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게 된 탓에 신문을 보지 못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요 기사들을 훑어보게 되지만 '신문지'를 읽는 것만큼 개운하지는 않다. 구닥다리 활자문화세대이면서, 신문지 세대여서 그런가 보다. 온라인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내일자 지면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자본론>의 한국어판 출간 20주년에 관한 기사이다.

경향신문(07. 01. 15)  이보게, 마르크스 다시 얘기해보세…‘자본론’ 재조명 활발

직선제 헌법 20주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20주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20주년…. 올해는 유난히 ‘20주년’이 많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산물들이다. 또 하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국어판 출간도 20주년이다. ‘무시무시한 금서’로 일본어판, 북한 번역본 등이 은밀히 떠돌던 자본론이 당당하게 일반인들 손에 쥐어질 수 있었던 것도 민주화의 세례 중 하나다.



당시 한국사회에 자본론을 공개적으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부 교수(53)와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5). 김교수 책이 더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빗장을 열어젖힌 것은 강교수의 ‘자본’(이론과실천)이다. “87년 농협중앙회 조사부 근무 시절이었어요. 이론과 실천의 김태경 사장이 와 뭔가 건넸는데 집에 와서 뜯어보니 ‘자본론’이더군요. 익명의 서울대생들이 초벌 번역한 것이었죠.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 ‘익명의 역자들’로 해서 출간이 됐습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납본(納本)하기까지 1주일간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어요. 난리가 났죠.”

잠적했던 김태경 사장이 결국 잡혀 법정에 섰다. 민주화 물결 속에서 김사장의 부인이었던 당시 강금실 부산지법 판사, 김수행 한신대 교수 등의 탄원에 힘입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사실상 ‘해금’이었다. 강교수는 이어 자본론 2, 3권을 실명으로 번역해냈다.

“실명으로 책을 낼 때는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학계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민주화 이후 동아대에서도 학생회가 대학 당국에 ‘정치경제학’ 강의를 요구했죠. 그래서 박사논문 쓴 지 6개월도 안된 제가 임용됐어요.” 강교수는 절판된 자신의 번역본 출간 20주년을 맞아 주석까지 모두 담은 자본론의 독일어판 번역본을 새로 낼 예정이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비봉출판사)은 좀더 완결된 번역으로 89년 2월 출간돼 대중에게 파고들었다(*영역본을 옮긴 것으로 안다). 72년 외환은행 런던지점 근무 시절이던 자본론을 접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김교수는 80년대 초부터 이미 자본론 번역에 들어갔다. “서울대 교수가 출판하니 공안당국에서도 손을 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시 내 강의는 수강생이 1000명이 넘었어요. 다 수용하지 못해 후배 학자들을 동원해 강의를 맡겼을 정도였죠.”

주황색 표지에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자본론’(1~3권) 완역본은 불온서 해금의 상징이 됐다.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책은 지금도 매년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제1권 상(上)편 기준으로 3만여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나도 이 책만 갖고 있는 듯하다). 김교수는 “93년 한꺼번에 몰아 받은 인세로 산본의 아파트 분양대금을 치렀다”며 “마르크스가 나를 먹여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은 짧았다. 소련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대신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다. ‘시차를 갖고’ 도입된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나마도 대중화되기에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김수행 교수는 “경제적 불안정성, 공황의 반복과 실업 증가, 빈부격차의 증대 등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가 드러났다”며 “자본론의 수요가 다시 생겨났고, 연구자들도 조금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신준 교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소수만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황을 보며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다시 얘기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 번역 20년을 맞아 중흥을 꾀하고 있다. 김수행, 김세균, 이진경 교수 등이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마련한 ‘한국 마르크스주의 지형 연구’ 강좌를 진행 중이다. 또 한국사회경제사학회는 오는 4월 학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맑스코뮤날레 등도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문화제인 제4회 ‘맑스코뮤날레’를 열 계획이다.

이 외에 장상환, 정성진 교수가 주축이 돼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 연구를 주도해온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6호를 냈다. 20년전 자본론 한국어판을 처음 내 옥고를 치른 이론과 실천 김태경 사장은 최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시 펴내며 이렇게 밝혔다.



“‘수고’가 쓰였던 1844년에도, 출간됐던 1932년에도, 한국에 번역됐던 1987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인간 사회 저 심연에 똬리 틀어 입 벌리고 있는 악의 본질이 존재하는 한, 그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사유의 무기로 ‘경제학-철학 수고’는 아직 유효하다.”(손제민 기자)

07. 01. 25.

P.S. 국내 마르크스 학자들 간에도 의견/노선 차이가 심한 것으로 아는데, 그 중 한 축을 대표하는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가 작년말에 출간됐다. 564쪽이니까 두툼하다. 나로선 마르크스보다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 들춰볼 듯한데,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현재까지는 제로이군(최근에야 깔린 것인가?)...

P.S.2. 생각난 김에 시 한 편도 옮겨둔다. '자본론' 하면 떠오르는 시가 내겐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이다. 나도 프로그레스출판사의 양장본 마르크스를 모스크바에서 잠시 찾은 적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을 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舊石器時代의
  이 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飜譯劇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세트,
  窓을 향한 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은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레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커트해 줄 때,
  낮잠 자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잘라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내 귀지를 파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쉼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 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無垢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橫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空氣族館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前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내가 "오우 소파, 마마이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前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 낮 28도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空氣族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1-15 20:2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우울한 시대 이상 새롭게 쓰기. 학부 때 주위에 황지우-주의자 들이 많았었는데, 그 황지우-주의자들은 다 무얼하고 있을까. ^^;

로쟈 2007-01-15 22:05   좋아요 0 | URL
황지우-주의자들이란 소파족들인가요?..

yoonta 2007-01-16 01:14   좋아요 0 | URL
강신준씨가 독어 번역본을 새로 내시나보군요..반가운 소식이네요. 김수행씨의 번역본은 북한본을 많이 참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강교수의 새로나오는 번역본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재미나겠네요. ^^

로쟈 2007-01-16 08:44   좋아요 0 | URL
나중에 꼭 비교한 글을 올려주시길.^^

나비80 2007-01-16 14:35   좋아요 0 | URL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양장본 3권' 이 구절이 인상적이네요.
저도 그런책 수다하거든요.^^ 디스플레이 용이랄까.
김수행 역 <자본론>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존재하는 듯 합니다. 지금 서점이나 대학가에 깔린게 거의 김수행 역이라 그렇지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교수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번역이 좀 조야한 수준이라네요. 저도 오역과 패역에 대한 문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교수님들이 그럴때마다 '그럼 당신이 해보시지'라는 말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오긴 합니다. 솔직히 조금 편안한 문장으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는 것도 아니죠. 그래도 저 오렌지 빛과 고등학교 수학 정석 같은 표지는 여전하네요. 저는 사실 시초축적(본원적 축적) 부분만 심하게 발췌독을 해 놓은 형편이라 <자본론> 전반에 대해 가타부타 할 입장이 못 됩니다.

로쟈 2007-01-16 14:43   좋아요 0 | URL
사정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로선 말씀대로 '수학 정석' 같은, 혹은 고시서적 같은 권위적인 모양새가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요(게다가 처음엔 한자 투성이었죠). 그리고 중요한 책이면, 소프트카바에 문고본으로도 나와야 정상 아닌가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천재뮤지션 2007-01-22 09:55   좋아요 0 | URL
손제민 기자. 제 고등학교 선배인데 이렇게 멋진 기사를 선물해주시다니!
그나저나 빨리 강신준씨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로쟈님께 질문 하나만.
(사실 누군지도 모르고 항상 눈팅만 하다가 처음 남깁니다)

자본 번역본이 국내에 한 3개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그 중 제일 볼 만한 번역본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로쟈 2007-01-22 11:16   좋아요 0 | URL
그건 제 판단을 넘어서는 질문입니다.^^; 제가 강신준 번역은 안 갖고 있고, 본문에 적은 대로 김수행본도 일부만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독어본과 대조해볼 능력이 안됩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 지적해놓은 게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오 마이 갓!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설마 이런 뒷북성 제목을 내가 달았을 리는 없다. 오마이뉴스의 뒷북성 기사의 제목이 그럴 뿐이다(알라딘에서 맨날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입증해준다!). '씨네마떼크 탐방'을 다루는 기사가 연재되는 듯한데, 두번째 꼭지가 지난번에 소개했던 아스트라 테일러 감독의 <지젝!>이다. 기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관련기사'로 옮겨놓는다. 나와 무관하지도 않기에... 

 

오마이뉴스(07. 01. 15)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라캉도 어려운데 지젝에게까지 관심이 생겨 자료를 찾다가 뜻밖에도 '오!재미동'에서 귀한 다큐멘터리 자료를 한 편 만났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겸 문화연구자 슬아보예(*슬라보예) 지젝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이다. 슬아보예(*기자분이 아직 감이 없나 보다) 지젝은 현존하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 국내에도 그의 다작으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지만, 다큐멘터리로 그를 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2006년 가을 종로의 '스펀지'에서 열렸던 서울영화제에서 지젝에 관한 영화가 한 편 상영되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알게는 되었지만 보지는 못했다. 그 영화가 이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반가웠다(*단순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다니. 서울영화제에서 상영된 건 <지젝의 기묘한 영화강의>였다). 국내에는 출시가 물론, 되지 않았고 'ZEITGEIST FILMS'라는 곳이 판권을 가진 DVD로 물건너 온 것이였다. '오!재미동'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로쟈라는 분이 자막을 입혔고, 지난 12월에는 상영회와 강의도 있었다고 한다(*어떻게 '-했다고 한다'란 기사를 쓸 수 있을까!). DVD케이스의 표지에 지젝(Slavoj Zizek)은 "문화이론의 엘비스(The Elvis of cultural theory)"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젝은 인문학 동네에서는 남자 마돈나 취급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고,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주제로 삼아 끊임없이 주절대는 수다쟁이 철학자이기도 하다(*이건 나의 서평 멘트를 옮겨온 것이다).

그런 그는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엄밀히 말하면, 쉘링)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은 진정한 좌파철학자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문제부터 모국인 슬로베니아의 정치적 현실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고민하고 글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한편, 자신을 스스로 스탈리니스트라고 주장을 하는 공산주의자이기도 하다. 동구에서는 공산당 정권의 몰락 이후 좌파들이 서유럽보다도 더 비난과 공격을 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현실 좌파로서의 선택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에 슬로베니아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는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는 그의 사상이 현재보다는 오른쪽이었고 다원주의사회 지향적이었다고 한다.

<지젝>에 나오는 자료화면을 보면, 그의 정당은 자유민주당(Liberty Democratic Party)이다. 하지만, 이 당명을 우리식으로 '자민당' 정도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역사적, 현실정치적 문맥에 따라서 똑같은 '자유'와 '민주'도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단히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고, 1989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학계와 이론계에 등장하여 불과 15년이 지난 현재 당당히 우리 시대의 사상가 반열에까지 올라있다. 현재는 구체적 정치보다는 출판과 담론의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젝!>은 사실 그의 이론세계를 다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여러 강연들과 인터뷰를 보면서 때론 오해를 했을 법한 그의 퍼스낼리티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고, 그가 사실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가령, 라캉 정신분석학과 쉘링철학, 마르크스레닌주의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특히 보스턴에서의 강연을 보면 그가 여러 이론상의 적들, 특히 페미니스트의 공격에도 쟈크 라캉의 철학을 고수하고, 그가 일종의 흥행수단으로서 택한 자신의 강의와 저술방식에 대한 변명을 듣게 되어서 이채롭기도 하다.

혹시 최근 인문학, 철학, 문화연구 동향에 관심이 있어서 지젝의 세계에 대해서 한 번 공부해 보고 싶다면, 먼저 아스트라 테일러의 71분짜리 다큐멘터리 <지젝!>을 한 번 시청하고, 지젝 입문서로 엘피출판사에서 간행한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으면 그의 여러 저서들을 직접 독파해 보라! 현대사회와 정치현실, 대중문화와 서구의 주요정치·문화담론에 대한 나름대로 식견이 생기게 될 것이다.(심정곤 기자) 

07. 01. 15.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경 2007-01-15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식입니다. 다만 저로써는 그 상연회와 강의를 듣지 못해 아쉬움점이 뒷북을 칩니다.

로쟈 2007-01-1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들으셨다고 하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강의는 아주 훌륭했답니다...

열매 2007-01-16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지젝의 책에서 무엇을 읽었다는 이야기는 한줄도 안 나오는군요. 기사로 본다면 고작 영화 한편과 토니 마이어스의 책 한권 정도 읽고 이런 하나마나한 '기괴한' 글을 쓴 꼴인데, 그 용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1년 여 영어본으로 라깡을 읽어왔는데, 과연 한국에서 라깡을 이야기한 사람 중에 라깡의 에끄리나 세미나를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이 들더군요.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글을 그렇게 잘 정리해서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공부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깡의 세미나들은 그 당시 세미나를 함께 했거나, 함께 했던 사람들을 '모시고' 전수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11월에 동국대에서 있었던 라깡학회에 '구경'갔을 때 느꼈던 것은, 라깡을 원전으로 읽어내는 '일진'학자들과, 라깡'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간의 미묘한 위계 질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철학과에서 풍기는 이런 미묘한 뉘앙스, 혹 아실까 싶습니다.
여하튼 이런 어이없는 기사를 북리뷰에서 자주 보다 보니 한국에는 언제쯤이나 제대로 된 북리뷰를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안쓰러움'이 듭니다.

로쟈 2007-01-16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읽으면서 저도 반가움보다는 착오적인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거기에 기시감!). 원래 'news'를 다루는 게 언론이 아닌가요. 아니면 심층분석/이든가. 오마이뉴스야 '시민기자'들의 기사로 채워지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편, 지젝도 영화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요즘 읽고 있는 스타브라카키스도 그런 얘기를 하는데, 비의적이고 수사적인 라캉의 담론이나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다 사기입니다...

나비80 2007-01-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의는 아주 훌륭했나보군요ㅋㅋ^^ 저도 전형적으로 저런식으로 기자질을 해먹다가(?) 그 비루함을 못 견뎌 뛰쳐나와버렸죠. 기사를 쓸 때 어려운 주제는 감당이 잘 안되곤 해 여러 곁말을 에둘르거나 중대한 사안일지라도 실체 확인을 게을리 해 개박살이 나곤 했답니다. 예민한 독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만두길 백 번이고 잘했다 생각합니다. 본격적, 전면적으로 구라를 칠 수 있는 일이 제게는 맞겠더라구요.^^

로쟈 2007-01-1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자를 하셨군요.^^ '전면적 구라'는 언제쯤 나오는지요?(이건 소이부답이신가요?)^^

오늘사람 2007-02-1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를 쓴 심정곤이라고 합니다.
먼저 지젝에 조예가 깊은 분들께 죄송합니다.
현재 라캉에 관한 기사도 썼는데 그것도 욕먹겠군요.
제 의도는 고지곧대로 소개입니다.
씨네마떼크,지젝,라캉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도 있지만
저처럼 조금만 아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언짢아 마시고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7-02-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 읽기>에 관한 기사도 읽어봤습니다.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서 기사를 쓰신다는 것에 저는 이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사라면 '팩트'를 확인하시고 쓰셔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에크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아직 영문으로도 완역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는 내용은 어떤 소스에 근거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브루스 핑크의 완역본이 작년에 나와 있습니다. 기사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사람 2007-02-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렇군요.

브루스 핑크 완역본은 어디선가 들은 가억이 나기는 했는데, <라캉읽기> 책내에 언급된 내용을 기준으로 기사작성했습니다. 시차가 있나봅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주말에 할일이 많았는데, '중복리뷰'와 관련한 페이퍼들을 읽다가 상당 시간을 허비하게 돼 유감스럽다(문제제기 자체야 5분이면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논쟁이 너무 소모적이었다). 무슨 일을 하면서 '나의 서재'를 같이 띄워놓는 일은 앞으로 삼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창피하게도 어제오늘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이다. 이런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 밤낮 페이퍼질이나 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도 변명할 구실이 없겠다. 거의 페이퍼꾼 아닌가? 이러니 돈내고 페인트칠하는 주제에 알라딘에서 '알바'하느냐는 소리까지 듣는 것 아닌가? 남세스러워서라도 한동안 잠적하든지 해야겠다. 혹 그런 결단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들고가고픈 책은 아마도 오늘 도착할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창비, 2000)과 조만간 주문할 T. 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뿔, 2006)이 될 것이다.

 

 

 

 

나온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최근에 영화화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오래된 정원>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인바 지난 80년대와 90년대를 가름하는 지표이면서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가 박종철 학형의 사망 20주기였지만 지난 80년대, 별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오래된 정원>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박종철'이란 이름을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20년전 이맘때 인천의 한 가건물 식당에서였다('오래전 식당'이로군!). 논술시험을 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서 친구분 댁에 이틀인가 유숙해야 했었는데, 그 댁이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그 식당에서 읽은 아침신문에 '턱' 치니까 '억' 하더란 기사가 났던 것이다.

예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생활이란 게 얼마나 '비낭만적'일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좀더 우려했어야 했다. 얼마후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두달쯤 다니다가 학생생활연구소에 우울증 상담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6월이 시작되자마자 기말시험도 거부한 채(한두 과목은 보았지만)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6.10항쟁이 일어났을 때 아마도 나는 바닷가에 있었거나 배 쭉 갈고 엎드려 소설책들이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1학기 같은 분위기였다면 나는 대학을 오래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6월 이후에 맞은 2학기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졌다('개량국면'이라고 한다). 그해 겨울 알다시피 대선이 있었고, 나는 대선 참관인단이 되어 다시 지방에 내려왔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 때문에 또한번의 '좌절'을 맛봐야 했지만...  

<오래된 정원>은 불가피하게 그런 시간의 족적들을 들추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읽기 괴롭다. 문제는 내가 그런 괴로움도 이젠 얼마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란 어느 시구절이 나의 무기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대개 호평이 많은 듯하다. 임상수의 현대사 3부작 가운데, 그래도 내게는 가장 '현실적인'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그의 냉소는 한국영화에 드문 자질이지만, 나는 냉소를 즐기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 기사들이 많지만 얼른 눈에 띄는 건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12211738051&code=960401 이다.

그럼, 또 왜 <지혜의 일곱 기둥>인가? 최근에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와 관련된 이들, 곧 제작자와 원작자에 대한 기사들을 페이퍼로 만들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던 차에 <닥터 지바고>의 바로 전작이자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주인공 'T. E. 로렌스'의 '원작'이 출간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책은 지난 11월말쯤에 나왔는데, 북리뷰 기사들을 거의 빼놓지 않는 내가 어떻게 무심코 지나갔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짐작엔 다른 신문들에서 비교적 작은 기사로 다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참고할 만한 언론리뷰는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f=total&&n=200611250128).

사실 이 로렌스는 또다른 로렌스인 소설가 'D. H. 로렌스'보다도 내게 먼저 각인돼 있는데,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세계위인전에 그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TV에서 방영되었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나는 진득하게 본 기억이 없고 따라서 유별난 감동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다. 영화를 공부하던 한 선배가 최고의 추천작 중 하나로 꼽아서 그런가 보다 했을 뿐(피터 오툴이란 이름은 덕분에 기억하게 됐다). 그런 '아라비아의 전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더구나 원작이 나온 지 70여년만에 완역된 책이라면.  

소개에 따르면, 책은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했던 T.E. 로렌스의 자전적 기록. 아랍 반전 전쟁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국내 최초로 완역되어 선보인다. 정신의 힘과 의지에 대한 찬양,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몸부림쳤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함께 녹아 있는 저작이다. 영어권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필적하는 대작으로 손꼽히며, 20세기 최고의 전쟁 문학이자 자서전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후 맥락을 앞에서 언급한 리뷰에서 발췌하면 "영국 옥스퍼드대를 수석졸업한 엘리트 고고학자였던 T. E. 로렌스는 1916년 28세의 육군 정보장교(대위) 신분으로 오스만제국의 해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것은 오스만제국 안에서 터키인과 하나가 됐던 아랍인에게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오늘날 시리아, 리비아, 요르단, 이라크, 이스라엘 지역의 통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아랍독립전쟁이라는 거창한 명분이 달려 있던 그것은 거대한 기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한편이었던 오스만제국을 분열시키기 위한 대영제국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로렌스의 제의를 받아들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를 지배하던 후세인 이븐 알리에게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된 통일아랍왕국의 수장 자리를 제의했다. 대신 영국과 한편이 돼 오스만제국에 대한 전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맥마흔 선언과 더불어 영국은 프랑스와 이 지역의 분할통치를 밀약한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했다. 로렌스는 이런 음흉한 계약 위반 사실을 눈치 챘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아랍인과 우정을 나누며 2년여간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이 책은 1916∼1918년 이집트에서 사우디의 메카로, 다시 홍해 유역의 아카바를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사막의 전투’를 치르며 겪은 모험에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함께 녹여낸 그의 회고록이다."



 

 

 

물론 책에 대한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랍계 미국의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 책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대리인’의 관점에서 쓰인 오만과 편견의 덩어리라고 비판했"고, "실제 이 책에는 터키인을 대신해 중동지방을 다스릴 새로운 민족(아랍민족)을 세우겠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틈틈이 포착된다." 그러니/그래서 문제적이다.

사실 잠적을 꿈꾸는 이들이 갈 만한 곳이라곤 '감방'이거나 '사막' 말고 더 있겠는가. 그러니 들고갈 책도 자명할 밖에. 해서 당신에게도 권한다. '잠적할 때 들고가고픈 책' 두 권을. 물론 <오래된 정원>이나 <지혜의 일곱 기둥>을 들고 가는 게 아니라 감방/사막에서 갖고 나오는 '강적들'은 예외다. 상종을 못할 자들이다...

07. 01. 15.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1-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좀 타격을 입으셨군요. 이 주부터는 좀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잠적을 꿈꿀 수 있는 님 부럽습니다^^

로쟈 2007-01-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정신적(시신경적), 물질적 피해가 상당합니다. 1년에 리뷰 두어 개 쓰는 형편이라 '중복리뷰' 자체에 관심을 가질 만한 형편도 아니면서 말이죠('중복페이퍼'라면 또 모를까)...

stella.K 2007-01-15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혜의 일곱 기둥 읽고는 싶은데 영 자신이...

로쟈 2007-01-1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막에 가실 때(만)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기인 2007-01-1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생각보다는 로쟈님의 학번이 낮으시네요 ^^ 황석영 선생님의 책은 나왔을 때 봤었는데, 황석영 선생에 관한 논문은 꼭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ㅋ 하고 싶은 것만 많은 공익 -_-;; )
영화는 제 주위에서는 혹평이 더 많던데, 로쟈님은 호평을 더 많이 들으셨나보네요 ㅎ

로쟈 2007-01-1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렇게 노티가 났었나요?^^ 그래도 기인님보다는 꽤 높은 학번 같은데요. 지금 나이도 '명퇴'가능한 나이이고(알라딘에서도 '후임자'를 물색중입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주로 잡지나 언론의 것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실제 관객들의 '현장평'은 좀 다를 수 있겠죠. 제 예상치보다는 평들이 좋았습니다. 물론 대학 주변의 눈높은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호평하는 걸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만...

기인 2007-01-1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아니 이제 활발히 개척하실 연배시죠! 물론 저보다는 많이 높으신 선배님이시죠 :) 예전에 제 국문과 선배님들과 저랑 (90년대 중후반학번들)이 모여서 로쟈님의 학번대를 추론해본 적이 있었는데, 80년대 초반 같다는 것이 대세였거든요. 사실 예상과 별 차이는 안 나지만, 저희한테는 83-85 와 86-88 은 쫌 다르게 다가와서요. 86-88은 같이 하는 것도 많고 '선배'라는 위치라면 83-85는 '선생님'으로 갈리는 뭔가 물질적 기반의 차이가 있어서 ^^; ㅎ

로쟈 2007-01-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론'씩이나요.^^; 사실 여기저기 단서들은 흘려놓았었는데 말입니다. 제 경우엔 97-98학번 정도가 경계인 것 같습니다. 저더러 형/오빠라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물론 듣기 좋은 건 '오빠'죠...

클리오 2007-01-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로쟈오빠!!! (문득 실례가 아닌가 하면서 눈을 하늘로.. ㅋ) 이렇게 부르고나니, 어려웠던 로쟈님이 더 편해지는 듯한... 이런 페이퍼에나 댓글을 달 수 있는 제 수준을 탓하고 싶어요.. ^^ 그리고 저 책은 보셔도 좋지만, 잠적은 하지말고 자주 뵈요.. 아니, 저만 보는건가요? ^^;;

로쟈 2007-01-1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클리오누님, 오빠라니요?!!

클리오 2007-01-15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누가 더 어리나 시합하기?? ^^; 87년에 전, '광주사태' 사진전을 처음보고 경악했던, 그러나 심한 데모로 학교가 빨리 끝나는게 마냥 좋았던 중학교 1학년 이었다지요.. ㅋㅋ

로쟈 2007-01-15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데요. 저는 박통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날까 잔뜩 겁먹었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yoonta 2007-01-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리뷰논란이라... 중복해서 리뷰를 올리건 말건 상업적 의도만 없다면 그만인 일 아닌가요? 왜 중복리뷰에 대해 그렇게 예민한건지 솔직히 이해가 안간다는. 출판사 관계자들이 중복리뷰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런 쓰잘데기 없는 논란 때문에 로쟈님이 잠적하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랍니다..^^

로쟈 2007-01-16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중복리뷰로 여러 곳에서 '이주의 리뷰'에 선정된다든가 하는 문제만 걸러진다면, (도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하는 것도 취향이지요). 그 정도 해야 '서평꾼'이기도 하고. 저더러 은근히 잠적하길 권하시는 것 같네요.^^ 전 감방에 안 갑니다! 사막도 싫고요!...

나비80 2007-01-1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리뷰에 대한 견해를 소략하게 밝혀주셨네요. 저는 로쟈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했었거든요. 워낙 알라딘에서도 '오버마인드' 역할만 하시지 웬만한 전장(?)엔 직접 뛰어들진 않으시니까. 저도 사실 그 '중복서평'에 관한 논란과 추인, 반박, 응징의 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상황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형편이랍니다. 괜한 말을 늘어놓았네요.^^
저는 뭐든지 책으로 봐야 제 맛이라는 편견을 가진 편입니다. <뽕> 시리즈는 제외하고서 말이죠.

로쟈 2007-01-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별로 특출난 견해도 아니어서, 그리고 '전장'에 뛰어들 만큼 그 문제에 열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구경만 했습니다. 골자는 (1)예스24와 알라딘에 같이 리뷰를 올리시는 분들이 많아지면 결국 차별성이 없어지는 거 아니냐, (2)그리고 이중으로 '수익'을 챙기는 거 아니냐 같은데, (1)에 대해서는 데이터가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도서구입을 양쪽 모두에서 하는 경우라면 무방한 거 아니냐란 게 제 생각입니다(그게 아니라 한쪽 서점하고만 거래하면서 다른쪽엔 서평만 띄워놓는 건 좀 얌체짓이란 생각이 들고요). (2)에 대해선 그 '수익'이란 게 맥시멈 한달에 만원 가량일 텐데(물론 현상 리뷰는 좀 액수가 되지만) 아직은 무시할 만한 수준 아닌가, 그 '노동'에 대해서 본전도 못 추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출판사쪽과 연계된 알바 서평 같은 건 진지하게 문제가 될 만하겠죠(대규모 서평단이라도 뜬다면). 하지만, 그게 당면한 문제는 아닐 뿐더러, 그러한 기획/시도가 성공할 거란 보장도 전혀 없지요. 뭐가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 격이라고 봅니다. '소략하게' 몇 자 더 보충했습니다...

나비80 2007-0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평쓰기'라는 행위를 '노동'으로 분류해야 할지 '유희'로 분류해야 할지 아니면 그 둘의 교섭 작용으로 인해 나오는 산물인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둘을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동인이 있을 수도 있겠구요. 저는 알라딘 쪽에서도 그 주변부에만 기식하는 형편이라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한 감각도 무딘 편이고, 오로지 '불량 서평' 대목만으로도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많아 '중복'까지는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내겠더라구요. 전 아무 생각 없이 일기식으로 쓴 서평도 있거든요. 전문 서평꾼들에겐 아마 책의 객관적인 평가를 방해하는 질 낮은 사변담쯤으로 보였을 것 같네요. 소박한 변명이었습니다.

로쟈 2007-01-1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보수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발적인 무보수 노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희'라고 하기엔 품이 많이 들고 또 주변의 시선(?)도 의식해야 하니까요. 그게 주류(?) 시각에서는 '서평꾼' 정도로 폄하될 수도 있겠죠. 이게 무슨 공직도 아니고 대단한 벌이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자본'이 펼쳐놓은 마당에서 주제들 모르고 깝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다 사이드이펙트, 부작용입니다. 의도하지/계획하지 않은. 알라딘 '커뮤니티' 같은 것도 그런 거구요. 제가 간혹 치르는 유명세(?)도 그런 거겠죠. 여긴 '동네'니까요...

나비80 2007-01-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착한 사람들의 마을'이라니 하는 말도 나오게 된 모양이군요.
로쟈님의 세세한 자료 배치라든지, 정보의 질적인 측면을 보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계시단 걸 충분히 알겠습니다. 갑자기 품질이 낮아지면 소비자들의 항변이 장난아니겠죠? ㅋㅋ 그러나 로쟈님의 페이퍼 쓰기의 경우는 본인의 욕구 충족도 큰 폭으로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7-01-1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멘트는 아주 당연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하고 또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밥먹고 숨쉬는 것부터 시작해서... '큰 폭'이라는 건 제 경우 비공개를 공개로 돌린다는 것 정도일 텐데, 사실 비공개인 페이퍼들도 적지는 않습니다.^^

마늘빵 2007-01-27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 98이에요. 로쟈님의 경계선요. ^^v

로쟈 2007-01-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오빠'(?)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고 에바님이 물어오셔서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 몇 편의 글들에 대한 서지 정도를 확인해두었는데, 영문 서지인지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건 다름아닌 내가 3년전에 쓴 것이다. 다시 읽으며 약간의 '시간차'를 느끼게 되지만, '자료'로 치면 무난할 것도 같아서 그냥 옮겨놓는다(지젝에 관해 쓴 자료들을 다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창고에 없다!).  

인터넷 검색(산책)을 하다가 작년(*2003년) 10월 6일자 이대학보에 실린 '지젝 특집'을 읽게 되었다. 당시 각 대학 학보마다 지젝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술면 특집을 마련했더랬는데, "욕망과 실재로 현대사회를 본다"라는 이 특집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특집은 "사회를 구하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지젝의 작업을 개관하는 기사와 함께, 각각 그의 행동적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지지와 이론적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짧은 기고문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제목에서 '두 가지 의견'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기고문을 말한다.

먼저 허윤(국문4)은 자신이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한다: "그는 학문이 삶과 괴리되지 않음을,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가다. 이것이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학자는 상아탑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상아탑의 높은 벽을 부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현실사회와 연결시키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짧은 기고문의 마무리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긴 이유는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 나는 그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지구적/인간적 현실에 대해서 발언/비판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내가 작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에서의 그의 거친 목소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이지만, 그는 이론적/사회비판적 저작들을 계속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인물은 아니다. 요컨대 '교수'나 '학자' 타입이 아니라, '활동가'이다.

사실 그가 슬로베이나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맡고 있는 지위도 우리식의 '연구교수' 같은 것이어서 강의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그는 강의로부터 면제돼 있다). 그것은 슬로베니아 당국 혹은 대학권력과의 마찰/불화의 결과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는다. 우연찮게(우연은 아니다. 그는 대담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열정은 철학보다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뜨게' 되었지만, 그의 그러한 '전술'은 사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것이니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지젝파들은 애초에 라캉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지 못했거나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라캉 이해는 전적으로 자크-알랭 밀레에 기대고 있다. 밀레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지젝도 가능하지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론가이자 해석가로서 밀레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그가 '활동가'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가 활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과 독일 관념론 같이 아주 난삽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때의 이론은 이미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다. "정신이 뼈"라는 헤겔의 문구를 반복하자면, 그에게는 "이론이 곧 실천"이다(반면에 '실천적 이론'이라거나 '이론적 실천'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도식안에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은 '연구'에 바빠서 미처 사회적 '활동'을 할 만한 여가가 없는 책상물림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며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한 모범에 따른다는 것은 무사안일하게 'mere life'나 'mere study'에 함몰돼 있는 '왜소한' 자신의 삶/학문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습관/관행을 "이건 아니지!"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은 지젝의 세계적인 유명세("동유럽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주류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론'(이건 비교문학쪽 소관이다)과 '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을 구분하는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인데,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같은과 김상환 교수의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는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러한 평가/비판은 니체의 철학을 무체계적이라고 하여 '문학류'로 취급하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지나치게 수사적(동시에 수행적)이라고 하여 '비철학'으로 간주해버리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에코그라피>를 번역하기도 한 이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국내 '유일의' 데리다 전문가 김상환 교수의 평 또한 그간에 '데리다'에게 쏟아졌던 단골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문제는 지젝의 실재가 아니라 지젝의 대가적 명성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아닐까?

진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데, 이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는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바울이나 레닌에 경도되어 있는 지젝에 따르면, 진정한 행위(act)는 어떤 계획이나 고안에 의해서 성취/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겪어낸다거나 통과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경험과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 사회변혁의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지젝의 말대로, '지식'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의미화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영국 사회철학자 존 엘스터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의 결단에 대해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내보여라, 그럼 신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신앙은 도약의 문제이다).

평자는 당부의 말로 덧붙인바,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하다"라고 했는데, 평자가 과연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일치'(이건 상당히 프래그머티스틱한 주장인데)야말로 이론의 목적이자 철학의 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좀 의심스럽다. 평자가 전공한 스피노자가 과연 그러한 철학자이며, 헤겔이 그러한 철학자이며, 알튀세르가 그러한 철학자인가?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양자역학의 진리(이론)는 전부 넌센스가 될 것이고, 무의식의 진리(앎)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또한 잠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지젝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내 경우에, 상당히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주장들이 매우 실감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주 리얼한 것이다. 책속의 진리야 말로 지젝이 혐오해 마지 않을 만한 것인데, 지젝의 '이론'을 책속의 진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비판으로서도 좀 고약하다...

04. 01. 07/ 07. 01. 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아, 이것이 지난번에 어느 페이퍼에서인가 암시(?) 되었던 로쟈님과 진태원님의 견해 차이군요. ^^

로쟈 2007-01-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이나 지젝이나 모두 거부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수용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학계/대학에서의 거부감 같은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각엔 거부의 '논리'가 불충분한 게 아닌가 싶어요...

sommer 2007-01-1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부정성으로 귀결되는 '반성'과 무관하게 '행위'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활동가'가 곧 지젝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데거가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물구나무를 서는...사례가 곧 이론이 되는 '매뉴얼'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7-01-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행위'가 '자기부정성'(반성)과 무관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오히려, 자기부정, 지젝식 용어로는 자기철회의 제스처가 바로 행위인데요. '형이상학적 활동가'란 명칭도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는 한 지젝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suture님의 자세한 입론을 기대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가 정초에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이다. 전세계에서 <햄릿> 다음으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라고 하니까 드문 일도 아니며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국내에서 공연되는 <갈매기>를 본 적이 없어서 얼마간 흥미는 갖게 된다. 공연기간이 짧아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매일경제(07. 01. 11) 안톤 체호프 `갈매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인간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에게만은 철저히 몰두한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한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그의 정의는 탁월하다.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하고 싶어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진정으로 뭔가를 주는 데는 지독히 서툴면서 자신은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인 까닭이다.

극단 여백(대표 오경환) 창단 10주년 기념작 '갈매기'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그린 연극이다. 모자 관계인 여배우 아르카지나와 작가 지망생 코스차,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소설가 트리고린, 배우 지망생 니나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통해 자기애에 빠져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고 사랑에도 서툰 인간의 모습을 고찰한다.



'갈매기'는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와 더불어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하나. 명확한 사건이나 주제가 없어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체호프 서거 100주년이었던 2004년부터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극단에 의해 여러 차례 공연된 바 있어 연극 애호가들에게는 익숙한 작품이다.

평범하고 하찮기까지 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진실을 섬뜩할 만치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 '갈매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작품 번안과 연출을 맡은 오경환 대표는 "'갈매기'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선종남 유준원 박현미 박찬국 정선철 이보영 등이 출연한다. 16~21일 대학로 우석레퍼토리극장. 2만~2만5000원. (02)762-0810(노현 기자)

07. 01. 14.

Чехо в театре - Чайка
 
P.S.  사진은 극단의 동료들에게 <갈매기>를 읽어주고 있는 안톤 체호프(가운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1-1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쎄요, 체홉의 작품으로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요(제가 두루 알지는 못하지만). 체홉의 작품으로는 좀 '쎈' 설정 같기도 하구요(일단 누굴 죽이고 하는 얘기가 그의 취향은 아니라서요). 체홉의 작품이라면 놀랄 일이지만, 아무래도 후자쪽 같습니다...

릴케 현상 2007-01-2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매기는 연영과 애들이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 보고 싶네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