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테바의 이어지는 질문은, 만약에 언어가 '표현'이고 그래서 그것의 한계[울타리]가 분명하게 그려진다면, 그걸 넘어설 방도는 없는가, 비표현성(nonexpressivity)이란 무얼 말하는가, 혹시 문자학은 언어학적 표기들이 아닌 논리적-수학적 표기들에 기초한 비표현적 '기호학'은 아닌가, 이다. 즉 문자학이 기존의 기호학과 대상[자료]만을 달리하는 기호학[보다 넓은 기호학]은 아닌가라는 의혹.



이에 대해 데리다는 모순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On the one hand, expressivism is never simply surpassible, because it is impossible to reduce the couple outside/inside as a simple structure of opposition. This couple is an effect of diff rance, as is the effect of language that impels language to represent itself as expressive re-presentation, a translation on the outside of what was constituted inside."(33쪽)

국역: "한편으로 표현주의는 결코 간단히 초월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부-외부의 단순한 대립 구조라는 이러한 차이의 결과와 언어로 하여금 표현적인 표상, 내부에서 구성되었던 것의 외부로의 해석으로 재현되게 하는 이러한 언어행위의 결과를 환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56쪽)

영역처럼 끊어서 읽겠다: "한편으로 표현주의[표현성]는 간단하게 초월할[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조로서의 안/바깥을 해소[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립 쌍은 차연의 결과[효과]인데, 이는 언어가 자기 자신을 표현적인 재현[표상], 그러니까 안에서 수군거린 일을 바깥으로 옮기는 것[번역]으로서 제시하도록 강요하는 언어(작용)의 결과라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요지는 '표현'으로서의 언어가 어떤 필연에 따른다는 것이겠지. 이것은 칸트가 선험적 환상이라고 불렀음직한 구조적인 미끼[유혹]이다(즉 어지간하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미끼인 것). 유독 서구 형이상학만이 좀 둔해서 걸려든 것은 아닌 것이다.

"On the other hand, and inversely, I would say that if expressivism is not simply and once for all surpassable, expressivity is in fact always already surpassed, whether one wishes it or not, whether one knows it or not. In the extent to which what is called "meaning" (to be "expressed") is already, and thoroughly, constituted by a tissue of differences, in the extent to which there is already a text, a network of textual referrals to other texts, a textual transformation in which each allegedly "simple term" is marked by the trace of another term, the presumed interiority of meaning is already worked upon by its own exteriority. It always already carried outside itself. It already differs (from itself) before any act of expression."

다소 길다. 국역: "다른 한편으로, 그리고 역으로, 나는 표현주의는 간단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초월될 수는 없지만 표현성은 우리가 원하건 아니건간에, 또한 우리가 알건 모르건간에 실제로 이미 늘 초월되어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표현해야' 할) '의미'라고 부르는 것이 이미 도처에서 차이들의 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텍스트, 즉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텍스트의 참조망, 또한 '단순한' 각 '항목'이 다른 항목의 흔적에 의해 나타나는 텍스트의 변형이 존재하는 한, 의미의 추정된 내재성은 이미 그 자신의 외부의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항상 자기 밖으로 놓여지게 되며 모든 표현행위 이전에 이미 (자기로부터) 차이됩니다."(57쪽)

나의 번역: "다른 한편으로, 이번에는 거꾸로, 나는 이 표현성이 아주 간단하게[만만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초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실제로는 이미 그리고 항상 초월되어 왔다고 말해야겠군요.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바인가 아닌가, 혹은 우리가 그걸 알고 있었나 없었나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표현'되어야 할) 어떤 '의미'란 것이 차이들의 망에 의해 이미 그리고 완벽하게 구성되는 한, 또 이미 어떤 텍스트, 즉 다른 텍스트들에 대한 어떤 텍스트적[조직적] 관계[연관]망, 그러니까 다른 단어의 흔적에 의해 표시되는 이른바 개개의 '순진한 단어'들이 거주하는 텍스트적 변형[텍스트들 간의 오고감]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가정하는 의미의 내재성은 이미 자신의 외재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미(의 내재성)]은 항상 이미[먼저]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갑니다[운반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표현행위 이전에 (자신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는[달라져 있는] 것이지요."

즉 어떤 표현행위에 의해서 (의미가)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표현되는 것] 아니라 그러한 행위 이전에 이미 밖에 나와 있다는 얘기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것은 뭔가를 '의미'할 수 있다[Only on this condition can it "signify."]."

데리다는 이러한 관점[자리]에서 비표현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 "Only nonexpressivity can signify, because in all rigor there is no signification unless there is synthesis, syntagm, diff rance, and text."

국역: "엄밀하게 말해서 종합·연사·차이·텍스트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표현성만이 의미적일 수 있습니다." 나의 번역: "오직 비표현성만이 의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뭔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차이들의) 종합, 결합, 차연, 그리고 텍스트가 없다면 어떠한 의미작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물론 텍스트만이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할 때에 의미작용과 의미의 가치는 이미 변형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규정되는 문자학: "Grammatology, as the science of textuality, then would be a nonexpressive semiology only on the condition of transforming the concept of sign and of uprooting it from its congenital expressivism."

국역: "텍스트성의 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는 그러므로 기호의 개념을 변형시키고 그 생래적 표현주의로부터 그것을 떼어놓는다는 조건에서만 비-표현적 '기호학'이 될 것입니다." 다시 번역하지 않겠다. 마지막 질문이 까다롭다는 걸 전제하면서 데리다는 인공언어[순 논리적-수학적 표기(법)]에 대한 저항[비난]이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의 기본적 성격[전제]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A grammatology that would break with this system of presuppositions, then must in effect liberate the mathematization of language, and must also declare that "the practice of science in fact has never ceased to protest the imperialism of the Logos, for example by calling upon, from all time, and more and more, nonphonetic writing.""

국역: "이러한 전제들의 체계와 절연하고자 하는 그라마톨로지는 그러므로 언어의 수학적 체계화를 자유롭게 하고 또한 '과학의 실행이 오래 전부터 그리고 점점 더 비음성적 글쓰기에 호소함으로써 로고스의 제국주의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인용은 <그라마톨로지>에서 따온 것이다.

나의 번역: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 전제들의 체계들과 절연하고자 하는 문자학은 사실 이제는 언어의 수학화[수학적 언어화]를 거리낌없게 해야 하며, 또한 과학의 실행이 따지고 보면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점 빈번하게 예컨대 비음성적 문자[표기]에 호소함으로써 로고스 제국주의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 왔다는 걸 공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 이면의 역사가 있었다는 얘기(수학[수학적 표기]은 이 또 다른 역사의 주역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반전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 반전[접수]은 거의 끝장을 보기 힘든 과업[infinite task]이다. 자연언어와 비수학적 표기들을 모두 접수[환원]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부의 적: "We must also be wary of the "naive" side of formalism and mathematism, one of whose secondary functions in metaphysics, let us not forget, has been to complete and confirm the logocentric theology which they otherwise could contest."

국역: "또한 그 부차적 기능들 중 하나가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던 형이상학에 있어 로고스중심적 신학을 오히려 완성하거나 공고히 하는 것이었던 형식주의와 수학주의의 '소박한' 측면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합니다."

나의 번역: "우리는 또한 형식주의[형식]와 수학주의[수학]의 '순진한' 측면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측면이 (제대로였다면 비판할 수도 있었을)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적인 신학을 (옆길로 새는 바람에) 오히려 완성하고 확고하게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죠."(라이프니츠의 예)

결론: "The effective progress of mathematical notation thus goes along with the deconstruction of metaphysics, with the profound renewal of mathematics itself, and the concept of science for which mathematics has always been the model."

국역: "그러므로 수학적 기호표기법의 실질적인 진보는 형이상학의 해체, 수학의 개념과 그것이 늘 그 모델이 되었던 과학의 개념에 대한 심오한 쇄신과 짝을 이룹니다."

나의 번역: "따라서 수학적인 표기(법)의 결정적인[실질적인] 진보는 형이상학의 해체(구축)과 함께 하는 것이며, 수학 자체와 그것[수학]이 언제나 모델[전범]이 되어 왔던 과학의 개념에 있어서의 근원적인 갱신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테바의 마지막 질문. 만약 기호의 문제가 과학성[과학을 과학으로 성립시켜주는 근거]의 문제에 걸려 있는 거라면, 즉 이 둘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면, (기호학에 대한 비판[대안]으로서의) 문자학은 '과학'인가 아닌가, 하는 것. 또 만약에 데리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기호학적 작업은 문자학의 기획[프로젝트]에 근접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에 대한 데리다의 답변: "Grammatology must deconstruct everything that ties the concept and norms of scientificity to ontotheology, logocentrism, phonologism. This is an immense and interminable work that must ceaselessly avoid letting the transgression of the classical project of science fall back into a prescientific empiricism. This supposes a kind of double register in grammatological practice."

국역: "그라마톨로지는 과학성의 개념과 규범들을 존재신학,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주의에 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대하고 무한한 작업이며 과학의 고전적 계획에 대한 위반이 전-과학적 경험주의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라마톨로지적 실행에 있어 일종의 이중 기제를 전제로 합니다."(59쪽) '이중 기제'는 '이중 기재[등록]'의 오역인 것 같다.

나의 번역: "문자학은 과학성의 개념과 규준들을 존재신학,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주의와 연루시키는[연결시키는] 모든 것을 해체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방대하면서 종결되지 않을 작업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과학의 고전적 기획이 과학 이전의[전과학적인] 경험주의로 추락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저지[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은 문자학의 실행[실천]에 있어서 일종의 이중 등록을 가정합니다."

즉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를 넘어서야 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과학 자체 내의 모든 유효한 작업들을 부추겨야[북돋아줘야] 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문자학이 '과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지 않다: "In a word, I would say that it inscribes and delimits science; it must freely and rigorously make the norms of science function in its own writing; once again, it marks and at the same time loosens the limit which closes classical scientificity."

국역: "나는 한마디로 그것을 과학을 기입하면서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글쓰기 속에 과학의 규범들을 자유롭고 엄격하게 기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것은 고전적 과학성의 영역을 나타내는 경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완시킵니다."(59-60쪽)

나의 번역: "한마디로, 나는 그것[문자학]이 과학을 기입하면서[새겨넣으면서] 동시에 과학을 (한계)지운다고[과학에 속하면서 과학을 넘어선다고] 말하겠습니다. 그것[문자학]은 과학의 기능에 대한 규준들을 아주 자유로우면서도 엄격하게 작성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것[문자학]은 고전적인 과학성을 마감하게 한[울타리 지운] 한계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이완[완화]시킵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모든 과학적인 기호학 작업은 문자학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One can say a priori that in every proposition or in every system of semiotic research metaphysical presuppositions coexist with critical motifs."

국역: "기호학적 탐구의 모든 명제나 체계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전제들과 비판적 동기들은 함께 섞여 있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 둘[형이상학적 전제와 (그에 대한) 비판적 동기/모티브]이 한 언어 속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맺는 말: "Doubtless, grammatology is less another science, a new discipline charged with a new content or new domain, than the vigilant practice of this textual division."

국역: "그라마톨로지는 틀림없이 또다른 과학이라거나 새로운 내용과 제한된 새로운 영역을 지닌 새로운 학제라기보다는 이러한 텍스트 분할의 세심한 실천일 것입니다."

나의 번역: "두말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문자학은 또다른[새로운] 과학이 아닙니다. 즉 새로운 내용, 새로운 영역을 가진 새로운 학문[과학]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은 차라리 이러한 텍스트 분할[가름]의 세심한[섬세한] 실천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여기서 '텍스트 분할'이라고 한 것은 한 텍스트 속에서 아군[(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동기들]과 적군[형이상학의 전제들]을 배추포기 나누듯이 가려내는 걸 말한다. 그래서 먹을 만한 부분과 버려야 할 부분[벌레먹은 부분(형이상학에 오염된 부분)]을 추려내는 것. 여기에는 아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고 데리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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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7-11-0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적인 번역이란 외국어보다 우리 말에 능란해야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페이퍼입니다. 로쟈님의 번역물을 알고 싶습니다. 전부터 알고 싶었지만 말입니다.

2007-11-01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2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2 13:40   좋아요 0 | URL
그 '의문'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크리스테바의 두번째 질문은 데리다가 내세우는 기호학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 '비현전의 새로운 구조'로서의 그람(gram)과 차연(differance)으로서의 에크리튀르[문자](writing)가 무엇이며 이것들이 기호학의 주요 개념들과는 무슨 차이[단절]가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문자학에서 말하는 텍스트가 언어학과 기호학에서 사용하는 언표(enounced)란 개념을 어떻게 대체하느냐 하는 것.



먼저 문자(나는 '글자들'이란 말로 옮기고 싶지만)에 대한 데리다의 대답은 그것이 음성중심주의와 로고스중심주의에서 (부당하게) 폄하(reduction)되어 왔다는 것. 이 부분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넘어가기로 한다(<그라마톨로지>의 1, 2장). 데리다가 보기에 순전히 음성표기적인 문자(purely phonetic writing)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는 주장[음성주의]은 특정한 윤리적 가치론적 경험의 결과[표현]이다.

이들에(데리다는 '재현주의자representativist'란 말로도 부른다) 의하면: "Writing should erase itself before the plenitude of living speech, perfectly represented in the transparence of its notation, immediately present for the subject who speaks it, and for the subject who receives its meaning, content, value."(25쪽)

국역: "그 표기법의 투명함 속에 완벽하게 표상되며, 말하는 주체와 그 의미·내용·가치를 전달받는 주체에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살아있는 말의 충만함 앞에 글쓰기는 지워져야 한다는 것"(48쪽)이다.

다시 옮겨보자: "문자[글쓰기]는 살아있는 말[음성]의 (자족적인) 충만함 앞에서 스스로 사라져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살아있는 말은 그것의 아주 고분고분한[투명한] 표기 속에서 완벽하게 표상[재현]되며 그것을 말하는 주체와 그것의 의미, 내용, 가치를 전달받는 주체에게 공히 직접적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이것은 소쉬르가 제기한 '차이의 원리'를 조금만 더 밀고나가면 대번에 알 수 있다: "This principle compels us not only not to privilege one substance - here the phonic, so called temporal, substance - while excluding another - for example, the graphic, so called spatial, substance - but even to consider every process of signification as a formal play of differences. That is, of traces."(26쪽)

국역: "이러한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실질 - 예를 들어 이른바 공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자적 실질 -을 배제함으로써 다른 실질 - 여기서는 이른바 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성적 실질 -에 틀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모든 의미작용의 과정을 차이들의, 다시 말해서 흔적들의 형식적 유희로 간주하게 합니다."(49쪽)

나의 번역: "이 원리[차이의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실체(예컨대 문자의 형태적이고 공간적인 실체)를 배제하고 어느 하나의 실체(여기서는 음성적, 그러니까 시간적 실체)에만 (배타적인) 특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모든 의미작용을 차이들의 형식적인 유희[놀이]로 보도록 합니다. 말하자면, 흔적의 유희란 것이죠."

여기서 데리다가 재도입하는 문자[형식적인 유희의 근거]는 문자(언어)/음성(언어)의 이분법의 구성항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글쓰기의 개념을 산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t is a question, rather, of producing a new concept of writing." 다시 옮기면: "말하자면, 문자[글자들]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문제라고나 할까요."

이 새로운 것이 그람(gram)이고 차연(diff rance)이다(차연에 대해서는 그의 [차연]이란 글을 참조해야 한다. 사실 이어지는 부분은 그 글을 거의 요약한 듯하다. 거기서 그는 차연을 가리켜 어떠한 실체도 개념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그람과 차연의 전제, 혹은 가능근거: "Whether in the order of spoken or written discourse, no element can function as a sign without referring to another element which itself is not simply present."

국역: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어진 담론의 영역이건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다시 옮기지 않겠다. 이러한 현전과 부재의 부단한 몸바꿈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이 흔적의 망(interweaving; textile)이 바로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변형을 통해서만 생성된다(로티의 재서술). 데리다의 텍스트주의: "There are only, everywhere, differences, and traces of traces."; "그러므로 흔적의 차이와 흔적들만이 도처에 존재합니다." 나의 번역: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차이들[차연]과 흔적(들)의 흔적(들)뿐입니다."("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

이렇게 되면, 그람은 기호학[세미올로지]의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 되며 기호학은 문자학[그라마톨로지]에 접수된다(문자학은 언어학까지 커버한다). 이 문자학의 장점: "The advantage of this concept... is that in principle it neutralizes the phonologistic propensity of the "sign," and in fact counterbalances it by liberating the entire scientific field of the "graphic substance"(history and systems of writing beyond the bounds of the West) whose interest is not minimal, but which so far has been left in the shadows of neglect."(27쪽)

국역: "이러한 개념의 장점은 그것이 원칙적으로 '기호'의 음성주의적 성향을 중화시키며,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어둠 속에서 버림받아왔던 '문자적 실질'(서구를 넘어선 글쓰기들의 역사와 체계)을 모든 과학적 영역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을 실제적으로 균형잡는다는 점입니다."(50쪽)

조금 모호하군. 다시 옮겨보자: "이 개념[문자학]의 원론적인 장점은 '기호'에 대한 그동안의 음성주의적 편향을 바로잡아준다는 데 있으며, 그것의 실제적인 장점은 (서구를 넘어선, 서구 바깥의 역사와 문자체계를 포함하여) '(문자의) 형태적 실체'에 대한 모든 학문적[과학적] 탐구를 개방함으로써 또한 그에 대해[그동안의 편향에 대해] 균형을 맞춰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문자적 실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작지 않(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것이지요." 대충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 차연: "The gram as diff rance, then, is a structure and a movement no longer conceivable on the basis of the opposition presence/absence. Diff rance is the systematic play of differences, of the traces of differences, of the spacing by means of which elements are related to each other."

국역: "차이로서 문자는 그러므로 현전/부재의 대립에 의해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차이는 요소들이 서로를 참조하는 차이들, 혹은 차이들의 흔적의 그리고 공간화의 체계적 유희입니다."

나의 번역: "차연으로서의 그람[문자]은 그러므로 현전/부재[있음/없음]이라는 이항대립으로는 더 이상 헤아릴 수 없는[사유할 수 없는] 구조이며 운동입니다. 차연은 차이들의 체계적인 유희이고 차이의 흔적들의 유희이며, 개개의 요소들을 다른 요소들과 관계지어 주는 공간화[글자배열]의 유희인 것입니다."

이 공간화에 대한 부연: "This spacing is the simultaneously active and passive production of the intervals without which the "full" terms would not signify, would not function. It is also the becoming-space of the spoken chain - which has been called temporal or linear; a becoming-space which makes possible both writing and every correspondence between speech and writing, every passage from one to the other."

국역: "이러한 공간화는 그것이 없으면 '충만한' 항목들이 의미하거나 기능하지 않을 간격들의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생산입니다. 그것은 또한 언어연쇄 -시간적이고 선조적이라고 말했던 -의 공간화(그것만이 글쓰기와 말과 글쓰기 사이의 모든 상응과 서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화)이기도 합니다."

나의 번역: "이 공간화는 (문자들의) 간격(들)이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인데, 이 간격(들)이 없다면 이른바 '온전한' 단어[말]들이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게 되고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것은 또한 음성언어 연쇄(이것을 대개는 시간적이거나 선조적인 걸로 말해왔지만)의 공간화이기도 합니다. 이 공간화가 바로 문자(행위)뿐만 아니라 음성과 문자 사이의 모든 대응을 가능하게 하며, 이들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음성과 문자의 공통자질[혹은 조건]로서의 공간화가 이들간의 대응[주고받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차연에 대해서 조금 부연: "Differences are the effects of transformations, and from this vantage the theme of diff rance is incompatible with the static, synchronic, taxonomic, ahistoric motifs in the concept of structure."

국역: "차이들은 변형의 결과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차이의 주제는 구조라는 개념의 정적인·공시적인·계통적인·반역사적인 주제와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50-51쪽)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그러한 성격[모티브]에 의해서만 구조가 특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차연의 구조라는 것도 가능하다(데리다는 조금 완곡하게 "[차연이] 비구조적이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이것이 하는 일: "it produces systematic and regulated transformations which are able, at a certain point, to leave room for a structural science. The concept of diff rance even develops the most legitimate principled exigencies of "structuralism.""(28쪽)

국역: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구조적 과학을 낳게 하는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변형을 생산합니다. 차이의 개념은 심지어 '구조주의'의 가장 합법적인 원칙적 요구들을 개진하기까지 합니다."

나의 번역: "그것[차연]은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변형(들)을 생산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구조적 과학으로 정립될 수 있는 여지[가능성]를 남겨놓습니다. 차연이란 개념은 한술 더 떠서 '구조주의'의 가장 정당하면서도 원론적인 (당면)요구들을 제기합니다[더 밀고 나갑니다]."

데리다는 소쉬르가 '분류항들classifications'이라고 부른, 일반적인 모든 기호(학)적 약호[코드]를 차연(운동)의 결과로 본다. 그걸 조금 자세히 알아보자: "Nothing - no present and in-different being - thus precedes diff rance and spacing. There is no subject who is agent, author, and master of differance, who eventually and empirically would be overtaken by differance."

국역: "어떤 것도 -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어떠한 현전하는 존재자도 - 그러므로 차이와 공간화에 선행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산출하고 지배하는 동작주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차이는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경험적으로 주체에 덧붙여집니다."(52쪽)

나의 번역: "어떤 것도, 그러니까 차이와는 무관한 어떠한 존재자도 차연과 공간화에 선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연에는 주체가, 그러니까 작인이나 저자나 주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주체란 것은 결국에 가서는 보나마나 이 차연에 의해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겁니다[잡아먹히는 겁니다]."

이렇듯 우리의 차연이 모든 것을 잡아먹게 된다면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차연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주관성도 객관성과 마찬가지로 일개 차연의 결과[효과], 차연의 체계에 기입된[등재된] 결과일 뿐이다. 우리의 경제라고 예의가 아니다: "Deferred by virtue of the very principle of difference which holds that an element functions and signifies, takes on or conveys meaning, only by referring to another past or future element in an economy of traces. This economic aspect of diff rance, which brings into play a certain not conscious calculation in a field of forces, is inseparable from the more narrowly semiotic aspect of diff rance."(29쪽)

국역: "어떤 요소도 흔적들의 경제 속에서 지나간 혹은 다가올 다른 요소들을 참조함으로써만 기능하고 의미하며 의미를 취하거나 부여하게 되는 차이의 원리 때문에 지연되는 것입니다. 힘들의 영역 속에 계산을 -의식하지 않은- 작용하게 하는 차이의 이러한 경제적 양상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학적 양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저 번역을 해보자: "바로 이 차이의 원리(의 공덕)에 의해서 지연된다는 말은, 어떤 한 요소가 기능하거나 의미하는 것, 그러니까 의미를 취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오직 흔적의 경제[가두리] 내에서 과거나 미래의 다른 요소와의 관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차연의 이러한 경제적 측면은 힘(들)의 장 속에 명백하진 않더라도 모종의 계산을 도입하는 것이죠. 차연의 이러한 측면은 보다 좁은 기호적 측면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교환가치와 차연을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해체론과 맑시즘?).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모든 형이상학적 이분법(기표/기의, 감성적/초감성적, 문자/음성, 수동성/능동성 등)의 효력이 정지되고 모두가 차연의 발굽 아래 놓인다. 이제는 차연이 지배하는 탈형이상학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이제나저제나 언제나?

크리스테바의 세번째 질문은 기호학과 현상학에서 각기 말하는 '의미'에 차이가 있다고들 하는데 둘은 어느 만큼 공모되어 있는가, 또 기호학적 구상[프로젝트]은 어느 만큼 형이상학 내적인가, 이다. 먼저 의미에 대한 데리다 답변.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미의 외연은 일단 대단히 넓다는 것. 의식에 나타나는[드러나는] 모든 것을 현상학에서는 의미로 친다[다룬다]. 그래서 의미는 현상의 현상성으로 정의된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나타남의 나타남됨쯤으로 바꿔말할 수 있겠다. 지시적 의미(Sinn)와 언어적 의미(Bedeutung) 사이의 프레게식 구분에서 현상학적 의미와 기호학적 의미의 공모[결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1)먼저, 후설의 경우: "Husserl, in order to isolate meaning (Sinn or Bedeutung) from the intention of signification (Bedeutung-intention) that "animates" enunciation, needs to distinguish rigorously between the signifying (sensible) aspect, whose originality he recognizes, but which he excludes from his logico-grammatical problematic, and the aspect of signified meaning (which is intelligible, ideal, "spiritual")."(30쪽)

국역: "후설은 언술의 의미 또는 언술을 '고무하는' 의미작용의 의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그 독창성은 인정되지만 그 논리-문법적 방법론으로부터 그가 배제시킨 기표의 (감각적)측면과 기의의 의미의 (지적·관념적·'정신적')측면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나의 번역: "후설은 (지시적 의미건 언어적 의미건) 의미를 언술행위에 (불순하게) '바람을 넣어주는' 의미작용의 의도(지시적 의도)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 기표적인(감각적) 측면과 기의적인(초감감적, 이념적, '정신적') 측면을 엄격하게 구별하려 하지요. 그는 기표적인 측면의 고유성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논리적-문법적 문제틀[구도]로부터는 제외시킵니다." 즉 후설에게 문제된 것은 의미(기의)와 의도 사이의 긴장[관계]이다. 그에게서 기표는 문젯거리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Thus, whether or not it is "signified" or "expressed," whether or not it is "interwoven" with a process of signification, "meaning" is an intelligible or spiritual ideality which eventually can be united to the sensible aspect of a signifier that in itself it does not need."(31쪽)

국역: "이렇듯 '의미'는 그것이 '표현되거나' 또는 '의미되건' 그렇지 않건간에 의미작용의 과정에 '결부되건' 그렇지 않건간에 (경우에 따라서는 기표의 감각적 측면에 결합될 수도 있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적 혹은 정신적 관념성입니다."(54쪽)

나의 번역: "그래서 (후설을 따르자면) '의미'란 것은 (그것이) 지시된 것이건 표현된 것이건, 의미(화)작용에 연루되어 있건 말건 하여간에[죽이건 밥이건 간에 어쨌든] 초감성적인, 즉 정신적인 관념(성)[이념(태)]인 것이지요. 이 관념성은 (후설이 보기에) 때에 따라선 기표의 감각적 측면과 결합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 자체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기호학자와 마찬가지로 현상학자도 기의의 혹은 의미의 직접성[현전(성)]을 믿는 것.

(2)"This layer of pure meaning, or a pure signified, refers, explicitly in Husserl and at least implicitly in semiotic practice, to a layer of prelinguistic or presemiotic (preexpressive, Husserl calls it) meaning whose presence would be conceivable outside and before the work of deff rance, outside and before the process or system of signification."

국역: "이러한 순수한 의미나 기표의 층위는 헤겔에서는 명시적으로, 기호학적 실행에서는 적어도 함축적으로, 전-언어학적인 혹은 전-기호학적인(후설에 의하면 전-표현적인) 의미의 층위를 지시하는데 그것의 현전은 차이의 작업이나 의미작용의 체계나 과정 이전에는 또는 그것을 벗어나서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54-55쪽) '기표의 층위'라고 한 것은 '기의의 층위'의 오역이고 '헤겔'은 '후설'의 오역이다(교정은 본 것일까?). 나머지도 모두 오역이다.

나의 번역: "순수한 의미의 층, 순수한 기의의 층은 전언어적, 전기호적(후설은 전표현적이라고 부른다) 의미의 층을 가정하는 것이다[가리킨다](이러한 가정은 후설에게서는 아주 명백하게 그리고 기호학에서는 암묵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차연의 작업[운동] (시간적 공간적) 바깥에서, 의미작용[의미화]의 체계나 과정 바깥에서 의미의 현전을 사유할 수[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가정[생각]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틀림[오류]은 아주 끈덕진 것이어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없다. 기호학에서 의미/기호, 기의/기표의 관계가 외재성의 관계(기표는 기의의 외재성)가 되듯이 후설에게서 기호와 기표는 의미나 기의의 외재화( usserung)나 표현(Ausdruk)이 된다.

그런데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소쉬르에서처럼: "I have attempted to indicate elsewhere the consequences that link all of phenomenology to this privilege of expression, to the exclusion of "indication" from the sphere of pure language (of the "logicity" of language), and to the privilege necessarily accorded to the voice, etc."

국역: "나는 이러한 표현에 대한 특권이나 순수 언어(언어의 '논리성')의 영역을 벗어난 '지시'에 대한 배척, 목소리에 필연적으로 부여된 특권 등에 모든 현상학을 연결시키는 태도들이 지니는 결과들을 지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도 좋은 번역이 아니다.

다시 옮겨보자: "나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언어를 표현으로서 규정한 결과) 현상학 전체[전부]가 이 표현의 특권과 연결되며, 순수 언어의 영역(언어의 '논리적 영역')에서 '지칭[대상과의 연관]'을 배제하려는 것과 연결되고, 또 당연히 목소리[음성]에 부과되는 특권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이다. 소쉬르에서처럼 현상학에서도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말하는 걸까. 언어표현에서 지시대상을 배제한 것은 현상학이 잘한 일이지만(후설은 먼저 수학자/논리학자[수리철학자]였다), 목소리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이런 식. 더 읽어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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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크리스테바의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Semiology and Grammatology"에서 중요하다거나 난해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옮겨본다. 오래전 대학원 시절의 번역이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번 올렸던 글이지만, '로쟈의 책의 바다'에도 빠져 있어서 찾아읽기가 쉽지 않고(어쩌다 찾는 사람이 있지만!), 편집상태도 좋지 않아 다시 편집했다. Alan Bass의 영역본 과 박성창의 국역본 <입장들>(민음사)을 대본으로 한다. 영역본은 작년에 조다단 컬러(아니면 크리스토퍼 노리스)가 새롭게 서문을 쓴 출간 30주년 기념 증보판이 나왔고, 국역본은 현재 절판됐다. 우리말로도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초기 데리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쉽고 요긴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의 첫번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기호학(모델)의 한계는 무엇이며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런 한계를 빠져나갈 방도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기호학적 모델의 한계에 대해 데리다가 답하는 부분: "For if the sign, by its root and its implications, is in all its aspects metaphysical, if it is in systematic solidarity with stoic and medieval theology, the work and the displacement to which it has been submitted - and of which it also, curiously, is the instrument - have had delimiting effects."(17쪽)

이에 대한 국역: "왜냐하면 그 토대와 함축적 의미로 인해 기호라는 개념이 형이상학적이며 또한 스토아적이고 중세적인 신학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부과되었던 작업과 치환은 -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것은 그러한 작업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 한계가 지어진 효과들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40쪽)

먼저 '함축적 의미'로 번역된 "implication"은 에코식으로 말하자면 이차적으로 확장된 의미이다. 즉 기저의미, 기본의미에서 가지를 치고 뻗어나간 의미(그래서 "root"와 조응한다). 그래서: "만약 기호라는 개념이 그것의 기원적 의미와 파생적 의미 모든 측면에서[그것의 뿌리에서부터 또 여기저기 뻗어나간 가지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형이상학적이라면, 즉 스토아철학[신학]과 중세신학에 아주 체계적으로[조직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면, (이제까지) 그것[기호]에 부과되어 왔던 (탈형이상학에의) 작업과 전복[전복작업]은, 또 아주 흥미롭게도 그것[기호]은 이러한 작업의 도구이기도 한데, 제한적인 효과[결과]만을 낳았던 것이지요[낳았을 밖에요]."

여기서 "displacement"를 나는 '전복'('전도'나 '치환'으로 옮겨도 무방할 것이다)으로 옮겼다. 이 부분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에서의 두 항을 자리바꿈한다고 해서 탈형이상학이 될 수 있겠느냐는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전도된 플라톤주의'라고 니체를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도된 플라톤주의도 플라톤주의 아니냐는 것.

또 한편으론: "For this work and displacement have permitted the critique of how the concept of the sign belongs to metaphysics, which represents a simultaneous marking and loosening of the limits of the system in which this concept was born and began to serve, and thereby also represents, to a certain extent, an uprooting of the sign from its own soil."

국역: "즉 그 효과들은 기호라는 개념의 형이상학적 귀속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러한 개념이 태어나서 복무하기 시작했던 체계의 한계를 나타내고 그 틈을 열어놓게 해주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 고유한 토양으로부터 기호를 떼어놓게 합니다." 영역본은 조금 풀어서 이 부분을 옮긴 모양이다.

나의 번역: "왜냐하면 이 (기호의) 작업과 전복(의 효과[결과])은 기호가 어떻게 형이상학에 연루되어 있는가를 비판하게 해주는 바, 이것은 곧장 이 (기호라는) 개념을 낳아주고 보살펴준 체계의 한계를 표시하고 완화시킴으로써[한계를 눈에 띄게 하고 느슨하게 함으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호를 그것을 배태한 토양으로부터 분리해내기[잘라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호[라는 모델이]가 이중적(equivocal)이라는 것.

여기서 '완화'라고 옮긴 "loosening"을 "틈을 열어 놓게 (함)"으로 옮기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uprooting"과 조응되게 하려면 느슨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to a certain extent", 즉 "어느 정도까지"만 괜찮다는 것. 즉 기호와 형이상학의 결속을 분리해내는[잘라내는] 일이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This work must be conducted as far as possible, but at a certain point one inevitably encounters "the logocentric and ethnocentric limits" of such model. At this point, perhaps, the concept is to be abandoned."

국역: "이러한 작업을 가능한 한 멀리 수행해야 하지만 실제 어느 순간에 그러한 모델이 지니는 '로고스중심적이며 인종중심적인 한계'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개념을 포기해야 할 때는 바로 이 순간입니다." 대충 맞게 번역되어 있지만 굳이 옮기자면: "이 작업은 최대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는 그러한 모델의 '로고스중심적이고 인종중심적인 한계'를 불가피하게 만나게 됩니다. 그때엔, 아마도 이 (기호라는) 개념을 포기해야겠지요."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아주 정합적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But this point is very difficult to determine, and is never pure." 국역: "그렇지만 이 순간은 결정하기 매우 힘들뿐더러 결코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번역: "그러나 (기호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하는) 이 타이밍을 결정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고 또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All the heuristic and critical resources of the concept of the sign have to be exhausted, and exhausted equally in all domains and contexts. Now, it is inevitable that not only inequalities of development (which will always occur), but also the necessity of certain contexts, will render strategically indispensible the recourse to a model known elsewhere, and even at the most novel points of investigation, to function as an obstacle."

국역: "기호라는 개념의 비판적 자원들이 소진되고 모든 영역들과 문맥들에서도 똑같이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규칙적인 진전들과(이것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특정 문맥들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모델에의 의지가 전략적으로 필요불가결해짐은(연구가 가장 진척된 시점에 이르면 이러한 모델에 의지하는 것이 하나의 장애로 기능할 것이 주지의 사실이겠지만) 불가피합니다."

불규칙적인 진전들? "사과나무와 떡갈나무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하는 법칙은 없는 것이다."(신경숙) 이 부분도 크게 틀린 곳은 없지만 내친김에 마저 옮긴다: "(우리의 이 타이밍은) 기호라는 개념의 모든 발견적, 비판적 에너지가[기호라는 개념이 발견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 소진되었을 때, 그것도 모든 영역과 컨텍스트[상황] 속에서 똑같이[동시에] 소진되었을 때이어야 하니까요. (이게 가능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이 모든 영역과 컨텍스트에서의) 불균등한 발전[성숙]과 (원래 일이란 게 그렇지요) 다른 한편으론 어떤 컨텍스트적인 필요 때문에, (우리의) 작업[탐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면 그저 골칫거리에 불과할 이 (기호) 모델로 다시금 귀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예를 든다. 소쉬를 기호학의 이중적 역할(double role), 두 가지 배역에 대해서. 먼저, 착한 기호학. 그것은 먼저 기표/기의의 비분리성과 기호(학)적 작용의 차이적(differential), 형식적(formal)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소쉬르는 그가 거기서 차용했던 기호의 개념을 형이상학적 전통의 반대편으로 돌려놓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41쪽); "Saussure powerfully contributed to turning against the metaphysical tradition the concept of the sign that he borrowed from it."(18쪽)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호학의 변신, 혹은 나쁜 기호학의 징후가 바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소쉬르는 그가 기호라는 개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한 이러한 전통을 확고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내 손을 씻지 못한다는 것. 칼리토의 길? 그래서: "There is at least one moment at which Saussure must renounce drawing all the conclusions from the critical work he has undertaken, and that is the not fortuitous moment when he resigns himself to using the word "sign," lacking anything better."

국역: "적어도 소쉬르가 자신이 시도했던 비판적 작업으로부터 모든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은 존재하며 이는 그가 부득이 '기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결코 우연적인 것만은 아닌 순간입니다."

나의 번역: "소쉬르는 자신이 착수했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작업의 결론[결과]을 모두 망라하는 것을 적어도 어느 한 순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모멘트]은 불가피한[필연적인] 것인데, 그가 만부득[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해왔던 '기호'라는 개념을 단념해야[포기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지요." 데리다는 이어서 나쁜 기호학이 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늘어놓는다.

(1)먼저, 기의(signatum)와 개념을 등가로 처리한 것. 이렇게 되면 "(소쉬르는) 그 자체로, 그 본질에 있어 어떤 기표도 참조하지 않으며 기호들의 연쇄망을 벗어나는, 어떤 순간에 이르면 더 이상 기표로서 기능하지 않는, 내가 '초월적 기의'라고 부르기를 제안했던 것의 고전적 요구에 순응하게"(42쪽) 된다. 어쨌든 이 '초월적 기의'[중심]가 문제되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전환(switch) 운동, 즉 한 기의가 기의의 기표되는 무한운동[유희]을 방해하고 억제하기 때문이다. 의자앉기 게임(충분한 의자가 있다면 문제가 없다, 재미도 덜할 테지만. 하지만 자리가 하나씩 비어간다면? 재미있지만 가혹한 게임! 사랑(仁)이란 다른 사람을 의자에 앉혀주는 배려[어진 마음]라고.). 하지만 이 '초월적 기의'를 문제삼는 작업은 신중하게[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a) it must pass through the difficult deconstruction of the entire history of metaphysics which imposed, and never will cease to impose upon semiological science in its entirety this fundamental quest for a "transcendental signified" and a concept independent of language."(20쪽)

국역: "그러한 작업은 모든 기호학적 과학에 '초월적 기의'나 언어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근본적 요청을 부과했으며 앞으로도 끝없이 부과할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에 대한 어려운 해체를 거쳐야 하기 때문"(43쪽)이다. 끊어서 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것은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를 해체해야만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바로 이 형이상학이 기호(과)학[기호학을 바탕으로 한 모든 과학적 탐구]에 대해 '초월적 기의', 곧 언어(체계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원초적인] 요구[추구]를 강제[부과]해왔던 것이고,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강제할 것입니다."

또: "(b) nor is it a question of confusing at every level, and in all simplicity,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국역: "기표나 기의를 모든 층위에서, 매우 단순하게 뒤섞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번역: "(그렇다고 해서) 그저 단순하게 기표와 기의를 뒤죽박죽으로 혼용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즉 초월적 기의가 문제된다고 해서 기표/기의의 이분법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분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형이상학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작대는 특수하게 무장할 필요가 있겠는데, 그것이 바로 데리다의 그람(gram)이고 차연(differance)이다. 이 그람과 차연은 오직 흔적만을 남겨둔 채 포위망을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아직 빠져나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럴 것으로 기대될 뿐이다).

예를 들어볼까. 번역[혹은 변장]의 문제: "For example, no translation would be possible without it. In effect, the theme of a transcendental signified took shape within the horizon of an absolutely pure, transparent, and unequivocal translatability."

국역: "예를 들어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해석(traduction)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초월적 기의의 주제가 구성되었던 것도 실제로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단의적인 해석 가능성의 지평에서입니다."

나의 번역: "예컨대 그것[기표와 기의의 대립]이 없으면 어떠한 번역[해석]도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 초월적 기의라는 주제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단의적인 번역이 가능하다는 전제[지평] 하에서인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러한 번역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번역이란 말을 옮김[변형](transformation)이란 말로 대체해야 한다(사실 우리말의 이 '옮김[운반]'은 데리다의 구도에 아주 적합한 말이다. 또 이 말은 로티의 재서술과 같은 의미연관을 갖는다.).

그리하여: "We will never have, and in fact have never had, to do with some "transport" of pure signifieds from one language to another, or within one and the same language, that the signifying instrument would leave virgin and untouched."

국역: "우리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혹은 하나의 동일한 언어의 내부에서 기표의 수단, 혹은 '전달매체'를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기의'들의 어떠한 '이동'과는 상관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뜻은 통하지만 좀 억지스럽다. 조금 고쳐보자: "우리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거나 한 언어체계 내에서 어떤 말을 다른 말로 옮길 때, 결코 그 기호표현[기표]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거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순수하게 기호의미[기의]만을 '운반'해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쉬르가 기의와 개념을 등가로 처리한 것은 잘못이다!

(2)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소쉬르가 (형이상학적인 이유로) 음성(phone)에 부여한 특권. "그는 또한 사유와 목소리, 의미와 소리 사이의 '자연적 유대natural link'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고]" "심지어 '사유-소리thought-sound'에 관해" 말한다. 이렇게 되면: "The theme of the arbitrary, thus, is in turned away its most fruitful paths (formalization) toward a hierarchizing teleology."(21쪽)

국역: "자의성의 주제는 이렇게 해서 그 풍요성의 방향(공리화)으로부터 이탈되어서 위계질서적 목적론을 향하게 됩니다."(44쪽) 나의 번역: "(우리의 기대주인) 자의성이란 주제는 약속의 땅[민주화?]으로 가는 길[정도; 마땅히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여[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다시) 차별적인[위계적인] 신학[신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와 개념들은 헤겔에게서도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소쉬르가 음성에 부여한 특권은 그의 또 다른 주장과 모순된다. 그는 뭐라고 말했던가: ""it is not spoken language that is natural to man, but the faculty of constituting a language, that is, a system of distinct signs...," that is, the possibility of the code and of articulation, independent of any substance, for example, phonic substance."

국역: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말해진 언어가 아니라 랑그를, 다시 말해서 서로 구별되는 기호들의 체계, 즉 실질, 예를 들어 음성적 실질과는 독립적으로 약호와 분절의 가능성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나타납니다."

나의 번역: "(소쉬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본래적인[고유한] 것은 음성언어가 아니라 랑그, 즉 변별적인 기호들의 체계를 구성할 줄 아는 능력이다. (데리다의 부연) 즉, 어떤 실체, 가령 음성적 실체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약호와 분절의 체계를 세우는 능력인 것이지요." 여기서 나는 "possibility"를 "faculty"에 대응하는 말로 보아 능력이라고 옮긴다. 소쉬르, 혹은 한 입으로 두말하기.

(3) 문제는 소쉬르의 모순[오류]이 개인적인 모자람 탓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기호 개념(기표/기의의 이분법)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소쉬르가 음성적 실체에 특권을 부여하고 언어학을 기호학의 전범(pattern)으로 삼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우면서 필연적이다. 어떤 필연인가: "Phon , in effect, is signifying substance given to consciousness as that which is most intimately tied to the thought of signified concep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voice is consciousness itself."(22쪽)

국역: "음성은 실제로 기의의 개념에 대한 사유에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의식에 주어지는 의미의 실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소리는 의식 그 자체입니다."(45쪽) 맞게 번역되어 있지만 굳이: "음성, 이것은 사실 기의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오는, (직접적으로) 의식에 주어지는[막바로 연줄이 닿는] 기표의 실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목소리[음성]는 바로 의식 자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 듯한" 현상이 유발되는 것: "나 자신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자발성에 의존하는 듯하며 어떠한 도구나 부속물, 외부의 힘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기표를 나의 사유나 '개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간직하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이렇게 되면: "Not only do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seem to unite, but also, in this confusion, the signifier seems to erase itself or to become transparent, in order to allow the concept to present itself as what it is, referring to nothing other than its presence. The exteriority of the signifier seems reduced."

국역: "기표나 기의는 결합된 듯이 보일 뿐 아니라 이러한 혼동 속에서 개념이 그 자신의 현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으면서 그 스스로 제시되게 하기 위하여 기표는 지워지거나 투명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기표의 외재성은 환원된 듯이 보입니다." 나의 번역: "기표와 기의의 구별[차이]이 없어져 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혼동[구별이 없어짐] 속에서 기표는 지워지거나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투명해집니다. 개념이 마치 자기 자신의 현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는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이죠. (그렇게 되면) 기표의 외재성[기표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있음]이란 것은 거죽만 남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것은 환상이다: "Naturally this experience is a lure, but a lure whose necessity has organized an entire structure, or an entire epoch..."
국역: "당연히 이러한 경험은 환상이지만 이는 그 필요성에 근거해서 하나의 구조나 시대 전체가 조직되었던 환상입니다." 나의 번역: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경험은 미끼[유혹]에 걸려든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미끼에 걸려들 수밖에 없음[필연성]이 하나의 구조 전체, 시대 전체를 조직했던 것입니다[주물렀던 것입니다]."

이어서 데리다는 이 미끼에 걸려든 거물들을 나열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헤겔 등을 거쳐 후설까지. 그런데 우리의 기호학은 바로 이들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4) 기호의 외재성을 부정[환원]하게 되면 남는 것은 심리적인 것뿐이다. 이에 따른 소쉬르의 단언: "언어학적 기호는 그러므로 양면을 지닌 심리적 실체이다."; "linguistic sign is therefore a two-sided psychic entity." 그렇다면 일반 기호학을 어떻게 심리학에 복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소쉬르는 (장래의) 기호학이 사회 속에서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예언[기대]했다. 이런 소쉬르가 (그의 비판자들에게까지도) 기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이 심리주의[기호현상을 심리현상으로 환원시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걸 그냥 제거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이제 심리주의 하지 말자고 좋게 합의를 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또 단순하지 않다: "Psychologism is not the proper usage of a good concept, but is inscribed and prescribed within the concept of the sign itself, in the equivocal manner of which I spoke at the beginning. This equivocality, which weighs upon the model of the sign, marks the "semiological" project itself and organic totality of its concepts, in particular that of communication, which in effect implies a transmission charged with making pass, from one subject to another, the identity of a signified object, of a meaning or of a concept rightfully separable from the process of passage and from the signifying operation."(23쪽)

국역: "심리주의는 좋은 개념의 나쁜 사용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서두에 말했던 이중적인 방법으로 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기입되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기호의 모델을 짓누르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은 그 모든 개념들, 특히 이행과정과 의미의 작동과 이론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의미·개념·기의라는 대상의 동일성을 하나의 주체에서 다른 주체로 이동하게 하는 전달을 함축하고 있는 의사소통의 개념의 유기적 총체성과 더불어 '기호학적' 기도를 나타냅니다."(46쪽)

얼른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알아먹을 수 있게 옮겨보자: "심리주의는 좋은[멀쩡한] 개념을 엉뚱한 데다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내가 서두에 말했던 것과 같이 이중적인 방법으로 기입되고 이미 지정되어 있습니다[기호라는 개념 자체에 겹쳐져 있습니다]. 기호 모델을 틀어쥐고 있는 이 (모호한) 이중성은 '기호학적' 구상[프로젝트] 자체와 (그런 기호학적 구상에 소용되는) 개념들의 유기적 총체성, 특히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의 유기적 총체성을 표시합니다[나타내줍니다]. 이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은 사실, 한 주체로부터 다른 주체에게로 어떤 기의(대상), 그러니까 의미라거나 개념을 전달경로나 (기호적인) 의미작용으로부터 안전하게 분리시켜서 온전하게 전달하는 이송행위[이송과정]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기호학의 전제와 구상 자체에, 커뮤니케이션 메카니즘 자체에 심리주의가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다(커뮤니케이션의 아주 단순한 발상[전제]: "A는 C에게 B를 전달한다. A communicates B to C."). 바탕 자체가 그런 것이지 무슨 쓰임이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기호학과 심리주의는 샴쌍동이(이것도 이중성이다!)처럼 서로 붙어 있다. 그러니 피를 안 보고 이걸 분리해낼 수는 없다.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외과용 메스가 필요하다. 게다가 둘 중의 하나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 따라서, 다시 한번 데리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수술)작업은 신중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기호와 연관된 개념으로 크리스테바는 질문에서 커뮤니케이션과 구조에 대해 언급을 했고, 이제 데리다는 구조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인다. 구조라는 개념의 경우는 훨씬 더 애매모호하다고. 모든 것이 그것[구조]의 작용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기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로고스중심적이며 인종중심적인 확신들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뒤흔듭니다."(47쪽)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폐기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방법 또한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데리가 제시하는 방법[대안?]: "Doubtless it is more necessary, from within semiology, to transform concepts, to displace them, to turn them against their presuppositions, to reinscribe them in other chains, and little by little to modify the terrain of our work and thereby produce new configurations."(24쪽)

국역: "그러므로 기호학의 내부에서 이 개념들을 변형시키고 이동시키며 그것들의 전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놓고 다른 연쇄망 속에 재기입하며, 작업의 지평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새로운 지형을 생산해내야 합니다."

번역이 잘돼 있지만 내 식대로 옮겨본다: "(그러므로) 기호학 안에서 개념들을 변형시키고 도치시키며 자신들의 전제에 대항하도록 부추기고 또 다른 관계망[연결고리]에 재편입[재기입]시키면서 아주 조금씩 우리 작업[공작]의 지형적 구도[작전지역]를 변화시켜감으로써 새로운 판도를 이룩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게릴라전이다. 데리다는 전면전[혁명?]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기에 승산이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I do not believe in decisive ruptures, in an unequivocal "epidemiological break," as it is called today. Breaks are always, fatally, reinscribed in an old cloth that must continually, interminably be undone. This interminability is not an accident or contingency; it is essential, systematic, and theoretical. And this in no way minimizes the necessity and relative importance of certain breaks, of the appearance and definition of new structures..."

국역: "나는 오늘날 흔히 거론되는 결정적 단절, '인식론적 단절'의 단일성을 믿지 않습니다. 단절들은 이전의 망 속에 항상 필연적으로 재기입되기 마련이며 그 순환 속에서 이 망은 끝없이 해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끝없음은 우연한 사건이나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체계적이며 이론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단절, 새로운 구조들의 출현 혹은 정의의 필요성과 상대적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번역: "나는 어떤 결정적인 단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어떤 명확한[전면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믿지 않습니다. 단절들은 항상, 그리고 운명적으로 이전의 낡은 의상을 걸치게 마련이며 이걸 벗어던지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결코 끝장나지는 않습니다. 이 끝장나지 않음[비종결성]은 결코 우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고 체계적으로 그러한 것이며 이론적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어떤 단절들, 혹은 새로운 구조들을 나타나게 하거나 정의해야 하는 필요성과 상대적인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데리다가 내뱉은 한 마디이다. 대략 그의 어프로치[공격] 방법이 직선적이라기보다는 우회적이며, 그것도 지그재그로 우회적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 그는 목표설정은 단번에 하지만, 그리고 그걸 명확하게 지정하지만, 이후의 공략태도에 있어서는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그러면서 집요하다. 그러니, 힘[펀치]만 가지고는 그를 결코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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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시킨과 먼 친척뻘 되는 소녀 바르바라의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는 대학생 가정교사 포크로프스키 부자(父子)의 얘기가 나온다. 바르바라의 회상 속에서 어릴 적 연정의 대상이기도 했던 포크로프스키에게는 가난하고 늙고 병든, 게다가 알콜중독인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들은 이 아버지의 자랑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생일 선물로 바르바라의 도움을 받아 헌책방에서 러시아 시인 푸슈킨 전집을 사지만, 미처 선물을 전해주기도 전에 병약했던 아들은 홀연히 세상을 뜨고 만다.

아들의 장례식날, 아들의 관은 드디어 뚜껑이 덮이고 못이 꽝꽝 박힌 채 짐마차에 실린다. 그리고 묘지를 향하여 마차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고, 말은 빠른 걸음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가련한 포크로프스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운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리면서 가끔씩 끊어지기도 한다.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춰 서지도 않는다. 궂은 날씨에 내리는 비가 그의 벗겨진 맨머리를 적시고 쌀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여전히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한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푸슈킨 전집) 비죽이 기어나온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으면서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본다. 그 사이에도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진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준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간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간다. 그렇게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만년의 걸작들로 잘 알려진 문호이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소설은 이렇듯 ‘감상적인’ 에피소드들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의 데뷔작이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대목들로 대표되는 그들의 ‘값싼’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로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적인 상실이며, 결코 다 애도될 수 없는 어떤 잉여의 체험이다. 그래서 결국, 아들의 관을 실은 마차를 끝끝내 따라갈 수 없었던 포크로프스키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저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한 대목에서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종교를 만나는 그 자리에서 나는 시를 만난다.

 

 

 

 

 
한때 시인 이성복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쩌자고’란 부사어를 통해서 집약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가령, 세상엔 어쩌자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것일까? (시인 백석을 따라서)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있는 것일까? 그토록 사랑스러우며, 그토록 연약하고, 그토록 한심한! 왜 세상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이 있는 것일까? 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전 새로 나온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시인의 ‘어쩌자고’는 ‘왜, 어떻게’로 변주된다. 왜, 어떻게 그이는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남국의 붉은 죽도화’는 왜, 어떻게 여기에 와 피어 있는 것일까?

왜, 어떻게, 너는 이곳에 와서 꽃피었니?
초록 잎새 속에 뿌려진 핏방울.
내 살 속의 살, 살보다 연한 뼈

나는 그 연한 뼈마디보다 더한 슬픔도, 덜한 슬픔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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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북매거진 <텍스트>의 청탁으로 쓴 글로 인문 번역서의 오역 실태를 점검해본 것입니다. 절반 정도는 이미 쓴 글들에서 따온 것인데, 분량(원고지 50매) 제한 때문에(청탁받은 분량은 40매) <천개의 고원> 등 몇몇 책이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회는 또 있겠지요...

  

  

  



얼마전 <한겨레>에 “다시 불붙은 화두 ‘번역은 반역이다’”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내용은 불문학 전문번역가 이세욱씨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문학세계사)에 대해서 동료 번역가인 백선희씨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인데, 쟁점은 과연 번역가는 원작에 얼마만큼 개입할 수 있는가로 읽혔다. 예컨대, “나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 보다가 혀를 데었다.”라고 한 이씨의 번역에 대해서 백씨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보다가”는 원작에 없는 내용이며 역자가 불필요하게 첨언함으로써 단문 중심의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두 사람은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는 셈인데,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의 오역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소설 번역 얘기를 먼저 꺼낸 건, 그나마 그 정도의 쟁점이라면 ‘사치’에 가깝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짐작에 이세욱씨가 역자로서 지나친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닌가 싶은데, 사실 그러한 친절이 아쉬운 쪽은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 번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닌, 그리고 절대로 과장이 아닌 배신, 배반형 번역서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사실 그러한 (과잉)친절은 오히려 과분하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의 번역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일전의 (놀랄 것도 없는) 조사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일반적인 번역환경과 수준은 아주 열악하며 한참 뒤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확하기 이전에 최소한 ‘말이 되는’ ‘논리가 닿는’ 정보만 전달해도 나쁘지 않은 번역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문서 번역에서 제대로 된 번역을 가물에 콩나듯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소극이다(여기에 비극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웃기는’ 번역들이 너무 많다.

 


 

  

 

인문서 번역의 경우 우리말이 어색하거나/이상하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오역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의 경우라면, 도대체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말았는지 하는 내용이 오역인가 아닌가는 원작을 대조해 보아야만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소설 등 문학작품의 오역은 웬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고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올 때인데, 가령 시중에 나온 번역본 중에 가장 많이 팔린 걸로 돼 있는 <걸리버 여행기>(문학수첩)의 첫쪽에는 걸리버가 긴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2년 7개월 동안 ‘물리학’을 공부한 걸로 나온다. 물리학이라니? 뭔가 이상해서 원작을 대조해봤는데, 물리학이라고 옮긴 단어는 'Physick', 즉 ‘의학’이었다(다른 번역본에서는 ‘의학’이라고 제대로 옮겼다). 역자는 그걸 ‘물리학Physics'으로 착각한 것인데, 아쉬운 것은 그렇게 옮기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걸리버가 항해중에 의사 노릇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오역을 눈치채지 못한 역자의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번역이 아무리 경쾌하고 유려해 보여도 역자에 대한 신뢰는 팍팍 떨어진다.

또 다른 사례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의 맨마지막쪽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거의 행복한’ 하루를 뒤따라온 독자의 머리를 한대 치는 결말인데, 안타깝지만 여기에도 오역이 있다. 10년이면 날수로 삼천육백십삼일이 아니라 삼천육백오십삼일이어야지 맞다. 어쩌다가 십단위의 ‘오’가 빠졌는지 모르겠지만(교정중의 실수일 수 있다), 덕분에 독자는 감동을 받기 이전에 날짜수를 계산하도록 요구받는다. 문제는 사례로 든 두 작품의 경우 계속 판을 찍으면서도 오역이 교정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검토해 볼 인문 번역서들은 이 정도의 오역들을 오역으로서 정말 무색하게 만든다. 예컨대, 현대 사상의 원조로 꼽히는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부터가 전혀 미덥지 못한 번역이다. 다음을 보라. "언어적 물체는 쓰여진 낱말과 발음된 낱말의 결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후자 하나만으로써도 이 물체를 구성한다."(35-6쪽) 언젠가 이차문헌의 내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이 대목을 읽다가 경악을 한 기억이 있다. '언어학의 대상'을 정말 황당하게도 '언어적 물체'라고 번역해놓고 있는 것이다!(이게 물리학책인가?) 절판된 옛날 번역본을 인용하자면, 이 대목은 적어도 “언어학의 대상은 쓰여진 낱말과 말해진 낱말의 결합인 것으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말해진 낱말만이 그것의 대상이다."(형설출판사, 41쪽) 쯤으로 옮겨져야 한다. 사실 확인해보지 않은 다른 대목들의 번역은 훌륭할 수도 있지만, 이 한 대목에서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게 된다.

 

 

 

 

이런 사정은 소쉬르 언어학에 근거를 둔 <구조주의의 역사2>(동문선)에 가서도 반복된다. ""하나의 모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전체 체계를 끌고간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 보어"임을 알게 해주었다."(14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구조주의적인 '보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역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번역했을까? 물론 아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의 영역은 이렇다(불어본과 대조해보면 더 확실하겠지만). "completely structualist insofar as when each vowel moves, the whole system moves with it."(물론 앞에 좀 길게 나오는 부분이 있지만, 생략했다.) 역자가 보어라고 번역한 건 무엇일까? 바로 영어로는 ‘completely’이다. 짐작에 불어로 '꽁쁠리뜨망completement'이란 단어를 '꽁쁠리망complement'(보어)으로 착각한 듯싶다. 비슷한 단어이기 때문에 혼동할 수 있다고 해도 ‘완전히 구조주의적’이란 뜻을 ‘구조주의적인 보어’라고 옮기고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역자의 배포가 놀라울 따름이다(말이 안되면 다시 봐야 할 것 아닌가?).

소쉬르 이후 현대철학의 수난이라고 할 만한 번역에는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도 빼놓을 수 없다. 92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에 제법 많이 팔려나가고 있는데다가 대학 교재로도 자주 쓰이는 책이지만(강사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좀 자세하게 뜯어본) ‘구조주의’ 장의 번역은 오역의 연속이다.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역자가 기표/기의 혹은 능기/소기라는 기본적인 개념쌍부터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 “새로운 언어학을 형성시키는 과정에서, 소쉬르는... 소기(le signifie; signifier)와 능기(le significant; signified)... 등의 일련의 차이를 제시한다.”(274쪽)를 보자. 우선 역자는 리처드 커니의 원저에도 없는 불어를 병기하는 (과잉)친절을 베풀었는데(시니피앙le signifiant은 철자도 틀렸다), 그것이 도리어 사단이 됐다. 불어의 시니피에(le signifié)와 발음상/형태상 유사한 영어의 signifier를 같은 뜻으로 착각하고 ‘소기’라 옮긴 것이다. 이 문장은 일단 “소쉬르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등의 일련의 구별(distinction)을 제시한다.”로 옮겨져야 한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역자는 이후에 능기/소기(기표/기의)를 뒤죽박죽으로 옮겼다(그나마 오역에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전혀 엉뚱하게 번역한 한 대목만 더 보도록 하자. “랑그에 대한 연구는 구조적 기호체계를 위한 지향적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 언어학의 확실한 과학적 정초를 다지게 하는 것이다.”(276쪽) 원문은 이렇다. “In short, by bracketing the intentional message for the sake of the structural code, Saussure resolves to set linguistics on a firmly scientific footing.” 문제가 되는 건 “전언내용을 일괄적으로 다룸으로써”란 말인데, 그것은 “전언의 내용을 괄호침으로써”로 고쳐져야 한다. 요점만 말하면, 소쉬르는 코드(code)를 위해서 메시지(message)에는 괄호를 쳤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쉬르 계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일괄적으로 다룬다는 게 그런 뜻인가? 그나마 소쉬르가 이 정도이다. 하물며 라캉에 대해선 무얼 더 기대하랴. 신기한 것은 이런 책이 아무런 교정 없이도 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구조주의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부르디외도 불운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가장 얇은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를 보자. 얇지만, 오역은 충만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하지만,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 우리말 번역만 가지고는 부르디외가 과학사회학 강의를 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핵심이 빗나갔으니 나머지 대목들이 끼워맞추기식 번역일 거라는 건 안봐도 뻔한 얘기이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사례.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 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쯤으로 옮겨야 한다. 그나마 양심적인 건 역자의 말이다.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사실 더 양심적이었다면,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

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도 오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기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렇듯 넘쳐나는 오역의 사례들에서 유턴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지점은 최근에 마구 뜨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의 자리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상태가 좋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을 먼저 보자.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은, 그 통일성을 깨트리며 그 허위성을 드러내는 어떤 특별한 경우를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상(理想) 또는 ‘허구’이다.”(49쪽)

축약하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상 또는 허구이다”라는 것인데,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오역은 사실 역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교정자의 것이다(역자가 이런 정신나간 짓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상(ideal)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사실 영어의 ‘so far as’(-인 한에서)이다. 짐작에, “모든 이데올로기는 ...포함하고 있는 이상, ‘허구’이다”라는 번역문에 교정자의 (과잉)친절욕이 개칠을 한 것이다. 바로 다음 문단에 ‘시장의 이상(理想)’(이때는 ideal을 번역한 ‘이상’이다)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심증을 굳게 한다. 이 정도의 오역은 사실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역판까지 나온 <향락의 전이>(인간사랑)는 사정이 다르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서 한 일간지 서평자는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들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비밀인 향유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은 바 있다(서평자들이 한심하게도 자주 잊어먹는 일은 서평의 대상이 원저가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분명 모험이긴 하지만(그것도 굉장히 고된), 그 모험은 오역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기이다. 물론 이 허우적거리기에서 일반 독자가 뭔가 '교양'을 얻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말 그대로 당신들의 향락인 셈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지젝의 신간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서를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이런 식의 오역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하자(내게 주어진 분량을 이미 훨씬 넘어섰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지적할/수정할 것. 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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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3-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인문서 보기가 겁나요...

로쟈 2004-03-12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은 더 겁납니다!..

lastmarx 2004-04-02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군요. 번역하시는 분들이 이런 지적을 받고 고쳐나가면 좋겠습니다. 서평쓰기도 그러하지만 결국 번역도 전체 내용을 파악해야지만 오역을 피할 수 있겠군요.

로쟈 2004-04-0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for your comment, and I'm sorry for my English. I can't use hangul until now, here in Mosc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