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옮겨오는 연재물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엔 소설가 윤성희씨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달초 한국일보에 게재됐던 '작가의 우정편지'까지 같이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2. 24) [작가와 문학사이](7)윤성희-문학은 선물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부가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준다는 원숭이손을 얻게 된다. 이들은 시험 삼아 100만원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위로금 100만원이다. 부부는 슬픔에 빠져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빈다. 죽은 아들은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부부는 울면서 마지막 소원을 빈다. 아들을 다시 죽게 해달라고.

이 이야기가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파워를 가진 원숭이손? 좀비가 된 아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냉혹한 경제적 순환의 논리는 우리를 불안하고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니! 따지고 보면 그렇다. 상품과 돈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언뜻 그러한 논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이나 우정, 가족애조차 교환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러한 진실한 감정조차 사실은 그러한 논리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우연한 사고로 자기 대신 죽은 사내의 한쪽 구두만 신은 발을 본 뒤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들을 상상하지 않고는 깊게 잠”(‘무릎’)들지 못한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집을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쓸모없이 소진한 뒤, 자신이 정원사로 일하던 집의 주인에게 꽃다발 타일을 선물로 준다. ‘레고로 만든 집’과 ‘거기, 당신’에서 주변부 마이너리티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때로는 무거운 절망으로, 때로는 가벼운 유머로 포착해 온 윤성희의 최근작들은 이렇듯 죄책감과 선물의 테마로 우회하고 있다. 그런데 죄책감과 선물이라니?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의 죄책감은 많은 경우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죽거나 자살하거나 이혼한 데서 생기는 것이지만(‘무릎’ ‘재채기’ ‘저 너머’),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자장가’)에 시달리거나 임신한 담임선생님이 기형아를 낳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험을 망치기도 한다.(‘하다 한 말’)

이러한 죄의식은 되갚아주어야 한다는 어떤 부채의식으로 발전하면서 선물의 논리를 작동시킨다. 이때 선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해진 답례나 경제적 계산에 얽매여 주고받는 것과는 다르다. 윤성희 소설에서 선물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거나 엉뚱한 대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낯설다. ‘무릎’에서 ‘그’의 부채의식은 분명 죽은 사내로부터 촉발되지만 ‘그’의 선물은 죽은 사내의 가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사건과는 무관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다가 윤성희 소설에 등장하는 선물의 목록을 보면 꽃다발 타일, 달력, 늙은 말, 허름한 카페, 혹은 틀니 등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선물은 그렇게 세상 이치와 계산법을 벗어난 곳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완고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논리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현실세계에서 선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물은 현실사회의 악무한적 원환구조를 찢고 느닷없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주어진다.

부채의식을 떠안은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축적 대신에 무의미한 소진을 선택함으로써 살벌한 교환의 원환을 벗어나 “눈동자가 있는 곳 너머”(‘등 뒤에’)에서나 펼쳐질 법한 낯설고 불가능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한 응시가 윤리적인 것은 현실세계의 교환과정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이름붙일 수 없는 것, 비가시적인 것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 세계의 익숙한 현실논리는 낯설어지고 세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니 ‘문학은 선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냉혹한 현실논리에 두려워하고 삭막한 세상 이치에 불안해하는 고독하고 소심한 자의 부채의식으로부터 문학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윤성희 소설은 우리에게 주어졌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한국일보(07. 02. 08) [작가의 우정편지] 소설가 윤성희가 소설가 강영숙에게

전 아직도 그 공중전화를 기억하고 있어요. 이화여대 후문을 지나는데 삐삐가 울렸어요. 번호를 보니 선배였어요.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걸까요? 전날 저는 술이 과해서 집엘 가질 못했죠. 그래서 선배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졌었잖아요. 우리가 같이 술을 마셨던 술집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 나요. 명동 근처의 중국집이었죠. 성희야, 안주 먹어라. 안주. 선배는 내게 말했어요. 그러고는 내 쪽으로 비싼 안주를 밀어주었어요. 그 덕에 전 아주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암튼, 다음날 저는 공중전화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죠. 전화기 저편에서 선배는 이렇게 말했어요. “성희야. 니가 떠나자마자 전화가 왔단다. 됐단다.” 그렇게 짧게 말하고 선배는 전화를 끊었어요. 그게 선배의 당선 소식이었죠. 갑자기 눈이 왔다거나, 가슴이 두근거렸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하게 보였다거나, 하지 않았죠. 아, 됐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려봤죠.

그리고 일 년 후, 저도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죠.(역시 공중전화였어요) “선배님. 저 됐어요.”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어요. 역시, 갑자기 눈이 내리지 않았죠. 세상이 온통 내 것처럼 느껴지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을 하지도 않았죠. 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오들오들 떨었어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았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저는 일 년 전 선배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배, 미안해요. 그 생각만으로도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때 이후로 전 이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선배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는 길이 안개처럼 보일 때, 똑같은 문장을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해서 중얼거릴 때, 새벽녘 방 한구석에서 쪼그려 뛰기를 해도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을 때면 선배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했죠. 그런 생각들이 오늘날 나를, 팔 년 전의 나보다, 조금은 더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아요. 이제는 선배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입시키게 되었죠. 존경하는 많은 선생님들, 의지하는 많은 선후배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의 주인공들…. 그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이라면 어떻게 견뎠을까?

제가 이십대일 때 선배는 삼십대였죠. 같은 삼십대가 되기 위해 얼른 달려왔더니 선배는 사십대가 되어 버렸네요. 가끔 선배는 제 작품에 대해, 압정 같은 말을, 한마디씩 던져주곤 했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전 태연한 척 했지만 실은 무엇인가를 들켜버린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들켜버린 게 그다지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이 편지를 다 쓰면, 술 마시자고 전화할게요. “이년아, 넌 너를 너무 몰라.” 술 취한 선배의 목소리로 이런 욕을 듣고 싶거든요.(성희 / 2007년 2월)

07. 02. 24.

P.S. '선물'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이후에 현대철학에서 매우 인기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지극히 바타이유적인 주제이면서 지극히 레비나스-데리다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한국소설에서 그러한 주제를 탐구하는 일은 드문 게 아닌가 싶다(편지에서도 작가의 밸런스 감각, 교환의 논리가 읽힌다). 작가의 묵직한 장편소설이 씌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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