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제안에 따라 5월에도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강좌를 꾸리게 됐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0754&gryear=2010&subjseq=0001). 어제 낮에 협의를 했는데, 바로 공지가 올라왔다. 이번엔 '현대철학' 두번째 편으로 데리다부터 가라타니 고진까지 다섯 명의 철학자에 대한 '입문' 강의다(철학자는 한겨레측에서 선정했고, 교재는 내가 골랐다). 첫번째 강의의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들 골랐다. 현대철학자들이 혼자 읽기 버겁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번 강의는 5월 6일부터 5주간 매주 목요일 저녁 7:30-9:30에 진행된다.   

1. 5월 6일_ 데리다와 해체철학 : 니콜라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 



2. 5월 13일_ 라캉의 정신분석학 : 지젝,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 



3. 5월 20일_ 푸코와 지식의 고고학 : 사라 밀즈,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앨피, 2008) 



4. 5월 27일_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 :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 



5. 6월 3일_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 b, 2010) 

 

10.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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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좋아요.. 4월엔 세계문학작품을 더 읽고 이강좌 부터 본격적으로 이 책들을 파야겠어요. 지속적으로 공부에 불을 지필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의미의 '뻬치카'이셨군요.^^

사과나무 2010-03-2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와 함께 하는 인문학 여행>이라....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겠습니다. 몸이 한국 땅에 있지않은 것이 아쉽군요. 올려주신 책들을 구해서 읽어야겠군요. 좋은 책소개와 서평 글들,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중앙게르마니아'의 이번 학기 일정을 소개한다(http://ikdk.net/germania.html). 이번주 3월 19일(금)부터 3주에 한번 꼴로 진행이 되는데, 세번째 순서가 슬라보예 지젝이고 나는 지난 겨울에 발표자로 초청을 받았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대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대신문(10. 02. 28) 2010 학내 콜로키움 프리뷰 : 중앙게르마니아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11회에 거쳐 공동으로 기획 시행해온 <중앙게르마니아>가 올해는 21세기 담론 지형에 대해 탐구한다. 류신 교수(문과대 독어독문학과)는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폐기한 진리들인 ‘역사’, ‘정치’, ‘윤리’ 등을 살아있는 현역 학자들의 책들로 재조명 하려고 한다” 고 말하였다.   

올해 첫번째 일정인 3월 19일엔 프랑스 학자인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 예정되어 있다. 『감성의 분할』은 부재로 “미학과 정치”를 내세우는데, 이는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얘기한 것과 유사하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현재 교육의 문제점을 교육이 아닌 정치로 삼았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술에서도 정치와 연관시켜서 설명한 책이 바로 감성의 분할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은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4월 9일엔 이탈리아의 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준비되어 있다. 『호모 사케르』는 『감성의 분할』과는 다르게 생명과 정치에 대하여 풀어내는 책이며 연세대 박진우 교수가 진행한다.   

그리고 4월 30일에는 동구권의 지성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로 선택되었다.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그리고 헤겔을 접목한 학자로서 책 제목의 ‘대의’는 마르크스를 지칭하며 한림대 이현우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5월 14일에는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로 정해졌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는 유현주 교수(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가 맡는다. 유현주 교수는 “볼츠는 문자매체와의 결별과 동시에 미디어믹스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볼츠의 글을 택한 이유는 볼츠가 현대시대를 매력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마지막 6월 4일에는 한스 요아스 『행위의 창조성』으로 막을 내린다. 『행위의 창조성』은 현 사회과학계의 합리주의적 행위이론과 진화론적 근대화 모델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담은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게르마니아는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낮아진 현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콜로키움이란 ‘함께 모여 이야기한다’는 라틴어 콜로키움의 어원적 의미에 따라 지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2000년도 당시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는 유럽 대학들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반면 국내대학에서는 심포지엄이나 학술대회로 일축되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참여가 낮아지고 결국 인문학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고 판단한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에서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를 필두로 지정 토론자 없이 참석자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담론 생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끝장 토론’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성공은 다른 학과와 다른 대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대 안에서는 영문과 사회학과 등에 학부생이 참여하는 정기 콜로키움이 생겼고, 서울대 독일어문화권 연구소도 2005년부터 ‘현대를 다시 읽는다’는 주제로 관악 블록세미나를 시작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목표는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인문학에 대해서 깊이 있고 즐겁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대학들에서 인문학이 살아 숨쉬는 풍토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10. 03. 15. 

 

P.S.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결과물은 책으로 묶인 것도 있다. <현대문화 이해의 키워드>(이학사, 2007)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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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1 00:13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강좌 강의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
 
 
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림대 교수로 소개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앞에 '연구'를 빼먹었네요...

hikrad 2010-03-1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한림대에 오신 줄 몰랐네요. 춘천에도 오시나요?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가끔 갑니다.^^

2010-03-1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18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도 참석가능한 거예요?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대학내 행사이지만 제한은 없는 걸로 알아요.^^

비로그인 2010-03-1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이아가씨 스토커아니야? 하시는 것 아니겠죠?

로쟈 2010-03-19 10:43   좋아요 0 | URL
흠, 강연 스토커는 환영합니다.^^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래는 지난주에 나갔어야 할 칼럼이지만 기한을 못 맞춘 탓에 한 주 늦춰졌다(그러니 이번주 원고로는 가장 빨리 내지 않았을까 싶다).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을 읽은 소감을 몇 마디 적었다.   

교수신문(10. 03. 15)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사상의 오빠’  

리영희 선생의 팔순을 기념한 책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을 읽고 지난 시대 ‘사상의 은사’를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어떤 은사였던가. 강준만 교수는 예전에 이렇게 적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의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역할은 주로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의 학생·청년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의 하나로 꼽히지만, 80년대 후반 학번인 나에겐 이미 ‘지나간’ 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리영희와 책읽기’를 다룬 천정환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대학가의 독서문화와 관련된다. 『강철서신』이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같은 젊은 세대의 책이 대학가를 주름잡던 시기여서 “리영희 같은 경험 많고 나이 든 스승을 경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여느 80년대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나 세대’였던 나도 학회나 세미나 자리에서 읽은 책은 『철학에세이』였고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게다가 ‘교조주의자’들이 많았던 80년대에 리영희는 ‘수정주의자’로 내비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안수찬 기자가 들려주는 1990년대 후반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1997년 겨울 한겨레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다. 누구는 허리를 세우고 잤고, 누구는 엎드려 잤다”는 고백이다. 시대가 다르다고, 최소한 달라졌다고 믿은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대학생 자유기고가 한윤형이 정확하게 짚어준 대로,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1970~80년대 대학생 비율은 청년층의 30%였고, 바로 그 대학생들이 청년문화와 정치의식을 주도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어떠한 사상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음의 소수가 필요”하다는 리영희의 ‘소수의 전위부대’론, 곧 ‘인텔리겐치아’론과 대학문화가 접목될 수 있는 토대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 진학률이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이라고 하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대학생이 더 이상 운동의 동력도, 사회의 전위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리영희와 청년문화의 대립항 자체가 상실됐고, 오늘날의 청년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윤형의 진단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도 돈만 굴리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에,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라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직한 토로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금 ‘사상의 은사’를 반추하게 된다. 

20대 에세이스트 김현진과의 대담에서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현실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 또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변증법이 그의 오랜 확신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와 ‘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리영희 선생의 설명대로, 의사와 같은 특권계급을 필수적으로 1년씩 시골로 보내 똥지게를 지게 한다든가 궂은일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알게 한 다음 다시 자신의 일터로 복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듯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지젝은 그 실패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마오쩌둥 자신이 인민에게는 반란의 권리가 있다고 독려하고 부추겼지만, 정작 백만 명의 노동자가 국가와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하면서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하자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실패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전적인 투항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리영희 선생이라면 노신을 인용해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 아닌 ‘사상의 오빠’(김현진)로서 그의 말과 글은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10. 03. 15.  

P.S. 올해는 대학진학률이 작년보다 약간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80%를 상회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계간지 봄호 특집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황해문화>의 '대졸자 주류 사회와 위기의 대학'인데, 바로 대학 진학률 80% 사회의 초상과 문제를 짚고 있다. 보다 본격적인 진단과 분석이 필요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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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강철서신><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방법론>의 공통점은 읽은 척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죠.강철서신은 책이라고 하기엔 좀...

로쟈 2010-03-16 23:24   좋아요 0 | URL
팸플릿인데, 겹낫표를 해서 책처럼 돼 버렸네요.^^;

comorin 2010-03-1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지나가는 공돌이입니다.^^; 전 90년대 후반 학번인데, 강준만 교수의 리영희 입문서를 읽은 뒤에 뒤늦게나마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논)를 읽었습니다. 사실 "전논"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획기적인 서적이었겠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대단하게 진실을 '폭로'하는 수준으로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고, 행간의 뜻을 살펴보면 정말 명불허전이란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사실 "리영희"가 예전보다 않읽히고, 찾지 않아졌으면 하는게 "리영희" 선생의 소망이라고 하는데, 과연 앞으로도 그게 진지하게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더 찾게 되지나 않을지 하고..

로쟈 2010-03-19 10:51   좋아요 0 | URL
명불허전이 맞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는 '과거의 지식인'이 아니구요...
 
16세기 장인들의 문화혁명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고 적었다. 세계체계론자인 월러스틴도 근대세계체계는 16세기(1450-1640년대)에 형성돼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원을 16세기로 잡는 것이다. 그런 것이 경제사에서 ‘16세기’가 갖는 의의로 보인다. 하지만, 문화사적으로 16세기는 보카치오나 라파엘로가 활동한 14-15세기의 르네상스와, 갈릴레오나 뉴턴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 사이의 계곡처럼 간주돼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테면 들러리다.   

대학과 성직자 VS 미술가와 장인
‘자력과 중력의 발견’을 다룬 <과학의 탄생>의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또 다른 역작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펴냄)을 통해서 이러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17세기를 준비하는 지식세계의 ‘지각변동’으로 16세기를 재평가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봉들이 대륙판들의 충돌로 인한 대규모 지각변동의 결과인 것처럼, 17세기 과학 천재들의 혁혁한 업적도 16세기 문화혁명이 밀어올린 지반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16세기가 과소평가돼왔다면, 그것은 16세기 문화혁명을 주도한 직인이나 기술자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절하와 무관하지 않다.   

중세 서유럽의 대학에서 육체노동은 멸시 대상이었으며, ‘기계적’이란 말은 ‘손으로 하는’ 혹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의 의미였다. ‘기계적 기예’는 자유인이 익혀야 할 학예를 뜻하는 ‘자유학예’와 대비됐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대비였으며, 라틴어를 사용하는 엘리트 지식인과 직인 사이의 대비였다. 저자는 중세의 지식이 특정한 구성원들에게만 전수되었던 데 반해서 16세기는 이러한 비밀들이 벗겨지기 시작한 시대로 지목한다. 대학과 성직자가 독점하던 문자문화에 대해 선진적인 미술가나 장인이 도전장이 내민 형국이었고, 이로써 지식의 분단 상황은 와해돼간다.  

저자가 16세기 문화혁명의 지표로 내세우는 것은 대학과 인연이 없던 직인, 예술가, 외과의들이 속어(각국의 언어)로 과학서와 기술서를 쓰기 시작한 점이다. 알다시피 로마제국의 유산인 라틴어는 통치를 위한 공용어였고 문명어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럽의 권력자들에겐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수단이었다. 민중의 생활과는 단절된 소수 지적 엘리트의 전유물로서 라틴어는 비록 지역 간 언어의 장벽을 없애긴 했지만, 소수 엘리트와 민중의 사이에는 높은 장벽을 쌓았다. 그럼으로써 민중을 학문세계로부터 배제했다.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할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 육체노동과 잡일에 종사했을 정도다. 라틴어 구사 능력의 유무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던 셈이다(그것은 오늘날 ‘영어 시대’에도 얼추 들어맞지 않을까).   

'과학혁명'이 누락한 것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도 중세 스콜라학에 이의를 제기한 건 맞지만 학문 세계의 배타성까지 타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속어는 물론이고 속어가 섞인 라틴어조차도 저급한 것으로 경멸했다. 자연에 대한 비밀도 민중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계급이 생각한 ‘도덕적 책무’였다. 이러한 사정은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에도 적용되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지동설을 그냥 주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천문대화>를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로 저술함으로써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썼을 때에도 파문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독일어로 번역․요약해 인쇄하자 그의 주장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의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이런 것이 16세기 문화혁명에 수반된 언어혁명의 양상이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국어’는 국민국가 형성으로까지 이어진다.  

16세기 문화혁명의 성과는 17세기에 들어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계승하게 된다지만, 그사이의 ‘단절’도 간과하긴 어렵다. 지식과 과학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란 질문을 과학혁명의 ‘승리의 진군’은 누락한 듯싶어서다.   

10. 03. 15.

 

P.S. 분량상 발췌독을 했지만 <16세기 문화혁명>은 서평거리로 읽은 책들 가운데 발군이다. 힐베르크의 역작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래서 그의 전작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2005)도 긴급하게 구했다. 제2부의 한 장 제목이 '과학혁명의 여명 - 16세기 문화혁명과 자력의 이해'다. <16세기 문화혁명>은 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후속작인 셈. 두 권은 과학사와 문화사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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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rin 2010-03-19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모토씨의 저작이 또 나왔군요. 전공투의 힘이 느껴집니다...

로쟈 2010-03-19 10:46   좋아요 0 | URL
대단한 역량의 저자인 건 맞습니다...

괄호밖 2010-12-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을 읽고 접속하게 되었고, 지금껏 이 서재의 글과 댓글을 탐독하며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매일 늘어만 갑니다. 읽을 책이 늘지만 오히려 기분은 짜릿하네요. 고맙습니다.

P.S. 잘못된 부분이 있기에 씁니다.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할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를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로

 

최근 한국인 유학생 피습으로 다시금 관심사로 떠오른 러시아의 스킨헤드와 인종테러를 진단하는 기고기사를 옮겨놓는다. 2004년 러시아 체류시에도 잔뜩 긴장하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실제로 공원 등지에서 가죽옷을 입은 스킨헤드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음울한 이면인데, 혹 여행 계획이 있으신 분이라면 미리 주의하는 게 좋겠다.    

외국인 혐오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에서 지난 7일(현지시간) 한국인 유학생이 또 피습을 당해 대책이 시급하다. 주러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7일 오후 5시쯤 모스크바시 유고자파드나야의 상가 건물 앞에서 모스크바 국립 영화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심모(29)씨가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목 부위를 찔려 한때 중태에 빠졌다. 심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4시간여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다. 외교 당국자는 심씨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전했다. 6년 전 모스크바에 유학 간 심씨는 노래방에서 나오다 변을 당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심씨는 동료들과 헤어져 걸어가던 중 흰 가면을 쓴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으며, 이 괴한은 곧바로 달아났다. 이 지역은 지난주에도 외국인 한 명이 현지 청년들에게 살해되는 등 외국인 대상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현지 경찰은 범행수법으로 미뤄 극우민족주의자인 스킨헤드의 소행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 갔던 한국인 대학생 강모(22)씨가 지난달 15일 극동 알타이주 바르나울시에서 현지 청년 3명에게 흉기 등으로 집단 폭행을 당해 숨졌다.(세계일보 3월 8일자 기사)

 

한겨레(10. 03. 15) [기고] 나치와 러시아 순혈주의의 만남

짧은 머리에 가죽옷, 그리고 그 가죽옷에 달려 있는 반짝이는 금속물체들…. 이들이 스킨헤드들이다.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유색인종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고 다닐까.

히틀러의 탄생일인 4월20일은 스킨헤드들에게 가장 큰 축제의 날이다. 러시아의 스킨헤드들은 이날을 기념하면서 순수한 ‘루스키’(러시아) 혈통을 강조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테러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얼마 전 있었던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잇따른 인종테러도 이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스킨헤드는 1960년대 후반 패션·음악·생활에 영향을 받은 영국 노동자들의 하부문화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스킨헤드의 하부문화에 정치성향과 인종적 태도가 혼합되면서 현재의 극우 인종차별주의로 발전하였다. 러시아의 스킨헤드는 1980년 중반 이후부터 러시아 청년 하부문화에서 발생하여 나치즘과 연결된 나치스킨(Nazi Skinheads)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념적 성향이 무질서하게 혼합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스킨헤드는 이념에 의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무질서한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극단주의 그룹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러시아 스킨헤드의 특징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소비에트 체제 붕괴 이후 경제난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소외계층 청년들의 불만이 누적되었으나 이런 불만을 분출할 만한 사회적 통로가 없었다. 그 결과는 ‘희생양’ 힘없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적인 태도였다.

둘째, 러시아의 극우성향을 지닌 정치단체들이 이런 불만 소외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이들에게 치기 어린 민족감정을 불어넣어 주었다.

셋째, 2000년대 이후 러시아의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졌던 소외계층 청년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러시아 내 3D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극단적 반감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에서 자행되는 인종테러는 해마다 2만건이 넘으며, 최근 5년 사이에는 매년 5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살해당했다. 지난해에는 희생자가 갑절인 1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소연방 구성 공화국이었던 중앙아시아 출신 노동자들과 캅카스인들이다. 이들은 러시아공화국에서 잡일과 3D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서 약 1000만명이 일하고 있다. 러시아 스킨헤드는 이들 때문에 자신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빈곤해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인들이 마다하는 일자리를 이들 외국 노동자들이 차지하였고 현재 러시아 경제에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이은 인종테러에 대하여 러시아 정부도 2006년 7월 극단주의 단체 척결에 대한 연방법을 채택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가뜩이나 사회와 정부에 불만이 가득한 소외 청년세력의 극단적 인종주의가 반정부 성향의 행동으로 돌변할까 매우 조심스런 입장이다.

오는 5월9일은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기념일이다. 러시아의 선열들이 나치 독일과 싸워 2000만 러시아인들의 고귀한 피의 값으로 조국을 지켜낸 날이다. 그러한 순국선열의 무덤 위에서 나치의 깃발 아래 러시아의 순혈주의를 주창하는 현재의 러시아 젊은이들을 과연 현재를 사는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김선래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10. 03. 14.  

P.S. 핵심은 "사회와 정부에 불만이 가득한 소외 청년세력"이 반정부 성향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극단적 인종주의'로 유도되게끔 방치한다는 것. 인종주의 포퓰리즘이 갖는 잠재성과 한계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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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3-15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공부할 때도 그곳이 요주의 위험구역(!)이었나요?

로쟈 2010-03-15 09:05   좋아요 0 | URL
공연을 보러갈 때 공원 같은 데서 마주칠 때가 있었어요. 적당히 피해가야했죠.^^;

Kitty 2010-03-15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이은 유학생 피습 뉴스를 보고 깜짝놀랐어요.
여름쯤에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전면 수정 들어가야 할 것 같네요 ㅠㅠ

로쟈 2010-03-15 09:07   좋아요 0 | URL
관광객은 대체로 건드리지 않는 게 나름 불문율인데(단체로 다니기도 하고), 그래도 조심은 해야합니다. 혼자 여행하는 건 물론 위험하고요...

카스피 2010-03-15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팽창주의는 예로부터 인접 국가에는 커다란 공포였지요.러시아 청년들의 인종 차별은 혹 예전부터 이런 전통에 기인한것이 아닐까요?

로쟈 2010-03-15 09:09   좋아요 0 | URL
팽창주의 전통이야 러시아만의 것은 아닌데, 스킨헤드는 90년대 이후 현상입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 속에서 생겨난 일종의 청년층 '하위문화'인데, 러시아 정치권이 악용하면서 지금은 통제가 어렵게 된 걸로 압니다...

자꾸때리다 2010-03-15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라브족을 천시한 히틀러를 추종하는 민족주의 슬라브족이라... 이건 뭐 뇌가 없는건지...아님 뇌의 고랑과 이랑이 머리통처럼 만질만질한 건지..

로쟈 2010-03-15 23:03   좋아요 0 | URL
원래 논리적으론 이해가 안되는 현상이죠...

2010-03-15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5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5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5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란드나 러시아는 사회주의 정권 시절에도 권력자들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은근히 이용해 먹었지요.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요즘 극우주의자들이 날뛰고 있으니 게르만 스킨헤드와 슬라브 스킨헤드가 육박전이라도 벌이면 살벌하겠네요.

편의상 나치라고 부르고 있지만 슬라브족이 나치사상에 공명한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로쟈 2010-03-16 23:33   좋아요 0 | URL
슬라브족이 아니라 러시아 스킨헤드들이죠. 실제로 히틀러를 숭배한답니다. 숭배의 포즈인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