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도울링의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월인, 2000)의 서문 읽기이다. 원서는 <제임슨, 알튀세르, 마르크스(Jameson, Althusser, Marx)>(코넬대학교출판부, 1984)이고, '<정치적 무의식> 입문(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Unconscious)'이 부제이다. 국역본은 그 부제를 제목으로 삼았다. 원저는 147쪽의 '가벼운' 책인데, 번역본은 하드카바에다가 저자의 사진까지 (표지뿐만 아니라) 서장을 장식하고 있어서 좀 격에 맞지 않는다(우리 같은 경우 회갑논총이나 정년퇴임기념논총 등에나 그런 사진을 집어넣는다). 자신의 책도 아니고 제임슨 '입문서'에 그런 치장을 한 걸 알면 저자도 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독자로선 책값이 비싸지니까 유감스럽고).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이다."라고 서문의 첫문장이 시작할 때 내가 떠올리는 '주제 넘는 일'은 이러한 외형과 장정에 관련된 것이다. 말 그대로 '찍찍'읽어보고 치워야 할 입문서를 하드카바로 펴내는 것부터 불만스러운데, 번역이 그런 '하드함'을 전혀 받쳐주지 못하기에 더더욱 유감스러운 것이 이 <서설>이다. 과연 저자가 원하는 바대로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책을 읽는다는 게 단지 '뒷걸음질'에 불과한 건지 이 '서문'에 대한 브리핑을 읽고 판단해보시길(보통 서문은 '곁다리텍스트'에서 다루지만 제대로 된 서문이 아니어서 '브리핑'에 집어넣는다. '곁다리텍스트'도 격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먼저 책의 용도와 의의에 대해서 규정한다. 이게 연구서나 비평서도 아니고 당대 마르크스주의 비평 혹은 거기서 제임슨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고찰도 아니라는 것. "다만 이 글은 <정치적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익히 들어왔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단순히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에 관해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를 시도하려는 것일 뿐이다."(17쪽)

책은 그러니까 <정치적 무의식>에 대해서 '지끔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그럼에도 내가 읽은 도울링의 문체는 만연체여서 제임슨만큼이나 읽기 뻑뻑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한국어 독자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아직 <정치적 무의식>조차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해서 <서설>이 먼저 나오는 상황 자체는 코믹하다). <정치적 무의식>?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다. '태생적으로'는 'seminally'의 번역인데, 직역하는 '씨눈이 될 만한'이란 뜻이다. 풍부한 열매를 거기서 기대할 수 있다는.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the very demanding argument'의 번역인데, 여기서 'demanding'의 사전적 의미는 '벅찬'이란 뜻이다. 제임슨의 논의를 압축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일이 저자의 능력에 비해 벅찬 일일 수 있다는 겸양의 표현으로 읽힌다. 물론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오역이 아니며 사실에 부합한다. 실제로 이 번역서를 완독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왜 이런 류의 '안내서'(introduction)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복잡한 이유는 아니다. 아주 중요한 책이지만 그만큼 난해한 책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왜 중요한가? "실로, 이 책은 서로 다른 다음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 발생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은 "Indeed, the book could claim a seminal importance on either of two separate grounds:"

번역문은 우리말로도 비논리적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근거에서 각각 '배아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란 뜻이다. 그 두 가지 입장/근거란 무엇인가?

"그 두 가지 입장이란, 알튀세르 저작으로부터 비롯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부활을 영어로 된 문화적 연구물들에 확대하고자 한 최초의 지속적 시도로서, 그리고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이 경쟁적으로 전개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독창적이고 강력한 시도로서의 입장 그것이다."

요컨대 (1)알튀세르적 마르크수즈의를 영어권 문화연구로 확장시키고자 한 시도로서, (2)데리다와 푸코, 들뢰즈 등의 경쟁적인 프로그램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섭하고자 한 시도로서 <정치적 무의식>은 의의를 갖는다는 것. 거기에 "지금까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필적할 만한 사람으로서 영어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제임슨이 유일하다."(18쪽)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워낙의 그의 책들이 난해하기 때문에("최근 그의 사상은 계속해서더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더욱 우회적이고 압축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제임슨이 어렵다는 단순한 사실, 혹은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평이한 영어로 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이 데리다와 라캉 같은 저술가들의 난해함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격분케 할는지 모른다. 그러한 저술가들에 대하여 항상 질문받게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말할 수 없는가?"(19쪽) 

그러니까 데리다나 라캉의 난해함도 부족해서 제임슨까지 머리 아프게 하느냐란 불평이 나올 만하다는 것. "왜 그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버럭) 거기에 한술 더 뜨는 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평이한 한국어'로 옮겨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원문은 이렇다: "Why, to ask the question that always gets asked about such writers, can't he just come out and say what he means?"(10쪽)

번역문은 'to ask-'하는 삽입문을 목적을 가리키는 부정사구문으로, '질문(question)'를 '문제'로 오독함으로써 혼란을 자초했다. 다시 옮기면, "데리다나 라캉 같은 저자들에게 항상 던져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묻자면, 제임슨은 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는 "데리다가 여기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고 친구들이 물었을 때 설명하고자 애를 쓰면서 느꼈던 피로감을 되새기면서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의미에 대한 허위이론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고 있었던 바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제임슨은 그 점을 직접 말하지 않았으며, 그리고...(이것들이 우리가 느꼈던 좌절이다.)"

그 '좌절감'을 그대로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번역문은 정서적인 '직역'에 가깝다. 마지막 문장의 주어가 '제임슨'이 아니라 '데리다'란 사실만 빼면. 원문은 이렇다: "What Derrida was saying, I later realized, was that  you can come right out and say what you mean only if you've got a false theory of meanng, but even so, he never said that directly, and...(There are the frustrations one felt.)"(11쪽) 그리고 다시 옮기면, "내가 나중에 깨달은 바이지만,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의미에 대한 잘못된 이론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실상 데리다는 결코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며, 게다가...(이런 것이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것인가? "<그라마톨로지> 그리고 <정치적 무의식>에 똑같이 제기된 문제는 다름 아닌 법규로서의 문체 문제이다: 알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을 말해줄tells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shows 하는 글쓰기 방식." 여기서 '법규로서의 문체'는 'style as enactment'의 번역인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문구에서 'enactment'는 '법규'가 아니라 '연기(演技)' 혹은 '공연'이란 뜻이다. 메시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 한다는 게 그런 '연기로서의 문체'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는 데리다의 경우 지시적/도구적 언어관에 근거하고 있는 '단순명쾌하게 말하기'에 대한 회의/의문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제임슨에게 있어서 법규(*연기)로서의 문체 문제는 이론과 실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 평이한 문체는, 모든 진실들이 미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불분명해야 할 어떤 필요성도 없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투명한 문체이다."(20쪽) 곧 '평이한 문체'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것. 

"어떤 책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이루어내는 진보에는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많다고 제임슨 박사가 말했다. 그는 소설이나 미스터리 이야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지적 산문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에 관해서 18세기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변증법적 충격에 의해 제임슨이 의도하는 바에는 그러한 종류의 고통, 즉 어떤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 우리 모두가 느꼈던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21쪽)

'그러한 종류의 고통(that sort of pain)'에서 'that'이 강조돼 있어서(번역문에는 누락돼 있어서) 굵게 처리했다. 한데, 이런 번역문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에 느끼는 고통과 무관하다. '존슨 박사(Doctor Johnson)'가 난데없이 '제임슨 박사'로 오기돼 있어서 겪는 어리둥절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존슨 박사'란 별명으로도 흔히 불리는 이는 영문학의 거장 새뮤얼 존슨(1709-1783)이다(국내에는 그의 풍자적 산문집 <라셀라스>(민음사, 2005)가 번역돼 있다. 번역/소개된 걸로 치면 '거장'이란 말이 무색하군).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1709년 영국의 중부 지방인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의 펨브루크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중퇴했다. 1737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고 <산사의 잡지>에 의회 기사를 써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잡지 <산책자>를 냈다. 풍자시 '런던', '욕망의 공허', 비극 <아이린> 등을 발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1747년 방대한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영어사전>을 혼자 힘으로 팔 년 만에 완성시켜 사전편찬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문학상의 업적을 인정받아 이후 '존슨 박사(Dr. Johnson)'라 불렸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해인 1759년 <라셀라스>를 집필하고, 1765년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의 편찬을 완성하여 출간했다. 이후 십여 년간 정치 논설문 등을 발표했다. 만년에는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하여 열 권의 <영국 시인전>을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1784년 런던에서 숨을 거두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1979년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제임스 보즈웰은 그의 전기를 출판했다. 저술뿐 아니라 재치 있는 논객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로,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지난 천 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저자로 선정하였다."

이 만한 인물을 '제임슨 박사'로 오기하는 건 무성의의 소치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불유쾌한 고통과 달리 제임슨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고통은 보다 고차적이다.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또 한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유일한 탈출구가 정치적-사회적 혁명에 있을 뿐인 하나의 악몽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 역시 제임슨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는 대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같은 안내서가 그 효과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렇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변증법적 충격은 해석을 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다." 원문은 "dialectical shock is, as Robert Frost said of poetry, what is lost in translation." 프로스트는 물론 '가지 않은 길'의 시인 프로스트를 말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란 번역하면 잃어버리는 것"이란 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그러니까 '해석'이 아니다. 왜 임의로 번역하는가?). 도울링이 얘기하는 것은 만약 읽기 어려운 제임슨을 읽기 편하게 옮겨놓으면 고통이 경감되는 만큼 그 효과도 상실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저자의 당부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이 안내서를 통해서 <정치적 무의식>에 다가온 독자는 보다 어려운 제임슨의 논의를 있는 그대로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곧, 이 <서설>을 읽고 나서, 혹은 이 <서설>과 함께 반드시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야 한다는 것. 결코 안내서가 원저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읽는 것은 원저에 대한 배반이 될 것이다. 배신, 배반...  

이제까지 읽은 것은 8쪽 짜리 서문의 절반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뒤뚱거리면서 나머지 절반쯤을 더 읽어가야 '서문'을 다 읽게 된다. 그런 수고를 감내할 용의는 있지만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어서 '브리핑'은 이만 줄인다. 책을 덮으려다가 잠시 훑어본 '옮긴이 해설'(저자 서문보다도 앞에 위치해 있다).

"여러 문헌의 도움을 받아 도울링의 저술 의도에 부합하는 번역이 되고자 했으나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역자에게도 이 번역은 'demanding work'였던 것.

"이 번역서를 읽을 때, 문맥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짜증스러움을 누구나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번역의 난삽함도 난삽함이지만 당혹스러울 정도의 (:)과 (;)의 사용은 독서의 매끄러움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다." -->역자는 '귀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본 의도를 살리기 위해 특별히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원문의 문맥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곳곳에 산재하고 있을 오역은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며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으로 꾸준히 바로잡아 걸 것을 약속한다." -->2000년 가을에 책이 나왔지만 그간에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짐작엔 이 책을 구입한 사람도 드물겠지만 완독한 사람은 아예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치적 무의식>을 완독한다면 모를까). 아직 초판도 다 나가지 않은 듯하니 '꾸준히 바로잡는' 일은 언제 가능할는지...

07.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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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4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로쟈님의 예리한 메스로 분해되기 직전이네요! 원서는 제본해 놓았습니다만. 로쟈님의 분해가 기대됩니다. :)

로쟈 2007-02-2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도 빠르시네요(말씀드린 대로 대조해서 읽지 않으면 곳곳에서 난감한 번역서입니다). 두어 주 전에 꺼내놓았다가 책정리하면서 다시 치우려고 하는데, 번역이 좋지 않다고 뱉어놓은 말이 있어서 잠시 주워담으려고 합니다. '기대'하실 것까진 없구요.^^;

기인 2007-02-2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불유쾌한 고통과 달리 제임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고통은 보다 고차적이다.
-> 제임슨이
What Derrida was saying, I later realized, was that wou can come right out and say what you mean only if you've got a false theory of meanng, but even so, he never said that directly, and...
에서 wou -> you 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후배들이 석사논문 발표하는 것을 보러 갔는데, 후배들 공부하는 것 보니까, 공부할 맘 나던데요 ^^ 선배 중에 김동인으로 박사논문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서 김윤식 선생의 '콤플렉스론'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훌륭한 김동인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 (파란 여우님 김동인 글에 대한 댓글을 보고 ^^ )

로쟈 2007-02-2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 훌륭한 '김동인'인가요, 아니면 '김동인론'인가요?^^
 

이번주 언론의 북리뷰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은 프랑스 사회학자 이브 드잘레이와 미국의 법학자 브라이언트 가스가 공저한 <궁정전투의 국제화>(그린비, 2007)이다. 며칠전 한 지인으로부터 책을 얻었는데, 제목은 생소하지만 리뷰기사를 하나만 읽어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짐작된다. '궁정전투'란 말이 "국가권력을 둘러싼 지식투쟁의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새로울 것도 없고 남의 나라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의의는 그러한 '상식'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것(그러니까 이런 건 '머리'로 쓰는 책이 아니다). 경향신문의 리뷰기사를 '조감도' 삼아 읽어두기로 한다. 보다 자세한 리뷰는 한겨레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92298.html)

한국일보(07. 02. 24) 美유학파들이 재생산하는 '세계의 미국화'

정치학 강사 A씨는 어느 술자리에서 끝내 본심을 들키고 말았다. “내가 박사를, 프랑스가 아니고 미국에서 했어야 했는데…”라는 푸념과 함께.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즐비한 강단에서 몇 년째 자리를 못 잡고 강사직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수자’의 비애를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가라면 어디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jacket image]

‘세계의 미국화’를 논하는 게 새삼스럽지 않은 요즘이다. 여타 국가의 제도와 인적 구성이 미국적인 것을 표준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학문 체계와 지식 엘리트 계층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이브 드잘레이는 미국의 학문을 수용한 유학파 지식인이 자국에서 특권 엘리트 계층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남미 사례를 통해 자세히 보여준다.

2002년 별세한 사회학의 거장 피에르 부르디외를 사사한 드잘레이는 지배 계급 자체보다는 위계가 발생하는 원칙에 주목했던 스승의 지론을 계승, 거시적 논의보다 미시적 관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두 공저자는 연구 대상국의 정부 대학 로펌 싱크 탱크에 소속된 주류 지식인을 300명 넘게 인터뷰하는 공을 들였다.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파가 길러낸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를 살펴보자. 1950년대까지 국내에서 열세를 보이던 시카고 학파는 공화당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학문 수출에 나섰다. 이들은 국제 개발처와 거대 재단들을 활용, 칠레 산티아고 가톨릭대학에 투자했다. 자연스레 이 대학 경제학도들은 시카고대학으로 건너가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이 기초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며 세력을 키운 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정권과 손을 잡았다. 국가 개입 축소, 민영화 등 정책 아젠다를 생산하며 이들은 옛 엘리트들을 붕괴시키려는 군부 독재 정권에 기여했고 스스로 특권 계층의 공석에 올랐다. 1980년대 외채 위기 이후 브라질에 불어 닥친 탈규제·투자 개방 바람도 칠레 사례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경제학과 더불어 가장 잘 팔리는 미국의 학문 체계는 법률이다. 미국 법률의 장이 지닌 특징은 법률가들이 대형 로펌 및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시민 운동이나 무료 법률상담 같은 공익적 활동을 중시하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는 점이다. 이를 습득한 일군의 남미 법률가들은 1970, 80년대 비민주적 자국 정부에 맞서 국제사면위원회와 손잡고 국제인권법을 무기로 삼는 등 미국식 인권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군부 독재가 속속 무너지면서 헤게모니를 쥐게 된 이 엘리트 법률가들은 금세 표변하며 보수화됐다. 여기에 더해 외채 위기를 계기로 남미에 신자유주의 체제가 급속히 도입되자 미국식 경제 관련법에 정통한 법률가들 역시 국가 권력의 한 축으로 부상했다.

저자 드랄레이는 한국판 서문을 통해 자신의 논의가 아시아에도 유효하리라 조심스레 예상한다. 일례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과 결탁한 ‘버클리 마피아’의 출세 경로는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의 경우가 고스란히 겹친다는 것. 저자들은 전문 지식인들이 국가 권력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 옛 궁정 귀족들의 정치 다툼과 닮았다며 제목에 ‘궁정 전투’(palace wars)라는 단어를 넣었다.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분석틀이다.(이훈성 기자) 

07. 02. 24.

P.S. 찾아보니 두 공저자가 <궁정전투의 국제화> 이전에 쓴 전작으로 <미덕의 거래(Dealing in Virtue)>(1996)란 책이 있다. '국제 무역 중재와 초국가적 법질서의 구축(International Commercial Arbitration and the Construction of a Transnational Legal Order)'이 부제인데, 얼추 책의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아래는 그 내용소개이다. <궁정전투의 국제화>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로펌들은 싫어하려나?).

In recent years, international business disputes have increasingly been resolved through private arbitration. The first book of its kind, Dealing in Virtue details how an elite group of transnational lawyers constructed an autonomous legal field that has given them a central and powerful role in the global marketplace.

Building on Pierre Bourdieu's structural approach, the authors show how an informal, settlement-oriented system became formalized and litigious. Integral to this new legal field is the intense personal competition among arbitrators to gain a reputation for virtue, hoping to be selected for arbitration panels. Since arbitration fees have skyrocketed, this is a high-stakes game.

Using multiple examples, Dezalay and Garth explore how international developments can transform domestic methods for handling disputes and analyze the changing prospects for international business dispute resolution given the growing presence of such international market and regulatory institutions as the EEC, the WTO, and NA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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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4 23:1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매주 옮겨오는 연재물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엔 소설가 윤성희씨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달초 한국일보에 게재됐던 '작가의 우정편지'까지 같이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2. 24) [작가와 문학사이](7)윤성희-문학은 선물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부가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준다는 원숭이손을 얻게 된다. 이들은 시험 삼아 100만원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위로금 100만원이다. 부부는 슬픔에 빠져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빈다. 죽은 아들은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부부는 울면서 마지막 소원을 빈다. 아들을 다시 죽게 해달라고.

이 이야기가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파워를 가진 원숭이손? 좀비가 된 아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냉혹한 경제적 순환의 논리는 우리를 불안하고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니! 따지고 보면 그렇다. 상품과 돈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언뜻 그러한 논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이나 우정, 가족애조차 교환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러한 진실한 감정조차 사실은 그러한 논리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우연한 사고로 자기 대신 죽은 사내의 한쪽 구두만 신은 발을 본 뒤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들을 상상하지 않고는 깊게 잠”(‘무릎’)들지 못한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집을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쓸모없이 소진한 뒤, 자신이 정원사로 일하던 집의 주인에게 꽃다발 타일을 선물로 준다. ‘레고로 만든 집’과 ‘거기, 당신’에서 주변부 마이너리티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때로는 무거운 절망으로, 때로는 가벼운 유머로 포착해 온 윤성희의 최근작들은 이렇듯 죄책감과 선물의 테마로 우회하고 있다. 그런데 죄책감과 선물이라니?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의 죄책감은 많은 경우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죽거나 자살하거나 이혼한 데서 생기는 것이지만(‘무릎’ ‘재채기’ ‘저 너머’),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자장가’)에 시달리거나 임신한 담임선생님이 기형아를 낳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험을 망치기도 한다.(‘하다 한 말’)

이러한 죄의식은 되갚아주어야 한다는 어떤 부채의식으로 발전하면서 선물의 논리를 작동시킨다. 이때 선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해진 답례나 경제적 계산에 얽매여 주고받는 것과는 다르다. 윤성희 소설에서 선물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거나 엉뚱한 대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낯설다. ‘무릎’에서 ‘그’의 부채의식은 분명 죽은 사내로부터 촉발되지만 ‘그’의 선물은 죽은 사내의 가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사건과는 무관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다가 윤성희 소설에 등장하는 선물의 목록을 보면 꽃다발 타일, 달력, 늙은 말, 허름한 카페, 혹은 틀니 등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선물은 그렇게 세상 이치와 계산법을 벗어난 곳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완고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논리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현실세계에서 선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물은 현실사회의 악무한적 원환구조를 찢고 느닷없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주어진다.

부채의식을 떠안은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축적 대신에 무의미한 소진을 선택함으로써 살벌한 교환의 원환을 벗어나 “눈동자가 있는 곳 너머”(‘등 뒤에’)에서나 펼쳐질 법한 낯설고 불가능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한 응시가 윤리적인 것은 현실세계의 교환과정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이름붙일 수 없는 것, 비가시적인 것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 세계의 익숙한 현실논리는 낯설어지고 세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니 ‘문학은 선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냉혹한 현실논리에 두려워하고 삭막한 세상 이치에 불안해하는 고독하고 소심한 자의 부채의식으로부터 문학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윤성희 소설은 우리에게 주어졌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한국일보(07. 02. 08) [작가의 우정편지] 소설가 윤성희가 소설가 강영숙에게

전 아직도 그 공중전화를 기억하고 있어요. 이화여대 후문을 지나는데 삐삐가 울렸어요. 번호를 보니 선배였어요.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걸까요? 전날 저는 술이 과해서 집엘 가질 못했죠. 그래서 선배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졌었잖아요. 우리가 같이 술을 마셨던 술집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 나요. 명동 근처의 중국집이었죠. 성희야, 안주 먹어라. 안주. 선배는 내게 말했어요. 그러고는 내 쪽으로 비싼 안주를 밀어주었어요. 그 덕에 전 아주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암튼, 다음날 저는 공중전화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죠. 전화기 저편에서 선배는 이렇게 말했어요. “성희야. 니가 떠나자마자 전화가 왔단다. 됐단다.” 그렇게 짧게 말하고 선배는 전화를 끊었어요. 그게 선배의 당선 소식이었죠. 갑자기 눈이 왔다거나, 가슴이 두근거렸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하게 보였다거나, 하지 않았죠. 아, 됐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려봤죠.

그리고 일 년 후, 저도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죠.(역시 공중전화였어요) “선배님. 저 됐어요.”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어요. 역시, 갑자기 눈이 내리지 않았죠. 세상이 온통 내 것처럼 느껴지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을 하지도 않았죠. 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오들오들 떨었어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았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저는 일 년 전 선배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배, 미안해요. 그 생각만으로도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때 이후로 전 이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선배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는 길이 안개처럼 보일 때, 똑같은 문장을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해서 중얼거릴 때, 새벽녘 방 한구석에서 쪼그려 뛰기를 해도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을 때면 선배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했죠. 그런 생각들이 오늘날 나를, 팔 년 전의 나보다, 조금은 더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아요. 이제는 선배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입시키게 되었죠. 존경하는 많은 선생님들, 의지하는 많은 선후배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의 주인공들…. 그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이라면 어떻게 견뎠을까?

제가 이십대일 때 선배는 삼십대였죠. 같은 삼십대가 되기 위해 얼른 달려왔더니 선배는 사십대가 되어 버렸네요. 가끔 선배는 제 작품에 대해, 압정 같은 말을, 한마디씩 던져주곤 했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전 태연한 척 했지만 실은 무엇인가를 들켜버린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들켜버린 게 그다지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이 편지를 다 쓰면, 술 마시자고 전화할게요. “이년아, 넌 너를 너무 몰라.” 술 취한 선배의 목소리로 이런 욕을 듣고 싶거든요.(성희 / 2007년 2월)

07. 02. 24.

P.S. '선물'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이후에 현대철학에서 매우 인기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지극히 바타이유적인 주제이면서 지극히 레비나스-데리다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한국소설에서 그러한 주제를 탐구하는 일은 드문 게 아닌가 싶다(편지에서도 작가의 밸런스 감각, 교환의 논리가 읽힌다). 작가의 묵직한 장편소설이 씌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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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이었나 평론가를 만났을 때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뭐냐고 물었더니 무슨 본드걸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라고 했다(아이디어를 쥐어짜는 데에서만큼은 우리 작가들도 발바닥에 땀날 정도이다). 직감에 본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는 있겠다 싶었던 소설이 최근에 출간됐다. 평론가는 해설에 '남근이여, 안녕'이란 제목을 붙였군. '본드걸'이란 말이 고상한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지만 재미만큼은 보장할 수 있을 법하다. 어쩌면 좀 섹시할는지도 모르겠고. 한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2. 24) 본드보다 더 007같은 본드걸

20세기의 아이콘인 이안 플레밍 원작의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1편이 제작되면서 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대단한 완력과 성적 매력을 갖춘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 그의 상관인 M, 신무기를 개발해 극의 잔재미를 더해 주는 과학자 Q, 그리고 M의 비서인 머니페니. 늘 등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본드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당들과 그의 조력자이자 연인인 본드걸은 매번 바뀐다.

젊은 여성작가 오현종은 그 본드걸 중 하나인 미미를 내세워 ‘007 시리즈’의 코드를 뒤집어보는 패러디 소설을 시도한다. 다음 에피소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질 운명인 본드걸 미미가 자신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스파이가 되고, 007과 함께 작전에 투입돼 활약하면서 남성중심적·이분법적인 ‘007 시리즈’를 해체해 버린다.

이 소설에서 본드는 더이상 제3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백인남자가 아니다. 모종의 작전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본드는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보지 못하는 쫌생원이고, 미미의 기분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이며, 홈쇼핑이나 코미디 채널을 돌리며 악당과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는 왜소한 한국 남자다.

그런가 하면 취직면접에서 줄창 떨어진 뒤 언니와 형부가 운영하는 갈빗집 카운터를 보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미미는 청년백수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 미미가 새로운 출동명령과 함께 다른 애인을 만든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M의 밑으로 들어가 스파이 교육을 받고 살인번호 013이 된다. 그러나 동료의 말처럼 스파이는 이 시대의 사양산업이다. “위성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제트테러리즘 시대에 스파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는 자조가 떠돈다.

어쨌거나 좌충우돌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파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미미는 드디어 본드와 함께 이쪽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줄 스파이 백색공포를 데리러 일본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색공포는 M의 경쟁상대인 하이드측에 의해 납치되고 백색공포의 애인이던 미스 플라워, 이같은 일을 꾸민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스파이 살로메 사이에서 본드와 미미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주어진 체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본드와 달리, 미미는 스파이세계의 허를 찌르기 시작한다. 착한 본드걸 미미와 나쁜 본드걸 미스 플라워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고, 하이드의 첩자인 살로메는 다름아닌 M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M은 자신이 키우던 사자에게 먹히는데 그의 몸에 조금씩 쌓여있던 독이 사자를 죽인다.



결국 본드와 본드걸, M과 하이드, 아군과 적군, 선과 악 등의 구분과 위계가 사라지면서 철저히 환멸과 혼란만 남은 ‘007 시리즈’가 독자들 앞에 던져진다. 지난해말 개봉된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은 본드가 스파이가 되기 전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상처받은 현대의 남성상을 대변하면서 이 시리즈의 클리셰를 해체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더욱 완전하면서 얄궂은 해체를 보고 싶다면 미미 같은 본드걸의 입장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강변한다.(한윤정 기자)

07. 02. 24.

P.S. 리뷰기사는 <카지노 로얄>의 본드걸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이 아니라 카테리나 뮤리노)의 이미지를 붙여놓았는데, 개인적으로 '본드걸'하면 떠올리게 되는 여배우는 캐롤 부케이다. 그건 그녀가 나오는 007영화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1981)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007영화였기 때문이다(당연히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이며 이후에 본 007영화들은 대개 시들했다. 물론 머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짐작에 영화를 찍었을 무렵 그녀의 나이는 23-4살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만 50세가 되었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한번 상처한 이후에 지난 2003년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재혼한 걸로 나온다. <내겐 너무 이쁜 당신>(1989)에서의 그 바람둥이 남편 말이다!(물론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란 게 바람 피는 이유였지만.) 삶은 참으로 뻔하면서도 미스테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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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4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카테리나 뮤리노란 배우네요. 두 여자 중 왼쪽이 에바 그린이죠.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 전 그 새 살이 쪘나 했더니 기자가 잘못 안 것이네요.^^


마늘빵 2007-02-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요? 아 이렇게보니 또 다르네요. <몽상가들>에서 참 섹시하고 귀엽고 은은한 매력도 있고 그랬는데.

stella.K 2007-02-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로쟈님 페이퍼 보니 선물해준 분이 그냥 보내준 게 아니었네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내겐 너무...>이 영화 본 것도 같고 가물가물 하네요. 정신하군...>.<;;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들고 와서 훑어보다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책은 '다윈의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시리즈이다. 가격이 2만 8500원이라고 돼 있어서 꽤 두툼한 책인 줄 알았더니 4권 합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각 권은 130쪽 안팎 분량에 정가 7500원짜리 책이다. 그러니까 문고본 컨셉에 해당한다.

 

 

 

 

예일대출판부에서 나온 시리즈라고 해서 찾아보니까 'Dawinism Tdoay'라는 원 시리즈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약간 어긋나게 지난 1998-9년부터 나온 책들이다(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시리즈이다!). 한겨레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예일대 출판부에서 펴내 화제를 부른 ‘다윈이즘 투데이 시리즈’의 번역본 <다윈의 대답>(이음). 편집자들은 ‘사회과학적 논제의 패러다임을 진화생물학으로 뒤집는다’는 도전적 표제를 내걸었다.(...) 실제로 책은 인문·사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충돌하는 현대사회의 쟁점들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도발적 ‘대답’을 담고 있다."

"‘다윈주의 자체는 좌도 우도 아니다’며 기존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고 나선 1권의 저자 피터 싱어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동”을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한다.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2권),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3권),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다른가?’(4권)로 이어지는 책들은 제목에서 이미 ‘한 판 벌어질 듯한’ 흥미를 자극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은 고의적인 남녀차별 장치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본질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여성주의자들을 도발한다."

이만한 시놉시스라면 좀더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원서가 80여쪽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두툼했으면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번역본 분량으론 한 200쪽 가량). 물론 이런 푸념은 먹어보기도 전에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번역본의 첫 권을 장식하고 있는 건 피터 싱어의 책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를 부제로 단 <다윈의 대답1>이다. 원제는 '다윈주의 좌파: 정치, 진화 그리고 협동'으로 돼 있다. '프로이트 좌파'와 계열체를 이루는 원제 자체가 내겐 더 매력적인데 요즘 '좌파'란 말이 별로 호감을 주지 않는 국내 정세를 반영한 듯도 하다. 그래도 목차만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마지막 제안으로 그가 덧붙이고 있는 게 '오늘날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인 것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출간됐지만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영어본 시리즈의 '첫권'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다위니즘1>의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물론 저자인 피터 싱어의 지명도가 고려됐을 법하다(기억에 싱어는 호주 철학자이다). 알다시피 저명한 윤리학자인 싱어의 책들은 국내에 (거의 놀라울 만큼) 많이/자주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지명도에 비하면 베스트셀러 학자라고도 할 수 없는데, 좀 기이한 일이다). <다윈의 대답>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2년간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5권이나 된다. '철학 가판대의 숨겨진 베스트 싱어'라 할 만하다.

나머지 2, 3, 4권의 저자는 모두 생소하며 (알라딘에는) 목차 또한 떠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겠다. 대신에 나로 하여금 다윈이즘에 입문하도록 해준 도킨스의 신간이나 덧붙이도록 한다. 작년에 나온 책 <신이라는 망상>이 그의 최신간이다(http://en.wikipedia.org/wiki/The_God_Delusion). 제목 그대로 종교(유신론)에 대한 한 다윈주의자의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종교계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치면 도킨스도 도올 급인 듯하다). 그러한 도킨스의 '무신론'을 유신론적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한 책도 <도킨스의 신>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http://en.wikipedia.org/wiki/Dawkins'_God:_Genes,_Memes,_and_the_Meaning_of_Life). 얼른얼른 번역되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07. 02. 23.

P.S.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아래의 책도 아직 나오지 않았군. 책장에만 꽂아두기엔 좀 아쉽다. 번역본이 나와야, 멍석이 깔려야 떠들어볼 수 있을 텐데...

P.S.2. 고대하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리처드 도킨스: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을유문화사, 2007). <이기적 유전자>를 낸 출판사에서 그래도 '책임감'을 갖고 출간한 듯하여 미덥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책.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로서, 합리주의자로서, 작가이자 대중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사회에 미친 다방면의 영향들을 살펴보고 있다. 과거 도킨스의 대학원생이었고 지금은 생물학자들인 앨런 그래펀과 마크 리들리가 엮은 이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깊이 분석하거나 그와의 개인적인 일화를 회상하는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의 글들이 실려 있다."

거기에 보태는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 "내게 가장 심오한 과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였다." 얼른 원서와 나란히 꽂아두어야겠다...

07.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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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2-23 13:13   좋아요 0 | URL
피터 싱어의 책 중 <전쟁 대행 주식회사>는 다른 Singer의 책인데요^^;

로쟈 2007-02-23 13:1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언젠가 싱어가 둘 있다는 건 확인해놓고 깜박했네요.^^;

2007-02-2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3 13:42   좋아요 0 | URL
**님/ 제가 '개봉박두'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02-23 23:17   좋아요 0 | URL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의 성공회 역사신학자... 물리학도 출신... 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대단한 인물임은 맞는 것 같음...근데 맥그래스가 유신론적 다윈주의라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삼... 이 사람은 지적 설계 운동하고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 하워드 반틸 류의 유신론적 진화론은 별로 안 좋아할텐데...(아주)

로쟈 2007-02-23 23:29   좋아요 0 | URL
맥그레스에 대한 진술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댄 건 "Alister E. McGrath is one of the world's leading theologians, with a doctorate in the sciences." 같은 소개구절들이었기 때문에요...

2007-02-24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9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정신 없으실 텐데, 내주면 곧 강의부터 하시겠네요(보통 책도 오기 전에 학기가 시작하죠?^^). 싱어와는 나름의 인연이 계시군요. 푸코에 대한 소개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07-02-2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9:02   좋아요 0 | URL
**님/ 그 기사는 몇 달째 걸려있어서 남세스럽게 하더군요.^^;

미생지신 2007-02-25 17:43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 오셨다는 말씀은 18도만 따로 판다는 말씀인지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셨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편의점에 잘 안 가서...ㅡㅡ.

로쟈 2007-02-25 18:13   좋아요 0 | URL
따로 팔리가 있겠습니까?^^ 주된 목적이 '18도'에 있다 보니 그렇게 적었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9 11:57   좋아요 0 | URL
아 잘못 알았습니다. 맥그래스는 물리학도가 아니라 분자생물학도 출신이군요. 22세 옥스퍼드 분자생물학 박사 24세 옥스퍼드 신학 박사.

자꾸때리다 2007-05-10 23:27   좋아요 0 | URL
아 죄송합니다. 맥그래스 유신론적 진화론자 맞습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