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1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1회를 발췌해놓는다. 원고가 밀려 있어서 오늘 아침까지 헉헉대며 쓴 것이다. 내주엔 한 주 쉴 예정이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아니, 트이기를 바래본다.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라”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 회에 다룬 건 신체 자해자들이나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의 ‘실재에 대한 열정’이 피하고자 한 것이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재 자체라는 지젝의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 ‘실재의 열망’, ‘실재에 대한 열정’은 거부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마지막까지 가기를 거부하는 태도, “외양들(appearances)을 보존하자”는 태도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실재의 열망’이 던졌던 문제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단지 가짜의 열망이었다는 데 있고, 이 가짜의 열망이 외양들 배후에서 무지막지하게 실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그런 노력은 실재와 마주치기를 회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는 데 있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61쪽)

 

어떻게? 이번에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 감독판 2000)을 예로 들어보자. 지젝을 즐겨 읽은 독자라면 친숙한 예이기도 할 텐데, 영화 속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주인공 커츠(쿠르츠) 대령은 “프로이트적 의미의 ‘원초적 아버지’에 해당하고, 어떠한 상징적 법에도 종속되지 않은 외설적 향락의 아버지, 소름끼치는 향락의 실재와 직접 대면하려고 나서는 절대적 주인을 대신한다.”(<탈이데올로기>, 27쪽; <실재계 사막>, 65쪽) 중요한 것은 그가 야만적인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서구 권력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커츠는 완벽한 군인이었지만 군 권력체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했고 결국은 체계가 제거해야 할 과잉이 되었다. “이 영화의 궁극적 지평은 권력이 그 자신의 고유한 과도 잉여를 낳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를 모방해야 하는 작전을 통해 이 잉여를 없애야만 하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다.” 즉 여기서 문제는 체계로부터의 병리적 일탈이 아니라 체계 자체가 필연적으로 생산해내는 과잉이다. 윌라드는 커츠를 제거하는 비밀작전에 투입이 되는데, 그의 임무는 공식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전을 지시하는 장군의 말대로 “그것은 결코 없던 일이다.”  

(...)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은 그 계통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집단적인 정치활동의 전망이 되는데, 그 계통은 그의 초자아 과잉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엔 그것을 완전 제거하도록 강요된다. 더 이상 초자아의 외설성에 의지하지 않는 혁명적인 폭력이다. 이런 ‘불가능한’ 행동은 진정한 모든 혁명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66쪽)

이 대목은 다소 부정확하게 번역됐는데, 첫 문장은 “What remains outside the horizon of Apocalypse Now is the perspective of a collective political act breaking out of this vicious cycle of the System which generates its superego excess and is then compelled to annihilate it”을 옮긴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지평 바깥에 있는 것, 그러니까 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이란 전망인데, 이 정치적 행위란 체계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체계의 악순환이란 이미 예시된 대로 체계가 그 자체의 과잉으로서 커츠와 같은 ‘초자아적 과잉’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제거해야만 하는 악순환을 가리킨다. 혁명적 폭력은 더 이상 그러한 초자아적 외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가능한’ 행위,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가 모든 진정한 혁명적 과정의 표지가 된다.  

그러한 행위를 회피한다면 ‘실재에 대한 열정’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 그리고 그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이다. 그 동일시는 영웅적 수임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그것은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놔두자!”(<실재계 사막>, 70쪽)가 아니라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Somebody has to do the dirty work, so let's do it!)는 태도다. 이것은 “그래 내가 책임진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적 태도의 뒤집힌 거울상이다(“우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아요”라는 말에서 나는 가끔 ‘아름다운 영혼’을 느낀다). 우리가 우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세가 또한 그러한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국가를 위해 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라는 논리가 그러한 찬양에는 깔려 있다.  

지젝이 실제로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그가 사례 목록에는 1980년대 이란 콘트라 사건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이 사건에 대한 의회 청문회에서 작전의 ‘악역’을 맡았던 올리버 노스 중령이 당당하게 국가를 위한 자신의 애국심과 신념을 밝혀서 ‘영웅’으로 부상하기도 했었다.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변호였다. 레이건에서 노스가 있었다면, 히틀러에겐 히믈러가 있었다. 이건 지젝이 직접 들고 있는 사례인데, 히믈러는 1943년 10월 4일 포젠에서 SS 지휘자들에 대한 연설을 통해 유대인 대량학살이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이자 결코 씌어진 적도 결코 씌어질 수도 없는 한 페이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물음과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서도 전적으로 명쾌한 해결책을 찾기로 했습니다. 나는 남자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한 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나중에 우리의 아이와 손자들에게 복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민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SS 지휘자들은 히틀러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히틀러는 전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최종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히믈러가 ‘총대’를 맨 터라 그들 간에 공유된 음모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독일 국민 전체는 이것이 사활이 달린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후방의 다리는 파괴되었다.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지젝은 실재에 대한 ‘반동적인’ 열정과 ‘진보적인’ 열정을 이론적으로는 대립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동적’ 열정이 법의 외설적 이면에 대한 보증․배서라면, ‘진보적’ 열정은 (‘정화에 대한 열정’에 의해 부인된) 적대라는 실재와의 대면이다.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실재(계)는 적대를 도입하는 과잉적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접촉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지젝은 실재를 우리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terrifying Thing)’로 보는 표준적인 비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인 실재는 상상적인 베일이나 상징적인 베일에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다. 기만적인 외관 밑에 우리가 직접 쳐다보기엔 너무나 두려운 ‘궁극적 실재라는 괴물(ultimate Real Thing)’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궁극적인 외관(ultimate appearance)이다. 이 실재라는 괴물은 그 존재를 통해서, 혹은 존재한다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상징적 세계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그 구성적 비일관성(적대)과의 대면은 회피하게 해주는 환영적 유령(허깨비)일 뿐이다.  

(...) 

10.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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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17: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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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5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말과 휴일에 연이어 강연행사에 다녀왔더니 '정신력'이 바닥이다. 써야 했던 원고들이 고스란히 밀렸으니 내주, 아니 당장 오늘 일정이 빡빡해졌다. 혼미한 틈에도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서 일단은 스크랩해놓는다. 시 번역에 관한 것인데, 최정례 시인이 자신의 시 영어 번역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기억엔 김광규 시인의 경우에도 자신의 시 독일어 번역에 참여했던 듯싶다(시인 자신이 독문학자이다). 이런 경험들을 모아놓아도 번역뿐 아니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가 되지않을까 싶다. 

경향신문(10. 09. 13) “시 번역, 장벽 넘기 어려워… 원작자가 직접 참여 중요”   

“문학작품 창작자가 번역에 직접 참여하면 오역을 피할 가능성이 높겠죠. 특히 낯선 외국어의 표현과 어휘를 접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영감, 창조적 역량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시는 번역되는 순간 원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국내에 번역돼 출간되는 숱한 해외 문학작품들 가운데 시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최정례 시인(55)은 시 번역에 존재하는 까다로운 장벽을 넘기 위해 원작자가 직접 번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2008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간 미국 버클리대학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머문 최 시인은 미국 시인 브렌다 힐먼(세인트매리대 교수)과 함께 직접 자신의 시 53편을 영어로 공동 번역했다. 미국 시 전문 저널 ‘프리 버스(Free Verse)’에 최 시인의 시 ‘보푸라기들(Motes)’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The Five-thousand-Year-Old Heart I’ve Swallowed)’ ‘없는 나무(The Absent Tree)’ 등 9편이 번역돼 실렸다. 최 시인의 시선집도 출판사 ‘팔로프레스(Parlo Press)’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레바논 감정> <붉은 수수밭> 등의 시집을 통해 밀도 높은 시어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시편들을 선보인 최 시인은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 시인과 미국 시인이 공동으로 직접 자신의 시를 번역하기는 최 시인이 처음이다. 초벌 번역은 한국문학을 전공한 웨인 드 프레메르(Wayne de Fremere)가 맡았고, 최 시인과 힐먼이 원작의 의미를 해치는 표현을 바로잡고 영문 시 형식에 맞도록 가다듬었다. 최 시인은 “양국의 작가가 원작자이자 동시에 번역자의 역할을 했다”며 “공동 번역은 번역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처리해 번역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번역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로 주어의 명확화, 상투적 시어의 번역, 관용어구의 번역, 잠재적 의미의 파괴 등을 꼽았다. 한국 시의 경우 주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영시의 경우 구조상 주어가 없으면 문장 구성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최 시인은 “번역이 불가피하게 변형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생략된 주어를 찾아 새롭게 지시함으로써 모호했던 원전의 의미와 감정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 ‘숲’이란 시의 ‘아름다운’을 영어로 번역할 때 ‘beautiful’이란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조언에 따라 ‘ultimate’ ‘ideal beauty’로 번역하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했을 경우 원본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들이 있어 신비하게 느껴졌어요.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의 경우 영어로 번역하고 나니 오히려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미국에는 김소월·김지하·고은 등 몇몇 한국 시인들의 시가 번역돼 있지만 미국인들에게 잘 읽히지는 않는 상황이다. 최 시인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경우 해외의 현대 시와 감각이 통하기 때문에 잘 번역될 수 있다면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말했다.(이영경기자)  

10. 09. 13.

 

P.S. 잘 읽히지 않는다는 번역이지만, 한국 시의 영역본은 국내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답게 한국문학총서'로 10권이 출간돼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2-3권 갖고 있는 시리즈이고, 아예 이 번역시를 대상으로 한 시 비평을 고려해보기도 했었다. 나중에라도 좀 여유가 생기면 손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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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주 오랜만에 구입한 시집은 최영철 시인의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열음사, 1987)와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2000) 등이 내가 기억하는 시집인데, <찔러본다>를 거기에 보탠다. 순전히 표제작의 힘이 크다. 많은 경우에 한 편의 시는 한 권의 시집을 버틴다(읽다 보니 '비자금 만 원' 같은 시도 마음에 든다). 시집에 처음 눈길이 가게 해준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10. 09. 11) 숨이 붙어있는 모든것을 바라보며 애틋한 연민을… 

최영철(54·사진) 시인의 새 시집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는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사람은 물론 가녀리게 흔들거리는 풀잎에서부터 힘없이 낙하하는 낙엽과 땅 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에 이르기까지 고루 배려하는 시선이 따뜻하고 애달프다.

  
“반찬거리 파는 할머니/ 조르지도 않았는데/ 주위 눈치 보며 얼른/ 새싹 몇 잎 더 넣어준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 다른 사람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비밀’)

할머니와 벌이는 시인의 ‘불륜’이 귀엽다. 할머니의 따스한 비밀이 애틋하고 시인의 뛰는 가슴이 정겹다. 시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 이유는 비밀을 들킬까봐서만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이 고마워서, 아름다워서, 흔치 않게 경험하는 그 느꺼운 감정을 시로 옮기게 될 순간이 성급하게 기다려져서 더 콩닥콩닥 뛰었을 것이다.

“대형마트에 얻어터진 난전의 눈두덩이 시퍼렇다/ 온 데 파스를 바르고 나온 친절 연습/ 사시사철 땡볕 세례에 그을린 할머니들/ 애교 떨며 보조개 만들며 요염한 브이자를 그린다/ 눈물겹다 자본주의 꽁무니라도 따라붙으려는/ 저 늦은 보충 학습”(‘재래시장 살리기’ 부분)

할머니들과의 ‘불륜’이 뜨거울수록 그네들의 늦은 ‘자본주의 보충학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깝다 못해 서럽다. 그 서러운 연민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투사된다.

“젖이 안 나온다고 보채던 해가/ 잘근잘근 젖꼭지를 씹었다/ 젖을 물고 흔들던 바람이/ 떨어질락 말락 젖꼭지를 땄다/ 발갛게 피멍 들어/ 바닥에 떨어진 젖꼭지/ 벌레들이 달려들어 빨고 있다/ 핏기 다 빠져 해골이 되어서도/ 수천 수만의 자식을/ 더 안아 키우겠다는 거다”(‘만추, 잎’) 

해와 바람이 나뭇잎을 씹고 흔들어 결국 땅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그 이파리를 이번에는 벌레들이 달려들어 진액을 빨아먹는 바람에 핏기 다 빠진 해골이 되었는데, 그 모습이 시인에게는 죽어서도 수천 수만의 생명들을 끌어안으려는 모성으로 다가오는 거다.

만추의 붉은 잎에서도 화려한 색감의 아름다움보다 그늘진 생의 뒤안을 먼저 보듬는 시인의 마음은 수직으로 서있어야 할 나무가 누워 있는 모습에 이르면 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되 누워서 옆으로 자라는 ‘수영성 와목(臥木)’을 보고 시인은 “자기를 슬며시 쓰다듬고 가는 여인에게로 기울다가/ 행장 챙겨 무작정 따라나서기도 하다가/ 저렇게 호된 회초리를 맞고 쓰러졌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때/ 나무를 쓰다듬고 간 그 여인은/ 먼 여정에 눈앞이 아득해져/ 잠시 손 짚어/ 찰나를 쉬었다 갔을 뿐”이라고 쓸쓸하게 돌아선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햇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찔러본다’)

이번 시집의 표제로 뽑힌 이 시편은 연민과 슬픔 같은 것은 모두 안으로 삭여버리고, 햇살과 비와 바람을 기꺼운 마음으로 껴안는다. 깼나 안 깼나, 죽었나 살았나, 익었나 안 익었나, 끊임없이 안부를 걱정해주는 해와 비와 바람 같은 것들이야말로 이곳에 존재하는 불멸의 주인이기에,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생명들도 꿋꿋하게 한 번 살아낼 만한 것이다. 최영철 시인은 자서에 “내 게으름의 핑계가 되어준 병, 내 가난의 핑계가 되어준 시, 그들과 함께 조금만 더 애절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조용호 선임기자) 

10.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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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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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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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차 노원평생학습관에 다녀왔다. 가고오는 데 꼬박 두 시간씩 걸리는 거리다. 체코 감독 피터 젤린카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2008)을 관람하신 분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강의했다. 영화는 미리 보고 갔는데, 실제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8년째 공연중인 체코 극단원들이 폴란드의 한 제철소에서 열리는 대안공연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주로 필름에 담았다. 그렇다고 다큐는 아니고 극중극 구조다...   

이렇게 계속 쓰면 오늘의 일기가 될 터인데,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간단한 소회만 적는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를 오늘 배송받았다. 책은 어제 나왔지만 공식 발행일은 '2010년 9월 11일', 즉 오늘이다. 우연찮게도 9.11에 나온 책이 돼 버렸다(<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작년 5.18에 나왔다). 이 책의 에피그라프(제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스러운 여러분, 소중한 여러분,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습니까?" 

이 대목을 제사로 쓴 이유는 책의 서문('책머리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공식적으론 두 차례 서문을 쓴 셈이지만, 나대로는 예전에 자비로 여러 권의 책을 만들면서 그에 맞게 여러 번 서문을 쓴 적이 있다. 1996년 9월에 쓴 서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란 합본서의 서문이다(참고로, 이 책은 <책을 읽을 자유>의 맨마지막 쪽 책 사진에 들어가 있다).   

1. 나는 묽어진 존재, 아니면 욕조에 빠진 먼지...  

2. 이 책은 지난 2년간 만든 세 권의 시집, <중력과 은총>(96.8), <새둘이 날아간다>(96.1), <생의 바깥에서>(95.4)를 한 데 묶은 것이다. 그렇다고 더 나이지는 것이 있을까? 몇 군데 빠진 글자와 틀린 글자를 바로 잡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나는 내가 만든 책의 부피(volume)를 느끼고 싶었을 따름이다. 영혼은 어떤 부피 안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3. <존재와 시간>의 저자는 디히텐(Dichten, 시를 쓰다)과 덴켄(Denken, 생각하다)을 모두 단켄(Danken, 감사하다)에 고정시킨다. 그에 의하면, 사유하는 것, 시를 쓰는 것은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에게 열려 있는 존재(Sein)로 귀향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4. 이 책을 집어든 당신에게 감사한다.

96년이면 아직 20대였던 시절이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건 책이 내게 갖는 의미다. '부피'와 '감사'. 나는 여전히 책의 부피를 사랑하며, '사랑스러운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그러한 의미가 보존되는 한, 앞으로도 책은 더 내게 될 것이다. 여러 기획이 예정돼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러시아문학 강의'다. 러시아문학에 진 빚을 좀 덜 기회가 어서 오기를 기대한다... 

10.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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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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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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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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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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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isart 2010-09-1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가까운 동네에서 로쟈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었지만.. 강연을 들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반드시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가졌지용^^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강연해주셔서 넘 감사해용^^ 우리의 삶과 유리된 예술가 및 철학가는, 세상을 떠나 청정하게 수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종교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심게 되었다능~! 암튼 이런 멋진 인문강연 자주 해주삼~!!!

lifeisart 2010-09-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깜짝 놀랐어용^^ 40, 50대 층이 많은 강연장의 분위기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라는...

로쟈 2010-09-12 22:47   좋아요 0 | URL
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오시더군요. 특히 장년층이 많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oren 2010-09-12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라는 멋진 소설에 관한 얘기를 볼 때마다, 80년대초 대학입학을 앞두고 한겨울 시골 고향의 따스한 온돌방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이 소설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항상 그립습니다.

표도르, 미짜, 알료샤, 스메르자코프, 조시마 장로, 까쨔, 그루셴까... 그 소설을 다 읽고나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흑백버전'의 영화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우연히 TV로 봤었는데, 소설을 읽으며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닯아서 깜짝 놀랬던 기억도 있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러시아문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책과 글들을 '아무 때나 마음껏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인터넷 서재가 참 좋습니다. 로쟈님의 두 번째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9-12 22:49   좋아요 0 | URL
율브리너 주연의 영화를 보셨던가요? 드미트리 역엔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oren 2010-09-13 17:01   좋아요 0 | URL
흑백영화를 봤던 게 80년 초반의 일이라 율브리너가 주연이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흑백영화에 어울리듯...계단 아래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와.. 마치〈반지의 제왕〉에 나오던 골룸(스미골?)과 같은 분위기의 스메르자코프와.. 그런 기억들만 어렴풋하게 나네요.
언제 한 번 DVD라도 구해서 그 영화를 다시 봤으면 싶네요..

재준 2010-09-1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강차 노원평생학습관에 다녀왔습니다. 가고오는데 합이 2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강의는 어제였습니다. 어떻게든 저한테 계속 정을 붙혀보고 싶습니다.
지난 7월 한겨례에서 뵈었고, 노원에서 또 뵙겠다고 해놓고...

익숙해짐과 무감각해짐에 무력한 범인으로서, 주변 비범인들의 에너지를 받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새책 축하드리고, 꼭 읽어보겠습니다. 빌리지 않고..^^

로쟈 2010-09-12 22:50   좋아요 0 | URL
한겨례에서도 뵀으면 자주 뵙네요.^^

헌내 2010-09-1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노원평생학습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가보지도 못했네요.. ㅠㅠ
오늘 북페스티벌도 못 가보고.

꼭 뵙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로쟈 2010-09-13 01:34   좋아요 0 | URL
노원구에 사는군요.^^

헌내 2010-09-13 16:32   좋아요 0 | URL
네 ^^

비로그인 2010-09-1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형극이 재미있네요, 좀 슬프기도 하고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이 어느 정도나 심했던 건가요?
초등학교 때 간질을 앓는 친구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어서
몇 번 쓰러지는 걸 보기도 했거든요.
아주 심했다면 치명적이었을 텐데요...
작가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끼친 영향으로 볼 때
도박과 간질이 비슷한 무게였을까요?...

로쟈 2010-09-13 01:36   좋아요 0 | URL
간질과 도박, 사형수 경험 등이 모두 결정적이었는데, 도박중독은 두번째 아내의 도움으로 치유됩니다. 간질은 평생 갔다고 하고요. 유전이어서 아들 알료샤도 간질로 이른 나이에 죽었죠...

푸른바다 2010-09-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늦었지만 새 책 내신 거 축하드립니다.^^ <러시아 문학강의>도 기대되네요. 지젝에 대한 책도 계획하고 계신거죠?^^

2010-09-13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4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다˝

격주간 <기획회의>(27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청탁원고를 사절하고 있어서 요즘 정간물에 쓰는 서평은 한달에 한번 쓰는 <기획회의>와 격월로 쓰는 <공간> 원고가 전부다(한데 마감은 내주에 또 같이 몰려 있다). 내년에는 예약해놓은 곳이 있어서 더 추가되겠지만, 이런 추세면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다음 서평집은 3-4년 뒤에나 묶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책을 읽고 아무말도 하지 않을 자유'도 좀 누려봐야겠다). 각설하고, 이번에 다룬 건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동녘, 2010)이다(지난번에 다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 리뷰까지는 <책을 읽을 자유>에 실렸다). 애초엔 개념사에 관한 책을 집어들었지만, 마감이 임박해서는 아무래도 더 재미있는 책을 서평감으로 고르게 됐다. 물론 더 빨리 쓸 수 있어서였다...   

기획회의(10. 09. 05) 선물로서의 삶을 위해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이란 이름은 더 이상 철학 전공자들만의 ‘은어’가 아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을 비판한 첫 저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롤스식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 대열에 가세한 걸로 유명하지만, 영미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나 흥미를 끌 이야기다. 심지어 2005년 ‘다산 기념 철학 강좌’에 초빙돼 내한하여 네 차례 강연을 갖고, 강연문이 <공동체주의와 공공성>(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어도 샌델을 아는 독자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인문서로선 올 최고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가 모든 걸 바꾸어놓았다. 얼마전 그가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을 때는 ‘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4천 명이 넘는 일반 청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한국사회의 한 ‘현상’이 됐다.    

샌델의 방한에 발맞춰 출간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그런 ‘현상’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샌델과 비슷하게 자유주의적 우생학을 비판하고 하버마스의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3)가 독자들의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던 걸 상기해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자신이 다루는 윤리적 쟁점에 독자(청중)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샌델 특유의 화법과 기술이다. 이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독자에게는 친숙한 방식이지만 샌델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이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논거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의 강점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가령 ‘강화의 윤리학’을 다루는 첫 장에서도 샌델은 다짜고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레즈비언 부부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 애를 쓴 사례가 제시된다. 이 부부는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서 결국은 청각장애 아들을 얻었다. 이 사례를 바탕으로 샌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그렇게 일부러 청각장애를 갖기로 계획하는 일이 과연 도덕적으로 그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독자(혹은 청중)와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타당한 윤리적 결론을 도출해가는 샌델의 방식은 자칫 딱딱한 논변으로 일관하기 쉬운 윤리적 문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책의 부제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다. 유전공학 시대의 생명윤리를 탐색하는 샌델의 기본 입장이 이미 드러난다.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서 완벽해지려는 시도에 그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생명공학 기술들은 질병을 치유하거나 유전적 이상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노화에 따른 근육 손실을 복구하는 기술은 손상된 근육뿐만 아니라 건강한 근육도 강화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만약 운동선수들이 이 유전학적 강화기술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운동선수가 파열된 근육을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치료의 도움을 받는 것이 허용된다면, 근육을 강화하는 데 그 치료를 사용하는 것은 왜 안 되는가. 과학자들은 기억 관련 복제 유전자를 활용하여 기억 향상 약물이나 ‘인지력 강화제’를 개발하려고 한다. ‘뇌에 쓰는 비아그라’다. 이런 약물이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치료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면, 건강한 사람이 치료 목적과 무관하게 자신의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금지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키가 작은 아이들이 성장호르몬제를 처방받는 것이 허용된다면, 평균 키지만 키를 좀더 키워서 농구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이 성장호르몬제를 처방받는 것은 왜 안 되는가. 현재 기술적으로는 정자 선별 기술을 통해서 여자아이는 91%, 남자아이는 76%까지 감별할 수 있다고 한다. 남아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고 성비 균형이 맞는 사회에서도 그런 성 감별을 거부할 이유가 있는가. 성별뿐만 아니라 아이의 키와 눈 색깔, 피부색까지 선택할 수 있다면? 성적인 성향이나 지능, 음악적 재능, 운동 능력도 부모가 미리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 유전공학적 기술로 가능하여 부모가 아이의 ‘디자이너’가 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치료와 강화 사이에 경계선이 흐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샌델은 그 구분 자체의 중요성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령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도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받아들이는 사랑은 자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변화시키는 사랑은 자녀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랑은 물론 서로 다른 측면의 과도함을 교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샌델이 우려하는 것은 오늘날 부모들의 사랑이 변화시키는 사랑 쪽으로 치우쳐서 과도하게 자녀들의 완벽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치료 목적으로 개발된 생명공학 기술이 강화의 목적으로 전용되거나 남용되는 현상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  

생명공학이 ‘자녀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만들어내는 부모’라는 신화를 현실로 만든다면, 아이의 재능과 능력은 ‘선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계획과 개입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으로 강화된 아이들은 자신의 소질에 대해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부모에게 빚을 진 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이나 운에 맡길 부분이 줄어들면서 부모에겐 엄청난 책임이 전가될 것이다. 즉 “우리가 유전적 유산의 정복자가 될수록 자신의 재능과 행동 방식에 대한 부담이 커질 것이다.” 농구 선수가 리바운드를 놓쳤을 때 지금은 제 위치에 없었다고 코치에게 야단맞지만 미래에는 키가 작어서 리바운드를 못 받는 거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지 모른다는 게 샌델의 우려다.  

대학 입학과 관련한 2년 컨설팅에 3만 2995달러가 드는 ‘플래티넘 패키지’가 최상류층을 상대로 판매된다면, 그런 비용을 댈 수 없는 부모는 무능하고 자격 없는 부모로 간주될 것이다. 마치 산전 유전자 검사를 제 때 받지 않아서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은 부모처럼 “할 일을 안 하고 넘어간” 부모로 치부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우리보다 못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과의 사회적 연대는 더없이 약화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우생학과 유전적 강화에 샌델이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다. 그는 “이 시대의 과잉 양육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의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라고 본다. 때문에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의 재능과 성공이 노력의 산물만은 아니며 선물이기도 하다는 인식의 회복이다.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한 두 아들 아담과 아론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저자의 서문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10.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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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9-1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델은 인간이라는 종을 특별하고 존엄한 존재로 보는 것 같네요. 존 그레이의 책하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10-09-12 08:42   좋아요 0 | URL
특별한 존재로 본다기보다는 우리의 통념적 인간 이해가 아닌가 싶어요. 존 그레이의 책은 지금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