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새물결)에서 가장 어렵다는 3장(도덕의 지질학)을 읽다가 옐름슬레우(Hjelmslev)로 빠지게 됐다. 사실 내가 관심있는 건 들뢰즈/가타리의 기호학 비판과 언어철학인데(그래서, 4-5장만 읽으려고 하다가, 3장을 먼저 읽어야겠기에 작전상 후퇴했다), 그들의 주장에 결정적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옐름슬레우의 언어학, 즉 언리학(Glossemantics)이다(그레마스의 기호학 또한 옐름슬레우라는 언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장, 수도없이 쏟아지는 ‘표현과 내용’, ‘형식과 실체’란 말의 감을 잡지 않고서는 <천 개의 고원>을 읽어나갈 수가 없다.

이진경의 <노마디즘1>(휴머니스트)에서 비교적 친절한 설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해서 관련서적을 뒤적이게 된다. 이때 요긴한 참조가 되어주는 책이 존 레흐트의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이다. 약간의 오타/오역이 흠이긴 하지만, 그만하면 80%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리고 서정철의 <기호에서 텍스트로>(민음사). 5명의 언어학자/기호학자를 다루고 있는 책의 한 장이 옐름슬레우에게 할당돼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그래도 국내 필자가 쓴, 옐름슬레우에 대한 가장 자세한 소개이다.

옐름슬레우의 주요어 중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건, 형식form과 짝을 이루는 substance이다. 철학에선 주로 ‘실체’라고 옮기고 언어학에서는 ‘실질’이라고 옮기기 때문에(서정철도 ‘실질’로 옮기고 있다) 좀 애를 먹이는데, 같은 언어학자인 최승언의 <일반언어학강의>(민음사)나 김성도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번역에서도 ‘실체’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그냥 일률적으로 ‘실체’로 옮겨도 무방하겠다.

 

 

 



문제는 번역된 옐름슬레우의 주저 <랑가쥬 이론 서설>(동문선)의 번역이 수준이하라는 것(동문선은 오역 전문출판사로서 수위를 다툴 듯하다). 이 책은 이진경도 참조하고 있지만, 용케 오역인 부분들만 피해가고 있다. 원저가 덴마크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불역본도 어차피 중역이어서, 영역본과 비교해 보는 것이 적반하장격은 아니다. 가장 짜증나는 건 'substance'를 전부 '본질'로 옮겨놓은 것. 비록 철학에서 ‘실체’란 말이 ‘본질’과 비슷한 뜻을 가질 때도 있지만, 불어학 전공자들인 두 역자의 언어학적 상식이 의심스런 대목이다. 레흐트에 의하면, 옐름슬레우의 ‘실체’는 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비가시적인 '본질'과는 차이가 나며, 따라서 그렇게 옮겨서는 안된다.

더불어 마음에 안드는 건 ‘형식’을 또 전부 ‘형태’로 번역하고 있는 것. 화용론의 주장대로,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웬만하면 관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가령, <천개의 고원>의 역자는 언어학/기호학 용어중 ‘화용론’을 ‘화행론’으로, ‘의미작용’을 ‘기표작용’으로 생경하게 옮겨놓는데, 그럴 듯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번역임을 면치 못한다. 마치 ‘등신’이란 말을 좋은 취지로 썼다는 딴나라당 국회위원의 경우처럼.

<랑가쥬 이론 서설>이란 제목도 그렇다. 불어에서의 랑그와 랑가주를 구별해주기 위해서 쓴 거 같지만, 랑그와 달리 랑가쥬는 언어학에서도 그다지 상용되는 말은 아니다. 해서, 랑그로서의 언어와 랑가주로서의 언어가 혼동될 경우에만 괄호안에 넣어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령, 크리스테바의 <언어, 그 미지의 것>(민음사)에서의 ‘언어’는 ‘랑가쥬’를 가리키지만, <랑가쥬, 그 미지의 것>이란 제목을 일반 독자가 언어학 책으로 알아볼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다.

번역본만으로는 의미파악이 거의 되지 않거나 아주 힘든, 의미의 변비통만 안겨주는 책인데, 한 대목만 보자;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본질은 전적으로 형태에 좌우되고 우리는 어떤 의미로도 -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 - 독립적인 존재를 형태에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68쪽) 이에 대한 영역은 “If we maintain Saussure's terminology-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 - it becomes clear that the substance depends on the form to such a degree that it lives exclusively by its favor and can in no sense be said to have independent existence."(50쪽)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문에서 ‘본질’과 ‘형태’는 앞서 말했듯이 오역이므로 ‘실체’와 ‘형식’으로 바꿔서 이해해보자. 일단 번역문은 (1)실체는 형식에 좌우된다, (2)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를 형식에 부여할 수 없다, 라는 두 가진 진술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왜 ‘실체’를 얘기하다가 갑자기 ‘형식’으로 초점이 넘어갔느냐는 것이다. 뒷부분의 불어 원문은 이렇다: “il nous faut alors rendre compt -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 - que la substance depond exclusivement de la forme et qu'on ne peut en aucun sens lui preter d'existence independante."(불역본, 68쪽)

나로선 불어사전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이기에 유창하게 번역하진 못하지만, 역자들이 마지막에 있는 대명사 lui를 substance가 아닌 forme를 받는 걸로 해석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번역에서 대명사나 관계사의 선행사를 잘못 짚게 되면, 치명적인 오역을 낳을 수밖에 없다. 통사적으로 모호할 경우엔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역자들은 만만한 불어실력에만 의존한 듯하다.

해서 다시 옮기면,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실체는 전적으로 형식에 의존한다. 때문에 (그의 전제/가정들에 따라서) 실체가 독자적인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괄호로 묶은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나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은 앞의 전제/가정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실체와 형식에 관한 내용이 앞에 주어져 있는데, 그에 따라서 이러이러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국역본이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라고 옮긴 것 역시 오역이다.

사소한 대명사 착오가 사소하지 않은 오역을 낳는다. 엘름슬레우와 관련하여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동문선)이다. 존 레흐트를 참조한 것이지만, 국역본 117-121쪽 정도에서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에 대한 데리다의 평가를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없다. 역자는 언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언어학자의 번역이어서 사정이 좀 나은 걸까?), 여러 곳에서 치명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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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sboy 2007-05-16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만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소쉬르의 용어를 따른다면(그리고 정확히 말해 그의 전제들에 입각해본다면), 실체는 반드시 형식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고, 결코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실존을 갖는다고 얘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히 실체는 형식에 의존해 있다."

로쟈 2007-05-1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페이퍼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번역해주신 대로입니다. 숙제가 여기도 남아있었네요.^^;
 

어제 한 서점에 갔다가 원래 사려고 했던 손디의 <문학해석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들뢰즈 입문서 한권을 손에 들고 왔다.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그것이다. 콜브룩의 원저는 "Routledge critical thinkers"의 한권으로 나온 것으로, 가장 얇고, 가장 쉽고, 가장 편안한 입문서이다.

 

 

 



책은 미국의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두번이나 '디킨스'로 오기하는 등 약간의 교정 부실을 드러내지만, 번역의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역자는 폴 페이튼의 <들뢰즈와 정치이론>도 곧 역간할 모양인데,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지젝에 비해서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번역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데(사실은 짜증나는 점이다), 그건 역자가 'power'(불어의 puissance)를 계속 '역능'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권능'이란 단어보다도 더 역겨운 이 '역능'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은 일어이다. 순전히 스피노자에서 (영어로) power와 force를 구별하기 위해 얻어다 쓴 이 말이 잠시의 궁여지책은 될수 있을지언정 관용어로 굳어질 만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사실은 짜증스럽다). 스피노자에 관한, 번역된 이차문헌들을 내가 잘 읽지 않는 이유는 과장없이 순전히 이 '역능'이 말이 꼴사나와서이다.

이 신간의 경우에도 '역능'이란 단어를 그냥 '힘'으로 읽어도 독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스피노자 전문가는 '역량'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지만). 역자(들)의 무사안일한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역능'으로 옮기는 것이 '파워'로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번역에 대해서 타박을 했지만, 한가지 배운 것도 있다. 그건 들뢰즈에게서 impersonal을 '비인칭적'이라고 옮긴 것. 나는 지난번에 흔히 '비인격적'이라고 옮겨지는 이 용어를 '비인칭적'이란 말과 견주어 보다가 (자신이 없어서)'익명적'이라고 옮기고 말았는데, '비인칭적'이란 말이 더 적합하다는 걸 신간을 읽으며 깨달았다(물론 역자가 그렇게 옮기고 있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jouissance나 power의 경우도 그렇지만, 해당 용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여럿 있을 경우이다. impersonal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것은 세분야에 걸쳐 있다. '비인격적'(윤리학), '익명적'(사회학), '비인칭적'(언어학). 그런데, inhuman을 떠올리게 하는 '비인격적'이란 말은 여기서 가장 먼저 제외될 만하다(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의 역자도 '비인격적'이라고 옮기는데, '사례'로 옮겨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case를 전부 '경우'라고 옮길 걸로 봐서 역자의 우리말 감각엔 문제가 좀 있다). '익명적'과 '비인칭적' 중에서 내가 '비인칭적'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사유'와 종종 결합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즉 (인칭적 사유에 대하여) '비인칭적 사유'. 실제로, 들뢰즈는 언어학과 수학, 자연과학의 용어들을 즐겨 참조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impersonal의 역어로는 '비인칭적'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책은 술술 읽힌다. 들뢰즈의 현란한 용어들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집어들 만하다. 하루만 투자한다면, 어디에 가서라도 들뢰즈에 대해서 한두 마디 할 만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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