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386세대를 위한 문화 교양지'를 표방하는 무크잡지 <소문>(민음사) 창간호가 나왔다('소문'은 '소통과 문화'를 뜻한다고).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원고를 넘긴 것이 지난 1월 중순이었으니까 꽤 오래 '뜸'을 들이다가 나온 셈인데, 아직 책은 받아보지 못하고 보도(소문!)를 통해서만 출간 소식을 접했다. 기획위원들이 적은 '창간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내가 무슨 일에 동참했던 것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소문> 창간사 - 새로운 시간과 문화의 의미 찾기

2007년은 오 년 만에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며, IMF 경제 위기를 겪은 지 십 년, 그리고 6월 항쟁이 있은 지 이십 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대한 회고와 변화된 의미 찾기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에 대한 생각들로, 대중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에 어떤 ‘주기’가 있는 것이라면, 올해 이 땅에서는 또 한 번 거대한 변동이 일어날 조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과 대학, 책과 영화, 신문과 인터넷, 그리고 여자와 남자들은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돌아보면 마음보다 몸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보다 세상 변하는 속도는 좀 더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동을 향해 ‘모순’이 착착 누적되고 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고 한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새로 태어날 것이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수반합니다. 한때는 가장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었던 ‘새로움’이라는 가치는 속도와 손잡기 시작하면서 우리를 끝없는 현기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혁신적 태도에 대한 요구는, 한꺼번에 몰아닥친 수많은 ‘조정’과 ‘개혁’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경제적이고,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대중적인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는 막연한 동의하에, 각자 자기 방식의 경제와 효율과 취미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며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립니다.

간헐적으로 이 새로운 시간을 사는 이들의 의식과 그들이 영위하는 ‘문화’의 의미에 대해 점검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네트워킹하는 장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블로그와 미니홈피들 그리고 댓글과 UCC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이 왔지만, 그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이미 뱉어놓은 것들을 복제하거나 추인하거나 엉뚱한 말놀음만 벌이다가 으스러지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과 곡절을 겪은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반년이 넘어 지나서 무크 <소문>이 나왔습니다. 기다리시던 독자들과 필자들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좀 근본적인 의문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아직도 종이잡지를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 종이 잡지는 낡은 것이 되어 문화의 주변으로 밀려 나고 있습니다. 앎과 일과 향유는 모두 종잇장보다 더 가벼워져서 ‘디지털’의 공간에 떠돌아다닙니다. <창작과 비평> 세대의 의식과 문화를 지양해야 하는 힘은 단지 내용에만 있지는 않은 것이지요. 거대한 소통 체계의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아직 명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 더듬어 나아가며 실험해야 한다는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요. <소문>은 그러한 실험의 하나로서 기획됐습니다.

<소문>의 작은 실험은 우리가 품은 다음과 같은 의문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달라진 삶의 양식과 정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읽고 묘사할 것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새로운 세대는 ‘386’세대들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근본적이고도 비약적인, 동시에 아래로부터 추동되는 저항과 변화는 아직도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386’세대의 함의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이 외치고 지키려 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현실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괴물로 변화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시장’은 삶을 갈가리 찢어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참을 수 없게 떼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대 안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유지하는 이들과 그 이후의 세대는 어떤 방식의 운동성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인 가치여야 할 자치와 연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달성 불가능한 미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3할의 희망과 7할의 낙담이 뒤섞인 심정으로, 우리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소문>의 첫 발자국은 우리의 평범한 생각과 몸에 육박해오는 음험한 힘들 앞에 새기려 합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첫 번째 기획 테마를 ‘중독’으로 정했습니다. 중독은 원치 않는 어떤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강제하는 자기 자신 속의, 또한 우리 몸 바깥으로부터의 위력적인 메커니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주관과 객관이 극단적으로 만나는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와 생각해볼 거리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약ㆍ술과 같은 물질중독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 보편으로서의 과정중독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배후의 힘과 그에 연관된 역사적·정치적·문화적 ‘증상’들까지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이런 기획과 더불어 천명관ㆍ정희진ㆍ로쟈ㆍ신윤동욱과 같은 ‘탈근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과 위치를 가진 필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공원국ㆍ김국현ㆍ신호철 씨처럼 90년대에 성장하여 21세기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젊은 목소리도 담았습니다.

<소문>의 첫걸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시련의 시간들은 앞으로의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의 과정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격려와 질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9월

<소문> 기획위원 천정환·박경신·김현철·이영아·김지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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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30 15:17   좋아요 0 | URL
로쟈님 활발히 활동하시는군요. 신윤동욱 기자가 본격적으로 책도 내고, 대외활동(?)도 하는군요 이제. :)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계절에 한두 편 쓰는 걸로 '활발'하달 수는 없지요. 서재활동은 '활발한' 편이지만.^^

수유 2007-09-30 18:32   좋아요 0 | URL
이젠 본명을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
잡지 나오면 한번쯤은 꺼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 맘에 들면 구독하고^^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이게 무크라서 언제 또 나올지는 기약할 수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