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이미 지나간 '책의 날'에 무얼 했던가 돌이켜보니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러시아 현대비평이론>(민음사, 1999)을 구한 게 전부다. 책은 대학원 시절인 1993년에 초판 1쇄가 나왔고(그땐 좀 비싼 책이었다) 구입한 건 2쇄다. 현재 절판된 걸로 아는데, 우연히 눈에 띄기에 '10년전 가격'을 빌미로 손에 넣은 것. 그렇게 별일없이 지나간 '책의 날'이건만, 알라딘에서 뒷북 이벤트를 한다고 하니 간단히 답한다(10문은 어제 오후에 한번 훑어봤다). 기분전환이 되려나 모르겠다...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2005)과 <순교일기>(두레, 1997)의 저자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그가 찍은 '딥포커스' 장면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아니면 서로 입 다물고 묵상하고 있어도 좋겠다. 그의 '현전'이면 그걸로 족하다.  

  

혹은 키에슬로프스키라도 좋겠는데, 국내엔 소개된 책이 없어서 유감이다. 생존 감독 중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한데 그가 '저자'이기도 한지는 모르겠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이반 데니소비치이지만, 따져보니 이미 경험해본 적이 있다. 대학 2학년 전방입소 교육을 받을 때 나를 '슈호프'라고 부른 친구도 있었으니까. 한데, 이건 '살고 싶은 삶'이라고 하긴 어렵겠다('체험 삶의 현장'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이왕 '체험'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센 걸 경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 같은 벌레-되기의 체험.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낚인다'는 게 별로 소득이 없었다는 뜻인가? 보통은 그럴 기미가 있으면 다 읽지 않기 때문에 '입질'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기대와 다른 책'이라고 하면, 최근에 읽은 작품으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들 수 있다. 분명 20대에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이지만 40대에 다시 읽으니 생각만큼의 감흥이 일지 않았다. 대신에 <사양>이 오히려 더 나았다. 그러니 다시 읽으면서 <인간실격>에 '낚이고' 대신 <사양>을 '낚았다'고 해야 할까...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표지야 흉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라는 식이니까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책은 없다. 단, 지난 겨울에 체호프의 단편집 표지 얘기를 잠시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아래 같은 표지라면 대만족이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는 있지만 소장하고픈 책으론 앨프리드 크로스비의 <생태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7)가 있다. 이미 읽은 책이고 또 소장도 하고 있지만, 괜히 절판된 게 아쉬운 책으론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이 있고, 출판 편집자들을 만날 때마다 바람을 넣고 있는 책으론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자서전 <러시아 영혼에 대한 성찰>이 있다(영역본도 나와 있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좋은 책'일 경우엔 '옥에 티'라고 생각하지만 '허접한 책'일 경우엔 저자나 역자를 기억해둔다. 페이퍼까지 쓰지 않는다면 오래 기억을 못하는 게 탈이군...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대개는 강의용 책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론 <지하생활자의 수기>(혹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같은 걸 들 수 있을까? 매 학기마다 다시 읽거나 최소한 읽는 흉내를 낸다. 새로 나온 번역본들과 대조해서 읽는 건 올해의 과제 중 하나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꼬마 소녀가 주인공인 <마틸다> 같은 책을 아이가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혼자 생각일 듯싶다. 게다가 <마틸다>는 내가 어렸을 때 읽은 책이 아니군.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이라는 표현이 좀 간지럽긴 한데, 내겐 방정환의 <사랑의 선물> 같은 책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강감찬>이나 <을지문덕> 같은 전기들. 하지만 딸아이가 좋아하는 전기는 장군들의 전기가 아니라 이태영 변호사의 전기다. 각자가 읽는 수밖에...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아마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보다도 더 기니까. 이번 학기에 읽을 책으로는 <악령>이 가장 길다.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특별히 편애하는 출판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때 그때 좋은 책, 읽고 싶은 책을 내는 출판사가 그주의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다. 신뢰는 그런 호감이 쌓여가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겠다. 이번주엔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 그리고 어제 가장 탐나는 책이었던 <만주족의 청제국>(푸른역사, 2009) 등이 관심도서다. 엊그제부턴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부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관련서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런 걸 제때 내주는 출판사가 독자로선 좋은 출판사다... 

 

10. 04. 2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4-28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 2010-04-2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랑콜리 미학표지 참이쁘네요 ㅎㅎ

로쟈 2010-05-01 11:15   좋아요 0 | URL
요즘 어지간한 책들은 다 표지값을 합니다.^^
 

교수신문에서 번역 문제에 대한 황현산 고려대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현 한국번역비평학회장이기도 한 황교수는 번역 행위의 다층적 의의와 번역 비평/평가의 필요성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안 그래도 개인적으론 번역의 바다에 '잠수'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눈길이 가는 칼럼이다.    

교수신문(10. 04. 26) 번역과 학문적 위선  

극렬한 찬성과 극렬한 반대는 많아도 비평은 없는 것이 우리 사회라는 말이 있다. 이 비평부재의 현상은 번역이 관련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몇 년 전에 외국문학을 전공한 어느 교수가 한 유명 번역가의 번역문에 나타나는 허점들을 격렬한 어조로 지적해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내 친구이기도 한 번역가는 그 지적에 수긍하면서도 자신이 소홀한 번역가를 넘어서서 ‘나쁜 놈’으로까지 매도된 데에 깊은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서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의 풍토이다.  

번역자는 신문·잡지의 단평을 벗어나서 자기 번역을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교수는 자신이 발견한 중요한 오류와 그 처방을 공개적으로 개진할 기회가 없었다. 말해야 하나 말하지 못한 말들은 상처가 되고, 그 상처에서 어느 날 화산이 폭발하듯 솟아나온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상처는 늘 비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평 없는 사회의 분노에서 온다.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창립된 것은 4년 전이다. 그 동안 학회는 월례발표회와 춘하추동의 학술발표회를 통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언어로 실현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인 번역은 그 텍스트에 담긴 진리성과 미적 효과를 다시 검토하는 매우 정교한 절차라는 점이 자주 논의 됐다. 인간사회에 어떤 절대적 언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언어와 관련해 모든 언어는 하나의 방언일 터인데 한 방언의 역량을 토대 삼아 그 사용자들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 안에서 성립된 텍스트를 다른 방언의 역량을 토대로 다른 주관성 안에서 다시 재현하는 번역 작업은 그 텍스트를 다른 문화에 비춰 객관화하는 한 방편이 된다. 이 객관화의 시련은 그 텍스트를 최초에 성립시킨 언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번역으로 재현하는 언어에도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라면 어떤 텍스트건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어휘적으로건 통사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미학적으로건 우리말에 본래 내장된 힘을 밑바닥까지 동원해야 하며 그 텍스트를 둘러싼 문화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역사와 풍속과 주관성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두 언어에서 말과 사물의, 생각과 표현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때이다. 따라서 진지한 번역자가 자기 작업에서 현대 인문학의 크고 작은 주제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의 번역은 외국어 텍스트에 대한 우리말 텍스트를 마련하는 일에서보다도 언어에 미치는 이 번역 효과에서 더 중요하다. 번역비평은 궁극적으로 이 번역효과를 토론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번역평가의 이론과 방법은 학술 테스트나 문학 텍스트보다도 외교문서, 계약서, 제품의 매뉴얼 등을 대상으로 하는 실용번역에서 먼저 정립됐다. 이런 문서의 번역에는 한 국가나 기업의 운명, 때로는 개인의 생사가 걸려 있는 만큼, 그 평가도 오류의 지적에 치중하게 돼 있는 것이 당연하다. 문학 텍스트라 하더라도 오류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지만 현재 주로 사용하는 평가방법 곧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말로 환원되는 평가방법은 의미이해의 층위, 문체의 적합성, 낱말의 경제적 효과, 언어역량의 개발 등 숱한 문제를 섬세하게 다룰 수 없는 탓에 시비를 토론으로 발전시키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평가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 이를테면 번역시학이나 비교문체론 같은 좋은 비평을 촉발시킬 수 있는 번역이 드물다는 점도 말해야 한다. 질 높은 번역은 질 높은 비평의 토대가 된다.

늘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번역과 번역가의 낮은 위상도 문제가 된다. 정신적인 가치까지도 시장이 평가하는 사회에서 전문번역가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투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이 안정된 대학교수들에게도 모든 업적이 양으로 평가되는 평가 체제에서는 정교한 번역을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연구번역이 소논문 한 편의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정황은 일종의 학문적 위선과 연결된다. 우리말 사전에는 번역서에만 나오거나 그 쓰임이 번역에서 특별한 어휘들이 등재돼 있지만 번역서의 문장이 용례로 소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번역비평에 관심을 지닌 사람들은 학문의 이런 위선과도 싸운다.(황현산 고려대·불어불문학과) 

10. 04. 27.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4-2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과 사전편찬을 무시하는 나라는 문화대국이 될 수 없습니다.

로쟈 2010-04-28 20:23   좋아요 0 | URL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부터 둘러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말에 공감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29 0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지 2010-04-3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국역본 읽을 만한가요?...

로쟈 2010-05-01 09:48   좋아요 0 | URL
2종의 국역본을 같이 읽으시면 될 듯합니다. 국내에선 최고 권위자들의 번역입니다...

BonBon 2010-05-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번역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내내 고심하다가 오후에 두 시간 동안 작성해서 보낸 원고다. 심신이 쇠약한 상태라 천안함 사고같이 덩치 큰 사건은 다루지 못하고('인간 어뢰'까지 등장하면 소설의 경우엔 진지하게 읽지 말라는 신호이건만!) 연이어 터지고 있는 지자체 단체장들의 비리 사건에 대한 씁쓸함만을 적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뭔가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10. 04. 27) [문화와 세상]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평소 별로 말이 없는 성격임에도 자주 들먹이던 얘기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홍어(洪魚)와 광어(廣魚) 얘기다. 한자 이름에서 보이듯이 둘 다 바다 밑바닥 쪽에 사는 ‘납작한’ 물고기다. 그 동네에서 사는 데는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유리하기에 그런 모양새로 진화했다. 하지만 닮은 점 못지않은 것이 차이점이다. 둘은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온 방식이 전혀 다르다.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은 모양을 갖게 되었고 좌우가 대칭이다. 하지만 가자미목에 속하는 광어(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어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겠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론 외눈박이를 만드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됐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연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광어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기이하게 뒤틀린 두개골은 이 임기응변적 적응방식이 추가적으로 지불한 대가이다. 물론 광어에게도 홍어와 같은 방식으로 납작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광어의 조상이 그와 같은 진화 경로를 따랐다면, 단기적으로는 한쪽으로 눕는 종과의 경쟁에서 뒤졌을 것이다. 우리의 넙치는 나름대로 다급했던 상황에 적응한 셈이다. 삶의 품위나 따질 여가가 없었다. 게다가 이젠 두개골마저 뒤틀려 버렸으니 무얼 차근차근 제대로 생각할 만한 여건도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시인의 말대로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오규원)일까?

홍어와 광어 얘기를 자주 들먹인 건 그것이 압축정리판 ‘세상의 이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란 왜 저들은 그 모양이고 우리는 이 모양일까를 설명해주는 것일 테니까. 그런 세상의 이치를 새삼 떠올린 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단체장들의 갖가지 비리가 터지고 있어서다. 얼마 전 여주군수가 지역 국회의원에게 현금 2억원을 건네려다 현장에서 체포되더니, 며칠 전 당진군수는 건설업자로부터 아파트와 별장을 뇌물로 받은 혐의가 포착되자 위조여권을 이용해 해외로 도피하려다 적발됐다. 활극이 따로 없지만, 그간 ‘흔하게’ 벌어진 일이어서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렇게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함을 자아낸다. 민선 4기 기초단체장 중 절반 가까운 42%가 비리로 기소됐음에도 놀랍지 않다니!

지방자치제란 지역 주민 스스로 선출한 기관을 통하여 지방의 정치와 행정을 맡게 함으로써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그건 ‘홍어형’의 이상이고, 단기간에 제도의 안착을 기대한 우리의 현실은 ‘광어형’에 가깝지 않나 싶다. 유권자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기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한쪽으로 드러누워 한몫 잡으려는 인사들이 판을 치는 한 우리 정치문화에 미래는 없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10. 04. 26.  

P.S. 선거 시즌을 앞두고 읽어볼 만한 민주주의 이론서로 최근에 나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와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을 들고 싶다. 전자는 조르조 아감벤부터 슬라보예 지젝까지 여덟 명의 쟁쟁한 철학자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펴보인다. 소개는 이렇다.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이 부고 소식에 띄우는 조서이자, 과연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고 따져보자는 문제적 발제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글을 기고한 여덟 명의 비판적 지성들, 오늘날 세계 지성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사유의 거장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데이비드 헬드의 책은 두툼한 교재형 책이다. '민주적 자치'에 대해서도 한 장이 할애돼 있어서 참고해볼 만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4-26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6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7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7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8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4-28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데이비드 헬드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군요. 작년 정치사회학 시간에 원서로 공부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한 권 구입해야 겠습니다.

로쟈 2010-04-28 20:20   좋아요 0 | URL
역시나 교재로 많이 쓰이는군요...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학교에 나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아무도 없는 강사실에 앉아 있다. 무심코 즐찾의 알라딘을 클릭했더니 '정상화'돼 있다(아직 100%는 아닌 듯싶다). 오후부터인 것 같다. 내일 아침까지는 '휴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에도 '근무'하는 기분이다. 학교처럼 알라딘 마을도 아주 고적하다. 어제 대형서점에 잠깐 들렀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다가("이번주엔 눈에 띄는 책이 없네"라고 중얼거렸다) 언론리뷰를 보고서야 챙긴 책 두 권에 대한 소개기사만 옮겨놓고 다시금 '오프라인'으로 넘어가야겠다.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예고된 붕괴>(궁리, 2010)와 에릭 윌슨의 <멜랑콜리 즐기기>(세종서적,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서울신문(10. 04. 24) 전쟁·경제위기·총·범죄… 붕괴, 미국도 소련처럼?

미국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긍정, 부정 어느 방향이든 한반도의 상황과 운명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들어선 뒤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지만 미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 뒤주에 머물지 않고 철저히 현실에 기반해 미국을 파헤치는 목소리까지 가세했다. 과연 ‘미국 없는 세상’, ‘포스트 미국의 시대’는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급진적 전망일 뿐인가. 아니면 냉엄한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인가.

1991년 소련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의 충격, 각 민족국가의 독립 요구 등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함께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세계사적인 충격이었다. 오로지 소련만 쳐다보고 의지했던 범 소련권 국가들이 겪은 경제적 혼란, 대량 실업, 정치적 위기 등은 필연적 후과(後果)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상황은? 만약에 미국이 소련처럼 붕괴한다면,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미국 이후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절박하게 미국에 매달리게 되곤 한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최근 두 차례의 이라크전쟁의 패배 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등 금융자본 전횡의 후폭풍 등은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보여준다. 



‘예고된 붕괴’(드미트리 오를로프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는 19세기 이후 최대 제국, 미국이 구 소련과 비슷한 양상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학술적 측면의 접근이 아닌, 현장 중심의 근거들을 갖고 실증적 접근을 통해 이를 예견한다.

1962년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스스로 “전문가도, 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목격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냉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인터넷 보안 등까지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로 활동한, 드문 이력을 갖고 있다. 이는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를 직접 목격했음은 물론 미국 자본주의 현장을 구석구석 체험했음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파산하기 전 소련과 현재의 미국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소련이 외채에 시달렸던 만큼, 미국 역시 재정 적자와 달러 가치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 뒤에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국방비 지출을 늘려 왔다. 이는 고스란히 지나친 석유 의존도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석유 부족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던 소련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의 상황이 더욱 우울한 근거로 저자는 “세계 최고의 범죄율과 민간인에게 풀린 수억 자루의 총”을 든다.

책 뒷부분에서는 아예 붕괴를 기정사실화한 뒤 각자의 대처법을 제시한다. 3단계로 나뉜 일종의 ‘생존 가이드라인’이다.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공동체의 힘을 믿고 따르며(완화), 붕괴 이후 석기시대에 준한 세상에 맞춰 불편하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며(적응),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기회)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쉽게 읽히도록 풀어냈다.(박록삼기자)   

 

한국일보(10. 04. 24) 입만 열면 행복 행복… 우울이 창조의 원천인줄 모르시나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에 어디를 가나 보는 것은 가면을 쓴 모습이다. 행복한 얼굴이라는 분칠… 탈출을 감행한 날 욕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다소 슬프고 음울한 표정이다. 당연하다. 행복 나라에서 탈출한 결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 아름다움이 스민 우리의 얼굴임을 깨닫는다."(121쪽)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묻는 책은 많다.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릴게요, 친절한 안내서도 넘친다. 육탄전을 치르듯 행복을 갈구하지만 좀체 그것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일 터. 이 '행복 쟁탈전'의 패잔병들은 스스로를 우울, 다른 말로 하면 멜랑콜리(melancholy)의 포로로 여기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 책_원 제목이 'Against Happiness'다_은 이렇게 선언한다. "멜랑콜리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멘토다!" 



미국 웨이크포레스트대 교수인 저자는 문학과 심리학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영문학자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잘 짜인 행복 방정식에 맞춰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기성품처럼 표준화된 이런 행복을 욕망하는 것은 진솔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에 깃든 세상과 우주의 두 가지 상반된 요소_고통 혹은 체념이라는 극, 짜릿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다른 극_에 한쪽 눈을 감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오히려 저자는 멜랑콜리가 삶의 필수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원천, 모든 창조와 발명을 가능케 한 귀중한 영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책을 쓴 배경을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우울증 따위는 대패로 밀어버리듯 하며, 그 결과 인류의 창조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멜랑콜리마저도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된" 현실이라고 밝힌다. 다소 격정적인 그의 토로를 그대로 옮겨보자.

"멜랑콜리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떨림 혹은 흔들림에 다름아닌데, 그것이 완전히 멸종된다면 인간이 추구해온 장대한 소망이라는 탑은 어느 날 갑자기 휘청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교차하는 인간 삶의 교향곡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리지 않을까? … 이런 움직임은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학적 위기, 핵무기 확산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 못지않게 위험하다."(12쪽)

 

저자는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천재들의 사연을 논거로 동원한다. 예컨대 존 레넌. 그는 전쟁,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성장했다. 상심과 번민에 지친 영혼이었기에, 그의 음악은 깊은 울림을 지닐 수 있었다는 얘기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 낭만피 시인 존 키츠, 심리학자 카를 융 등도 공통적으로 '인공적인 행복'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독과 은둔을 택했다. 저자는 상실감과 슬픔의 정서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숨쉬는 삶의 무대라고 거듭해 말한다. 이 책은 그 무대, 곧 창조적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의 초대인 셈이다.(유상호기자)  

10. 04. 24.  

P.S. <예고된 붕괴>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과 '옮긴이의 말'만 읽어보더라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오를로프는 '석유 고갈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로 소개되는데, 그가 '미국 붕괴' 전망의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는 것도 석유 고갈 문제다. 원유의 급격한 고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이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인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 힘들 거라는 점. 세계 5위의 원유 수입국이면서(한국은 일본과 독일보다도 자원 낭비가 심한 나라라고 한다), '미국을 가장 닮은 나라'(강준만)라는 한국도 이러한 전망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석유 고갈 문제라고 하니까 석유정점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소개된 리처드 하인버그의 책도 참고해볼 만하다. <파티는 끝났다>(시공사, 2006)과 <미래에서 온 편지>(부키, 2010)가 번역돼 있다.   

한편, 멜랑콜리와 관련해서는 김동규의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도 신간이다.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랑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예술과 철학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고. <글루미 선데이>에 대한 글도 말미에는 붙어 있는데, 글루미한 날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는 영화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nathema 2010-04-24 15:06   좋아요 0 | URL
존 레논은 마약과 환각제 상습 복용자였고, 오컬트에 깊이 빠졌었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했었던 비정상적인 인간이었지요.

로쟈 2010-04-24 21:1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분보단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mediocris 2010-04-25 00:07   좋아요 0 | URL
어떤 자의 입 방정 때문에 자살한 사람의 죽음에 대고 자살세를 거론하여 비아냥거렸지만 정작 그 어떤 자의 자살에는 침묵한 미학자에게 많은 책을 읽은 아까운 자긍심을 봉헌하는 영혼보다는 서울을 봉헌한다는 자의 영혼이 그나마 때가 덜 묻지 않았을까? 세습 왕조의 봉헌 의식은 외면한 채 줄기차게 한쪽만 비판하는 균형 감각으로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anathema 2010-04-25 00:38   좋아요 0 | URL
아니죠. 둘 다 비정상이라고 해야죠.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

Joule 2010-04-25 14:03   좋아요 0 | URL
명박아에게 존 레논 같다고 하면 그닥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은데, 존 레논에게 명박아 같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요.

픽션들 2010-04-25 18:11   좋아요 0 | URL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말에, 한 인간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이 일지 않나요?
행복찾기의 '게임'에서 길을 잃고 개인의 순수노동을 권력에 헌납하며 살아가는 것이 덜 때묻은 것일까요?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단지 마약이나 과도한 자기애 등과 같은 것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위대한 영화감독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쑤셔넣어야 하니까요. 거기다가 베르베르나 보통 같은 작가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당연히 들어갈 겁니다.

로쟈 2010-04-26 20:12   좋아요 0 | URL
존 레논과 함께 천국을 상상해볼 순 있지만 MB와는 도저히...
 
체호프와 바냐 아저씨의 해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

안톤 체호프 원작의 <숲귀신>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여유가 없다 보니 관람기회는 놓쳤는데, 그래도 리뷰는 챙겨놓는다. 드디어 내달초에 찾아오는 러시아 말리극단의 <바냐 아저씨>공연 안내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지만 도진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뉴스컬처(10. 04. 19) 121년 만에 빛을 본 연극 [숲귀신]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숨겨진 명작 [숲귀신](연출 전훈)이 무대화됐다. 국내 초연된 이번 공연은 1889년 당시와 같이 소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며, 전훈 연출은 노컷, 노어레인지로 연출해 작품의 초기 모습 그대로를 무대에서 보여줬다.

연극 [숲귀신]은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바냐 아저씨’의 전신(前身)으로, 체호프가 발표한 세 번째 장막극이다. 초연 당시 참담한 실패를 기록했는데, 공연은 물론 희곡 자체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다. 이에 체호프는 죽기 전까지 [숲귀신]의 출판 및 공연을 불허하고 작품을 봉인했다.

121년 만에 봉인이 해제돼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 중인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졌다. 퇴임한 교수 세레브랴코프, 그의 젊은 둘째 아냐 옐레나 그리고 딸 소냐가 두 작품에서 똑같이 등장한다. 옐레나를 짝사랑하는 바냐는 본디 이고르였으며, 숲 속에서 살던 의사 아스토르프는 ‘숲귀신’이라는 별명으로 의사 일보다는 숲을 지키는 일에 더 열성적인 흐루쇼프였다.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3시간 동안 공연되는 희곡 또한 방대하다. 무대는 나무와 식탁, 창틀, 의자 등을 이용해 대저택의 정원과 식당, 응접실 그리고 숲 속 물레방앗간을 보여준다. 1막이 2명으로 시작해 2명으로 끝나는 등 인물 등장과 구성이 구조적이며, 전개는 다소 산만한 듯 나열된다.

그러나 [숲귀신]은 ‘바냐 아저씨’보단 한결 가볍다.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키스를 퍼붓는다. 특히, 4막만 봐서는 체호프의 작품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쉽게 말해 ‘바냐 아저씨’의 로맨틱코미디 버전이자 100년 뒤 시대를 내다본 트랜디 드라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숲귀신]의 주인공은 옐레나를 사랑하는 이고르가 아닌 흐루쇼프다. 그는 실리를 위해 숲을 벌목하는 것을 반대하며, 후세를 위해 숲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숲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는 거침없지만 소냐를 향한 사랑의 마음 앞에서는 소극적이고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소냐와 흐루쇼프의 엇갈리는 마음은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숲귀신]이 그 옛날 혹평을 받았고, ‘바냐 아저씨’보다 가벼워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체호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함없다. 이고르의 권총자살로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시작의 발을 내디딘다. 떠나지 않았던 옐레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이던 교수는 “일을 합시다”라고 말한다. 좌절하더라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바냐 아저씨’의 주제가 약하게 나마 드러난다.

사실 안톤 체호프는 초기 희곡에서 큰 난항을 겪었는데, 희곡 자체의 문제 말고도 그에게는 작품을 이해하는 연출과 배우가 없었다. 당시 [숲귀신]은 “훌륭하게 각색된 소설이지 드라마는 아니다”라는 혹평을 들었을 정도. 이후 다행히도 체호프는 그의 작품 세계를 잘 이해해준 연출가 단첸코와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체호프는 혹평으로 인해 ‘숲귀신’을 봉인시켰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개작에 착수, 10년 뒤 ‘바냐 아저씨’를 발표했다. ‘바냐 아저씨’는 1899년 10월 스타니슬랍스키 연출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는 5월, 연극 ‘바냐 아저씨’가 세계적 명성의 레프 도진 연출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이 스타니슬랍스키의 어법을 바탕으로 공연할 예정이다(5/5~5/8, LG아트센터). 전신인 [숲귀신]과 개작 후 명작이 된 ‘바냐 아저씨’를 비교해 볼 만하겠다.(양훼영기자)    

한국일보(10. 04. 21) 3시간 짜리 대하연극 "이것이 인생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말리 극단은 무대를 삶의 축도로 만든다. 2001년의 '가우데아무스', 2006년의 '형제 자매들' 등 두 차례 내한 공연에서 그들은 무대가 곧 삶의 현장을 그대로 모사한 것일 수도 있음을 실증했다. 객석에게는 무대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들의 무대는 뚜렷한 방향을 갖고 생생한 삶을 그렸다. '대하(大河)'라는 말이 연극 무대에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웅변했다.

그들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작은 실험극단으로 출발했던 이 극단을 23년의 세월과 함께 세계적 극단으로 키워낸 연출가 레프 도진(66)의 이번 무대도 상연 시간이 3시간여다. '전원 생활의 정경'이란 원래 희곡의 부제대로 시골을 배경으로 19세기 말 러시아의 세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대하가 흐르듯 유장하게 진행되는 도진의 무대는 연극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사실적 수법에 의지해 최대한으로 확장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다.

도진은 이 무대를 "체호프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정수"로 꼽는다. 20여년 간 무대 구상만 하다 2003년에야 첫 상연한 데에는 그 같은 경외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무대는 또 연극을 유흥이 아니라 계몽과 학습의 장으로 여기는 러시아 특유의 연극관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진의 배우들은 테크닉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심성과 감각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훈련을 거친다. 대연출가 피터 브룩이 "말리 극장은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 감탄했던 그 진면목을 확인할 기회다. 5월 5~8일, LG아트센터. (02)2005-0114 (장병욱기자)  

10. 04. 22.   

P.S. '3시간짜리 연극'은 러시아에서 통상적인데, '대하연극'이라고까지 한 것은 다소 과장이다. 연출가 전훈의 체호프 공연 대본은 <안똔 체홉 4대 장막전>(제이앤북, 2005)으로 나왔었지만 현재는 품절상태다(<숲귀신>까지 포함해서 다시 나오면 좋겠다). 레프 도진과 말리극단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세프초바의 <레프 도진과 말리드라마극장>(동인, 2010)이 매우 요긴한 참고문헌이다. <숲귀신>과 <바냐 아저씨> 등에 대한 국내 연구는 김규종 교수의 <극작가 체호프의 희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신아사,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4-2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