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음)
이 영화의 단점은 이미 주요장면이 유튜브 쇼츠로 펴져서 막상 본편을 봤을 때 감흥이 덜하다는 점이다. 아마 사전정보 없이 봤다면 충격은 훨씬 컸을 것이다. 거의없다와 이동진 리뷰를 봤는데 무난하고 정석적인 해석이었지만, 고양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니키가 베어에게 죽은 고양이를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니키가 주문에 빠진 뒤 첫마디가 “고양이가 죽었어”이다. 그리고, 베어 집에 들어온 후 처음 한 이상한 짓이 고양이 장례를 치른 것이다. 이후에도 고양이는 계속 등장하는데 한 밤의 침대장면에서 니키가 음산한 동작으로 꽃병을 들고 온 후 “샌디(고양이)거야”라고 말한다. 유튜브 쇼츠에 의하면 한 밤의 침대장면에서 니키의 움직임이 고양이의 움직임을 흉내 낸 거라고 한다. 그리고, 니키가 베어에게 이것봐, 하면서 과장된 미소를 짓는 장면이 있다. 눈을 일자로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한껏 위로 올리며 웃는데 이 표정은 어째 웃는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보면 곧바로 니키가 바닥에 실례를 하는 장면은 키우던 반려동물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영화 초반 베어가 고양이가 죽은 바닥을 열나게 닦는 장면과 대응된다. 결정적으로 니키는 베어의 샌드위치에 죽은 고양이 다리를 끼워 놓는다. 그리고, 결말에서 베어가 고양이가 죽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이다. 왜 자꾸 영화 초반 죽은 베어의 고양이가 등장할까? 단순히 충격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머리를 굴린 후 내린 결론은 혹시 베어가 고양이를 일부러 죽인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베어의 고양이는 실수로 베어의 약을 먹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이후 베어는 약뚜껑을 닫아서 벽장에 넣는다. 하지만, 고양이가 돌려서 닫는 약뚜껑을 스스로 열고 약을 먹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베어는 침대에 앉아 통곡하지만, 혹시 이건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처분'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영화에서 베어의 성격이 모순적, 내지는 기만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니키는 은연중에 이걸 알고 있지 않았을까. 베어는 니키가 프리키하게 변한 이후 니키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객센터에 전화해 소원을 취소하려고 하고,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니키에게 “지금 행복한 거 맞지?”하고 물으며 사랑의 진정성과 상대방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같다.(베어가 니키를 진짜 사랑하는지에 대한 지표다.) 하지만, 비몽사몽간에 정신이 돌아온 니키가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 –고객센터에서 소름끼치는 니키의 비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어의 대답은 “내가 그렇게 싫어?”이다. 이 때 베어는 평범하고 소심한 찌질남이 아니고 잔인하다. 핑크핑크한 고백연습장면과는 달리 처음부터 베어가 니키를 진짜 사랑한게 아니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 이동진이 지적한 것처럼 베어가 사랑을 고백하려는 상대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손짓 하나, 한숨 하나에도 귀가 쫑긋해지는 법이다.) 초반에 알콩달콩하던 니키의 사랑이 광기로 변하는 것은 베어가 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 아닐까. 오히려 베어는 글을 쓰려는 니키보다 음악을 하겠다는 새라와 쌓아온 과거와 공감대가 더 눈에 띈다. (베어는 니키와 기타를 치면서 논다. 베어가 광분하는 것은 새라가 죽은 다음이다.) 마지막에 베어는 자살하지만 니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수라장에서 도피하는 것에 가깝다. 니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속인 것처럼 베어가 실은 고양이를 죽여놓고 잔인한 자신을 기만한 것 아닐까. 영화 초반 이언은 베어에게 고백연습을 시키며 타박을 놓는다. 하지만,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진짜 사랑으로 발전했거나 인생의 경험이 됐을 텐데....
사랑받는게 짜릿한 이유는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 자유'를 거세한 베어의 소원은 과녁을 빗나간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다. 리뷰도 그렇고 대체로 여론은 베어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는 것 같다. 베어를 위해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 나바레티같은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뿌리깊은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흥행은 그런 판타지도 동시에 만족시켜주기 때문 아닐까. 뭐 나만 그런건가. <헤어질 결심> 보고는 탕웨이 같은 여자한테서 저 정도로 사랑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으니. 마지막으로 베어에게 주는 충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살고 싶다는 의지가 어디서 오는지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왜 죽지 않고 고통의 세계에 몸을 더 맡기려 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아끼고 돌볼 것이, 내가 없으면 삶이 더 힘들 무언가가, 한마디로 눈에 밟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먹이를 주어야 할 금붕어와 반려견이 눈에 밟혀야 한다.
혹은 햇볕의 방향에 따라 자리를 옮겨줘야 하는 화초가 마음에 들어와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의지에 있어 결정적이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가 화초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낀다는 것은 무척 수고스러운 일이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을 묵직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옥상 난간 너머로 몸을 던지지 않게 만든다. 아껴야 할 것이 있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중 (강신주,EBS BOOKS)
서둘러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사랑받는 것은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는 것은 기껏해야 칭찬이나 편리함일 뿐이고, 종종 원치 않는 의무이며, 최악의 경우 부담이자 저주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사랑받는 것이 중요하다.
<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 사랑을 이해하는 철학적 가이드북>(로버트 솔로몬,이명호 옮김, 로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