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열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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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사랑에 대한 추상은 언제나 실패한다.
(혹시나 모를 스포일러가 염려되오니, 영화를 조만간 보실 분들께서는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첫사랑 열전
 
박범훈 감독의 영화 첫사랑 열전은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이야기가 하나의 작품으로 묶인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이다. 이 세 개의 짧은 영화들은 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갖고서 첫사랑에 대한 추상을 구현한다. 첫 작품 <종이학>의 경우 남성이 품는 첫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시도한 작품이다. 순수한 첫사랑이 결국 실패할 때 우리들은 그 이유를 상대방에 대한 허물에서부터 찾기보다 외부적인 데서 찾게 된다. (보통 나이가 좀 더 들면 실패의 이유를 상대방에게서, 그리고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실패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순수하게 들끓는 첫사랑이 실패로 돌아가게 될 때 이 젊은 20대들은 우리의 사랑을 그냥 이루어지게 해달라며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다).
 
따라서 첫사랑의 실패에 대한 고전적인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두 주인공은 극진히도 사랑했지만 결국 ‘원수의 딸’을 사랑한 객관적인 정황으로 인해 이 둘의 사랑은 실패하고 만다.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복원을 혁수의 입장에서 재현코자 노력한 작품 <종이학>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도를 답습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당연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종이학>에서의 사랑도 결국 실패하며 바뀐 것은 전혀 없는 가운데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분명하다. 그 어떤 서정으로 덧칠한 끈적한 사랑의 기억이라도, 그것이 외사랑이자 첫사랑이라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마음,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사랑의 매개체인 종이학에 담아 자신의 정성을 구태여 꾸깃거릴지라도, 종이학은 종이학일 따름이며 부채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오히려 종이돈일 뿐이다.
 
<종이학>을 보면 내내 아쉬웠던 점은, OST의 어색함 – JK 김동욱과 같은 개성있는 가수가 30분도 안 되는 영화에 OST로 등장하게 되면, 오히려 이 음악이 영화를 장악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16부작이 넘어가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각자에게 배치되는 테마음악과 같은 기법이 단편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사뭇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부한 조폭 소재 – 비루한 남성의 처지를 대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손쉽게 이 소재에 손을 대고 마는가. 영화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추상을 얘기하고자 할 때 그 결말은 언제나 실패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더욱 진실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질 예술적 성취마저 실패해서는 안 될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이청아에 대한 과도한 기대 – 불안한 마음으로 혁수를 바라볼 때의 서연(이청아 분)의 눈빛 연기는 너무도 일품이었지만, 그 장면을 위해서 희생된 억지스러운 전개들을 생각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짧은 시간 안에 이 판타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너무도 억지스러운 도약을 시도하고자 하는 점들이 계속 눈에 띄어서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두 번째 작품은 류현경 배우가 열연한 <한번만, 다음에> 라는 작품으로 전작이 드라마의 문법을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노력한 작품이라면, 오히려 이 작품은 코메디에 가깝다. 그것도 매우 실험적인 기법과 소재들을 대동한 작품이라서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실패한 사랑에 대한 추상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를 아주 훌륭하게, 우리의 상상력을 마음껏 조롱하며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처음에, 첫사랑들이 겪게 되는 매우 흔한 소재 (첫경험)로 시작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이 영화가 평범하다. 하지만 곧 이어서 우리의 상상력과 익숙함을 배반하는 전개가 계속 연이어 나오게 된다. 이를테면 무려 3-4분이 넘는 long take로 술집에서의 대화를 담는 장면에서 계속하여 남/녀가 바뀌게 되는 구도, 그리고 그 속에서 빚어지는 순간적인 오해들이 관객을 헷갈리게 하면서 동시에 즐겁게 만드는 것인데, 결국 주인공들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자신의 사랑을 완결짓지 못한 채 (과연 그것이 완결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라면 더욱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이 다시 시작될 무렵 용식은 자신의 첫사랑이 완전히 복원 되었음에 기뻐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은, 이 사랑은 이제 이전의 사랑과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사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이 사랑은 복원된 것이 아니다. 실로 첫사랑에 대한 복원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한번만 다음에>의 경우 반전이 강한 영화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소소한 불만이 하나 있다면 촬영에 있어서 무슨 이유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핸드헬드 촬영이 필요 이상으로 자주 나온 것 같다는 점이다. 특히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 long-take scene의 다수 등장에서 핸드헬드 촬영이 자주 대동되었는데, 아마도 ‘술 취한 상태에서의 몽롱함 – 그리고 그것이 종내에 선사할 반전효과’ 등을 노린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오히려 이 영화가 줄 긴장감을 이런 기법만으로 성취하려고 한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보는 동안 긴장이 되기 보다 오히려 어지럽고 답답했다.

 
 
마지막 작품인 <설렘>의 경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이 영화는 문학에서 자주 재현된 서사적 자아의 <떠남 – 모험 – 귀환>의 원운동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작품인데, 재미있는 점은 이 모험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서사의 원형으로 우리는 일리아드에서 나온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이것을 현대적인 허무함으로 잘 표현해낸 무진기행 등을 떠올릴 수 있으며 이들 작품에서의 모험가는 언제나 남성이었다. 이러한 전형성에서 벗어난 작품을 은희경과 같은 작가가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이를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을 선뜻 떠올리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두 여성은 자신의 첫사랑을 가장 잘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영화가 세 편의 연작을 통해서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이 첫사랑의 편린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돌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면, 아마도 그것을 하기 가장 적절한 장소는 여행지가 될 것이다. 수희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첫사랑이 어떻게 상실되었는가를 여행지에서 알게 된다. <한번만 다음에>에서 교살당한 첫사랑이 그 비극성을 블랙 코메디로 승화시켰다면 <설렘>에서는 미묘한 긴장감을 갖고서 끝까지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미묘한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힘은 아마도 장소에의 집착일 것이다. 시행착오를 허락하지 않는 거창한 처음에의 기대는 이 사랑의 사소한 부분들에게까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내가 당신을 알기 전, 당신이 한 공간을 추억하며 아련한 눈빛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그 시간에 내가 존재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그 공간을 탐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을 잃고 난 후 서성거려보는 그 곳에서 당신의 상실을 더욱 처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수희는 첫사랑이 머물렀던 민박집의 어느 한 방에 머무르고 싶어한다. 자신의 첫사랑이 그토록 자주 말했던 그 방에서 결혼을 앞두고 그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정리하고 싶은 것. 하지만, 먼저 온 혜정으로 인해 그 방에서 머물 수 없게 된다. 혜정은 남편을 잃고서 남편이 죽기 전 오고 싶어 했던 장소로 여행을 온 미망인이다. 혜정과의 대화를 통해 수희는 혜정과 사별한 남편이 바로 자신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공간에의 집착이 묘한 질투심과 결합할 때 그녀는 더욱 과감해진다. 결국 혜정이 방을 비운 사이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 첫사랑의 유골 단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상실이 준 고통을 잊기 위해 찾아온 여행에서 두 여인은 더 큰 상실감을 얻게 되며 영화는 마감하게 된다. 이러한 결말은 매우 자연스러우며 첫사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첫사랑은 쉬이 잊혀지지 않으며 첫사랑 이후에 우리가 달라진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다시 이 사랑을 떠올리게 될 때 무섭게도 동일한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려고 할수록 그 상실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첫사랑은 그것을 떠올릴 때 더 이상 아련한 것이 없다면 첫사랑이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망각함으로써 이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성공해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첫사랑이 아닌 것이다. 아련함에 대한 원조이자 향수로 우리 삶의 첫부분에 홀로 침잠한 첫사랑이 저기 울고 있을 때, 우리는 기억 저 편의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위로는 자주 삐걱거리며 실패하게 된다. 하물며 이제 그 첫사랑이 죽었다는 사실이 두 여인에게 가져다 줄 파장은 어떤 것일까. 감독이 <설렘>을 통해 첫사랑의 이후를 말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 영화 이후 혜정과 수희의 삶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그 이유에서이다.

 
 
영화의 삼부작은 첫사랑에 관한 고전적인 세 국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종이학>이 이루지 못한 ‘짝사랑’을, <한번만 다음에>가 첫경험을, <설렘>이 첫사랑 그 이후를 다루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상이한 세 가지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일관적인 듯 하다. 그것은 바로 실패한 사랑의 추상은 언제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여, 우리는 이 세 편의 영화가 암묵적으로 ‘죽음’이라는 소재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죽지 못해 사는 우리가 그래도 삶을 반추하며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은 아마도 첫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계속 죽으려고만 한다. 우리는 마른 황어에 침을 뱉는 심정으로 이 펄떡이는 지나간 기억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실함은 매번 실패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가 이를 도외시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첫사랑 열전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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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좀주소
홍현기 감독, 류현경 외 출연 / 플래니스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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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에게 퍼주는 물 한 바가지: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영화에 대한 스포가 있사오니 안 보신 분들은 넘겨주십시오)

예수가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 머물 무렵이었다. 목이 말랐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인에게 말을 한다. 이 여인은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를 찾아 헤매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요한4: 13-14)

주의 말씀을 좇는 사람들이 사뭇 감동하며 읽는 이 구절에서 나는 다른 층위의 감동을 발견한다. 예수는 이 여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상황에 주목한다. 여인 역시 이방인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의무가 따르지 않는 그의 제안에만 집중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가스관을 목에 두른 사내가 채권 추심단에게 협박을 한다. 분명 협박을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채권 추심단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저당잡고 협박을 멈추지 않는 사내는 채무자이다. 이렇듯 이 영화가 집요하게 추적하고자 하는 인간 군상의 한 편린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영화는 시종 법률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그대로 이행되지 못하며 발생하는 끝없는 잡음들에 주목한다. 채무자가 오히려 채권자에게 대들며 그들의 비참한 인생을 전시하고 채권자는 오히려 이들의 발악을 보며 짐짓 멈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바로 이 장면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장면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가 제시하는 이 지긋지긋한 ‘공식’적인 관계들은 원래 현실에서 제대로 이행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로마법에 기초한 인간과 물질의 분리는 진정한 ‘권력’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임재하는지 암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는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을 위해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필수적이었다). 현대의 민법에 기초한 소유권 개념은 원래 권력이란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힘의 각축임을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유권이 적어도 일종의 ‘권력’임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사람과 사물이 관계를 직접적으로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유권이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다시금 제시하는 하나의 ‘관계’들은 바로 서로의 이름을 필수적으로 불러내야만 하는 법률적이고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공동체이다. 구창식(이두일 분)이 곽선주(류현경 분)의 빚을 받아내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도중 그녀에게 묻는 한 마디는 이 영화의 핵심정신을 잘 요약한다. “대체 너는 뭐냐?” “저요, 뭐긴 뭐에요. 그냥 신용불량자지.”
 

 법률적인 의무와 권리가 우리의 신체를 촘촘하게 규율하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그 흔한 ‘이름’마저 탈취당한 채 사회에서의 보호 대상으로 격리되기 일쑤이다 (신종플루가 의심되기 시작한 환자는 보통 ‘아 신플 꺼져’라는 식의 혐오스러운 낙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 흔한 이름마저 탈취당한 대상들을 다시 불러모아 그들의 인생을 핍진하게 묘사하기 시작한다. 여기 대졸에 40번 이상 입사 면접에 떨어진 심수교(강인형 분)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결국 한 사채업체의 ‘빚쟁이’로 취직하게 된다. 이른바 ‘조폭’들과 함께 일하며 그는 도저히 자신이 획득할 수 없는 ‘남성적’ 습성들을 획득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른바 자신의 ‘젠더’에의 탈취까지 강요당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창식의 빚을 받아내는 게 목표인 수교인데 이 수교와 창식 간에 모종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나마 ‘신용평가사’에서 일하는 창식의 경우 공식적인 채권추심원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수교에게는 그러한 직함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어설픈 ‘짜가’ 채권추심원에게 창식은 복잡한 용어들을 한 수 가르치기도 하면서 이들 사이에 묘한 우정까지 목격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교는 결국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창식을 살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창식을 찌른 것은 같은 장소에 숨어 있던 다른 인물 조을상(김익태 분)이다. 창식으로 인해 딸의 결혼식까지 망친 그의 분노가 결국 그를 살인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수교는 창식을 태우고 응급실로 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계’ 설정에의 끝없는 의심과 의문을 뒤로 둔 채 이들이 비로소 한 공간에 머물게 되면서 누군가를 보살피게 되는 현장 – 이것이 결국 ‘물 좀 주소’에서 갈급해하며 찾고 있던 또 하나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식과 선주의 만남 속에서도 끊임없이 관철된다. ‘사는 게 무섭’고 ‘집이 제일 싫’은 한 여인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미혼모임을 알게 되면서, 창식은 단순한 채무자 곽선주를 넘어선 인간 곽선주 자체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이 둘 간에는 모종의 ‘책임의식’이나 ‘의무관계’가 없다. 그저 갈급한 가운데 서로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모습이 시종 관찰되는 것인데, 이를테면 선주가 아이를 채 맡기지 못하고 일을 나갔을 때 창식이 우연히 선주의 집을 방문했다가 대신 그녀의 ‘삼촌’이 되어서 아이를 돌보는 장면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사가족과도 같은 이들의 관계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 부분인 창식과 선주가 도로 상에서 짧은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다. 선주는 과거 창식이 아닌 다른 채권 추심원과 만나면서 상당액의 돈을 빌린 후 일방적으로 잠적을 한 적이 있다. 마트에서 창식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장을 보던 중 우연히도 그 채권 추심원을 다시 만나게 되고 이들 간에 짧은 추격전이 벌어진다. 선주가 재빠르게 도망간 후 창식은 그 추심원과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선주를 저주하는 그를 뒤로 두고 오히려 창식은 선주의 껍질이 아닌 속내를 이해하려 든다. 그녀가 그러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진정 그녀라는 인간 자체를 신뢰하며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아쉽게도 선주는 창식과의 연락을 끊게 된다. 창식은 많은 어려움 끝에 선주가 밤에도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그녀를 찾은 것인데, 당연히도 선주는 일방적으로 창식을 피하려고만 한다.
 

선주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지임을 강변하며 그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다그친다. 마치 창식이 자신에게 빌려준 돈(이 액수는 35만원이다)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라도 되는 냥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데, 창식이 그러한 이유로 자신에게 오지 않은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그를 거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거짓된 증오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창식은 자신이 그 이유 때문에 온 것이 아님을 말하며, 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 멀리 서 온 화물차에 선주의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채권과 채무의 관계도 남아있지 않은 한 남녀의 새로운 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의 이름도 공식적인 문서에 남아 있지 않은 채 (이들은 심지어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다만 서로의 실존 자체가 각자에게 가장 갈급한 관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선주는 21살이라는 그 스스로의 나이 때문에 이 대담한 관계가 가져다 줄 다음의 이야기를 스스로 끌고 나가지 못하며 결국 도피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생물시간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본 적 있다. 마른 그의 몸에 절실했던 물 한 방울 부어주는 자 없었고 우리는 모두 능숙했다. 그는 술에 취해 눈을 감고 이내 잠들었다. 우리는 그를 찌르고 또 찔렀다. 다시 예수의 일화로 돌아와 이제 우리 몸 위에 나릴 물 한 바가지를 상상해본다. 오늘도 구창식은 어느 집 창문을 넘어서 ‘계세요?’ (이 공식적인 名稱으로 점철된 호명행위여!)를 연창하고 있을 것이고, 선주는 크게 나아진 바 없는 자신의 형편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정한석 기자가 말한 일종의) ‘축제’는 사실 굉장히 비극적인 축제이다. 축제가 끝난 후 우리 모두 비릿한 일상을 좀 더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모든 축제가 사실 비극적이긴 하지만 이 비극은 좀 더 짙은 것만 같다. 한치도 나아지지 않은 삶들이 웃고 춤추며 영화의 말미를 노랗게 적시고 있을 때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끝없이 울리고 있지만 그 마지막 가사는 ‘아무리 기다려 봐도 아무리 기다려 봐도 비는 안 오네’ 였다.
 이 영화의 위로는 그래서 너무 쓰다. 선주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예수가 말한 그 물 한 바가지는 과연 공동체에 속한 익명의 모두에게 공평히 나려질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아름다운 선주를 화면에 담으며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평안한가?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목 마르다는 사실마저 감각할 수 없게 너무 말라버린 건 아닌가? 어려운 문제이다. 나희덕의 시 한 편으로 이 영화의 짧은 감상을 마치고자 한다.
 


마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은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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