덤 속에 진리가 숨어있다는 말을 실감케 한 발굴이었다.

‘죽간본노자’는 ‘백서노자’보다 더 시대적으로 앞선 것으로서, 현행본 ‘노자’와 장·절의 순서 및 사상 내용에서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점에서 기존에 행해진 인물로서의 노자와 책으로서 ‘노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번역자가 노자의 ‘노’는 성이 아니고 존칭이면서, 노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노선생’ 즉 ‘늙은 선생(Old master)’을 의미한다는 것, 인물로서의 노자와 책으로서 ‘노자’를 분리해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 그리고 원시유가와 원시도가는 사마천이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대척점에만 서 있지만 않았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기존의 노자사상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게 해준 것이 바로 ‘죽간본노자’인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죽간본노자’에 대한 번역 및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이 번역서의 출간은 한국의 ‘노자’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역자는 유가·불가·도가 삼가사상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중국과 일본에서 행해진 ‘노자’ 관련 연구를 최대한 참조하면서 자구 하나하나에 대해 꼼꼼하게 주석하고 있다. 아울러 노자사상이 갖는 의미를 중국사상을 통관하는 입장에서 해설을 하고 있어 원형으로서의 노자사상과 그 사상이 후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성인(聖人), 자연(自然), 사(士), 미(美), 정(精), 음(音)과 성(聲)에 대한 자구 풀이에서는 관련 자구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경향까지 반영하면서 거의 소논문 수준의 주석을 하고 있다. 저자의 성실성과 해박한 학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울러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노자라는 인물, 책으로서 ‘노자’, 그리고 ‘초간본노자’가 출토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잘 정리하여 노자사상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좋은 번역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노자’는 워낙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어떤 책보다도 주석서가 많다. 이런 점을 감안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노자사상의 본의에 가깝게 번역된 이 번역서에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동양철학자이면서 시인이기도 한 번역자의 절제된 언어와 맛깔스런 번역이 노자사상의 묘미를 잘 느끼게 해 준다. 다만 역주에서 또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지만, 현행본 ‘노자’ 19장(죽간본: ‘返也者, 道僮也’)의 ‘반(返)’자를 풀이할 때 ‘반대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고 한 것은 역자가 해설 부분에서 “‘반(反)’은 도의 기능적 측면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하듯이 ‘반대(反)’라는 의미보다는 ‘되돌아감(返)’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점만 거론하고자 한다.(조민환/ 춘천교대 - 동양철학)

담비(07. 03. 20) 老子는 親유가적인가 反유가적인가

1993년 중국에서 '노자' 연구자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심한 이들은 다리 힘이 쪽 빠질만한 일이 발생했다.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전국시대(기원전 475~221) 중기 무덤에서 죽간으로 된 '노자'의 또 다른 판본이 발굴된 것이다. 이후 노자 학계는 충격과 엄청난 후폭풍에 휩싸였다.

'노자'엔 다양한 판본이 있다. 모두 81개 장으로 이뤄진 이 텍스트는 주로 왕필이 주석을 붙인 ‘왕필본’에 근거해 해석돼왔다. 왕필(226~249)은 남북조시대에 살았던 요절한 천재로서 그의 주석은 '노자'를 형이상학적 수양론의 결정판으로 해석하게 된 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1973년 중국 남부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의 무덤(기원전 168년)에서 비단에 쓰인 2종의 ‘노자’(帛書本)가 출토되었다. 학계가 깜짝 들썩였지만 왕필본과 비교해볼 때 道經과 德經의 순서가 바뀌고 글자 일부분이 다른 점을 제외하면 백서본과 왕필본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20년 뒤인 1993년 ‘노자’의 일부분이 들어 있는 대나무 문서(竹簡)가 발굴된 것이다. 학계는 뭐가 많이 다르겠냐 싶었지만, 이번엔 정말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노자'에서 儒家를 강하게 비판한 부분은 다 빠져있어 '노자'라는 텍스트가 후대에 많이 개정, 첨가된 것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곽점본과 왕필 및 백서본(이하 합쳐서 통행본)의 내용을 비교하는 연구들이 줄지어서 나왔다. 지난 10년간은 주로 글자를 해독하는 등 텍스트를 확정짓는 연구들이 주로 나왔다면, 근자에는해독된 내용을 바탕으로 '노자'라는 텍스트의 위상을 재규정하는 과감한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최근 두 명의 학자가 곽점본과 통행본을 비교하는 논문을 나란히 발표해 주목을 끈다. 하나는 임헌규 강남대 교수가 학진 프로젝트로 수행해 최근 '동양고전연구' 제25집에 발표한 '노자의 무위이념은 유가의 인의를 비판하는가?'라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오상무 고려대 교수가 지난해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최근 '동양철학' 제26집에 수정보완해 실은 '노자의 유가관 재론-통행본과 곽점본을 중심으로'이다.

그러나 두 학자가 곽점본을 읽고 내린 결론은 서로 상반되는 감이 있어 이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이 예상된다. 임 교수는 곽점본이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노자 판본이라고 볼 때 노자가 반유가적이라는 기존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노자는 친유가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비해 오 교수는 비록 노자 곽점본은 유가에 대해 덜 적대적이지만 유가의 통치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는 결론을 낸다. 또한 두 교수는 한자 해석 방법에서도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논란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임 교수의 논의를 보자. 핵심은 기존 통행본의 제38장이다. 여기에 "道를 상실한 이후에 德이 있게 되었고, 덕을 상실한 이후에 仁이 있게 되었고, 인을 상실한 이후에 義가 있게 되었고, 의를 상실한 이후에 禮가 강요되었다. 대저 예라는 것은 忠信이 엷어진 것이며 어지러움의 머리이다. 미리 아는 것은 도의 헛된 꽃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임 교수는 이런 노자의 인, 의, 예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가를 살핀다. 공자는 '논어'에서 "仁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을 실행할 때 편안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공자를 이은 맹자 또한 "仁은 인간의 편안한 집"이라고까지 천명했다. 맹자는 도처에서 인을 식물, 나무, 생장하는 곡식 등 유기체에 비유하면서 인의 실천은 유기체의 성장, 실현, 성숙과 같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임을 역설했다.

이를 통해 볼 때 "仁이 실행하는 의지에 의해 실천된다고 주장한 노자의 주장은 잘못"이라는 게 임 교수의 견해다. 또한 義가 仁의 외표라는 점에서 의 또한 인간의 내적 본성에 말미암아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이지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노자의 유가비판은 전반적으로 오해나 악의적 왜곡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죽간본에는 이 38장이 빠져있다. 여기서 임 교수는 이것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통행본에는 죽간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절들을 덧붙인 부분이 꽤 보인다. 게다가 글자를 교묘하게 바꿔서 뜻을 완전히 틀어놓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8장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경우이다.

죽간본 : 그러므로 大道가 행해지지 않는데 어찌 仁義가 있겠는가? 육친이 불화한데 어찌 효자와 자애로운 부모가 있겠는가? 나라가 혼란한데 어찌 올바른 신하가 있겠는가?

통행본 : 大道가 행해지지 않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겨났고, 육친이 불화하니 효성스런 자식과 자애로운 부모가 있게 되었으며,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있게 되었다.

죽간본에는 "故大道廢 安有仁義"라고 돼 있는데 통행본에는 "大道廢 有仁義"라고 두 글자가 빠짐으로써 뜻이 위에서 보듯 확 달라졌다. 통행본에서는 道가 仁보다 더 상위의 가치라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임 교수는 이를 이데올로기적 투쟁 때문에 개작을 통해 본문을 반유가적으로 바꾼 결과라고 해석한다.

임 교수는 이외에도 많은 부분들을 대조하여 노자의 無爲之道가 유가의 仁政과 전혀 상반되지 않고, 오히려 상호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들 도가는 '도'를 자연물인 天地보다 선재하는 것으로 상정하여, 道 => 天地 => 萬物로 내려오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유가는 천지에서 만물로 내려오는 우주발생론적 체계를 취하고 있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도가는 무위를 최상의 이념으로 하며, 따라서 정치 역시 무위정치를 이상으로 한다고 간주되어 왔다.

이에 비해 유가는 인을 최상의 덕목으로 하면서 인정을 정치이상으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단순한 문자상의 차이를 버리고 그 근본정신과 거시적인 체계에서 보면 비슷하다는 게 임 교수의 입장. 도가에서 道가 자연물인 천지를 넘어서는 生生하는 자연 그 자체이듯, 유가의 天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오상무 교수의 의견은 좀 다르다. 임 교수가 도가와 유가의 유사점을 강조했다면 오 교수는 그 차별성을 여전히 강조하는 입장이다. 가장 확연한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故大道廢 安有仁義"에 대한 해석이다. 임 교수는 여기서 '安'을 의문대명사 "어찌"로 해석했다. 그런데 오 교수는 전후맥락상 볼 때 "어찌"보다는 연결조사 "이에"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입장이다.

오 교수는 그 근거로 이 18장이 내용상 17장을 잇고 있으며, 17장에 '安'이 명확하게 '이에'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었다. 만약 '安'을 '이에'로 본다면 "위대한 도사 폐기되면 이에 인과 의가 생겨난다. 가족이 화목하지 않으면 이에 효와 자가 생겨난다"로 죽간본과 통행본 사이에 변별점이 없다. 이런 견해에 대해 임 교수는 어떤 입장을 보여줄 지 궁금하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굳이 뜻이 다르지 않은데 왜 후대에 이 '安'자를 없애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좀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아무튼 오 교수는 이런 입장에서 보듯 곽점본 노자 또한 유가에 대해 유보적이라고 본다. 다만 유가의 통치론에는 비판적이지만, 도덕론에는 동조적이라는 선에서 논의를 마무리짓는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표현한다.

"노자가 仁을 끊고 義를 버려라고 말했을 때 그 청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군주이다. 다시 말해 인과 의를 버려야 할 사람은 군주이지 백성들에게 인과 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통치자가 인의의 통치방법을 버릴 때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효의 마음과 행위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게 노자의 본의이다."

과연 이를 보면 노자는 유가의 '仁'이라는 덕목 자체는 인정했지만, 그것을 통치술에 활용하는 '仁政'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임 교수는 '곽점본' 노자로 볼 때 노자 또한 '인정'을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해석한다. 과연 노자라는 텍스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학계의 좀더 깊이있는 토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리뷰팀)

07. 07. 16.

P.S. 비전문가로서 <노자> 텍스트 비평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갖기 어렵고 대신에 노자 사상/철학의 '해석'의 문제에 주의를 두게 되는데, 나의 견문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강신주의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이다. 이 또한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어서 최근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됐는데, 책의 타이틀 자체가 상당히 '모던'하면서 파격적이다. 흔히 '형이상학'으로 이해되는 노자철학을 '정치철학'으로 재해석하는데,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도덕경>은 가령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같은 책이라는 것이다. 관련학계의 반응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그런 '반응'을 따로 알 길이 없어서 리뷰 기사 정도만을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4. 05. 14) 군주의 통치윤리로 ‘老子’ 뒤집어 읽기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와 대중의 지적 호기심을 환기시켰던 흐름 중 하나로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인 노자에 대한 관심을 들 수있다. 공중파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노자 열풍’을 지피는 데 공헌한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외에도 국내외 수많은 연구자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텍스트 ‘노자’에 주목했으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한 다양한 책을 끊임없이 내놓아 왔다. 이에 따라 과거에 양생술(養生術)이나 통치술, 처세술, 무(無)의 형이상학, 마음의 수양론 등으로 이해해온 데서 나아가 최근에는 유토피아적 무정부주의나 생태철학, 페미니즘의 이론적 기초로 보는 견해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노자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노자 이해의 주류를 이뤄왔던 것은 중국의 보편적인 형이상학 또는 형이상학적 수양론의 결정체로 보는 견해였다. 이는 지난 2000년 가까이 노자 이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중국 위진 남북조시대 왕필(226~249)이라는 천재가 18세에 붙인 주석의 탓이 크다. 노자의 사상을 ‘개인’의 관점에서 조망함에 따라 일반 대중에게 ‘노자’는 무욕(無欲)의 삶을 설파한 마음의 수양론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개인에게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전해주는 교훈서 또는 ‘삶의 기술’을 통찰해낸 성인(聖人)의 글로 이해돼 왔던 것이다.

이에 반해 책은 개인이 아닌 ‘국가(state)’의 관점에서 ‘노자’를 해석하면서 기존의 노자 이해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장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전쟁과 살육, 주장과 논쟁으로 뜨거웠던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과 갈등을 국가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 국가의 논리를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게 숙고한데서 ‘노자’의 의미를 발견해낸 것이다. 물론 ‘노자’라는 텍스트에서 국가라는 관점을 찾아낸 것이 저자가 처음은 아니다. 한비자(韓非子) 이래 최근까지 많은 철학자가 ‘노자’에서 국가를 읽어냈지만, 이들의 작업은 그동안 통치술로 가치폄훼돼온 현실에서 보듯 뚜렷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우선 20세기 후반 중국에서 새로 발견된 판본들을 통해 기존 노자 이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모두 81개 장으로 이뤄진 ‘노자’란 텍스트는 그동안 주로 왕필이 주석을 붙인 ‘왕필의 판본’에 근거해 해석돼왔다. 그러나 1973년 중국 남부 창사(長沙) 마왕두이(馬王堆)의 무덤(기원전 168년으로 추정)에서 비단에 쓰인 2종의 ‘노자’ 백서본(帛書本)이 출토되고 다시 20년 뒤인 93년 허베이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전국시대(기원전 475~221) 중기 무덤에서 ‘노자’의 일부분이 들어 있는 대나무 문서(죽간·竹簡)가 발굴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결국 우리는 ‘노자’에 대한 상이한 판본을 3종류 가지게 됐는데,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의 순서가 바뀌고 글자 일부분이 다른 점을 제외하면 백서본과 왕필본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다. 반면 곽점본의 경우 백서본과 달리 유가사상에 적대적이지 않고 유(有)와 무(無)가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위상을 가지는 등 몇가지 사상적인 차이점이 나타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상의 두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노자’ 81장을 포괄적이고 하나의 연결된 문맥으로 독해할 것을 주장한다. 81개 장 전체를 동일한 비중으로 고려하지 않았고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도가도비항도·道可道非恒道)”와 같이 일부 몇몇 장만 핵심적인 장으로 간주해 온 것이 기존 노자 이해 의 문제점이란 것이다.

모두 10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노자’라는 텍스트의 핵심을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교환의 논리를 발견한데서 찾고 있다. 군주가 통치자라는 자리에 오래 있기 위해서는 세금의 대 가로 무엇인가를 피통치자들에게 주어야 하며, 만약 이 교환의 논리를 어기게 되면 군주는 결코 통치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음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가라타니 고진, 라이프니츠 등의 저작과 사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저자는 노자가 유가와 법가를 비판적으로 종합해 사랑과 폭력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제국의 논리를 제공했으며, 이는 한(漢)제국을 거쳐 현재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제국의 논리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연히 ‘노자’에 나오는 수양론도 대상이 군주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이와 함께 장자 연구자인 저자는 노장(老莊)으로 한데 묶어 이해해온 도가(道家)라는 범주가 해체돼야 한다는, 일반 독자들에게 매우 도발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제기한다. 군주와 국가의 철학자
였던 노자와 단독적인 개체와 삶의 철학자였던 장자를 함께 도가 또는 노장사상으로 부르는 것은 사마천의 분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 뿐 순자(荀子)의 저서나 ‘장자’를 정밀하게 독해하면 노자와 장자가 별개의 학풍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노자의 해석과는 판이하게 다른 저자의 주장이 일반 독자들에게 당황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의 ‘노자 열풍’ 속에서 노자에 덧씌워진 각종 신비한 외관을 벗겨내고 그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저자의 주장은 독자들이 음미할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최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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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16 21:52   좋아요 0 | URL
장자에 이어 노자까지 자꾸 제 가슴에 불을 지피시는군요. 둘 다 매우 관심있고 파들어가보고싶은 매력적인 철학자입니다. 저도 겉핥기 정도의 지식 밖에는 없죠. 장자와 노자는 공부하려면 좋은 텍스트들이 참 많습니다. 지적하신 강신주씨 같은 경우 <도에 딴지걸기 노자와 장자>를 통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도 섞어가면서 재밌게 노자와 장자를 비교하기도 하고요.

로쟈 2007-07-17 00:47   좋아요 0 | URL
제가 방화까지 하다니요!^^; <장자 & 노자>는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자가 보다 면밀한 책을 써서 중국이나 미국에 자신의 학설을 소개하는 게 어떨까 싶었어요...

가넷 2007-07-17 00:35   좋아요 0 | URL
장자와 노자 아닌가요...^^;

로쟈 2007-07-17 00:4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노자읽기 2007-09-18 22:3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일년전 쯤 노자, 곽점초간, 백서, 통행본을 완독, 비교 연구해 본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최근에 그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일년의 소회라 하면, 생각보다, 현대 우리는 한문 독해 능력이 참 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
임교수님과 오교수님의 논쟁이라면, 저는 오교수님의 입장입니다 .참고로 백서의 표현은 '책상, 밥상, 안석 안案'이라 했습니다. 번역해 보면 큰 도가 기울고(大道廢), 책상, 밥상피고, 안석 기대고 인, 의를 잡고 있다(案有仁義)는 것입니다 즉 오교수의 번역에서 제 번역은 더 나아간 것인데, 큰 도가 짓밟고(大道發), 편안히 인, 의를 가졌다(安又{身心}義)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기존 통행본 도덕경에, 安, 案이 없는 것 보다 더 파격적이고, 심한 비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덕경은 安, 案을 누락해서 더 순화된 표현을 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가와 도가의 대립점이라면 유가 또한 무위를 주장하기도 하여 무엇보다, 무위냐, 유위냐의 대립이 아니라, 正名과, 無名이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유가는 배워서 더 잘 이름을 알고 이름에 걸맞게, 즉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살자는 것이고, 도가는 억지로 끌어 올려 배워 익히지 말고, 왕도 스스로 고아, 과부, 나쁜 놈으로 부르며 외롭고 천하니, 이름을 가리지 말고, 날마다 비워, 스스로 그러한 바 대로 내 맞겨도 왕은 왕이고, 신하는 신하고, 백성 또한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말 나온 김에 이를 다시 법가와 비교하자면, 법가는 刑名이라, 이름을 벌준다(?!)는 것이니, 신하가 신하 답도록, 백성이 백성 답도록 상벌을 명확히 해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저도 강신주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가장 탁월한 관점은 아마도 무뮈무불위에서, 무불치지나, 무소불위와 같은 개념이 나와서, 통치론으로 노자가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강신주 님은 아예 노자가 곧 이러한 통치론, 심지어 파시즘적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강론하지만 말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이무불위가 나오는 장은 도덕경에서 딱 두 장인데, 첫 째는 37장에 도상망위편이고, 두 번째는 48장에 위학자일익편입니다. 그런데 48장에는 초간부터 而亡丕爲가 있는반면, 37장에 而無不爲는 현행 도덕경에서 덧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초간에는 아닐 不이 아니라 커질 丕를 쓰고 있으니, 짓길 잃고도 짓기가 커지길 잃는다는 뜻이거나, 丕가 혹 不의 필사 중 오기라면, 짓길 잃고도 짓지 않기를 잃는다는 뜻으로 행위를 잃었는데도 행위하지 못함이 없다(無弗爲; 사실 이렇게 못한다는 것이라면, 不이 아니라 弗이라 해야 합니다. )는 뜻이 아니라, 행위를 잃고 또, 행위 하지 않아야 함에서 자유롭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대게 사람은 무엇을 한사코 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무엇을 한사코 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8장에서는 이는 직접 도를 말하는 술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도를 무위라 여기게 된 것은 [도덕경] 37장에서 道常無爲而無不爲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25장 도법자연 구를 덧붙여, 우리는 현재 道는 無爲自然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서 갑이나, 을은 모두 '도항무명'이라 했으니, '이무불위'라는 구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초간은 예초에 道를 말한 것도 아니고, 행위의 도인 갈 행行 가운데 人을 끼워 넣은 글자,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구전에, '도 인'자라는 것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간에선 그럼 이 행위의 도와 노자의 도가 같은 것인가? 이는 똑같은 형식으로 즉 인항무뮈와, 도항망명이라 한 장을 비교해 알 수 있는데, 결론 부터 말하면 초간은 도와 인을 같이 보지 않고, 인을 도에 못 미치는 것으로 봤다는 것입니다. 초간 12편(도덕경 32장) 망명의 도는(道恒亡名) 종놈이고(僕), 단지 점괘를 전하는 여자일 뿐이라고(唯{卜曰女}, 천지가 감히 신하삼지 못하고(天地弗敢臣), 만가지 날림들이 스스로 집안에 재물인데(萬勿將自{宀貝}) 비해, 37장에 인용된 초간에선, 행위의 도인 인은 항구히 짓기를 잃어({行人}恒亡名, 후황이 지켜지는 것임에도(侯王守之) 그래도 만가지 날림은 스스로 마음 짓고(而萬勿自{爲心}, 마음 짓고도 욕망을 갑자기 일으키니({爲心}而慾作}, 이름 잃은 깨침인 것으로써 바로 잡아지는 것({貞之以亡名之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서에서는 이제, 행위의 도인 인과 망명의 도가 구별되 쓰이지 않고, 오직 도만이 쓰이게 되었고, 그래도 백서는 이를 차마 无爲라 하지 못하고, 오직 無名이라 옮기게 되니, 이미 망명인데, 다시 망명지박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통행본처럼 다시 초간을 따라, {行人}이 이미 道라 바뀐 상황에서 무위라 하는 것 역시, 상황을 반전시키지 않았으니, 통행본은 도가 늘 함이 없고, 게다가 하지 못함이 없어, 후왕이 이를 잘 지키고(侯王守之) 만물도 장자 스스로 잘 바뀌는데(萬物將自化), 바뀌다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욕망이 일어나고(化易欲作), 그러면 내가 이름 없는 통나무 인 것으로 누르는 것이라 하게 된 것입니다. 즉 통행본의 논리 속에서도 무위이무불위 한 도는 다시 무명지박의 힘을 빌어야 하는 만큼, 無所弗爲, 無弗治之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백서가 도를 차마 무위라 하지 못하고 논리적 모순이 있더라도 한사코 망명이라 한 것은 결국 도는 초간이나, 백서나 망명의 도라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무위를 무불치지로 착각하여 통치술로 본 것은 법가의 오해라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사실 초간에서는 治자가 쓰인 적이 없고, 바로 잡아서 나라를 좌지우지 하고(以正之邦), 창을 크게 구부려서 병장을 꿰고((以{奇戈}甬兵), 기원해 섬기길 잃고서 천하를 취한다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법과, 천하를 취하는 일이 다르다 구분했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천하를 천자 또는 황제가 다스리는 천하로 본다면, 어쩌면 비약일 수 있습니다. 혹 춘추전국시대 천하를 주유했던 모든 유가들이 재패하길 소망하는 바, 당대의 세계, 세상을 말한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설혹 초간에서 백서로의 변화가, 혹 정치적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유독 법가적 관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문헌적 검토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자, 특히 전국시대 백서 노자를 법가라 보는 김홍경씨나, 강신주님의 책에는 그러한 문헌적 검토가 없는데다, 이를 테면, 한 고조본 즉 백서 을 노자를 전국시대 노자로 보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게 도덕경에 꿰어 맞추어진 현행 백서 노자 번역본을 빌어 쓰다 보니, 현행 도덕경을 전국시대 노자라 우기는 사태도 비일비재하게 됩니다 . 무엇보다, 강신주님이나, 김홍경씨가 증명해야 할 것은, 노자를 통치이념으로 써서, 춘구전국시대 '파시즘'을 구가한 군주나 그러한 통치예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아다시피 현행 [도덕경]을 정리한 한 고조의 네째 아들 문제는 노자를 좋아하여 법령을 간소히 하고, 함이 없는 정치를 행하다, 비록 명을 길게 하여 제위기간은 좀 길었을 지언정, 흉노의 침입과 귀족들의 반란을 막지 못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다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9-18 22:33   좋아요 0 | URL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책으로 내시는 건가요?). 저야 '관전자'의 입장지만, 부엌데기님의 입론을 기대하게 되는군요.^^

노자읽기 2007-09-18 22:43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 줄 데가 없는데요... ^_^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수천년간 그 이해가 답보 상태였던, [노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제겐 정말 행복한 '삼 년'이었습니다.

2007-09-18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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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간본(곽점본, 초간본) 노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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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을 지나면서 즐찾이 1200명을 넘어섰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즐찾이 1000명쯤 되는 게 이 서재의 '적정규모'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작에 목표달성은 한 셈이다. 목표? 한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인 주절거림이라도 '사회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독자층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치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게으른 알라디너가 됐을 것이고(언제부턴가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페이퍼를 비공개로 돌렸을 것이다.

조촐한 기념거리를 찾다가(그렇다고 이벤트까지 열 생각은 없고) 7년전 이맘때 일기를 들추게 됐다. 모스크바통신에도 가끔씩 일기를 정리해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올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발동한 것이다. 나이테 하나를 그어두기 위해서는 비교거리(과거의 흔적)도 있어야겠기에 정래해놓는다(정리라는 건 몇몇 고유명사를 삭제한 것이다). 마침 알라딘에 처음 리뷰를 올리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아의 외투'란 제목을 달고 있던 일기의 타이틀도 '로쟈의 기원'으로 바꾼다. 잠시 기억을 되새기는 이 일기 읽기는 <오! 수정>으로부터 <로스트 하이웨이>까지의 여정이다.

00. 6. 15
정확히는 16일. 2시가 되어 간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만남이 2-3일간의 뉴스를 모두 채우고 있다. 그 틈에 나는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홍상수의 <오! 수정>을 봤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와 다시 본 <부기 나이트>에 이어서. 홍상수의 영화적 작업은 어쩌면, 니체, 프로이트, 맑스가 가져온 정신사적 가치의 전도와 비슷한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글로 쓸 만한 거리가 될 듯하다. 그가 말하는 ‘표면’이란 게 심층이라고 믿어져 온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표층 해석학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것.

흑백인 것과도 연관이 되겠지만, 그의 영화 속 세계는 70년대 후반쯤의 정서에 고착되어 있어 보인다. 몇몇 모티브들은 결코 90년대의 것이 아니다. 핸드폰이 그나마 유일하게 동시대와 연결지어주는 매개물인데(그리고 지하철 안산선), 인물들과 정서, 그리고 인사동이라는 배경 모두가 이전 세대의 것에 속한다. 홍상수식 아나크로니즘? 이건 약점은 아니어도 빈틈은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빈틈.



<매그놀리아>는 소문 대로, 알트만의 <숏컷>을 떠올리게 할 만한 규모와 주제와 긴장을 갖고 있는 영화. 29세에 이미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타란티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그는 이미 믿을 만한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건 그가 대가라는 의미이다.

번역 독촉이 온 모양이다. 새로운 적의를 갖고 다시 일손을 모아려 보아야겠다.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비교하는 글을 빨리 완성하고도 싶고. 몸과 마음, 그리고 돈이 각기 따로 노는 세상이라니!..

 


00. 6. 18
어제 산 책은 러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 번역본은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다. 내가 어떤 문제로 무력감과 고민에 빠져 있는지를 이 책은 잘 요약하고 있다.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필자의 결론이 궁금하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은 분명 파산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에의 꿈마저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야만성과 부도덕성 때문이다.(<부르주아 유토피아>도 사서 볼까?)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도 읽고 있다. 내가 가진 문제틀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사회적 정의와 (개인에게서) 예술적 창조의 문제. 정의(justice)와 가능성(possibility)의 문제. 사회적 정의와 시적 정의의 문제. 요약하면, 정의의 문제. 

 

그러고 보면, 리자드 로티의 문제틀을 그대로 따온 것 같기도 하다. 이 둘이 매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직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관심을 집중해 보기로 하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논문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유령들('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실체화/현실화. <공산당 선언> 읽기도 병행해야겠다. 1848년. 최초의 유토피아 종언론.(1807년 예나를 제외하면)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1950년대 초반. 이어서 1989년, 1991년. 루카치도 빨리 읽어야겠고...



00. 6. 21
독서대학에 가서 <롤리타> 강의를 들었다. 나보코프 얘기보다는 프로이트 얘기가 더 많이 나왔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대해선 몇 가지 배웠지만, 나보코프와 <롤리타>에 대해서는 기대만큼 얻을 것이 없었다. 일단, 지나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작가의 죽음이니 하는 풍문에 의존하여 작품을 미리 재단하는 듯했다. 실재(리얼리티)의 파악 불가능성 하나만으로 작품의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주제에 대한 너무 지나친 집착. 이건 일종의 미스리딩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라는 주제를 잘 짚어내고, 이야기가 몇 차례 굴절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나보코프 대신에 사실주의 작가 퀼티의 죽음을 놓고 작가의 죽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찾아봐야겠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입문서 한 권을 그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요즘 전철에서 읽고 있는 책은 <유토피아의 종말>. 다원주의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복원은 신선해 보인다. 그것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신선해 보이는 것은, 다들 쉽고 편하게 지나쳐버리는 주제이고 태도이기 때문이다.

보이드의 나보코프 전기 두 권과 데리다와 문학에 대한 연구서 등이 주문해서 사고 싶은 책들이다. 내일은 도서관에 있는 나보코프 자료들을 복사하고 1학기 성적처리를 할 예정이다. 학원일은 학생들이 하나 둘 늘어갈 것 같아 걱정을 조금 덜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고, 돈이다.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걸 계급의 한계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00. 6. 22
학교에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자료들을 복사했다. 나보코프는 분량이 많아서 복사비만 만 오천 원이 더 들었다. 그리고 구내서점에서 문예미학회에서 나온 <해체론과 맑스주의>를 샀다. 주로 대구 지역의 인문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나가는 학회인데, 교수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통 굴리기’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 데리다와 해체주의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이해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사들었다. 사실 해체론과 맑스주의란 주제를 처음 부각시킨 마이클 라이언의 책을 이전에 대출해 놓기도 했다. 해체론과 맑시즘,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문학사회학, 대략 이런 것들이 문학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나에게 의미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데리다를 읽어야 하고, 맑스와 가라타니 고진을 읽어야 하고,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을 읽어야 하며 루카치와 부르디외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들뢰즈까지.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다루려는 계획을 어느 정도에서 매듭지어야 할지 고민중이다. 충분히 다룰 수는 없고,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데, 그걸 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유토피아의 종말>에서의 지식인 비판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저자인 자코비의 <사회적 건망증>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고 요점을 명확히 하고 비판할 대목에 가선 눈치보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다. 마치 미국판 강준만의 글쓰기 같기도 하다.

 



00. 6. 25 
돌잔치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간으로 서평에 오른 <미>란 책을 사들었다. 의대 교수가 쓴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 표지 장정이 맘에 안들고, 교정도 불충실하지만, 관심있는 주제여서 일단을 손에 넣었다. 이런 식의 책들은 일주일에 한 권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푸코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읽는다. 아니 읽어야겠다.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란 글에 다시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 글은 푸코의 글에 대한 상세한 주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른바 (새로운) 해석학의 문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포기할 때 우리가 진리에 대한 점근선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은 해석학이다. 인식과 들어올림의 문제.  

 

여러 가지 글거리들이 있다. 가령 나보코프와 프로이트, 나보코프와 히치콕. 양손잡이 세계. 그리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 망명 문학 등등. 그것들의 상당수가 포기되거나 폐기처분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논문 준비도 있고. 책을 사거나 복사하는 일에만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내가 과연 무얼 이룰 수 있을까?

 



00. 6. 27 
맬컴 보위의 <라캉>을 그제부터 읽고 있다. 오역은 아니라도 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라캉 자신이 쓰는 용어들에 신조어가 많고 또 전․후기의 용례와 강조점이 다른 까닭에 다 따라가기가 힘든 것이다. 일단은 윤곽만 잡을 생각이다. 이후에 벤베뉴토와 아니카 르메르, 마이클 페인, 마단 사럽 등의 입문서를 읽으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그의 <에크리>를 짬짬이 읽어가면서.

00. 6. 28
학교에 들러서 몇 권의 책을 반납하고 다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라캉에 관한 책들. 맬컴 보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김상환 교수의 강의 교재가 데리다의 <우편엽서>와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었다. 다른 책을 한두 권 더 보고, 르메르의 책을 읽을 계획이다. 물론 데리다를 읽는 건 그것보다 늦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을 읽는 일도 지난 봄에 잡혔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여러 모로 밀린 책들이 많다.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지젝과 리네츠키(Linetski)의 글을 상당수 프린트로 뽑았다. 지젝은 근래 가장 저명한 헤겔파(혹은 셸링파) 라캉주의자이자, 문화이론가이다. 반면에 바짐 리네츠키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현재 이스라엘의 헤브루대학 교수로 있다고 한다. 러시아 태생인듯한데, <안티-바흐친: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좋은 책>이라는 러시아어 저서까지 갖고 있다. 흥미가 있어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글을 뽑아놨는데, 간혹 이렇듯 지명도 있는 신예 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의 <안티-바흐친>을 구해보고 싶다.

내일은 다시 국립도서관에 가볼 작정이다. 스프링 제본할 책이 몇 권 있고, 간 김에 라캉 연구서도 한두 권 복사할 계획이다. 라캉의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에크리>의 영어판 색인에는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이 딱 한번 나온다. 라캉이 좀 더 여러 번 말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그걸 내가 대신 말하고 싶어진다.

 

 

 

00. 6. 29
국립도서관에 가서 라캉과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 연구서들을 복사했다. 장 뤽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라캉 연구서를 챙긴 건 수확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 <하이데거와 데리다>, <안티오이디푸스 입문>, <문자의 타이틀> 등이 제본한 책들이다.

00. 7. 3
마단 사럽의 <알기 쉬운 자크 라캉>을 읽었다. 맬컵 보위의 <라캉>에 이어 읽은 것인데, 보위의 것보다는 읽기가 수월했다. 보다 평이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라캉의 전보가 손에 잡힌 건 아니다. 아직 개념정리가 확실히 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라캉 사전을 참조해 가며 더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라캉 읽기 혹은 라캉 사용하기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 유형을 떠올려 본다. 지젝과 제임슨, 그리고 페미니즘(이리가레와 크리스테바)이 그것이다.

지젝의 책들은 대부분은 제본하여 갖고 있고, 인터넷에 떠있는 아티클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제임슨의 책들은 대부분은 구할 수 있다. 한두 편의 주요 논문 정도만 찾으면 된다. 페미니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셋과 모두 맞물려 있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무엇보다는 메츠를 읽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독서 계획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데리다가 있다. 포우에 대한 라캉과 데리다의 읽기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바버라 존슨이 한 일).

한길사의 로로로 시리즈 중에서 <히치콕>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자신의 영화에 대해 평가하면서 포우가 문학에서 한 일을 자신은 영화에서 해보고자 했다는 히치콕의 증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포우를 중심으로 하여 히치콕은 나보코프와 만난다. 그리고 라캉과도 만난다. 히치콕과 나보코프는 재미있게도 1899년생 동갑내기이다. 이들에 관해서 뭔가 재미있는 글이 씌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히치콕의 영화들에 대한 관람 계획도 필요하다.



라캉 읽기와 관련해서는 일단 그의 컨텍스트를 먼저 읽기로 한다. 보위나 사럽의 책들은 약간 어중간한 형태의 전기라 할 수 있겠는데, 아니카 르메르나 마이클 페인, 그리고 데리다의 글들은 라캉의 텍스트를 주의깊게 읽는 작업에 해당한다. 거기에 대하여 라캉의 컨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 책들이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 그리고 스튜어트 슈나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이다. 새물결에서는 루디네스코의 방대한 라캉 전기가 번역되어 나올 거라고 한다. 

그래서 컨텍스트에 대한 책들을 먼저 읽고, 텍스트에 대한 책들은 직접 <에크리>를 읽는 작업과 병행해 나갈 작정이다. 물론 라캉의 텍스트 읽기는 프로이트 읽기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컨텍스트 읽기와 함께 지젝과 권택영의 책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일단 7월에는 컨텍스트 읽기, 8월에는 텍스트 읽기가 목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러시아 문학에 대한 적용 가능성은 항상 탐색거리이다. 가령, <우리들>에서의 거울 이미지. 그리고 폰비진의 <미성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나보코프의 소설들의 경우.



00. 7. 4
강남 동화서적에 들렀다가 시공사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온 마틴 제이의 <아도르노>를 샀다. 지성의 샘에서 나온 번역본을 이미 갖고 있는데도, 잠깐 잊었었다. 다행히 새 번역의 가독성이 훨씬 좋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의 <부정의 변증법>도 마찬가지겠지만, 번역 불가능성의 사례로서 지적될 만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도르노인 듯하다. 하지만 새 번역을 통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의 전문가인 마틴 제이의 권위 있는 해설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 

 

특히 관심있는 부분은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혹은 <미니마 모랄리아>).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잠시 망명해 있던 시기의 저작이고, 또한 가장 니체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오직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사유만이 참되다.” 음미해 볼 만한 부분이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건 모더니즘 작가로서의 베게트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 그는 자신의 <미학이론>을 베케트에게 바치려고 했단다. 라캉 읽기에 불쑥 끼어든 아도르노 읽기이지만, 나는 곧 라캉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TV문화기행 코너에서 토마스 하디 편이 방송되는 걸 봤다. 테스가 겁탈 당하는 장면이 세 차례에 걸쳐 개작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무지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바로 <테스>의 계보를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게 새로 알게 된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그의 고향 마을의 농촌 학생들은 그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을 구해봤으면 싶다. 어디 번역되어 있을 것도 같은데, 전혀 검색이 되지 않는다.

 

00. 7. 8
며칠간 인터넷 자료들과 대출한 책들을 인쇄하고 복사했다. 어제 뽑은 것 중에서 제일 흥미로왔던 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한 글. <이미지>란 잡지에 제임스 데이빗슨(비디오 평론가)이 기고한 것인데, 사실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해보는 글은 내가 먼저(!)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들고 있는 공통점은 다섯 가지이다. ①게임 이론 ②카메오 출연 ③자기 지시적 기법 ④분신들과 “신빙성 없는 화자” ⑤공통적인 문학적 영향(특히 포우). 어쨌거나 수고가 반 이상 덜어지게 되어 다행이다. 참고문헌을 보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다룬 글은 이게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최초’라는 자리를 놓치게 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00. 7. 11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을 다 읽었다. 알라딘에 서평까지 올렸다. 라캉 이론의 테두리를 긋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이지만, 이론의 내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정신분석의 사회학이면서 일종의 지성사인데, 프랑스에서 프로이트 혁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변모 과정을 잘 개괄하고 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정신분석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실, 즉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대면하는 것이다.”(307쪽) 그런 점에서 미국식의 적응주의적, 실용주의적 정신분석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다. 그 다음. “알튀세르와 라캉에 있어 '과학만이 전복적이다'”(310쪽) 두 이론가가 모두 왜 그렇게 과학(과 수학)에 집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정치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친 라캉의 영향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중적인 철학(신철학)과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에서 나타난다.”(311쪽)는 대목.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73)가 제일 먼저 출간된 곳은 프랑스였다. 터클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래도 미국에서의 라캉을 다룬 에필로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일종의 시작(詩作)이다. 라캉에게 시인과 정신분석가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332쪽)



“정신병은 엄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병자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엄밀해지고자 노력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정신병자이다.”(라캉) ‘정신병자’ 라캉의 전략은 과학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엄밀한 작업을 피하기 위해 시적인 합리화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과학적 엄밀함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4쪽) 그리하여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다.”(336쪽)

라캉 독서 계획. 슈타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을 읽으면, 콘텍스트는 끝난다.(루디네츠코의 책이 역간되면 콘텍스트에 포함될 것이다.)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정복>이나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 텍스트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00. 7. 14
어제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복사했는데, 그 중 어얼리치의 <모더니즘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러시아 사상>이란 엔솔로지는 전권을 다 복사했다. 그만큼 수지가 맞는 책이었다는 얘기. 특히 어얼리치의 경우는 그렇다. 1994년에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이다.

7월도 보름이 후딱 지나갔다. 해야 할 일은 손끝도 대지 않은 채, 아니 손끝만 댄 채. 방향 상실의 세월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듯하다. 불행도 헹복도 말할 수 없는 시간... 



00. 7. 16
로로로 시리즈의 <히치콕>을 마저 읽었다. 대출한 지 보름이 지났다. 너무 밋밋한 전기. 영화감독의 개인사라는 게 그의 작품세계만큼 흥미로울 수는 없는 법이고, 주요 작품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짧다. 그냥 히치콕에 대한 윤곽을 잡는 데 유용한 책. 더 두꺼운 전기나, 대담, 연구서들을 봐야 할 듯하다. 트뤼포와의 대담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널드 소포토(Donald Spoto)의 저명한 전기는 갖고 있다. 물론 그에 관한 참고문헌은 수백 권을 헤아리지만...

작년, 1999년의 키노 12월호는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에 바쳐지고 있다. 지젝의 책들과 더불어, 라캉과 더불어, 히치콕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물론 나보코프와 비교도 해볼 만한 작업일 것이다.  

00. 7. 19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올린 서평 중 <미- 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평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히치콕에 대한 것만 올라와 있었다. <유토피아의 종말>에 관한 것도 한번 더 올려봤는데, 이것도 올라오지 않으면 문의해볼 생각이다. 또 인터넷 카페로 개설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꼭 1년이 되었다. 한 살을 먹은 것. 회원수가 119명. 내일로써 120명이 채워졌으면 싶다. 3일에 한 명 꼴로 회원이 는 것이니까 실적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카페나 마찬가지지만 비활동 회원이 많다는 것. 매일 들르는 회원은 10명이 채 못되는 듯하다. 반면에 칼럼은 실족이다. 새로 칼럼을 띄우지 않은 지 두 주가 넘은 듯하고, 회원들도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쪽으로 업종 전환을 해야 할 듯.

새로 나온 신간 중 몇 권이 눈에 띈다. 마음에 내키는 책들은, 모아둔 것까지 하면 10여 권쯤 될까. 뭐라도 당첨이 되었으면 싶은데... 정말 뭐라도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에 다시 치이고 있다. 막상 시간은 내지 못하면서 부담은 크다. 리포트도 그렇고. 어떻게든 타개책을 마련해야 할 터인데... 정신분석에 요즘 마음이 갈 만한 이유들이 어쨌든 있는 것이다!



00. 7. 23
알라딘에 올리는 서평들은 잘 올라가고 있다. 세 편이 추천서평에 꼽혀 있는데, 우수작으로라도 뽑히면 좋겠다. 10만원 정도면 책가뭄을 얼마간 해갈할 수 있을 듯하기에.

어제는 EBS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보고, 오늘은 비디오로 <로스트 하이웨이>를 다시 봤다. 린치는 정신분석적 접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게 된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경우는 나보코프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 모델(‘다른 세계’)이 유력한 해석의 방안처럼 보인다. 물론 그 자세한 읽기는 보다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00. 7. 25
김형효 교수의 하이데거 연구서를 손에 들었다.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주로 초기작인 <존재와 시간>의 ‘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년에 속편을 낼 예정이라고.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박식함과 성실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글 또한 일정한 수준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어 반갑고. 다만, 글쓰기의 문턱에 대해서 아직은 가볍게 생각하는 듯하다.  

불교나 노장 사상을 가지고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론을 읽는 건, 물론 얼마간 성과를 낼 수 있을 터지만, 역시 근원적인 한계를 가질 법하다. 그것은 불교나 노장 모두, 언어를 불가피한 장애물 정도로 다루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다리로 취급하는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면 버려야 하는, 아니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김 교수의 문체가 진지하되, 유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겠다. 물론 모처럼 개성적인 하이데거 연구서가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올해에 새로 나온 연구서만 세 권쯤 된다. 신상희 박사의 <시간과 존재> 연구서와, 권순홍 교수의 <존재와 탈근거>가 그것이다. 언제나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을 가질 수 있을까?

 



인터텟에서 나보코프에 관한 비평 자료들과 함께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에 관한 글들을 뽑았다. 린치와 지젝을 비교한 장문의 글도 있었는데, 독어여서 입맛만 다셨다. 지젝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한 책도 쓰고 한 모양이다. 아무튼 정신분석학자들의 구미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들을 다 챙겨보기도 했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도 거의 본 것 같고, <사구>(듄)도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비디오로 빌려다 본 적이 있다. 그의 필모그라피 중에서 <로스트 하이웨이>가 가장 최신작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와일드 앳 하트>와 <로스트 하이웨이>. 전자는 아마도 가장 먼저 본 영화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듯하다. <이레이져 헤드>도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이다...

07. 07. 16. 


P.S. 여름일기가 7월로 끝난 건 그해 8월에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적어도 나는 그해 여름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었다. 애당초 '노아의 외투'란 제목이 붙여진 건 그래서였다). 이후로 정신없었던 건 당연하고 게다가 아이는 한달 동안 병원신세까지 졌었다. 그래도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고, 내가 알라디너 8년차에 들어선 올해 8살이 되어 학교엘 갔다. 쑥쑥 자나라는 아이와 비교해본다면 나의 '지적 성숙'이란 게으르기 짝이 없다(아이는 '또 알라딘!'하면서 서재질을 할 때마다 나에게 주의를 준다!). 릴케라면 '부도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DNA보다 분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지...

 

P.S.2. 그럼에도 이 정처없는 질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http://www.youtube.com/watch?v=pD3_9yd72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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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
1200 즐찾이라 와우...
여튼 축하드리고 갑니다.

로쟈 2007-07-16 15: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07-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1200이라... 엄청나군요. 아마도 저 정도 숫자는 바람구두님과 로쟈님 뿐일듯.
그나저나 저 아이가 로쟈님을 많이 닮은거 같은데요? 눈과 볼이 :) 저는 비록 사진으로만 봤지만. 귀엽습니다.

로쟈 2007-07-16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기여분이 있을 텐데, 사실 아이는 엄마의 판박이입니다...

드팀전 2007-07-1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 일단 축하해요.
로쟈님 책은 결코 만만한 책들은 아닌데 이렇게 즐찾이 많은 건 사람들이 그만큼 인문사회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나...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하고 ^^(김창렬이 유행시키고 있다는 '같기도' 버전)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올려주시길.

로쟈 2007-07-16 18:25   좋아요 0 | URL
워낙에 댓글들이 없는지라 저는 그 숫자가 다 허수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단 다른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 '허수'에라도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죠.^^;

퍼그 2007-07-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저도 항상 시달리는 고민인데, '규모'는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을 듯합니다. 그리고 아마 허수 아닐 거예요. 말하긴 어렵지만 그... 하여간 댓글 달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1200 즐찾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7-07-16 23:27   좋아요 0 | URL
인문학이 원래 밥벌이 잘 못하는 기생학문이잖아요(그래서 왕후장상의 학문이란 말도 하고). 퍼그님은 능력있는 배우자를 만나길 바랍니다.^^

필라멘트 2007-07-1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뜸한 건 달았다간 수준이 들통날까봐 그런거죠. 허수는 아닐겁니다. 댓글을 달고싶어도 웬만한 지적 내공자가 아니고선 왠지 머뭇거려지는.. ㅎㅎ

로쟈 2007-07-16 23:42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 '바닥'을 드러내는 글들도 많은데요.^^; 게다가 제 딴엔 부러 흰소리도 많이 하는데 잘 먹히지 않네요.--;

작은앵초꽃 2007-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많은 것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참 예뻐요.

로쟈 2007-07-17 09: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유명인사분들이 오늘은 많이 오셨네요.^^

프레이야 2007-07-17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1200돌파, 축하합니다.
쉽지않은 책들에 읽기만 하거나 채 읽지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지만
그중 한 사람으로서 계속되는 질주를 기대합니다.
참, 일전에 언젠가 보았던 로쟈님의 사진 속 얼굴이 아이의 얼굴에 그대로
있네요. 참 똘망똘망하니 예쁩니다.^^

로쟈 2007-07-17 09:14   좋아요 0 | URL
똘망똘망한 거라도 절 닮은 거라고 아이에게 주입시켜야겠습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경우 2001년 1월 11일에 첫 리뷰를 쓴 전 즐찾 294명. 한편으로는 로쟈님에 비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적인 블로그를 즐겨찾는 사람이 294명이나 된다는 것에 움찔해버립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앗, 축하의 말을 빼먹었네요. 축하드려요. 로쟈님은 그럴만하다구요. ^^

로쟈 2007-07-18 18: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찾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사적인 블로그만은 아닌게 돼 버리죠(사서 고생하기도 하고--;). 한 20명까지는 '사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요. 흠...

이매지 2007-07-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달다가 무식이 탄로날까싶어 조용히 읽고 추천만 하고 간 것도 많은걸요 :)
어쨌거나 로쟈님의 즐찾 1200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07-07-18 23:24   좋아요 0 | URL
알고 모르고는 몇 걸음 차이나지 않습니다. 앎에 흥미를 느끼느냐가 사실 더 중요하지요.^^
 

인스턴트 커피, 곧 커피믹스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애연가들이 흡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듯이 커피(믹스) 애호가들 또한 이 '간편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요즘은 여름인지라 나는 하루 한 잔 정도의 냉커피를 마시고 두 잔 정도의 커피믹스를 습관처럼 마신다. 이렇듯 "습관적으로 마시게되는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를 바로보자"란 취지의 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몸으로 느끼게 되는 기사이다!). 이런 기사를 자주 읽어둬야 그래도 커피량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겠기에(반대로 내성이 생길까?).

한겨레21(07. 07. 12) 커피믹스, 오늘 몇 잔째?

하루에 1100만 개, 한 해에 43억 개를 마신다?
논술 잡지 <월간 논>을 만드는 신관식(32)씨는 지난 7년간 하루 평균 7봉의 커피믹스를 위에 들이부었다. 군대 시절, 힘들 때마다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먹던 습관이 제대 뒤에도 계속됐다. 하루 활동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보면 2시간에 한 봉씩 조제해 마신 셈이다. 사무실마다 신씨와 같은 이들이 많아서일까. 커피믹스 시장은 지난 5년 사이 3배 가까이 성장했다. 2001년만 해도 2128억원이었던 커피믹스 시장 규모는 매년 늘어 지난해에는 6047억원에 이르렀다. 커피믹스 한 봉당 가격을 140원(20개들이 2800원)으로 계산하면 연간 43억 개의 커피믹스가 팔려나갔다는 얘기다. 커피믹스가 ‘기호식품’을 넘어 대다수 직장인들의 ‘생필품’이 된 것이다.

“지방·화학첨가물을 위에 들이붓는 셈”
커피믹스 커피 제조 과정은 간단하다. ‘커피 스틱 포장 귀퉁이를 뜯는다 → 내용물을 컵에 확 붓는다 → 정수기 물을 받는다 → 휘휘 젓는다.’ 수십만 명의 대한민국 커피믹스 애호가들은 아침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회사원 배진옥(27)씨는 “아침에 졸릴 때 먹으면 잠이 깨는 느낌이라서, 아침마다 먹는다”고 말했다. “깜빡하고 안 먹은 날은 ‘오늘 안 먹었지’ 생각하고 일부러 타 먹는다”고 덧붙였다.

저마다 조제의 비법도 있다.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디자이너 김남연(36)씨는 “스테인리스 스푼으로 휘저으면 열이 뺏겨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꼭 내용물을 비운 포장지로 저어야 한다”며 “휘젓는 재미로 믹스커피를 마신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한 봉지의 커피는 한 잔의 소화제다. 주부 김경례(42)씨는 “밥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할 때 마시면 느끼한 느낌이 가신다”고 말한다. 등산 가는 이들도 배낭에 한두 개씩 꼭 커피믹스를 꼽아 가고, 술 먹은 다음날은 입 안을 개운하게 하려고 또 한 잔 타 먹는다. 커피믹스는 이렇게 다양한 용처를 갖고 많은 이들을 중독자로 만들고 있다.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 공화국이다. 커피 소비량은 세계 11위지만, 인스턴트 커피 소비량은 세계 정상이다. 서유럽, 미국 등은 원두커피가 커피 시장의 80%를 차지한다. 일본도 60%가 원두커피 몫이다. 반면에 한국은 인스턴트 커피가 78%를 차지한다. 지난해 9512억원 커피시장에서 원두커피 판매액은 372억원으로 입지가 미미하다. 대신 인스턴트 커피는 7452억원, 그중에서도 커피믹스가 6047억원이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유리병에 담긴 커피, 설탕, 프림을 티스푼으로 떠서 저어 먹던 모습은 이제 ‘추억’이 됐다. 지금은 가로 2cm, 세로 15cm의 막대형 포장이 병커피와 티스푼을 대체해버렸다.

그렇다면 커피믹스에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도 ‘믹스’돼 있는 것일까. 날마다 마시는 커피믹스에는 과연 어떤 성분이 믹스돼 있을까.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의 저자 안병수씨는 “커피믹스를 컵에 붓는 것은 지방과 화학첨가물들을 위 속에 들이붓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안씨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문제는 ‘프리마’라고 불리는 커피 크리머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 크리머가 우유나 유제품으로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고 있다.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각성이 필요할 때는 꼭 커피믹스를 집어든다”는 회사원 윤민혜(28)씨도 커피 크리머 성분을 묻자 “우유로 만든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짙은 갈색빛의 커피가 프림을 넣으면 ‘부드러운 밀크빛’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맛도 부드러워져 왠지 우유 맛 같다.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어서 문제
하지만 짐작은 사실과 다르다. 커피 크리머에서 커피 색깔을 묽게 만들어주는 주성분은 우유가 아니라 기름이다. 식물성 유지(기름)를 물에 섞고, 물과 기름이 잘 섞이도록 식품첨가물 유화제를 넣으면 커피 크리머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물에 기름을 섞어 만든다고 해서 아베 쓰카사(<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저자)는 커피 크리머를 ‘밀크맛 샐러드유’라고 부르기도 했다.

안병수씨는 이 기름덩어리에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된 것이 커피 크리머라고 설명한다. 맛과 향이 부드러운 커피 크리머를 만들기 위해 카제인나트륨, 인산이칼륨, 폴리인산칼륨 같은 각종 식품첨가물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사용되는 첨가물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공인한 것들이다. 안씨는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식품첨가물들을 자기도 모르는 채 하나씩 먹게 되면 하루에도 수십 가지 첨가물을 섭취하게 된다. 커피믹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3~4잔씩 별 생각 없이 꾸준히 먹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커피 크리머에는 예상과 달리 트랜스지방은 없다. 대신 100% 포화지방산이다. 포화지방도 다량으로 섭취할 경우는 건강에 해롭다. 한진숙 동의과학대 식품과학과 교수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할 경우 심혈관계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 아델레이드대 심장전문의 스티븐 니콜스 박사는 “포화지방인 코코넛 기름으로 만든 당근케이크와 밀크셰이크를 먹은 사람의 경우, 3시간 만에 동맥 내막 기능이 저하되고, 6시간 뒤에는 혈전으로 인한 염증을 억제하는 고밀도지단백질(HDL)이 감소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포화지방이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를 높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커피믹스 뒤의 영양분석표에는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고 쓰여 있다. 크리머의 포화지방이 콜레스테롤 함량을 높인다면야, 콜레스테롤 함량이 0mg이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김지영 식약청 전문위원은 “포화지방을 하루 섭취 열량의 10%까지 섭취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평소에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이 커피믹스 커피를 통해 추가로 포화지방을 섭취할 경우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커피믹스를 통해 섭취하게 되는 당분의 양도 적지 않다. 12g 커피믹스 한 봉에 담겨 있는 설탕은 5~6g이다. 하루에 커피믹스 다섯 봉을 먹는 사람은 설탕만 40g을 집어먹은 셈이다. 지난해 여성이 하루에 열량을 많이 섭취하는 식품 4위가 커피믹스라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김초일 한국보건산업진흥연구원 박사는 “이렇게 커피믹스 섭취량이 늘다가는, 언젠가 한국인이 섭취하는 당분이 죄다 커피믹스에서 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합성 착향료 추가하고서 ‘웰빙 커피’?
최근에는 이런 커피 프리머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감안해 ‘웰빙 커피’가 출시됐다. 하지만 이 웰빙도 미심쩍다. 특히 한국네슬레가 대니얼 헤니를 내세워 선전하고 있는 ‘웰빙 밀크커피’는 일반 커피에 없는 칼슘을 보강하기 위해 탈지분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일반 믹스커피에는 들어가지 않는 합성 착향료가 0.2% 첨가됐다. 안병수씨는 “커피에 들어가는 첨가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화제와 향료, 색소 등인데 기존 커피믹스에도 안 들어가는 합성 착향료를 쓰고서는 ‘웰빙’이라 이름 붙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혹과 의심,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커피믹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안경호 동서식품 홍보실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커피 심부름을 하던 여직원들이 크게 줄면서 스스로 커피를 타서 마시는 문화가 정착된데다 냉·온수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커피믹스 시장이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 실장은 “커피믹스가 커피 시장에서 점점 확대되는 분위기가 마냥 반가운 건 아니다”고 말했다. 커피믹스 판매가 증가하는 것은 곧 ‘경기가 좋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 안 실장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빨리 털어 빨리 먹는 믹스 커피를 마시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똑같은 커피를 먹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커피는 농도의 높낮이에 따른 무게감, 커피를 끓일 때 나는 향기, 얼얼한 맛에서부터 달콤한 맛까지를 결정하는 산도 등에 따라 수천 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 케냐, 예멘 등 커피가 나는 나라에 따라 맛도 다양하고 기후, 재배 조건, 볶는 방법 등에 따라서도 맛이 천차만별이다. 커피 로스팅 전문가 전광수씨는 “이렇게 다양한 맛을 모른 채 모두 똑같은 커피 맛을 즐기는 모습이 슬프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월간 논>의 신관식씨는 7년의 커피믹스 생활을 접고 지금은 원두커피로 바꿨다. 신씨의 주장으로 지난해부터 사무실에 원두커피 기계를 들여놓은 것이다. 덕분에 사무실 식구들도 주로 원두커피를 마시고 가끔 커피믹스를 애용한다. 신씨는 “7봉씩 7년간 지속된 커피믹스 생활 동안 계속해서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속이 깔끔하다”고 말했다.

커피믹스에 천인공노할 ‘나쁜’ 성분이 들어 있는 건 아니다. 가끔 한 잔씩 즐기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몇 개씩 믹스 껍데기를 까다 보면, 배 언저리에 치유할 수 없는 포화지방을 두르고 다녀야 할 게 뻔하다. 어른들의 불량식품, 커피믹스. 무심코 뜯기 전에 ‘이 안에 뭐가 들었나’ ‘오늘 몇 잔 먹었나’ 의심을 찬양해보자.(박수진 기자)

07.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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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5 11:46   좋아요 0 | URL
뭐든지 스트레스 안받고 잘 먹고 잘 소화시키는게 건강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하루에 커피 석잔 정도는 기본인데... 그것마저 끊으라면
이 답답한 인생 무슨 낙으로 사나요? ㅋ~
글 고맙습니다 로쟈님 :)

로쟈 2007-07-15 15:31   좋아요 0 | URL
습관이란 게 길들이기 나름이어서 이왕이면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게 더 낙이 되겠죠.^^

마노아 2007-07-15 20:29   좋아요 0 | URL
하루 한잔은 애교로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봅니다. 전 여름 겨울에만 마셔요(>_<)여름엔 더워서, 겨울엔 추워서..;;;;

로쟈 2007-07-15 21:13   좋아요 0 | URL
좀 문제가 되려면 매일 4-5잔 이상은 마셔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Mephistopheles 2007-07-15 21:53   좋아요 0 | URL
커피는 여간해선 한 잔도 안먹는데..그게...야근이 일상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마셔주고 있는 현실이 조금은 두려워지는군요..^^

오월의시 2007-07-15 22:56   좋아요 0 | URL
칼로리 높다는 사실을 알아도 어쩔 수가 없네요^^;;

몽당연필 2007-07-16 11:03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에 1~잔은 마시는데...^^;;

로쟈 2007-07-16 15:50   좋아요 0 | URL
하루에 3잔까지는 괜찮은 걸로 중지를 모으도록 합시다!..
 

벌써 재작년 일이 돼 버렸는데, "200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전역 274개 방리유(도시 외곽)에서 발생한 ‘방리유 사건’의 의미와 원인을 철학,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등 각 분야의 젊은 국내 연구자들이 다각도에서 추적한 책"이 출간됐다.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이란 부제를 단 <공존의 기술>(그린비, 2007)이 그것이다(그 이면이야말로 공화주의의 구성소가 아닌지 궁금하다). 당장 손길이 가지는 않을 책이지만 공저자들과의 인터뷰 기사 정도는 챙겨두도록 한다.

한겨레(07. 07. 14) 우리 안의 이방인, ‘통치’ 아닌 ‘공존’ 필요

“방리유는 명목상으론 프랑스에 포함돼 있으나 실질적으론 각종 권리와 지위 등에서 배제되는, 더 정확하게는 배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포함되는 사회적 장소를 지칭하는 유적(類的) 이름이다. 이 역설적 공간에 거주하는 주변인, 소수자, 이방인 등에 대한 포함·배제의 통치술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첫번째 과제다.”

프랑스를 흔들고 세계를 놀라게 한 2005년 10월 말의 ‘68혁명 이후 최대 소요사태’가 일어난 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아주 특별한 ‘현장 보고서’가 한국에서 출간됐다.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그린비). “방리유자르(방리유 주민들)에 대한 표상, 치안불안과 그것을 활용하는 권력메커니즘, 여성학적 접근, 새로운 저항형태로서의 재조명, 정책 차원의 비판, 그리고 프랑스 이민역사와 노동시장 및 이민노동” 등 다각적으로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450쪽짜리의 방대한 보고서다. ‘진짜 전문가’들이 만든 21세기형 ‘대안언론’일 수 있다.

필자는 모두 9명. 그들은 1만대에 가까운 자동차들이 불타고 3천여명이 체포된,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 공화주의의 치부와 민주주의 위기 징후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태 당시 현장에 있었고 지금도 거기에 있다. 8명은 한국의 프랑스 유학생, 한 명은 에티엔 발리바르 파리10대학,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 교수. 지난 11~12일 <공존의 기술> 출간작업을 이끈 이기라(35·파리4대학 정치학·유학 6년차·왼쪽)씨, 양창렬(29·파리1대학 철학·유학 5년차·오른쪽)씨와 통화하고 전자메일로 접속했다.

“우리의 작업은 소요 발생 전인 2005년 초에 이미 시작됐다. 그때 철학공부모임, 재불 사회과학회, 라빌레트 건축학교 한인학생회를 주축으로 재불 유학생단체협의회가 결성됐고, 가장 중요한 연간사업으로 연합학술회의를 기획했다. 이때 채택된 학술행사 주제가 바로 ‘공존의 기술: 포함/배제의 동학’이었다. 다양한 인종 및 국적자들이 모여 사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봉합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른바 ‘시테’(게토, 방리유의 또다른 이름)의 문제를 이방인에 대한 표상과 공간적 배치 등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해 보려 했다.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던 10월 말에 전국적인 소요가 발생했고 이 주제는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됐다.” “부유하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지닌 그들에게도 사태의 조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완연했던 모양이다.

책을 낸 의도는? “한국에서도 크게 보도됐지만,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한국에 사건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진 못했다고 봤다. 그래서 작업을 더 발전시켜 한국에 좀더 풍부한 고민과 논쟁거리들을 던져주자는 생각으로 기획했다.” “때늦은 책일 수 있지만, 한국 상황에서 보면 ‘때이르게’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이주 노동자도 40만을 헤아리지 않는가. 배제당하고 싸우는 광범한 비정규직들을 보라.

방리유란? 사전적 의미는 “대도시를 둘러싼 (외곽의) 밀집지역 전체”를 가리키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배제를 조건으로 해서만 포함되는” 역설적 공간 방리유 주민 대다수는 2차대전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제3기 이민물결’을 탄 프랑스의 옛 식민지 출신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마그리브 지역 무슬림과 서부 아프리카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말리 출신과 프랑스 국적의 2, 3세 자손들이다. 호경기로 노동력이 부족할 때 환영받았던 그들은 불경기 때마다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프랑스를 프랑스인에게!” 따위의 구호들이 상징하는 극우담론 속에 실업 등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로 낙인찍혔다.

“이민 1, 2세대는 경기침체 뒤 은퇴하거나 실직한 상태고, 3세는 청년실업에 처했으니 거의 유폐된 공간이다. 이들이 모여 살면서 박탈감은 더욱 확산된다. 이전의 아프리카 식민지 도시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형국이라 할까?”

지난 20여년간 권력자들은 저항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았다. “사회적 갈등 해결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력이 낳은 불안, 공포, 두려움 등을 역으로 반대자, 나아가 ‘내부의 적’을 제조해서 그런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공화국 보호를 내건 치안담론은 “빈곤, 실업,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불안요소들을 감추고, 그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들 개인 책임으로.


이민자들은 “이전에 프랑스 노동자와 식민지 대중이 담당했던 최하층 계급의 역할을 떠맡게 됐다. 결국 계급문제가 인종문제와 중첩되면서 문제의 본질이 전이되는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이민자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이질적인 자들, 즉 내부의 이방인으로 바라봐야 문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더 풍성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중심부-주변부 관계 해체를 둘러싼 식민지 쟁점과도 겹친다.

그렇다면 ‘공존의 기술’은? “방리유 청년들이 보여준 반란의 형태, 자생적 사회운동, 히잡 착용을 통한 주체성의 정치화 등은 기존 통치방식의 틈새를 벌려 새로운 공존의 기술을 세우기 위한 단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말로도 바꿔 놓을 수 있다. “궁극적인 사회 안전은 결코 치안강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혁명정신의 회복과 사회안전망의 재구축을 통한 온전한 사회통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존 아닌 통치 기술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다.(한승동 선임기자)

07. 07. 15.

P.S.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재작년 소요사태 때 누구나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1995)를 떠올렸을 것이다. '방리유'란 말을 아마도 처음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우리에게 각인시켜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왠지 현실이 실제 다큐처럼 찍은 그 영화를 뒤늦게 '모방'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조금 특이해 보이는 건 저자들이 '공존의 정치' 대신에 '공존의 기술'이란 화두를 고른 것. 하지만 "궁극적인 사회 안전은 결코 치안강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자유·평등·박애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혁명정신의 회복과 사회안전망의 재구축을 통한 온전한 사회통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공존의 기술'보다는 '공존의 정치'에 더 많이 해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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