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고원에 오래 전에 올려놓았던 글을 옮겨놓는다(포스팅 날짜는 2002년 2월 2일로 돼 있다). 원래는 '루카치와 후쿠야마, 그리고 노동과 유희에 대하여'란 제목이었는데, 너무 '구태'가 나서 바꾸었다. 이 포스팅 또한 나름대로 <비평고원 10>(도서출판b, 2010) 출간 기념의 의미를 갖는다. 내용은 역시나 카페 주인장인 쿤데라님과의 논쟁을 담고 있다(주로 쿤데라님의 주장에 대한 논평과 반박이다). 돌이켜보니 2000년대 초반에 나는 주로 이런 논쟁을 즐겨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논쟁도 다 추억거리가 된다(나 자신의 생각도 그간에 좀 달라지기도 했고).
제 생각에 의견의 차이는 설득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과학철학에서 패러다임 이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토마스 쿤은 그것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걸 권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의견 혹은 입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논리적 일관성과 정합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와 관련하여 제가 좀 미심쩍게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오해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해명도 덧붙입니다.
"우선, 전 해체주의를 읽기 이론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왜냐면, 이것은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1) '읽기 이론'(reading theory)는 마이클 페인의 저서명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책이름은 '이론 읽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에 데리다는 자신의 읽기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고착화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방법론은 모든 텍스트의 상이성을 지우는 것이기에. 그리고 텍스트의 해체/구축이라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그리고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러나 그런 점을 고려하여 그의 생각을 읽기 이론으로 보는 건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데리다가 환영받을 수 있었던 건 신비평에서 얘기하는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와 접맥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이건 제 생각이 아니고 일반론입니다). 다만 신비평은 자세히 읽기를 통해서 텍스트의 아포리아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에, 해체론은 오히려 아포리아들이 생산된다는 걸 보여줍니다. 읽기 이론에서 '이론'이란 말에 거부감이 있다면, 그냥 읽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방점은 읽기에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읽기란 본래 의미를 음미하는 작업입니다. 글쓰기는 이와 다르죠. 어떤 글쓰기도 결코 동일할 수 없으니까요."라는 건 뭔가요? 읽기가 글쓰기와는 다르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읽기는 동일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해체론은 글쓰기 이론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글쓰기와 차이>로 번역된 데리다의 책이 서점에서 작문 코너에 꽂혀 있기는 합니다.)
"해체주의를 정치적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란 말과 같게 들리는군요.(자유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정체체제는 없다라는 절벽에 다다름) 아니면, 님이 민주의의란 말을 너무 추상적으로 사용하고 계시던가요."
(2) 저는 '민주주의'라고 했지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자유주의와 (정치적)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인데, 제 방점은 민주주의에 있으며,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민주주의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민주주의도 있고, 조선인민민주주의도 있습니다. 제가 뜻하는 민주주의는 텍스트적 의미의 단일성에 대한 믿음(그건 형이상학적 신앙 혹은 파시즘과 연관되는데)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정치에서의 의견의 복수성에 대한 믿음과 연관이 되고. 해서 의미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해체론이 정치적 민주주의와 연결된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민주주의 앞에 놓인 수사 때문에 그러한 복수성에 침해/훼손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냥 민주주의라고 한 것이죠.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십니까?
"다만, 전 데리다와 루카치를 한 사람을 택하라면, 루카치를 택할 겁니다. 물론, 루카치의 정치적 실천에서의 오류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또는 글)로만 실천을 외치는 것보단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3) 요컨대, 데리다보다 루카치를 지지하신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적어도 이 대목에선) 데리다가 말/글로만 떠든 데 반해 루카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직접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는 이상주의자(세계의 변화를 기대하는)와 냉혹한 현실주의자(또는 허무주의자)의 차이점이기도 하구요."라고 덧붙이셨는데, 루카치가 이상주의자이고 데리다가 현실주의자/허무주의자의 배역을 맡은 것 같네요(루카치가 말하는 리얼리즘이 이상주의로 번역되는 것이었나요?). 제 상식으로 루카치를 지지한다는 것은 맑시즘을 지지한다는 것이고,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믿는다는 것이며 예술/문학은 사회현실의 충실한 반영이고 또 반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작품해석에 있어서 유일한 진리(유일하게 올바른 해석)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만년에 후배인 하우저와 나눈 대담(1969)의 일부를 인용해 보죠.
루카치: 서구에서는 요사이 제 견해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구호인 '다원론주의'라는 것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문제를 두고 여러 개의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언제나 오로지 단수 속에만 있습니다.
하우저: 적어도 단일한 이데올로기 내에서는 그렇지요.
(반성완 편역,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 92쪽.)
그러한 믿음을 쿤데라님도 공유하고 계신가요?..
(4) 말이 나온 김에 후쿠야마 얘기도 하죠. "관변학자=주류"라는 공식에 의문을 제기하셨는데('관변학자'란 말은 제가 만들어쓴 말이 아닙니다), 기득권층을 주류라고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지요? 사뮤엘 헌팅턴이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현재 미국의 국익과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그들입니다. 관변학자나 주류란 말에 무시의 의미가 내포돼 있는지요?(후쿠야마는 아시다시피 미행정부의 정책자문역을 해왔습니다. 관변학자란 말은 그걸 지칭하는 것인데, 그게 무시인가요?)
"더구나, 후쿠야마는 그렇게 무시할 만한 존재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후쿠야마가 우리나라에서 너무 폄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관변학자인 후큐야마보다 비주류인 푸코의 책이 더 많이 팔리죠) 그의 논의엔 상당히 정당한 주장들도 많은데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것 등등."
저는 후쿠야마를 무시하지 않았고(그의 '역사종언론'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음미할 대목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와 같은 입장이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는 국내에서 폄하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책들이 나오는 족족 번역되고 있고, 언론매체에서도 자주 그와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습니다(적어도 그는 고진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신지요?(또,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푸코의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하셨는데,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바케트빵처럼 팔리기라도 했나요? 그의 번역본과 연구서를 몽땅 다 해서 몇 만부이고, 또 실제로 읽은 독자는 그 절반의 절반도 안될 겁니다. 쿤데라님의 출판사회학은 제게 그다지 신뢰감을 주지 못하네요.)
그리고 문제의 대목. "그의 논의엔 상당히 정당한 주장들도 많은데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것 등등"이라고 하셨는데, 왜 여기선 (추상적인!) '민주주의'인가요? 후쿠야마가 말하는 건 개나 소나 다 붙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엔 그게 없어서 테러리즘이 창궐한다고 말합니다(요컨대 그는 미국 테러사태에 대해서 미국의 책임은 묻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루카치에 대한 지지와 후쿠야마에 대한 동조가 결합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루카치는 후쿠야마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을 것 같고, 후쿠야마 또한 루카치에 대해 지지할 것 같지 않은데 말이죠. 물론 둘 다 헤겔리안이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한 사람은 좌파고 한 사람은 우파거든요. 쿤데라님은 그런 좌우이념이 이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아니면, 그 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고 계신 건지요? 아니면, 그냥 '종교적' 관용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요?
"다만, 이것 하나는 지적하고 싶군요. 국내 계간지에서 언급된 사상가들 대부분은 님의 기준으로 한다면, 모두 비주류이기에 소위 문학권력 논쟁도 비주류와 비주류의 싸움일 수도 있군요. 질문 하나, 그럼 님이 생각하는 주류는 누구입니까? 구체적 실명을 들어 주십시오."
(5) 제가 비주류적 지식인으로 언급한 사례는 촘스키, 부르디외, 푸코 등인데, 그게 "모두 비주류"란 의미가 되는 건가요? 다 촘스키와 부르디외, 푸코 같은 놈들인가요? 다만, 저는 지명도만 가지고 주류/비주류를 나눌 수는 없고, 그가 가진 정치적 성향(사회비판적 혹은 반체체적)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비판적 지식인과 주류 지식인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문학권력 논쟁이 비주류와 비주류의 싸움"이라는 결론을 함축할 수 있는지요? 어떻게 그런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저는 한번도 이문열을 비주류 지식인(엄밀한 의미에서는 그가 지식인인지 의문이나)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데뷔 초기 무명시절에 잠시 비주류 작가였을 뿐입니다.(사실 이문열에 대한 쿤데라님의 태도도 저로선 모호하고 미심쩍게 생각됩니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 한 두 개의 정확성보다 전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반복해서 읽기를 강조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시간적 격차를 두고 다시 읽는다는 것은 삶으로 읽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을 10대에 읽었을 때와 20대에 읽었을 때와 30때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죠. 이는 단순히 지적 성장뿐 아니라, 인격적 성숙(인생경험)과도 관련이 있지요."
(6) 이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선, 전제는 원서로 읽는 것이 좋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외국어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번역본을 읽는 것은 차선입니다. 왜? 엄청난 외국어 능력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에!(그런데 왜 가끔 쿤데라님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역본을 인용하시는지요?)
"물론, 로쟈님 말씀처럼 필요한 부분만 찾아읽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극히 작은 부분을 확인하거나, 오역을 찾아내는 수준이지, 전체를 원서로 음미하는 것과는 엄청 차이가 납니다."
요는 쿤데라님이 전체를 원서로 음미해 보셨는데, 번역본으로 읽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는 말씀이죠? 만약에 정말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면, 좀 번거롭지만, 엄청난 외국어 능력을 기르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지 왜 번역본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까?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어서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왜 포기해야 합니까? 차선으로 영역본들만 읽어도 (좀 덜 엄청나겠지만 나름대로 엄청난) 그 차이를 음미해 볼 텐데 말씀입니다. 더구나 외국문학 전공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겠죠. 제가 아는 사람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엄청나게 외국어를 공부해서 영어와 불어는 비교적 자유자재로 읽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유명 작가/작품들을 읽고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쿤데라님이 번역본을 고집하시려면, 적어도 원서 읽기와 번역서 읽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하셔야 되는 게 아닐까요?
"또, 님은 전공자라면 원서 읽기를 주장하셨는데, 전 번역서가 있는 한(아주 엉텅리가 아니라면) 굳이 원서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문학 전공자가 프루스트는 불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괴테는 불어로 읽어도 좋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부딪힐 수 있으니까요. 원서로 읽는 걸 자신의 공부방법으로 삶기 위해선, 해당 작품을 해당 언어로 읽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요? 적어도,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어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쿤데라님의 원서 읽기 개념은 해당 문학작품이 씌어진 언어로 읽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지 않아서, 번역서를 읽자는 것이죠.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가능할 경우에는 원서를 읽으면 좋다입니다. 즉 "굳이 원서를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번역서로 읽어도 된다는 것이죠(번역서로만 읽자는 뜻은 아니시죠?). 그러니까 불문학 전공자는 (가능하다면) 불어로 프루스트를 읽고, 괴테는 아무 번역으로나 읽으면 됩니다(불역이건, 영역이건, 국역이건). 굳이 국역본만을 읽을 필요는 없겠죠?
"님은 작품읽기와 그 작품을 둘러싼 해석읽기를 분리하시는 것 같은데, 전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7) 제가 말씀드린 걸 다시 반복하자면, "쿤데라님은 번역본을 세 번 읽는 것이 원서를 읽는 것보다 더 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같은 논법으로 말하자면, 사실 작품에 대한 유려한 해설들을 서너 개 읽는 것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해설들에 빠져 있는 것은 '경험'이지 '이해'가 아닙니다." 이게 작품읽기와 그 해석 읽기가 분리된다는 뜻인가요? 제가 말씀드린 건, 번역본 읽기로 원서 읽기를 대신할 수 있다면, 해설 읽기로도 번역본 읽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경우에는(음미가 아니라). 쿤데라님이 말하는 비분리라는 건, (제가 상상력을 좀 발휘하면) 작품이 곧 해설 그 자체이기에 따로 해설이 필요없다는 뜻인가요? 그건 이론의 불필요성에 대한 주장과도 합치되니까 그럴 듯하네요. 저는 그냥 그래도 중요한 건 작품이다, 란 뜻으로 새기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10-20년 후면 대학교수들이 푸코, 들뢰즈, 라캉을 칸트, 헤겔, 하이데거를 이야기하듯 이야기할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수가 말하길, 난 데리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리다를 말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밥먹고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대학에서 그럴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8) 미래학자들의 예측도 겨우 60% 적중율을 보였다는데, 제가 굳이 쿤데라님의 의견에 동감할 필요는 없겠죠. 10년 후에도 푸코, 들뢰즈, 라캉이 이야기된다면, 그들이 중요해서인지 무슨 꼼수나 로비에 의해서는 아닐 겁니다. 데리다를 말하지 않으면 대학에서 밥먹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신비평만 알아도 30-40년씩 대학교수를 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우리 대학이 그렇게 험악해 지나요? 그런 상황이 현실화되려면, 즉 데리다를 모르는 교수가 '왕따'가 되려면 나머지 대다수 교수들은 데리다를 좋아하거나 정통해야 하는데(우리에게 데리다가 그토록 중요하고 절실하게 될지도 의문이지만), 쿤데라님은 그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시는 건지요? 저는 유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습니다.
"(푸코, 데리다를) 영문학 전공자들이 미국에서 유행을 하니까 부지런히 수입해서 유행을 시켰죠. 해서, 헤겔, 칸트의 책이 안 팔리고, 이들의 책들이 팔리기 시작했죠."
(9) 몇 번의 논쟁을 거치면서 느낀 건데, '출판학'이나 '미래학'에 대한 쿤데라님의 주장은 그냥 한쪽 귀로 흘려들으면 될 것 같습니다. 푸코 번역서만 해도 번역자들은 철학자, 법학자, 정치학자, 불문학자 등입니다. 영문학자들이 강의실에서 떠드는 바람에 이 사람들이 번역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들이 수입하거나 맘만 먹으면 유행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가요?(참고로 80년대 이후 대학사회에서 지식인의 유행은 루카치-알튀세르-푸코-들뢰즈의 순입니다.) 푸코나 데리다 때문에 헤겔, 칸트의 책이 안 팔렸다고요? 읽히는 건 둘째치고, 헤겔, 칸트의 책이 언제는 그렇게 많이 팔리다가 안 팔리게 된 건가요? 푸코, 데리다만 아니었다면 헤겔, 칸트가 여전히 유행하고 많이 팔려나갈 거란 말씀이신가요? 헤겔, 칸트가 일년에 몇 천부가 팔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나 <글쓰기와 차이>가 얼마나 팔렸는지 모르겠지만(<글쓰기와 차이> 같은 건 2천부도 안 나갔을 거라는 게 제 짐작인데), 뭐가 얼마나 안 팔리고 또 팔리기 시작했단 말씀인지... 다음에는 더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참, 그리고 푸코가 동성연애자이기때문에 비주류라고 하신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 = 비주류'엔 왠지 성차별적인 느낌이 드는군요."
(10) 동성애자는 분명 성적 소수자입니다(설마 의견이 다르신 건 아니겠죠?). 그런 소수자를 주류라고 해야 맞는 건가요? 그리고 비주류란 말이 차별적입니까? 저 또한 비주류 인문학도인데(쿤데라님도 별로 다를 것 같지 않고), 그건 우리시대에서 인문학 자체가 비주류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차별이 있는 건가요? 우리가 분개해야 합니까?
"근대문학에 있어 가치평가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장에의 요구에 따라 졸작이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그 역이 되기도 하죠. 해서, 제 말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한다는 말입니다. 텍스트 내의 문학성 외, 텍스트 밖의 사회성 역시 말입니다."
(11) 이것도 아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텍스트 밖의 사회성은 우리가 어떻게 고려할 수 있는지요? 작품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 내의 문학성'과 '텍스트 밖의 사회성'을 아우르는 거라면, 작품(만) 읽기는 절반의 읽기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쿤데라님은 작품에 대한 해설도, 이론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우리는 그냥 절반만 이해하는 걸로 충분한 건가요?
(12) "예, 쿤데라님은 고전작품 읽기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것에 부정적이시죠"라는 저의 단정에 대해서, "정확히 말해선, 작품 읽기죠."라고 하셨는데, '작품 읽기'가 '고전작품 읽기'보다 더 정확히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전 바흐친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 바흐친을 읽는 것이죠. 물론, 요즘엔 거꾸로지만. 전 문학을 하는데 있어 이론을 그닥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결코 이론혐오증은 아닙니다) 이론을 문학은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이지, 문학 그 자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론의 과잉, 이건 20세기적 현상에 불과합니다."
(13) 이전에 쿤데라님은 바흐친을 높이 평가하신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요. 이론이 그닥 필요하지 않은데, 굳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 바흐친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요? 그리고 바흐친을 권할 필요가 있는지요? 더불어 문학이론을 문학 그 자체라고 우기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리고 도움을 주는 게 어딥니까?). 문학이론의 과잉은 물론 20세기적 현상이고, 그것은 대학에서의 문학교육이 학제화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론을 참조하거나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읽기란 어떤 건가요? 쿤데라님은 그런 읽기를 실천하고 계신 건가요?
(14) 제가 "(저에게) 그런 책읽기는 모두 괴로운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였습니다. 모름지기 고전읽기는 자기만족과 교양을 위한 것이지 결코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거나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 데 대해서. "노동과 유희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에 기쁨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쾌락, 전 솔직히 그런 걸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독서?"라고 하셨는데, 모든 노동이 유희와 결합되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우리가 벌써 그런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니!) 흔히 유희란 사회적 생산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할 경우에는 비유적인 뜻인 것이죠. 그리고 그건 생계를 위한 노동과는 정말 다른 겁니다.
책읽기가 노동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강제되어 있어서 억지로 행해질 때입니다(돈을 받고 독서 리뷰를 판다든가 할 때). 그렇지 않은 책읽기를 노동이라고 부르는 건 우스개입니다. 그리고 유희를 노동이라 부르는 건 범주착오일뿐더러 노동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가령 고진의 <윤리21>을 밤새워 읽는 건 노동이 아니라 유희입니다(설마 돈받고 읽으신 건 아니겠죠?). 재미없거나 피곤하면 언제든지 덮을 수도 있는 걸 재미/흥미 때문에 다 읽고 나서 '노동'을 했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아이들이 축구하느라고 뛰어다니다 보면 숨도 차고 힘이 드는데, 그걸 노동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독서?"에 의문을 표시하셨는데, 누가 억지로 제발 좀 읽어달라고 해서 읽는 것도 아닌데, 왜 괴로운 독서를 해야 합니까? 요컨대 (어려운 일 뒤에 따르는 기쁨을 위해)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고생(이런 걸 고통이라 할 순 없죠), 즉 사서 하는 고생을 가지고 노동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쿤데라님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문학전공자라면 고전읽기는 일정부분 강요되어 한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물론, 엘리엇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문학이란 역사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전통에 대한 이해없이는 한 치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목을 보면, 쿤데라님은 강요에 의해서, 등떠밀려서 고전읽기에 나서시는 듯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인과적 강제가 아닌 이상, 쿤데라님의 자발성(자유의 공간!)이 개입한 것이고, 따라서 고전읽기의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건 엄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게 너무나도 괴로우시면 딴걸 하시면 됩니다. '즐거운 유희'를 '괴로운 노동화'하시느라 굳이 수고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15) 제가 너무 억지인가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기도 하니까. "고전 기하학에 대한 이해없이, 미적분을 한다는 것은 우수운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즐겁냐? 즐겁지 않냐?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전공, 직업으로 선택했다면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될 듯합니다. 쿤데라님은 (고전)작품 읽기는 전공/직업으로 선택한 것이고, 그래서 그 읽기는 유희가 아니라 노동(유희와 분리 안되는?)입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습니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소외 문제가 그것입니다. 그 노동은 고역일뿐더러 소외된 것이기에 삶의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쿤데라님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저 혼자만의 의문입니다...)
부기: 직장이 아닌 집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글에서 답변/질의서를 작성하다 보니 말이 촌충처럼 너무 질어졌네요. 이러다 '노동'이 되겠습니다. 오해는 풀리고, 의견 차이는 보다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10. 07.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