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아가라고 하여 내려가보니 전문 월간지 <공간(SPACE)>(512호)이 배송돼 있다. 보통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한 번 건너뛰고 이번 7월호에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미술문화, 2010)에 대한 서평을 실은 바 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라면 들여다볼 일이 거의 없을 잡지인지라 가끔씩 '문학평론가'의 서평이 실리는 게 신기하긴 하다.   

공간(10년 7월호)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부제는 ‘4인의 철학자가 들려주는 통섭강의’다. 아르코미술관 주최로 네 명의 인문학자가 참여한 강좌 ‘현대미술과 인문학’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전반적으론 미술사와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강의록’이라고는 하지만 ‘강의’는 빠지고 ‘기록’만 남았다. 강의의 현장감이 반영돼 있지 않은 탓인데, 독자에게 ‘들려주는’ 청각적 텍스트가 아니라 여전히 독자가 ‘읽어야 하는’ 시각적 텍스트에 머물고 있는 점이 흠이다. 무엇을 읽을 수 있나?   

먼저, ‘둥지의 예술철학’을 주제로 삼은 박이문 교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예술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라고 전제하고 기존의 정의들을 검토한다. 예술을 ‘재현’과 ‘표현’, ‘형식’, ‘제도’ 등으로 규정해온 전통적 정의들이 어떤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한가를 지적한 후에 그는 ‘예술의 종말’론으로 유명한 아서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고 비판한다. 단토의 정의가 “눈으로 보아서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런가? 

  

단토는 1964년 앤디워홀이 뉴욕의 한 갤러리에 ‘브릴로상자’를 전시한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는다. 당시 워홀이 흔한 비누상자를 모방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적어도 육안으로는 기성품과 구별되지 않았다. 단토는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이란 문제를 도출해내며 지각이 더 이상 예술작품을 식별해주는 준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술이 ‘눈’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문제가 된 것이고, 이것은 감성학으로서 미학의 종언을 뜻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단토에 대한 비판은 다른 근거에서 이루어져할 듯싶다. 대신에 박 교수는 예술작품의 양태적 정의를 제안하며 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 ‘둥지’를 제시한다. 새들의 둥지가 가장 바람직한 예술적 언어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둥지는 생태학적이며 친환경적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건축공학적으로 견고하며, 감성적으로 따뜻하고, 영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중국철학 전공자인 임태승 교수는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라는 강연에서 동아시아 미학의 구조와 성격을 밝히고 디지털미학을 위한 제언을 보탠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과 원리이며 동아시아 예술은 철학적인 원리와 미학적인 범주 사이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한 전통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유가(儒家)미학이다. 격물(格物)에서 수신(修身)을 거쳐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유가적 알고리즘이 미학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래서 ‘물로써 덕성을 비유한다’는 뜻의 이물비덕(以物比德), 줄여서 ‘비덕’이 가장 전형적인 심미론 또는 창작론이 된다. 자연계의 물상이 모두 인간의 도덕적 정감과 관련되기에 ‘재현(再現)’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 ‘사의(寫意)’다. 실경(實景)보다 상징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예 임 교수는 동아시아 예술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동아시아 미학이 디지털미학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동아시아 신화와 역사의 수많은 내러티브들이 디지털기술에 스토리보드를 구축하게 해줄 거라는 것이 임 교수의 기대다.   

‘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에서 이광래 교수는 서양미술사가 재현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탈재현(차이의 발견)과 반재현(차이의 생산)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푸코에 기대어 말하자면, 재현에서 재현을 통해 재현을 부정하는 탈재현으로, 그리고 그것마저도 거부하는 반재현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서양미술사의 전개과정이었다. ‘재현미술의 종언’ 이후의 미술은 곧 ‘엔드게임’으로서의 미술이다. 이 게임은 결코 끝나지 않고 다른 게임, 즉 메타게임으로 대체되며 게이머들만 바뀐다. ‘미술의 종말놀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다. 급속하게 변화해가는 매체환경 속에서 미술작품도 무한변신을 시도할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 ‘확장미술 시대’를 맞이할 미래의 사이버서퍼들은 스펙터클 엔드게임에 빠져들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전망이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은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에서 매체 변화와 혁명이 가져온 의식 및 사회 변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이상학의 밑그림을 그린다. 근대의 개인적 주체, 자본주의적 대량상품 시장 체제, 목적론적인 진보적 역사관 등의 확립이 모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한 문자문화의 정착과 무관하지 않다면, 사진술의 발명은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모든 시각적 세계가 ‘인간의 눈’으로 본 세계였지만 사진술의 발명 이후에 인류는 ‘기계의 눈’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우리의 감각비율과 지각 패턴을 바꾸고 문화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꾸어놓는다. 아직 진행중인 디지털혁명이 이미 존재 질서를 재편하고 우리의 정체성마저 변화시켰다는 주장은 그래서 가능하다. 아마도 우리가 인문학을 다시 또 만난다면 ‘미술관’이 아니라 ‘사이버미술관’에서이지 않을까.    

10. 07. 01.  

P.S. 엉뚱하게도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는 미술관이 아니라 영화관을 떠올려준다. 책의 후반부를 씨네큐브에서 <하하하>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아서 단토의 신작이 <앤디 워홀>(2009)인데, 구미가 당긴다. 하하하, 앤디 워홀이네!.. 

 

P.S.2.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은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로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번역'이란 말을 쓸 수도 없다('아서 단토 지음'은 어떤 의미로 적어놓은 것일까?). 편집자주에 따르면, "원저작물에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엮은이를 따로 두었"고, 책은 그 엮은이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단토의 지적대로 워홀에 관해선 훌륭한 전기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하필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책을 골라서 '전기'로 재가공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기대하던 책을 하나 도둑맞은 기분이다. 단토나 저작권자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10.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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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앤디 워홀 이야기' 유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4 20:07 
    저녁을 잘 먹고 소화 안 되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신작이 출간된 건 반갑고, 게다가 그 책이 지난달에 기대를 표한 <앤디 워홀>(2009)이라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작 '번역서'라고 나온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는 엉뚱하게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하나로, 앤디 워홀의 전기나 소설처럼 꾸며서 훑어주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