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8월말에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려놓았던 '번역의 속도에 대하여'에서 후반부를 옮겨놓는다. <선악의 저편>의 한 대목 읽기였다. 발단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란 니체의 말이었고(<선악의 저편>, 단장 28). 이 번역은 책세상판 니체전집 14권,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2004, 초판 3쇄)의 55쪽에 나온다. 그 단장  28을 읽어보기로 한다. 니체는 이 단장에서 번역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바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번역은 원전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경쾌한) 속도까지도 옮겨놓아야 하며,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지나가는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의 니체를 사랑한다. 내가 아는 니체가 거기에 있다("안녕, 프리드리히!").

 

 

 



-독일인은 자신의 언어에서 빠른 템포(프레스토)를 거의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듯이, 자유로운, 자유정신적 사상의 가장 유쾌하고 대담한 많은 뉘앙스도 낼 수 없다. 독일인에게는 육체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부포(Buffo)와 사티로스가 낯선 것처럼, 그들에게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와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번역을 잘해내기 힘든 것이다. 독일인에게는 장중한 것, 용해하기 힘든 것, 엄숙하고 둔중한 모든 것, 느리고 지루한 종류의 온갖 문체가 엄청나게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달했다. 괴테의 산문마저도 딱딱함과 우아함이 혼합되어 있는데,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는 그의 산문이 속하는 ‘옛날 좋은 시절’의 반영이며, ‘독일적인 취미’가 아직도 존재했던 시대에 독일적 취미의 표현이며, 양식과 기교 면에서 볼 때 로코코 취미였다.

(*)아리스토파네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각각 그리스와 로마의 (희극)작가이다. 니체는 독일어의 느리고 지루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데, 나의 짐작에는 오직 니체에 이르러 독일어가 자신의 빠른 템포(=프레스토)에 다다른 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니체는 유쾌하고 경쾌하다.

 

 

 



-레싱(Lessing)은 많은 것을 이해했고, 많은 것을 잘 아는 배우적 천성 때문에 예외가 되었다. 그가 베일(Bayle)의 번역자였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으며, 기꺼이 디드로(Diderot)와 볼테르 곁으로, 오히려 로마의 희곡작가들 틈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문체의) 속도에서도 레싱은 자유정신을 사랑했고, 독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독일어는 어떻게 레싱의 산문에서조차도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속도를 모방할 수 있었던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에서 플로렌스의 건조하고 맑은 공기를 포함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제어할 수 없는 쾌속조(allegrissimo)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어떤 대립을 감행하고자 하는 심술궂은 예술가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 사상은 지루하고 무겁고 딱딱하고 위험하며, 말처럼 질주하는 속도와 최고의 오만한 기분 속에 있는 것이다.

 

 

 

 

(*)니체는 레싱 정도를 예외로 쳐주는데(지난주에 러시아어 레싱 선집을 샀다. 절판된 그의 책<현자 나탄>이 다시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때문에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베일을 번역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베일도 상당히 경쾌한 문체를 구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레싱조차도 마키아벨리의 속도(=알레그리시모)를 따라가는 건 역부족이라는 얘기. 여기서, 마지막 두 문장은 좀 미흡해 보인다. ‘어떤 대립’보다는 ‘어떤 대조’가 맞는데, 그 대조의 내용이 번역문에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과 무엇의 대조인가? “지루하고 무겁고 딱딱하고 위험한 사상”과 그 문체가 갖는 “말처럼 질주하는 듯한, 너무나도 쾌활한 기분의 속도” 사이의 대조이다. 그러니까,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지루하고 무겁지만, 그 문체는 경쾌하고 아주 활달하다는 것.

(*)한가지, 편집/교정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하자면, 이런 문단 같은 경우 인명에 대한 외국어 표기들이 일관성 있게 병기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미주에서 처리하고 있는 인명들은 굳이 본문에서도 외국어 표기를 병기해줄 필요가 없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익히 알려진 인명의 경우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볼테르는 낯익기 때문에 그냥 놔두고 디드로는 낯설기 때문에(?) ‘Diderot’라고 병기해준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하긴 ‘디데로’라고 옮기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하여간에, 그건 좀 이상한 ‘노파심’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마키아벨리에다가 ‘Machiavelli’를 나란히 표기한 것처럼.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겐 ‘사티로스’가 ‘마키아벨리’보다는 친숙한 이름이어야 한다. 풍자(Satire)란 말의 어원이 되는 이 ‘사티로스(Satyr)’가 과연 그런지?.. 나는 완벽한 책, 적어도 최선을 다한 책을 읽고 싶다.

-결국 그 누가 지금까지의 어느 위대한 음악가보다 훌륭한 창의와 발상, 말에 있어서 빠른 속도의 장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를 감히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 우리가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내닫게 하면서 모든 것을 건강하게 만드는 바람의 걸음걸이를, 들이마시고 호흡하는 바람을, 바람의 자유로운 조롱을 지니고 있다면, 병들고 사악한 세계의 수렁이나 ‘고대 세계’의 수렁이 결국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저 신성하게 변용시키면서 보완하는 정신 아리스토파네스에 관해 말하자면, 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그리스 세계 전체를 용서하게 된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에 용서와 변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가슴 깊이 이해했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니체는 페트로니우스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경탄으로 이 단장을 마루리하게 된다. 어쨌든 독일어로는 페트로니우스를 번역할 수 없다는 것. 그는 너무도 빠른 속도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경탄. “저 신성하게 변용시키면서 보완하는 정신 아리스토파네스”라고 옮겨져 있는데, 희극에서 세상이 ‘신성하게 변용’된다는 건 약간 어색하다(내가 아직 아리스토파테스를 읽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어 번역에는 ‘밝게 하다’란 동사가 쓰이고 있다. 즉 빛이 들게 하는 것이다. 용서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 세계’란 어두운 세계인바, 그것을 ‘희극적으로’ 재현/묘사함으로써 용서해줄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얘기인 듯싶다(웃음은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아리스토파테스는 “저 밝게 비춰주면서 보완해주는 천재”인 것.

-그렇기 때문에 저 다행스럽게도 보존되어온 소품(petit fait)보다 더 내가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스핑크스의 본성에 대해 꿈꾸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즉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그가 부정했던 그리스적인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원문은 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지만, 내가 임의로 분할한 마지막 문단이다. 니체의 경쾌한 속도를 그런대로 따라온 우리말 번역은 이 대목에서 헛걸음을 하고 있다. “저 다행스럽게도 보존되어온 소품”이란 게 무슨 뜻인지? ‘소품’은 보통 작은 단편/작품을 말하는 것이지만, 병기된 불어 ‘petit fait’는 ‘작은 사실’(little fact)이란 뜻 아닌가? 역자는 ‘보존되어온’이란 말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사실’을 ‘소품’으로 옮긴 듯하다. 우리말이 어색하다면 번역에서 약간의 변형이 필요하지만, 여기선 방향이 잘못됐다. ‘보존되어온’에 맞출 게 아니라 ‘작은 사실’에 맞추었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해져 내려온 사소한 사실 하나’라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스핑크스의 본성”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그 스핑크스적(=수수께끼적) 성격”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니체로 하여금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그 수수께끼적 성격”에 대해서 공상해보게 만든 ‘사소한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이 임종한 베개 밑에 있던 책이 아리스토파네스였다는 사실이다. <성서>(<구약>을 뜻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경전?)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그리고 플라톤 자신의 책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말이다. 해서, “플라톤 또한 삶을, 자신이 부정했던 그리스적인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라도 없었다면 말이다!”(책들, 이 책들이 아니라면, 나는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2004. 08. 28-29.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니체와 문체의 속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7 23:37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위원 칼럼을 옮겨놓는다. 예전에 '니체와 번역의 속도'란 페이퍼에서 니체의 번역론, 정확하게는 문체의 속도 번역론을 소개하고 나대로 풀이한 적이 있는데, 최근 <번역이론>(동인, 2009)이란 책에서 다시금 그 대목이 번역돼 있는 걸 보고 그 속도의 문제를 한번 더 생각해본 글이다. 당시엔 번역돼 있지 않았던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공존, 2008)이 그 사이에 소개된 것이 
 
 
 

제목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 서재에 초창기부터 자주 들락거리시는 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재작년 연말에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렸던 글의 제목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었고, 데리다의 <법의 힘>의 일부분을 읽고 정리한 것이었다. 이 페이퍼는 그걸 다시 정리한 것이다(내지는 다시 정리하려는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아무리 크리스마스이고 연말 정서에 취해 있다고 해도(*이 글은 2004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씌어졌다), ‘법의 힘’을 무시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읽은 대목을 정리해두겠다고 해놓고 입 닦는 건 혹 ‘사기죄’에 걸리진 않을까? 해서 입막음으로 약간의 시늉은 해두어야겠다. 책들을 펴놓으시길 바란다. 자크 데리다,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음, 책은 지난 7월에 나왔군.) 1부의 제목은 ‘법에서 정의로’이다. 제목부터 벌써 기죽이지 않는가? 역자에 따르면, 이는 또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복화술’이 법에 고유한 것인지, 데리다만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학부시절 법학과 경제학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은 걸 은근한 자랑으로 삼고 있는 나이지만(그러니까 나는 ‘법’과 ‘경제’를 고의로 무시했던 것인바, 결정적으로 나는 ‘돈 버는 법’을 잘 모른다. 안쓰럽게도 이 때문에 고생하는 건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이럴 때는 (‘무시’가 발각되는 게 아니라) ‘무식’이 탄로날까봐 ‘긴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짐작에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 ‘정의의 권리’란 말은 데리다의 의도(?)와 무관하며, 다만 프랑스어의 중의적 효과이지 않을까 싶다. 기억에, 본문에서 ‘정의의 권리’란 말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치는 않지만(한번 읽었기 때문에), 그럴 법한 것이 데리다가 일차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은 법과 정의의 차이/구별이지 않은가?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37쪽) 법은 계산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불어의 ‘droit’는 ‘법’과 ‘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란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이다. 법이 정의의 상 아래에서 심판될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받을 수 없으며 (법에 따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인 데리다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대로, <법에서 정의로>는 1989년 10월 미국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로 개최된 학술콜로퀴엄에서 발표된 것이고, 이 발표(영어본) 텍스트는 나중에 (1992)란 단행본에 수록되었다. 나는 이 책을 제본해서 갖고 있는데, 그걸 구하러 몇 년 전에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십 몇 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법대도서관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법전’들을 혐오하는 편이다. 그 일본어투의 한국어들을 말이다. 그런 내가 제 발로 법대도서관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 ‘데리다의 힘’이다.

데리다는 먼저 자신이 ‘기조연사’로 초대된 콜로퀴엄의 주제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그는 다른 글들에서도 대부분 ‘타이틀’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곤 한다). 그가 문제삼는 것은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성마른 연설자’로 지칭하면서,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어떤 수사법도 ‘해체’와 ‘정의’의 이런 연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나는 이 사물들 또는 이 범주들 각각에 대해, 그리고 이 유사범주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말해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질서나 분류법 또는 어구에 따라 말할 수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11쪽)

거기서 ‘범주들’과 ‘유사범주들’은 문법용어로 말하자면, 실사(實辭)와 허사(虛辭)를 말한다. 즉,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단어결합)에서 ‘해체’ ‘가능성’ ‘정의’가 실사(=실질형태소)이고, ‘와’와 ‘의’가 허사(=형식형태소)이다. 역자는 ‘그리고’ ‘정관사 la’ ‘-의’라고 옮겼는데, 이 꼼꼼한 번역서에서 옥의 티라 할 만하다. ‘그리고’는 물론 불어의 ‘et’(영어의 ‘and’)를 옮긴 것일 테지만, 그 ‘et’에 해당하는 것이 ‘와’이며, ‘정관사 la’는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번역어구에 대응어를 갖고 있지 않다(이 제목의 불어문구 자체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러니 번역할 필요가 없는 단어이다). 데리다의 말은, 자신이 ‘해체’ ‘와’ ‘정의’ ‘의’ ‘가능성’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그걸 다 결합한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어구에 대해서 말하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흔히 하는 말로 ‘주최측의 농간’이라는 것).

그는 잠시 자문자답을 하던 끝에 이 문제를 이렇게 일단락을 짓는다: “이 최초의 허구적인(=가상적인) 의견 교환에서부터 이미 법과 정의 사이의 애매한 미끄러짐들이 예고된다. 해체의 ‘고통’, 해체가 겪는 고통이나 또는 해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고통은 아마도 법과 정의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과 규범, 그리고 확실한 기준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는 규범이나 규칙, 기준이라는 개념들에 관한 문제다.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12쪽)

자신이 기조연설자로서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을 숙고/강조하면서 데리다는 (데리다답게) 이 언어의 문제로부터 연설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즉, 그는 불어에는 없고 영어에만 있는 관용표현 두 가지를 인용하는 것에서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 그 하나가 ‘to enforce the law’인바(다른 하나는 ‘address’란 동사이다), ‘법을 집행하기(법 집행)’이란 내용을 영어/불어/한국어는 각각 ‘to enforce the law’(직역하면 ‘법을 강제하기’)/‘appliquer la loi’(직역하면 ‘법을 적용하기’)/‘법을 집행하기’라고 표현한다. 이 셋은 동의어이다.

하지만, ‘to enforce the law’란 영어표현에서 데리다가 끄집어 내고자 하는 내용은 불어에도 우리말에도 없는데, 그건 바로 힘(force)이다. 이 법과 힘의 관계는 오직 영어표현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적용’이라거나 ‘집행’이란 표현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고로, 이 녀석들이 힘/법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해서, ‘to enforce the law’를 불어나 한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에 대한 직접적인 문자상의 암시를 상실하게 된다.”(강조는 나의 것) 

어쨌든 이 영어표현에서 강하게 암시되는바,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은 법에 대하여(…) 외재적이거나 부차적인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법으로서의 정의’ 개념 자체에, 법이 되는 것으로서의 정의, 법으로서의 법 개념 자체에 본질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힘이다.”(15쪽) 요컨대, 힘과 법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칸트의 <법론>에서도 환기되는 바이지만,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 가능성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16쪽)

 

 

 

 


역자가 계속 ‘적용가능성’으로 옮기고 있는 건 우리말의 ‘집행’을 뜻한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참에 언급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는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최상의 텍스트이다(데리다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해체도 시도한 바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과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데리다에 좀 익숙한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법의 힘’과 ‘폭력’이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식의 ‘해체’가 이후에 진행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암시를 데리다는 이번엔 독어에서 가져온다. 게발트(Gewalt)란 단어에서.

2부에서 그가 자세하게 다룰 벤야민의 텍스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의 제목에도 쓰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이 ‘게발트’인바, 이 단어는 독어에서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게발트는 폭력과 적법한 권력, 정당화된 권위 모두를 뜻한다. 어떤 적법한 권력이 지닌 법의 힘과, 분명 이러한 권위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최초의 설립의 순간에는 합법적이기도 비합법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적 폭력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17-8쪽)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데리다는 영어에서 ‘법=힘’이라는 등식을 가져오고, 독어에서는 ‘힘=폭력’이란 등식을 끌어온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법=폭력?! 법에 대한 이런 사전정지작업 이후에 데리다는 ‘해체’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에 들어간다.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 왜냐?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시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21쪽)이기 때문이다.

해서 ‘가설상’ 이러한 해체가 고유한 (하지만 불가능한) 장소를 갖고 있다면, 그건 철학이나 문학부라기보다는 법학부, 혹은 신학이나 건축학부가 될 거라고도 데리다는 말한다(그런 이런 관점에서 ‘비판법학’이나 스탠리 피시 등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니까 데리다를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쪽은 나 같은 문학도가 아니라 법학도이고, 신학도이고, 건축학도이다. 그게 데리다의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해체라는 이름을 지닌 가장 잘 알려진 작업들에서 해체가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24쪽)

그리하여, 데리다가 이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해체 일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의의 문제를 ‘전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해체 일반이 해온 일은 오직 이 문제를 전달하는 일이었는지”(25쪽)이다. 즉,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시작이다. 아니 시작도 아니다(“나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파스칼과 몽테뉴의 단장을 인용하면서, 그걸 해석하면서부터이다. 데리다가 <팡세>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스칼의 단장은 이것이다.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Justice, force – Il est juste que ce qui est juste soit suivi, il est necessaire que ce qui est le plus fort soit suivi.)

이 대목은 브륀슈빅판의 단장 298번으로 돼 있는데(대부분의 우리말 <팡세>도 이 브륀슈빅판을 옮긴 것이다), 역자가 역주에서 참고로 제시하고 있는 국역본(셀리에판을 옮긴 서울대출판부본)의 번역은 이렇다: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추종받는 것은 정당하다. 가장 강한 것이 추종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번역을 비교해 보건대(그리고 러시아어본을 참조해보건대), 아무래도 역자(혹은 데리다)가 이 문장을 독특하게 읽은 듯하다. 내 불어실력이 고등학교 때보다도 못하지만, 그걸로라도 판단해 보건대, 역자가 ‘지속되다’로 옮긴 것은 ‘soit suivi’이며, 그 경우 이걸 (영어로 치자면) (사전을 보니 ‘suivi’라는 형용사가 있다. ‘연속적인’이란 뜻)로 본 듯한데, 나로선 , 곧 수동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국역본에서처럼 말이다).

‘suivr’란 동사의 과거분사 역시 suivi이니까 나는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그러니까 suivi는 그 과거분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모양이다). 그 ‘suivr’의 뜻은 ‘따르다’이다(국역본은 ‘추종하다’로 옮겼고, 러시아어본은 ‘복종하다’로 옮겼다). 가장 큰 차이는 ‘따르다’가 타동사인 반면에 (be+형용사를 동사로 본다면) ‘지속되다’는 자동사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에 하자가 없다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문맥일 텐데, 나는 타동사(수동태 구문)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옮기면: “정의, 힘 – 정당한 것(=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힘)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다(=불가피하다).”

이어지는 단장의 내용은 이렇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27쪽) 여기서 접속사 ‘그리고’는 ‘그런데’로 읽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힘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정의)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강한 것(=힘)을 정당한 것(=정의)으로 간주했다는 것. 아주 냉소적인 단장인데, 곧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의해서 힘이 정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알다시피, 미국이 ‘무한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정의’ 덕분이 아니라 ‘힘’ 때문이다).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국회의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이 ‘정의 없는 힘’이라면, ‘파병(연장) 반대’는 ‘힘없는 정의’이다. 어떻게 하면 정당한 것이 강해질 수 있을까?



파스칼은 다른 단장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28쪽) 러시아어본은 마지막 문장을 “관습을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라고 옮긴다.

즉 권위의 신비한 토대는 ‘관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당히 래디컬한 관점이다. 거기에 견주면, 관습법(불문법)과 성문법을 구분하는 상식(적인 관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사실, ‘관습법’이란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가로막는 알리바이는 아닐까? 마치 관습으로서의 법 말고 다른 법이 또 있다는 듯이 암시하는? 비유컨대, 관습법과 성문법의 관계는 니체에게서 은유와 개념의 관계와 같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파스칼-니체적 견해에 따를 때, 행정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따라 위헌이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생각보다 ‘래디컬한’ 결정이다(이 재판관들을 무슨 ‘8적’ 운운한 김용옥의 견해야말로 상식적이지만 ‘보수적’이다). 우리의 재판관들은 법적 권위의 ‘신비한 토대’를 건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성문)헌법이란 그저 닳아빠진 관습헌법에 다름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니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어쨌든 우리의 재판관들은 (무)의식적으로 법에 대한 자기-해체를 감행했던 것. 해서, 한국은 경이롭게도 (프랑스에도 없을 법한) ‘해체주의적’ 재판관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표현은 파스칼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몽테뉴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정당하게도 몽테뉴에게 관심을 돌리는데, <수상록>(혹은 <에세>)의 저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법들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28쪽)



이 대목은 <수상록> 3권 12장에서 인용한 걸로 돼 있는데(<수상록>은 전3권의 방대한 텍스트이다),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13장(마지막장)에 나온다(러시아어본은 <경험들>이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3권이 모두 완역돼 있다. 2권짜리와 4권짜리로 두 종류). ‘신용을 얻으면서’란 표현은 아마도 ‘credit’가 들어간 어구를 번역한 듯싶은데, 그냥 ‘신뢰를 얻으며’ ‘준수되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개인적으로 신용불량자의 경험이 있는 나는 ‘신용’이란 말을 싫어한다). 하여간에 몽테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거창한) 정의와 무관하다. 비록 법은 정의를 요구하며 정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해서 이러한 관점은 법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이끌며, 그러한 비판을 넘어선다.

“정의와 법의 돌발(=우발적인 출현)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는 법이 힘을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 지배 권력의 유순하고 비굴한, 따라서 외재적인 도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힘 또는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좀더 내재적이고 좀더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31쪽)

사실 나는 첫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법을 만드는 작용은(…)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의 의미를 간취하지 못하겠다. 걸리는 건 ‘해석적인 힘’, ‘해석적인 폭력’이란 표현이다. 그게 ‘해석적인’이 힘/폭력의 수식어인지, 아니면 해석과 힘/폭력이 등가적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전자라면, ‘해석적인 폭력’의 짝개념은 무엇인가? ‘기술(記述)적인 폭력’인가? ‘해석적인’이란 말은 그냥 (오스틴의) ‘수행적인’이란 말로 이해하면 되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어떤 정당화하는 담론도 창설적인 언어활동의 수행성 또는 이 수행성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대하여 메타언어적인 역할을 보증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32쪽) ‘지배적 해석’? 데리다의 ‘메타언어는 없다’는 테제는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이해는 나로선 장래의 것이다(이해란 패러프레이즈하는 것인데, 나는 이 대목을 아직 내 식으로 패러프레이즈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후의 내용들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정초의 순간에는 불법적이지도 비적법하지도 않다.”(32-3쪽) 같은 지적은 이해하기 쉽다.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또 다른 법)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폭력(게발트)’이다. 르네 지라르가 얘기하는 ‘정초적 폭력’ 같은 게 여기에 대응할 것이다.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의)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이다.

이러한 법의 구조가 해체 가능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 토대에 정초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건축학적으로 어떤 건물이 해체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부실해야 한다). 이러한 법, 혹은 법으로서의 정의와는 대조적으로 ‘법 바깥’에 또는 ‘법 너머’에 있는 ‘정의 그 자체’는 해체 불가능하다. 해체 그 자체 역시 해체 불가능하다. 해서, “해체는 정의다.”(33쪽) 이걸 좀 어렵게 말하면,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34쪽) 이해하기 어려운가? “나는 이것이(=이러한 정식화가) 명료하리라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확신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곧 좀더 명료해지리라고 희망한다.” 그것은 또한 ‘성마른 독자’인 우리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어서 데리다가 끌어오는 것은 영어에서 ‘address’란 타동사이다. 이 동사는 ‘연설하다’ ‘(어떤 사람을) 소개하다’ ‘(편지에) 주소를 적다’ ‘(편지를) 발송하다’ ‘구애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역자는 주로 ‘전달하다’라고 옮긴다. 그러니까 address란 동사는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란 뜻을 기본적으로 갖는다. 데리다는 자신의 이 기조연설에서 (데리다) 자신을 청중들에게 address해야 하며,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란 주제(문제)를 address해야 한다. ‘정확하게’ ‘우회 없이’. 여기서 특별히 ‘정확성’을 문제삼는 것은 흔히 ‘편지/문자(letter)는 목적지에 도달하지/전달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해체(주의)의 표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러한 표어 혹은 주제를 이 기조연설에서 address해야 하는,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아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길-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道斷)’을 뜻하는바, 해체의 지배적 관심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그에게 ‘강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불어가 아닌) 영어로 발표해야/전달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의무를 ‘to enforce the law’와 ‘address’란 두 가지 영어표현을 문제삼음으로써 주제화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갖게 된 것은 “힘과 정확성, 그리고 정의의 독특한 혼합물”(36쪽)이다. 이 혼합물과의 대면은 아포리아의 경험 자체를 요구한다. 먼저, “정의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정의의 아포리아이다. 하지만,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인지, 욕망, 요구는 자기 자신, 곧 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37쪽)

다시 반복하자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아포리아적인 경험들은 정의에 대한, 곧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결정이 결코 어떤 규칙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인 경험들이다.”(37쪽)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그러한 경험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법은 정의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권리)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데리다는 그러한 전제하에 법의 곤궁에 대해 더 파고들어간다. “전달/주소(address)는 방향처럼, 정확성처럼,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데(*주소를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편지/문자는 전달된다. 안 그러면 반송된다), 우리가 정의를 원할 경우, 정당하고자 할 경우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전달/주소의 정확성이다.” “그런데,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38쪽)

그렇다면, “항상 하나의 독특성과 관계해야 하는(…) 정의의 행위(법관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일반적 형식을 갖고 있는 정의, 규칙이나 규범, 가치 명령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어떤 규칙을 적용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법에 일치하게(=합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되겠지만, 정의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 규칙은 독특성(=단독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고진의 문제틀을 가져오자면, 합법적인 결정/판결이란 건 고유명이라는 단독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법은 갑, 을, 병을 다루지 배용준과 이나영을 다루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 단지 합법적일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즉,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데리다는 그러한 확신이 오직 자기만족과 신비화의 모습으로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어서 이러한 아포리아적 상황을 자신이 처한 언어적 상황(영어권 청중에게 영어로 연설해야 하는 상황)과 계속 비교해가면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러니까 불어로 말해야 했을 상황이었다면, 이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연설의 주제는 제대로 제시/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제시/전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원텍스트’는 불어가 아닌 영어 텍스트이다. 사실상으로도 권리상으로도 그렇다. 비록 발표문이 최초의 불어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더라도 이 연설은 영어로 행해졌으며 이 연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to enforce the law’와 ‘address’란 두 (우연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39쪽, 나의 강조)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정의가 (불가능한) 아포리아인 것처럼. 따라서 정의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 언어의 문제는 어떤 판결이 그것을 구성하는 고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졌을 때 발생하는 불의의 폭력을 문제로서 제기한다. 그건 (이 콜로퀴엄의 담론공간을 넘어서) 더 나아가 동물(재판)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데리다 자신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하면서 넌지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동물의 희생은 (인간의) 주체성의 구조에 본질적이며, 또한 지향적 주체의 정초 및 (법이 아니라면 적어도) 법의 정초에 본질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법의 기저에 있는 동물 희생과, 양육과 사랑, 애도 및 사실은 모든 상징적이거나 언어적인 전유에서 상호주관성을 구조화하고 있는 상징적이거나 비상징적인 모든 식인 풍습 사이의 친화성”(41쪽)과 연계된다(이에 대해서는 ‘애도’와 ‘식인풍습’과 관련한, 역자의 용어해설을 더 참조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의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아주 복합적이며 방대하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간 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42쪽)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걸 통째로 문제삼고 있는 해체를 “정의에 관한 윤리적/정치적/법적 물음 및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 사이의 대립을 유사-허무주의적으로 포기하려는 태도”로 간주하는 일부의 피상적인 이해/오해는 (데리다가 강조하거니와) 해체와 무관하다(그들은 엉뚱한 ‘주소지’에 가서 해체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와는 전혀 반대로, (1) “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것과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양하고 있으며(‘가제’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앙가제’하고 있다).”(43쪽)

여기서 불어의 ‘가제’ ‘앙가제’는 영어의 gage와 engage로 옮겨서 이해해도 무방해 보인다. 즉 해체는 정의의 요구에 ‘be gaged’ 돼 있고, ‘be engaged’ 돼 있다. 그리고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것이 해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주장/변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애초에 그는 법과 힘(폭력)의 관계를 정식화했고, 이어서 정의와 해체의 (아포리아적) 관계를 진술/전달했다. 암기하기 좋게 말하자면, ‘법=힘(폭력)’이고, ‘정의=해체’이다. 이제 문제는 이들의 연관성이다. 정의로서의 법에 대해서 해체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에 정의와 법에 대한 이러한 구분(*법은 정의가 아니다)이 진정한 구분(…)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문제는 거기서 종결될 테니까).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집행되어야) 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힘없는 정의는 무력하다’는 말을 상기해보자. 그런데, 법은 힘 아닌가? 그러니 정의가 힘을 얻는 방도는 그것이 법 안에 자리잡는 것이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48쪽)

거기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세 가지 아포리아의 기술이 이 연설의 결론부이다. (1) “어떤 결정(=판결)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59쪽)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고,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요구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해서, “이러한 역설로부터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결정이 정당하며 순수하게 정당하다고, 더욱이 ‘나는 정당하다’고 현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이 첫번째 아포리아, ‘규칙의 판단중지’이다.

여담이지만, 초등학교 때 읽은 한 동화에서는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왕비가 되기 위해서인가(동화에서 여자들이 갖는 두 가지 ‘명분’이다), 하여간에 한 처녀가 왕으로부터 모순적인 요구를 받는다. 옷을 입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알몸이어서도 안된다. 말을 타고 와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걸어와서도 안된다. 이런 아포리아적인 요구에 대한 ‘현명한’ 처녀의 해법은 이랬다. 옷을 입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걸쳤고(그건 ‘옷’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벗은 것도 아니다), 말을 타지 않은 대신에 그물을 말에 매달고 끌려왔던 것(적어도 걸어오진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법과 정의 사이에 끼인 해체는 내게 그러한 해법의 모색으로 보인다. 해체는 지혜인가?

그리고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흔히 해체는 결정불가능성과 결부되어 이해되지만, 그때의 결정불가능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와 같은) “단지 두 결정 사이의 동요나 긴장만은 아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규칙을 고려하면서 불가능한 결정에 스스로를 맡겨야 하는 것의 경험이다.” 이것이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라는 두 번째 아포리아인바,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여 있다. 이것의 유령성은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53쪽)

“만약 현전하는 정의를 규정하는 확실성에 대한 일체의 가정이 해체된다면, 이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으로부터 작동한다.” 물론 이 정의의 이념이 무한한 것은 그것이 환원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환원불가능성은 타자로부터, 타자의 (단독적인) 독특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렇듯 결정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으며(이 또한 정당하지 않다) 오직 결정(=판결)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이 아포리아의 내용이다(그러니까 정의는 판단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판단의 실행에 있다).

끝으로,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이것이 세 번째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전제로서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다. 즉,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결정의 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이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는 하나의 광기이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56-7쪽)

따라서 결정은 광기 어린 것이며 신들린(=수동적인) 것이다. 하긴, 정의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 혹은 불가능한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불가능한) 아포리아에 대응하는 것이 ‘광기’라는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데리다가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54쪽)고 말하는 것도 과장이나 엄살은 아니겠다.

이상의 세 가지 아포리아를 다시 암기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불가능성] (2)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만 한다.[불가피성] (3)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아주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그렇다고 해서, 정의가 계산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렇게 판단하고 결정/판결해서는 안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영역하면, “Unaccountable justice orders us to account!”)(그러니, 정의도 미쳐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해체 불가능한, 현전 불가능한, 계산 불가능한, 그래서 ‘견적 안 나오는’ 정의의 구조이며 요구이다. 그리고 해체는 거기에 미쳐 있다. 왜?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59쪽, 나의 강조)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붙)들릴 때 우리는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망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내가 읽고 정리한 데리다는 일단 거기까지이다…

04. 12. 26-27.

P.S. 한 일주일 정도 인터넷 사용정지 처분을 받은 탓에(소위 '유비쿼터스'가 안되고) 뜻대로 내용을 업그레이드할 수가 없다. <법의 힘>의 나머지 부분도 조만간 정리할 계획은 갖고 있지만, 논문과 서평 여러 편을 다음 주까지 써야 하는 까닭에(게다가 종강하고 리포트 처리하고 하는 일들!) 언제 가능할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위기지학(爲己之學)인 걸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다. 위인지학(爲人之學), 곧 남들을 위한 공부였다면, 이 얼마나 불성실한 공부인 것인가!..

06. 06.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0년 봄의 독서일기 중에서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 1998)을 읽으면서 적어놓은 메모를 옮겨놓는다. 한때는 '하에데거냐 야스퍼스냐'란 문구가 유행하기도 했을 만큼('한계상황'이란 유행어!)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소위 독일의 '실존철학'을 양분하기도 했던 철학자이지만, 현재의 명성은 거기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아래는 노년의 야스퍼스. 그는 가장 전형적인 독일 철학자의 인상을 갖고 있다. 강인하고 엄격한 인상 말이다).  

지금은 하이데거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동급의 사상가, 철학적 라이벌로서 인정받았던 듯하고, 독일사상에 민감했던 일본에도 그런 식으로 수용된 듯하다. 우리도 당연히 옛날엔 그렇게 수용했었고, 때문에 무슨 사상전집류들에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같은 책이 단골메뉴였다. 야스퍼스로서 좀 불행한 일이라면 후학이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만 해도 데리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뒤를 받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국내 소개된 책으론 한스 자너의 전기 외에 리하르트 비서의 <카를 야스퍼스>(문예출판사)가 있는데(자너의 책은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공평하게 다루는 쪽이다.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야스퍼스학회 공동대표를 역임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내엔 그의 하이데거론과 야스퍼스론이 모두 번역돼 있다. 유감스러운 건, 정신의학과 철학에서의 야스퍼스의 (방대한) 주저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개인적으론 아직 큰 흥미를 갖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폴 리쾨르가 그의 학생이었으며 가다머는 그에게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직을 물려받았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기억해두기로 한다. 그의 걸출한 여제자가 한나 아렌트였다는 것도. 아렌트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와의 '관계' 때문에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오며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에서 사랑의 개념'인가가 논문의 제목이었다. 이제 아래부터가 2000년의 메모이다.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를 읽는데, <루소>(한길사)만큼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유는 그의 생애 전체에 대한 요약에 들어 있다: “그의 부인은 야스퍼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헌신하면서도 그것을 희생으로 느낀 적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계를 감싸안는 팔’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한결같이 안정감을 주면서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전체적인 흐름은 늘 그의 정신 속에 편안히 녹아들었다. 이렇듯 아늑한 삶은 역사의 유여곡절이 거의 없는 삶인 동시에 특기할 만한 개인적인 사건도 거의 없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오직 사유의 세계를 위하여 송두리째 정열적으로 바쳐졌던 것이다.”(124쪽) 유태인이었던 부인 때문에, 히틀러 치하에서는 제법 고달펐음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삶으로 기술될 수 있을 만한 삶을 그는 살았다는 것이니 더는 붙일 말이 없다.

1883년생인 그의 사진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1938년 대학에서 해직을 당한 그가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78쪽)인데, 그는 키가 190의 장신이었다. 또 막스 베버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과 하이델베르크의 리케르트와 앙숙관계였다는 것 정도가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덧붙여서 포괄자(das Umgreifende)에 대한 그의 정의: “무규정적인 일자”. 그리고 실존. “실존은 영원을 현재화하는 것으로서 시간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초월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실존의 구조이다.”(183쪽)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에서 그가 내린 실존철학에 대한 정의: “실존철학은 모든 사실적인 지식을 이용하면서도 이러한 지식을 초월하는 사유로서, 인간은 그러한 사유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하는 자의 존재를 해명하는 동시에 성취한다. 실존철학은 존재를 고정시키는 모든 세계인식을 초월하여 부유상태로 들어가게 함으로써(이것이 곧 세계정위이다) 자신의 자유에 호소하는 것이며(이것이 곧 실존해명이다), 또한 초월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제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이것이 곧 형이상학이다).”(186쪽)

또 야스퍼스의 고유한 개념인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대하여: “모든 근본상황(Grundsituation)은 현존의 유한성에 근거한다. 인간이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한, 한계상황은 근본상황이다. 유한한 현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유래를 지니고 있으며, ‘죽음’에 처해 있고, 다른 현존과의 ‘투쟁’ 관계에 있다. 또한 인간은 그때그때의 여러 가능성들을 선택함으로써 또한 가능적인 것의 개방성 내에서 다른 가능성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우연’에 맡겨져 있으며, 현실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다."

"야스퍼스에게는 인간이 궁극적인 여러 상황에 어떻게 관련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근본상황들을 경험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여러 상황은 한계상황들로 된다. 여기서 ‘한계’라는 말은 현존의 테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 초월자를 향해 나가면서 투명해지는 위치를 가리킨다... 한계상황을 경험한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은 철학의 보다 심원한 근원인 셈이다.”(190-1쪽)

06.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 소설, 비평, 게다가 러시아문학 연구자로서 '토탈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장욱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사실 나온 지는 좀 됐다. 한데,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한지라(저자 사인본을 보내줄 거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 몇 마디 거드는 걸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언론에서도 비교적 비중있는 리뷰들을 싣고 있어서 일단은 한 곳에 모아놓는다(참고로, 인용하는 일간지들의 게재일자는 인터넷상에서 옮겨왔을 경우 실제 게재일과는 하루 정도 차이가 난다). 개인적으로 부탁을 받은 바 없지만 그래도 좀 띄워주는 게 의리가 아닌가란 생각에서. 그리고, 혹 잠재적인 독자가 <정오의 희망곡>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서. 인용문에서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중앙일보(06. 04. 21) 2월 14일 정오 서울 프레스센터. 창비 40주년을 앞두고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거기, 백낙청 선생 옆 자리, 공부 잘하게 생긴 청년 하나 앉아있었다. 농 섞어 질문을 던졌다. "거기 앉아있는 거 불편하지 않아요?" 대답은, 제법 다부졌다. "제가 여기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오늘 창비의 모습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장욱. 1968년생이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87학번이다. 94년 시인이 됐고, 여태 평론집 두 권과 시집 한 권, 장편소설 한 권을 발표했다. 처음 썼다는 소설은 지난해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많지도 않은 나이에 시도 짓고 평론도 하고 소설도 쓴다는 얘기다.

 

 

 

 

-그가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을 발표했다. 시는 각오했던 대로 난해하다. 온전히 해석한다는 게 사실 무리다. 그는 평론가 권혁웅이 명명했던 이른바 '미래파'의 핵심 당원. 다시 말해 그의 시는 소통 기능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인칭과 시제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는 갖가지 실험 자체가 그의 시 세계란 뜻이다.(*사실 김소월의 어떤 시들도 상당히 난해하므로 '난해성' 자체가 시의 결함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난해함인가 하는 것.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 

-굳이 참견한다면, 그에게선 지식인 냄새가 난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난무하는 욕설과 흥건한 성적 암시 따위가 그에겐 없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이상의 '오감도'가 연상되는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에서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우울과,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나는 사라지지 않지./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비닐봉지처럼 유연해.'('근하신년' 부분) 같은 대목에서 기존 질서를 거역하는 부정(否定)의 시학이 읽힌다고. 그러면 시인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래, 맘대로 해. 나는 너를 피해 먼 곳을 돌아갈 테다. 우리 만나지 말자.'('비열한 거리' 부분)

-이장욱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자투리를 제공한다. 그는 진짜로 공부를 잘한다. 아니 열심히 한다. 그는 집 근처 독서실에서 입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짓고 소설을 쓴다(이런 시인, 처음 봤다). 그리고 그는 비밀결사 '빨간 바지'의 조직원이다. 권혁웅.김행숙.장석원.여태천.하재연 등 고려대 출신 또래 시인들의 시 합평회 모임이다.

-권혁웅에 따르면 시 두어 편을 두고 몇 시간씩 토론하는 지루하고 밋밋한 모임이다. 여태 외부에 알려진 적 없어 비밀결사란다. 이장욱은 98년부터 암약했다.(*이들이 '빨간 바지' 마피아들이다. 우리 시단의 전복을 꿈꾸고 있는?) 두 달 전 그는 창비의 신임 편집위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필경 뉴스였고 일종의 난센스였다. 그럴 수밖에. 그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최전방 어딘가에 서있기 때문이다.(손민호 기자)

 

한국일보(06. 04. 22) 이장욱씨의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속의 시적 주체들은 엉뚱하다. 너무 엉뚱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엉뚱함이라 해도 무방할 듯 싶다. 그의 시들은 ‘나, 당신, 우리, 그, 그들’ 등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수많은 인물들로 북적거린다. 종잡을 수 없다 함은, 등장인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한 편의 시 속에서도 하나의 캐릭터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표제작)

-‘당신’과 ‘나’의 감쪽 같은 탈바꿈, 혹은 시적 화자의 자리바꿈이 해명되는 유일한 단서라면 ‘우리는 우호적’이라는 아주 느슨한 연대감일 것이다. 그들은 그 느슨한 연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냉소적인 자’들을 어렴풋이 냉소한다. 그 배경 음악은 슬프게도 ‘정오의 희망곡’이다.

-그의 시에서는 시적 주체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역시 엉뚱하다. “오 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결정’)오고, “10년 후의 1루 베이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10년 후의 야구장’)간다. “여름의 잎새들 사이로 12월의 눈이 내”(‘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리고, "수도관의 저편에서 빙하의 이동이 시작”(‘지진’)된다. 시간과 공간, 주체가 뫼비우스의 띠로 꼬아놓은 새끼줄처럼 그렇게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엉뚱한 시공간 속에서 엉뚱한 주체들은 ‘좀비 산책’을 하고, 길을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한다.(‘엉뚱해’)

-세상이 엉뚱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세상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근대의 이성, 그 강박적 질서의식이 세상의 종잡을 수 없음을 정돈해 우리 인식 속에 체계화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은 질서 강박의 거푸집으로 주조된 가짜일 것이다.

-이들 시적 주체들의 종잡을 수 없음은 그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거나, 냉소이거나, 위로이거나, 견딤의 방식은 아닐까. 그래서 마치 좀비라도 된 듯 산책도 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펭귄을 만나는 공상도 하고, 코를 맞대는 아프리카식 인사를 해보는 것(‘아프리카 식 인사법’)은 아닐까.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중독’ 부분)

-시집은 엉뚱한 세상을 향한 엉뚱한 저항과 냉소와 위안과 희망으로 풍성하다. 최소 저항으로 그 엉뚱함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삼차원을 ‘조용한 평면’으로 펴야 할지 모른다.(최윤필 기자)

'정오의 희망곡' 진행자 정선희씨.(라디오를 따로 듣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정오의 희망곡'을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정의 레퀴엠'이나 가끔 들었을까?)

동아일보(06. 04. 27)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 넘실거리는 음악, /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정오의 희망곡’에서)

-이장욱(38) 씨는 시인이고 소설가이며 평론가다. 등단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씨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김민정 황병승 씨 등 젊은 시인들의 실험시가 시단의 주요 경향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보다 앞서 쓰인 이 씨의 시도 주목받게 됐다.(*평론가 이장욱은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경향의 시인들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은 그런 실험 정신으로 가득하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언어인데 한 편의 시로 엮이니 낯설게 보이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 조용히 멈출 수 있다.’(‘가을에 만나요’에서) 인형처럼 생각도, 말도 없이 걷던 화자는 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감정을 갖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 나는 전진하였다 / 당신을 향해 / 한 발 한 발.’

-이런 독특한 작품들은 시에서 메시지를 찾는 데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씨도 “내 시가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면서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읽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한다. 시에 위대하고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서 언어미를 향유해 달라는 것이다.(김지영 기자)

(*)띄워준다고 해놓고서 시가 난해하다는 리뷰만 나열해놓았으니 이 또한 '수행적 모순'이 아닌가 걱정된다. 걱정을 덜기 위해서 샘플로 올려져 있는 시 '먼지처럼'을 읽어보기로 한다. "시 너머에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는 편견을 갖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먼지처럼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이 시의 퍼즐을 맞춰보기로 하자. 다른 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에 여기서는 시인 고유의 어휘적, 통사적, 의미적 반복과 패턴을 재구성할 수는 없고, 단지 이 시에 한정하여 '보이는 그대로'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먼저, 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이다(원론적으로 말해서 리듬은 반복에 의해서 만들어지기에 반복은 시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이동하였다', '우리는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가 이 시의 핵심 의미소이다. 묘사되고 있는 나머지 대상들은 이 이동중에 보게 되는 '우리의 배경'이다.   

'우리' 자신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시의 시적 세계관은 허무주의이다. 먼지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의 유구한 상징이기에. 어차피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기꺼이 코끼리이고 개이고 기린이고 하마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그 '먼지적 세계관'의 허무주의를 부드럽게 허락하고 수용한다. 그건 이를 테면 체념이다. 이 체념적 정서에서 '욕망'이 배태될 리 없다. 화자는 다만 관조할 따름이다. 바람결에 떠도는 먼지 같은 세상과 세월과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먼지처럼' 그냥 "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그러한 관조적 허무주의이다(풍경 자체가 허무주의의 산물 아닌가?).

모든 의미가 증발해버릴 만한 의미의 영점, 혹은 '가장 짧은 그림자'를 거느린 정오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용 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일 뿐(이런 시의 계보의 우두머리에 김종삼을 앉힐 수도 있으리라. 중간 보스쯤에는 박상순을)."우리는 미래와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포즈를 취하고.

그런데, '피아니스트'로서 이장욱이 연주하는 음악은 지극히 모던해서, 독자의 이지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정서적인 감화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음악이 '정오의 희망곡'이란 표제로 배달되는 것은 또한 지극한 유머이다. 그 유머에 어떤 트라우마가 배어 있는 것인지는 나는 아직 알지/확인하지 못한다. 하니 나는 당분간 그의 시의 배경으로만 남도록 하겠다...

06. 04. 3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지 2010-07-16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글로 해서 김행숙을 읽으며, 'too deleuzian'이라고 느꼈습니다. 비평가로서는 이런 작가가 얘기하기 쉽겠다 싶은... 하지만 신형철 문장이 워낙 매력 있어서 ... 이별의정거장을 사서 좀 읽었습니다... 그런 건 있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감성... 이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만... 저는 추사 세한도에서 그 극적인 예를 봅니다, 그런데 거기엔 충만한 숭고미의 '배면'이 있습니다. 진짜 기교적이죠!... 또 좀 들여다보니 김행숙의 시에서도 숭고미가 느껴집니다. 신형철은 탈숭고라고 해석했지만요... 그런데 중요한 건 '배면'입니다...

미지 2010-07-16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없는 아름다움으로서의 음악... 시는 철학과 음악의 결핍이 겹치는 곳에서 탄생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어의 순서(학)와 감각의 순서(악)가 조성하는 물질적 공허, 육체적 무의미를 달래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을 거라는... 결국 시는 물질적으로 충만하고 육체적으로 의미로운 언어이자 음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자 일종의 요구가 떠오르네요.
 

 

 

 

 

수잔 손택의 신간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을 어제 받아들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매번 소개하지만, 정작 내가 구입하는 책들은 40% 이내이다. 그러니까 5권을 언급하면 2권 이내의 책을 사는 것이며 그 정도만 돼도 3할은 넘는 '타율'이 아닌가라며 자위하는 편이다. '손택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하지만, 두툼한 데다가 가격도 만만찮은 책을 바로 주문을 넣은 데에는 호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 1932- )의 그림 '인도의 하늘(Indian Sky)'을 두르고 있는 표지도 한몫했다. 원서의 표지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장정이 가장 화려하며 때문에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강조'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표지이다.

국역본이 배달되자 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며칠전에 확인해둔 원서 'Where the stress falls'(2001)를 대출했다. 서가의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아서 직원에게 찾아봐줄 것을 부탁까지 했었는데, 다행히도 퇴근시간 전에 연락이 왔고 나는 그 책의 첫 대출자가 되었다(대출시스템이 전산화 돼 있기 때문에 최종대출일이 기록으로 남는다). 말하자면, '새책'이란 얘기이고, 이런 책을 대출할 때는 마치 직접 새책을 구입한 것 같은 부듯함을 느끼게 된다. 아래 사진은 2001년 한 서점에서 자신의 신간을 소개하고 있는 수잔 손택.

그리고 오늘, 읽어야 할 책들의 산더미 속에서도(나는 한번에 대략 10여권 이상의 책들을 건드린다) 마수걸이로 에세이 한편 정도는 읽기로 하고 편 것이 2부 '내가 읽은 것들'의 첫번째 에세이 '시인이 쓴 산문'이다. 처음엔 1부의 첫번째 에세이 '영화의 한 세기'를 읽으려고 했으나, 원서와 대조해본 결과 국역본의 차례는 1부와 2부가 바뀌어져 있었다. 즉 원서에는 '내가 본 것들(Seeing)'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내가 읽은 것들(Reading)'이고, 그래서 나 또한 그에 따라 2부를 먼저 읽기로 한 것(아마도 출판사로선 시작부터 '시인의 쓴 산문'을 읽어낼 독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쓴 산문'은 러시아 작가들, 특히 여성시인 마리나 츠베타에바(1892-1941)에 관한 에세이였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출전에 따르면 이 에세이는 원래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사로잡힌 영혼(Captive Spirit: Selected Prose)>(1983)의 서문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손택은 러시아문학에 정통하다). '즐거운 책읽기'까지 적어놓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더불어 몇 가지 번역상의 오류도 눈에 띄기에 교정해두고자 한다.

"19세기의 러시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58년에 카뮈가 파스테르나크에게 경의를 표하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단언했다는 걸로 에세이는 시작하는데(그러니 러시아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 카뮈를 읽는 일도 속없는 일이다), 그해에 스웨덴 한림원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었다. "실제로 지난 25년 동안 뛰어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재발견되고 복권되었다."라는 건 지난 1983년 시점에서 영어권의 사정을 말한다. 2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의 한국의 사정은 아직 턱도 없는 형편이다(단적으로 츠베타예바의 '시인이 쓴 산문'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전공자들의 반성이 요구된다(어떠한 핑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을 바꿔놓은 19세기의 러시아는 산문작가들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반면 20세기의 러시아는 주로 시인들의 업적이다. 물론 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업적은 아니다. 시인들은 산문을 통해서도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하지만 진지함이라는 이상은 필연적으로 비난을 불러일으킨다."(193쪽)

처음 두 문장은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문장은 좀 의문스럽다. 원문은 "About their prose the poets espoused the most passionate opinions: any ideal of seriousness inevitably seethes with dispraise."(3쪽)이다. 'about their prose'가 '산문을 통해서도'란 뜻이 되는 건지 일단 의문이고(상식적으로 왜 '산문에 관해서'가 아닐까? 손택의 어법인가?), '하지만'은 왜 들어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내용이 자전적 산문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폄하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도 두 문장의 의미는 와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산문에 대해서 시인들이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낸 것이고, (산문에서의) 어떠한 진지한 목적(이념)도 불가불 (시인들의) 비난을 사기 마련이다, 라는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다(손택의 어떤 문장들을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 않다). 그럼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파스테르나크는 죽기 전까지 몇십 년 동안 자신이 청년기에 썼던 뛰어나고 섬세한 자전적 산문(예를 들면 <안전통행증>)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며 폄하했다. 반면 당시 집필하고 있던 작품 <닥터 지바고>는 자신이 쓴 글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번역문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기에 원문을 제시한다: "Pasternak in the last decades of his life dismissed as horribly modernist and self-conscious the splendid, subtle memoiristic prose of his youth (like Safe Conduct), while proclaming the novel he was then working on, Doctor Zhivago, to be the most authentic and complete of all his writings, beside which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

원제인 'A Poet's Prose'를 '시인이 쓴 산문'으로 옮긴 데에서 전문번역자로서 역자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지만(대부분은 그냥 '시인의 산문'이나 '한 시인의 산문'이라고 옮길 것이다), 인용한 대목에서만큼은 실수가 도드라진다. 전체가 한 문장인 원문을 역자는 세 문장으로 분할했는데, 방점은 파스테르나크가 산문을 폄하했다는 데 놓여 있으므로 순서상으론 번역문의 첫번째 문장이 맨마지막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더불어, "beside which(=Doctor Zhivago)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을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라고 옮긴 건 이해가 불가능한 오역이다. "<닥터 지바고>에 비한다면 그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 아닌가?(참고로, <안전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 1977)로 번역돼 있으며, 말년의 파스테르나크와의 인터뷰는 <11인의 위대한 작가들>(책세상, 1997)을 참조할 수 있다. 원래는 <나의 삶, 나의 문학>(책세상, 1989)로 소개됐던 책이다. 언론인 김성우의 러시아문학기행 <백화나무 숲으로>(제3문학사, 1991)의 파스테르나크 편도 유용하다. 아들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파스테르나크가 숨은 거둔 모스크바 근교의 페레젤키노의 별장(다차). 가보진 못했는데, 지금은 파스테르나크 박물관이라고.  

해서 전체 문장을 다시 옮기면,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며, 거기에 비한다면 그가 쓴 젊은 날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공언하면서도 말년의 이십여 년간 파스테르나크는 (<안전통행증)> 같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섬세하고 빼어난 자전적 산문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고 격하시켰다." 아래 사진은 1934년 작가동맹회의에서의 파스테르나크.

파스테르나크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모더니즘 최대 시인 중 한 사람인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은 산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산문의 핵심은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자가나 수필가에 의미있는 것이 ㅣ시인에게는 (전적으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손택의 보충설명: "산문작가는 동시대인이라는 구체적인 청중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시는 시간적으로 먼 미지의 수신인을 향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한데, 웬 그녀? 원문의 '만델슈탐'을 다시 받기가 그랬는지 역자는 인칭대명사로 바꿔주는데, 그렇다고 성(性)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만델슈탐의 아내 '나제쥬다 만델슈탐'이 걸출한 회고록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는 '나제쥬다'가 아니라 '오시프'이므로 '그'라고 해야겠다. 사진은 1930년대 체포된 만델슈탐의 프로필 사진. 그는 1938년에 숙청됐다.  

이러한 배경설명하에 등장하는 이가 츠베타예바이다. 그녀 또한 시가 문학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는바, 어느 정도였느냐면 푸슈킨의 소설 <대위의 딸>에 대해서 "푸슈킨은 시인이었다. '고전적' 산문이라 할 수 있는 <대위의 딸>만큼 시적 호소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라고 했다. 즉, 푸슈킨이 소설을 시로 간주하는 것. 왜? 위대하니까? 만약 어떤 산문/소설이 위대하다면 그건 '시'이다. 시만이 위대하니까.

이러한 '편견'은 이 시기 러시아 시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믿음이어서 손택은 망명시인 브로드스키(1940-1996)의 예를 덧붙인다(번역서에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란 러시아식 이름을 '조지프 브로드스키'라고 영어식으로 읽어준 건 유감스럽다. 성경의 인물을 따라 '요셉 브로드스키'라고 타협할 수도 있을 텐대, '조지프'는 아무래도 낯설며 떨떠름하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산문이란 "다른 표현수단을 통해 씌어지고 있는 시"이다.

"시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실상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산문을 '산문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산문적인'이라는 말을 '지루하고 평범하며 단조로운'이라는 폄하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낭만주의 시대의 사고이다." 손택의 논평이다. 어쨌거나 "문자의 공화국은 실상 귀족사회"이고 "이곳에서 귀족의 작위는 바로 '시인'이다." 여기서 '문자의 공화국'은 'the republic of letters'인데, 복수형의 'letters'는 '문학'을 뜻하므로 '문학의 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요컨대, "러시아 문학은 시인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를 계승하고 있다. 현대 러시아 시인들에게 '시'는 비참하고 속된 현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지리멸렬함에 맞서는 자유이자 개인성이며 체계에 순응하지 않는 정신이다(진정한 산문은 결국 국가라는 듯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시의 절대성을 단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물론 시의 근원적 우월성을 주장했던 건 러시아 시인들만이 아니며 손택은 발레리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사례를 더 예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인들이 산문을 썼다는 것. 손택의 서평 대상이 되고 있는 츠베타의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에 대한 애기는 좀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마저 다루도록 하겠다...

 

06. 04. 29 - 05. 0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5-0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본문에 적은 대로입니다(필요한 문장도 다 적었습니다). 'nothing in comparison'이 '견줄 수 없이 뛰어난'이란 뜻을 갖고 있나요? 'beside which'도 '-는 차치하고'의 뜻인가요?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파스테르나크가 시라는 장르를 높이 평가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초기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지바고>에 대해선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실상 <닥터 지바고> 자체가 '소설로 쓴 시'입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bluegoby 2006-05-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실수한 걸 깨닫고 고치려고 들어와 보니 로쟈님이 벌써 답글을 달으셨네요.
먼젓글은 무시해 주세요.

털세곰 2008-01-1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소개해주신 영역본 쯔볘따예바 산문집(Captive Spirit)의 링크를 따라가면 위키의 그녀 사진이 나옵니당^^ 그리고 이제는 영어책 못 읽겠어요. 하도 멀리하다보니 로쟈님 번역문의 오류 등을 원본과 대조해 지적해주시는 것들은, 정말 제게는 어디가 번역이 틀렸지 할 정도입니다 ㅠ.ㅠ

로쟈 2008-01-10 09:49   좋아요 0 | URL
링크가 그쪽으로 바뀌었군요. 러시아어나 영어나 읽는 만큼이죠. 한데, 중요한 건 한국어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