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구입한 책의 하나는 에드워드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민음사, 2010)다. 제목이야 워낙에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작가 올비는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를 잇는 현대 미국의 대표 극작가"라고. 그런 명망의 출처를 이번에 확인해볼 수 있겠다.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마침 이 작품을 다루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아, 책은 이 칼럼을 읽고 구입한 듯하다).

한겨레21(10. 07. 09) 누가 환상 없는 실재를 두려워하랴?

김수영의 시 ‘전화 이야기’(1966)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보세요. 앨비의 아메리칸드림예요. 절망예요./ 8월 달에 실어주세요. 절망에서 나왔어요./ …살롱 드라마이지요.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에서/ 공연을 하게 돼요. 절망의 여운이에요./ …앨비예요, 앨비예요. 에이 엘 삐 이 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 유명한 ‘푸른 하늘을’이나 ‘풀’ 같은 근엄한 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수영의 ‘발랄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앨비’라는 극작가의 살롱드라마 <아메리칸드림>의 번역 원고를 게재할 의향이 없느냐며 잡지사 담당자와 어딘가 서글픈 협상을 벌인다. 근데 앨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정확한 발음은 앨비가 아니라 올비다.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김수영이 언급한 <아메리칸드림>(1960)보다는, 누구나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2)라는 작품으로 더 유명한 극작가다. 1959년에 <동물원 이야기>로 데뷔했고 팔순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다. 미국문학사에서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계승해 미국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대접받고 있고,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가차 없고 무정한 관찰이 그의 주특기로 간주된다. <현대세계희곡선집>(동화출판사 펴냄, 1970)에 오화섭의 번역으로 수록된 적이 있는 이 작품이 이번에 다시 출간됐다(강유나 옮김, 민음사 펴냄).

저 유명한 제목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파리 리뷰>(39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문장은 어느 술집 거울에 씌어 있는 누군가의 낙서였다. 디즈니 만화영화 <아기돼지 삼형제>에 흘러나오는 노래 <누가 크고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를 패러디한 문장이다. 아기 돼지 삼형제가 집을 지어놓고 이제 늑대 따윈 두렵지 않다며 신나게 저 노래를 부를 때 늑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big bad wolf’ 대신 ‘Virginia Wolf’를 집어넣은 것. 노래의 원래 맥락과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미지가 혼합된 것일까. 저 문장이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누가 허위의 환상이 없는 실재의 삶을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으로 변주되었고 이 작품이 탄생했다.

바로 저 물음이 이 작품의 테마다. 환상과 실재의 대립이 그것. 우리의 삶은 스스로 의식 못하는 환상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간다. 특히 작은 환상들의 역할이 크다. ‘대한민국 언론은 진실을 보도한다’ 혹은 ‘대한민국은 지금도 여전히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인식하고 인정하지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혹은 ‘우리 부부는 행복하고 아이들을 엄마·아빠를 존경한다’와 같은 믿음들이 환상일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인정도 못한다. 만약 그 환상-목발을 빼앗기면 우리는 실재-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한 부부의 정신적 난투극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그 환상의 스크린을 칼로 찢고 뼈를 발라낸다.

뼈 운운은 필자의 과장이 아니다. “뼈에 도달해도 아직도 다 간 게 아니지. 뼈 안에 여전히 뭔가 들어 있거든… 골수… 그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거야.”(172쪽) 연구서들에 따르면 이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1막이 피부를 벗겨낸다면 2막은 뼈를 발라내고 있고 가장 결정적인 3막에 이르면 이 작품은 6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 환상의 골수까지를 쑤신다. 1963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고 당연하게도 그해 퓰리처상 희곡 부문 수상작으로 지명되었으나 퓰리처 위원회는 시상을 거부했다. “미국적 삶의 건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작가로서는 더 영광스러운 일이었겠다.   

‘누가 두려워하랴?’라는 물음은 두렵지 않다는 뜻의 수사의문문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가… 조지… 내가… 두려워.”(193쪽) 가장 치명적인 환상이 폭로되고 정신적으로 침몰한 여주인공 마사가 내뱉는 탄식이다. 환상 없는 삶이 그토록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파국의 절정에서 도리어 기이한 희망의 조짐이 느껴진다는 것은 의외다. 달콤한 환상의 땅에서 자라는 건 허망일 뿐, 진정한 희망은 끔찍한 실재의 땅에서 싹틀 수 있다는 취지일까. 이 묘한 여운을 공연으로 느끼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볼 수 없어 아쉽다. 일단은 동명의 영화(마이크 니컬스 감독, 1966)를 먼저 봐두려고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10. 07. 10. 

 

P.S. 이번에 안 것이지만 올비의 희곡은 몇 편 더 번역돼 있다. 2003년에 한꺼번에 세 권이 나왔는데, 짐작엔 역자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듯싶다. 이번에 대표작이 소개된 김에 좀더 조명을 받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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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7-1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뼈속에 골수를 두려워 하랴, 나의 환상이여, 그 골수를 나는 어그적 어그적 씹어 넘겨보자 그러면 내 머릿속에 여전이 유령처럼 나의 환상은 살아 있다', '올프'는 누구의 환상이었을까요.

로쟈 2010-07-12 20:47   좋아요 0 | URL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雨香 2010-07-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리스트에 올려놓은 책입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약 6년의 직장생활을 관두고 잠시 미국에서 놈팽이질 할 때, 이 연극을 봤습니다. 연극의 재미에 폭 빠져있다가 문든 '어! 내가 영어를 듣고 있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리스닝 테스트 시간이 되어 버렸고, 이후 연극에 몰입을 못했었습니다. 연극의 묘미를 관객과의 호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귀국하고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DVD를 구입했습니다만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허위의 환상'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저도 이 '허위의 환상'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