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긴데, 하도 시끌벅적한 뉴스가 많다 보니 주목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해마지 않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관리대상'이 되는 독서라면 정나미 떨어진다. 필시 이런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려는 '관료'들의 독서량이 턱없이 부족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독서는 주변에서 적당히 자극하고 격려하는 '넛지' 정도로 충분하다. 아이들은 '책 읽는 기계'가 아니며 더구나 '책을 읽어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책을 읽고 아무말도 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한다. 모든 개개인의 독서 이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독서가 제일 괴로웠어요"란 비명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 무슨 퇴행적 전체주의란 말인가. 조만간 <1984>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한국일보(10. 06. 30) [편집국에서/6월 30일] 아이들의 괴로운 독서

"아니, 이상의 '날개'를 중학교 1학년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유정의 '봄봄'은 또 어떻구요. 뭐,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글쎄. 이광수의 '무정'도 그래요. 그 나이 아이들에게 썩 맞는 작품 같지 않은데."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둔 주부에게 며칠 전 들은 이야기다. 아들이 글쓰기 지도를 받는 사교육 강사가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이 책들을 읽어둬야 한다고 했단다. 중학생이 되면 영어 수학 공부에 치여서 책 읽을 틈이 없으니 독서도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면서. 이웃 주부들에게 물어보니, 그 책들이 그 동네 중학교 필독서이고 초등 5,6학년 때 미리 읽는다고 하더란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온 책들을 보더니 글쓰기 강사가 놀라더란다. "아니, 왜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사셨어요? 다들 축약본으로 보는데. 많이 팔아요. 못 보셨어요? "

요즘 아이들의 독서 풍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아이가 소화하기 힘든 책을 골라 읽으라는 어른들도 이상하지만, 문학작품을 원전으로 읽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축약본으로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어 버렸다.

독서는 뭐니뭐니 해도 즐거워야 한다는 원론은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입시용 스펙 쌓기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독서논술 사교육이 번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의 책 읽기는 단순한 지식 늘리기에 쏠려 괴로움이 되어버렸다. 부모의 욕심과 학교의 '이상한' 독서 지도가 아이들을 못 살게 군다. 이 주부의 아들이 4학년 때 교내 독서퀴즈 때 푼 문제를 보자. 화산활동을 재미있게 설명한 책이 대상이었는데, 퀴즈 문항이 이랬다. "다음 중 휴화산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퀴즈를 맞히려면 책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더 기가 막힌 사례도 있다. 중학교 아이들에게 김동인의 소설 '감자'를 읽게 한 다음 "복녀는 얼마에 팔려갔습니까?"라고 묻는다. 한 지방 교육청이 시행 중인 독서활동 평가 항목이다.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는 독서 평가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특수한 예가 아니며,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15일 올 2학기부터 학생들의 독서 이력을 일일이 기록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2011년 대입 때부터 전형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방침에 따라 각 시ㆍ도 교육청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www.reading.go.kr)을 구축해 운영한다. 학생이 책을 읽고 독후 활동 기록을 입력하면, 교사가 이를 평가해 인증하는 온라인 관리 프로그램이다. 초중고 12년 간의 독서 이력이 통합 관리되는 것이다. 대입 입학사정관은 이 시스템에 접속해 학생의 독서 이력을 점검ㆍ평가하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 제도가 창의ㆍ인성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입시와 연계되어 일일이 기록하고 관리하고 평가받는 독서가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 '읽고 싶은 책'보다 '읽어야 할 책'만 늘려 아이들을 괴롭히는 또다른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벌써부터 학원과 독서지도 사교육 업체는 이 제도에 맞춘 필독서를 선정해 지도하는 신규 사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더 큰 부담을 안고 책을 읽게 되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오미환 문화부 차장 )  

한국일보(10. 07. 10) [책갈피] '책꽂이의 자유' 마저 위협하는 세상 

사상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설령 ‘빨갱이’라 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툭하면 나오는 색깔론은 분명 불합리한 잣대이지만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다.

색깔론이 다시 튀어나왔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보도한 MBC ‘PD수첩’ 중 피해자 김종익씨의 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 문제가 됐다. 방송에서 제목을 모자이크 처리한 이 책들은 <혁명의 연구> <김일성과 민주항쟁> <조선노동당 연구> <사회주의 개혁과 한반도> 등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 책들로 보아 “김씨는 특정 사상에 빠진 편향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참 단순하고 편리한 판단이다. 그 명쾌함이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단세포적 발상이야말로 편향적 사고일 것이다. 국방부가 군대 내 금서목록을 발표해서 비난과 조롱을 산 일을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다.

독서는 극히 사적인 활동이다. 무슨 책을 읽느냐는 한마디로 ‘내 맘’이다. 국가나 권력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거나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개인의 독서 내역을 그를 위협하는 무기로 삼는 것은 더더욱 부당한 폭력이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책도 조심해서 읽는 게 좋겠다. 내가 읽은 책이 어느 날 나를 겨누는 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이런 조심성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게 좋겠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간의 독서 내역을 개인별 포트폴리오로 관리해 대입 전형에 반영하는 ‘독서교육 종합 지원 시스템’이 2학기부터 전국에서 시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적인 독서 활동을 일일이 보고하고 평가 받으라는 것은 정신적인 지문 날인 강요와 다름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오미환기자) 

10.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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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09 23:2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도 벌써 독후감 숙제 땜에 스트레스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아이보다 제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숙제 안 하는 아이를 방치하는 어른이 되더라도 아이를 놀게 할 것인가, 숙제는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사이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클 때는 실컷 놀다놀다 스스로 책을 집어들었던 것 같은데요..--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앞으론 스스로 책을 집어던질 거 같습니다...

조아 2010-07-09 23:57   좋아요 0 | URL
간간이 다니는 서점에서 입구에 "교과서 수록소설 미리 읽기"라고 크게 걸어 놓고 있더군요. 뭐 저러면 장사는 되겠다 싶었죠.. 저런 정책 이전에 학교에서 책 읽으면 빼앗아 가는 문제부터 지적해야 할듯 싶은데 말이죠.

로쟈 2010-07-10 10:18   좋아요 0 | URL
그냥 학교수업이 독서중심이 되도록 하면 되지요...

빵가게재습격 2010-07-10 00:49   좋아요 0 | URL
조건만 몇 가지 붙인다면, 저는 이 정책에 찬성합니다... 정책 입안자들과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사교육 담당자들까지(입시 사정관도 포함해야겠네요) 똑같은 책을 읽고 함께 똑같은 시험, 혹은 글쓰기까지 제출하게 한다면요. 가령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구체적인 이름을 모두 쓰시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전쟁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어난 전쟁인가? 연도로 표기하시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비유는 총 몇개인가? 정확한 갯수를 제시하시오.' 운운.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독서기술부'를 두어 학교선생님, 사교육 담당자들, 입시사정관, 정책입안자의 집안을 불시에 침입, 검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불시에 습격하게 하는 겁니다. 새벽 두시에 침투, 집안을 모조리 뒤져 불온한 책이 없는지 확인한다면, 오! 진정 찬성합니다. 꼭 하자고 건의하고 싶어욧!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이 아예 없는 게 아닐까요? 지침서만 잔뜩 꽂혀 있을 듯한데요...

Sati 2010-07-10 01:26   좋아요 0 | URL
"공공장소나 텔레스크린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혼자 공상에 잠긴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정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나타나는 경련, 무의식적으로 짓는 불안한 표정,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 등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가령 승전 소식이 보도될 때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84> (민음사, 89쪽)

로쟈 2010-07-10 10:17   좋아요 0 | URL
책꽂이 관리에 이어서 조만간 표정관리도 해야겠네요...

2010-07-10 0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7-10 09:53   좋아요 0 | URL
독서가 관리 대상이 된다니...으음...
이거야말로 유희가 아니라 노동이 되는 지름길이군요. 후...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이렇게 강제적(?)으로도 시스템에서 책을 보게 하는것도 필요하것도 같고...역시 정답은 없는걸까요^^;

로쟈 2010-07-10 12:56   좋아요 0 | URL
기대되는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거 같습니다. 실효성도 의문이구요. 의무 복무도 아니고 의무 독서라니요...

kumun 2010-07-10 13:14   좋아요 0 | URL
미국에선 학교에서 단계별로 책을 나눠서 아이들이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게 독서지도에 중점을 두더라구요

로쟈 2010-07-10 13:25   좋아요 0 | URL
미국만도 못한 셈이네요...

자꾸때리다 2010-07-10 19:14   좋아요 0 | URL
주제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저는 중고등학교 윤리 교과서 없애버리고 대신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같은 대화편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수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0-07-10 23:04   좋아요 0 | URL
주제와 상관이 있는데요.^^

네모선장 2010-07-13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고등학교 전문계 교사 입니다. 이제서야 기사를 봤는데요.
실제로 강압적으로 저런걸 하고 있고 더 웃기는 것은 '독서교육종합지원 시스템'을 창의적 체험활동이란 것과 연동되게 해놨는데 얼마전에는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직접 학교로 방문하여 이용실적을 물어보고 갔습니다. 저희야 전문계고라 학생들이 워낙에 책을 안읽거나 연애소설과 판타지 소설만 주로 읽어서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서도 교육당국은 저 시스템을 이용하여 자꾸만 분량과 권수로 학교평가랑 연계한다는 거죠.
또한 학교 도서관에 대출권수는 자동으로 교육청에 집계되어서 대출 많이 했으면 우수학생 우수학급 우수학교라며 칭찬하고 있는게 요즘의 교육 현실이네요.

로쟈 2010-07-13 10:38   좋아요 0 | URL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