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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좀주소
홍현기 감독, 류현경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1월
평점 :
이름 없는 자에게 퍼주는 물 한 바가지: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영화에 대한 스포가 있사오니 안 보신 분들은 넘겨주십시오)
예수가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 머물 무렵이었다. 목이 말랐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인에게 말을 한다. 이 여인은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를 찾아 헤매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요한4: 13-14)
주의 말씀을 좇는 사람들이 사뭇 감동하며 읽는 이 구절에서 나는 다른 층위의 감동을 발견한다. 예수는 이 여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상황에 주목한다. 여인 역시 이방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의무가 따르지 않는 그의 제안에만 집중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스관을 목에 두른 사내가 채권 추심단에게 협박을 한다. 분명 협박을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채권 추심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저당잡고 협박을 멈추지 않는 사내는 채무자이다. 이렇듯 이 영화가 집요하게 추적하고자 하는 인간 군상의 한 편린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영화는 시종 법률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그대로 이행되지 못하며 발생하는 끝없는 잡음들에 주목한다. 채무자가 오히려 채권자에게 대들며 그들의 비참한 인생을 전시하고 채권자는 오히려 이들의 발악을 보며 짐짓 멈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바로 이 장면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장면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가 제시하는 이 지긋지긋한 ‘공식’적인 관계들은 원래 현실에서 제대로 이행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법에 기초한 인간과 물질의 분리는 진정한 ‘권력’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임재하는지 암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는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을 위해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필수적이었다). 현대의 민법에 기초한 소유권 개념은 원래 권력이란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힘의 각축임을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권이 적어도 일종의 ‘권력’임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사람과 사물이 관계를 직접적으로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유권이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다시금 제시하는 하나의 ‘관계’들은 바로 서로의 이름을 필수적으로 불러내야만 하는 법률적이고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공동체이다. 구창식(이두일 분)이 곽선주(류현경 분)의 빚을 받아내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도중 그녀에게 묻는 한 마디는 이 영화의 핵심정신을 잘 요약한다. “대체 너는 뭐냐?” “저요, 뭐긴 뭐에요. 그냥 신용불량자지.”
법률적인 의무와 권리가 우리의 신체를 촘촘하게 규율하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그 흔한 ‘이름’마저 탈취당한 채 사회에서의 보호 대상으로 격리되기 일쑤이다 (신종플루가 의심되기 시작한 환자는 보통 ‘아 신플 꺼져’라는 식의 혐오스러운 낙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흔한 이름마저 탈취당한 대상들을 다시 불러모아 그들의 인생을 핍진하게 묘사하기 시작한다. 여기 대졸에 40번 이상 입사 면접에 떨어진 심수교(강인형 분)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결국 한 사채업체의 ‘빚쟁이’로 취직하게 된다. 이른바 ‘조폭’들과 함께 일하며 그는 도저히 자신이 획득할 수 없는 ‘남성적’ 습성들을 획득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른바 자신의 ‘젠더’에의 탈취까지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창식의 빚을 받아내는 게 목표인 수교인데 이 수교와 창식 간에 모종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나마 ‘신용평가사’에서 일하는 창식의 경우 공식적인 채권추심원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수교에게는 그러한 직함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어설픈 ‘짜가’ 채권추심원에게 창식은 복잡한 용어들을 한 수 가르치기도 하면서 이들 사이에 묘한 우정까지 목격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교는 결국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창식을 살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창식을 찌른 것은 같은 장소에 숨어 있던 다른 인물 조을상(김익태 분)이다. 창식으로 인해 딸의 결혼식까지 망친 그의 분노가 결국 그를 살인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수교는 창식을 태우고 응급실로 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계’ 설정에의 끝없는 의심과 의문을 뒤로 둔 채 이들이 비로소 한 공간에 머물게 되면서 누군가를 보살피게 되는 현장 – 이것이 결국 ‘물 좀 주소’에서 갈급해하며 찾고 있던 또 하나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식과 선주의 만남 속에서도 끊임없이 관철된다. ‘사는 게 무섭’고 ‘집이 제일 싫’은 한 여인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미혼모임을 알게 되면서, 창식은 단순한 채무자 곽선주를 넘어선 인간 곽선주 자체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 둘 간에는 모종의 ‘책임의식’이나 ‘의무관계’가 없다. 그저 갈급한 가운데 서로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모습이 시종 관찰되는 것인데, 이를테면 선주가 아이를 채 맡기지 못하고 일을 나갔을 때 창식이 우연히 선주의 집을 방문했다가 대신 그녀의 ‘삼촌’이 되어서 아이를 돌보는 장면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사가족과도 같은 이들의 관계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 부분인 창식과 선주가 도로 상에서 짧은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다. 선주는 과거 창식이 아닌 다른 채권 추심원과 만나면서 상당액의 돈을 빌린 후 일방적으로 잠적을 한 적이 있다. 마트에서 창식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장을 보던 중 우연히도 그 채권 추심원을 다시 만나게 되고 이들 간에 짧은 추격전이 벌어진다. 선주가 재빠르게 도망간 후 창식은 그 추심원과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선주를 저주하는 그를 뒤로 두고 오히려 창식은 선주의 껍질이 아닌 속내를 이해하려 든다. 그녀가 그러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진정 그녀라는 인간 자체를 신뢰하며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아쉽게도 선주는 창식과의 연락을 끊게 된다. 창식은 많은 어려움 끝에 선주가 밤에도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그녀를 찾은 것인데, 당연히도 선주는 일방적으로 창식을 피하려고만 한다.
선주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임을 강변하며 그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다그친다. 마치 창식이 자신에게 빌려준 돈(이 액수는 35만원이다)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라도 되는 냥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데, 창식이 그러한 이유로 자신에게 오지 않은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를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거짓된 증오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창식은 자신이 그 이유 때문에 온 것이 아님을 말하며, 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 멀리 서 온 화물차에 선주의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채권과 채무의 관계도 남아있지 않은 한 남녀의 새로운 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의 이름도 공식적인 문서에 남아 있지 않은 채 (이들은 심지어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다만 서로의 실존 자체가 각자에게 가장 갈급한 관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선주는 21살이라는 그 스스로의 나이 때문에 이 대담한 관계가 가져다 줄 다음의 이야기를 스스로 끌고 나가지 못하며 결국 도피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생물시간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본 적 있다. 마른 그의 몸에 절실했던 물 한 방울 부어주는 자 없었고 우리는 모두 능숙했다. 그는 술에 취해 눈을 감고 이내 잠들었다. 우리는 그를 찌르고 또 찔렀다. 다시 예수의 일화로 돌아와 이제 우리 몸 위에 나릴 물 한 바가지를 상상해본다. 오늘도 구창식은 어느 집 창문을 넘어서 ‘계세요?’ (이 공식적인 名稱으로 점철된 호명행위여!)를 연창하고 있을 것이고, 선주는 크게 나아진 바 없는 자신의 형편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정한석 기자가 말한 일종의) ‘축제’는 사실 굉장히 비극적인 축제이다. 축제가 끝난 후 우리 모두 비릿한 일상을 좀 더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모든 축제가 사실 비극적이긴 하지만 이 비극은 좀 더 짙은 것만 같다. 한치도 나아지지 않은 삶들이 웃고 춤추며 영화의 말미를 노랗게 적시고 있을 때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끝없이 울리고 있지만 그 마지막 가사는 ‘아무리 기다려 봐도 아무리 기다려 봐도 비는 안 오네’ 였다.
이 영화의 위로는 그래서 너무 쓰다. 선주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예수가 말한 그 물 한 바가지는 과연 공동체에 속한 익명의 모두에게 공평히 나려질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아름다운 선주를 화면에 담으며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평안한가?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목 마르다는 사실마저 감각할 수 없게 너무 말라버린 건 아닌가? 어려운 문제이다. 나희덕의 시 한 편으로 이 영화의 짧은 감상을 마치고자 한다.
마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은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