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수난 -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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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칼럼 등에서 자주 접하던 문광훈 교수의 책을 처음 읽었다. 하지만 보론까지 포함하여 본문 365쪽의 책을 한 시간만에 읽었으니까 그냥 넘겨본 수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읽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또 잘 읽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자와는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듯한데, 서점에서 거의 살 뻔했으나(재고도서에는 있었지만 매장에는 없었다) 구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일단 '장정일 문학의 변주'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나는 의당 '작가론' 정도의 책인 줄 알았지만 <정열의 수난>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이다(물론 '역사-서사-권력-문화의 관계'도 속표지에는 부제로 돼 있다). 장정일을 다루고는 있으나 주로 <중국에서 온 편지>란 중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이 작품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온전한 작가론은 아니며,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론'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것은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해석을 의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설 언어를, 그 언어의 권력 성찰적 본성을 우리 사회의 이념적-문화적 갈등의 문제 지평에 놓고, 그것이 가치의 개방과 삶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때 감각과 사고의 갱신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23쪽)는 게 의도이기에(하지만 나는 저자의 문제의식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장정일인가? 저자가 묻고 답하는 바에 따르면, 일단은 "기질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져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걸 보충해서 "내가 그를 읽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글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에 가장 유쾌한 성찰 재료가 되기 때문이지 싶다."(13-4쪽)라고 적는다.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은 '문광훈이 말하고 싶은 바'를 늘어놓을 따름이지 장정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해주는 바가 없다(그냥 저자의 '지리한' 예술론만 나열된다). 나로선 '중국'에서 온 편지만큼이나 해독하기 난해하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책장을 넘겼지만 정작 <중국에서 온 편지>가 다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전체 8장 중 5장(148쪽)에 가서이다(책의 절반이 서론이다!) 아무리 '에세이'라고 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자의 스타일인 것인지? 그냥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에서 장정일 자신이 말해놓은 게 훨씬 짧고 유익하다(그는 이 소설을 <일월>이란 희곡으로도 각색했는데 그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렇게 좀 허무하게 본론이 다 끝나면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 읽기'라는 보론이 나오는데, 이 또한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나는 '장정일이 어떻게 읽혔는가, 내지는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글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을 읽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듯하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민주적 사회질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시민 중심의 광범한 참여로부터, 불신과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347쪽)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 종이가 아깝게 여겨진다.

저자의 예술론: "예술은 논리와 개념으로 삶이 비틀어지기 전의 정치 이전적 세계 - 원형적이고 근원적 진리가 비유적으로 현현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 곧 심미적 경험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한다. 왜인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지지하는 평등,자유, 박애, 인권, 생명, 평화와 같은 보편 가치들이 나날의 생활 안으로, 개개인의 습관과 사고, 행동과 양식 안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작가는 바로 이런 일에 자신의 표현을 통해 참여하는 대표적 존재이다."(353쪽) 요컨대, 사회주의 예술론의 민주주의 버전 같다. "문학예술은 민주적 가치를 생활에서 육화하기 위한 상상력의 의미화이다."란 단정적인 규정은, 하지만 민주적인 규정인 것인지?



아무튼 내가 요약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이런 정도이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예술의 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쓸 것이고, 이렇게 쓰인 글을 어떤 믿음으로 읽을 것이며, 또 이렇게 읽은것이 어떻게 나날의 자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술-아름다움-반성과 자유-평등의 세계공화국, 이 둘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장정일의 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가 보여주는 문제의식도, 그 문화적-문화적 의미도 이 점에 닿아 있지 않나 여겨진다."(356쪽)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350쪽이 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수난'이지 않나 여겨진다.

저자로서의 변명 내지는 자긍심: "글을 쓰는 것이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보다 쓸 때 더한 행복을 느낀다."(103쪽) 그의 '행복'을 탓하거나 말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쓸 경우에라도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2장의 제목을 ''욕됨을 견디다': 나, 문광훈의 경우'라고 달아놓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두세 해 전부터 '나이 마흔이 무엇인가'란 문제에 골몰해왔다는 것 말고는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그리고 '욕됨'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종암결찰서의 전경들' 정도가 유일하게 구체적인 '지표'이다). 근래 드물게 읽은 기이한 책이고 저자이다.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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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2009-07-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책이 번역되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서
오역을 강행하는 결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