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온 지 한달쯤 됐다.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을 읽으면서부터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동의나 공감의 여부와 무관하게 현대 영화나 문학 전공자라면 '들뢰즈'란 이름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푸코의 예언대로, 20세기가 들뢰즈의 세기로 기록될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의 '문턱'을 이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누구나 들뢰지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한때 들뢰즈에 빠져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왜? 더 멀리 나가기 위해서. 더 멀리 도주하기 위해서.

 

 

 

 

그런 필요성이라면 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실제적으로 들뢰즈에 빠져보는 건 쉽지 않다. 즉, 들뢰즈를 읽어나간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건 당신이 <천 개의 고원>(새물결)이나 <차이와 반복>(민음사) 어디를 들춰봐도 대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차이와 반복>의 옮긴이 해제에서 김상환 교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처음 여는 독자는 첫 대목부터 어떤 주름운동 속에 놓여 있는 재빠른 문장들 앞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애매한 개념들이 혼잡하게 난무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기 십상이다. 적어도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는 그렇다. 남들이 어렵다고 내팽개친 철학 책들을 별 불만 없이 읽곤 했던 나로서도 들뢰즈의 이 저서 앞에서 느낀 처음의 당혹감은 예외적이었다. 두세 번 반복해서 읽은 다음에야 겨우 번역할 용기를 얻을 정도였으니까."(685쪽)

프랑스 철학 전공의 엘리트 독자마저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은 다음에야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는 책을 일반 독자들이 어찌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으랴(더구나 번역서로)? 철학에는 아마추어 독자인 나도 어제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과 '사유와 이미지' 장에 나오는 한 대목, '어리석음의 문제'를 복사해서 귀가길 전철 안에서 읽었는데, '머리말'은 대충 읽을 수 있었지만, '어리석음의 문제'는 새삼 나의 둔함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해당 대목을 복사한바(책들이 무겁기 때문에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가 없다) 이따 귀가길에 다시 도전해볼 작정이다(두세 번까지는 읽어줘야 한다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두세 번 읽는 일이 효과를 볼 리는 만무하다. 들뢰즈로 가는 길, 혹은 들뢰즈를 읽는 방법에는 여럿이 있겠지만(들뢰즈 또한 리좀적 다양체일 테니까), 내가 가장 권하고 싶은 건 흄의 경험론을 통하는 길이다(무턱대고 <차이와 반복>에 달려드는 일은 아무런 훈련 없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이 나로선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가장 큰 성과이다. 책의 역자가 백미라고 권한 건 '감각'을 다룬 6장이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2장 '실험'이었으며, 나머지 장들은 모두 그 변주로 이해되었다('실험'은 'experimentation'의 역어이며, 언제나 '경험'과 대체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식으로 '한번 해보는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한번 맛 좀 보지 그래?"라거나 "그런 게 다 경험이지!"라고 말할 때의 '경험'이 '실험'이기도 한 것).

알다시피 들뢰즈의 첫번째 책은 1953년 그가 26세의 나이에 펴낸 <경험론과 주체성>이다. 지금 생각에 희한한 일이지만, 국내의 많은 들뢰지언들이 유독 얇은 분량의 이 책만을 아직까지의 번역 목록에서 제쳐놓은 이유를 모르겠다(<들뢰즈 커넥션>을 읽으면서 나는 부랴부랴 영역본을 입수했다). 라이크만에 따르면, "들뢰즈는, 경험론의 비밀은 철학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지, 지식이나 과학을 보는 단순한 철학적 입장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비밀은 바로 흄에서 드러났다. 흄과 함께, 경험론은 새로운 역량들을, 심지어 새로운 논리를 발견했다."(43쪽) 나는 거기에 이후에 펼쳐지게 될 들뢰즈 철학의 모든 포텐셜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라이크만의 교훈을 되새기자면, "그대 들뢰즈를 읽으려는가, 흄을 들고 가는 걸 잊지 말기를!"이다. 참고로, 흄의 책으론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예전에 흔히 <인성론>이라고 불렸던 책)을 비롯해서 비교적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으며 국내의 연구 수준 또한 낮지 않다. 참고할 만한 책들을 약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김효명 교수의 <영국 경험론>(아카넷, 2001)은 영국 경험론 전반에 대한 모범적인 개관이며, 최희봉 교수의 <흄>(이룸, 2004)은 흄 철학에 대한 평이한 입문서이다.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 <흄의 자연주의와 자아>(울산대출판부, 1999) 등은 '전문서' 범주에 속한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 읽었던 건 에이어 경의 <흄의 철학>(서광사, 1989)이라는 얇은 책이었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당시 흄에 대한 관심은 칸트를 읽기 위한 예비적인 성격의 것이었다(물론 흄은 문학적 필치가 뛰어난 철학자로 분류되기에 따로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른바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는 이가 흄 아닌가? 내 생각에 그런 흄의 파워(역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철학자가 20대의 젊은 들뢰즈가 아니었나 싶다(1950년대 들뢰즈의 흄 강의가 소르본느의 전설이었다는 것은 '들뢰즈의 적' 바디우 또한 <존재의 함성>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이다. 바디우 자신은 듣지 않았다지만).  

 

 

 

 

아쉬운 것은 들뢰즈의 가장 '평이한' 책이기도 한 <경험론과 주체성>에 대해서 국내의 들뢰지언들이나 흄 전공자들 모두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자신의 역량이 다 펼쳐지기 이전의 '배아적 들뢰즈'를 보여주고 있기에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안티 오이디푸스>나 <천 개의 고원>으로 내모는 것은 조금 '잔인해' 보인다(들뢰즈? 거기서 좀 굴러보면 알게 될 거야!). 들뢰즈 '전문가'인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에서도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을 다루면서 흄 철학과의 관련이 아닌 '들뢰즈 인식론의 칸트적 배경'을 해명하고 있는데, 평탄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길을 에둘러 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물론 저자에게 칸트는 '쉬운' 철학자일 수 있지만, 일반 독자에게도 과연 칸트가 흄보다 만만하며 읽기 편한 철학자인지? 고명하신 <순수이성비판>을 과연 몇 명이나 읽었겠는가?).  

하지만, 정작 들뢰즈-라이크만의 흄은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한) '칸트 이전의 흄'이 아니라 (비판철학을 넘어선) '칸트 이후의 흄'이다: "이처럼, 흄은 칸트와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들'에 대한 탐구의 막다른 골목 이후에 올 것이 무엇인지를 예견하고 있었다. 흄은 공통감의 경계들 또는 틀들을 교차시키고 공통감에 앞서는 관계들과 연결접속들을 만들어내는 개념적 실험가라는 유형을 예견했던 것이다."(25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개념적 실험가'는 'conceptual experimenter'의 번역인데, '개념의 실험가'로 이해하면 되겠다. '개념의 실험가'이자 '발명가'가 바로 흄-들뢰즈가 말하는 '철학자'이며, 이것은 이성의 법정을 주관하는 '판사(judge)'로서의 철학자 형상과 대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판단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For to think is to experiment and not, in the first place, to judge.)"(23쪽). 

요컨대, 철학에는 초월론과 경험론의 두 가지 계보가 있으며, 흄-들뢰즈가 권유하는 것은 '경험론으로의 개종', '경험론의 개종(empiricist conversion)'이다. 들뢰즈는 흄에게서 그가 발견한 경험론(이후에 자신의 경험론을 '초월적 경험론'이라고 명명)을 그가 애호했던 모든 시인, 작가, 철학자, 화가, 영화감독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발견한다. 경험론에서만 '사건의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오직 영국인과 스토아학파만이 '사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노라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들뢰즈를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구별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경험론'이었다: "동시에 들뢰즈의 '경험론'은 들뢰즈를 프랑스 동시에 학자들과 구별시켜 놓았다. 푸코에 따르면, 경험론은 들뢰즈가 현상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48쪽).

들뢰즈와 동시대 철학자들은 전후 3H(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던 이들로, (제도권 밖의)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제도권 안의) 메를로-퐁티, 리쾨르, 레비나스, 데리다 할 것 없이 모두 현상학자이거나 현상학에서 출발했던 철학자들이다. 그러한 풍경에서 비껴나 있었던 이로는 영미철학뿐 아니라 영미문학에 대한 예찬자이기도 했던 들뢰즈가 유일하다 싶을 정도인바, 그의 철학적 조국은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리스나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다고 해야 온당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블루오션'의 철학자였던 것이다.

05. 10. 11.

P.S. 이 글은  '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짤막한(!) 글을 쓰기 위한 '노트'의 일부분이다. 이런 종류의 토막글은 이후에 짬짬이 몇 차례 더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들뢰즈 커넥션>을 근거로 해서 들뢰즈에게서 흄 철학과 경험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사실 <들뢰즈 커넥션> 자체도, 내 경험에 의거하자면, 2장을 가장 먼저 읽는 게 효과적이다(번역상 미덥지 않은 대목들은 차후에 다시 지적하겠다). 그리고 1장을 읽는 식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읽어야 할 것은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에서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장이다(거기서도 '경험론'이란 절부터 읽어보시길). 그럼, 들뢰즈 철학의 윤곽이 잡힐 것이다.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은 제값을 하는 책이지만, 들뢰즈의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영화(론)'부터 소개하는 것은 불만스럽다(초보자에겐 아무리 그래도 '순서'가 중요한 법이다). 여하튼 그녀의 책에서 핵심적인 장을 셋만 고르라고 한다면, '사유의 역량들(역능들)', '초월적 경험론', '생성'을 고르고 싶다(바쁘신 분들은 참조하시길). 그리고, 이어서,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에 실린 보론 '경험론과 철학'을 읽어보시길. 내 경험상 들뢰즈에 접근하는 가장 평탄하면서도 용이한 루트이다. 다음 글에서는 그런 내용들에 대해서 좀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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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5-10-1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디즘'을 읽고도 '천개의 고원'을 다 읽지 못하고 중도에 쉬고 있습니다. 로쟈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서 흄 등으로 내공을 쌓은 후 내년 쯤 다시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정우님의 베르그송 인터넷 강의 수강하면서 사서는 첫 페이지에 기겁을 하고 지금껏 책장에 꽃혀 있는 '영화 1'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텐데... 가야 할 길이 참으로 멀군요.

yoonta 2005-10-1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콜브룩의 책은 분명 들뢰즈 입문서임에도...어떻게 보면 제일 난해하다 할수있는 씨네마를 앞에다 배치했으니..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이책의 영화편을 읽다가 집어 던졌을지도..^^

저에겐 초기사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콜브룩이나 라이크만의 책보다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라는 마이클하트의 책이 훨씬 들뢰즈를 쉽게 이해할수있게 만든 책이더군요...<경험론과 주체성>과 관련된 들뢰즈의 작업은 "총체를 가로질러 특정한 한 단편만 취했다"고 저자 스스로도 고백했다시피 스킵하긴 했지만 말이죠..베르그송으로부터 니체..스피노자로 나아가는 사상의 발전과정은 잘 서술한 책인 것 같더라고요..니체나 스피노자관련 해석은 좀 강한 해석이라는 견해도 있지만..말이죠..

로쟈 2005-10-1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인간님/ 쉬엄쉬엄 즐기면서 가시길.^^ yoonta님/ 하트의 책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들뢰즈 철학의 키워드를 저는 '경험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는) 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인데요, 물론 들뢰즈로 가는 루트는 베르그송을 경유하거나, 니체를 따라가거나 스피노자를 길잡이로 삼는 등 여러 갈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짐작에 흄이 가장 평탄하며 쉬운 길입니다(독자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더불어, <니체와 철학> 등이 들뢰즈의 '초기사상'이라곤 하나 그러한 초기사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배아적 사상을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로쟈 2005-11-04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준으로 삼은 건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입니다. 그리고 제 요점은 일반독자의 '들뢰즈 독해'에 칸트가 덜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흄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칸트를 공부하셨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보시하시길...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를 읽고 있다(패튼은 <차이와 반복>의 영역자이다). '들뢰즈와 정치'는 '들뢰즈와 철학'(구체적으론 '들뢰즈의 경험론')에 이어서 이번 가을에 계획하고 있는 들뢰즈 읽기의 두번째 테마인바, 패튼의 책은 그 주제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건 책의 '서론'인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들뢰즈'를 읽기 위한 몇 가지 기본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그걸 따라가보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이 이 '메모'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들뢰즈와 정치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다. 네그리와의 한 대담에서 들뢰즈 자신이 인정한 것이지만, <안티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완전한 '정치철학서'이며, <천 개의 고원>은 '정치철학적 문제들의 목록'이다.

한편,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시종일관 <앙티외디푸스>와 <천의 고원들>이란 독자적인 역어를 사용한다(<질 들뢰즈>에서는 '안티외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란 역어들이 더러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건 물론 번역서의 모든 인용이 기존의 국역본들에 대한 참조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이기도 하다. 어려운 원서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읽어주지 않으니 소모적이면서 비생산적인 노릇이다. 들뢰즈가 염려하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시대에, 들뢰즈의 바람대로 '비커뮤니케이션(non-communication)'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는 동네가 국내 들뢰지안들의 동네가 아닌가 싶다.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는 (1)"'많은 정치'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는 클레르 파르네와 함께 쓴 책인 <대화들>의 한 장", (2)"푸코에 대한 책", (3)'통제사회들에 대한 후기'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푸코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 등이다. (1)에 해당하는 것이 <디알로그>(동문선, 2005)라고 옮겨진 책의 제4장 '정치들'이다(영역본의 장제목은 'Many Politics'). 그리고 (2)에 해당하는 것이 <푸코>(동문선, 2003)와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 두 권이다. 그리고 (3)에 해당하는 것이 <대담 1972-1990>(솔, 1993/1994) 5장에 실린 '추신: 통제사회에 대하여'란 글이다. 이 5장은 '정치'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통제와 생성'이란 제목이 붙은 네그리와의 대담 또한 들뢰즈 정치철학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대담 텍스트이다.  

 

 

 

 

1993년 초에 초판이 나온 <대담>은 내게 들뢰즈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며, 이후에 들뢰즈의,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도록 한 '죄목'을 갖고 있다. 한데, 이번에 5장에 묶인 두 편의 글을 읽으며 따져보니까 대담의 부분부분을 단편적으로 읽었을 뿐 제대로 읽은 적이 그간에 한번도 없었다(12년 동안!). 하긴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담>의 번역은 '골동품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록 1992년에 나온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와 함께 <대담>은 국내에 들뢰즈를 처음 소개한 '공로'가 인정되지만 번역서로서의 실효성은 이미 다한 것이 아닌가 싶고.(참고로 책자 형태로 나온 최초의 들뢰즈 번역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이정우 편역의 <구조주의를 넘어서>(인간사, 1990)에 실린 '리좀' 번역이다. 아마도 지금의 역자라면 재번역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겠지만). 

이미 들뢰즈의 카프카론이 <카프카>(동문선, 2001)로 재번역돼 출간된 것이 수년 전 일이다. 해서 <대담> 또한 제대로 다시 옮겨질 때가 되었다.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문헌목록'에서 서동욱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국역본 <대담>은 전체 17편의 글 중에서 12편만을 옮긴 부분역이다. 들뢰즈의 육성을 담은 입문서로서 더없이 요긴한, 그리고 훌륭한 책이므로 조만간 새롭게 완역되기를 기대한다.  

 

 

 

 

패튼이 나열한 목록들에 덧붙여져야 할 책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는데, 니콜래스 쏘번(N. Thoburn)이라는 젊은 학자의(나보다 젊다!)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가 그것이다. 표지에도 그렇고 이 책의 원제가 'Deleuzian Marxism'처럼 돼 있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 책의 원제는  <들뢰즈, 맑스, 그리고 정치(Deleuze, Marx, and politics)>(Routledge, 2003)이다.

책은 들뢰즈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유작 <맑스의 위대함(The Grandeur of Marx)>에서 실마리를 얻고 있다. 한 들뢰즈 연구자의 소개를 빌면, "쏘번의 책은, 맑스주의의 핵심 텍스트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 속에서, 들뢰즈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한 분석 속에서, 그리고 들뢰즈의 정치학과 친화성을 갖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라이스모 운동과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정치이론 및 전략들에 대한 유익한 설명 속에서 (전체로서의 삶과 그 삶을 고양시키는 탈주선의 창출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맑스주의자이자 코뮤니스트로서의) 들뢰즈의 정치적 기여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들뢰즈주의 연구가 결정적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서, 이 가을에 읽을 책이 하나 더 늘었다...

05. 10. 03.

 

 

 

 

P.S. 본문에서 들뢰지언 동네의 '비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언급했는데, 가령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은 들뢰즈의 문헌 인용시 원저와 함께 자신이 옮긴 두 권의 역서, 그리고 (<천 개의 고원> 대신에)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의 <천의 고원>을 사용한다. 소위 '전문연구자'가 원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간된 번역서도 아닌, 저작권에도 저촉되는 번역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천 개의 고원> 번역이 부분적으로 불만족스러울 수 있을지라도 인용시에 '부분수정'을 하면 된다(그렇다고 <천의 고원> 번역이 그토록 탁월한가?).

예전에 한 저널에서는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 출간에 맞추어 이 들뢰즈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면서 <천 개의 고원>이 아닌 <천의 고원>을 서평 텍스트로 삼은 적도 있었다. 혹 번역에 미비한 대목이 있다면, 그걸 지적해야 하는 것이 서평 아닌가? 스피노자-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슬픈' 일이되, 옆에서 보기에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참고로,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경험론과 철학'이란 보론이다. 책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학술적인' 안내서로서 훌륭하지만, (소수적인 책이 아니라) '다수적인' 책이다('소수문학'을 옹호/주창하는 들뢰즈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다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법이다).   

들뢰즈의 <대담>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완역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나치 수용소(Nazi camps)'를 '나치 군대'로 옮긴다거나 '자본가(capitalist)'를 '자본주의자'로 옮긴 것 등은 원문과 대조해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알 수 있다.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people'을 '대중'이라고 옮긴 것도 상식밖이다(김재인은 '민족'이라고 옮기고, 이진경은 '민중'이라고 옮겼다.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사람(들)'이라고 옮기고. 참고로 러시아어본은 '나로드' 라고 옮긴다. 가장 적합한 역어는 '나로드'의 역어이기도 한 '인민(人民)'이라고 보지만, 이게 공산주의 용어로 등록돼 있는 탓에 역어로서 불편을 야기한다. 가령, 'people to come'을 어떻게 옮기는가? 도래할 민족? 도래할 민중? 도래할 사람들?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와 정치> 역자의 '전매특허'는 '아상블라주'이다(<들뢰즈와 정치>의 첫번째 역주도 이에 관한 것이다). 'assemblage'의 역어인데, 불어에도 같은 단어가 있지만, 들뢰즈의 영역 용어로서의 'assemblage'는 불어의 'assemblage'가 아니라 'agencement'의 역어이다(<천 개의 고원>, 12쪽 참조. 이 또한 첫번째 역주이다). 그러니 제대로 번지수를 맞추려면 '아장스망'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데, 거의 대부분의 들뢰즈 연구자들이 '배치(물)'라고 옮겨쓰는 단어를 굳이 '아상블라주'라고 (이상하게) 음역해주면 독자들의 이해가 용이해지는가? 제멋으로 하는 번역이라고 쳐도 좀 희한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이런 취향만 아니라면 내 생각에 역자는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의 오역 두 가지. "그[들뢰즈]의 단언에 따르면 정치적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어떤 철학도 자본주의의 본성과 진화를 설명해야만 한다."(28쪽)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나오는 대목인데, 맥락을 모르고 읽어봐도 '설명'에의 요구는 조금 과도하지 않을까? 역자가 옮긴 것은 'take account of'이고, 그건 '고려하다' '주의하다' 정도의 뜻이다('설명하다'는 'account for'이다). 역시 같은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조건에 대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네그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극적인 약속어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야 할까?"(33쪽) '비극적인 약속어음'? 이런 튀는 번역이 오역이 아닐 수가 없다. 'tragic note'를 옮긴 것인데, 의당 '비극적 음조'라고 옮겨져야 한다. 물론 'note'에는 '약속어음'이란 뜻도 있지만, 이 경우엔 (다른 오역들이 그렇듯이) 써먹을 수 없는 '부도어음'이다...

05.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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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10-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5-10-0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헿헿... OTL

yoonta 2005-10-0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맑스주의라는 책..저도 저 책은 일단 사 두긴 했는데..갈무리에서는 왜 항상 자신들이 펴낸 책이름에서 맑스주의를 강조하는건지 모르겠더군요. 전에 나온 푸코와의 대담책도..ramarks on Marx라는 원재를 푸코의 맑스라고 바꾸었고..이번도 그렇고요..

맑스와의 친화성을 강조해야 책이 잘팔린다고 생각해서인지(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네요-_-)..아니면 자율주의와 맑시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자율주의가 가지는 아나키즘적 지향성을 맑시즘의 이론적 정교함으로 보완하려는 성격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자율주의(혹은 코뮨주의)와 들뢰즈와의 거리는 가까울지 몰라도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시즘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고 생각하는데...이번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라는 책에서 들뢰즈주의?로 표현되는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스주의와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고 있는지는 일단 읽어보고 평가해 볼 일이군요.

로쟈 2005-10-0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수정하고 첨가한 대목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다시 퍼가심이). yoonta님/정신분석에서는 '강박증'이라고 하잖아요. '독실한 신앙'이란 게 옆에서 보기엔 좀 불편하긴 하죠...

palefire 2005-10-0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ople(peuple)의 국역은 골치거리긴 한데, [시간-이미지]와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는 모두 '민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인민' 빼고는 제일 나은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국내 들뢰지언들의 '비커뮤니케이션'은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여서 역시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5-10-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맑스주의자'로서의 들뢰즈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아무래도 '민족'에는 다른 뉘앙스들이 많이 겹쳐져 있어서요(김재인씨가 어떤 의향에서 그렇게 옮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뢰즈 커넥션>에서 좀 께름칙하더군요)...

myth 2005-10-0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이 <들뢰즈의 철학>에서 수유판 '천의 고원'을 인용한 것은 김재인의 정식 번역본 '천 개의 고원'에 대한 불만이나 여타의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저술 당시 저자가 유학 중이었던 탓에 그 무렵 출간된 새물결판을 구해볼 수 없어서였다는 해명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로쟈 2005-10-0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제가 좀 이해할 수 없는 건 <천 개의 고원>만 원서로 읽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죠. 그가 다른 학술적인 글들에서 번역본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며, 들뢰즈는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인데 말입니다. 더불어, 유학중이어서 책을 구해볼 수 없었다는 건 아시겠지만, 넌센스입니다(필요한 책을 다 구해볼 수 있습니다). 구해볼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해야 정확하다고 봅니다...
 

 

 

 

 

<들뢰즈 커넥션>의 맨마지막 문장은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239쪽)이다. 원문은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fools]."(142쪽) 지난주에 거의 한달이 걸린 책읽기를 끝냈다. 다른 일들과 겹치기도 했고, 원서와 꼼꼼히 대조하며 읽은 탓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인데, 이 글은 그 '책떨이'쯤 된다. 다른 일들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도 얼마간의 마무리는 필요할 듯하다.

'바보들'은 다소 뜬금없을 듯한데, 이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에서 라이크만이 얘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리아드네, 즉 통제사회에 맞게 적응해서, 전자 뇌-도시 속에서 그것과 더불어 작용하며, 우리의 실존에서 낯설고 독자적인 것에 '긍정'을 말할 수 있고, 예술과 예술의지, 새로운 감각과 감각의 구성을 향한 취향을 불어일으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차라리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우리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믿음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For what we lack is not communication (we have too much of that), but rather this belief in what we may yet come, and in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and in 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That may make fools laugh, said Deleuze -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 여기서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한 '믿음'의 세 가지 대상은 (1)(우리가)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what we may yet come) (2)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3)우리들 서로간의 관계(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등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하나의 세계)를 믿는 일이다?

(*paby님의 지적에 따른 것인데, 믿음의 대상의 두 가지이다. 역자를 잠시나마 따라간 나의 불찰이다. 원문을 내 식대로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생성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들뢰즈에 따르면,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런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우리가 믿는 것이다.")

원문의 'them'을 <들뢰즈 커넥션>의 역자는 'fools'로 봐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 문제의 모든 것(the whole problem)이라고 했다. 이때의 바보들은 '성스런 바보(holy fools)'라도 되는 걸까? 뭔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도 같으며, 마지막 문장으로서의 여운도 남긴다. 하지만, '상식적인 논리'에 기대면 좀 이상하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나의 (허술한) 문법 지식은 them=fools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나의 직관은 이 '시적인' 문장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 '그것들'이란 앞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나열한 두 가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그래야 상식적인 논리상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렇게 읽는 쪽이 내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 같은 '바보'는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직 '심오한 바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가령, 나 같은 '바보'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들뢰즈 자신이 몸의 조건(phystic condition)이 그를 덮치자 마자"(238쪽)에서 'phystic'이란 이상한/희귀한 원서의 단어를 나는 그냥 'physic'의 오타라고 생각한다. 역자도 그렇게 생각했음 직한데 굳이 'phystic conditio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뭘까?(이런 게 역자의 '공'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233쪽에서도 '비조직적 판(anorgniezed plan)'이라고 '희한한' 원어가 병기돼 있는데, 이건 'anorganized plan'(138쪽)의 오타이다. 물론 나는 'anorganized'도 'unorganized'의 오타라고 생각하며, (원서에서의) 그 정도 실수는 이해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니, 그냥 '비조직적 판'이라고 옮겨주면 될 것을 굳이 오타를 그것도 또다른 오타들까지 보태서 'anorgniezed pla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무엇인지?(역자가 한번이라도 다시 읽어본 것일까?) 예컨대, 129쪽에서 '르루아 구랑(Leroi-Gouhran)'이란 인명은 원서의 '르루아-구롱(Leroi-Gouhron)'이란 오타를 교정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상식적인 교정'이 왜 다른 사례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은 것인지?

하여간에 이 번역서에는 그런 식으로 무성의해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역자가 오역들에 대해서는 '상시교정'하겠다고 하니까 추이를 지켜볼 일이지만, 정말로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자가 '이 책의 백미'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는 6장에서도 오역들(혹은 '이견들')은 튀어나온다. 216쪽에서 "그것은 '비밀'을 통해 숨겨진 후 드러내지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란 문장의 원문은 "something that, though 'secret,' is not hidden and then disclosed."(127쪽)이며 역자는 'though secret'(비록 '비밀'이더라도)를 'through secret'로 잘못 보았다. 같은 쪽에서 "'강렬'과 관련해서 현대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은..."은 "What happens in the modern work, regarded as 'intensive'..."를 옮긴 것인데, 역시나 'regarded as'(-한 것으로 간주되는)를 'as regards'(-에 관련해서)로 잘못 읽었다.

223쪽에서 현상학에 대해 들뢰즈가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들뢰즈는 베이컨적인 '고기(meat)'와 대비하여 현상학의 '살(flesh)'은 부드럽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이 여전히 분별하려 노력하는 세계의 초월적 개념에 둘러싸이지 않을 때에만, '하나의 삶'의 가능성이 현상학적 '삶의 세계'에서 해방되고 지각을 조건짓는 데 이바지하는 방식에서 해방될 때에만, 감각은 충분히 실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은 "For sensation becomes fully a matter of experimentation only when it is no longer enclosed in the transcendental conception of the world that phenomenology still tries to discern - when the possibilities of 'a life' are freed from the phenomenologial 'life-world,' and the ways it serves to condition perception."(132쪽).

문제는 굵은 글씨로 표기한, 'serves'의 주어인 대명사 'it'을 무얼로 볼 것인가 하는 점. 번역문에서는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주어처럼 돼 있지만, 그건 복수 명사이므로 당연히 serves의 주어가 될 수 없다. it은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life-world'를 받으며 이 현상학의 용어는, 역자도 알겠지만, 관례상 '생활세계'로 번역한다. 해서 강조된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현상학의 '생활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리고 그 생활세계가 지각을 조건짓는 방식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정도이다.   

224쪽에서, "들뢰즈의 실험주의적 미학의 문제는, '미학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항상 맞대결하는 '질식(suffocation)'의 의미다. 그리고 이 의미가 주어지는 기본적이 정감은 우울증 또는 스피노자가 '슬픈 정념'이라 부른 것이다." 원문은 "The problem in Deleuze's experimentalist aesthetic is the sense of 'suffocation' against which the search for 'possibility in the aesthetic sense' is always directed."(132쪽) 의견 차이일 수 있는데, 일관적으로 '의미'라고 옮겨진 'sense'가 이런 대목들에서는 내가 보기에 '느낌'이나 '감(感)'이란 뜻을 강하게 갖는다. 해서, '질식의 의미'보다는 '질식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같이 병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사'라고 옮겨진 'search'는 '탐구'가 더 타당할 것이다('조사'는 보통 'research'를 가리키니까).

같은 쪽 각주33)에서 프린트상으로 엉겨나온 글자들은 부주의한 교정의 결과일 터이다. 오역에 해당하는 것은 그 다음: "비록 라캉이 (...) 자신의 카톨릭교를 통해 법과 그것의 명령에 앞서는 즐거운 지식으로까지 밀어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대목의 원문은 "as though Lacan were pushing through his Catholicism to a gay science prior to the law and its Order..."(165쪽)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했지만, 역자가 양보절로 옮긴 이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다. 희한하게도 역자는 가정법 문장들을 거의 제대로 옮기지 않았다(설마 못한 것일까?). 가령 51쪽 각주12)에서 "로티가 이끌렸던 '대담이론'에 대해서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는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로 옮겨져야 한다(듀이는 1952년에 죽었고, 로티는 1931년생이다. 안면도 없었을 대학생 로티에 대해서 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하다). 또 84쪽에서 "들뢰즈는 (...) 철학이 정말이지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보다는 다른 곳에서 출발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Deleuze says that philosophy might well have started elsewhere than in Athens and with Pato."(40쪽)이며,  "들뢰즈는 철학이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그건 또다른 철학사의 잠재성이었다(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갖게 된 출발점은 그리스철학이다).

시간관계상 하나만 더 지적한다. 237쪽에서 "왜냐하면 그런 믿음, 그런 '아이스테시스'가 있을 때면..."의 원문은 "For when there is no such belief, no such 'aisthesis..."(140쪽)이다. 단순한 건데, 역자는 'no'를 빼먹음으로써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꿔서 옮겼다. 불성실이 아니라면 이런 허술한 실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기 곤란하다.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다른 대목의 오역들도 마저 지적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필요할 경우의 일로 미루어둔다(이런 게 유쾌한 일은 결코 아니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과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그리고 들뢰즈의 대담 <디알로그>(동문선), 세 권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애초에 기획했었다. 그래서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질 들뢰즈>를 읽었고(<질 들뢰즈>는 두 챕터 정도를 남겨놓았는데,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다. 비록 일부 번역어에 내가 동의하지 않으며, 문학작품들에 대한 역자의 '무지'가 옥의 티이긴 하지만), <디알로그>를 읽고 있다. '간단한 리뷰'를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때에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불어난 일의 견적 때문이며 대부분은 쉽게 읽을 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들뢰즈 커넥션> 탓이다. 내가 이 번역서에 갖게 되는 '감정'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한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너희가 들뢰즈를 아느냐'는 식의 만듦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가령 원서에서도 미주로 돌려진 들뢰즈 원전의 인용문 주가 굳이 각주로 옮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국역본이라곤 역자 자신의 번역서들까지도 깡그리 인용되지 않은 각주가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더구나 각주의 원서명들은 번역도 안 해놓았으면서). 게다가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면서 첫 페이지부터 '들뢰즈(Deleuze)'라고 '명찰'을 달게 하더니(자기 집에서 이름표 달고 있는 꼴이다), '플라톤(Plato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고 국적불명('Aristoteles'는 정말 그렇다)의 표기를 병기해놓는 건 또 뭔가? 들뢰즈를 읽는 독자가 설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인지 모를까봐 걱정이 되었을까? 원서에 그냥 'Ethics'라고 돼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Ethica in Ordine Germetrio Demonstrata'라고 장황하게 라틴어 원저명을 병기해놓은 '깊은 뜻'은 무엇일까? 이걸 '세심한 배려'로 읽어야 하나? 그런 배려가 일차적으로 지향했어야 하는 것은 그런 류의 '티내기'가 아니라 오역을 최소화한 '성실한' 번역이었다.

역자가 재번역하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이런 투정을 부릴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05. 09. 26.  

P.S. 르페브르님의 '바보들의 세계'에 관련한 대목을 찾아주셨다. 들뢰즈의 <시네마2>에 나오는 것으로 영역본 쪽수로는 173쪽(불어본 225쪽)이다.

We must believe in the body, but as in the germ of life, the seed which splits open the paving stones, which has been preserved and lives on in the holy shroud or the mummy's bandages, and which bears witness to life, in this world as it is. We need an ethic or a faith, which makes fools laugh; it is not a need to believe in something else, but a need in this world, of which fools are a part.

르페브르님의 번역으로 이 대목은 "우리에게는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윤리나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바보들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정도의 뜻이다. 아마도 이것이 <들뢰즈 커넥션>에서 라이크만이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일 듯싶다. 따라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와 관련한 나의 의혹은 나의 오독이다. 단, 나로선 자세한 맥락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다소 뜬금없는 표현으로 느꼈던 것. 아무튼 역자에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역자에게 직접 한 수 배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반나절만에 내가 궁금했던 대목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나로선 소득이 없지 않다. 무지한 자가 배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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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9-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발견하지 못하신 오역이 있군요. 문제의 구절에서 믿음의 대상은 셋이 아니라 둘입니다. 다음과 같은 정도가 적절한 번역이겠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소통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건 너무 많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도달할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 모든 문제는 그들을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는데, 저야 들뢰즈도 모르고 들뢰즈 커넥션도 읽어 보지 않았으니, 주어진 영어 문장 하나와 저의 상상력만 동원해서 짐작을 해 봅니다. 일단 “그것”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도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만들어지게 되면, “그것”은 바보들을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들을 만족시켜 주는 “그것”이 도대체 뭘까요? 아마도 그것은 들뢰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제 추측으로는, 그런 이상적 상태가 바로 “바보”들이 웃는 세계,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인 것 같네요. (* 그리고 문법적으로 보아도 them은 fools가 맞습니다.)

로쟈 2005-09-2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의 대상에 관한 건 옳은 지적이십니다. '바보들'을 문제삼느라고 제가 거기까지는 주의를 두지 못했군요.^^ 문법적으로 them이 fools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이른바 문법적 모호성이겠죠. 하지만, paby님의 추측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저로선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보다는 간단한 상식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belief in/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여기서 의미상의 반복을 만들어낸다고 보며, 그럴 경우 굳이 다른 (거창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이며, 들뢰즈가 '바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을 찾아본다면 풀릴 수 있는 의문이라고 봅니다. 저 또한 들뢰지안이 아니어서 어디서 나오는 얘기인지 현재로선 집어올 수 없지만...

paby 2005-09-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설(로쟈님에 따르면,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상식"에 따른 해설)에 의하면, them은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what we may yet come과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을 병렬적으로 연결한 것이 되나요? 이들을 them으로 받는다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곤란하지요. (우선 what절과 명사를 함께 묶어서 them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를 엮어서 그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곤란하지요.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라는 것은 내용적으로 동등한 차원의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 바로 believe in의 구문적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상식" 때문에 저는 what we may yet come이 a world that includes them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는 왜 저자가 양자를 실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지, 그리고 왜 여기에 갑자기 fools가 등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죠.

로쟈님의 설명에서도 여전히 fools가 왜 등장하는지는 설명이 필요한 사실이지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있어야 할 테고요. 갑자기 아무런 상관없이 이야기를 끌여들이면서 책을 끝냈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해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로쟈님 방식을 따를 경우 그러한 해설이 어떻게 가능할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까요.) 또한 로쟈님의 해설에서, 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전/혀/ 분명하지 않습니다. X를 믿는다는 것과 X를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로쟈님이 believe in의 내용으로 our relations가 있다고 오해하셔서 그러한 잘못된 "해설"을 제시하셨던 것 같습니다.

armdown 2005-09-2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문법상의 명백한 오류들은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제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잡겠습니다. 그밖의 사소한 정황들은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밝히고 또 해설하겠습니다.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

lefebvre 2005-09-2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좀 빈정 상하는 표현이군요. 라이크만이 (간접) 인용한 들뢰즈의 문장은 Cinema 2: The Time-Image, p.173.[Cinéma 2: l'image-temps, p.225.]에 나옵니다. (물론 뉘앙스의 문제이긴 하지만) "잘 풀어보라"라는 말은 마치 수수께기를 낸 문제제출자의 태도 같군요. "나는 아는데 너희는 모르냐?" 식의......흠......

paby 2005-09-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보았는데, 문제의 구절을 새로 번역하신 부분을 추가하셨군요. 그런데 그 번역은 오역입니다. "간단한 상식"에 따르면, 대쉬(-) 이후에 나오는 문장은 대쉬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기능을 담고 있지요. "하지만"의 뜻을 넣어서 번역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번역되려면 반/드/시/ "but" 따위의 말이 있어야 하지요.) 로쟈님의 설명을 고집하시려다 보니 그런 "난해한 독해"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오역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paby 2005-09-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ps.도 있었군요;; 어쨌거나 이젠 지난 문제가 되었네요. 참고로 "Platon"과 "Aristoteles"는 "국적불명"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런 표기를 병기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죠.)

로쟈 2005-09-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려나 Paby님의 지속적인 관심/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법적/축어적 의미가 통하지 않을 때는 의미가 통하도록 어떻게든 비틀어보는 성향이 있는데, 간혹 그런 게 안 통할 때도 있지요.^^ Platon과 Aristoteles가 음역 표기라는 건 다 아는 얘기입니다. '국적 불명'이란 그게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한국어'도 아니란 것입니다(단, 불어로도 Platon이라고 표기하는 듯하지만, 그때는 '음역'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고유명사의 원어 병기는 혼동의 여지가 있거나, 생소할 경우에 해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은 정식으로 소개할 경우(풀네임과 생몰연대를 같이 적을 경우). 제가 철학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가장 짜증스러울 때는, 그런 경우들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플라톤(Platon)', '칸트(Kant)', '헤겔(Hegel)' 등으로 병기해줄 때입니다. 그러한 표기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철학자연' 혹은 '철학서연'하는 티를 냅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혐오합니다...

paby 2005-09-2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릴 사람은 오히려 저지요. 이런 식의 귀동냥을 통해서 얻는 것도 적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제가 참견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참견하지 않는 경우에도요. 참고라고 끝에 붙인 것은 사족이 되어 버렸네요^^ 사실 저도 "칸트(Kant)" 이런 식의 병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거부감이 로쟈님만큼 크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다만, 그런 문제는 그것이 "국적불명"인가 아닌가와는 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굳이 국적을 찾는 것이 문제라면, "Platon"과 "Aristoteles"는 "Kant"나 "Hegel"처럼 독일어라고 하면 되잖아요^^;;;

palefire 2005-09-2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마지막이 머리에 와닿았던 - 저는 이 책을 원서로 접할 때 5-6장, 특히 6장을 흥미롭게 읽었었기에 - 저로서는 이런 논의들이 이어진게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jaewoni님(제가 누군지 아시겠죠?)이 적절히 잘 지적해 주셨네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와 사유의 관계, 영화의 내재적 형식뿐 아니라 영화의 윤리적 존재에 대한 들뢰즈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어쨌든(저는 아직 국역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다시 보니 [시간-이미지]의 7장(로자님도 인용하신 그 부분은 7장 제2절의 마지막 문장들입니다. '사유의 무력함'에 대해 모던영화가 대응하는 방식들을 논하고 있죠')의 맥락에서 - 좀 더 포함하자면 '통제사회'론과 [시간-이미지]결말부의 연관성에서 - 쓰인 부분입니다. 저자가 직접인용부호를 달아주었다면 더욱 친절했겠지만, 저자가 이 문단의 처음을 열면서 특별히 따온표를 단 'belief-in-the-world'(belief=croire)가 [시간-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알려주는군요.

palefire 2005-09-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 경우 로자님도 수긍하신 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자의 번역이 맞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저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완하고 있는 맥락들을 역주로 개입했다면 좀 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바보들'에 대해 로자님같은 탁월한 주석자-교정자님도 의문을 표시했을 정도니까요. 역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던 듯합니다. paby님이 의문을 표하신 '우리가 아직 생성하고 있을 지 모르는 것'과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대상입니다. 전자는 잠재성의 차원이고 후자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창궐하는 통제사회의 상황 일반을 가리킵니다. 바보들([시간-이미지]의 영역본과 여기서는 fool, [시간-이미지] 원본에서는 idiot)을 웃게 만든다는 건 바로 통제사회를 맹신하거나 혹은 이를 관장하는 바로 그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로쟈 2005-09-2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네마2>의 국역본을 어제 저도 읽어봤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이어서 곧 '브리핑'을 올릴 생각입니다. 더불어, 아직 다 풀지 못한 의문점들도(idiot와 fool에 관련된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가요?)...

yoonta 2005-09-2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모른채 넘어갈뻔 했던 오류들이 많이 수정된 거 같네요. 김재인님 홈피에서 보다 여기서 그 책의 수정을 보는게 빠르다는건..좀 문제가 있는 거 같네요. 한가지 아쉬운건..번역에 대한 지적보다는 라이크만의 책 내용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가 더 듣고싶은데...그건 없네요..^^

로쟈 2005-09-2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 끝에서 사정 얘기를 약간 언급했는데, <디알로그>까지 마저 읽게 되면 리뷰를 쓸 계획입니다. 주제는 (1)들뢰즈의 경험론, (2)들뢰즈와 정치, (3)들뢰즈와 영화이며, (3)은 당장 기약할 수 없지만, (1), (2)는 이번 가을에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단한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yoonta 2005-09-2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기대하고 있겠습니다..^^

lefebvre 2005-10-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 님/ 음......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분은 혹시 맞으시다면, 연락 좀 주시겠습니까? 저희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나요? ^^;;
 

 

 

 

 

필요 때문에 앤디 메리필드가 쓴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Routledge, 2002), 국역본 제목으로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를 읽는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메트로맑시스트'들은 '맑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그 중에서 당장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 관한 장은 맑스와 엥겔스에 이은 제3장인데, "벤야민은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였을 것이다."(149쪽)란 논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드디어 번역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의 저자가 '메트로맑시즘' 프로젝트에서 한 자리 차지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는(아예 질로크의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란 책이 나와있지만) 벤야민과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메트로맑시즘>의 국역본 출간에 대해서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었는데(212쪽짜리 원서가 439쪽짜리 번역서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반가움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이제 그 반가움의 상당 부분은 당혹감이 채우고 있다). 웬만해서는 한국어 책을 읽고 똑똑해질 수 없는 것이 이런 류의 비협조적인 '번역서들' 때문이란 걸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왜 이토록 부실한 번역서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궁금하다(이건 상투적인 표현이다.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젠 오역서들을 읽는 데도 얼마간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다. 돈과 시간이, 그리고 엉뚱한 데 투여되는 순진한 독자들의 학구열이).

사실 책의 서두에 붙은 '옮긴이의 말'에서부터 아마추어리즘의 냄새를 풍기기는 했다. "Henri Lefevre의 책을 찾기 위해 '르페브르'가 좋을지 '르뻬브르'가 좋을지 걱정하는 일은 또 어떤가"라고 별걱정을 다하는 역자들을 두고 미소를 지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요즘은 Lefevre를 '르뻬브르'로 읽는 게 가능한가? 물론 Foucault를 '푸꼬'로 읽는 걸로로 모자랐는지 '뿌꼬'라고 읽는 이도 보긴 했지만). 어쨌든 다소 미덥지 않았는데, 번역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해서, 벤야민이 강조하는바, '세속적 계몽'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세속적 오역'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계몽'에 얼마나 이바지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역의 반복들로부터 (언젠가는!?)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다.

애초에 시작은 '사랑' 이었다. 123쪽에서,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 '대도시를 그렇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것과 대도시적 인간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열망에 대한 예언자이자 구원자로서 앞에 나타난 이유' 사이에 우연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로 나가는 문장이다. 원문은 "it's no coincidence that these 'preachers of individuality' are so 'passionately loved in the metropolis and why they appear to the metropolitan man as phrophets and saviors of his most unsatisfied yearnings."(52쪽) 굵은 글씨는 내가 표시한 것인데, 번역문은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옮겼다.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이란 말은 역자의 서비스로 들어간 것인데, 그런 서비스 정신이 문장의 기본틀을 간과한 건 유감스럽다.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란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루소, 러스킨, 니체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군집화 경향'에 대해서 혐오했는데,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받았다는 것(그러니까 그들이 대도시를 사랑한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혐오했다고 해놓고, 어떻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다'고 말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쪽에서 "20세기 초반 베를린에서 보낸 10년간 벤야민은 지적인 욕구를 느꼈고, 그 욕구가 가지는 '활동적인 환상'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1929년 걸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도 원래 끊어진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바꿔 옮기면서 주어(그 욕구)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번역문 대로라면, 벤야민의 지적 욕구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되블린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데(적어도 3종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1980년 파스빈더에 의해서 15시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용은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하층생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광장의 바로 그 이웃인 되블린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던 그 공기는 벤야민이 들이마셨던 근대 베를린의 공기였다."는 건 말 그대로 '소설'이다. 원문은 "But one of stars of Doblin's book - the Alexanderplatz neighborhood itself - gulped in, and was nourished by, the same modern Berlin air that Benjamin imbibed."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장에서 '소설의 한 배역'과 '알렉산더 광장 지구 자체'는 동의어이다. 번역문은 '지구/지역(neighborhood)'이란 말을 '이웃'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연이어 엉뚱한 작문을 한 사례이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글의 대세(=내용)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허용되다 보면 '유관한'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126쪽에서, "이후 17년 동안 벤야민은 그 도시 자체와 넓은 풍경에 아이와 같은 천진한 포용력을 유지했다."의 원문은 "Seventeen years later, Benjamin retained this wide-eyed, childlike embrace of the city."(53쪽)이다. 먼저, '17년 동안'이 아니라 '17년이 지난 뒤에도'이다. '그 도시'는 파리이고, 파리에 대한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호기심어린 시선을 그가 견지했다는 내용. 번역문의 '넓은 풍경'은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wide-eyed'를 옮긴 거라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오역이다.

곧 이어서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에게, 베를린은 파리의 옆에 있음으로써 핏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파리는 음모, 진기함, 그리고 모험으로 상징화되었지만, 이에 반해, '베를린은 아마도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같은 대목은 내용을 반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부도덕한 오역에 속한다. 원문은 "For the young and mature Benjamin alike, Berlin paled alongside Paris. The latter symbolized intrigue, novelty, and adventure. Conversely, 'there are perhaps few cities in which so little is - or can be - overlooked as in Berlin."이다.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이란 번역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young Benjamin'은 대학시절 처음으로 두 주간 파리를 여행하던 시절의 청년 벤야민을 말하고, 'mature Benjamin'은 그로부터 17년 후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 일기>를 쓰게 되는 중년의 벤야민을 말한다. 그러니까 "청년 벤야민에게서나 중년 벤야민에게서나 똑같이"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똑같이 어쨌다는 건가? "베를린은 파리에 견주면 창백한(=볼품없는) 도시였다"라는 것. 왜? 비밀스럽고 진기한 모험으로 가득 찬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은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알다시피, little은 '거의 없다'라는 부정의 뜻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간과될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토록 작은 것들'?). 왜? 파리와는 달리 볼 게 별로 없기 때문. 파리에서라면 어제 본 거리와 건물도 오늘 '새롭게'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조직적/기술적 정신'의 효과로 한번 보면 더 볼 게 없다는 얘기이다. 해서 약간 의역하면, "베를린만큼 볼 게 별로 없는 도시도 거의 없을 것이다."  

128쪽에서, 'a second dissertation'을 '두번째 박사학위논문'으로 옮겼는데, 역자가 벤야민에 대해서나 독일의 학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비평개념>이고(<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번역돼 있다), '두번째 학위논문'이라 지칭된 <독일 비극의 기원>은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이다(물론 끝내 통과되지 못한). 원문에는 '박사' 운운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두번째 논문이 'the work of esoteric genius'로 지칭되고 있는데, '비밀스런/비교(秘敎)적인 천재의 작품' 정도가 아니라 '난해한 분위기의 그 논문'이라고 어렵게 옮겨진 것도 이해하기 난해하다.

 

 

 

 

133쪽에서, "블로흐는 다가오는 나치의 무자비한 공격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는 벤야민과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벤야민이 망명을 택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원문은 "Bloch, however, survived the approaching Nazi onslaught in a way Benjamin never did: he got out."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he)를 역자는 블로흐가 아닌 벤야민으로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망명시켜버렸다.  작년에 대표작 <희망의 원리>(전5권, 열린책들)가 완역돼 나온(영역본은 3권짜리이며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벤야민과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는바, "블로흐가 보여주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강경한 공산주의의 혼합은 벤야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벤야민과 달리 비교적 일찍, 1933년에 망명했고(처음엔 스위스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서 뒷문장은 "그는 탈출한 것이다."로 옮겨져야 하며, 여기서의 '그'는 '벤야민'이 아닌 '블로흐'이다(앞뒤 문장의 주어가 전부 '블로흐'인데, 대명사 'he'가 '벤야민'을 받는다는 건 난데없는 일이다).

블로흐보다 '정통적인' 맑시스트로 벤야민에게 영향을 끼진 이는 블로흐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카치이다. 특히나 중요한 저작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 거름, 1992), 이 책을 벤야민은 이탈리아의 카프리에서 걸출한 볼세비키 아샤 라시스로부터 소개받는다(라시스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참조). "그와 그녀는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라시스의 호텔에서 발가벗은 채로 루카치의 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었다." 이런 배경지식하에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0년대의 급진적인 국면을 맹비난했다."란 문장을 읽어보자. 원문은 "...Georg Lukacs, whose History and Class Counscious tore on to the radical scene in the 1920s." 'tear'란 동사에 '비난하다/혹평하다'란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의 뜻은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구멍을 내다' '찢어놓다'(=양분시키다)이며, 구어적으론 '들쑤셔놓다' 정도로 보인다.

알다시피, 1930년대에 루카치는 '공식적인 맑스주의'로서의 스탈린주의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내비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수정을 요구받는다('관념론'이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인용문에 붙은 각주10)은 이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 들어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루카치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그가 집필한 위대한 저작에 대한 폐기통고를 거절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413쪽)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More recently it was discovered that Lukacs really believed everything all along: he'd actually written an essay in his own defense, renouncing his earlier denunciation of his great text."(190쪽) 내 생각에 번역문은 일의 영문을 전혀 모른 채 옮겨진 것이다. 당시에 루카치는 소위 '자아비판'을 감행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은 내내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옮기면,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루카치는 자신의 신념을 정말로 끝까지 견지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텍스트(=<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이전의(=30년대의) (자기)비판을 철회하는 자기옹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에세이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다. 루카치가 쓴 에세이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것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옹호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Verso, 2000)이다(이 책의 후기를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이 '옹호'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짐작에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해서, '맑스주의' 책을 번역하는 역자들이 ('일반 독자'보다 게으르게도) 걸출한 맑시스트들에 대한 기본사항들마저 챙기고 있지 않은 것은 거듭 유감스럽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후에 <역사와 계급의식>의 주요 내용을 3쪽에 걸쳐서 요약 정리하고 있다. 비록 "벤야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란 단서를 잊지 않고 있지만. 그 내용 가운데 134쪽에서, '두번째 자연(second nature)'은 아도르노에게서도 그렇고 '이차적 본성'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136쪽에서, "모호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subtle messages and repressive force)"은 "교묘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이 더 적당하겠다.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 벤야민과 루카치의 차이점? 그건 '총체성'에 대한 의견차이에 두어진다. "처음에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이음매 없는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었다."(138쪽) '처음에'는 'To begin with'를 옮긴 것인데, 당연히 '먼저'란 뜻이다(이런 사소한/자질구레한 오역들은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 "그의 정신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언제나 미세한 균열의 틈과 구멍이 존재했다. (루카치의) 상품화는 더할 나위 없는 개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문화와 도시주의(=도시화), 모든 건축물 그리고 일상에는 다공성(porosity)이 존재한다."

벤야민이 나폴리에서 발견해낸 '다공성'이란 개념은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를 살필 때 핵심적인 것인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과 대비시킨 저자의 설명은 일품이다(내가 '다공성'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총체성' 대 벤야민의 '다공성'이란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가 한편으론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는 한 루카치에게서는 '도시(urbanism)'가 주제화되지 않는다).   

이를 약간 소급시켜서 적용해 보자. 루카치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상품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는데,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they'd become one and the same"을 "그 둘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옮기는 것도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겠다). "그러나 일상의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궤도에 옮겨놓는 것 또한 루카치의 맑스주의라는 브랜드를 붙여야 했다."(138쪽) 벤야민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바로 이전에 나오는 것으로 벤야민식 맑스주의를 루카치의 그것과 대비하고 있는 대목이다. 원문은 "But bringing everyday culture and experience into the orbit of political-economy also required a few caveats about Lukacs's brand of Marxism."(58쪽) 역자가 제대로 옮기고 있지 못한 것은 'caveats'란 단어. '보류' '단서' '경고' 등으로 사전에서는 풀이되고 있는데, 문맥상 '(벤야민식으로) 일상적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루카치식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유보사항을 필요로 했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 유보는 루카치가 가정/전제하는 '총체성'에 대한 유보이다.

나폴리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모든 것은 여기에서 우발적인 것의 '극장', '대중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곳도 '그렇게 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nowhere is it 'thus and not otherwise'"이다. 벤야민의 짤막한 에세이 <나폴리>로부터의 인용인데, 원문의 이중부정을 단순부정으로 옮김으로써 내용을 거꾸로 옮긴 사례이다. 모든 것이 '즉흥성을 향한 열정'에 의해 좌우되며, 우발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다면, "어느 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때문에 다른 장소가 될 수 없는 장소란 것은 없다"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모든 장소가 다른 장소로 변신이 가능했다" 정도이다. 해서, 나폴리에서는 공적인 생활/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 것. 참고로, 나폴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처음 착안되는 장소이다. 때는 1924년 여름.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벤야민의 텍스트 <나폴리>에 3쪽을 할애하고 있으며,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러한 '과소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140쪽으로 넘어가자(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벤야민은 혁신적이고 경험적인 사상가"였다? '실험적인(experimental)'을 '경험적인'으로 잘못 옮겼는데, 안된 얘기지만 역자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성의한가를 보여준다. 좀 심한 비난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무식하며 무성의한가? 141쪽에서 '고상한 초현실주의적 경험(heightened surrealist experience)'는 '강화된/고양된 초현실주의적 경험'이 낫겠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그런 경험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벤야민은 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한 건 마리화나, 즉 마약이었다. "그는 해시시를 통해 환각 증사에 빠지길 시도했다." '해시시'('하시시')로 옮겨진 'hashish'는 사전에 따르면 통상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마약이므로 좀더 익숙한 용어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그(=벤야민)는 의사인 에른스트 조엘에게 수 년 동안 마약중독자란 진단을 받아왔다. 조엘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고? 원문은 "He'd been medically prescribed the drug for years by Dr. Ernst Joel... to help cope with periodic depression."이다. 내용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친구인 의사 조엘로부터 수년간 (치료용)마약을 처방 받아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감기약 등에도 치료용 마약이 소량씩 들어 있으며 이를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벤야민의 복용한/처방받은 것도 그러한 치료 목적의 마약이었는데, 벤야민이 복용량을 늘림으로써 약간의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근거로 <마르세이유에서의 하시시>란 글까지 썼다는 것.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는 내용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나?(마약 복용과 마약중독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벤야민은 마르세이유의 한 작은 호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곧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되며(브라스밴드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는 거리로 나와서는 항구의 선술집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려워했던 근본적인 예리함을 드러내며 그것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으로부터의 인용문(내가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its canonical magic with primitive sharpness that I had scarcely felt then"이다. 이런 대목은 오역을 지적하기도 쑥쓰러운데, 역자는 'scarcely'란 부정부사를 '두려워했던'이라고 옮긴다(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canonical magic'은 마리화나의 아주 '전형적인/일반적인 마력'이란 뜻이고, 그 마력의 내용은 감각이 아주 민감/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몇 줄 내려가서 "그는 굴 몇 개에, 아마도 토끼고기나 닭고기를 따위를 먹었을 것이다."에서 '-했을 것이다'로 옮긴 조동사 'would'는 내가 보기엔 '-하곤 했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각성(覺醒)'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경도를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약에 의한 황홀경에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단지 종교적 황홀경이나 마약에 의한 황홀경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142쪽)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세속적 계몽(profane ill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유물론적인, 인류학적인 영감"이다. 아주 부실한 번역문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또한 ('다공성'에 이어) 메리필드의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사유란 '뛰어난 마약'이며, 진정한 계몽은 '세속적 계몽'을 통해서, 냉정한 텔레파시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 독서야말로 그 텔레파시의 과정인바, 벤야민이 1930년대 내내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했던 일, 즉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를 읽고 정리했던 일이야말로 바로 '세속적 계몽'이었으며, '뛰어난 마약'의 장기복용이었던 것이다!(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것은 '본드'가 아니라 '독서'이다.)

물론 읽을 만한 대목이라고 해서 오역이 빠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보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불가사의한 측면'에 있어 '신파조의' 혹은 '광신도적인 긴장'이 여태까지 이루어낸 것은 하나뿐이었다."(143쪽) 무슨 말인가? 원문은 "Thus, 'histrionic' or 'fanatical stress' on the mysterious side of the mysterious' takes one only so far, Bejamin thought."(강조는 나의 것, 역자는 'stress on'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잘못 보고 있다) 벤야민이 강조하는 것은 '미스테리한 것'의 일상성, 일상적인 면모이다. 즉, 미스테리한 것은 연출되는 것도 아니며 들뜬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신비스러운 면에 대한 과장적이면서도 열광적인 강조는 기껏해야 일면적일 뿐이다." 왜? 우리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불가해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것들, 벤야민이 보기엔 저 '아케이드'와 '쇼핑몰' 속에 있다. 따라서, 벤야민이 "만약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다다(Dada)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147쪽)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벤야멘에게서 '다공성'과 '세속적 계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메릴필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다 챙긴 것이 된다. 해서, 뒷부분은 그냥 대충 빨리 넘어가기로 하자. 152쪽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풍자적 문체와 천재성에 의지했지만, 파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맑스보다도 시인 보들레르를 더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대한 태도인가? 원문은 "Benjamin got turned on by the poet's allegorical style and genus, to say nothing of his prodigious passion for Paris." 지적하기도 멋쩍은 일이지만, to say nothing of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은 말할 것도 없이'란 뜻이다(2+2는 5가 아니라 4라고 지적하는 식이니 낯간지럽다). 그리고 'turn on'은 여기서 '의지하다'가 아니라 '흥분되다' '매혹되다'란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는 늘 보들레르에 대한 자신의 작업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슴에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문은 "Benjamin always insisted that his work on Baudelaire was more dear to his heart than any other."(65쪽)이고, 다시 옮기면, "벤야민은 언제나 자신의 보들레르론이 어느 작업보다도 그에겐 소중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로서 자신이 많은 글을 썼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보들레르론이라는 뜻이다. 'any other'를 '다름아닌'으로 옮겼는데, 문맥상 'any other works'란 뜻이다.

153쪽에서 '모호함(ambiguity)'는 '양가성'으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쉽다. 근대 파리의 설계자 오스망의 새로운 파리 건설에 대해서 보들레르/벤야민은 개탄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파괴/건설이 나은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새로움도 인정했다는 것(오스망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세하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독립적인(=무관한) 성질이다. 그것은 부지런한 식료품 상인의 유행이 어떤 것인가와 같은 착각의 원천이 된다." 무슨 소리인가? 원문은 "Newness is a quality independent of the use value of the commodity. It is the source of that illusion of which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이다. 복잡한 문장의 오역이라면, 지적하는 사람도 좀 덜 민망할 것이다. 관계사로 연결된 뒷문장을 분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Newness is the source of the illusion. +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 of that illusion. 해서, "'새로움'이란 (상품물신이라는)환영의 원천이며, 패션은 그 환영의 지칠 줄 모르는 조달자이다."  

벤야민과 엥겔스와의 비교. "벤야민이 '오스망'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인용하긴 했지만, 그의 맑스주의적 방침은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방침보다 오히려 치밀했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근대화로부터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총체적인 경험에 으해 큰 자극을 받았다."(153쪽). 두번째 문장에서 엥겔스 파트는 "Whereas Engels saw little apart from capitalist modernization"을 옮긴 것인데, 내용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근대화를 약간 떨어져서, 즉 거리를 두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김에, 154쪽 끝에서 '1789년의 일(the work of 1789)'은 '1789년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159쪽에서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란 브레히트의 유명한 공리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로 옮겨져야겠다. 더불어, 브레히트의 작품 <3페니 소설(Threepenny Novel)>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말하는 것 아닌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모두 브레히트가 벤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로 평가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갖고 있던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과 잘 제련되고 세련된 도구가 이제는 벤야민에게 잔혹한 회초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원문은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 they said,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 was now converted into a crude mallet."(68쪽) 일단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와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가 동일인으므로 번역문은 지지될 수 없다.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의 브레히트'? 뜬금없는 소리이다. 내용은 벤야민처럼 아주 섬세하면서 복합적인 심성의 소유자가, 아주 정밀하게 조율된 악기 같은 사람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투박한) 나무 방망이처럼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지겹게 나열한 이 세속적 '오역'의 대미는 나름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160쪽)란 결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1940년 9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이 50알의 모르핀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한 장면에서 끝났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저자 메리필드는 가정법 문장들로 벤야민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에 벤야민의 희망대로 무사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는 (결국) 리버사이드 도로를 거닐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에 살았더라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웨스트사이드 위쪽 거리의 유태인 이민문화에 대해 편암함을 느꼈다."(161쪽) 이하의 과거시제 문장들은 전부 오역이다. 가정법 과거완료형의 문장들이기 때문에, '느꼈을 것이다'란 식으로 모두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잔뜩 인상을 써야 할지 웃음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번역 연습'을 '번역'으로 착각하고 책을 내는 일은 삼가해주었으면 싶다...

05. 08. 12-14.

P.S. 벤야민 장의 각주는 '발터 벤야민'이 아닌 '월터 벤야민'으로 표기돼 있다. 아마 본문과 각주의 역자가 달랐던 모양이다. 414쪽 각주22)는 유익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 책은 전설적인 역사를 갖는다. 1940년 벤야민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 당국에 의해 압수당했던 것일까? 벤야민이 나치의 점령을 피해 달아나기 전에,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그 책을 국립도서관 안에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1년, 이것은 1962년에 사망한, 벤야민의 친구이자 도서관의 전 기록보관인(=사서)인 조지 바타이유('조르주 바타이유'를 말한다)의 사유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1년후, 파사젠베르크는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오랜 기다림 후에서야 벨넵(벨크넵) 출판사(Belknap Press)가 마침내 영어판을 출간했다."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자신의 원고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1982년에 드디어 출간됐다는 것. 그런데, '파사젠 베르크'가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다고? 이 '지독한 무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는지? 더불어, 번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중을 이 각주는 해결해 주는데,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의 책갈피 벤야민 약력에는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 밤, 에스파냐 국경 지역 포르 부에서 모리핀으로 자살한다. 그는 에스파냐 국경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돼 있다.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 믿기지는 않았었는데(그는 원고를 위해서라면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내막은 따로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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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이 타시겠습니다.^^ 이거 참 한두번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하는 건지, 음란물 유포행위로...로쟈님 말씀처럼 한국말로 유식해지기는 힘들까요? 그나마 이렇게 솎아주시니 다행입니다만...

로쟈 2005-08-16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한국어로 유식해진다는 건, '웬만해선' 힘듭니다. 웬만하지 않은 책들 덕분에...

비연 2005-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krinein 2005-08-1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번역에 대한 몇몇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도 번역본의 출간을 반가움 반 근심반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정말 신고라도 해야할까 봅니다(그런데 어디에?).

주니다 2005-08-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해주신,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의 역자가 이 책보다 먼저 혼자 번역해서 출간한 토마스 크로우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를 어제 읽었습니다. 결론은 엄청난 번역으로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오역,오역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책 전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인데다가 오역은 차치하고(오역도 수두룩), 한국말이 아닌 문장들로 빼곡했습니다. 역자 후기는 더 가관인게 "많은 학생들이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건 영어만의 문제는 아니지 싶었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이거보고 뒤로 자빠졌습니다. 하하핫. 이거 출판사에 환불해달라고 해야 되는건지....처음으로 리뷰를 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합니다.^^

로쟈 2005-08-1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은 안 산 게 천만다행이네요(주니다님은 사서 읽으신 거네요!). 아무튼 이런 '문화'는 더이상 지속될 수 없도록 무슨 특단의 조치라도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aho 2005-08-19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석이에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보는 건 어때요? 이정도 오역이라면 좀 심각한데, 두께로 개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로쟈 2005-08-1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건 벤야민 장뿐이지만, 다른 장들의 번역이라고 해서 그닥 나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역자들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 같지 않으며(만약에 그렇다면, 그 '둔감함'과 '무능력'에 대해선 어찌해볼 도리가 없겠죠), 그런 '부실한' 번역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 책을 낸 거라면(대단히 '오만한' 경우인데) 이 정도의 지적에 꿈쩍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출판사측에서 회수하고 재번역서를 내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제로이겠죠. 오늘도 생각없는 언론(한겨례 같은)에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이 책을 추천도서로 올려놓았더군요. 사실, 제가 더 뻔뻔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 쪽은 그렇듯 옆에서 부추기는 이들입니다...

주니다 2005-08-1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책<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은 학생들과 함께 번역을 해서인지^^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서점에서 잠깐 살펴본 거지만서도. 문제는 그 책이 아니라 '크로우'의 책이죠.^^ 책의 1장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2번이나 번역이 되어 있는데, 결론은 그것도 안봤다는 얘기죠. 역자가 그 이름도 거룩한 <교수님>이시니, 아마도 그 책으로 수업을 진행할터, 죄없는 학생들이 불쌍한거죠. 근데 이 정도 상태면 학생들도 형편없는 번역이란걸 알텐데, 도대체 무슨 배짱일까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비가 좀 오면서 날이 너무 시원해졌네요. 주말을 잘 보내실 준비는 되셨나요? (일들은 좀 마무리가 되시는지....끝없이 쏟아지는 일들을...^^)

로쟈 2005-08-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불가사의한, 미스테리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한국식 '학술'을 한꺼풀만 벗겨보면 말이죠... 일들이야 늘 소나기 같아서, 안 젖어 있을 도리가 없습니다(주말마다 비맞은 생쥐꼴입니다. 어쩌다 볕들 날 기다리는--;).

주니다 2005-08-1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맞은 생쥐꼴이라...ㅎㅎㅎ, 가족과 함께 주말 편하게 보내시구요...
한겨레 서평에는 이번에도 <베냐민>을 고집했더군요. 그 고집에 경의를^^

리그파 2006-1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무식함을 탓하고 있었는데...더 이상 끙끙 앓지 말고 책 덮으렵니다.
로자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로쟈 2006-11-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은 좀 심한 경우였습니다...
 

뤽 페리와 단짝을 이루는 알랭 르노는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인간사랑, 1995)으로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칸트와 피히테 전문가라는 그는 68사상, 혹은 그들이 '반휴머니즘'이라고 규정하는 구조주의 시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주체 철학, 혹은 새로운 개인주의를 모색하고 있다. 나의 견문으론 그렇다.

 

 

 

 

알랭 르노의 <개인: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동문선, 2002)은 짐작에 그의 또다른 주저 <개인주의의 시대>(1989)의 또다른 버전, 혹은 포켓북 버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컴팩트한 분량이어서 프랑스에서의 개인주의 논쟁의 전말과 페리/르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수 있을 듯한 책. 하지만, 이 역시나 양질의 번역일 경우이다.

 

 

 

 

우리에게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으로 번역 소개된 질 리포베츠키의 책을 <덧없음의 제국>이라고 옮길 때부터 좀 의심이 가기 시작하더니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의 저자 알랭 핑켈크로트를 다룬 절에서의 아래와 같은 번역은 역자가 어떤 '계산'으로 번역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게 한다.

"민주적 개인주의의 전망인 난폭함. '유로디즈니'로 회사를, '쥐라기 공원'으로 영화를, 또는 마돈나의 콘서트를 나타냄으로써 구호 만들기의 요구에 스스로를 바치는 방법이 잔인함의 엄청난 희생자들에게 모욕은 아닌지 우리는 분명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말놀이는 그 근본원리가 신비한 단어를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단어들이 아주 심각하게 사물들을 구속할 때는 아마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잔인함이 표현되는, 이론의 여지가 있는 형태를 빼고 생각한다 해도 반론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론의 논리 또한 검토되어야 한다."(43-4쪽)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돼 있지 않으며 국내 도서관에는 불어본도 들어와 있지 않다. 그러니 나로서는 원문의 내용이 어떠한지 확인할 길이 없고, 그저 이 '난폭한' 번역에 '모욕'을 느끼면서 '희생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그 모욕을 역자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도대체 번역이란 것의 근본원리가 원문을 신기한 단어들로 대체하는 건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아주 심각하게 오역을 해놓으면, 그건 더 이상 번역으로서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식의 번역에 잔인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는바, 아무리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다면 '반역'(=번역)은 계속될 것이고, 그 반역의 논리 또한 더더욱 뻔뻔스러워질 것이다." '덧없는 번역'은 이젠 그만 나와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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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가끔 전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식해서가 아닐까 고민할때도 있습니다만은..^^

근데 번역글들을 읽어보면 이해를 못했기에 그런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고 외국어라는게 제대로 번역하기에 쉽지 않은게 사실인만큼 과연 얼마나 나은 번역을 갖게될지는 희의적입니다.
번역을 교수들 논문실적으로 쳐주거나 (이거 아직도 그렇죠? 갑자기 자신없네요..) 돈을 엄청 주거나 그럼 나아질까요?

로쟈 2005-04-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연구업적으로 평가하는 데 좀 인색한 게 사실입니다. '돈을 엄청 준다면' 당연히 나아지겠죠.^^ 더불어 당연한 얘기지만, 고전이나 중요한 인문/과학 서적의 번역을 위한 국가적/사회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번역자들이 좀더 정신 차려서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