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냐 반역이냐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청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우 인문학의 황금기가 따로 없었기에 인문학 '부흥'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박 교수는 그럼에도 인문학 부흥을 위해 다져야 할 기본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독서 문화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뒷걸음만 치고 있군요. 90년대만 해도 인문서 초판을 2,000-3,000부도 찍었는데 요즘은 500부, 1,000부더군요. 점점 더 책을 안 사본다는 거지요. 게다가 대학 교수들은 마치 올림포스 산 정상의 신들처럼 고고한 상아탑에 유폐된 채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아니, 소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것 같아요. 평생 인문학 교수 했다면서 대중과 소통 가능한 저서 한 권 없이 정년을 맞이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분을 과연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제도권 속에서 요구하는 논문만을 줄곧 쓴다는 점에서 '인문 기능인'이라고 해야지 않을까요?"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한다.  

"인문학이란 기본적으로 글읽기와 글쓰기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콘텐츠는 정말 빈약하지요. 읽을 글이 태부족입니다. 한글은 창제된 후 상당히 오랫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고, 20세기 전반기에는 식민지 지배를 겪으면서 활용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번역을 통한 양질의 한글 텍스트 확보는 시급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온전한 콘텐츠 확충을 위해서는 번역이 절실해요. 전 세계 모든 지식과 정보를 모국어로 습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와 비전이 있어야죠. 모국어에 대한 이런 포부와 야망마저도 없다면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시작전권' 환수도 버거워하는 국가인지라(이유야 어찌됐든 소위 '군사주권'을 방기하는 것인데) '지식주권'까지 바란다는 건 너무 무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건 현재 우리나라의 번역과 인문학 수준에 대한 박 교수의 평가인데,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서구 편향적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이슬람 문명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슬람교가 창시된 직후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은 찬란한 문명을 창조해냈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은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아랍어로 번역했지요. 그것을 12세기 서유럽인인 라틴어로 중역해서 만든 것이 기독교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한 스콜라 철학이고요. 그런데 21세기 우리는 아직도 한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이 없습니다. 아랍보다 1,100년, 서유럽보다는 900년 뒤졌네요.   
시인 김수영은 1960년대 중반에 쓴 산문에서 '1930년생'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했어요. 1930년 이전에 태어난 '구세대'는 해방되던 1945년에 15세 이상이었고 따라서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죠. 반면 1930년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는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김수영은 구세대가 일본어를 통해 문학의 자양을 흡수한 데 비해, 신세대는 일본어 해독 능력의 결여로 지적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수영은 신세대 문학 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했어요.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른는 까닭에 세계문학의 흐름에서 차단된 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지성'이라는 겁니다. 그는 산더미같이 밀린 외국 고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 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국운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지적했어요.     
흔히 일본을 번역 천국이라고 하죠. 일본어로 세계의 고급 정보와 지식을 다 습득할 수 있어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 쿄토산업대 교수는 "영어를 못해 물리학을 택했다"고 농담할 만큼 영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어요. 대학원 시험 때 지도교수가 그의 외국어 시험을 면제해줄 정도였고 평생 외국도 못 나가 여권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글만 갖고서도 노벨상을 탈 정도가 돼야 선진국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아예 '번역국'을 설치하여 국가 주도하에 수천, 수만 종의 서양 학술서를 번역했던 일본의 처지와 견주어 보면 우리는 100년 이상 뒤진다는 것이 박 교수의 냉정한 평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이 이미 19세기에 어머어마한열정으로 시작한 일을, 우리 사회는 지금도 그 필요성을 조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무관심과 제도적 냉대에 대해서 박 교수는 이렇게 꼬집는다. 

"인문학자들에게 정체성 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모국어를 튼실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인문학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성찰할 줄 몰라요. 미국이나 독일 등지의 대학원은 외국학(동양학) 연구자들에게 석박사 학위논문으로 번역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외국학을 할 경우 번역을 연구 실적으로 인정해야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런 주체성에 입각한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자신이 한국사람이 아닌 미국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나 봐요." 

마지막 멘트는 농담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절반은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녀들은 '미국인' 아닌가. 끝으로, 나도 개인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주제인데, 번역 문제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이다.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 인구는 극소수입니다.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를 10개 땄다고 해도 영어책을 한글책처럼 자유자재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글 콘텐츠를 확충해서 영어가 아니더라도 한글만으로 전 세계의 고급지식과 정보를 다 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가 되는 거지요.
조건이 여의치 않다고해서 번역가와 출판인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위기를 극복한 역사적 경험을 갖지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일수록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좋은 번역서를 출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출판의 정도를 걸어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번역의 힘'을 만끽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이며 나라살리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병운동'과 '나라살리기 운동'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으로서 번역이 갖는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키고픈 의도에서 박상익 교수의 인터뷰를 옮겨적었다... 

10. 07. 02.  

 

P.S. 박상익 교수와 마찬가지로 번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영문학자 김욱동 교수가 번역과 한국 근대를 다룬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했다.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 <근대의 세 번역가: 서재필, 최남선, 김억>(소명출판, 2010)이 그 두 권의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주문을 넣고 기다리는 중이다. 우리는 100년 전에 번역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고 또 어떤 작업을 했던가 살펴볼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 또한 100년 뒤에 똑같이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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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7-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이 거의 25여년 전에 했던 주장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지 않았나요?

물론 전체적인 문제의식에는 십분 공감은 하지만 예로서 거론 된 것들이 좀 부적절하다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 1100년 900년 뒤졌다고 하는 건 좀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전달된 후 100여년 지났을 테니 그 시점 이후부터 따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인물임을 전제한다면 아랍어 번역이 나오는 데 거의 1000년 이상 걸린 셈이고 그리스 문명에 매우 친화적이었던 라틴어 번역도 아랍어 중역을 통해 거의 13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셈이니까요. 물론 문화교류의 스피드를 그 시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번역에 열심이었던 일본에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이 얼마만에 나왔나와 비교한 예를 들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당시 학문의 중추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 사회에 그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구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는 암암리에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세뇌도 보입니다...

김욱동 교수님 책은 저도 관심이 가는 군요.^^

로쟈 2010-07-02 21:38   좋아요 0 | URL
약간 '과장'된 면도 있지요. 서양사 전공자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예로 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동시대 문제작들도 바로바로 소개되는 건 아니니까 저는 사정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하기야 번역을 기다리는 우리 '고전'도 산적해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을 듯해요...

안티고네 2010-07-20 23:28   좋아요 0 | URL
그렇게 연대만 가지고 단순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랍어 번역이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슬람 문명권에서의 번역이라고 해야겠죠. 이슬람신학의 쳬계화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인것이니까요. 622년 시작한 신흥종교 이슬람교가 750-900년에 모든 번역을 마쳤으니 이슬람기원으로부터 130년이 경과된 뒤 본격 번역작업을 시작한 거죠. 이슬람교 초창기 모든 것이 체계가 잡히지 않고 어수선한 그 시대에 불과 130년 지나서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작심을 했으니 정말 대단한 겁니다.
그리스문명에 라틴어가 친화적이었다는 것도 고대로마시대에 국한된 얘기입니다. 로마 멸망 후 500년 넘도록 과거와의 엄청난 단절이 있었습니다. 서유럽 게르만족이 라틴어를 겨우 읽고 쓰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샤를마뉴 시대인 800년경이었지만 11세기 중반까지 서유럽의 문맹률은 99% 이상이었습니다. 대단한 문맹시대였죠. 샤를마뉴 황제도 문맹이었으니 말 다했죠. 한마디로 거의 동물처럼 산겁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면서...유럽은 1050년 이후에야 겨우 농업혁명으로 경제가 피어나고 먹고살만해져서 교육시설이 늘어나고 라틴어 해독능력자도 많아진거죠. 그러니 기아상태에서 벗어나고 사람답게 산지 1세기가 채 안되어서 비록 중역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한 겁니다.
그때와 지금의 시간을 똑같은 시간이라고 인정한다 해도(그럴 리가 없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동작이 신속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엄청난 변화속도를 감안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느려터진 굼벵이 수준이고요.
그리고 로쟈 님이 말씀하셨지만 서양사 전공자가 아리스텔레스 예를 들었다고 '서구중심주의의 세뇌' 운운하는 것은 생뚱맞은 오바로밖에는 안 보이네요. 모국어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서구 중심주의로 딱지 붙이는 건 심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비판을 하면 좀 멋져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공정성은 있어야겠죠?

알비스 2010-07-0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출판 뿐만 아니라 음반시장을 봐도 일본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음반을 일본에서는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를 기록하고 보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죠.
그리고 요즘 출판업계에서도 서서히 전자책이 도입이 되고 있는데 열악한 우리 출판계에 이것이 대중화 되면 불법복제로 출판상황이 더욱 더 악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로쟈 2010-07-05 08:50   좋아요 0 | URL
촐판계에서도 불법복제 차단 기술에 대해선 다들 회의적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