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철학 - 오래된 지혜가 오늘의 나에게 답하다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최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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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것인가?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행복이 높은 수입과 좋은 직장, 사회적 지위와 인정 같은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와 내적일관성, 내면의 균형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은 감정, 기분같이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다. 외부적인 것은 수단에 불과하고 좋게 봐줘야 외부적인 것을 얻기 위해 내면의 평화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일단 내면의 평화에서 내면에 해당하는, 외부의 영향과 무관한 나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나는 어차피 다른 사람과 기존의 가치관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는 것 아닐까? 저자는 강물은 계속 흘러 변하지만 강바닥은 그대로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디오티마라는 가상의 철학자와 상담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의 한 축은 번아웃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직장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삶을 찾으라는 격려와 나다움을 찾으라는 충고와 방법론이다. 예전에 김어준, 강신주 콘텐츠에서 나오던 내용과 비슷한데( 예를 들어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강신주의 <다상담>) 설득력은 상당하다. 저자의 직업이 철학 컨설턴트라고 나오는데 문장 하나하나에 내공이 느껴지고, 품위가 있다. 저자는 아마 그리스 로마철학부터 불교 유교같은 고대철학을 토양삼아 일종의 2차생산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힐링서적으로 손색이 없다. 자기계발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토록 품위있게 힐링을 안겨주다니. 아마 상담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심란한 사람이라면 디오티마의 상담에서 적잖은 위로를 얻을 것이다. 이 책의 또다른 축은 내면의 평화평화를 해치는 여러 부정적 감정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지나친 자책감에 시달리는 30대 여성부터 (디오티마는 자신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라고 답을 준다.) 애인이 생긴 남편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인까지(디오티마는 관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성장하고 죽는 것이니 자신의 행복에 관한 열쇠를 남편에게 두지 말라고 조언한다.) 여러 군상들이 디오티마와 대화룰 나누고 돌아간다. 아마 스토아 철학의 방법론이 주로 쓰이는 것 같다. 외부의 상황은 통제할 수 없지만 거기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내면의 정원을 가꾸고 외부를 용기와 관용이라는 미덕으로 대하라는 게 디오티마의 대체적인 처방같다. 디오티마의 처방 중 내게 가장 낯선 덕목은 감사이다. 행복한 바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결핍이 없다면 향상심도 사라지지 않을까?. 성취는 미래의 것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순간을 감사라는 덕목으로 충족하게 살라는 것일까? 디오티마는 나에게 지금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 이미 이룬 것이 갈망하는 것 보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아직 오지 않은 삶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내면의 가치가 외적인 소유물보다 더 중요하고, 나의 자존감이 사회적 지위보다 더 중요합니다”(181페이지) 라고 말한다. 인상적인 문장이다. 이 책의 화자는 디오티마의 상담을 지켜 본 조수인데,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철학의 실천성이다. 고대철학은 삶과 결합된 실천철학이었고, 고대의 보편적 지혜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열린책들) ).일상을 바꾸지 못하는 철학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책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 책의 문장 하나하나의 배경에는 고대철학이라는 엄청난 백그라운드가 있지만 한 번 이 책을 읽고 훅 던져버린다면, 삶에 체화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디오티마가 강조하는 것은 꾸준한 연습과 반복, 결단과 용기이지만 막막하게 느껴진다. 매뉴얼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이 이런 막막한 끈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반드시 사서 읽을 것을 권한다. 체화되지 않는다면 절반도 읽지 못한 것이다. 가장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렴한 느낌의 한국어판 제목. 뭐 원제는 침착하게! - 철학으로 쉽게 잘 살기라니 출판사의 고충도 이해는 간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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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봤는데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초반부는 대사가 별로 없고 루마니아의 도시를 걷는 주인공을 계속 보여준다. 신호등을 건너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화면 한 구석 전봇대 기둥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낙서가 있다.  “sex”                               길거리에서 주차문제로 주인공과 우연히 설전을 벌인 남자도 익숙한 욕설을 내뱉는다. “내 *이나 빨아, 걸레야감독은 이런 식으로 일상에 슬그머니 숨어있는 우리가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기호들을 보여준다. 아이스크림 광고판의 문구는 목구멍 깊숙이이고 극장의 외벽에 장식된 그리스식의 남성 조형물은 성기가 당당히 드러나 있다. 길바닥에 버려진 여자 마네킹 다리 옆에는 그 가랑이 사이를 연상시키는 꽃이 피어 있다. 이 영화를 루마니아라는 국가의 사회분위기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감독이 차우세스쿠부터 군가를 부르는 아이들,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같은 극우,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기호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극의 마지막 학부모회의 중 한 명은 루마니아 군대는 패하지 않는다, 라고 외치는 군인이다. 감독은 루마니아의 파시즘이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 이게 남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유는 섹스동영상이 유출된 여교사는 음란하다고 비난을 받는데 다른 남자 가수는 당당히 내가 박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기억인데 한 미술교사가 자신과 부인의 누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학부모의 항의를 받고 아마 징계를 받았던가?.. 하는 일이 기억난다. 주인공 여교사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학부모회의의 반응 그 때의 코리아의 학부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재밌긴 하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한국과 루마니아의 학부모가 비슷한 문제에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주인공이 헌신적이고 능력있는 교사라는 것은 후반 학부모 회의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추잡한 짓을!”은 변하지 않는다. 섹스는 더러운가? 우리는 단지 동물일 뿐인데 실은 고상한 척 하느라 섹스를 철저히 감춰야 하는 걸까? 이건 필패다. 섹스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인간은 (아마도) 없기 때문이다. 답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영화라기 보다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영화같다. 무거운 영화가 아니라 탭댄스를 추듯 경쾌하고 안드로메다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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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철학 - 오래된 지혜가 오늘의 나에게 답하다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최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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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강신주 식의 담론인데 이렇게 설득력있게 말할 수 있다니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평화와 균형을 찾고 자신만의 집에서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답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의 소리를 잘 따르는 사람만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더 이상 그 직장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는 겁니다. - P130

그러면 미래에 대한 믿음이 생길 거예요. 인생은 계속될 것이며 나는 멈추지 않고 내 삶을 살아갈 거라고 반복해서 말하세요. 직장을 비롯한 외적인 조건은 상대적인 가치로만 인정하고 내면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집중하세요 외적인 모든 건 우리에게 잠시 왔다 가는 것들입니다. 자기자신을 계속해서 믿어주면 기회와 가능성을 발견할 거예요. 가장큰 힘의 원천과 에너지의 원천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있을 때, 진정한 자기다운 모습을 유지할 때, 자기 자신을 상하게하지 않을 때만 비로소 흘러넘치게 되는 거랍니다. 행운과 불행은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져요. 올바른 길 위에 서 있기만 한다면 방황하더라도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세상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과 잘 지낼 수 있게 되죠.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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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니데이 인 뉴욕> 비스끄레한 제목으로 관객을 현혹시키는 건 아마 배급사의 마케팅. 원제를 구글에 돌렸더니 <행운의 일격>이라고 나온다. 우디 앨런이 성폭력 스캔들 여파 때문인지 전부 프랑스 자본을 들였다. 뭐 여주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다운 매력이 있긴 하다만, 그런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매치포인트>의 변주에 가깝다. 이런 주제라면 오히려 <매치 포인트>가 훨씬 잘 만든 영화 같다. 보고 난 뒤 떠오른 영화는 <언페이스풀>이나 <사랑의 탐구>. 예전에 사랑이 사라지면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사라질 거라는 진부한 말이 있었는데 불륜이 사라져도 비슷한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기억나는 <사랑의 탐구> 중 대사. “다들 바람 피더라구”. 그러고 보니 그 영화도 프랑스 영화였는데 이게 프랑스 사람들 이야긴지 전 세계적 현상인지 궁금해진다. 영화 속 불륜을 어머니나 딸이 상담해 주는 장면도 특이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도 이게 일반적인 모습인지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오래 전 본 <클라우드9>(한국제목: 우리도 사랑한다.) 라는 독일 영화에서는 딸이 어머니의 불륜을 알고 좋은 일이라며 절대 들키지 말라,고 격려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긴 그 딸의 아버지도 의붓아버지였다.) 그럼 불륜이라는 게 가끔 가다 생길 수 있는 우발적인 접촉사고 같은 것인가? <언페이스풀>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배신당한 남편은 극단적인 삐딱선을 탄다. 이들에게는 배우자의 외도가 가벼운 접촉사고가 아니라 생의 방향을 바꿀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왜? 아마 한국이라면 “육체적인 더러움”이라는 코드가 들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언페이스풀>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남편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런 “육체적인 배신”이라기 보다 파트너쉽을 배신했다는, 인정욕구를 배신당했다는 느낌에 가까운 거 같다. 그러니까 아내의 사랑의 화살만 다시 자기쪽으로 돌려놓으면 “과거”는 묻지 않고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다. 운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라는 쪽과 우연이 삶을 지배한다라는 쪽이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 당연히 후자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이상 전자처럼 콧대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일론 머스크나 브루스 웨인 정도? 이 영화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이유다. 오히려 나는 다른 생각이 드는데, 사실 우연 안에도 인과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연한 교통사고같은 같은 것도 사실은 우리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우자와 히로후미, 사월의책)), 자동차를 이용한 로테크 테러가 가능한 것도 실은 자동차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고 교통사고는 자동차의 위험이라는 ‘가능태’가 현실화된 것 아닐까? 발생하는 사건은 잠재적인 ‘가능태’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일치하는 순간 무대 앞으로 갑자기 돌출하는 것은 아닐까. 가능태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들뢰즈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별4개까진 아니고 세 개 정도는 되겠다. 우연과 불륜이라는 주제라면 수십년 전에 만든 <매치 포인트>가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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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어게인을 외치는 분들에게 이 영화는 빨갱이 영화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좌파 배우일 것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설정이 일본에 적군파, 독일의 바더마인호프는 들어봤어도 미국에 이런 무력혁명을 외치던 세력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마지막 헌정자막을 보면 <프렌치75>라는 설정이100% 가공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포함해서 뼛속까지 자본주의적인 미국인들에게 이 영화의 설정이 좀 뜨악하게 다가가진 않았을까.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그것도 폭력 혁명을 외치는 이들이 있을까. 젠슨 황과 이재용 치맥회동을 부러움이 섞인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지금의 일반적 정서 아닌가. 나 역시 APEC 정상들이 미소 띤 모습으로 즐겁게 만찬하는 장면을 보며 국뽕 비슷한 흐뭇함을 느끼다 내게 노예근성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애초에 국가는 착취기구란 말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이 영화를 스필버그가 21세기 최고 미국영화라고 상찬했다는데 물론 망작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 포스터에 디카프리오가 라이플을 들고 있는 장면은 일종의 페이크인데 이 영화에서 디카프리오가 보여주는 유일한 액션은 라이플로 총 몇 발 쏘고(어째 이것도 마지못해 삽입한 장면 같다.) 달리는 자동차와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 뿐이다.(이것도 스턴트맨이 했겠지.) 정작 디카프리오 딸을 구하는 장면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물론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여기에서도 훌륭하다. 몸이 굼뜬 디카프리오가 수십년전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해 욕을 퍼붓는 구강액션이 오히려 일품이다. 그래서, 은퇴한 아버지는 딸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며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세대교체를 한 기운이 넘치는 딸은 세 시간이 넘는 오클랜드로 시위하러 간다는 흐뭇한 결말인데, 영화에서 박탄 크로스라는 도시에 경찰들이 군사작전하듯 이민자들을 색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그냥 영화적 연출인지 실제 모델이 있는지 궁금하다. 멕시코 국경 도시에서는 트럼프가 엘에이에서 했던 것 같은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감독이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 장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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