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반납해야 할 책들을 챙기다 보니 카자 실버만의 <월드 스펙테이터>(예경, 2010) 원서도 눈에 띈다. 지난 4월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올려놓으면서 서평도서 후보로 고려했다가 제쳐놓는 바람에 아직 읽지 못한 책이다. 부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한데, 방학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드문 소개기사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주간한국(10. 04. 13)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 

책의 제목인 '월드 스펙테이터(World Spectators)'는 본래 저자인 카자 실버만의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에서 나왔다. 아렌트는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외부세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시각의 주체,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의무, 권리를 지닌 주체를 철학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월드 스펙테이터' 즉, '세계관찰자'란 말을 지어냈다.

저자인 카자 실버만은 이 말을 전복시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낸다. 이 전복이 블록버스터 급이다. 그녀는 '외양'과 '존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말한다. "바라보아야 존재할 수 있다"고. 이 책의 핵심은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의 인식이다. 참고로 그녀 실버만은 국내에서 정신분석학 틀을 이용해 사진과 영화를 분석하는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대중문화, 사진과 영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하나의 툴이 될 수 있을 터다.

우선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알레고리, '동굴의 우화'를 전복시킨다. 평생을 컴컴한 동굴에서 살아온 죄수가 어느 날 갑자기 환한 바깥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동굴에 들어온다는 옛날 옛적 그리스 이야기를, 그리고 죄수는 이제 바깥 세계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그 고통이 크더라고 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명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저자는 '동굴 속 개별 죄수'에 집중함으로써 비틀어 버린다.

실버만은 동굴 속 죄수 각자는 주어진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부자유스럽지만, 적어도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물이 눈에 보일 때만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결국 세계가 나타나 존재하게 될지, 아니면 비(非)존재의 어둠으로 흐려져 사라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 뿐"(15페이지)이라고.

보기, 즉 시지각은 말하기, 언어에 앞서는 것이다. 그녀의 다음 전복 대상은 성경이다. 흔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언어측면이 강조되지만, 실버만은 동물과 새가 아담 앞에 먼저 보이고, 그런 다음에야 아담이 존재의 이름을 말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주체는 개별자이지만, 또한 그가 속한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다. 본다는 것은 언제나 주체와 대상, 타자, 세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버만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에게 비춰질 때만,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진공상태의 단독자보다 현실 세계를 사는 집합체 속 개별 주체를 강조한다. 개별적이면서도 사회 안에 집합적으로 살아가는 세계관찰자, 월드 스펙테이터는 동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언어가 나타낼 수 없는 존재의 근본 조건을 볼 수 있는 시각적 역량을 지닌다.

이 책의 부재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이다. 그러니까 그녀, 실버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철학을 사유의 바닥에 깔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 하이데거와 라캉은 다시 플라톤과 프로이트의 사유에 기대고 있는바, 책을 읽어내기 위해 정신분석, 철학, 시각문화, 미술사 그리고 문학과 영화학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을 마칠 때쯤 동굴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죄수, 현상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터다.(이윤주기자) 

10. 07. 12.   

P.S. 실버만의 책 가운데 관심을 끄는 타이틀은 몇 개 더 있다(원래는 <기호학의 주체>란 초기 저작으로 알게 된 이론가였다). 그나저나 말 그대로 '월드 스펙테이터'들이 주시하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이 몇 시간 남지 않았군...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7-12 0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2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구입한 책의 하나는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민음사, 2010)다. 제목이야 워낙에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작가 올비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를 잇는 현대 미국의 대표 극작가"라고. 그런 명망의 출처를 이번에 확인해볼 수 있겠다.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마침 이 작품을 다루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아, 책은 이 칼럼을 읽고 구입한 듯하다).

한겨레21(10. 07. 09) 누가 환상 없는 실재를 두려워하랴?

김수영의 시 ‘전화 이야기’(1966)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드림예요. 절망예요./ 8월 달에 실어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앨비예요, 앨비예요. 에이 엘 삐 이 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 유명한 ‘푸른 하늘을’이나 ‘풀’ 같은 근엄한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수영의 ‘발랄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앨비’라는 극작가의 살롱드라마 <아메리칸드림>의 번역 원고를 게재할 의향이 없느냐며 잡지사 담당자와 어딘가 서글픈 협상을 벌인다. 근데 앨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정확한 발음은 앨비가 아니라 올비다.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김수영이 언급한 <아메리칸드림>(1960)보다는, 누구나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라는 작품으로 더 유명한 극작가다. 1959년에 <동물원 이야기>로 데뷔했고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미국문학사에서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계승해 미국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대접받고 있고,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가차 없고 무정한 관찰이 그의 주특기로 간주된다. <현대세계희곡선집>(동화출판사 펴냄, 1970)에 오화섭의 번역으로 수록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이 이번에 다시 출간됐다(강유나 옮김, 민음사 펴냄).

저 유명한 제목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파리 리뷰>(39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문장은 어느 술집 거울에 씌어 있는 누군가의 낙서였다. 디즈니 만화영화 <아기돼지 삼형제>에 흘러나오는 노래 <누가 크고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아기 돼지 삼형제가 집을 지어놓고 이제 늑대 따윈 두렵지 않다며 신나게 저 노래를 부를 때 늑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big bad wolf’ 대신 ‘Virginia Wolf’를 집어넣은 것. 노래의 원래 맥락과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가 혼합된 것일까. 저 문장이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누가 허위의 환상이 없는 실재의 삶을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으로 변주되었고 이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저 물음이 이 작품의 테마다. 환상과 실재의 대립이 그것. 우리의 삶은 스스로 의식 못하는 환상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간다. 특히 작은 환상들의 역할이 크다. ‘대한민국 언론은 진실을 보도한다’ 혹은 ‘대한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인식하고 인정하지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혹은 ‘우리 부부는 행복하고 아이들을 엄마·아빠를 존경한다’와 같은 믿음들이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인정도 못한다. 만약 그 환상-목발을 빼앗기면 우리는 실재-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한 부부의 정신적 난투극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그 환상의 스크린을 칼로 찢고 뼈를 발라낸다.

뼈 운운은 필자의 과장이 아니다. “뼈에 도달해도 아직도 다 간 게 아니지. 뼈 안에 여전히 뭔가 들어 있거든… 골수… 그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거야.”(172쪽) 연구서들에 따르면 이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1막이 피부를 벗겨낸다면 2막은 뼈를 발라내고 있고 가장 결정적인 3막에 이르면 이 작품은 6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환상의 골수까지를 쑤신다. 1963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고 당연하게도 그해 퓰리처상 희곡 부문 수상작으로 지명되었으나 퓰리처 위원회는 시상을 거부했다. “미국적 삶의 건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로서는 더 영광스러운 일이었겠다.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은 두렵지 않다는 뜻의 수사의문문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가… 조지… 내가… 두려워.”(193쪽) 가장 치명적인 환상이 폭로되고 정신적으로 침몰한 여주인공 마사가 내뱉는 탄식이다. 환상 없는 삶이 그토록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파국의 절정에서 도리어 기이한 희망의 조짐이 느껴진다는 것은 의외다. 달콤한 환상의 땅에서 자라는 건 허망일 뿐, 진정한 희망은 끔찍한 실재의 땅에서 싹틀 수 있다는 취지일까. 이 묘한 여운을 공연으로 느끼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볼 수 없어 아쉽다. 일단은 동명의 영화(마이크 니컬스 감독, 1966)를 먼저 봐두려고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10. 07. 10. 

 

P.S. 이번에 안 것이지만 올비의 희곡은 몇 편 더 번역돼 있다. 2003년에 한꺼번에 세 권이 나왔는데, 짐작엔 역자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듯싶다. 이번에 대표작이 소개된 김에 좀더 조명을 받을 수도 있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10-07-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뼈속에 골수를 두려워 하랴, 나의 환상이여, 그 골수를 나는 어그적 어그적 씹어 넘겨보자 그러면 내 머릿속에 여전이 유령처럼 나의 환상은 살아 있다', '올프'는 누구의 환상이었을까요.

로쟈 2010-07-12 20:47   좋아요 0 | URL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雨香 2010-07-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리스트에 올려놓은 책입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약 6년의 직장생활을 관두고 잠시 미국에서 놈팽이질 할 때, 이 연극을 봤습니다. 연극의 재미에 폭 빠져있다가 문든 '어! 내가 영어를 듣고 있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리스닝 테스트 시간이 되어 버렸고, 이후 연극에 몰입을 못했었습니다. 연극의 묘미를 관객과의 호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귀국하고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DVD를 구입했습니다만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허위의 환상'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이 '허위의 환상'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긴데, 하도 시끌벅적한 뉴스가 많다 보니 주목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해마지 않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관리대상'이 되는 독서라면 정나미 떨어진다. 필시 이런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려는 '관료'들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독서는 주변에서 적당히 자극하고 격려하는 '넛지' 정도로 충분하다. 아이들은 '책 읽는 기계'가 아니며 더구나 '책을 읽어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책을 읽고 아무말도 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한다. 모든 개개인의 독서 이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독서가 제일 괴로웠어요"란 비명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 무슨 퇴행적 전체주의란 말인가. 조만간 <19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국일보(10. 06. 30) [편집국에서/6월 30일] 아이들의 괴로운 독서

"아니, 이상의 '날개'를 중학교 1학년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유정의 '봄봄'은 또 어떻구요. 뭐,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글쎄. 이광수의 '무정'도 그래요. 그 나이 아이들에게 썩 맞는 작품 같지 않은데."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주부에게 며칠 전 들은 이야기다. 아들이 글쓰기 지도를 받는 사교육 강사가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이 책들을 읽어둬야 한다고 했단다. 중학생이 되면 영어 수학 공부에 치여서 책 읽을 틈이 없으니 독서도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면서. 이웃 주부들에게 물어보니, 그 책들이 그 동네 중학교 필독서이고 초등 5,6학년 때 미리 읽는다고 하더란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온 책들을 보더니 글쓰기 강사가 놀라더란다. "아니, 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셨어요? 다들 축약본으로 보는데. 많이 팔아요. 못 보셨어요? "

요즘 아이들의 독서 풍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아이가 소화하기 힘든 책을 골라 읽으라는 어른들도 이상하지만, 문학작품을 원전으로 읽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축약본으로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어 버렸다.

독서는 뭐니뭐니 해도 즐거워야 한다는 원론은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입시용 스펙 쌓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독서논술 사교육이 번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책 읽기는 단순한 지식 늘리기에 쏠려 괴로움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욕심과 학교의 '이상한' 독서 지도가 아이들을 못 살게 군다. 이 주부의 아들이 4학년 때 교내 독서퀴즈 때 푼 문제를 보자. 화산활동을 재미있게 설명한 책이 대상이었는데, 퀴즈 문항이 이랬다. "다음 중 휴화산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퀴즈를 맞히려면 책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더 기가 막힌 사례도 있다. 중학교 아이들에게 김동인의 소설 '감자'를 읽게 한 다음 "복녀는 얼마에 팔려갔습니까?"라고 묻는다. 한 지방 교육청이 시행 중인 독서활동 평가 항목이다.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독서 평가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특수한 예가 아니며,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5일 올 2학기부터 학생들의 독서 이력을 일일이 기록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2011년 대입 때부터 전형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각 시ㆍ도 교육청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www.reading.go.kr)을 구축해 운영한다. 학생이 책을 읽고 독후 활동 기록을 입력하면, 교사가 이를 평가해 인증하는 온라인 관리 프로그램이다. 초중고 12년 간의 독서 이력이 통합 관리되는 것이다. 대입 입학사정관은 이 시스템에 접속해 학생의 독서 이력을 점검ㆍ평가하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제도가 창의ㆍ인성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일일이 기록하고 관리하고 평가받는 독서가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 '읽고 싶은 책'보다 '읽어야 할 책'만 늘려 아이들을 괴롭히는 또다른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학원과 독서지도 사교육 업체는 이 제도에 맞춘 필독서를 선정해 지도하는 신규 사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더 큰 부담을 안고 책을 읽게 되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오미환 문화부 차장 )  

한국일보(10. 07. 10) [책갈피] '책꽂이의 자유' 마저 위협하는 세상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설령 ‘빨갱이’라 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툭하면 나오는 색깔론은 분명 불합리한 잣대이지만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다.

색깔론이 다시 튀어나왔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보도한 MBC ‘PD수첩’ 중 피해자 김종익씨의 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 문제가 됐다. 방송에서 제목을 모자이크 처리한 이 책들은 <혁명의 연구> <김일성과 민주항쟁> <조선노동당 연구> <사회주의 개혁과 한반도> 등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 책들로 보아 “김씨는 특정 사상에 빠진 편향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참 단순하고 편리한 판단이다. 그 명쾌함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단세포적 발상이야말로 편향적 사고일 것이다. 국방부가 군대 내 금서목록을 발표해서 비난과 조롱을 산 일을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독서는 극히 사적인 활동이다. 무슨 책을 읽느냐는 한마디로 ‘내 맘’이다. 국가나 권력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거나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개인의 독서 내역을 그를 위협하는 무기로 삼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폭력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책도 조심해서 읽는 게 좋겠다. 내가 읽은 책이 어느 날 나를 겨누는 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이런 조심성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게 좋겠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전국에서 시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적인 독서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고 평가 받으라는 것은 정신적인 지문 날인 강요와 다름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오미환기자) 

10. 07. 09.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지 2010-07-09 23:2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도 벌써 독후감 숙제 땜에 스트레스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아이보다 제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숙제 안 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어른이 되더라도 아이를 놀게 할 것인가, 숙제는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사이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클 때는 실컷 놀다놀다 스스로 책을 집어들었던 것 같은데요..--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앞으론 스스로 책을 집어던질 거 같습니다...

조아 2010-07-09 23:57   좋아요 0 | URL
간간이 다니는 서점에서 입구에 "교과서 수록소설 미리 읽기"라고 크게 걸어 놓고 있더군요. 뭐 저러면 장사는 되겠다 싶었죠.. 저런 정책 이전에 학교에서 책 읽으면 빼앗아 가는 문제부터 지적해야 할듯 싶은데 말이죠.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그냥 학교수업이 독서중심이 되도록 하면 되지요...

빵가게재습격 2010-07-10 00:49   좋아요 0 | URL
조건만 몇 가지 붙인다면, 저는 이 정책에 찬성합니다... 정책 입안자들과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사교육 담당자들까지(입시 사정관도 포함해야겠네요) 똑같은 책을 읽고 함께 똑같은 시험, 혹은 글쓰기까지 제출하게 한다면요. 가령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구체적인 이름을 모두 쓰시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전쟁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어난 전쟁인가? 연도로 표기하시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비유는 총 몇개인가? 정확한 갯수를 제시하시오.' 운운.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독서기술부'를 두어 학교선생님, 사교육 담당자들, 입시사정관, 정책입안자의 집안을 불시에 침입, 검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불시에 습격하게 하는 겁니다. 새벽 두시에 침투, 집안을 모조리 뒤져 불온한 책이 없는지 확인한다면, 오! 진정 찬성합니다. 꼭 하자고 건의하고 싶어욧!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이 아예 없는 게 아닐까요? 지침서만 잔뜩 꽂혀 있을 듯한데요...

Sati 2010-07-10 01:26   좋아요 0 | URL
"공공장소나 텔레스크린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혼자 공상에 잠긴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정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나타나는 경련, 무의식적으로 짓는 불안한 표정,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 등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가령 승전 소식이 보도될 때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84> (민음사, 89쪽)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꽂이 관리에 이어서 조만간 표정관리도 해야겠네요...

2010-07-10 0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7-10 09:53   좋아요 0 | URL
독서가 관리 대상이 된다니...으음...
이거야말로 유희가 아니라 노동이 되는 지름길이군요. 후...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렇게 강제적(?)으로도 시스템에서 책을 보게 하는것도 필요하것도 같고...역시 정답은 없는걸까요^^;

로쟈 2010-07-10 12:56   좋아요 0 | URL
기대되는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거 같습니다. 실효성도 의문이구요. 의무 복무도 아니고 의무 독서라니요...

kumun 2010-07-10 13:14   좋아요 0 | URL
미국에선 학교에서 단계별로 책을 나눠서 아이들이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게 독서지도에 중점을 두더라구요

로쟈 2010-07-10 13:25   좋아요 0 | URL
미국만도 못한 셈이네요...

자꾸때리다 2010-07-10 19:14   좋아요 0 | URL
주제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저는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 없애버리고 대신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같은 대화편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수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0-07-10 23:04   좋아요 0 | URL
주제와 상관이 있는데요.^^

네모선장 2010-07-13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고등학교 전문계 교사 입니다. 이제서야 기사를 봤는데요.
실제로 강압적으로 저런걸 하고 있고 더 웃기는 것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을 창의적 체험활동이란 것과 연동되게 해놨는데 얼마전에는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직접 학교로 방문하여 이용실적을 물어보고 갔습니다. 저희야 전문계고라 학생들이 워낙에 책을 안읽거나 연애소설과 판타지 소설만 주로 읽어서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서도 교육당국은 저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꾸만 분량과 권수로 학교평가랑 연계한다는 거죠.
또한 학교 도서관에 대출권수는 자동으로 교육청에 집계되어서 대출 많이 했으면 우수학생 우수학급 우수학교라며 칭찬하고 있는게 요즘의 교육 현실이네요.

로쟈 2010-07-13 10:38   좋아요 0 | URL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모르겠네요...
 

격주간 기획회의(27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못 받았기 때문에 아래는 교정본이 아니라 초고다. 대리언 리더의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을 거리로 삼았는데, 분량상 책의 일부 내용만을 정리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어볼 참이다. 저자의 <라캉>(김영사, 2002)를 읽어본 독자라면 흥미로운 '성찬'이 될 듯싶다.   

기획회의(10. 07. 05)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무엇이 궁금해서 이 책을 펴보게 됐을까?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책의 원제를 직역한 걸로는 ‘왜 여자는 보내는 것보다 더 많이 편지를 쓰는가?’(‘Why do women write more letters than they post?’ 이건 물론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다. 당신은 혹 그런 게 궁금하지 않은가라고 그는 묻는다. 아마도 그가 던지는 질문 이전에 그러한 ‘사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로서 구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맞아, 정말 그래! 그런데, 왜 그런 거지?’라고 맞장구를 치는 순간, 이 질문은 우리를 어떤 앎으로 인도하고 그 원인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한다. 두 가지가 전제다. ‘왜 여자는’이 암시하는 바대로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의 대표적인 양상을 여자들의 편지쓰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그런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드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나는 조금 다른 경로를 따랐다. 책의 타이틀보다는 저자에게 먼저 끌린 때문이다. 주디 그로브스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곁들인 라캉 입문서 <라캉>(김영사, 2002)의 저자가 바로 대리언 리더였고, 기억엔 그 책의 참고문헌에서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란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실제로 저자 소개에는 “영미권에서 라캉 연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복잡하고 난해한 라캉 이론을 대중에 소개하는 데 기여해왔다”고 돼 있다. 핵심은 그가 ‘라캉 연구의 권위자’이며 주로 ‘라캉 이론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중화’의 주제가 이 책의 경우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라캉의 이론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그가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라캉 더하기 라이크’인데, 라이크는 프로이트의 초기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테오도어 라이크를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의 이론에 기대어 저자가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찰과 해석의 콜라주”이다.  

Why do women write more letters than they post? book cover

저자의 ‘관찰과 해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맛보기. 만일 당신이 남성에게 코트를 팔고자 한다면 요즘엔 다들 그런 옷을 입는다고 말해주는 게 좋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에게는 아무도 그런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게 더 낫다. 왜 그런가. 남성들은 일반적인 경우에 포함되기를 좋아하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좀 약한가? 그렇다면, 또 다른 관찰. 저자가 상담했던 두 살 반 된 남자아이는 창가에 늑대 한 마리가 있다면 걱정했다.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도 동일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늑대가 뭘 하려는 것 같으냐고 저자가 묻자 남자아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가서 물어보자”고 했다.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독자에게는 “가서 물어보자”고 답한 여자아이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러 인용과 사례 해석의 콜라주를 몇 장면 따라가보면, 일단 라캉의 대전제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단일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성의 본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초경을 겪은 여자아이들의 우울증을 설명한다. 그 경우에 우울증은 초경 자체에 대한 놀람이 아니라 초경을 겪었음에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월경은 소녀를 단숨에 ‘여성’으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는 공식이 아니다. 때문에 여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대상’보다는 ‘관계’에 두어진다. 가령 카페에 앉아 선남선녀 한 쌍이 걸어가는 걸 보는 상황에서라면, 남자들은 보통 여자의 매력에 이끌려 그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에게 끌리기보다는 함께 가는 여자를 보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녀들의 관심은 남자 혹은 여자라기보다는 그들 간의 ‘관계’다. “저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자기 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문화적 영향이나 교육의 결과가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한 사례에 따르면, 남자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접 주장하는 데 반해서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의 욕망을 대신 내세운다. 자기가 갖고 싶은 인형을 좀 달라고 말하는 대신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인형을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곧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떠안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자신이 소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서 라이벌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대상보다는 다른 아이의 욕망을 목표로 한다. 히스테리에 관한 프로이트의 고전적 분석사례에서 18살의 도라는 복잡한 성적 역학관계 속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K의 부인과 연인관계였고, 도라 자신은 K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분석과정에서 도라가 의식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K 부인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K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라캉은 다르게 해석한다. 라캉에 따르면 도라가 그렇게 한 것은 K 부인이 도라에게 여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도라는 여성성에 접근하기 위해서, 곧 K 부인이 구현하고 있는 신비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K와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전체 시나리오의 중심은 K가 아니라 K 부인이었던 셈이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란 정식을 떠올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저자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나>를 든다. 그 작품에서 트로이에 있던 여성은 진짜가 아닌 가짜 헬레나였다. 그녀는 여신 헤라가 공기로 만들어 파리스에게 안겨준 유령이었던 것이고, 진짜 헬레나는 이집트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곧 역사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증오 받는 여성 헬레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적 이미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성의 자리는 궁극적으로 비어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100벌의 드레스를 갖고 있어도 “입을 게 없어”라고 여성들이 말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다. 여성(The Woman)이 되기 위한 단 한 벌의 제복을 언제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저자의 기본 입장이자 책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여자들이 왜 끊임없이 “나 사랑해?”라고 되묻는지, 왜 여자는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는지, 왜 여자의 파트너는 고독인지, 왜 여자들은 글을 쓰면서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지, 남자들이 “꺼져버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왜 여자들은 “내가 사라질게”라고 말하는지를 알게 된다. 당신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일독해볼 만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10. 07. 08.   

P.S. '관찰과 해석의 콜라주'인 만큼 다양한 사례들을 동원하고 있는 게 이 책의 강점인데, 나도 덩달아서 <베니스의 상인>, <올랜도>, <사랑에 빠진 악마> 등을 새로 구입했다. 저자의 미끼가 제법 잘 통했다고 할까.  

번역은 읽을 만하지만, 한두 군데 오역도 눈에 띈다. 사소하지만 교정차원에서 적어두자면, 서문 8쪽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많은 남성 학자들이 학회에 낸 자신의 논문에 대한 비판은커녕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은 "Indeed, little research is required to demonstrate taht a large percentage of male academics would rather that no one understood their conference papers than that these be subject to criticism."이다. 구문상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기를 원한다"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앞문장에서 저자는 "이론가들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겁나 진짜 주장을 감추는 데 진력하거나 아예 주장을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라고 꼬집고 있는데,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학회에서도 대다수 남성 학자들은 남에게 비판받기보다는 차라리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비판/반박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해서 제시해보겠다는 얘기다. 그런 태도는 높이 사줄 만하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용한 대목인데, 국역본을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26쪽에서 바이올라의 대사 "What's she?"를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로 옮긴 것은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공작이 올리비아라는 여성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인데, 바이올라는"Who's she?"라고 묻지 않고 "What's she?"라고 물었다. 즉 이 질문에서는 'WHO'(주체)와 'WHAT'(대상)의 대비가 중요하다. 대상은 물론 남성 욕망의 대상이다. 그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여성은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 바로 그런 점에서 "What's she?"라는 질문은 대단히 탁월한 '여성적 질문'이라고 리더는 말한다. 직역하면 "그녀는 누구인가요?"와 대비하여 "그녀는 무엇인가요?"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번역본들의 선택은 어떤지 궁금하다...


댓글(15) 먼댓글(1)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라캉주의식 마케팅?
    from Null Model 2010-07-10 04:45 
    아래는 영국의 라캉주의자 대리언 리더가 쓴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에 대한 로쟈의 서평에서 인용한 것이다. 저자의 ‘관찰과 해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맛보기. 만일 당신이 남성에게 코트를 팔고자 한다면 요즘엔 다들 그런 옷을 입는다고 말해주는 게 좋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에게는 아무도 그런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게 더 낫다. 왜 그런가. 남성들은 일반적인 경우에 포함되기를 좋아하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싫어...
 
 
식은카푸치노 2010-07-08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라캉에 따르면 이렇다.'라는 책은 쉽게 찾겠는데 라캉 이론의 근거와 전개과정을 다룬 책은 좀처럼 찾기 어렵네요. 소개해주실만한 책이 있을까요? 가능한 쉬운 책으로요.

로쟈 2010-07-08 14:39   좋아요 0 | URL
숀 호머의 책이 쉬운 입문서로 꼽힙니다. 그리고 '라캉' 태그를 클릭하시면 참고할 글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식은카푸치노 2010-07-08 15: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미지 2010-07-0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년에 쓰신 서평과 함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의 목차만 읽어도 웃음이 나오네요.. 읽다 보면 또 괴로워질지는 모르겠지만요.. impulse와 drive를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한지요?

로쟈 2010-07-09 00:01   좋아요 0 | URL
합의된 번역은 없는 듯해요. 역자들마다 달라서요. 병기해주면 혼동은 없을 거 같습니다. drive를 보통 '욕동'이라고 많이 옮기는데, 저는 전에 쓰던 '충동'이 더 친숙합니다...

꿀물 2010-07-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건 아니지만 ㅋㅋ Indeed, little research is required to demonstrate taht a large percentage of male academics would rather that no one understand their conference papers than that these be subject to criticism 에서 would rather 뒤에 think 가 있는게 맞겠지요?

로쟈 2010-07-09 21:08   좋아요 0 | URL
understood를 understand라고 했네요. 나머진 원문 그대로입니다...

비로그인 2010-07-09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을 읽으면 어쩐지 남자는 고등생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아니면 여자가 지나치게 '고등한' 것인지...

대리언 리더는 지젝이 자신의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그 리더죠?
각주의 서지사항에도 자주 등장하던...
제목만 보고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리더의 책이라니까 혹하기도 하지만 리뷰를 읽으니 안 읽고는 못 배기겠네요^^

로쟈 2010-07-09 21:09   좋아요 0 | URL
네, 그 리더입니다. <모나리자 훔치기> 이런 책도 있고요. 책은 재밌습니다.^^

2010-07-26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명 2020-07-08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일간지나 주간지 북섹션 말고 출간되는 책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있을까요

로쟈 2020-07-0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서점요!

가명 2020-07-08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흥미를 끄는 논쟁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의 '진보적 애국주의' 논쟁 후일담 성격인데,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여름호)에서 서동진, 장은주 두 교수가 '애국주의'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음미해볼 만한 주제라 생각한다.   

한겨레(10. 07. 08) '시민과 세계’ 여름호, ‘진보적 애국주의’ 논쟁 다시 점화  

우리나라 진보진영에서도 ‘애국주의’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진보적 애국주의’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을 조짐이다. 지난번 <한겨레> 지면에서 벌어졌던 논쟁이 진보적 애국주의 자체의 성격과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마르크스주의가 개입해 국가를 매개로 한 정치적 기획 자체의 모순을 지적했다. 

최근 나온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 여름호는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교수의 ‘과연 공화국만으로 충분한가 : 애국주의 논쟁을 되짚어봐야 할 이유’와 진보적 애국주의를 주창했던 장은주 영산대 교수의 ‘민주적 애국주의와 민주적 공화주의 :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 등 두 편의 글을 나란히 실었다. 서 교수가 지난해 말 지상논쟁과 별도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었던 장은주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글을 다시 가다듬어 싣고, 장 교수가 이를 포함한 진보적 애국주의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에 대해 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이번 논쟁에 붙일 수 있는 소제목은 ‘공화국만으로 충분한가’이다. ‘민주공화국’을 명시한 헌법을 내세워 진보적 애국주의를 주장한 장은주 교수는 “애국주의는 특수주의적이지만, 인권을 비롯한 보편적 가치와 결합하는 한 민주주의를 추진하고 확장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 교수는 공화국의 이상만으로는 보편주의적인 국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으며, 이것을 간과하고 국가를 새로운 진보 정치를 기획하는 마당으로 삼은 것이 진보적 애국주의의 문제라고 비판한다.

민족 또는 민족을 통해 구성되는 국가라는 공동체는 사람들을 직접적인 삶의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개인화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로서 이미 보편주의적이라는 주장이다. 쉽게 말해,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 일본인·프랑스인과는 다른 공동체에 속한다는 측면에서 특수주의적이지만, 계급·성별과 같은 직접적인 삶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국적’으로 규정되는 개인이 된다는 점은 보편주의적이란 것이다. 



서 교수의 이런 주장은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에 주로 기대고 있다. 발리바르는 근대 국가가 보편적 인권 및 시민권을 확대해왔지만, 다른 한편 ‘국민’이라는 특권적 공동체를 만들어 그 권리를 한정했던 점에 주목한다. 근대 국가는 자본주의와 한 몸인데,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계급투쟁 및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사람들이 노동자·농민이 되기 이전에 시민적 권리를 줘서 국민으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자본주의적 보편성과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보편성을 함께 갖고 있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 서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속 착취와 불평등을 고발하고 거부하기 위해 더 많은 권리나 더 좋은 법에 호소해야 하나, 국가는 그럴수록 효과적인 정치적 공동체로서 구실하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만약 진보적 애국주의가 말하듯 “국가가 정치적 공동체로서 보편성을 담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이런 지적에 대해 “민주적 헌정주의에 대한 좌파주의적 회의”라고 규정하고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급진성을 좌파적 순혈주의의 추구라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완고한 지적 습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주창한 진보적 애국주의의 배경적 이념을 ‘민주적 공화주의’라고 이름붙이고, “민주주의의 이념과 원칙이 지닌 참된 해방적 잠재력을 신뢰하는 근본·급진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그는 서 교수가 지적한 보편주의적 국가의 모순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며, “바로 그 내적 모순이 끊임없이 국가 안에서 실질적 보편화에 대한 강력한 내적 동학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했다. 곧 인권과 같이 추상적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원칙이 보편적으로 입법화되는 것 자체가 현실적 실천이 이뤄질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제어·규제할 수 있다”며 ‘공화국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반박한다. 



두 사람의 시각 차이가 워낙 커 앞으로 논쟁이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공화국만으론 안 된다”는 서 교수의 비판은 진보적 애국주의뿐 아니라 최근 관심이 모였던 공화주의 등 정치철학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또다른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는 “‘권리의 정치’를 기반으로 삼다보니 자꾸 대안을 찾아 국가나 헌법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인다”며 “그러다보니 착취와 불평등이 실제로 드러나는 삶의 공간으로서의 ‘사회’가 잊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곧 시민적 권리에 기대느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으면, 노동문제도 노동 현장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기관에 민원을 넣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다.(최원형 기자) 

10. 07. 0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지 2010-07-08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서교수 입장에 더 설득이 되는군요. 국가민주주의의 보편성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삶의 구체성은 그 시작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지금 한국만 봐도 국가민주주의가 얼마나 황당할 수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7-08 13:49   좋아요 0 | URL
이론적 버전으론 지젝과 라클라우/무페(급진민주주의) 사이의 논쟁으로도 읽힙니다...

미지 2010-07-08 15:5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7-09 00:02   좋아요 0 | URL
아, 그냥 제 해석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