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은 알랭 바디우를 네번째로 다루고 있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05). '해체주의 시대에 보편적 ‘진리’ 가능성 제시해'가 타이틀이다. 국내에는 그의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지만(<조건들>을 포함해 네 권이 번역돼 있다) 아직 <존재와 사건>(1988) 같은 주저는 번역돼 있지 않다(영역본도 2005년에야 나왔다). 하여 아직은 '미-래의 철학자'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지젝은 아감벤과 바디우 등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는다. 

대학신문(07. 09. 22) 21세기의 사유들 ④ 알랭 바디우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e^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e′)’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홍기숙 강사/숭실대 철학과)

07. 10. 01.

P.S. 마지막 문단 같은 건 좀더 간결하게 씌어지는 게 어땠을까 싶다(바디우의 문장들이 그러한가?). 바디우 입문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그 사이에 더 좋은 책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피터 홀워드의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2003)이다. 지젝이 서문을 쓰고 있는데, 460쪽이 넘는 묵직한 책이다. 아래는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젝과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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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10-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거장의 밀담 사진이 자못 진지하네요.^^ 두 사람이 서로 친하다죠. 스피노자와 니체주의자들이 휘저어놓은 세상을 헤겔주의자인 지젝과 플라톤주의자인 바디우가 대응책을 논의하며, 서로 연대를 모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잡담하는 걸까요. ㅎㅎ 지젝이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철학계에서의 바디우의 무게감에 비해, 국내에는 그의 저서나 이차문헌의 번역이 부진한 듯합니다. 칸토르의 집합이론과 연관된 그의 '다수'철학의 난해함 때문도 있겠지만, '대중성' 내지는 '시장성'이 다소 떨어져서가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순수철학에의 고집은 언젠가 국내에서도 빛을 발하리라 기대해봅니다. 그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네요. 내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철학자 대회>에 바디우도 참석할 예정이라는데, 벌써부터 그의 강의가 기다려집니다.^^

로쟈 2007-10-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있다니까 조만간 주저들이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통가능한 것이 될지는 기다려봐야 할 것 같고요...

자꾸때리다 2007-10-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박사학위 딴 분들이 서용순, 박정태, 홍기숙... 이렇게 되지 않나요?

로쟈 2007-10-03 11:23   좋아요 0 | URL
저보다 잘 아시네요.^^ 여하튼 몇 분 된다고 하네요...
 
정열의 수난 -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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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칼럼 등에서 자주 접하던 문광훈 교수의 책을 처음 읽었다. 하지만 보론까지 포함하여 본문 365쪽의 책을 한 시간만에 읽었으니까 그냥 넘겨본 수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읽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또 잘 읽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자와는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듯한데, 서점에서 거의 살 뻔했으나(재고도서에는 있었지만 매장에는 없었다) 구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일단 '장정일 문학의 변주'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나는 의당 '작가론' 정도의 책인 줄 알았지만 <정열의 수난>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이다(물론 '역사-서사-권력-문화의 관계'도 속표지에는 부제로 돼 있다). 장정일을 다루고는 있으나 주로 <중국에서 온 편지>란 중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이 작품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온전한 작가론은 아니며,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론'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것은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해석을 의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설 언어를, 그 언어의 권력 성찰적 본성을 우리 사회의 이념적-문화적 갈등의 문제 지평에 놓고, 그것이 가치의 개방과 삶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때 감각과 사고의 갱신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23쪽)는 게 의도이기에(하지만 나는 저자의 문제의식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장정일인가? 저자가 묻고 답하는 바에 따르면, 일단은 "기질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져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걸 보충해서 "내가 그를 읽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글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에 가장 유쾌한 성찰 재료가 되기 때문이지 싶다."(13-4쪽)라고 적는다.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은 '문광훈이 말하고 싶은 바'를 늘어놓을 따름이지 장정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해주는 바가 없다(그냥 저자의 '지리한' 예술론만 나열된다). 나로선 '중국'에서 온 편지만큼이나 해독하기 난해하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책장을 넘겼지만 정작 <중국에서 온 편지>가 다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전체 8장 중 5장(148쪽)에 가서이다(책의 절반이 서론이다!) 아무리 '에세이'라고 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자의 스타일인 것인지? 그냥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에서 장정일 자신이 말해놓은 게 훨씬 짧고 유익하다(그는 이 소설을 <일월>이란 희곡으로도 각색했는데 그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렇게 좀 허무하게 본론이 다 끝나면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 읽기'라는 보론이 나오는데, 이 또한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나는 '장정일이 어떻게 읽혔는가, 내지는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글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을 읽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듯하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민주적 사회질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시민 중심의 광범한 참여로부터, 불신과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347쪽)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 종이가 아깝게 여겨진다.

저자의 예술론: "예술은 논리와 개념으로 삶이 비틀어지기 전의 정치 이전적 세계 - 원형적이고 근원적 진리가 비유적으로 현현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 곧 심미적 경험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한다. 왜인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지지하는 평등,자유, 박애, 인권, 생명, 평화와 같은 보편 가치들이 나날의 생활 안으로, 개개인의 습관과 사고, 행동과 양식 안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작가는 바로 이런 일에 자신의 표현을 통해 참여하는 대표적 존재이다."(353쪽) 요컨대, 사회주의 예술론의 민주주의 버전 같다. "문학예술은 민주적 가치를 생활에서 육화하기 위한 상상력의 의미화이다."란 단정적인 규정은, 하지만 민주적인 규정인 것인지?



아무튼 내가 요약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이런 정도이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예술의 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쓸 것이고, 이렇게 쓰인 글을 어떤 믿음으로 읽을 것이며, 또 이렇게 읽은것이 어떻게 나날의 자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술-아름다움-반성과 자유-평등의 세계공화국, 이 둘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장정일의 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가 보여주는 문제의식도, 그 문화적-문화적 의미도 이 점에 닿아 있지 않나 여겨진다."(356쪽)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350쪽이 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수난'이지 않나 여겨진다.

저자로서의 변명 내지는 자긍심: "글을 쓰는 것이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보다 쓸 때 더한 행복을 느낀다."(103쪽) 그의 '행복'을 탓하거나 말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쓸 경우에라도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2장의 제목을 ''욕됨을 견디다': 나, 문광훈의 경우'라고 달아놓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두세 해 전부터 '나이 마흔이 무엇인가'란 문제에 골몰해왔다는 것 말고는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그리고 '욕됨'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종암결찰서의 전경들' 정도가 유일하게 구체적인 '지표'이다). 근래 드물게 읽은 기이한 책이고 저자이다.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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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2009-07-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책이 번역되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서
오역을 강행하는 결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포스트 386세대를 위한 문화 교양지'를 표방하는 무크잡지 <소문>(민음사) 창간호가 나왔다('소문'은 '소통과 문화'를 뜻한다고).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원고를 넘긴 것이 지난 1월 중순이었으니까 꽤 오래 '뜸'을 들이다가 나온 셈인데, 아직 책은 받아보지 못하고 보도(소문!)를 통해서만 출간 소식을 접했다. 기획위원들이 적은 '창간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내가 무슨 일에 동참했던 것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소문> 창간사 - 새로운 시간과 문화의 의미 찾기

2007년은 오 년 만에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며, IMF 경제 위기를 겪은 지 십 년, 그리고 6월 항쟁이 있은 지 이십 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대한 회고와 변화된 의미 찾기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에 대한 생각들로, 대중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에 어떤 ‘주기’가 있는 것이라면, 올해 이 땅에서는 또 한 번 거대한 변동이 일어날 조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과 대학, 책과 영화, 신문과 인터넷, 그리고 여자와 남자들은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돌아보면 마음보다 몸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보다 세상 변하는 속도는 좀 더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동을 향해 ‘모순’이 착착 누적되고 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고 한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새로 태어날 것이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수반합니다. 한때는 가장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었던 ‘새로움’이라는 가치는 속도와 손잡기 시작하면서 우리를 끝없는 현기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혁신적 태도에 대한 요구는, 한꺼번에 몰아닥친 수많은 ‘조정’과 ‘개혁’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경제적이고,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대중적인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는 막연한 동의하에, 각자 자기 방식의 경제와 효율과 취미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며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립니다.

간헐적으로 이 새로운 시간을 사는 이들의 의식과 그들이 영위하는 ‘문화’의 의미에 대해 점검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네트워킹하는 장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블로그와 미니홈피들 그리고 댓글과 UCC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이 왔지만, 그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이미 뱉어놓은 것들을 복제하거나 추인하거나 엉뚱한 말놀음만 벌이다가 으스러지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과 곡절을 겪은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반년이 넘어 지나서 무크 <소문>이 나왔습니다. 기다리시던 독자들과 필자들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좀 근본적인 의문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아직도 종이잡지를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 종이 잡지는 낡은 것이 되어 문화의 주변으로 밀려 나고 있습니다. 앎과 일과 향유는 모두 종잇장보다 더 가벼워져서 ‘디지털’의 공간에 떠돌아다닙니다. <창작과 비평> 세대의 의식과 문화를 지양해야 하는 힘은 단지 내용에만 있지는 않은 것이지요. 거대한 소통 체계의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아직 명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 더듬어 나아가며 실험해야 한다는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요. <소문>은 그러한 실험의 하나로서 기획됐습니다.

<소문>의 작은 실험은 우리가 품은 다음과 같은 의문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달라진 삶의 양식과 정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읽고 묘사할 것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새로운 세대는 ‘386’세대들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근본적이고도 비약적인, 동시에 아래로부터 추동되는 저항과 변화는 아직도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386’세대의 함의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이 외치고 지키려 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현실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괴물로 변화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시장’은 삶을 갈가리 찢어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참을 수 없게 떼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대 안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유지하는 이들과 그 이후의 세대는 어떤 방식의 운동성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인 가치여야 할 자치와 연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달성 불가능한 미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3할의 희망과 7할의 낙담이 뒤섞인 심정으로, 우리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소문>의 첫 발자국은 우리의 평범한 생각과 몸에 육박해오는 음험한 힘들 앞에 새기려 합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첫 번째 기획 테마를 ‘중독’으로 정했습니다. 중독은 원치 않는 어떤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강제하는 자기 자신 속의, 또한 우리 몸 바깥으로부터의 위력적인 메커니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주관과 객관이 극단적으로 만나는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와 생각해볼 거리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약ㆍ술과 같은 물질중독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 보편으로서의 과정중독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배후의 힘과 그에 연관된 역사적·정치적·문화적 ‘증상’들까지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이런 기획과 더불어 천명관ㆍ정희진ㆍ로쟈ㆍ신윤동욱과 같은 ‘탈근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과 위치를 가진 필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공원국ㆍ김국현ㆍ신호철 씨처럼 90년대에 성장하여 21세기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젊은 목소리도 담았습니다.

<소문>의 첫걸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시련의 시간들은 앞으로의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의 과정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격려와 질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9월

<소문> 기획위원 천정환·박경신·김현철·이영아·김지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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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9-30 15:17   좋아요 0 | URL
로쟈님 활발히 활동하시는군요. 신윤동욱 기자가 본격적으로 책도 내고, 대외활동(?)도 하는군요 이제. :)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계절에 한두 편 쓰는 걸로 '활발'하달 수는 없지요. 서재활동은 '활발한' 편이지만.^^

수유 2007-09-30 18:32   좋아요 0 | URL
이젠 본명을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
잡지 나오면 한번쯤은 꺼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 맘에 들면 구독하고^^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이게 무크라서 언제 또 나올지는 기약할 수 없답니다.^^;
 

'건강은 타고난 복'이라고 옛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의 상식은 좀 다르다. 특별한 '통뼈'가 아니라면 건강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는 게 요즘의 통념이 아닐까? 그런 통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사회의제화를 위한 국민보고서'를 부제로 달고 있는, '건강불평등에 관한 대국민 보고서이자 한국판 건강불평등 르포르타주' 이창곤의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밈, 2007)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면서 몇 자 보탠다.  

 

한국일보(07. 09. 29) 경제력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 그 불편한 진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건강 정도가 다르다.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껴왔고, 1990년대 말 IMF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체감하고 있는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

건강에 해로운 흡연을 예로 들어보자. 흡연이 원인의 75%를 차지하는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낮은 계층이 높은 계층의 2.3~8.1배에 이른다. 학력과 소득, 직업 등에 따라 흡연의 정도나 금연에 참여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막노동꾼 떠돌이 등 저소득층의 삶에는 흡연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는 몇 천원의 담배 외에는 삶의 팍팍함과 고단함을 손쉽게 풀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보건소의 금연클리닉은 들어본 적도 없다. 반면 교사 건축설계사 사업가 등 안정적인 직업과 고소득 계층은 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고 금연도 쉽게 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아이의 건강에 결정적이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어머니의 영양상태와 물질적 환경이 아이의 건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저체중아는 건강불평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강원대 손민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의 학력은 저체중아 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학력은 보통 경제력의 잣대로 간주된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인 경우 대졸 이상보다 저체중아를 얻을 확률이 1.69배 높다. 고졸 아버지는 1.1배, 중졸은 1.44배 높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울 서초ㆍ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가 더 높다. 성과 나이가 똑같을 경우 전국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곳은 서울 서초구이며 가장 높은 곳은 경남 합천군으로, 두 지역의 격차는 갑절이나 됐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전국 234개 시군구의 사망등록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고, 좋은 직업,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또 다른 지역보다 인구 당 운동시설이 더 많을 수 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소득층이 당연히 의료이용 수준이 높을 것 같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특히 큰 돈이 들어가는 암 치료에서는 고소득층의 이용이 더 많다. 저소득층은 병에 더 잘 걸리고 치료는 덜 받으니 건강이 더 불량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초 <한겨레>에 연재된 기획기사를 뼈대로 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사회나 정부가 건강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좀더 갖고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남경욱기자)

07. 09. 30.

P.S.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리처드 월킨스의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당대, 2004)와 마이클 마멋의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2006), 그리고 최근에 나온 사라 네틀턴의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한울, 2007) 등이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그만큼 병치레 기간이 길어질 거란 얘기도 된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오래 버티게 될 것이다) '건강불평등'과 '사회적 건강'(과연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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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5 11:09 
    지난주에 서평도서로 내가 고려했던 책은 그 전주에 나온 <권력의 병리학>(후마니타스, 2009)과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2009)이었다. 지면 사정상 후자에 대해서 쓰게 됐고 <권력의 병리학>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의외로 리뷰기사가 별로 올라오지 않았다. 다행히 메인으로 다룬 기사가 하나 있어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03. 06) 질병은 왜 가난한
 
 
수유 2007-09-30 18:33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도 같고요..

로쟈 2007-09-30 19:11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평등'한 건가요?^^

瑚璉 2007-09-30 20:59   좋아요 0 | URL
유감스럽지만 정신건강도 재벌 급의 재화집중이 아니라면 경제력과 정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강불평등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항상 궁금한 건데 과연 건강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이룰 수 있는 목표인 건지, 아니 그 전에 바람직한 것이기나 한 건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09-30 23:38   좋아요 0 | URL
'건강평등'이란 말이 좀 낯설지만 건강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망에 관한 것이죠.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바라 2007-10-01 00:41   좋아요 0 | URL
그냥 제 경우에 보면 소방서에서도 이른바 잘 사는 곳과 못 사는 곳의 구급출동 건수의 단적인 격차에서 느껴지는게 많더군요. 소개해주신 책과 더불어 "보건의료 :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라는 책도 읽어볼만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01 00:52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천연구실에서 낸 책이군요...

비공개 2007-10-01 17:46   좋아요 0 | URL
지난해쯤 한겨레에서 건강불평등을 기획기사로 연재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 기사 읽고서 충격으로 받아들였었는데 여러권의 책이 나온 걸 보니 논의가 많이 진전된 것 같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7-10-02 00:30   좋아요 0 | URL
그 연재를 책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얼만큼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국문과 소멸론'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칼럼을 하나 읽었다. '인문학 위기론'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시사적인 칼럼이다. 내용중에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란 구절이 있어서 찾아보니 정말로 딱 1년이 되었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 서재에 옮겨놓은 글들도 상당수였다(http://blog.aladin.co.kr/mramor/954391, http://blog.aladin.co.kr/mramor/1045570 등등). 이 위기론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몇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정도가 이 페이퍼의 주제이겠다. 

한국일보(07. 09. 28) [편집국에서] 국문과 소멸론

올해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김광규 시인, 정혜영 교수 부부는 독문학 전공의 대학생일 때 만났다. 한 사람은 현역의 우뚝한 시인으로, 한 사람은 한ㆍ독작가회의를 만드는 등 독일어권에 한국 현대문학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해온 이들에게 몇 년 전부터 큰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의 대학에서 독문과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과, 중문과 아니면 학생들이 오지를 않으니 과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문과의 존폐 여부도 여부지만, 그들의 진짜 걱정은 한국의 인문학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독문과 만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신설 대학이 국문과를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기존에 있던 국문과가 폐지되거나 디지털 스토리텔링 혹은 디지털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콘텐츠에 관한 실무를 주된 교과과정으로 하는 '아류' 국문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야 독문과도,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장 논리다. 전통적 국문과를 졸업해서는 취업이 안 되니 학생들이 지원하지를 않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던 교수들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ㆍ뉴미디어 쪽으로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바꾼다. 과의 위상이 하락하고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 학문의 순혈주의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 그걸 두고 인문학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언제 인문학이 위기 아닌 적 있었느냐, 인문학 전공자들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자기성찰하라는 등 말도 많았지만 인문학 위기론의 본질은 그런 차가운 비판으로 그냥 비켜갈 문제는 아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일본어 폐지론이란 것이 두 차례 제기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영어의 국어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프랑스어의 국어화를 외쳤던 움직임이 그것이다. "지배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억압된 반발과 나란히 가고, 그것은 증오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본의 근대만 해도 그렇다… 근대의 여명기에 일본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지향점을 바꾸었을 때 싹튼 것은 그때까지 스승으로 모셨던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이 아니었던가."(쓰지 유미 <번역사 산책>에서).
국문과 소멸론이 일본어 폐지론과 같은 수준의 논의는 물론 아니다. 특히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일본어에 대한 절망감은 과거 자국 역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의식과 겹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문과 소멸론, 넓게는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위기 논쟁을 보면 우리사회의 학문 혹은 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 빈 강정인가 절감하게 된다.

시장이라는 당장의 지배적인 가치에 그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사실 그것들은 인문학이고 대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의 평생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훈련과정이 아니며,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를 시장유일ㆍ경제제일주의의 밀림화로부터 지켜야 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나 대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조선일보(07. 09. 18)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그러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9월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117명은 비장한 어조로 ‘인문학(人文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9월 26일 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의 선언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1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1년 200억원… 치열한 경쟁
‘선언’의 가장 구체적인 반응은 지난 5월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2016년까지 10년 동안 4000억 원의 예산을 인문학에 지원하고, 당장 올해부터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 해 200억여 원의 돈으로 거점 연구소를 집중 지원해서 인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이 사업이 사실상 작년 ‘선언’의 유일한 성과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 사업을 공고한 것은 지난 6월 29일이었고, 신청 마감은 8월 30일이었다. 전국 69개 대학 153개 연구소가 불과 두 달 만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11월 발표되는 최종 지원 대상 연구소는 10~20곳뿐이다. 실로 각 대학 인문대의 사활이 걸린 로스쿨 못지않은 경쟁이었다. 인문학 전공의 한 교수는 “방학 중에도 며칠 동안 합숙하고 밤을 새워 가며 제안서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선택과 집중의 경제논리를 인문학에 적용하는 탓에 대학 사이의 양극화가 더 커진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위기’에 선 인문학
한국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학술원은 지난 14일 올해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자연과학자 세 명에게만 시상했다. 학술원 관계자는 “인문학은 수상 대상자가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상반기 교보문고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20권 중에 저서가 포함된 현직 인문학 정교수는 두 명이었지만 올해 9월 현재는 단 한 명(정민 한양대 교수)뿐이다.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작년 이후 인문학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선언’ 때만 해도 ‘지방대학의 경우 폐과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일어났지만 올해는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월 동국대는 독문과와 북한학과를 폐과하고 인문학 정원을 축소하는 학제개편안을 내놓아 마찰을 빚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6년 인문대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은 40.1%로 의대(82.9%), 공대(59.8%), 사회대(47.3%)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며,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경우도 48.8%(전체평균 68.9%)에 그쳤다. 작년 고려대 선언을 주도했던 조광 전 문과대학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인문학 위기란 짧은 시간 안에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그런 가운데서도 인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각개 약진’의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암학당의 플라톤 원전 번역 사업,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인터넷을 통한 철학강좌,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의 학문 통섭 노력, CEO를 대상으로 한 서울대의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 등의 예는 그 일부일 뿐이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과는 ‘논술 인증제’, 국문학과는 ‘문화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개척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 알기’ 붐은 사학과를 고무시키고 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는 “정부 지원을 바라기 전에 인문학자 자신들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유석재 기자)

경향신문(07. 09. 03) 한국 인문학 ‘길은 여전히 멀다’

십수 년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지난해처럼 교수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고, ‘인문주간’ 행사도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 강사·연구원도 크게 줄 것이고, 일자리가 없어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진 박사 학위자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바람대로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하 ‘인문한국’)이 계획대로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다면 말이다.

지난주 학술진흥재단이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올해 처음 시작된 ‘인문한국’ 프로젝트에 모두 69개 대학의 153개 연구소에서 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웬만한 대학의 연구소는 모두 신청했다는 얘기다. 어느 대학에서는 11개 연구소가 응모했다니 ‘인문한국’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번 ‘인문한국’ 사업은 경쟁률이 8대 1에 달해 2~3대1의 경쟁률에 그친 ‘두뇌한국’(BK) 사업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그도 그럴듯이 ‘인문한국’은 인문학 연구에 대한 최초의 정부 지원 사업이다. 지원규모, 기간 등에서 ‘두뇌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연구소에 10년동안 매년 5억~15억이라는 거금을 지원하니, 과제가 채택되기만 하면 연구교수와 연구원들이 시쳇말로 ‘먹고살 걱정’을 안해도 된다. 게다가 연구교수급은 ‘인문한국’사업이 끝나도 연구소 교수로 남아 학교로부터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다니 ‘꿩먹고 알먹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이 여름방학도 반납한 채 합숙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원 규모 이외에 ‘인문한국’은 연구 과제 공모에서도 BK와 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BK가 박사급 등 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인데 반해 ‘인문한국’은 연구소 등 인문학 연구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원 성격이 강하다. 당연히 공모하는 연구과제도 학제간연구, 인간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주제 등으로 포괄적이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의 파장이 컸던 만큼 그 대가로 얻어낸 ‘인문 한국’ 프로젝트는 야심치고 희망적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의 말대로, 인문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연구가 외부의 지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높은 보수에 편안한 연구실에서 수십년간 ‘연구’하고서도 변변한 학술서 한권 내지 못한 ‘학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 학문의 토대를 놓는 일이라면, 연구는 학자 개개인의 몫이다. ‘인문한국’의 지원이 연구소, 연구단 차원으로 이뤄진다 할지라도 연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지적 활동이다. 학문은 ‘혼자 하는 놀이의 진수’이고 그 방법론은 ‘지적 도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 인문학자의 노력과 성취는 인문학 탐구가 어때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 한문학자인 그는 지난달 4권이나 되는 학술서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예전에도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했기에 그가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의 학문 방법론이다.

대학원 시절, 강교수는 조선 후기 중인문학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양반사대부 문학과 다른 중인문학의 특징을 찾아보자는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연구를 해 보니 중인문학과 양반문학은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한국 인문학 연구가 ‘민족’과 ‘근대’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대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을 찾는 데 한국 인문학이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교수는 이후 우리의 눈으로 우리 것을 연구하는 대신,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살폈고 우리의 눈으로 타자를 봤다.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보고, 둘의 관계를 살폈다. 그로부터 얻어낸 결론이 ‘민족 국문학은 없다’는 점이다. 가장 민족적이라는 국문학·한문학에서조차 ‘민족’이라는 알맹이는 없었다는 그의 연구결과는 자못 논쟁적이다. 그러나 십수년간 중국과 한국의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얻어낸 결과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강교수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혼자 있었다. 그곳에서 한적을 뒤적이면서도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를 비롯한 4권의 저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남은 길은 여전히 멀다”고 적었다. 개인의 다짐이지만, 모든 인문학자들이 새겨야 할 금언이기도 하다.(조윤찬/ 문화1부장)

07. 09. 30.

P.S. 강명관 교수의 연구서들에 대한 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239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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