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의 정신 - 하루키 읽는 법 세계문학공부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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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 침묵의 카르텔인지 국내에서 하루키를 비평한 책이 의외로 없지 않을까. 몇 번 평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견강부회라는 느낌이 강했다. 반면 이 책은 하루키 독자라면 그래 나도 느꼈어, 하고 통쾌해 할 수 있는 책이다. 어려운 문학이론이나 난해한 문장 없이 쉽지만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 카프카라는 렌즈를 끌어와서 교양이라는 측면에서도 풍성하다. 오래전에 한국 문학계에 신인 작가들의 하루키 표절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 보다. 그런거 보면 작품의 질을 떠나서 하루키가 대단한 것 같다. 뭐 개인적으로는 청춘 3부작이 그냥 자기애의 표현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지만. 하루키를 제대로 읽으려면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을 눈여겨 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예시가 하루키가 쓴 재즈에세이다. 하루키 독자라면 그렇게 하루키월드가 확장되어 가는 것도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환영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하루키 소설의 핵심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본거 같은데 이 책에 비슷한 개념은 나오지만 같은 문장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이게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이다라는 문장이었나. 어쨌든 이 책에서 말하는 하루키 문학의 핵심키워드는 책임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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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 도쿄, 불타오르다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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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동명의 영화가 있어서 원작의 존재를 알게 됐다. 23년 일본 미스터리 대상을 휩쓸었다는데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휴일 아침부터 가끔 딴 짓하면서 본 게 저녁까지 무리없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질린다거나 책만 읽으니 머리가 후끈거린다는 느낌이 없는 걸 보니 분명 웰메이드 추리소설이다. 영화로 치면 관객이 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관객을 요리한다는 느낌이랄까, 이야기가 빈틈없이 꽉꽉 채워져 있다. 문장은 당연히 쉽고 책장은 훨훨 넘어간다. 하지만, 결말이 약간 고구마랄까. 헐리우드식 엔딩에 익숙하다면 분명 불만족이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결말의 반전도 뒷통수를 친다는 느낌보다 미야베 미유키 추리소설같은 사회파 장르가 떠오른다. 저자가 재일교포 3세라는데 아주 칙칙한 편견과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일본사회의 소수자로서 받은 차별과 배제(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에 대한 보복으로 이 소설에서 일본 사회에 폭탄을 투척한 거 아닐까. 범죄자도 당신의 연대에 끼워주느냐는 범인의 대사에서 일본 특유의 철통같은 울타리에서 배제된 사람의 느낌이 난다. 영화는  결말을 어떻게 각색했을까? 아마 원작대로라면 흥행에서 마이너스가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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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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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힐턴의 2루타처럼 소설가 지망생을 약 오르게 하는 게 있을까. 낭만적인 성공스토리를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걸 보면 신의 점지를 받은 선택받은 사람이 마치 남들은 다 집이 다섯 채인데 저는 두 채 밖에 없어요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다시 되새기게 되는 것이 지금 일본 문학의 주류같은 하루키가 실제로는 상당 기간 비주류였고 마이너였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하루키를 대하는 국내 반응도 재는 소설가라기 보다 문화상품이야정도 였던 것 같다. 하지만, 소설 쓰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어깨뽕없이 문학을 향해 직구 승부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작품을 문학이 아니라 팬시 상품정도 취급을 해도 짜증이 날 정도로 마이페이스를 지키는 하루키 스타일은 어깨한번 으쓱하고 말 것이다. 음 여기에 나오는 소설가의 방식들을 곧장 소설가 지망생들이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 뭐 이건 선택받은 사람이야기니까 그 뒤편에 이렇게 하다 수없이 실패한 지망생들이 있겠지. 지망생 입장에서는 하루키가 털어놓는 한숨과 고충조차 부러울 것이다.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모두 좋아하는 에세이이고 이 책은 기존 스타일의 결정판 같은 느낌이다. 하루키 특유의 경쾌한 유머는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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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매직 - 두려움을 넘어 창조적으로 사는 법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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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년들 중에 불안하고 가난하지만 창작혼에 불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을까. 예전에는 이런 초상들이 그래도 약간의 존경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냥 찐따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에게 창작은 경이로운 황홀이자, 자기 초월이고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그 초월을 위해 대체 자신의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창작의 불확실성, 우발성은 내가 창작자다.’라는 정체성조차 위협한다. 다른 직업에도 성공 여부는 갈릴 수 있지만 그 성공 여부가 보통 정체성까지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창작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하는데조차 훈련이 필요하다.(저자의 방법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매일 나는 **. 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끼>의 김태호씨가 강의 중에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허영만 선생같은 대가도 새로운 신작을 할 때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지금껏 성공해 왔다고 다음 신작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암울함과는 별도로 이 책은 한없이 가볍고 발랄하다. 아이디어가 정령처럼 자신의 숙주를 찾아 작가들 사이를 떠돈다는 발상도 재미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럴게 글질을 잘 하는지는 몰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를 양산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창조적 삶을 격려한다. 마치 명견 래시가 드넓은 평원에서 활기차게 양떼를 돌보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책장이 발랄하고 쉽게 넘어간다. 저자가 말하는 창작자와 창조성과의 관계는 우아한 파티에서 만난 연인과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를 신뢰하고 헌신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꾸밀 줄도 알아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연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치는 건 금물이다. 창조성에게 경제적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본인이 창조성을 부양하라는 얘기다. 당연히 창작한답시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빚 내가며 비싼 돈을 들여 예술학교에 가는 것은 금물이다.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지만 삶을 빛내는 보석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창작을 하면서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목에 힘이 들어간 열정 대신 호기심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진전시키라고 충고한다. (쉽게 말해 본인에게 재밌는 것을 찾아 그냥 그걸 하라는 얘기다.) 전제는 당신안의 보물은 발견되고 현현하기를, 당신이 예스라고 말하길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의 본질 자체가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비단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관이나 창작 태도를 보면 니체가 말하는, 천진난만하게 유희의 정신으로 영원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어린 아이의 비유가 떠오른다. 용기를 가지고 그 모든 비평꾼들의 입방아와 실패에도 신경쓰지 않고 그렇다면 한번 더를 외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향해 풍덩 뛰어드는 것. 예술가의 삶에 관심이 없더라도 저자의 입담 덕에 그냥 재미로라도 몇 번 더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술가의 고뇌를 내적인 고뇌와 외적인 고뇌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내적인 고뇌는 창작과정에서 나오는 좌절감과 실망이다. 저자는 창작과정에서 좌절하는 것은 창작과정의 일부이고, 그것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랑이 그 정도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외적인 고뇌라면 결국 돈이고 성공이다. 저자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는 외부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비평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고 각자 제 갈 길이 바쁘다. 당신은 그냥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하면 된다. 읽고 나면 즐거움 지상주의같은 느낌이 든다. 뇌과학적(?) 비유를 들자면 저자가 드는 창작의 장애물은 전부 좌뇌적인 느낌이다. 마이클 싱어가 명상 서적에서 말하는 쉴새없이 품평하고 비교하고 떠들어대는 목소리말이다. 저자가 하는 격려는 그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 저자가 창조의 즐거움을 묘사할 때 드는 초월이라는 단어는 우뇌적이다. 창작자의 기쁨이 마치 명상가가 자신의 자의식을 잊어버리고 열반의 기쁨에 드는 것같은 느낌이다.

 

딴지를 하나 걸자면 저자야 글쓰기에서 소명과 사랑을 찾아서 그것에 헌신하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이한 일 아닐까? 자신만의 꿈이나 목표를 찾으라는 말이 텅 빈 말이라는게 이미 최근의 동향 아닌가.(예를 들어 <행복하게 일하는 연습>(코이케 류노스케,랜덤 하우스), <인생 반 내려놓기>(나카지마 요시미치,21세기북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고(<올 어바웃 러브>(벨 훅스,책읽는 수요일) 인생에서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라, 라고 진행시킬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또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과정에서 얻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결과는 말 그대로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머리로 상상은 돼도 체감은 되질 않는다. 오히려 그 정도로 몰입감과 만족감을 주는 일 자체를 찾기 힘든 것 아닐까. 생업을 유지하며 불륜상대를 만날 시간을 내듯 창작할 시간을 내라는데 말이 쉽지, 그건 창작의 씨앗이 짓밟히는 것 아닐까. 생업에 치여 창작자의 길을 결국 포기한 사람에게 네가 포기한 건 어차피 그 정도의 재능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것 아닐까. 예전에 고독사한 영화감독이 떠오른다. 어쨌든 내 안의 창조성의 정령이 나를 기다린다는 저자의 망상(우리 모두는 각자의 망상 속에 산다는 저자의 말) 진실이기를. 유일하게 맘에 안 드는 것은 <씨크릿>류의 책을 연상시키는 북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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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탄생 - 불교 성립 이전부터 붓다 입멸까지
미야모토 케이이치 지음, 한상희 옮김 / 불광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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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교학에 문외한이라 일본에서 저자의 학문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의 불교학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불교학계의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불교 그 자체만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은 불교 지상주의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연구자들이 이미 승려이거나 불교신자라고 하는데 두 번째 관점은 일종의 비교 연구의 관점으로 불교와 당시 인도의 외도사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 관점이 합리적일 듯 한데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이 책에는 저자가 지지하는 두 번째 관점이 래디컬하다는 암시가 있는 것 같다. 불교를 윤회나 업 같은 종교적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철학이나 사상사적인 면으로만 조망할 수 있는데 이 책은 후자 쪽이다. 저자의 태도는 시종 환상과 신비주의를 버리라는 식이다. 대승불교가 지나친 선정(禪定)주의로 사마디를 신비화 신격화 했다는 것이다. 빤야 즉 지혜는 사마디와 원리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선정에 드는 것은 재능이 있는 소수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꼭 모든 축구선수가 메시처럼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재능이 없는 다수는 선정을 신비화하고 열반을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육사외도와 우파니샤드를 설명하는 책의 전반부만 내용이 거칠고 붓다의 생애와 불교의 성립과정을 서술하는 나머지 부분은 아무런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붓다의 생애이지만 저자만의 해석이 가미되면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예를 들어 라훌라는 늦게 낳은 것이 석존이 성관계에 혐오감을 가졌기 때문이라든지, 박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출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문장에는 왠지 돌직구 같은 느낌이 있다. 이후 불교의 발전은 방편의 비대화라고 저자는 대승불교에 날을 세운다. 방편이 목표를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리는 석존의 초상은 실용적 허무주의자다. 실용적이라는 의미는 어차피 의미없는 세상, 계율에 엄격하지 않고 도움이 되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게 석존의 태도였다는 주장이고, 허무주의라는 주장은 석존이 죽음과 허무주의를 지향했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생존욕구의 범위안에 있는 질문을 석존에게 묻는 것은 연목구어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허무주의라고 하면 왠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고엔카10일코스에서 늘상 듣는 말이 평정심과 아니짜(무상)이다. 한번은 모든 것이 아니짜고 평정심을 지켜야 한다면 희노애락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답변인 즉슨 희노애락이 사라지는 대신 자비희사가 듭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허무주의의 설명에서 끝나고 내가 들었던 자비희사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읽고 나면 글자 그대로 허무해진다. 삶은 살 가치가 없고 죽음을 기다리는게 최고라는 것이 석존의 원시불교의 가르침이라는데 힘이 빠지지 않겠는가. 저자 입장에서는 이것이 환상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할테지만 말이다.

 

ps. 고엔카 코스에서는 정화라는 말을 쓴다. 그 느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갈애라는 것은 마치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구같은 것 아닐까. 내 눈 앞에 마개를 막 딴 차가운 콜라병이 김을 풍기면서 있는 것이다. 이 때 내 마음에 드는 욕구는 단순히 물을 마실 때의 욕구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이런 욕구에서 벗어날 때, 긴장에서 벗어날 때 오는 청정한 마음 같이 있지 않을까. 저자가 그린 붓다의 초상이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것이라 아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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