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조건 - 융 심리학으로 보는 친밀한 관계의 심층심리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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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이 말을 듣고 음, 그런가, 했지만 다시 돌이켜보고 그냥 겉만 번드르한 레토릭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대체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죽음을 정말로 실감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연관인가.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말은 진리다. ‘투사라는 메커니즘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반복해서 실패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심리학의 관점 중 하나가 우리는 매번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간다는 관점이다. 이런 걸 습관이나 운명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패턴은 어릴 적 부모 같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갓 태어난, 한없이 무력한 아기는 분리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듯한 상실감, 주변 환경에 대한 무력감과 두려움, 공포 등의 패턴을 가지게 된다. 저자는 이걸 방어하는 여러 방어기제도 소개하고 있는데 가장 인상깊은 것은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대표되는 강자와의 동일시. 예상외로 이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광화문 탄핵반대 집회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최고 권력자의 모상 옆에서 손을 잡는 시늉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또 다른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유대감의 부족에 따른 방어기제도 눈에 띈다. 유대감이 부족한 상황의 아이는 내가 하는 만큼만 대우받는다라는 방어기제를 발전시킨다. 취업 못 하면 명절에 집에 안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이유가 이런 방어기제 때문 아닐까.

어쨌든 우리가 지금 말하는 사랑의 대부분은 자기 안의 구겨지고, 상처받은 콤플렉스를 타자에게 투사하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비치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삶의 책임, 자기 콤플렉스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는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 씌인 콩깍지가 벗겨지는과정은 나의 투사와 관계없이 타자는 완전히 나와 다르다는 것, 그 혹은 그녀가 나의 기대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대신 저자가 말하는 것은 영웅적 사랑이다. 상대방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삶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 어째 연인이라기보다는 동반자나 도반 같은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저자는 자신이 사랑의 환상을 깬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사는 가장 기본적인 정신역동 중 하나이다. ‘내 눈안의 들보’,‘내가 나무를 보기 때문에 나무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연상되는데, 자신과 맺는 관계의 질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질을 결정할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책의 결말에서는 투사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신이라는 절대타자와의 관계도 짚어본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종교는 유아 심리의 투사일 뿐일까? 저자는 프로이트가 옳지만 일부만 옳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겠지만-, ‘영적 직관이다.

홀리스의 다른 책처럼 이 책도 추상적인 단어가 많고 각 문장마다 무게가 있다. 한 번에 처음과 끝을 주파하는 독서 스타일은 책의 전개가 답답할 수 있다. 번역은 홀리스의 다른 책에 비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실증주의, 물질주의 경향의 독자도 영혼소명을 언급하는 저자의 조감도가 뜨악할 것이다. 하지만, 투사라는 정신역동으로 사랑을 설명하는 로직은 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저자의 이야기는 라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라캉은 주체가 상징계(사회,제도, 문명같은 뉘앙스다)에 진입하면서 탄생한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는다고 한다. 태어난 아기가 살아남기 위해, 제도에 편입되기 위해 입장료로 손모가지 하나는 바치는 식이다. 이후 주체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라캉은 이를 대상a라고 표현한다.- 찾아 헤매는데 이 과정에서 결핍이 완벽히 채워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무한반복이 이어진다. 융심리학 관점에 빗대 말해 보자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투사를 통해 낭만적 연인, 대상a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를 성찰해서 개성화’(자신만의 심리적 현실을 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와 전일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 과제를 완수할 때 나 자신이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내가 들은 사랑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정의는 아트앤스터디에서 강신주가 말한 사랑은 타자가 곁에 있으면 내가 즐겁기 때문에 타자를 계속 내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잘 해주는 것이라는 정의다. (강신주는 궁극적으로는 인류애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주제는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이 책에도 제법 현실적인 정의가 나온다. “사랑은 청년일 때는 성적 흥분, 중년일 때는 뻔한 익숙함, 노년일 때는 상호의존에 갖다 붙이는 말이다.”(미국 시인 존 시아디.) 저자가 말하는 영웅적 사랑이 김빠진 콜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이 사랑에 관한 이런 저런 담론을 기웃거리다 들은 현대인들은 사랑에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말이다.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맛은 좀 떨어지지만 영양은 풍부한 유기농 음식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융심리학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하나의 툴을 얻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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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런치>와 <퀴어>를 연이어 개봉한게 배급사의 기획은 아닐 텐데 결과적으로 연작영화를 본 느낌이다. 윌리엄 버로스 하면 읽어본 적은 없고 그냥 마약, 환각, 미로 같은 이미지만 떠오르는데 <네이키드 런치>를 보고 난 뒤 의외로 이 사람의 메인 테마는 자신의 성정체성 자각, 그에 따른 자책감 같은 고전적인 것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이키드 런치>에서 환상은 그냥 곁다리다. <퀴어>의 줄거리만 보고 난 뒤 이 영화가 <피터 본 칸트>나 아니 에르노의 <젊은 남자> 처럼  늙은이가 젊음에게 환장해서 벌어지는 플롯인 줄 알았는데, 전반까지는 그런 낌새를 풍기다가 나중에 <네이키드 런치> 식의 비약과 환상으로 방향은 튼다. 그리고 <네이키드 런치>와 비슷한 테마로 귀결된다. <네이키드 런치>를 미리 본 덕에 <퀴어>의 윌리엄 텔 놀이 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네도 똑같이 <네이키드 런치>에 등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은유인지 모르겠다. <네이키드 런치>는 90년대 영화인데 감독이 <퀴어>에서 오마주한 건지? 아니면 원작소설에서도 그대로 등장하는 설정인지 모르겠지만, 숨은 그림을 찾은 듯한 반가운 기분이었다.  <네이키드 런치>에도 등장하는 윌리엄 리는 자신이 퀴어가 아니라고, 몸과 영혼이 따로 논다고 말한다. 뭐 알 거 같기도 한데, 육식을 멈출 수 없는 비건주의자? 같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떠오른 대사는 <본즈 앤 올>에서 티모시 살라메가 한 말이다. "이게 우리야. 우린 원래 이래."

귀에 감기는 음악에 영화자체의 완성도는 괜찮지만 후반에 갈 수록 특유의 안드로메다 분위기가 난다. 퀴어라면 다니엘 크레이그와 드류 스타키의 육체가 엉기는 장면에서 보너스를 득템한 기분이겠지만, 나에게는 무감한 장면이었다. 외려 귀가하면서 지하철에서 옆에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가 앉았을 때 그 장면을 떠올리자 어색하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앞으로 계속 써먹어야겠다.  얼마 전에 본 <크라잉 게임>에서는 아직 모자이크가 붙던에 이 영화에는 모자이크가 없는게 눈에 띄었다. 이제 시대가 변한 건지? 다니엘 크레이그는 저렇게 찌질하지만 수트 하나만 바꿔 입으면 바로 007으로 변신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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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황혼에서 새벽까지> 하고 비슷한 설정이라고 들었는데 신기한 경험을 했다. 영화 중반에 뱀파이어가 등장하려고 분위기를 잡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저들이 표변해서 서로를 물어뜯겠지. 어떤 피칠갑이 펼쳐질라나.하는 심정이었다. 뭐 영화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패밀리'의 연대감을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등장인물들이 배신하면 나쁜 놈이지, 하고 약을 친뒤 피를 튀기는 장면은 영화지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진 후 자막이 올라오나 싶더니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이 심란한 영화를 순식간에 서정성으로 물들인다. 이제까지 전개됐던 막가파 설정(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처음 등장했을 때 평단 반응은 '막가파 패스티쉬' 였다.)이 하나의 은유와 함의로 변해버린다.  내가 떠올린 것은 <생쥐와 인간>(존 스타인벡) 의 장면이었다. 


"조지는 감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든지, 서커스가 오든지, 야구 시합이 있든지, 그밖에 무슨 일이 있으면…………."

캔디 노인이 찬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조지가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도 물어볼 필요가 없어. '구경이나 가지' 라는 한마디로 우린 거리에 나갈 수 있다구. 우유를 짜고 닭 모이를 던져주고 나서 우린 구경을 하러 나가는 거야.“   


마치 어떤 판사가 죽기 전에 회심해서 전체 인생이 바뀌었다는 설정처럼 마지막 장면이 전체 영화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문라이트>가 처음 나왔을 때 네티즌 비평 중에 흑인이 백인들 영화를 그럴 듯하게 흉내내서 상을 받았다 라는 식의 비평이 있었다. 즉 원본을 충실하게 모사한 짝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블랙팬서> 가 나왔을 때 흑인의 주류 히어로 첫 진입? 같은 반응이 기억난다. 여기에 깔린 전제는 결국 기준은 백인이라는 것이고 흑인이 백인이 세운 기준을 만족시켰다고 감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정말로 흑인들이 백인 컴플렉스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세련된 영화다. 단 울나라 기독교인이라면 약간 불편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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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 - 융 심리학으로 보는 친밀한 관계의 심층심리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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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의 목표는 환자가 지성화intellectualization와 합리화 rationalization 같은 저항의 반동을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향함으로써 온전한 깨달음이 주는 고통과 공포를 발견하는 동시에, 자신이 거기서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완전히 부조리하고 예측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음을,우리에게 마술 같은 수준의 궁극적 자기방어가 존재하지 않는 한 때로는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아픔을 겪어야 함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환상의 대상뿐아니라 환상과 망상 자체를 두고 슬퍼하고 비통해하고 나면 망상 없이 비교적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시간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덧없고도 소중한 경험임을, 우리가 환상을 갖지 않고 살아가려면 자기 삶의 의미를 직접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대와 요구가 들어섰던 자리를 희 - P157

망으로 채워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동성의 자리에 적극성이 들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돕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넓히고 성장시키는 쪽으로 희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슬픔도 기쁨도 더 풍부하게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어릴 적 잃어버린 에덴동산으로 통하는 문은 이미 닫혀버렸으며 불칼을 든 천사들이 그 문을 막고 있음을, 우리와 이어져 있던 어머니는 영원히,영원히 우리에게서 떠났음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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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어떻게 살아야 할까 - 삶의 길목 위에서 찾은 해답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미정 옮김 / 북아지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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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책은 왜 한국어판 제목이 따로 노는지 모르겠다. 원제는 <Living Between Worlds: Finding Personal Resilience in Changing Times>. 굳이 오십이 아니라도 자신만의 길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잘 다니던 대기업 퇴직하고 산티아고로 무작정 떠나는 사람? 들에게 빨리 떠나라고 뽐뿌질을 하는 책이다. 요즘 청년들 희망사항 1순위가 대기업이라는 게 약간 낯설다. 산티아고로 떠나는 게 더 이상 쿨하게 보이지 않나 보다. 예전 강신주 다상담 테마 중 하나가 진로문제, 회사문제였었는데(그 때는 대기업노예같은 뉘앙스였는데.) 요새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랄까,시대가 변했다. 뭐 그런 느낌이다. 홀리스 책에서 나오는 공통 테마는 이 책에서도 여전한데 다른 저서들에 비해 아마 가장 가독성이 좋고 내용도 알찬 거 같다. 번역도 괜찮다. 더군다나 심층심리학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어 맛보기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인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저자는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 사회적인 존재를 넘어서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누군가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저자는 의미를 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의미의 정의가 뭐냐부터 논쟁이 될 수 있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분위기는 자신이 더 큰 그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는 느낌, 삶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다. 혼이 의미하는 것은 주술이나 무속이 아니라(영어로는 프시케다.) 무의식의 차원을 넘어 근본적인 나(Self)’가 있다는 심층심리학의 인간상이다. 이 근본적인 나는 이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꿈이나 신경증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기존 사회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우리는 이런 신호를 외면한다. 저자가 여기서 드는 주된 방어기제는 두려움과 무력감이다. 이런 면에서는 이 책의 주제는 아니타 무르자니의 <두려움 없이, 당신 자신이 되세요 (산티)>와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아니타 무르자니는 에고와 더큰나를 구별하지 않는다. 반면 저자에게 에고는 더큰나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소명같은 느낌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명제는 기만적이다. 에고는 편한함, 익숙함, 안정을 원하지만 소명을 찾는 과정에서 에고는 고통을 느끼는 대신 의미를 찾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행복은 부산물처럼 다가올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조셉 캠벨의 “FOLLOW YOUR BLISS”의 심층심리학 버전이다. 캠벨은 자신의 인생사를 예를 들며 자신만의 블리스를 쫓아간다면 삶은 저절로 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와 인생,갈라파고스)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다이몬이 있으며 내면의 메시지, 개인적 권위를 신뢰하라고 말한다. 아마도 프로이트가 융과 결별한 이유가 이런 신비적요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30대에 캠벨의 말을 듣고 그럴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건 래퍼런스였지 그 말을 적극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다이몬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내가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면 그건 오만때문이라고 퉁칠 수 있다는게 문제다. 뭐 어쨌든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 자신만의 주사위를 굴리라고 말하는 책이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고 답답한 기분이 사라진다. 물론 실천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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