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기획회의(27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못 받았기 때문에 아래는 교정본이 아니라 초고다. 대리언 리더의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을 거리로 삼았는데, 분량상 책의 일부 내용만을 정리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 읽어볼 참이다. 저자의 <라캉>(김영사, 2002)를 읽어본 독자라면 흥미로운 '성찬'이 될 듯싶다.
기획회의(10. 07. 05)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무엇이 궁금해서 이 책을 펴보게 됐을까?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 책의 원제를 직역한 걸로는 ‘왜 여자는 보내는 것보다 더 많이 편지를 쓰는가?’(‘Why do women write more letters than they post?’ 이건 물론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미끼다. 당신은 혹 그런 게 궁금하지 않은가라고 그는 묻는다. 아마도 그가 던지는 질문 이전에 그러한 ‘사실’,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로서 구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맞아, 정말 그래! 그런데, 왜 그런 거지?’라고 맞장구를 치는 순간, 이 질문은 우리를 어떤 앎으로 인도하고 그 원인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한다. 두 가지가 전제다. ‘왜 여자는’이 암시하는 바대로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의 대표적인 양상을 여자들의 편지쓰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그런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손에 드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나는 조금 다른 경로를 따랐다. 책의 타이틀보다는 저자에게 먼저 끌린 때문이다. 주디 그로브스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곁들인 라캉 입문서 <라캉>(김영사, 2002)의 저자가 바로 대리언 리더였고, 기억엔 그 책의 참고문헌에서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란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실제로 저자 소개에는 “영미권에서 라캉 연구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복잡하고 난해한 라캉 이론을 대중에 소개하는 데 기여해왔다”고 돼 있다. 핵심은 그가 ‘라캉 연구의 권위자’이며 주로 ‘라캉 이론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중화’의 주제가 이 책의 경우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라캉의 이론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그가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라캉 더하기 라이크’인데, 라이크는 프로이트의 초기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테오도어 라이크를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의 이론에 기대어 저자가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찰과 해석의 콜라주”이다.
저자의 ‘관찰과 해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맛보기. 만일 당신이 남성에게 코트를 팔고자 한다면 요즘엔 다들 그런 옷을 입는다고 말해주는 게 좋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에게는 아무도 그런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게 더 낫다. 왜 그런가. 남성들은 일반적인 경우에 포함되기를 좋아하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좀 약한가? 그렇다면, 또 다른 관찰. 저자가 상담했던 두 살 반 된 남자아이는 창가에 늑대 한 마리가 있다면 걱정했다.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도 동일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늑대가 뭘 하려는 것 같으냐고 저자가 묻자 남자아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반면에 여자아이는 “가서 물어보자”고 했다. 지식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독자에게는 “가서 물어보자”고 답한 여자아이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러 인용과 사례 해석의 콜라주를 몇 장면 따라가보면, 일단 라캉의 대전제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단일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성의 본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초경을 겪은 여자아이들의 우울증을 설명한다. 그 경우에 우울증은 초경 자체에 대한 놀람이 아니라 초경을 겪었음에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월경은 소녀를 단숨에 ‘여성’으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주는 공식이 아니다. 때문에 여자들의 관심은 언제나 ‘대상’보다는 ‘관계’에 두어진다. 가령 카페에 앉아 선남선녀 한 쌍이 걸어가는 걸 보는 상황에서라면, 남자들은 보통 여자의 매력에 이끌려 그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에게 끌리기보다는 함께 가는 여자를 보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녀들의 관심은 남자 혹은 여자라기보다는 그들 간의 ‘관계’다. “저 여자는 남자를 어떻게 자기 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문화적 영향이나 교육의 결과가 아니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한 사례에 따르면, 남자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접 주장하는 데 반해서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의 욕망을 대신 내세운다. 자기가 갖고 싶은 인형을 좀 달라고 말하는 대신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인형을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곧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떠안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자신이 소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서 라이벌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대상보다는 다른 아이의 욕망을 목표로 한다. 히스테리에 관한 프로이트의 고전적 분석사례에서 18살의 도라는 복잡한 성적 역학관계 속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K의 부인과 연인관계였고, 도라 자신은 K의 유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분석과정에서 도라가 의식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K 부인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K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라캉은 다르게 해석한다. 라캉에 따르면 도라가 그렇게 한 것은 K 부인이 도라에게 여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도라는 여성성에 접근하기 위해서, 곧 K 부인이 구현하고 있는 신비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K와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전체 시나리오의 중심은 K가 아니라 K 부인이었던 셈이다.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란 정식을 떠올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저자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나>를 든다. 그 작품에서 트로이에 있던 여성은 진짜가 아닌 가짜 헬레나였다. 그녀는 여신 헤라가 공기로 만들어 파리스에게 안겨준 유령이었던 것이고, 진짜 헬레나는 이집트에서 남편이 돌아오길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곧 역사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증오 받는 여성 헬레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적 이미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성의 자리는 궁극적으로 비어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100벌의 드레스를 갖고 있어도 “입을 게 없어”라고 여성들이 말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다. 여성(The Woman)이 되기 위한 단 한 벌의 제복을 언제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저자의 기본 입장이자 책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여자들이 왜 끊임없이 “나 사랑해?”라고 되묻는지, 왜 여자는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는지, 왜 여자의 파트너는 고독인지, 왜 여자들은 글을 쓰면서 문장을 끝맺지 못하는지, 남자들이 “꺼져버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왜 여자들은 “내가 사라질게”라고 말하는지를 알게 된다. 당신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간에 일독해볼 만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10. 07. 08.
P.S. '관찰과 해석의 콜라주'인 만큼 다양한 사례들을 동원하고 있는 게 이 책의 강점인데, 나도 덩달아서 <베니스의 상인>, <올랜도>, <사랑에 빠진 악마> 등을 새로 구입했다. 저자의 미끼가 제법 잘 통했다고 할까.
번역은 읽을 만하지만, 한두 군데 오역도 눈에 띈다. 사소하지만 교정차원에서 적어두자면, 서문 8쪽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많은 남성 학자들이 학회에 낸 자신의 논문에 대한 비판은커녕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문은 "Indeed, little research is required to demonstrate taht a large percentage of male academics would rather that no one understood their conference papers than that these be subject to criticism."이다. 구문상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기를 원한다"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앞문장에서 저자는 "이론가들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겁나 진짜 주장을 감추는 데 진력하거나 아예 주장을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라고 꼬집고 있는데,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학회에서도 대다수 남성 학자들은 남에게 비판받기보다는 차라리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비판/반박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해서 제시해보겠다는 얘기다. 그런 태도는 높이 사줄 만하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용한 대목인데, 국역본을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26쪽에서 바이올라의 대사 "What's she?"를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요?"로 옮긴 것은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공작이 올리비아라는 여성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인데, 바이올라는"Who's she?"라고 묻지 않고 "What's she?"라고 물었다. 즉 이 질문에서는 'WHO'(주체)와 'WHAT'(대상)의 대비가 중요하다. 대상은 물론 남성 욕망의 대상이다. 그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여성은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 바로 그런 점에서 "What's she?"라는 질문은 대단히 탁월한 '여성적 질문'이라고 리더는 말한다. 직역하면 "그녀는 누구인가요?"와 대비하여 "그녀는 무엇인가요?"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번역본들의 선택은 어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