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늦지 않았다 - 마쓰모토세이초, 반생의 기록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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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일생‘ 마쓰모토 세이초의 숨겨진 욕망은 탈출이었다

어머니는 일흔여섯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여든아홉까지 사셨다. 외아들인 나는 부모에게 내 인생의 대부분을 구속당했다.
내가 형제가 있었다면 조금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집이 가난하지 않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이 ‘자서전‘ 비슷한 것도 틀림없이 더 재미있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는 부모의 애착 때문에, 열여섯 살 쯤부터는 가계를 거든다고, 그리고 서른 즈음부터는 처자식과 부모를 부양하느라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러니 내게 즐거운 청춘이 있을 리 없었다. 칙칙하고 어두운 반생半生이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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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손해를 많이 보면서 이런 걸 전혀 알려주지 않은 부모님을 점점 원망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처세술은 사회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하는 대신 참고 견디라고만 가르치셨다. 옳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모든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하는데다 사회는 그들을 벌주고 나를 칭찬하는게 아니라 그들을 칭찬하고 나를 벌주었다."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후안옌, 월북)  p234.


"이러한 현실적 교육을 한층 진보시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앞서 말한'왕따의 권력구조'를 있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을 제안한다. 현실 사회는 권력구조로 점철되어 있고, 너희는 이미 그 사실을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예행연습을 하고 있노라고,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느니 기본적 인권이라느니 하는 입바른 소리는 그저 이념에 불과하며(이념적으로는 훌륭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동떨어진 아수라장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가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내 몸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 결국 가해자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열 살쯤 먹었으면 이런 가혹한 권력관계는 알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교실에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양, 혹은 타파해야 하는 악인 양 동화같은 이야기만 읊어대니, 아이들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다."


                       <차별감정의 철학>(나카지마 요시미치,바다출판사.)  p60


이 글을 읽으면 왜 이상민 전 장관이 헌재 증언에서 "단전 단수를 적은 쪽지를 머어어얼리서 봤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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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 - 일이 내게 가르쳐준 삶의 품위에 대하여
후안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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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노동일지. 일독의 가치가 있지만 책 표지의 상찬만큼은 아니다. ~플레이션은 결국 신뢰성만 떨어뜨린다. 노동자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어드밴티지가 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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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처럼 허망하고 서글픈 질문이라니. 한 인물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의 모습을 하나의 영상 안에 담아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을 관찰한 느낌이다. 저 영상 안의 인물은 한 때 숨을 쉬고 실존했다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다.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비열하게 생각하면 어이없이 끝나버린 영화속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인간의 삶이란 저렇게 허망한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겸허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점을 우주로 올려서 삶을 관조하게 하거나 불교의 백골관비슷한 효과인 것 같다. 부모가 누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것이 단 한 가지 이유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의사의 시각으로 봤을 때 당시의 조현병 치료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80년대 누나가 발병했을 때는 아마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추측대로 자식이 조현병 환자라는 것이 창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적응하기 시작한 것 아닐까. 나는 그 가족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 섣부른 추측을 하는 것은 그 가족에게 실례가 될 것이지만, 감독이 영화를 공개한 이상 이런 상황도 감수하리라고 본다. 감독이 촬영을 위해 본가를 방문했을 때 부모가 누나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였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의외로 누나의 행동이 폭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누나가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입원을 시켰을 텐데, 아마 두 노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발병만 했던 것일까. 차라리 누나의 입장에서는 폭력이라도 썼어야 했던 것일까. 사랑으로 뭉친 가족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가족 역시 서로를 도구적으로 대한다는 게 진실일 수 있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를 떠올려 보자. 자식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야 쓸모가 있고, 부모는 얼마 이상을 벌어서 무엇을 해줘야 자격이 된다. 서로를 도구적으로 대할 때 가족 구성원이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진부한 말로 행복한지는- 논외의 대상이다. 가부장 가정에서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가족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도 가장은 우리 집에는 아무 문제 없어, 하는 식으로 문제를 덮어버린다. 가족 구성원의 속은 썩어들어가든 말든 마치 그런 일은 없다는 듯 평화로운 침묵이 가정을 덮는다.예전 마약방지 캠페인에서 나온 대사처럼 너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편안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네가 가장 중요하고,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가족구성원은 이중명령같은 상황에서 혼란에 빠진다.(즉 시키는 대로 한다.) 그렇게 이 가족은 누나의 인생과는 상관없이 상황에 적응을 한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않고 누나와 장기간 집 안에서 칩거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머니가 누나를 돌본 것이 아니라 누나가 오히려 어머니의 공백을 메우는 상황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딸을 그렇게 방치한 것은 어머니의 판단이었고 나는 따랐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답변은 진실일 수도 있고 면피일 수도 있다. 조현병이 발병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가고시와 의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사망했을 때 딸과 함께 쓴 논문이야기를 하는 걸 보며 의학 연구자라는 모델에 이 가족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러고 보니 집 안에 고가의 실험기기가 있을 정도다.) 의대를 가기 위해 4번이나 도전해야 했던 딸은 발병하자 점술이라는 정반대의 벡터에 빠져들었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우리 인생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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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구치 요리코의 최악의 낙하와 자포자기 캐논볼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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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로망 포르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엄청 수위가 높은 건 아니지만(오히려 <불량공주 모모코>같은 느낌이 난다.) 일본 특유(?)의 엽기적인 느낌이 난다. 오승호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 흡인력과 속도는 엄청나다. 저자가 감독 지망생이었다는데 영화 연출하듯 소설을 쓰는 것 같다. 하루키가 펄프 픽션을 쓴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오승호 소설에서는 성이나 배설같은 자극적이거나 근친상간같은 반사회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느낌이 난다. <폭탄><스완>에서는 무차별 테러, 묻지마 살인을 자세히 묘사하고, <라이언 블루>는 기존의 느와르와는 다른 반칙느낌의 경찰관들의 범죄다. (경찰소설이라는 출판사의 광고에 속지 마라.) <로스트>는 초반의 고문 장면을 보고 흥미를 잃었다. 이 책도 표현의 수위를 넘어서 설정 자체가 엽기다. 소설에서 나오는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결정하느냐식의 주인공의 대사는 오승호 본인의 질문일 것이다. 아사이 료의 <정욕>의 테마와 비슷한 취지의 주장이다. 단 이런 대사를 SM소설에 심취한 4차원인 주인공이 하는 것은 무리데쓰요이지 않을까. 취향이라면 재밌게 볼 수 있겠지만 난 아니다. 취침시간을 어겨가며 이 책을 읽은 다음 빡쳐서 오승호 소설 내가 또 읽으면 개다.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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