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뜻대로 안 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다˝

격주간 <기획회의>(27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청탁원고를 사절하고 있어서 요즘 정간물에 쓰는 서평은 한달에 한번 쓰는 <기획회의>와 격월로 쓰는 <공간> 원고가 전부다(한데 마감은 내주에 또 같이 몰려 있다). 내년에는 예약해놓은 곳이 있어서 더 추가되겠지만, 이런 추세면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다음 서평집은 3-4년 뒤에나 묶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책을 읽고 아무말도 하지 않을 자유'도 좀 누려봐야겠다). 각설하고, 이번에 다룬 건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동녘, 2010)이다(지난번에 다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 리뷰까지는 <책을 읽을 자유>에 실렸다). 애초엔 개념사에 관한 책을 집어들었지만, 마감이 임박해서는 아무래도 더 재미있는 책을 서평감으로 고르게 됐다. 물론 더 빨리 쓸 수 있어서였다...   

기획회의(10. 09. 05) 선물로서의 삶을 위해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이란 이름은 더 이상 철학 전공자들만의 ‘은어’가 아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을 비판한 첫 저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롤스식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 대열에 가세한 걸로 유명하지만, 영미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나 흥미를 끌 이야기다. 심지어 2005년 ‘다산 기념 철학 강좌’에 초빙돼 내한하여 네 차례 강연을 갖고, 강연문이 <공동체주의와 공공성>(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어도 샌델을 아는 독자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인문서로선 올 최고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가 모든 걸 바꾸어놓았다. 얼마전 그가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을 때는 ‘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4천 명이 넘는 일반 청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한국사회의 한 ‘현상’이 됐다.    

샌델의 방한에 발맞춰 출간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그런 ‘현상’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샌델과 비슷하게 자유주의적 우생학을 비판하고 하버마스의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3)가 독자들의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던 걸 상기해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자신이 다루는 윤리적 쟁점에 독자(청중)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샌델 특유의 화법과 기술이다. 이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본 독자에게는 친숙한 방식이지만 샌델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이면서 다양한 사례들을 논거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의 강점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가령 ‘강화의 윤리학’을 다루는 첫 장에서도 샌델은 다짜고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레즈비언 부부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 위해 애를 쓴 사례가 제시된다. 이 부부는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서 결국은 청각장애 아들을 얻었다. 이 사례를 바탕으로 샌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그렇게 일부러 청각장애를 갖기로 계획하는 일이 과연 도덕적으로 그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독자(혹은 청중)와 함께 문제를 제기하고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타당한 윤리적 결론을 도출해가는 샌델의 방식은 자칫 딱딱한 논변으로 일관하기 쉬운 윤리적 문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책의 부제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다. 유전공학 시대의 생명윤리를 탐색하는 샌델의 기본 입장이 이미 드러난다.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서 완벽해지려는 시도에 그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생명공학 기술들은 질병을 치유하거나 유전적 이상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노화에 따른 근육 손실을 복구하는 기술은 손상된 근육뿐만 아니라 건강한 근육도 강화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만약 운동선수들이 이 유전학적 강화기술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운동선수가 파열된 근육을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치료의 도움을 받는 것이 허용된다면, 근육을 강화하는 데 그 치료를 사용하는 것은 왜 안 되는가. 과학자들은 기억 관련 복제 유전자를 활용하여 기억 향상 약물이나 ‘인지력 강화제’를 개발하려고 한다. ‘뇌에 쓰는 비아그라’다. 이런 약물이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치료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면, 건강한 사람이 치료 목적과 무관하게 자신의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금지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키가 작은 아이들이 성장호르몬제를 처방받는 것이 허용된다면, 평균 키지만 키를 좀더 키워서 농구 팀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이 성장호르몬제를 처방받는 것은 왜 안 되는가. 현재 기술적으로는 정자 선별 기술을 통해서 여자아이는 91%, 남자아이는 76%까지 감별할 수 있다고 한다. 남아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고 성비 균형이 맞는 사회에서도 그런 성 감별을 거부할 이유가 있는가. 성별뿐만 아니라 아이의 키와 눈 색깔, 피부색까지 선택할 수 있다면? 성적인 성향이나 지능, 음악적 재능, 운동 능력도 부모가 미리 선택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 유전공학적 기술로 가능하여 부모가 아이의 ‘디자이너’가 되고자 한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치료와 강화 사이에 경계선이 흐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샌델은 그 구분 자체의 중요성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령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도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받아들이는 사랑은 자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변화시키는 사랑은 자녀의 복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랑은 물론 서로 다른 측면의 과도함을 교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샌델이 우려하는 것은 오늘날 부모들의 사랑이 변화시키는 사랑 쪽으로 치우쳐서 과도하게 자녀들의 완벽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치료 목적으로 개발된 생명공학 기술이 강화의 목적으로 전용되거나 남용되는 현상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  

생명공학이 ‘자녀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만들어내는 부모’라는 신화를 현실로 만든다면, 아이의 재능과 능력은 ‘선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계획과 개입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유전적으로 강화된 아이들은 자신의 소질에 대해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부모에게 빚을 진 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이나 운에 맡길 부분이 줄어들면서 부모에겐 엄청난 책임이 전가될 것이다. 즉 “우리가 유전적 유산의 정복자가 될수록 자신의 재능과 행동 방식에 대한 부담이 커질 것이다.” 농구 선수가 리바운드를 놓쳤을 때 지금은 제 위치에 없었다고 코치에게 야단맞지만 미래에는 키가 작어서 리바운드를 못 받는 거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지 모른다는 게 샌델의 우려다.  

대학 입학과 관련한 2년 컨설팅에 3만 2995달러가 드는 ‘플래티넘 패키지’가 최상류층을 상대로 판매된다면, 그런 비용을 댈 수 없는 부모는 무능하고 자격 없는 부모로 간주될 것이다. 마치 산전 유전자 검사를 제 때 받지 않아서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은 부모처럼 “할 일을 안 하고 넘어간” 부모로 치부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우리보다 못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과의 사회적 연대는 더없이 약화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우생학과 유전적 강화에 샌델이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각에서다. 그는 “이 시대의 과잉 양육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지나친 불안을 나타내며, 이는 선물로서의 삶의 의미를 놓치는 일”이라고 본다. 때문에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의 재능과 성공이 노력의 산물만은 아니며 선물이기도 하다는 인식의 회복이다. “그 모습 그대로 완벽한 두 아들 아담과 아론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는 저자의 서문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10.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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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9-1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델은 인간이라는 종을 특별하고 존엄한 존재로 보는 것 같네요. 존 그레이의 책하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10-09-12 08:42   좋아요 0 | URL
특별한 존재로 본다기보다는 우리의 통념적 인간 이해가 아닌가 싶어요. 존 그레이의 책은 지금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