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호학과 관련한 로트만의 저작은 국내에 세 권이 소개돼 있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러시아 영화론 선집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그리고 치비얀과의 공저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가 그것이다. 이 중 <영화기호학>과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 실린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는 (내가 알기에) 같은 내용이다. 해서, 로트만 영화기호학에 대한 개괄적인 코멘트를 담고 있는, 오래전에 작성된 아래의 글은 <영화기호학>(민음사)를 대본으로 했던 것이지만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도 적용될 수 있다(단, 페이지수는 전자의 것이다).

로트만의 <영화기호학>(1973)은 그가 결론에서 지적한 대로 ‘소박한’ 입문서이다. 무엇에 대한 입문이냐고 하면 바로 영화-언어(film language), 즉 언어(기호=약호)체계로서의 영화 입문이다. 이 입문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 영화 이해의 문턱이다. 단순하게 그렇게만 본다면, 그래서 영화기호학을 영화 이해의 한 방법이나 절차로서 인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1968년 이후 영화연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기호학이 처음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기로 하자(기호학은 “값싼 물건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들”이나 하는 짓(혹은 실천)이며 기호학의 일반적 태도는 “백치 수술을 받은 담비(a lobotomised ferret)의 경계심”에 불과하다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즉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영화기호학 또한 자연스러운 것(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걸 따져볼 수는 없고(그럴 능력과 시간이 없다),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만을 잠깐 옮겨보기로 한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사진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언어> 영역본).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 향하는 곳은 역시 이미지와 서사 중 어느 것을 근본적으로 보는가라는 문제이다.

메츠는 의미작용을 행하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영화에서는 이미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쇼트가 문장이나 발언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움켜쥔 이 손의 쇼트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손이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은 언어를 영화분석의 틀로 간주하는 전제 위헤서(만) 성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발언으로서의 쇼트와 그의 ‘거대 통합체’는 언어학의 모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의 산물이며 이를 통해서 영화의 분석에서 이미지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서사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의 결과에 불과하다... 서사란 이미지의 자명한 소여가 아니며 그 이미지의 토대에 있는 어떤 구조의 효과도 아니다. 즉 그것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의 한 결과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사유(=서사=개념=이론적 이성=인식론)에 대비시키면서 그 존재론적, 가치론적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분명 이해의 또다른 문턱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당장에 그 문턱을 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저만치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만을 얼핏 감지할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한 문단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현대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박성수, '이미지와 사유: 들뢰즈의 영화기호학 비판에 대해'에서 재인용)

이 무능력 앞에서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지만, 그건 진짜 막연한 걸음이어서 과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과연 영화를, 삶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한것인지? 도대체 그걸 전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생리적 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능력을 염두에 두고 다시 질문하자면, 영화기호학의 알짜는 무엇인가? 그건 영화기호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얼마만큼 가능한가를 묻는 일에서 구해져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가능성의 물음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사진이나 그림처럼 연속적인, 분절될 수 없는 기호에서 과연 자연어에서의 단위와 같은 의미 단위를 찾을 수 있을까?”(<영화기호학>, 역자해설)라는 것이 그것. 그에 대해서: “(프랑스의)초기 영화기호학 이론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로트만은 일정한 문화적 관념들이 하나의 도상 텍스트(그림 혹은 영화의 쇼트)에 어휘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함으로써 이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개략적이지만, 여기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다. 영화기호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화언어가 가능해야 하고, 그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절될 수 있는 어떤 (의미) 단위가 설정돼야 한다. 로트만 자신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호체계”로 아주 기능(주의)적으로 정의한다. 뭔가(전언)를 전달할 수 있는 약호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언어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데 영화가 바로 그렇다. 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고 또 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 하고 또 전달받기 때문이다. 분명 여기에 오고가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달의 매체(매질)는 무엇인가? 조형적 기호(이미지)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의 이 기호연속체(sign continuum)가 분절되는 자리, 그러니까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자리, 그것이 바로 쇼트이다. 이 쇼트가 바로 “몽타주의 세포”이면서 영화적 의미론의 기본단위가 된다.

기본단위는 그렇다 치자.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 단위들의 통사론과 의미론이 가능한가, 즉 영화에서의 의미작용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이건 그다지 어려운 물음이 아니다. 일단 단위가 주어진다면, 그걸 배합해서 잘 버무리는 일은 그저 ‘솜씨’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까. 쇼트들을 a, b, c, ...라고 해보면, 이들간의 연결관계가 문제된다. 즉 가능한 관계, 가능한 경로가 문제되는 바, a-b-c의 조합이 가능할 수 있고, a-b-d의 조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조합들 중에서 보다 중립적인(비표지적인) 것을 표준으로 놓는다면, 이 표준으로부터의 표시될 수 있는 거리 관계, 일탈 관계(말하자면 기대-위반의 메카니즘)가 바로 의미발생의 전조건이 된다(<영화기호학>, 67쪽 참조).

이건 보다 매크로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될 수 있다. 어떤 한 묶음의 쇼트(단어 혹은 문장)를 시퀀스(담화discourse)라고 한다면, 이 담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적, 사회적, 이념적 의미소들과의 결합(연루) 관계에 의해 영화적 담론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의미기능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대충 그런 식이다. 좋은 영화건 ‘나쁜 영화’건 영화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말하게 되는 방식은 그런 식이다(사진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에서 사자상 몽타주).    

이제, 무얼 더 말해야 할까? 영화기호학의 대강이 그러하니까 이젠 그것의 디테일에 대해서 말할 차례인 듯한데, 로트만은 그 디테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건 아랫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듯하다. 그는 요컨대, 기본만을 말하는 것이며, 전략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조건적 기호조형적 기호라는 로트만의 기호 이분법이다. 물론 이 두 기호는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기호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퍼지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변증법적 운동이 가능해지는데, 로트만이 보기에 시(문학예술)는 조형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건적 기호이고, 영화는 조건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형적 기호이다.

 

지향한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끝까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바로 기호의 존재론적 긴장이고 의미론적 긴장이다. 글자들은 이미지를 동경하면서도 완강하게 글자들로 남으며, 이미지들은 이야기를 동경하면서도 또 굳건하게 이미지로 남는다. 로트만은 바로 거기까지만 얘기한다(그리고 나머지는 암시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에겐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는다. 서로를 마주보며 애닯도록 깃발을 흔들어대는 시와 영화에 대하여, 그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시텍스트의 분석과 영화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에 대하여(그 공통점과 차이에 대하여). 사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아 있다고. 이하는 <영화기호학> 후반의 내용정리이다(전반부는 다른 사람이 정리했던 모양이다).  

 

10장 시간과의 투쟁

영화는 세계를 모형화한다.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형의 시간-공간적 성질에 대한 대상의 시간-공간적 특성의 관계는 모형의 본질과 그 인식적 가치를 여러 모로 규정한다. 모형의 인식적 가치는 모형화의 방법을 선택하는 예술가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높아진다. 이 때문에 자연히 예술가는 세계의 시간-공간적 변수를 영화 속에 자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는 창조행위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객관적 시공간의 등가물들이 갖는 고유의 엄격한 체계를 예술가에게 부과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영화의 경계내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가에게 남겨진 것은, 다름아닌 영화적 수단을 가지고 이들과 투쟁하여 이기는 일뿐이다.

 

시각 및 도상적 기호화 관련된 모든 예술에서 예술적 시간은 오직 하나, 즉 현재밖에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각 예술에 있어서의 시간은 언어 예술에 비하여 궁핍하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배제한다.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행위는 오직 하나의 양태, 즉 현실적인 양태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영화는 현재 시제의 필연성과 스크린상의 행위가 갖는 현실적 양태를 한꺼번에 돌파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 초기부터 꿈, 회상, 의사 직접 화법 등의 전달을 위한 수단을 모색하면서 디졸브를 비롯하여 일련의 수단들에 기대어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영화는 여러 가지 동사 시제를 현재 시제에 의해 전달하고, 비현실적 사건을 현실적 사건으로 전달하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삶의 템포에 대한 자동 기록장치로부터 시간의 예술적 모형으로 전화시키기 위하여 영화 필름에 가해진 힘은, 관객에게 예술적 에너지로, 긴장과 의미 포화성으로 느껴진다.

 

11장 공간과의 투쟁

현실의 모든 공간적 형식과 네 변으로 한정된 평면 스크린 공간과의 동형성 위에서 쇼트의 효과는 구축된다. 상이한 것끼리의 이러한 대비 관계야말로 영화 공간의 기초를 이룬다. 스크린은 네 변과 표면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한계 밖에서 영화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 돌파의 가능성이 언제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 스크린 내의 표면을 채운다. 클로즈업은 네 변을 위협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떨어져나온 디테일은 전체를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따라서 스크린 위에 존재하지 않는 이 사물의 전모는 스크린의 경계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면성에 대한 공격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큰 의의를 거두고 있다.

 

Citizen Kane

 

 

 

 

 

 

 

 

 

 

 

 

 

 

 

이와 관련하여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른바 쇼트의 심도 구축이다. 화면의 전경에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그 후경에 롱 쇼트를 결합시키면, 이들은 스크린의 '본래적인' 평면성을 깨고 훨씬 더 엄밀한 동형성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다. 3차원이며 경계가 없는 다층적 현실 세계가 평면적이며 제한된 스크린의 세계와 동형으로 되는 것이다(심도 쇼트의 탁월한 테크닉으로 <시민 케인>과 트뤼포의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공간은 특정한 액자 안으로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무한한 공간과 동형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예술에 공통되며 특히 조형 예술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에다 영화는 자기 특유의 모순을 보탠다. 요컨대, 그 어떤 다른 조형 예술에서도, 예술적 공간의 내부 경계를 채우면서 그처럼 적극적으로 그 경계를 파괴하고 한계 밖으로 나오고자 애쓰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갈등은 영화 공간의 현실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12장 영화배우의 문제

영화 쇼트의 기호학적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예술은 역사적으로 두 전통의 교차점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비예술적인 기록물의 전통에, 다른 하나는 연극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록 영화는 스크린 평면 위에서 우리에게 흑백으로 교차되는 얼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잊은 채 스크린 위의 형상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각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연극은 우리에게 보통의 인간, 즉 우리의 동시대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잊고 그에게서 어떤 기호적 본질, 예컨대 햄릿, 오셀로 혹은 리처드 3세를 보아야만 한다. 예술 영화를 이러한 두 전통에 이중으로 투영해 본다면, 예술 영화에 있어서 스크린 위의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계 유형이 당장 드러나게 된다.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약호화된 전언이 된다 - 1 감독의 차원, 2 일상적 행위의 차원, 3 배우 연기의 차원. 감독의 차원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쇼트 작업은 많은 점에서 다른 경우와 동일한다. 즉, 클로즈업, 몽타주, 그 밖에도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수단들이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의 연기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런 전형적인 영화 언어의 형식들이 특별한 상황을 창출한다.  

 

 

일상적 행동에 대한 관계는 연극과 영화에서 근원적으로 상이하다. 무대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연극적' 행동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배우의 행동이 일상의몸짓과 억양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단지 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상의몸짓과 행동의 정확한 재현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상 관계의 기호학과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전통의 기호학을 흡수할 수 있는 영화 텍스트의 능력은 영화를 광범한 비예술적 시대 기호로 가득 차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어떤 극장 공연형식과도 비교가 안된다. (참고로) 우리시대의 여배우들은 안나 카레니나나 나타샤 로스토바의 의상을 입었다 해도 여전히 우리시대의 여자들인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이 점은 이미 결핍이 아니라 미적 법칙이다. 이는 스크린 위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할 때에 특히 강조된다(그레타 가르보에서 소피 마르소까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의상은 어떤 역사적 시기의 실제 의복에 대한 재현이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기호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기호적 의미의 세번째 층위는 바로 배우의 연기에 의해 구축된다. 스크린상의 인간 행동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생생함, 즉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현실을 관찰한다는 환상을 갖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생생함'이란 느낌은 실은 영화배우의 연기 구조 속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생겨난다. 한편에서 보면 영화배우는 최대한 '자유롭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자 애쓰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영화 연기의 역사는 현대의 연극에 비해 더 상투어, 마스크, 역할의 컨벤션, 전형적인 제스처들의 복잡한 체계에 의존해 왔다. 영화는 컨벤션 연기의 다양한 유형을 단지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창조해 왔다(감독의 영화/ 배우의 영화). 영화배우 연기의 컨벤션이 갖는 또다른 유형은 영화의 장르적 성격과 관련된다. 하나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특별한 조직 유형으로서의 장르는 연극에서보다 현대의 영화에서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기대와 관련된 충족은 물론, 그 파괴까지도 많은 예술적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영화의 특정한 부분에서 조건성의 정도를 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전체 속에서 배우 연기가 갖는 기호성이 제고될 수 있다.

 

13장 영화 - 종합예술  

우리는 "움직이는 그림의 도움을 빌린 이야기"가 전달하는 복잡한 의미구조를 고찰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영화는 단지 이 언어로만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 전언, 음악적 전언, 텍스트 외적 관련의 활성화를 포함하며, 이들은 영화에 다양한 의미구조들을 보태준다. 이 모든 기호학적 층위들은 또한 의미적 효과를 창출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종합적 특성 혹은 다성적 특성을 거론하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체계의 복잡성, 텍스트 약호화의 다회성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예술적 다의성 등은 현대 영화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한 걸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가 어떻게 고도의 기호적 복잡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교육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광범한 관객 대중의 이해에 부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어떤 체계를 사용하는 것과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성을 갖는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둘째로, 영화는 다층적 구조이며 그 구조의 층위들은 상이한 정도의 복잡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육 정도가 다른 관객들은 각각 다른 의미 층위들을 취한다. 세 번째로, 텍스트는 또다른 의미에서 다성적이다. 그것은 한 차원 위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기호들의 다발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상이한 차원들 위에서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관객에게는 텍스트와 나란히 약호가 주어진다. 영화란 하나의 교육기제이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14장 기호학과 현대 영화의 진로

기호와 의미의 문제에 대한 증대된 관심은 단지 학문적 기술에서의 특성일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문화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기호의 문제는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 속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베르히만(<페르소나>), 펠리니(<8 1/2>), 안토니오니(<블로우업>) 등과 같은 여러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블로우업>(1967)에 대한 분석... 안토니오니를 그의 주인공(사진작가)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니가 작품의 플롯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와 주인공과의 분리를 증거해준다. 안토니오니는 <배회하는 카메라>의 이념으로부터 분석의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확대'란 뜻의 '블로우업'은 국내에 <욕망>으로 출시돼 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현대 영화의 자발적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이다. (<블로우업>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살인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사실의 부동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흔들면서 영화적 진실에로의 길을 열어준다. 또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예술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보다 정신적, 예술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하는가? 안토니오니는 예술가가 하나의 ‘개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메타-언어에로의 무한소급 문제. 이러한 과학적 진리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예술이 그 대상이 삶보다 논리적 추상화에 있어 높은 차원의 언어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학 텍스트에서는 메타 언어의존재 자체가 연구자로 하여금 연구 대상의 바깥에 있게끔 보장해준다. 예술의 경우 이 점에서 예술가의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자질이 더욱 불가결하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 속에서 기술자와 기술 대상, 의사와 환자를 겸하고 있는 까닭이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는 다면적인 의식으로 인해 후자에 속하며, 바로 그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의사, 재판관, 삶의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필요하다. 안토니오니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이 책은 영화의 기초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도 아니고 영화의 문법서도 아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목적은 가장 소박한 것, 즉 관객들에게 영화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나아가서 영화언어를 관착하고 그 영역에 관해 숙고하게끔 자극하자는 데 있다.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다...

 

06.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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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권혁웅의 평론집 <미래파>(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표제 평론 '미래파'를 훑어보다가 인용된 시들 중 장석원의 '金秋子에게 보내는 戀書'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인상 그대로 '활달한' 시인데, 최근 들어 그런 걸 드물 게 보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구입했다. 작년 11월에 나온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가 그것이다. 시는 3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의 '구성감각'으로는 뒤에 네번째 단락이 더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그래서 2% 아쉬운 감을 갖게 되지만), 읽어볼 만한 시이다. '방법적 인용'의 새로운 차원을 건드리고 있는데, 권혁웅의 해설은 이를 '시와 다성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시를 전문 인용해본다(80년대를 말한다는 건 요즘 시로선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1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 그대의 눈동자에 고이는 슬픔 때문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 갈대의 순정 때문에 그날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빛좋은 개살구.

그대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여, 그대를 만지면 몸이 부풀어, 아흔 아홉 풍선이 되어 서쪽으로 날아가버려, 꽃잎이 피고 또 졌기 때문에, 꽃잎 속에 다시 꽃잎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날은 부처님이 오신 날이었어, 자비는 그들에게 구해야 돼, 살려줘, 날 구해줘, 날 묻지 마, 파헤쳐줘, 뒤에서 날 쑤셔줘

떨어지는 꽃잎, 삼천의 꽃잎들, 실려간 청춘, 푸른 청춘, 꽃다운 그대 얼굴 위에, 다시 꽃비 내리는 오월에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 왜 가버렸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내게 사랑을 실어보냈는가, 나는 토막난 몸통이고 끊어진 길인데

다만 후회하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길 위의 혈흔 더운 피 더러운 피, 나의 시신경에 와 닿는 오월의 햇빛, 희미한 전기 신호, 뭉개진 얼굴

그대는 물질적 증거이기 때문에, 짓이긴 꽃잎이기 때문에, 오월의 햇빛 속에서, 소리없이 지는 한 점 그림자, 물들자마자 한 겹 벗겨지는 껍질

그리고 나의 사랑스런 벌레들 이 풍진 세상을 만나 번성의 시대를 보냈으니, 변태해야 하리, 벌레들이여 또 다른 살덩어리여, 내 아파트로 와서 하룻밤 즐기시라

그대 또 다른 살덩어리여, 붉은 혀 붉은 젖가슴 붉은 엉덩이여, 어두운 거실 소파 위에 나의 게르니카, 그대 차가운 추상이여


2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의 이미지면 나는 완성된다. 환상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희망이 나를 발기시킨다. 나의 연인이여, 내 가슴에 볼 비비는 꽃잎이여, 머릿속의 총알이여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는, 그렇다. 그대에게만 해당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그대만이 독점한다.


3.

우리는 자욱한 歲月에 걸친 試鍊과 苦惱의 時代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成長과 成熟을 通해 自己 完成의 時代를 形成하여야 할 80年代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聖스러운 새 時代의 序場에서 大統領이란 莫重한 責務를 맡게 된 本人은 國家의 成長과 成熟이 本人에게 賦與된 歷史的 課題임을 痛感하고 있습니다.('제5공화국 대통령 취임연설문'에서)

 

 

06. 01. 11.

 

 

 

 

 

 

 

 

 

 

P.S.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의 <쇼쇼쇼: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나무, 2004)에는 '마음의 요람이 되어버린 김추자'란 절이 포함돼 있다.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4)에도 '양희은, 김추자, 심수봉'이란 글꼭지가 있다(이 책은 산 것 같은데 그 글은 아직 못 읽었다). 그리고 이선영의 시집 <일찍 늙으며 꽃꿈>(창비, 2003)에는 '이미자와 김추자'란 시가 들어 있다(이 또한 아직 못 읽었다). 이영미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황금가지, 2002)는 우리 대중음악사인데, '신중현과 김추자에 대한 기억들'이란 꼭지에서 김추자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김추자(1951-)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어렸을 적에 접했던 대중가요는 주로 남진, 나훈아, 아니면 패티김과 이미자였다(아마도 어머니의 취향이셨던 듯하다). 물론 이 '전설적인 가수(혹은 '간첩')의 노래를 들어는 보았겠지만, 그다지 조숙하지 않았던 '나의 취향'은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됐기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점령했던 건 마이클 잭슨이었고 컬처클럽이나 듀란듀란 같은 '팝'그룹들이었다. 그 음악취향이라는 것도 '조지 마이클'과 '마돈나'를 거쳐 'R.E.M.' 정도에서 저문 듯하다. 이후로는 대중음반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영화음악이나 편곡된 국악 정도를 가끔 듣는다.

 

 

 

 

 

 

 

그런 가운데 없는 인연을 만들어낸 건 조관우의 리메이크 '님은 먼 곳에'이다. 한 연구소에서 간사로 근무할 때에는 벅스뮤직에서 온갖 버전의 '님은 먼곳에'를 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서 종일 듣곤 했다('빗속의 여인'도 그런 식으로 듣곤 했다). '꽃잎'은 그 다음이었다. 몇달 전인가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룬 한 TV프로그램에서 김추자 특집이 다루어지는 걸 보았고 김추자에 대한 새삼스런 '흥미'를 느꼈지만 내가 터치할 수 있는 쪽은 아니어서 흥미로운 책들이 씌어지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가 기대를 얼마간 충족시켜준 것. 

 

시인은 김추자의 '꽃잎'을 주조음으로 깔면서 마치 디스크 자키처럼 여러 장르의 여러 노래들을 뒤섞고 있는데, 좀 아쉽게 생각하는 건 '나와 김추자'의 구체적 세목이 빠진 것. 해서 시는 재미있지만 감동은 없다. 물론 3번째 단락에 전두환의 연설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시인이 의도한 건 돌발적인 충돌의 몽타주와 그로 인한 충격효과인 듯하지만, 시적 화자의 포지션은 (황지우식의) 방법적 인용과 (유하식의) 개인사적 고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돼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뒷심'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참고로 신중현 작사/작곡의 '꽃잎' 가사를 옮겨둔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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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1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추자 이전에 가수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없다.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씨의 말입니다.
저요? 제게있어 여가수 NO.1은 단연코 김추자입니다.
님과 공유하는 연서가 있다니, 가슴이 마구 뛰어요^^
제 페이퍼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580089 보시삼..흐흐

로쟈 2006-01-12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귀가길에 올린 글이어서 마무리를 못 지었었는데, 마저 보충했습니다. 김추자를 좋아하시는군요!^^
 

  

 

 

 

지난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미처 읽기도 전에 2005년의 책 가운데 한권으로 꼽기도 했으니까 나로선 이 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기대를 부여한 것이 된다. 물론 아주 안 읽은 건 아니어서 (한국어판 서문을 비록하여) 저자의 서문 정도는 읽었고,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란 서론은 내 기억에 <윤리21>(사회평론, 2001)에서도 읽은 바 있다(정확히 겹치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윤리21>은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그러니 생짜로 호언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것.

지난 며칠간 나는 책의 제1부 '칸트'를 영역본과 함께 거의 다 읽었는데(2부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역시나 고진은 기대만큼의 힘, 비평의 힘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그의 비평이 좀더 긴 분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트랜스크리틱>은 그런 바람도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칸트에 관한 내용만 거의 200쪽이 되니까. 이런 것이 내가 갖는 만족감인 반면에 한편으론 책의 교정상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미 일부에서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인명의 오기에서부터 내용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국역본은 얼마간 교정되어야 할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당분간 짬짬이 고진의 칸트 읽기를 따라가면서 그런 내용들까지 지적하고자 한다. 분량상 몇 차례 나뉘어 진행될 것이다.

 

 

 

 

서론에 해당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를 제쳐놓으면 제1부의 제1장은 '칸트적 전회(The Kantian Turn)'이다. 칸트를 기점으로 사고의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 '전회'는 "당시까지의 형이상학이, 주관이 외적 대상을 '모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주관이 외계에 '투입'한 형식에 의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식으로 역전된 것을 의미한다."(65쪽) 요컨대, 모사론(모방론) 대 구성론인 것. 이걸 칸트 자신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는데, 고진이 가장 먼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지구(주관) 중심의 사고를 부정한 코페르니쿠스와 다소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주관적' 구성주의가 어떻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하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서 고진은 단번에 '물자체'(와/혹은 '초월적 대상')에 대한 칸트식 사고에 그러한 전회(=혁명성)이 놓여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진에 따르면, 칸트가 주관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그래서 칸트가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관성 철학의 시조로서 '잘못' 간주되었지만) 실상 칸트는 그러한 '소박한' 관념론을 부정한다. 이에 따라 고진은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자체의 의미를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토머스 쿤에 따르면(<과학혁명의 구조>가 아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의 인용이지만 후자는 아직 국역돼 있지 않다), 실상 자신이 죽은 해에 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조차도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따르고 있다. 다만, 당시까지의 천동설에 따라다니는 천체 회전운동에서 보이는 어긋남(불일치)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으로 보면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동설인가 천동설인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을,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과는 별도로 어떤 관계 구조의 항으로 파악한 일이다."(68쪽)

마찬가지로 칸트에게서도 중요한 것은 경험론(감각)이나 합리론(사유)이냐가 아니었다. 칸트가 도입한 감성의 형식이나 오성의 범주는 '초월론적인 구조'이며(이 점을 고진이 내내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을 어떤 관계 안의 항으로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이유에서 고진은 토머스 쿤이 "프로이트 자신은, 지구는 단순한 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그의 발견의 병행적인 효과를 강조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교정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획기적인 것은 '무의식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제어한다'는 생각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꿈 판단>(*<꿈의 해석>이 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역본은 정말 <꿈 판단>인 것인지?)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어긋남을 초래하는 것을 언어적인 형식에서 보려고 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무의식의 '초월론적인' 구조가 발견되었다"(69쪽)

 

 

 

 

칸트나 프로이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갖는 의미에 대한 토마스 쿤의 오해, 혹은 부족한 이해는 사실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통념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념적인 칸트상에 문제가 있으며 고진은 일차적으로 그걸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상식/통념은 "칸트가 말하는 형식이나 범주가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에 기초한다는 오해이다." 사실, 칸트 철학이 '뉴턴 역학의 철학적 해명'이라는 건 대부분의 철학사나 철학 개론서들에서 반복하고 있는 통념이다. 한데, 고진은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칸트가 감성의 '형식'을 생각한 것은 오히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적 칸트 대 비유클리드적 칸트?(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어진다.)

"칸트는 항상 주관성의 철학을 연 사람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칸트가 한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형이상학을 그 범주를 넘어선 '월권'행위로 보는 것이었다.(...) 칸트에게서 감성, 오성, 이성 등은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 통각(주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이게 하는 작용으로 존재한다. 초월론적이라는 것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초월론적(하이데거)이다.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정신분석적 또는 구조주의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주관성 철학으로 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 '물자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전회하는 것이다."(72-3쪽)

 

 

 

 

그렇다면 '물자체' 무엇인가? 이 점에서 내가 보기에 고진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그는 '물자체'를 윤리적인 문제, 즉 '타자'의 문제로 본다: "'물자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지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의 '전회'가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칸트 이후 호언장담해온 그 어떤 사상적 전회보다도 근원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칸트의 '물자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식 주관적인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동설'이며, 그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값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고진이 자세히 드러내는 바이지만, 그러한 전회의 비밀을 고진은 <실천이상비판>이나 <판단력비판>에서 찾지 않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찾는다(이를 테면,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 비밀이란 '타자'의 발견과 그와 병행적인 윤리학적 문제의 제기에 놓여지며, 그것을 흔히 인식론에 관한 저작으로 읽히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해해내는 것이 가라타니 고진의 득의의 전략이다(요컨대, <순수이성비판>을 윤리학 책으로 읽는 것이다).

이른바 <순수이성비판> 다시 읽기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고진의 '비평가'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비평가'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만드는 이들을 가리키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틀렸습니다. 공부하세욧!"

06. 01. 09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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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09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가타리니 고진에 함 도전해 볼까요?

딸기 2006-01-1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칸트를 몰라 고진에 고전;;했는데, 로쟈님의 '진행중'인 글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릴케 현상 2006-02-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을 꿈의 분석이라고 번역한 사람도 있던데 상관없을까요??

로쟈 2006-02-0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의 해석>이라고 나와 있는 책을 굳이 '분석'이라고 할 건 없지 않을까요?(<꿈의 분석>이란 책을 직접 쓰면 되겠죠.) 일역본은 <꿈 판단>이라고 하던데, 일어의 '판단'은 우리말과 용례가 많이 다릅니다. 역자들이 주의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2006년 새해의 목표로 세운 것 중 하나는 매주 꾸준히 시를 한두 편씩 읽는 것이다(연말에 책 한권 분량을 묶는 게 멋쩍지 않은 한해를 보내기 위한 한 가지 계획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주에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시편'(1편)과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칠레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1904-1973)의 초기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이다.

 

재작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이를 기념한 평전이 출간됐었고, 그게 작년에 우리에게도 번역/소개된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이다. 이왕이면 이전에 소개됐던 네루다의 회고록 <추억>(녹두, 1994)도 재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나는 본 일이 없"다고. 물론 우리 번역본도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또 연말에는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알레스뮤직)도 출시되어 막판 분위기를 띄웠다. 경향신문의 소개 기사에 따르면,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남긴 최고의 걸작 ‘모두의 노래’.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 13편에 웅장하고 애수 넘치는 선율을 입힌 오라토리오 ‘모두의 노래’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예술’과 ‘혁명’이라는 두 깃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거인들이 조우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테오도라키스는 1973년에 망명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악을 작곡했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해 환호를 받았다. 지금 우리가 듣는 ‘모두의 노래’는 초연 당시의 음악을 다시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그럼 (내겐 생소한) 테오도라키스는 누구인가? "국내 음악팬들은 아그네사 발차의 음반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들’로 테오도라키스의 선율과 친해졌다. 이 음반에 담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멜로디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그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는 테오도라키스 음악에서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는 민중가곡 1,000여곡, 교향곡 5곡, 발레음악 2곡, 오라토리오 2곡, 오페라 4곡 외에도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해낸 그리스의 음악적 ‘국보’(國寶)다. 이 음반은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하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트로스 판디스가 성야곱합창단과 호흡을 맞춘 실황이다. 웅장한 서정미. 특히 마리아 파란두리의 영성(靈性) 넘치는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 든다. 70여쪽에 달하는 해설지에 네루다의 서사시 ‘모두의 노래’가 국내 최초로 번역돼 실려 있다."

 

<모두의 노래>가 번역돼 실려 있다는 얘기에,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 평저도 끼워준다는 얘기에 솔깃하여 나는 이 음반(과 책)을 올해의 첫 구입품으로 골랐다. 그런 만큼 스무 살의 청년 네루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새해에 읽은 첫번째 시로 고른 것이 억지스럽거나 근거없는 것은 아니겠다. 네루다의 시집에는 '사랑의 시' 20편과 '절망의 노래' 1편, 도합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일단 먼저 읽을 것은 첫번째 사랑의 시(Poema 1)이다(이 첫번째 시의 영역본들은 대개 첫 구절인 '한 여자의 육체'란 제목을 달고 있다).(*이후에 30분 정도 쓴 분량을 날려먹었다. 자주 '등록'을 해도 왜 이 모양인지! 다시 쓸 기운/시간이 없는 까닭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20살의 청년시인 네루다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시작은 아주 '관능적'이다(아주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그가 '에로스의 시인'이고 '디오니소스의 시인'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 이 시들을 쓸 때의 네루다의 모습이 평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가운데 사진이다. 맨 왼쪽 사진이 그가 3살 때,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사춘기인 16살 때의 모습이다. 오른 편의 사진들은 장년과 노년의 네루다를 보여준다(노년의 네루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필립 느와레가 연기했던 그 네루다이다). 

 

 

 

 

 

 

 

 

 

<사랑의 시>는 (적어도 책자 형태로 출간된 걸 기준으로 한다면) 내가 알기에 3종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정현종 시인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2007)이다. 하지만 네루다 시선집 형태의 이 중역본 시집에는 <사랑의 시> 4편만이 다른 시들과 함께 번역돼 있다('정현종과 네루다'에 대해서 따로 페이퍼를 쓸 계획이다. 그는 2004년에도 <100편의 사랑의 소네트>(문학동네)를 번역/출간한 바 있다. 탄생 100주년인가를 기념해서 칠레정부로부터 전세계 100명의 시인에게 주어진 네루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고. 차후에 정현종 연구자들이 논문을 쓴다면 가장 자주 들먹이게 될 이름이 아마도 바슐라르와 네루다가 될 것이다).

 

두번째 번역은 영역본이 아닌 스페인어본을 직역한 것으로 추원훈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청하, 1992)가 있다. 절판된 책이라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시집. 원시집의 시 21편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은 김남주 시인의 옥중 번역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푸른숲, 1995)에 포함돼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 특이하게도 김 시인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뺀 스무 편의 말 그대로 '사랑의 시'들만을 옮겨 놓았다.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의 번역은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본이다(시 번역에서 원어역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번역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특히나).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스페인어 원문과 영역, 그리고 3종의 우리말 번역을 아래에서 나열해놓겠다.

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te pareces al mundo en tu actitud de entrega.
Mi cuerpo de labriego salvaje te socava
y hace saltar el hijo del fondo de la tierra.

 

Fui solo como un túnel. De mí huían los pájaros
y en mí la noche entraba su invasión poderosa.
Para sobrevivirme te forjé como un arma,
como una flecha en mi arco, como una piedra en mi honda.

 

Pero cae la hora de la venganza, y te amo.
Cuerpo de piel, de musgo, de leche ávida y firme.
Ah los vasos del pecho! Ah los ojos de ausencia!
Ah las rosas del pubis! Ah tu voz lenta y triste!

Cuerpo de mujer mía, persistirá en tu gracia.
Mi sed, mi ansia sin limite, mi camino indeciso!
Oscuros cauces donde la sed eterna sigue,
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you look like a world, lying in surrender.

My rough peasant's body digs into you

and makes the son leap from the depth of the earth.

I was alone like a tunnel. The birds fled from me,

and night swamped me with its crushing invasion.

To survive myself I forged you like a weapon,

like an arrow in my bow, a stone in my sling.

But the hour of vengeance falls, and a love you.

Body of skin, of moss, of eager and firm milk.

Oh the goblets of the breast! Oh the eyes of absence!

Oh the pink roses of the pubis! Oh your voice, slow and sad!

Body of my woman, I will persist in your grace.

My thirst, my boundless desire, my shifting road!

Dark River-beds where the eternal thirst flow

sand weariness follows, and the infinite ache.

***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정현종, 1989)

***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빼어 닮았구나.

우악스런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엄청난 침략으로 내게 쳐들어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리었다 무기처럼,

내 활에 재어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投石機)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의 사발들! 아 넋나간 눈동자!

아 음부(陰部)의 장미들! 아 너의 느릿한 슬픈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번민, 막막한 나의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이 계속되는 어두운 수로(水路)들,

끊이지 않는 피로, 그리고 한없는 고통.(추원훈, 1992)

***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

몸을 맡기는 네 모습은 이 세계를 닮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의 육체가 너를 파헤쳐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세차게 솟아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가버리고

침략처럼 밤은 그 막강한 힘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단련시켰다 무기처럼

화살처럼 투석기의 돌처럼


이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

오 가슴의 두 컵이여! 오 딴전을 부리고 있는 두 눈이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목소리여!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

이 목마름, 이 끝없는 욕망, 이 정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밑 모를 고통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여(김남주, 1995)

 

***

 

그럼, 이제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시는 전체 4연 16행으로 이루어져 있고(각 연의 2, 4행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행이다), 의미상으로도 네 개의 마디로 돼 있다. 시제상으론 '현재-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1연과 3연이 현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면, 중간에 끼인 2연은 일종의 플래시백이다. 그럼 1연의 내용은 무엇인가? 청년 네루다는 비유적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 

 

이 육체에 대한 묘사를 세 번역본은 각각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로 옮겼는데(영역은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이 대목의 경우 나로선 정현종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에선 '여자' 일반이 아니라 내 앞에 누워있는 '한 여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여자의 육체'는 여기서 지형학적인 비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것은 3-4행의 비유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1연의 묘사를 따라가자면, 흰 언덕들(아마도 가슴 혹은 엉덩이)과 흰 넓적다리(허벅지)를 가진 한 여자가 지금 마치 '세계(=대지)'처럼 누워있고('세계로서의 한 여자'라는 비유는 흔한 듯해보이지만 대담한 것이다), 그 '대지'를 이제 파고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싹튀우게 하려는 '나'는 농부에 비유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정현종)보다는 '우악스런 농사꾼'(추원훈)이나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김남주)가 '나'에 대한 기술로서 보다 타당하다. 1연에서 핵심이 되는 비유는 '대지(=한 여자): 농부(=한 남자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3-4행의 번역으로는 추원훈의 것을 고르고 싶다. 그런 식으로 1연을 재조합해 보면 이렇게 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 흰 허벅지,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이 세계처럼 벌렁 눕는구나.

우악스런 농부인 내 몸뚱이는 너를 파들어가고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원시의 1행은 "꾸에르뽀 데 무헤르, 블랑까스 꼴리나스, 무슬로스 블랑꼬스(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정도로 읽히는 듯한데, 여기서 주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아스 -아스, -오스 -오스'라는 유사운의 반복이다. 시번역에서 메시지의 전달 못지 않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리듬의 전달이다(사진은 'blancas colinas'나 'muslos blancos'로 검색된 이미지).

 

" 여자의 육체, 덕들, 적다리"라는 정현종의 번역은 '한 - 흰 -흰'이라는 유사운의 반복과 '언/넓'에서 '어'운의 반복 등으로 리듬감을 살리고 있지만, '언덕들'의 조사 '들'이 '산문적'이고(이에 따르자면 '넓적다리'도 '넓적다리들'이 돼야 한다), '넓적다리'는 육감적인 시어이지만 리듬상 다소 튄다.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라고 옮긴 추원훈의 번역에서는 '블랑꼬스'라는 형용사를 '하얀'이라고 반복해줌으로써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지만, '구릉'과 '허벅지' 간의 리듬상의 연관성이 좀 약하다.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라고 한 김남주의 번역이 이 1행에 한정하자면 리듬을 가장 잘 살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얀'의 반복 외에도 '언덕' '허벅'에 쓰인 유사운들이 리듬을 만들어내기 대문이다. 때문에 '여자의 육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블랑꼬스'의 역어로 '하얀'과 '흰'은 선택적이라고 보지만, 나는 좀더 무표적인(unmarked) '흰'을 골랐다.     

 

 

이제 2연. 2연은 이미 지적한 대로 플래시백의 과거시제이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에 대한 되새김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홀로였다/고독했다"라는 것. 나는 '터널처럼'이란 비유가 스페인어 시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독창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미상으론 '텅 비어있었다' 정도의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새들이 나한테서 날아갔다"는 표현에 이어지는 것은 '밤의 엄습'이다. 논리적으론 '밤의 엄습'을 피해서 새들이 날아간 것이 되는데, '밤'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간으로 짐작에 혼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막강한 힘으로 나를 엄습하는 밤"이란 이미지를 낳은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엄습을 맞이하여 '내'가 필사적으로 하던 일은 '너'를 무기처럼 벼리는 것이었다. 이때 2인칭 대명사 '너'는 다른 연들의 '너'와는 지시대상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1, 3, 4연에서의 '너'는 현재에 비로소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과거에 '너'를 벼렸다는 건 '너'가 비유가 아니라면 논리상 모순된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이란 이어지는 비유에 적합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너'를 '나'의 '남성(男性)'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현종의 번역을 근간으로 해서 2연을 정리해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으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무기처럼 벼렸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요는 내가 벼르고 별렀다는 얘기. 그리고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3연의 내용은 관능적인 성애의 묘사와 영탄적인 환희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te amo)'란 표현은 여기서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며 현재진행형인 사랑과 애무를 뜻한다. 국역본에서 2행의 번역이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정현종)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추원훈)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김남주)로 각기 다른데, (1)피부 (2) 이끼 (3)갈증나고 단단한 젖이 모두 '육체'에 걸리는 걸로 보인다(정현종의 번역에서는 '갈증나는 밀크'를 따로 취급했다. 밀크?).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대상이 '한 여자의 육체'인 걸 고려하면, '피부' '이끼'(이건 '대지'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단단한 젖'이 무얼 지시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이어서 영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슴과 눈동자, 둔덕과 목소리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연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된다(나는 2행을 좀 의역했다). 이 3연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번역을 가장 많이 참조했다(정현종 시인의 '에로티시즘'은 그의 시구를 빌면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이다. 그는 도취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건하다. 비록 네루다의 시를 열애한다고 해도 그는 '육체파' 시인은 아닌 것이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 육체의 피부, 이끼, 그리고 갈증이 난 단단한 젖. 

오 젖가슴의 두 사발이여! 오 넋나간 눈동자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너의 목소리여!

 

이제 마무리인 4연이다. 이제 1연의 '한 여자의 육체'는 '내 여자의 육체'가 되었다(김남주 번역에서는 이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1-3연까지 서술된 것은 그러한 의미전이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번역번들로는 가장 의미파악이 어려운 게 이 4연이다. 당장 1행만 하더라도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정현종),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추원훈),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김남주)라는 세 번역은 제각각이어서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게 돼 있다. 

 

네루다의 이 사랑의 시편들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 레네 데 코스타의 해설은 추원훈 번역본에 발췌되어 실려 있다('The Poetry of Pablo Neruda', 하바드대출판부, 1979, 제1장). (번역돼 있지는 않지만) 꼬스따의 책 서론에 따르면, 이 연작 시집은 당초 1923년에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너무 '열정적인' 내용이 포함된 탓에 출판사측으로부터 출간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청년 네루다는 여러 문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페드로 프라도란 중견 시인이 '보증'을 서 준 덕분에 1924년 출간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이 밀리언셀러 시집의 대성공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은 네루다는 23세 때, 젊은 시인들에게 외교관의 자격을 부여하던 남미식 전통에 따라 극동 주재 영사로 임명 받는다. 해서 이후 5년 동안 그는 미얀마, 타이,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았다고(하지만, 아주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기였다고).

 

맨마지막 시행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내가 읽은 한 국내 논문에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정서는 우울(멜랑콜리아)이라고 한다. 네루다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시집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청춘기의 열정과 칠레 남부의 황폐한 자연이 혼합된 목가적 시들이 망라된 '고통의 책'"이었다고도 하고. 그 고통, 우울은 어쩌면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갖게 되는 필연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다(곽지균 감독의 영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의 대사. 강수연: "육체는 슬퍼요." 김영철: "슬픈 건 섹스지").

 

 

"육체는 슬퍼라,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라고 말라르메는 노래했지만, 책으로도 모자라고 정사(情事)로도 모자란 우리의 '무량의 슬픔'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인지? 네루다의 나머지 시편들에서는 알아볼 수 있을까?.. 

 

06. 01. 02 - 04.

 

 

 

 

 

 

 

 

P.S. 네루다 평전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네루다를 처음으로 만나본 한국 작가는 상허 이태준이며(1951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문학좌담회), 본격적인 번역소개는 1969년 김수영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직후 네루다가 활발하게 소개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남주 시인으로 그의 네루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보다 한 해 빠르다. 나는 1995년판 <은박지에 새긴 사랑>에서 인용하였지만, 이미 1988년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가 출간되었던 것. 하이네와 브레히트, 네루다 등의 시 번역서인데, 푸른숲에서 다시 나온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95)와는 편제가 다르다. 해서, 본문에서의 시 인용은 김남주-정현종-추원훈 순이어야 했다. '사랑의 시'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참고로, 네루다 시에서의 '사랑'의 테마를 분석하고 있는 한 논문에서의 번역을 여기에 옮겨둔다. 원어 번역의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기에 비교해봄 직해서이다. 1, 3, 4연만의 번역이긴 하지만.

 

여자의 몸, 하얀 언덕, 흰 허벅지,

그대는 몸을 맡기는 행위에서 대지를 닮았구나.

거치른 농부, 내 육신이 그대를 파헤치면,

땅의 밑바닥으로부터 아들이 뛰쳐나오니까.

(...)

그러나 복수의 시간이 덮치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이끼의 피부에다 탐욕스런 탄탄한 가슴을 가진 몸.

아아, 우유의 잔들이여! 아아, 딴전부리는 눈들이여!

아아, 내밀한 곳의 장미여! 아아, 느리되 구슬픈 그대의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그대의 매력을 지탱하리.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갈망, 내 정처없는 길이여!

영원한 목마름이 이어지고 피곤이 계속되고,

또 무한의 고통이 여울져가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일단 스페인어 'gracia'에 해당하는 영어 'grace'를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은 '경이로움'과 '매력'으로 각각 옮겼고(흔히는 '우아함'이나 '세련미'를 지칭하는 단어), 추원훈은 '상냥함'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페인어 동사 'persistirá', 혹은 영어의 'persist (in)'를 두 시인은 '살아가리', '사로잡히리라'라고 옮긴 데 반해서 추원훈은 '고집하리라'로 옮겼다. '보기 나름'이 아니라면 어느 한 편은 오역인 셈이 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내 여자의 육체'와 등가어로 제시되고 있는 2행의 내용이다. 이 2행의 경우는 세 번역본이 대동소이한데, 대략 "나의 갈증, 나의 끝없는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너의 상냥함'은 이러한 2행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반대로 가장 시적인 표현은 정현종의 '경이로움'이며, 나는 이에 따르도록 하겠다. 3행에서 '검은 하상(河床)'이 받는 것은 문맥상 앞에 나온 '나의 길'이겠다. 그러니까 '나의 길'이란 이러이러한 하상이다, 라는 게 3-4행의 내용. 이 '검은 강바닥'에 흐르는 건 영원한 갈증과 피로, 그리고 무한한 고통(슬픔)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살아가리라.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검은 강바닥을 따라 영원한 갈증이 흘러내리고,

피로와 무량(無量)의 슬픔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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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8-10-28 12:55 
    그린비의 네루다에 관한 세상의 모든 까칠이들에게 추천합니다! - 파블로 네루다를 보고 다시금 그의 시집을 꺼내 보았다. 단지 네루다를 꺼낸것이 아니라 고 김남주 시인을 보았다. 88년 김남주 시인의 번역으로 에서 네루다를 처음 알게되었다.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3인의 번역시집이다. 김시인이 투옥 중에 번역한 것으로 많은 곳에 나와있다. 하지만 투옥되기 전에 번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시기로 보면 78, 79년 즈음..
 
 
이리스 2006-01-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를 처음 만난분이 이태준 선생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세가지 버전의 번역, 잘 보았습니다. ^^; 추천 누르고 갑니다.

로쟈 2006-01-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길죠?^^

김도마 2006-02-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투한번더~~로쟈님지금처럼좋은글많이올려주세요~~
몰래몰래읽고가는거..죄송해서요~

섬나무 2007-10-2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고에 묵은 물건들 뒤지는 중입니다. 썩지 않아서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군요.ㅎㅎ
 

 

 

 

 

 

 

 

필요 때문에 연말연초 며칠간을 정현종 읽기에 할애하고 있다(덕분에 정현종에 관한 페이퍼를 몇 개 쓸지 모르겠다). 주로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출간되었던 <정현종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1999)와 작년 그의 정년을 맞아 출간된 <영원한 시작>(민음사, 2005)에 실린 글들과 함께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91)에 실린 김현의 글들을 읽는 건데, 물론 그의 시집들을 읽는 것도 포함해서이다(강의의 가장 좋은 점은 책읽기에 대한 '강제적 의지'를 수반한다는 데 있다. 게으른 천성을 알기 때문에 나는 종종 자발적 등떠밀리기에 나서는데, 그걸 '적극적 수동성'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수동적 적극성'이라 불어야 하나?).

 

어쩌다 보니 정현종의 시들을 많이 읽게 되었지만, 나는 역시나 1999년에 출간된 2권짜리 <정현종 시전집>은 안 갖고 있다. 그건 1972년에 나온 첫시집 <사물의 꿈>(1972)를 제외하고는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시집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현역'인 그의 시작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전집'이 갖는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시는 우리에게 오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시 속에서 살고 또 시는 우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공기나 햇빛 또는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지만 나무는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그 속에서 수많은 작은 태(胎)와 씨앗을 품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태이듯 시의 공간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태이며 씨앗입니다. 특히 시의 언어는 다른 종류의 언어에 비해 이러한 태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감동한다는 것, 시를 읽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팽창한다는 것은(아이를 밴 배에 대한 연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듯이) 시적 언어의 공간이 우리를 뱄다는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 다름아닙니다. 시는 새로운 존재의 모태입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더, 사람의 새로운 탄생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요구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살 만한 과정이며 살 만한 자리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와 우리의 접촉양상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를 숨쉰다고. 우리는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쉽니다. 시를 숨쉰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그 말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말입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마치 무용가가 높이 뛰어올라 용약(踊躍)의 정점에 이를 때 중력으로부터 해방되듯이 시는 우리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정신으로 하여금 용약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무거움에서 해방합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해방이나 열림의 순간을 체험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자유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이란 또 활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사실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은유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죽음을 봅니다. 실제 죽음은 물론 산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도 미만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할 때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 시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또한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쉰다고 말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연유에서이며 그래서 시를 산다는 말도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숲이 산소의 원천이듯이, 시의 숨의 원천, 따라서 우리의 숨의 원천이 꿈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꿈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써왔습니다. 약 10년전 나는 <사물의 꿈>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에세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나의 믿음은 사물이 꿈이 곧 나의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시적 대상들, 내가 노래하는 것들은 나를 통해서 그들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유추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만,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나무일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시를 가리켜 예술과 역사, 인간과 자연, 성(聖)과 속(俗)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낳기 시작합니다.(...) 꿈은 그러니까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에 있는 어떤 공간이며, 시가 꿈의 소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연결하는 운동이며 접합의 현장입니다.


결핍은 괴로움이고 충족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가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인데, 이 결핍은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하며, 여기에 노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가난하더라도 꿈은 가난한 법이 없으며 그것이 노래인 한 그것은 슬픔의 꿈을 충족시키며 기쁨의 아늑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창조행위가 그렇겠습니다만,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 괴로움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할 때 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예컨대 우리가 자유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그리워하고 사랑과 정의를 그리워할 때 그리고 시인이 그 그리움을 노래할 때 시인 자신이 다름아니라 자유요 사랑이요 평화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시는 모순과 갈등이 부딪쳐서 화해하는 현장이며 이것과 저것,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부딪치면 아프고 화해하면 기쁩니다. 시인의 고통은 ‘이상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과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의 꿈의 실현을 유예하면서 미래화하지만 지복(至福)의 순간을 허락하는 시는 우리의 현재를 탈환하고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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