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 역사, 2006) 출간에 대한 소개 기사/인터뷰를 옮겨놓는다.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붙여넣으려다가 따로 떼놓은 것이다. 기사는 국민일보(06.01.20)의 '책과 사람'란에 실렸던 것이며, (*)표를 하고 집어넣은 참견과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제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정부 내에 번역국을 두고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했는데,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됐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근대 일본의 번역 열풍을 “동서 문화 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우리 번역은 어떤가?(*"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학계의 고질적인 번역 경시풍조를 비판하면서 번역을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일부로 수행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동양철학자 김용옥이다. 1985년에 출간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상당 부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번역은 반역인가>, 202쪽. 김용옥에 대한 박교수의 평가에 대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니체 전집이 작년 말에야 나왔어요. 니체 전집이 이제야 나왔는데 다른 전집이야 어떻겠어요? 화이트헤드(영국 철학자)는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플라톤 전집이 없습니다. 서양사 공부하는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역사학의 아버지 헤르도투스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가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서양사학자들이 '역사'를 말하려면 좀 쑥쓰럽겠다. 플라톤전집은 몇년전부터 그마나 조금씩 선보이고 있다. 분명 사정이 나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플라톤전집이 다 출간될 쯤이면 앞에 나온 책들이 절판된 상태일 것이다.)


 

  

 


-서양사 교수이자 지금까지 10여권의 학술·교양서를 번역한 박상익 우석대 교수(51)가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나는 그 책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역사책들에 손이 덜 가기도 하지만, '-에서 -까지'라는 제명의 책들을 괜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 번역을 무시하는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오만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명까지 거리낌없이 거론하는 박 교수의 격정적인 육성으로 가득한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는 한국의 천민적 번역문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보고서이자 본격 비판서다.

“학자들은 논문만을 학문의 본령으로 취급하고 번역은 소일로 취급합니다. 걸핏하면 원서를 들먹이면서 지적 우월성을 뽐내기도 하죠. 그러나 이런 태도야말로 오만한 엘리트주의요 지식인의 반역입니다. 서양 학문을 수입해다가 팔아 먹기 바쁜 ‘지식 수입상’들이야 번역에 신경쓸 필요가 없겠죠. 그렇지만 지식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학자라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박 교수는 번역은 학문 연구자의 기본 임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책이 국내에 나와 있지 않을 경우,연구와 병행해 번역서를 출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박 교수는 박사 논문으로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와 표현의 자유’를 쓴 후,번역과 주석을 덧붙여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를 출간함으로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국내에는 수많은 루소 연구자들이 있지만 루소의 대표작 <에밀>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는 실정입니다. 로크, 홉스도 마찬가지예요. 구구단도 모르면서 수학을 안다고 하는 꼴이 아닙니까?”(*<에밀>을 비롯해서 몇 권 나와 있기는 하다. 루소 연구자가 그렇게 많은가? <리바이어던>의 정역본이 아직 없는 건 나도 유감스럽다. 홉스 대신에 오스터의 소설 <리바이어던>을 읽으면 되는 건가?)

-한국 번역의 빈곤함은 어느정도 역사적 이유가 있다. 한문 중심의 조선시대와 일본어 중심의 일제시대를 지나 한글이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겨우 반세기에 불과하다. 번역작업을 통해 지적 인프라를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관심과 홀대가 번역의 빈곤을 심화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학계는 번역을 학문적 작업으로 평가해 주지 않으며, 출판계는 전문번역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에 나서고 싶어도 못합니다. 열악하다고 소문난 시간강사 수입도 번역료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니까요. 그렇다고 정부 지원이 있습니까? 학술진흥재단의 학술명저 번역 지원 프로그램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 예산이 얼만지 아세요? 연 17억입니다. 한 국가의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고작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가는 겁니다.”(*때문에 지원 경쟁률이 심하다. 나도 작년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시간강사료는 보통 시간당 3-4만원 수준이다. 그리고 번역료는 매절원고의 경우 지명도 있는 역자가 아니라면 3-4,000원선인 것으로 아는데, 원고지 10매 분량을 한 시간내에 번역하면 강사수준이 되겠다. 한데, 거기엔 강의준비시간이 고려되지 않은 데다가 시간강사가 하루에 8시간씩 강의하는 것도 아니므로 강사와 번역자의 수입에 대한 '도토리 키재기식' 비교는 공정하지 않다.)

-박 교수는 동·서양의 고전조차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우리 현실을 “텍스트가 없는 사회”라고 표현한다. 텍스트도 없는 상황이라면 문화의 교류나 확장,창조를 강조하는 최근의 담론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텍스트 없는 사회'가 또 주제파악 못하고 광분하는 것이 '콘텐츠'이다. 요즘은 관료들뿐만 아니라 대학의 일부 교수들도 '문화'와 '문화콘텐츠'를 혼동하는 듯하다. '콘텐츠'면 다 통하는 것! 해서, 내 의견은 번역지원 사업명을 '문화콘텐츠 번역지원사업' 쪽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쩌겠는가? '반역'도 입에 풀칠은 해가면서 해야지!) 


06.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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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과 번역, 그리고 민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2 17:10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철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
 
 
2006-02-13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2-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박사 학위를 번역 작업을 통해서 수여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기만 해도 참 좋으려만.

로쟈 2006-02-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모든 학문에 그런 풍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인문학쪽은 좀 필요하지요. 그보다 먼저 '번역'에 대한 엄격한 심사/감시와 좋은 번역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대우가 우선되어야겠습니다.

2006-02-1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번역'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도 부르더군요. 번역은 세상을 좀더 '평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억지스런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2006-02-1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