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내내 고심하다가 오후에 두 시간 동안 작성해서 보낸 원고다. 심신이 쇠약한 상태라 천안함 사고같이 덩치 큰 사건은 다루지 못하고('인간 어뢰'까지 등장하면 소설의 경우엔 진지하게 읽지 말라는 신호이건만!) 연이어 터지고 있는 지자체 단체장들의 비리 사건에 대한 씁쓸함만을 적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뭔가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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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0. 04. 27) [문화와 세상]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평소 별로 말이 없는 성격임에도 자주 들먹이던 얘기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홍어(洪魚)와 광어(廣魚) 얘기다. 한자 이름에서 보이듯이 둘 다 바다 밑바닥 쪽에 사는 ‘납작한’ 물고기다. 그 동네에서 사는 데는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유리하기에 그런 모양새로 진화했다. 하지만 닮은 점 못지않은 것이 차이점이다. 둘은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온 방식이 전혀 다르다. 상어와 가까운 종류인 가오리과의 홍어는 ‘정규과정’을 거쳐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몸을 양 옆으로 늘려서 커다란 날개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압착기를 통과한 상어와 같은 모양을 갖게 되었고 좌우가 대칭이다. 하지만 가자미목에 속하는 광어(넙치)는 다른 방식으로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경골어류인 이 녀석은 상어와 다르게 세로로 납작하다. 따라서 광어의 조상이 바다 밑바닥에 엎드릴 때, 홍어의 조상처럼 배를 깔고 엎드리는 것보다는 몸을 한쪽으로 눕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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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래를 향한 눈 하나가 항상 모래 속에 파묻히게 되어 결과적으론 외눈박이를 만드는 문제점을 낳았다. 이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아래로 내려간 눈이 위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결됐다. 눈이 돌아가는 과정은 광어의 어린 새끼가 자라는 동안 재연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란 광어는 양쪽 눈이 모두 위로 향한, 마치 피카소의 그림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바다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기이하게 뒤틀린 두개골은 이 임기응변적 적응방식이 추가적으로 지불한 대가이다. 물론 광어에게도 홍어와 같은 방식으로 납작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광어의 조상이 그와 같은 진화 경로를 따랐다면, 단기적으로는 한쪽으로 눕는 종과의 경쟁에서 뒤졌을 것이다. 우리의 넙치는 나름대로 다급했던 상황에 적응한 셈이다. 삶의 품위나 따질 여가가 없었다. 게다가 이젠 두개골마저 뒤틀려 버렸으니 무얼 차근차근 제대로 생각할 만한 여건도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시인의 말대로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오규원)일까?
홍어와 광어 얘기를 자주 들먹인 건 그것이 압축정리판 ‘세상의 이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란 왜 저들은 그 모양이고 우리는 이 모양일까를 설명해주는 것일 테니까. 그런 세상의 이치를 새삼 떠올린 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단체장들의 갖가지 비리가 터지고 있어서다. 얼마 전 여주군수가 지역 국회의원에게 현금 2억원을 건네려다 현장에서 체포되더니, 며칠 전 당진군수는 건설업자로부터 아파트와 별장을 뇌물로 받은 혐의가 포착되자 위조여권을 이용해 해외로 도피하려다 적발됐다. 활극이 따로 없지만, 그간 ‘흔하게’ 벌어진 일이어서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렇게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함을 자아낸다. 민선 4기 기초단체장 중 절반 가까운 42%가 비리로 기소됐음에도 놀랍지 않다니!
지방자치제란 지역 주민 스스로 선출한 기관을 통하여 지방의 정치와 행정을 맡게 함으로써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그건 ‘홍어형’의 이상이고, 단기간에 제도의 안착을 기대한 우리의 현실은 ‘광어형’에 가깝지 않나 싶다. 유권자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기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한쪽으로 드러누워 한몫 잡으려는 인사들이 판을 치는 한 우리 정치문화에 미래는 없다. 납작하다고 다 홍어는 아니다.
10.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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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선거 시즌을 앞두고 읽어볼 만한 민주주의 이론서로 최근에 나온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와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을 들고 싶다. 전자는 조르조 아감벤부터 슬라보예 지젝까지 여덟 명의 쟁쟁한 철학자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펴보인다. 소개는 이렇다.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이 부고 소식에 띄우는 조서이자, 과연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고 따져보자는 문제적 발제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글을 기고한 여덟 명의 비판적 지성들, 오늘날 세계 지성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사유의 거장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데이비드 헬드의 책은 두툼한 교재형 책이다. '민주적 자치'에 대해서도 한 장이 할애돼 있어서 참고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