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 동연총서 209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동연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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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찾아간 파르시팔은 그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듣게 된다. 파르시팔 어머니의 이름이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이라는 걸 기억하는가? 파르시팔은 죽고 싶을 정도로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또한 남성의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인 부분이다. 성숙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식으로든 자기 어머니에게 불충실하지 않는 한, 절대 완숙한 남자로 성장하지 못한다. 만일 파르시팔이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위안을 드리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오두막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 콤플렉스를절대로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이 자기 품 안에 머물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어머니도 있다. 아들에게 ‘자식은 어머니에게 충직해야 한다‘는 개념을 아주 교묘하게 주입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들이 어머니의 뜻대로만 한다면 이런 아들의 남성성은 심각하게 상처를 입게 될것이다. 비록 어머니가 고통을 받게 될지라도, 또 자신의 행위가 어머니에게 불충실하게 보여질지라도 아들은 어머니와 헤어져 말을 타고 어머니가 사는 곳을 떠나야 한다.
나중에 파르시팔처럼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 P46

또 다른 차원에서 모자 간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의 발전은 아들이 먼저 어머니로부터 독립한 다음, 자신의 열정을 다른 여성에게 돌린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때 다른 여성이란 남성 내면의 여성일 수도있고 외부세계에서 만나는 또래의 여성일 수도 있다. 신화에서 파르시팔의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자 곧 죽게 된다. 아마도 이 어머니는 자신의 존재를 어머니로서만 이해하는그런 유형의 여성일 것이다. 이런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끝나거나 혹은 이런 역할을 빼앗기게 되는 순간 죽는다. 왜냐하면 이런 여성은 ‘어머니‘로서의 역할 이외에 어떻게 독자적인 ‘여성‘이 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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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는 해부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주이상스와의 관계에서 개인이 점유하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p116)

 

1.남성적 주이상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팔루스적 주이상스. 보통 더 큰 차, 더 큰 집 등이다.


2.여성적 주이상스: 여성 역시 남성적 주이상스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은 앙코르를 즐길 수 있다. 여성은 상징계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아 전체가 아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때문에 여성은 실재계와 관련된 타자적 주이상스를 즐길 수 있다. 선생님은 타자적 주이상스의 예를 예술,, (대상이 아닌)사물 등을 들었다.

 

문제는 상징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 실재계와 상징계가 충돌한다는 것일까?. 타자적 주이상스.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계를 대면하는 것. 재밌게도 신비주의나 라즈니시의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꽃을 보는 게 아니라 꽃이라는 단어를 본다는 것이다. 운운)

 

연상되는 다른 생각. 고병권이 강의에서 아파트 값이 올랐다 떨어지는게 어느 섬나라에서 원주민이 커다란 돌에 얼마라고 표찰 붙였다 바꾸는 거하고 같은 거라는 취지로 말한 것 같다. 고병권이 최근에 쓴 <고병권의 자본강의>(천년의상상)도 자본주의의 관점으로 자연을 재단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들었다.(이게 돈이 되나? 안되나?) 치킨값이 마트 치킨에 비해 너무 비싸니 원래 치킨의 원가가 얼마니 해도 "닭의 정당한 가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닭은 닭일 뿐이다. 가격이나 가치에 평소에 우리는 절절 매면서 살지만 그게 실은 인간이 만든 임의적인 것이라는 관점. 해방이기도 하지만 무정부적이기도 하다.

 

 

끝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활의 지혜

 

정신분석의 역할은 어떻게 모두 조화로운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가를 밝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으례 다른 사람을 자신이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듯한 것으로 우리 자신들을 바꾸려고 하는데 이것은 결코 타인의 욕망에 정확히 부합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남성과 여성 주체의 주된 문제는 그들이 그들의 배우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며 우리의 욕망은 충족 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진다....주이상스의 남성적 유형과 여성적 유형은 융화될 수 없는 것이다.(p171)

 

'연인이 사랑하는 이에게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자가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는 것' 사이의 비대칭성을 관찰할 수 있으며 바도 이것이 라킹에 의해 모든 성관계에 적용되는 것으로 묘사되는 특성이다. (P175)

 


ps. 대안연 [강좌] 라캉 시즌2- 브루스 핑크 <에크리 읽기>. 2025312()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730~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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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오해 - 10판
키이쓰 E.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 혜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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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주제로 하는 책이지만 비판적 사고를 다루는 책으로 마이클 셔머류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누군가가 자기를 규정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MBTI, 타로 같은게 유행하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한 방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란 느린 발걸음으로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공개돼서 반박당하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런 방면의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익숙할 상관관계나 인과관계의 차이, 반증가능성, 수렴적 증거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저자가 아주 편하게 서술하기 때문에 팝콘 씹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반면 영성류서적을 좋아하는 사람은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아서 불편할 수 있다. 영성서적류는 흔히 증언서를 증거로 삼는데 이 책에서는 증언서의 신뢰도를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태도가 확장된다면 기적은 없으니 발 밑이나 똑바로 쳐다 보라.” 정도의 세계관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고 나름 상당히 터프한 세계관이지만 동시에 지루하고 맥빠지게 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검증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는 대목도- 지금 라캉을 읽고 있는 나로서는- 인상적이다. (대안연에서 심리학을 강의하는 선생님은 프로이트가 시한이 다한 화석이지만 재평가 되는 면이 있다는 정도의 내용의 링크를 보내 주셨다. 내가 생각한 반론은 과학적 검증 모형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영역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툴을 적용할 수 없다고 그런 대상을 아예 외면해 버리는 것은 또다른 퇴보 아닐까?(지금 방금 든 뇌피셜이다.) 어쨌든 비판사고기술과 더불어 현대 심리학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점(심리학의 분야가 상당히 광대하고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안연 선생님의 인용은 심리학은 행정구역의 편의상 구분된 것이다.”)에서 ,그것도 엄청나게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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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텍스트나 장면들, 순간들, 타인이 발신한 기호들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본 책들과 영화들, 나는 그것들을 정말로 제대로 본 것일까? 처음에 무심히 지나갔던 문장들, 장면들이 어떤 경험을 한 후에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꾹꾹 눌러 담겨있는지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글을 읽을 때에는 거의 빙의 수준이 되어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바보의 벽>은 실제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중경삼림>을 한 다섯 번쯤 봤는데 세 번째 봤을 때 겨우 이해한 장면이 있다. 깨발랄한 왕페이가 몰래 들어간 양조위의 집에서 걸려온 자동응답기를 조작하는 장면이다. 난 그 짧은 장면을 매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세 번 봤을 때에야 그 장면이 왕페이가 양조위의 전애인이 보내온 재결합요구메시지를 삭제하는 장면이라는 알고 충격을 먹었다. <중경삼림>은 지극히 무해하고 상큼발랄한 영화가 아니라 스토킹 영화였던 것이다. 왕페이는 양조위의 인생에 애교정도로 봐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잡입한 게 아니라 아예 양조위의 인생항로를 바꿔버렸다. 만약 남녀 주인공의 설정이 반대였다면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마냥 흥겨워할 수 있을까?

 

갑자기 <중경삼림>이 생각난 이유는 어제 네 번째로 본 <밀레니엄 맘보> 때문이다. 이 영화가 4K리마스터링 된 후 개봉한 것을 계엄 덕분에 놓쳤다가 상영관을 겨우 찾았다. 청춘을 추념하는 기분으로 에무시네마에서 연거푸 두 번을 관람했다. 그런데 , 영화사의 명장면이라는 오프닝 신을 부릅뜨고 본 후 서기와 하오하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또 ~’하는 경험을 했다. 생일파티에서 신나게 놀고 들어온 서기가 하오하오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하오하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사랑의 동작을 한다. 그리고 서기에게 다리 벌려라고 말한 다음 서기의 하반신으로 향하는데 물론 예술영화 답게 그 앞은 탁자가 가리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게 사랑의 동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오하오는 서기의 윗도리를 벗기고 서기의 몸과 머리에 코를 갖다대는데 에로틱하게 보이지만 실은 이게 냄새를 맡는 행동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차렸다. 탁자가 가린 하반신에서도 하오하오의 상체는 그 짓을 연상하기에는 너무 상체가 아래로 내려가 있다. 하오하오는 놀고 들어온 서기가 바람피우지 않았는지 딴 남자 냄새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서기가 짜증을 내는지도 이해가 간다. 사실 하오하오가 귀가한 서기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영화 중간에도 나오는데 갑자기 서기의 브래지어가 노출되어서인지(수십년전 내가 dvd로 볼 때 누나가 한말.“너 서기 브래지어 볼려구 그러는 거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알지 못했던 것이 또 하나 드러난다. 두 번 봤을 때 알아차린 것도 있는데 잭 카오와 도즈가 처음 클럽신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제 네 번째로 보면서 마지막 홋카이도 신의 타임라인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기가 입고 있는 코트를 통해서다.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적어진다. 결국 더 섬세해 지고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문장 하나하나에, 장면 하나하나에 삶의 순간들 하나하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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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계 : 계속 변화해온 라캉의 개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프로이트의 이드,자아,초자아처럼 하나의 모델로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도. 절대로 상징화 될 수 없는 것. 이것은 상징계의 결여를 의미하고 우리는 이 결여를 메꾸기 위해 대상 a를 가지고 환상을 만들어 낸다. 라캉에게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상징작용과 의미들로 구성된 것이다.

 

“‘환상가로지르기는 주체가 실재계의 외상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주체는 외상적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 주이상스에 책임을 진다.”(p141)

 

라캉의 모델은 무엇인가를 찾아 영겁을 떠도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파랑새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애초에 파랑새를 잃어버린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허기에 시달리며 끝없이 대상 a’를 찾아 다니며 시련을 겪고 그것을 찾은 후에는 다시 실망하고 떠도는 인간 이미지... 하지만, 환상가로지르기는 오히려 주체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느낌이다. 당당한 시지포스의 느낌?...주이상스는 대상 a를 찾게 만드는 힘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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