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이었나 평론가를 만났을 때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뭐냐고 물었더니 무슨 본드걸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라고 했다(아이디어를 쥐어짜는 데에서만큼은 우리 작가들도 발바닥에 땀날 정도이다). 직감에 본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는 있겠다 싶었던 소설이 최근에 출간됐다. 평론가는 해설에 '남근이여, 안녕'이란 제목을 붙였군. '본드걸'이란 말이 고상한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지만 재미만큼은 보장할 수 있을 법하다. 어쩌면 좀 섹시할는지도 모르겠고. 한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2. 24) 본드보다 더 007같은 본드걸

20세기의 아이콘인 이안 플레밍 원작의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1편이 제작되면서 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대단한 완력과 성적 매력을 갖춘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 그의 상관인 M, 신무기를 개발해 극의 잔재미를 더해 주는 과학자 Q, 그리고 M의 비서인 머니페니. 늘 등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본드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당들과 그의 조력자이자 연인인 본드걸은 매번 바뀐다.

젊은 여성작가 오현종은 그 본드걸 중 하나인 미미를 내세워 ‘007 시리즈’의 코드를 뒤집어보는 패러디 소설을 시도한다. 다음 에피소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질 운명인 본드걸 미미가 자신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스파이가 되고, 007과 함께 작전에 투입돼 활약하면서 남성중심적·이분법적인 ‘007 시리즈’를 해체해 버린다.

이 소설에서 본드는 더이상 제3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백인남자가 아니다. 모종의 작전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본드는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보지 못하는 쫌생원이고, 미미의 기분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이며, 홈쇼핑이나 코미디 채널을 돌리며 악당과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는 왜소한 한국 남자다.

그런가 하면 취직면접에서 줄창 떨어진 뒤 언니와 형부가 운영하는 갈빗집 카운터를 보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미미는 청년백수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 미미가 새로운 출동명령과 함께 다른 애인을 만든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M의 밑으로 들어가 스파이 교육을 받고 살인번호 013이 된다. 그러나 동료의 말처럼 스파이는 이 시대의 사양산업이다. “위성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제트테러리즘 시대에 스파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는 자조가 떠돈다.

어쨌거나 좌충우돌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파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미미는 드디어 본드와 함께 이쪽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줄 스파이 백색공포를 데리러 일본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색공포는 M의 경쟁상대인 하이드측에 의해 납치되고 백색공포의 애인이던 미스 플라워, 이같은 일을 꾸민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스파이 살로메 사이에서 본드와 미미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주어진 체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본드와 달리, 미미는 스파이세계의 허를 찌르기 시작한다. 착한 본드걸 미미와 나쁜 본드걸 미스 플라워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고, 하이드의 첩자인 살로메는 다름아닌 M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M은 자신이 키우던 사자에게 먹히는데 그의 몸에 조금씩 쌓여있던 독이 사자를 죽인다.



결국 본드와 본드걸, M과 하이드, 아군과 적군, 선과 악 등의 구분과 위계가 사라지면서 철저히 환멸과 혼란만 남은 ‘007 시리즈’가 독자들 앞에 던져진다. 지난해말 개봉된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은 본드가 스파이가 되기 전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상처받은 현대의 남성상을 대변하면서 이 시리즈의 클리셰를 해체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더욱 완전하면서 얄궂은 해체를 보고 싶다면 미미 같은 본드걸의 입장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강변한다.(한윤정 기자)

07. 02. 24.

P.S. 리뷰기사는 <카지노 로얄>의 본드걸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이 아니라 카테리나 뮤리노)의 이미지를 붙여놓았는데, 개인적으로 '본드걸'하면 떠올리게 되는 여배우는 캐롤 부케이다. 그건 그녀가 나오는 007영화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1981)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007영화였기 때문이다(당연히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이며 이후에 본 007영화들은 대개 시들했다. 물론 머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짐작에 영화를 찍었을 무렵 그녀의 나이는 23-4살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만 50세가 되었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한번 상처한 이후에 지난 2003년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재혼한 걸로 나온다. <내겐 너무 이쁜 당신>(1989)에서의 그 바람둥이 남편 말이다!(물론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란 게 바람 피는 이유였지만.) 삶은 참으로 뻔하면서도 미스테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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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4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카테리나 뮤리노란 배우네요. 두 여자 중 왼쪽이 에바 그린이죠.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 전 그 새 살이 쪘나 했더니 기자가 잘못 안 것이네요.^^


마늘빵 2007-02-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요? 아 이렇게보니 또 다르네요. <몽상가들>에서 참 섹시하고 귀엽고 은은한 매력도 있고 그랬는데.

stella.K 2007-02-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로쟈님 페이퍼 보니 선물해준 분이 그냥 보내준 게 아니었네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내겐 너무...>이 영화 본 것도 같고 가물가물 하네요. 정신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