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융 심리학이 말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시간 자기탐구 인문학 1
로버트 존슨.제리 룰 지음, 신선해 옮김 / 가나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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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존슨 콘텐츠의 또 다른 변주다. 차이가 있다면 훈련 매뉴얼이 추가돼서 좀 더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 들고 불교나 인도 신비주의 서적에서 볼 수 있는 표현들-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깨달은 자는 같은 일을 다른 의식으로 한다든지-이 추가돼서 좋게 보면 관점의 확장이지만 난삽하다는 느낌도 든다.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안정되고 영혼이 풍성해진 느낌이 들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정색하고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데?“ 하며 따져들면 막막해지는게 특징이다. 이 사람 콘텐츠 중 가장 래디컬한 주장이라면 ‘미덕의 상대성’일 것이다. 거의 ‘새로운 윤리’의 창조까지 가는 내용인데 모든 미덕은 반대쪽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된 그림자는 반드시 돌아와서 자신의 지분을 주장한다. 해야 할 일은 기존의 미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덕에 의해 억압된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이다. 농담처럼 말하면, 윤석열탄핵찬반 집회를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그런 느낌? 만약 미덕이 너무 강조돼서 신경증을 일으키는 사회라면 저자의 처방이 설득력이 있을 텐데 미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미덕의 준수가 오히려 필요한 사회라면 저자의 주장은 초등학생에게 대학강의를 하는 셈일 것이다. 저자가 이런 대극을 통합하기 위해 내놓는 대안은 빅터 프랑클 식의 무조건적인 긍정이다. 저자들의 ‘그림자’론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논리적인 정합성이 있다. 모든 미덕은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은 니체까지 갈 것도 없이 여행 좀 많이 해보면 느낄 수 있다. (물론 상대성을 초월한 근본적인 미덕-예를 들어 생명은 소중하다- 은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의 초반에는 그런 미덕을 추구하는 패턴이 도움을 주지만 해가 정오를 지난 중년에는 그런 미덕에 의해 억압된 것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사람들은 기존 미덕의 패턴만 반복해서 문제를 키운다는 주장도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가 삶의 대극을 끌어안은 대안으로 내세우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삶의 이중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호하다. 이런 태도는 선불교 일화부터 빅터 프랑클까지 이미 여러번 언급된 관점이고 이 대목에서 갑자기 왜 이런 관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원래 그런 거'라는 식으로 넘어간다. 그 말 자체는 물론 듣기 좋은 말이지만 설득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나쁘게 보면 이 책이 불교나 신비주의 전통 담론을 모아놓은 페스티쉬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용적으로 이 책을 본다면 중년의 위기를 기존 미덕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패턴(컴플렉스)에서 도래한 것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그림자를 통합한 완전성으로 극복하라는 도식인데 영성적 인간관을 배경으로 한다는 게 특징이다. 융심리학이 원래 영성적인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상징기법들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 이 있다. 이 책은 로버트 존손의 기존의 여러 콘텐츠와 심층심리학을 요약 정리한 맛보기 인트로 느낌이다. 서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감별할 수 있는 앙케이트 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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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전사, 마법사, 연인 - 어른이 되기 어려워하는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
로버트 무어.더글러스 질레트 지음, 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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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심층심리학 서적이다. 이 책도 다른 융심리학 서적처럼 안정감과 위안을 준다. 고대에는 소년이 성인이 되는 입문의식이 있었지만, 전통과 의례가 사라진 개인의 시대에서 미성숙한 남성성이 유해한 영향을 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입문의식이 사라진 게 비록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소년은 남성이 될 책임이 있다. 지금 소년은 전통과 의례에 기대지 않고 각자 성숙한 남성이 되어야 한다. (이건 마케팅이겠지. 그러니까 자기들 책 사 보고 자기들한테 상담해라,이런 거) 소년의 특징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면으로는 익살스러움, 즐거움,활기 등 이겠지만 이 책에서 드는 성장하지 못하고 흑화한 소년의 특징은 가학성,수동성,무력함,통제욕 등이다. 일단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집단무의식이나 원형같은 융심리학의 기본전제를 깔고 소년의 원형을 신성한, 조숙한, 오이디푸스,영웅적인 아이원형으로 나눈 후 이들의 특성과 이들이 흑화할 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각각의 버전으로 서술한다. 이러한 소년의 원형이 성장한다면 왕, 전사, 연인, 마법사가 되는데 역시 이 성숙한 남성의 원형도 흑화한다면 다른 버전으로 바뀔 수 있다. (왜 흑화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까지는 안 나온다.) 각각의 원형을 서술할 때 저자들의 통찰이 곁들이지면서 각 원형의 설명을 돕는다. 가부장제하에서의 남성은 아이인가? 저자는 가부장제를 소년지배사회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가부장제의 특징은 여성성과 진정한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 것이고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는 연약한 소년심리에 근거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가학성, 폭력성이 과도한 남성성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여성성에 압도된 결과라고 저자가 진단한다는 것이다. (<페니스 파시즘>(강준만외, 개마고원)도 이 메카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소년이 성숙한 남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원형은 영웅 원형이다. 영웅원형은 소년이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고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또 다른 심층심리학자인 로버트 존슨은 소년기의 중요과제가 마더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한다.(<내 안의 여성성 마주하기>로버트 A 존슨, 동연) 이는 패배하고 싶은 욕망이고, 라캉이라면 죽음충동이라고 불렀을 법한 욕망이다. 다시 자궁으로 돌아가 돌봄받고 싶은 욕망이고 중세 신화에서 용과의 전투로 상징될 만큼 처절한 전쟁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싸우던 영웅(소년심리)은 죽음을 맞이하고, 초월적인 목표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며 겸손을 아는 남성성이 탄생하게 된다. 성숙한 남성성인 왕,전사,마법사,연인은 힘을 가진 자비로운 사람이미지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성장하도록 조력하는 왕국의 규율자이고, 수호자이며 타인과 공감하는 연인이다. 그는 내면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목표를 위해 고통을 견딜 만큼 강하고,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지 않을 만큼 지혜롭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소년이 남성성으로 성숙되는 과정은 거창해서 벅차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에고의 죽음이 소년을 남성으로 이끈다는 것인데 이는 불교식으로 하면 해탈 개념 아닌가. 뭐 옛날에는 이런 어른들이 많이 있었다고 저자들이 개탄하니 할 말은 없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원형과 그 흑화버전을 주변사람들에게 대입해 봐도 재미있을 것같다. 예를 들면 신성한 아이흑화 버전인 소년 폭군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직장상사 이미지 아닌가?(아니 나만 커리어를 바닥으로 찍은건가? 나이 많은 부장,팀장님이 어린 여직원에게 놀아줘 놀아줘 하면서 과외의 업무를 맡기지 말자. 손만 안 댔다 뿐이지 그것 역시 부당한 짓이다. 격노는 겁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수괴님도 이 버전이 아닐까 짐작한다.)

몇 가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마루야마 겐지였는지 나카지마 요시미치였는지 헷갈리는데 술에 취해 귀가한 직장인 가장을 아이 다루듯 하는 아내를 보고 일본 가정의 실상을 알게 됐다는 외국인 이야기다. 언젠가 강신주씨가 강의 중 한 이야기인데 등산하다 보면 일가족 단위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반응이 다르다고 한다. 부모가 어차피 자신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남자아이는 기본적으로 힘들다고 뗑깡 모드로 들어가는데,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여자아이는 힘들어도 아닌 척 애교를 부린다는 것이다. 예전에 50대 여사님들과의 대화에 낀 적이 있는데 그 여사님 왈 자기 남편이 괜한 고집피우고 삐지는게 둘째 아들과 똑같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나. 그 말 듣던 다른 여사님 왈 이제야 그걸 아셨어요.” 그렇다고 또 발끈할 필요는 없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남성성이 (아마도 페미니즘에 의해)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딱히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하거나 책임감이 있는 건 아니라고. 남성들이 해야 할 일은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여성들을 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고 한다. 책은 성숙한 원형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되는데 능동적 심상화,주문걸기, 롤모델 존경하기,원형처럼 행동하기이다. 능동적 심상화는 로버트 존슨의 <내면작업>(동연) 과 비슷하고, 다른 방법은 일종의 자기암시를 세련되게 만든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다른 심층심리학 서적처럼 비슷한 장단점이 느껴진다. 읽을 때는 위안이 되고 마음을 가라앉히지만 읽고 나면 정작 건더기는 많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 마지막 해법에 좀 더 저자들이 힘을 줬다면 달라졌겠지만 그러면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 더 가까워 졌을 것이고, 여타의 다른 영성자기계발 서적처럼 왠만해서 삶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읽고 나서 어떻게 이 책의 지침을 따를지는 독자에게 달렸지만.) 한번 이들의 지침을 따른 후 삶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챌린지 같은 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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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걸작까진 아니고 저주받은 수작 정도의 평가를 받은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의 한줄평이 한낮 아파트의 지리멸렬 헛소동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이 영화를 즐기려면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느끼는 자세가 필요하다. 별 것 아닌 얘기를 작은 설정 변화와 배우들의 연기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뭔가 터지나? 싶어서 기대를 하고 보면 아주 극적인 대목은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게 되는 건 작은 변화들이 계속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미키17>을 보고 난 뒤 <플란다스의 개> 의 향기를 느꼈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줄기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들이 갈래를 치는데 그 지리멸렬함이 <플란다스의 개>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대서사에 어울리는 SF 라는 장르와 <플란다스의 개> 식의 미세정서가 충돌하기 때문 아닐까? 차라리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티모가 잘 죽고 내일 보자라고 인사할 때 <플란다스의 개>를 봤을 때처럼 작은 아이러니와 재미를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아이러니가 연속될 때 영화의 만족감은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예고편이 스포일러처럼 되어 버렸다. 그만큼 스토리 자체는 <플란다스의 개>처럼 별 것 아닌데 예고편의 장면들이 그런 설정변화들을 노출시키며  소소한 재미를 앗아간다. 이 영화는 나에게 전혀 어렵지 않다. 사실 한국에서 직장생활 좀 해본 사람이면 미키의 정서는 직빵일 것이다. 미키가 나 아직 먹을 만해하고 소리칠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던데, 그거 우리가 면접 볼 때 맨날 하는 짓 아닌가? 일파가 왜 소스에 집착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부임 첫날에 기이한 취향으로 사무실 인테리어를 뒤집는 관리자를 얼마나 많이 봤던가? 지롤하는 직장상사 앞에서 미키18처럼 한 마디 던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것도 일종의 서구동경이겠지만 어쨌든 흥행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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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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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어둠을 몰아내는게 아니라 빛이 커질수록 그림자는 더 커진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게 된 어둠은 삶이라는 판을 뒤집고 중년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자아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지만 그림자는 그런 자아가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다. 마치 라캉이론에서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는 것처럼, 저자의 모델에서 인간은 문명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그림자로 만든다. (여기서 저자가 짚는 아이러니한 부분은 선악의 기준이 문화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은 신에게 받은 것은 전부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발전된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처럼 억눌린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저자의 드는 주된 메커니즘은 투사이다.(저자는 낭만적인 사랑도 투사로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 안의 인정하기 싫은 그림자의 부정적인 면을 타자에게 투사하는데 그 결과가 인종주의나 전쟁 등으로, 그림자의 긍정적인 면을 투사할 때는 영웅숭배가 나타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그림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내면작업>(동연출판사)을하는 것이다. 상징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무의식에게 상징은 진짜 현실과 같다. 내면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읽어보면 거의 오컬트 느낌이 들 정도다,) 책에 나오는 방법은 그림자의 특질을 표현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단편소설을 쓰거나, 춤을 추거나,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어버리는 행위이다.

저자의 최종목표는 전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한 상태를 역설로, 그렇지 못한 상태를 모순으로 개념화하는데 가장 애매모호한 부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는 맥락인지 저자는 각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말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한다. 모순은 한 가지 대극만 추구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바른 것에 의존한다. 반면 역설을 두 대극을 전부 존중하는 것으로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히 견디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강인한 자만이 역설을 견딜 수 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묘사한다면 딜레마에 빠졌을 때 타협’(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을 때 떡볶이를 먹고 죽는 게) 아니라 상이한 동력을 에너지로 해결책(떡볶이를 먹고 싶은 욕망과 죽고싶은 욕망의 공통점을 찾는 것?)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선악은 하나이고 죄책감은 오만이라고 까지 말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전쟁과 죄책>(노다 마사아키, 또다른 우주) 은 죄책감이 삭제된 전후일본사회가 다시 극우로 기울어지는 상황을 지적한다. 인간의 발달을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포토라인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드는 사람들한테 기가 차는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죄책감 좀 느끼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만돌라를 설명한다. 두 개의 원이 겹치는 이미지이고 대극 사이에 연결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는 동사를 이용해 주어와 목적어를 일치시키는 만돌라이고,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십자가 처형장면은 잔잔한 음조와 거슬리는 음조를 이용한 만돌라이다. 저자는 죄책감에 쏟는 에너지를 이용해 만돌라를 창조하라고 조언한다. 뭐 당장은 만돌라가 뭔지 모르더라도 딜레마의 상황에서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관점은 즉시전력으로 실생활에 투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적이고 계시적인 문장은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이다. 위안과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읽어도 뭘 읽었는지 멍해지는 그런 효과를 가져온다, 책의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서 위안과 영감을 얻고 싶은 분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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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성성 마주하기 로버트 존슨 융심리학 7
로버트 A. 존슨 지음, 이주엽 옮김 / 동연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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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현대 남성의 전장은 관계의 영역이라고까지 강조한다. (마초의 시대는 확실히 갔다.)여성성과의 관계가 남성의 행복 가치, 의미를 결정짓는데 여러 가지 여성성을 섞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한다. 저자가 드는 해결책은 명료한 의식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명료한 의식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까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서 여성성을 의미하는 단어는 부드러움, 상대성, 이성과 객관성,추상성에 대비되는 감정, 생명의 이미지이다. 남성성은 "거만하게도" 힘과,소유,지배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성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남성성이 결여되면 무기력하지만 반대로 여성성은 힘과 의미, 가치를 일깨워주는 건 여성성이다. 저자가 드는 여성성의 여러 유형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머니 콤플렉스와 아니마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어머니 콤플렉스는 패배하고 싶은 의지. 다시 유아로 돌아가 돌봄받고 싶은 욕구, 자살은 어머니 콤플렉스의 승리다. 수많은 남자들이 어머니 콤플렉스에 휘둘리고 평생 계속되는 중세 신화의 용과의 전쟁이다. 정직하고 분명해야 하고 명료함과 의식을 도구로 싸워야 한다.(저자는 어머니콤플렉스의 예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든다. 그의 남성적 행동이 어머니컴플렉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니마는 내면과의 연결성을 통해 남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불어넣어 주는 의미의 운반자이고 환히 빛나며 생기를 주는 내면의 성질이다. 인간은 완결성과 전체성을 원하는데 (플라톤의 향연의 거인 이야기.) 남성성이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성성이다. 남자의 인정욕구, 여성의 공감욕구는 연애담에서 흔한 이야기인데 저자도 아니마라는 개념으로 결국 같은 말을 한다. 남자는 취약해서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숙녀가 가볍게 비웃기만 해도 모든 승리는 재로 돌아간다...남자의 힘과 기운의 주인이 그녀이기 때문이다”(혹시 윤통과 그 배우자가 이런 관계일까?) 문제는 이들 원형이 뒤섞이거나 오염될 경우이다. 청년기에 용과의 전투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하면 중년의 통과의례에서 대혼란에 빠진다. “ 21세에 자기 인생을 두 팔로 꽉 붙들지 못한 남자가 45에 요구되는 희생을 제대로 치르기란 불가능하다,.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구체적 여성에게 투사하는 예도 나온다. 저자는 20세기의 여성의 반란은 남성아니마 담지자가 되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본능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한다.

조셈 캠벨의 글에서 어떤 여학생이 캠벨의 영웅신화에서 여성은 영웅이 될 수 없냐고 물었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은 퇴직할 때가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던 거 같다. 이 책에서 말하듯 신화는 내면세계이고 상징이다. 탑 안의 공주 때문에 또 기분나빠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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