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10회

진도가 안 나가는 원고를 오래 붙들고 있다 보니 포스팅이 늦었다. 오늘 아침에 원고를 보낸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10회를 발췌해놓는다. 아직 '실재계 사막'을 못 벗어나고 있으며,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 얘기를 약간 다루고 있다.  

(...)

이제 지난 회에서 다룬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9.11 사건이 “현실이 우리의 이미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와서 우리의 현실을 산산조각 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까지 인용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한다. 물론 지젝의 설명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상(semblance)과 실재의 변증법이 일상적 삶의 가상화(virtualization)와는 다른 문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우리가 갈수록 인공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경험은 “실재로 복귀하고” 어떤 “실재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다시 내리고자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낳는 것이지만, 가상과 실재의 변증법은 이런 초보적인 사실로 모두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돌아오는 실재는 어떤 (다른) 가상의 지위에 있다. 정확히 말해서 실재는 바로 실재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외상적이고 과도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실재를 우리의 현실 안으로 통합해낼 수 없고, 그래서 그 실재를 어떤 악몽의 출현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탈이데올로기>, 21-22쪽; <실재계 사막>, 52쪽)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있어서 더욱 확고한 ‘실재적 현실’에 뿌리 내리고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된다는 점은 ‘자해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초보적인 사실’이고 지젝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아오는 실재’, 다시 ‘귀환하는 실재’는 좀 다른 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재’란 그 정의상 외상적이면서 과잉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통합할 수 없다. 즉 현실이란 틀에 다 담을 수가 없다. 그것은 넘쳐난다. 때문에 실재는 언제나 악몽 같은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9.11 때 무너진 쌍둥이빌딩의 이미지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이자 ‘가상’이고 어떤 ‘효과’였지만, 동시에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였다.

만약 실재가 가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고 악몽으로서만 경험된다면,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허구를 현실로 오인하지 말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정확하게 뒤집어서, “현실을 허구로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를 겪는지 식별하고, 그래서 그것이 현실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인 양태로 지각되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실재적인 현실(real reality)’ 속에서 허구의 부분을 알아내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허구의 가면임을 폭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동물들은 가짜를 진짜로 속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도 인간은 진짜를 가짜로 속일 수 있다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진짜 속에서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다. 실재적 현실 속에서 허구를 식별해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지젝은 면도칼(면도날) 자해자들의 사례도 다시 해석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실재의 참된 대립 항이 현실이라면, 면도칼로 스스로 자해할 때 이들이 실제로 도망치고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비현실성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나 일상적 삶의 인공적 가상성이 주는 느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실재 자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고, 이 실재는 우리가 현실에 내린 닻이나 뿌리를 상실하는 순간 출몰하기 시작하는 통제 불가능한 환각의 형태를 띠면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23쪽; <실재계 사막>, 53쪽)

요컨대, 신체 자해자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비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라는 것이다. ‘현실’에 내린 닻을 잃어버리자마자 우리에게 출몰하기 시작하는 이 실재의 환각에 대해서는 헤겔이 말하는 ‘세계의 밤’에서 기원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듯싶다.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참고삼아 인용한다(이 대목에 대한 설명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참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밤, 즉 모든 것을 단순한 상태로 포함하고 있는 이 텅 빈 무이다. 무수히 많은 표상들,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곧장 인간에게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 순수 자기(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흰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까다로운 주체>에서 재인용)

여기서 좋은 사례가 돼주는 것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젊은 피아니스트와 연상의 여자 선생님 사이에 벌어진 ‘정열적이지만 도착증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자벨 위페르가 문제의 선생님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고,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래는 19세기말 빈에서 상류가정의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이 자신의 피아노 선생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상투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것이 한 세기 뒤에는 남녀의 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관용적․방임적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 자체도 도착적으로 비틀리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성적으로 구애를 해오자 ‘억압돼 있던’ 피아노 선생은 그녀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그에게 보냄으로써 자신을 폭력적일 만큼 격렬하게 내보인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을 묶는 법, 항문을 강제로 핥게 하기, 그리고 따귀를 때리고 매질하기 등등, 기본적으론 피학증적 성관계의 시나리오를 담은 것이다. 그녀의 이 가장 내밀한 환상 자체는 너무 외설적이고 외상적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기에 글로 쓰였다. 이러한 환상의 직접적 노출은 남자에게 그녀의 지위를 ‘매혹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혐오스런 실체’로 변환시키지만, 그는 처음엔 거부감을 느낀 그 시나리오에 몰입한다. 그녀의 뺨을 때려서 코피가 나게 하고 난폭하게 걷어찬다. 그러고 나서는?

그녀가 환상의 실현으로부터 움츠러들면서 쓰러져갈 때, 그는 그녀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행위로의 이행과 구애를 한다.(55-56쪽)

(...) 

여하튼 그녀의 환상을 거쳐서 그는 직접적인 성행위(삽입)로 넘어갔지만, 그녀에게 환상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성행위 자체 아주 혐오스런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혐오스러움은 그녀를 다시금 냉담하게 만들고 자살로 내몬다. 무엇이 문제인가? 그녀의 환상의 노출을 진정한 성적인 행위에 대한 방어형성으로 해석하고 그 행위를 즐기러 갈 수 없게 만든 그녀의 무능함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와 반대로 노출된 환상은 그녀 존재의 핵심을 형성하는데, 그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이다. 실제로 환상 속에 구체화된 위협에 대한 방어형성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성적인 행위이다.”  

‘그녀 안에 있는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은 ‘in her more than herself’의 번역이다. 이전에 한번 다룬 대로, 그녀 안에 있는 ‘사물’ 혹은 ‘괴물’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우리에게 이질적이고 낯설지만 우리 안에서 있으면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가리킨다. ‘환상’이 형태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것이 핵심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실재의 위협에 비하면 실제 성행위란 그에 대한 방어 형성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아니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메시지다. 현실을 허구(환상, 가상)로 오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10.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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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0-09-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에 대해선 <피아니스트>에서 약간의 호감을 갖게 되었고, <하얀 리본>에서 결정적 지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상적/역사적 주제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 미학적 형식미의 측면에서요. 어쩌면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영화 <하얀 리본>을 다뤄도 상당히 문제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로쟈 2010-09-10 07:14   좋아요 0 | URL
<하얀리본>은 예고편만 봤어요. 영화를 통 못보고 있어서요.--; 저보다도 먼저 한번 다뤄주시죠.^^
 

'지젝 읽기' 연재 원고를 쓰다가 새로운 글이 없나 검색해봤는데,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한보희 연세대 강사가 쓴 글이 올라와 있다(사실 내가 다리를 놓은 글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지젝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10. 09. 01) 진리의 심연을 떠안는 주체의 정치  

슬라보예 지젝의 첫 영문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1989년에 출간되었다. 1989년은 대단히 상징적인 해이다. 그 해 봄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인민들!―를 탱크로 깔아뭉갰고 가을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잇달아 붕괴하더니 마침내 소련의 해체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오늘날 1989년은 ‘사회주의의 공식적 사망년도’로 통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는 게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바로 그 무렵, 놀랍게도 지젝은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준비하는 책을 내놓으며 두더지처럼, 만장일치의 합의를 무너트릴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놀라운 데뷔작 이후 상재된 일군의 초기 저작들은 지젝을 단박에 서구 인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지젝이 이때부터 구가해온 성공 가도에는 아주 기이한 면이 있다. 그것은 지난 20년 간 소위 대세라고 여겨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최종적 승리, “역사의 종언”,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냉소적 회의주의 등등의 주류적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성취된 것이니 말이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1995년, 이 싱싱하고 매력적인 이론가가 방금 우리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신적 계승자란 생각은 당시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젝의 ‘레닌론’은 그 시금석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2인 3각’
1989년 이래로 좌파와 우파가 공유한 불문율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괜찮아. 그러나 레닌은 안 돼!’였다. 지젝이 이 불문율에 제기하는 반론은 우선 이런 것이다. “레닌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라!” 어째서? 레닌이라는 이름은 마르크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뮤니즘이라는 잠재력의 현동화(actualization)를 표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교양적 독자가 아니라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 실천(praxis)이라는 끈에 의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2인 3각’ 달리기에서처럼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말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경기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2인 3각’은 둘이 하나가 되는 조화의 경험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기본적인 느낌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과 ‘뒤뚱거림’이다.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란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살아있음의 구체적 체험들―예컨대 사랑―이 대개 그러하듯, 그것은 이질적인 타자와의 마찰, 부조화, 마치 장애물을 안고 뛰는 듯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물론 2인 3각의 묘미는 바로 그런 상호 타자성을 견디고 넘어설 때, 나의 다리도 너의 다리도 아닌 저 ‘세 번째의 다리’가 마치 내 다리인 것처럼, 보다 정확히 말해 내가 그 ‘타자의 다리’에 붙은 신체인 것처럼 움직일 때의 향락(juissance)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이라는 2인 3각에서 세 번째 다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코뮤니즘’이다. 이 세 번째 다리―음탕한 농담에서 언제나 남근(phallus)을 가리키는―가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형상을 띠거나 파시즘적인 ‘우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아니,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과감히 가로질러가야 한다. 레닌의 위대함은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라 불리게 될) 그런 위험과 끝까지 투쟁하며 혁명적 실천을 거듭했다는 점에 있지, 애초 그런 위험을 멀리한 신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자’는 지젝의 말
지젝이 강조하는 레닌은 1914년의 재난으로부터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불가해한 레닌’이다.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이 1차 대전을 용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이념은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당시 레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도 스위스 베른의 도서관에 처박혀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했다. 지젝은 레닌이 헤겔 <논리학> 독해에서 통찰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큰 타자(Autre)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레닌이 그 큰 타자의 ‘빈자리’에서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자유를 실현할 장(場)을 발견하는, 혹은 바로 그 간극(빈자리)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실재(the Real)의 행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지젝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레닌의 바로 이 행위, 혁명에 대한 어떠한 전제나 보장도 사라진 큰 타자의 공백을 주체적으로 떠안는 몸짓(gesture)이다. 그것은 무조건적 의지주의가 아니며 레닌이 책에서 읽은 것을 현실에 과감하게 적용했다는 뜻도 물론 아니다. 마르크스라는 미완의 텍스트가 레닌이라는 ‘사라지는 매개자’를 통해 미완결의 현실이라는 텍스트와 조우한 이 사건의 변증법적 핵심은 사랑에 관한 라캉의 통찰―사랑은 두 개의 결핍이 만나 발생시키는 잉여이다―의 정치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또한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자신의 간극을 열어 서로에게로 침투하는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이라고 일컬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 봉쇄와 교착상태 속에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 주체와 객체의 동시적 ‘열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젝은 이 물음을 화두삼아 1989년 이래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상징계로 꽉 닫혀버린 우리시대에 꾸준히 ‘구멍’을 내왔고, 독자들은 그가 뚫는 구멍들을 해방의 가능성을 향한 ‘열림’으로 체험해왔다. 이것이 지젝의 기묘한 ‘반시대적’ 성공의 이유가 아닐까.

포퓰리즘을 넘어서
오늘날 파시즘의 유사 버전으로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좌파적, 우파적 포퓰리즘들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으로 봉합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간극의 실재를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표지이다. 비록 그것이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지도자와 대중들의 무분별한 요구가 직접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로 나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치안이나 행정서비스로 환원되지 않는 본래적 ‘정치’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긍정적 표식이 들어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포퓰리즘을 돌출적인 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구성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클라우에 동의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주체(대중)가 자신의 수치와 대면해야 할 사회적 적대의 심연을 사이비 적대―이른바 좌빨과 촛불좀비에서부터, 열폭하는 찌질이와 쥐박이에 이르는 온갖 혐오의 형상들―를 통해 회피하고 기성의 욕망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구만을 계속하는 ‘증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판받아야 할 무책임과 비진리, 그리고 비주체의 정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그것이 인민의 열망과 불만을 정치적 비전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번역하지 못한 (정치 엘리트만이 아니라) 인민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기념비라는 데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결국 이 주체의 간극과 그것을 떠안는 ‘행위’의 문제로 집약된다. 포퓰리즘 정치에서 대중은 여전히 지도자와 구분되는 객체(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거기에는 (상상적, 상징적) 자기를 부정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실재의 주체’로서의 대중 자신이 결여돼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담론에도 이 ‘실체이자 주체’로 도약하는 대중의 ‘행위’, 한마디로 ‘레닌적 제스처’가 결여돼 있다.

포퓰리즘을 넘어서는 레닌적 ‘진리의 정치학’은 진리를 소유한 자―그는 언제나 물화된 진리의 소유물이 될 수밖에 없다―의 독단적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타자를 향한 우리 자신의 물음(問)이 열리는 구멍(口)에 뛰어들어 자신을 새로운 역사적 형세(constellation)를 여는 문(門)으로 변화시키는, 실체이자 주체인 진리가 되어가는, 우리 삶의 과정 자체이다. 지젝은 이를 “생성 중인 레닌”이라 불렀다. 우리가 지젝의 텍스트와 ‘2인 3각’ 달리기를 해야 할 운동장도 그 주체적 생성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정치’이다.(한보희/ 연세대 강사)  

10.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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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9회

제목에서 이미 눈치챈 분들이 많을 텐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9회를 발췌해놓는다.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의 첫 장도 다 읽지 못했다. 예상보다 진도가 더딘 편인데, 초반에 개념 설명이 좀 들어가서 그런 걸로 봐주셔야겠다. 그렇다고 이후엔 진도가 더 빨라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주까지는 1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재계의 사막>은 총 5개의 장으로 돼 있다. 

  

다시 반복해보자. “소위 근본주의자의 테러라는 것도 실재계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 아닐까?”(<실재계의 사막>, 35쪽)라는 것이 지젝의 물음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하여 따져본다. 지젝의 주된 방식이지만 안팎을 뒤집어가면서.  

 

영화 <바더 마인호프>(2008)를 통해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지젝은 먼저 1970년대 초 독일의 적군파(Red Army Faction) 테러의 배경에 주목한다. 신좌파 학생운동이 붕괴된 뒤 곁가지로 빠져나온 것이 적군파였는데, 그들은 학생운동 실패의 교훈을 이렇게 짚었다. (1)대중들이 비정치적 소비주의에 너무 깊이 침윤돼 있다. (2)통상적인 정치교육과 의식화로는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3)따라서 그들을 이데올로기적 무감각과 최면 상태에서 흔들어 깨우려면 더 폭력적인 개입이 필요하다(슈퍼마켓 폭파 같은). 이와 동일한 논리가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이 역시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지젝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다. 그러한 열정은 그 정반대적인 ‘연극적 스펙터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가상(semblance)에 대한 열정’이기도 하다(<실재계의 사막>에서는 ‘모사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졌다). 실재=가상? 그래서 역설이다. 지젝은 이렇게 정리한다.

만일 실재계에 대한 열정이 극적인 실재계 효과의 순수한 외관으로 끝난다면, 그와는 정반대로 외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열정은 실재계에 대한 열정으로의 맹렬한 회귀로 끝나게 된다.(<실재계의 사막>, 37쪽)

(...)

여하튼 우리 주변에서도 면도날이나 담뱃불로 자해하는 경우를 아주 드물지는 않게 볼 수 있다. 그건 어떤 의도에서인가? ‘현실 자체’를 주장하기 위해서, 단언하기 위해서다. 거꾸로 말하면, 뭔가 사는 것 같지 않고, 현실이란 실감이 나지 않아서다. 자해는 그런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현실 안에 확고하게 근거지우기 위한 시도이다. “면도칼 자해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보고에 따르면, 스스로 자해한 상처에서 붉고 따듯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나면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현실에 확고히 뿌리내린 기분이라는 것이다.”(<탈이데올로기>, 19쪽) 물론 이러한 자해행위는 병리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정상성을 회복하고, 완전한 정신병적 붕괴를 피하기 위한 병리적 시도이다 즉 자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해 현상과 상관적인 것이 바로 우리 주변 환경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실체가 제거됨으로써 현실이 점점 더 가상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예컨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 등등. 섹스 없는 섹스로서 가상섹스(혹은 사이버섹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고, 전쟁 없는 전쟁, 곧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콜린 파월의 독트린도 추가할 수 있다(<실재계의 사막>에서 ‘아무런 인관관계도 없는 전쟁’은 ‘아무런 아군 사상자도 없는 전쟁(warfare with no casualties)’의 오역이다). 거기에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한 ‘정치 없는 정치’와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 경험으로서 관용적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까지 ‘가상화’는 전면적이다. 여기서 ‘타자성이 제거된 타자의 경험(experience of the Other deprived of its Otherness)’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두 가지 번역본이 모두 잘못 옮기고 있어서 잠시 짚고 넘어간다. 원문과 그에 대한 두 번역이다.   

"the idealized Other who dances fascinating dances and has an ecologically sound holistic approach to reality, while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

“매혹적인 춤을 추고 현실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을 보이면서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실재계의 사막>, 38쪽)

“그 타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생태학적으로 건전하고 유기체적인 접근법을 통해 현실에 접근하지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탈이데올로기>, 20쪽)

인용문 전체는 ‘타자성(Otherness)’이란 말 뒤에 괄호로 묶여서 등장한다. 그 타자성이란 어떤 타자성인가? ‘매혹적인 춤’을 춘다고 할 때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의 춤이다. 뭔가 이국적인 춤. 동아시아의 춤이어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holistic approach’을 ‘심신상관학설의 접근방법’이나 ‘유기체적인 접근법’이라고 옮긴 건 좀 한정적이다. 전체론적 접근, 전일론적 접근을 뜻하는데, 분리적 접근과 반대되는 의미다.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으며, 부분과 전체를 분리시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수지침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전신의 부위에 해당하는 대응점이 있어서 여기에 자극을 주어 질병을 치료한다는 원리다. 발 마사지도 마찬가지다. 손이나 발은 몸의 일부이지만 전체를 반영한다는 것이 ‘전일론적 접근’이다. 서양의 기계론적, 분리론적 접근과는 다르기에 낯설고 ‘타자적’이다. 이 정도 타자성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다.  

하지만 그 타자성에도 불편하고 께름칙한 게 있다.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이다. ‘practices like wife beating remain out of sight’는 ‘아내 구타 같은 관습’은 ‘이상화된 타자’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관습은 배제된다.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고... 그러한 이상화된 대타”는 “안 보이는 곳에서는 아내 구타를 일삼는 이상화된 타자”라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아내 구타’와 ‘이상화된 타자’는 서로 충돌한다.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 등과 같은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이상화된 타자다”라는 번역도 ‘wife beating’이 어떻게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둔갑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눈감는’ 주체는 ‘이상화된 타자’가 아니라 ‘우리(서양인)’이다.  

‘아내 구타’는 빼놓고 매혹적인 춤과 전일론적 현실관 같은 타자성만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타자성 없는 타자’의 경험이다. 거기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우리식으론 ‘앙꼬 없는 찐빵’처럼 뭔가 실체가 빠져 있다. 그렇듯 뭔가 빠진 현실을 일반화한 것이 ‘가상현실’이다. “그것은 실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실재계의 견고하고 저항적인 핵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 

10.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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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 2010-09-09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처음으로 댓글 올려봅니다. 그동안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좋은 책들 많이 알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Spidersens 2010-09-09 07:45   좋아요 0 | URL
>> 그나저나 wife-beating이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로 번역되다니 정말 아연실색이네요..

그렇게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 없이 "wife beating"으로 되어있는데요. 급히 지나가면서 보면 동명사 "beating"이 앞의 "wife"를 수식하는 현재분사처럼 보이고, 일반적으로 현재분사를 옮길 때 쓰는 "~하는"을 쓰다 보니 "(누군가를) 구타하는 아내"로 생각하게 되고, 생략된 구타의 대상을 당연히 남편이겠거니 하고 짐작하고 "남편을 구타하는 아내"라고 옮겼을 겁니다.
또다른 예로 등장한 "casualties"의 경우도 빨리 지나가면서 보면 "causality"로 보일 수 있죠. 그러니 "인과관계"로 잘못 옮겼을 테고...
문제는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옮기고 나서 다른 사람의 책을 보듯 검토를 했어야 하는데, 역자가 그걸 하지 않은 듯 하다는 겁니다.

로쟈 2010-09-09 09: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걸러내는 사람이나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죠...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을 계속 다루고 있는데, 이번에도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다음에 한 차례 더 '읽기'를 덧붙일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837  에서 읽으실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본은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 대역본 두 종을 참고했는데, 대화 장면의 번역은 나대로 다시 옮겼다. 동서문화사판 <마지막 잎새/원유회>에도 번역돼 있다는 게 지금 생각났다. 참고한다고 책을 구해놓고는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고 있다...  

자,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도 이제 막바지 클라이맥스를 남겨놓고 있다. 어차피 ‘가엾은 여인(the poor little creature)’으로 판명된 이상 로즈머리로선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인도적 자선과 후의를 베풀면 될 터이다. 차 한 잔? 아니다. 샌드위치에다 버터 빵을 먹이고 찻잔이 빌 때마다 크림과 설탕을 잔뜩 넣어주었다. 사람들 말이 설탕에는 영양분이 많다는 걸 떠올려서다. 로즈머리는 물론 먹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피우면서 상대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일부러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she smoked and looked away tactfully so that the other should not be shy.) 여기서 부사 ‘tactfully’(재치 있게)는 남의 마음을 잘 알고 대처하는 기지를 말한다. 로즈머리는 상대(the other)에 대한 에티켓을 나름 지켜주고 있는 셈. 그녀의 자선적 포즈는 세련된 매너도 잊지 않는다. 물론 두 사람이 차를 같이 마셨다고는 돼 있지 않다.  

간단한 식사, 조촐한 요기로 일단 허기는 면하게 하자 손님은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기댄 채 벽난로를 응시할 정도가 됐다. 이제 남은 절차는 그녀의 처지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녀의 이야기에 동정을 표시하며 공감해주고, 궁극적으론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란 물음에 대한 전폭적인 수긍을 얻어내는 일이 남았다. 자신의 친절한 배려와 후의에 또 한 번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로즈머리는 살짝 눈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읽은 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래, 마지막 식사는 언제 했어요?”라고 로즈머리는 상냥하게 물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문 손잡이가 돌아감과 동시에 들어가도 되느냐는 목소리가 들린다. 남편 필립이다. 낯선 여인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란 필립을 로즈머리가 괜찮다며 안심시킨다. 그리고 필립에게 손님을 처음 소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여인의 이름이 ‘스미스’라는 걸 알게 된다. 필립은 벽난로 쪽으로 가 등을 지고서 아직도 맥이 풀려 있는 여인의 손과 신발을 뜯어보고 다시 로즈머리를 쳐다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를 파악해보려는 것이겠다. 필립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미스 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아내에게 서재에서 잠깐 보자고 이야기한다. 둘만 있게 되자 필립이 로즈머리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로즈머리는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커어즌 가에서 데리고 왔어요. 정말로. 정말로 그냥 데려온 여자야. 차 한 잔 값만 적선해달라고 하길래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죠 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필립의 물음에 로즈머리는 그저 그녀에게 친절하고 편하게 대해야 한다고만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안 해봤기에 그렇다. 과연 필립은 뭐라고 말했을까? “여보, 당신 정말 미쳤군그래. 그렇게 안 되는 거잖아.” 남편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로즈머리의 응수를 보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왜 안 된다는 거예요? 난 그러고 싶어요. 그게 이유가 안 되나요? 그리고 게다가 이런 일은 책에서 늘 읽는 거구요. 난-”

여기서 로즈머리가 염두에 둔 책은 앞에서 나온 대로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하는 대로 우리가 못할 건 또 뭐냐는 게 로즈머리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렇듯 당차게 자신의 결심을 밝히려는 순간, 필립이 말을 가로챈다. “하지만, 저 여잔 너무 놀랄 정도로 예쁘잖아.”(she's astonishingly pretty.) 필립의 이 예기치 않은 말에 정작 깜짝 놀라는 것은 로즈머리다. 낯선 여인을 집에까지 데려옴으로써 남편을 얼마간 의기양양하게 놀라게 한 로즈머리이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 대한 수식어로 사용된 ‘예쁘다’는 형용사는 그녀의 ‘현실’을 뒤집어놓는다.

“예쁘다고요?” 로즈머리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난, 난 그렇게는 생각 못했는데.”

(...)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상황은 예측 가능하다. 로즈머리는 석 장의 지폐를 ‘손님’ 손에 쥐어주고는 조용히 집을 떠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스미스 양’은 더 이상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로즈머리의 ‘시나리오’가 필립의 뜻밖의 반응 때문에 뒤엎어진 이상 그녀의 존재는 로즈머리에게 더 이상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분개의 대상이고, 지워야 할 악몽일 뿐이다. ‘사건’을 마무리한 다음에, 정확하게 말하면 다시 예전처럼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한 다음에, 로즈머리는 남편의 서재로 다시 가서 스미스 양이 같이 식사를 못하게 됐다고 통지한다. 자꾸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막을 수 없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아주 상냥하게 부드러운 어조의 목소리로.

로즈머리는 방금 머리 손질을 다시 하고, 눈매를 더 짙게 하고, 진주 장식품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들어 필립의 두 볼에 갖다 댔다.
“당신 날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고, 달콤하고 쉰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당황하게 했다.

로즈머리는 잠시 낮에 들렀던 가게에서 보아둔 작은 상자 얘기를 꺼내며 28기니나 하지만 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필립,” 그녀는 소곤거리고는 남편의 머리를 자기 젖가슴에다 꼭 눌렀다. “나 예뻐?”(am I pretty?)

(...)

「차 한 잔」에서 로즈머리의 시나리오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한 여인에게 특별한 환대를 베풀고자 하는 그녀의 자아도취적 욕구이다. 물론 이 욕구의 전제는 자기보다 못한 여인과 그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신과의 현격한 ‘차이’다. 두 사람의 온전한 소통과 교감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 차이, 사회적 차이이면서 계급적 차이다. 여성이라는 동일한 성별이 이러한 차이를 극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남편 필립은 ‘부조리하게도’(You absurd creature!) 두 여자를 똑같은 ‘여성’으로 놓고 심미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쁘다’는 형용사가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실재(the real)’처럼 로즈머리의 ‘현실(reality)’로 침범해 들어와 그녀가 짜놓은 시나리오를 교란시키고 무효화 했다. 그렇게 되면서 로즈머리의 관심사는 갑자기 이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전환된다.

(...) 

10.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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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우북 2010-09-0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 글 참 재미있습니다. ^^ 어머니들이 애청하시는 드라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부잣집 아내, 시어머니, 약혼녀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로즈머리와 겹쳐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네, 여성심리 묘사가 정확하다고 어느 여성 독자가 그러더군요...

비로그인 2010-09-0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소설 꼭 구해봐야겠네요. 로쟈님의 설명을 들으니 아주 재미있는 내용 같아 끌리기도 하지만 과연 어떤 문체에 담겨 있을지 그것도 무척 궁금해서요ㅋㅋ^^

로쟈 2010-09-08 19:27   좋아요 0 | URL
대역본으로 읽으시는 게 좋을 듯해요. 번역에 가려지는 대목이 좀 있어서요...
 

이번주 지구촌 최고의 화제작은 스티븐 호킹의 <거대한 설계>가 될 전망이다. 무신론을 함축한 '자발적 창조론'을 주장하여 영국에서는 이미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국내 언론도 관련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시간의 역사>(삼성이데아, 1989)가 물리학 책으로는 드물게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전력이 있는 만큼 <거대한 설계>도 곧 한국어본이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그 사이에 20년도 더 되는 시간이 지나가버렸군... 

한국일보(10. 09. 06) [지평선/9월 6일] 호킹의 우주 

다음 주말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열광 속에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천재물리학자로 불리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 <거대한 설계(Grand Design)>의 출간이 예고된 때문이다. 대중을 위해 알기 쉽게 우주의 기원과 구조, 팽창과정 등을 설명한 책이라곤 하지만, 앞선 <시간의 역사>나 <호두껍질 속의 우주>처럼 초끈이론, M-이론 등 난해한 현대물리학에 대한 기본이해 없이는 도전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그의 책은 매번 엄청나게 팔렸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가장 읽히지 않는 베스트셀러'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어쨌든 <거대한 설계>는 서점에 풀리기도 전에 이미 거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영국언론은 지난 주 책 내용을 발췌 소개하면서 '신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도발적 제목을 달았다. 우주의 기원이 된 대폭발(Big Bang)은 물리학 법칙의 필연적 결과라는 그의 '자발적 창조론'을 압축한 표현이다. 더욱이 호킹은 "(창조를 설명하려) 종이에 불을 붙여 우주를 폭발시키는 신을 부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단다. 이 냉소적 비유는 기독교신앙에 바탕한 창조론자, 다른 말로 '지적 설계론자'들로서는 가히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 10년 전 책에서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던 그에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에게 선택된 지구'의 자긍심을 무너뜨릴 만한 또 다른 태양계의 발견이 첫 계기였다고 하지만, 보도내용으로 미루어 우주의 현상을 완벽하고 통일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도달한 것이 결정적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런 이론 구축이 현실화한다면 창조론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것이다. 우주와 생명, 인간의 기원과 발전과정에서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입증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이 지금까지 신이 머물러온 자리인 때문이다.

■ 모든 인간이 숙명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와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이 조금씩 답을 얻어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론 두렵고 허망하다. 과학 발전에 따라 정신작용도, 사랑의 감정을 포함한 복잡미묘한 마음까지도 내분비계 화학적 성분의 조합으로 규명돼간다. 모든 것이 물리법칙과 화학반응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후련해서 행복할까?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의 존엄성이나 존재의미는 그럼 뭘까?…가을 문턱에서 호킹의 신작 소식에 접해 문득 어지러운 상념에 잠긴다.(이준희 논설위원) 

10. 09. 06. 

 

P.S. 책은 <위대한 설계>(까치글방, 2010)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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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주 탄생에 대한 스티븐 호킹의 대답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0-06 08:22 
    영어권에서는 지난달에 출간돼 화제를 모은 <위대한 설계>(까치, 2010)의 번역본이 나왔다(관련기사들에서 '거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로 옮겼었는데, 번역본 제목은 '위대한 설계'가 됐다). 교양과학서로는 이번주에 가장 크게 다뤄질 만한 책이다. 간단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알라딘에서도 이미 예약주문을 받고 있는 책인데, 나도 주문을 넣어야겠다...    
 
 
마일즈 2010-09-06 17:58   좋아요 0 | URL
그런 지적에 이견은 없습니다만, 과학에 관련된 글쓰기에 항상 따르는 운명같습니다. 특히 보편청중을 청자로 삼는 과학에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어떤 과학현상을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기존과 다른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식전개는 일반독자보다는 보편청중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의미가 있는거 같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섬세한 성과를 비유적으로 차용한 문학글쓰기와도 과학글쓰기는 다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한 경향으로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그의 글도 언어학에 관련된 여러 분야를 아우른 일종의 언어과학글쓰기로 보이는데, 맨 처음에 접했을 때 인상과는 달리 그가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이 관련된 분야 책을 읽을수록 크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약간의 당혹감이 듭니다.

거의 보편청중을 염두에 둔 과학을 일반독자에게 전달하는 과학글쓰기는 또 다르게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로쟈 2010-09-07 09:04   좋아요 0 | URL
그런 글쓰기가 아쉽게도 국내에선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책을 쓸 수 있는 과학자뿐아니라 전문 저널리스트들이 더 나왔으면 하는데, 그럴 여건은 아직 못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