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테바의 두번째 질문은 데리다가 내세우는 기호학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 '비현전의 새로운 구조'로서의 그람(gram)과 차연(differance)으로서의 에크리튀르[문자](writing)가 무엇이며 이것들이 기호학의 주요 개념들과는 무슨 차이[단절]가 있는가 하는 것. 그리고 문자학에서 말하는 텍스트가 언어학과 기호학에서 사용하는 언표(enounced)란 개념을 어떻게 대체하느냐 하는 것.



먼저 문자(나는 '글자들'이란 말로 옮기고 싶지만)에 대한 데리다의 대답은 그것이 음성중심주의와 로고스중심주의에서 (부당하게) 폄하(reduction)되어 왔다는 것. 이 부분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넘어가기로 한다(<그라마톨로지>의 1, 2장). 데리다가 보기에 순전히 음성표기적인 문자(purely phonetic writing)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는 주장[음성주의]은 특정한 윤리적 가치론적 경험의 결과[표현]이다.

이들에(데리다는 '재현주의자representativist'란 말로도 부른다) 의하면: "Writing should erase itself before the plenitude of living speech, perfectly represented in the transparence of its notation, immediately present for the subject who speaks it, and for the subject who receives its meaning, content, value."(25쪽)

국역: "그 표기법의 투명함 속에 완벽하게 표상되며, 말하는 주체와 그 의미·내용·가치를 전달받는 주체에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살아있는 말의 충만함 앞에 글쓰기는 지워져야 한다는 것"(48쪽)이다.

다시 옮겨보자: "문자[글쓰기]는 살아있는 말[음성]의 (자족적인) 충만함 앞에서 스스로 사라져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살아있는 말은 그것의 아주 고분고분한[투명한] 표기 속에서 완벽하게 표상[재현]되며 그것을 말하는 주체와 그것의 의미, 내용, 가치를 전달받는 주체에게 공히 직접적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이것은 소쉬르가 제기한 '차이의 원리'를 조금만 더 밀고나가면 대번에 알 수 있다: "This principle compels us not only not to privilege one substance - here the phonic, so called temporal, substance - while excluding another - for example, the graphic, so called spatial, substance - but even to consider every process of signification as a formal play of differences. That is, of traces."(26쪽)

국역: "이러한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실질 - 예를 들어 이른바 공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자적 실질 -을 배제함으로써 다른 실질 - 여기서는 이른바 시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성적 실질 -에 틀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모든 의미작용의 과정을 차이들의, 다시 말해서 흔적들의 형식적 유희로 간주하게 합니다."(49쪽)

나의 번역: "이 원리[차이의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실체(예컨대 문자의 형태적이고 공간적인 실체)를 배제하고 어느 하나의 실체(여기서는 음성적, 그러니까 시간적 실체)에만 (배타적인) 특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모든 의미작용을 차이들의 형식적인 유희[놀이]로 보도록 합니다. 말하자면, 흔적의 유희란 것이죠."

여기서 데리다가 재도입하는 문자[형식적인 유희의 근거]는 문자(언어)/음성(언어)의 이분법의 구성항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글쓰기의 개념을 산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It is a question, rather, of producing a new concept of writing." 다시 옮기면: "말하자면, 문자[글자들]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문제라고나 할까요."

이 새로운 것이 그람(gram)이고 차연(diff rance)이다(차연에 대해서는 그의 [차연]이란 글을 참조해야 한다. 사실 이어지는 부분은 그 글을 거의 요약한 듯하다. 거기서 그는 차연을 가리켜 어떠한 실체도 개념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그람과 차연의 전제, 혹은 가능근거: "Whether in the order of spoken or written discourse, no element can function as a sign without referring to another element which itself is not simply present."

국역: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어진 담론의 영역이건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다시 옮기지 않겠다. 이러한 현전과 부재의 부단한 몸바꿈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이 흔적의 망(interweaving; textile)이 바로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변형을 통해서만 생성된다(로티의 재서술). 데리다의 텍스트주의: "There are only, everywhere, differences, and traces of traces."; "그러므로 흔적의 차이와 흔적들만이 도처에 존재합니다." 나의 번역: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차이들[차연]과 흔적(들)의 흔적(들)뿐입니다."("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

이렇게 되면, 그람은 기호학[세미올로지]의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 되며 기호학은 문자학[그라마톨로지]에 접수된다(문자학은 언어학까지 커버한다). 이 문자학의 장점: "The advantage of this concept... is that in principle it neutralizes the phonologistic propensity of the "sign," and in fact counterbalances it by liberating the entire scientific field of the "graphic substance"(history and systems of writing beyond the bounds of the West) whose interest is not minimal, but which so far has been left in the shadows of neglect."(27쪽)

국역: "이러한 개념의 장점은 그것이 원칙적으로 '기호'의 음성주의적 성향을 중화시키며,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어둠 속에서 버림받아왔던 '문자적 실질'(서구를 넘어선 글쓰기들의 역사와 체계)을 모든 과학적 영역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을 실제적으로 균형잡는다는 점입니다."(50쪽)

조금 모호하군. 다시 옮겨보자: "이 개념[문자학]의 원론적인 장점은 '기호'에 대한 그동안의 음성주의적 편향을 바로잡아준다는 데 있으며, 그것의 실제적인 장점은 (서구를 넘어선, 서구 바깥의 역사와 문자체계를 포함하여) '(문자의) 형태적 실체'에 대한 모든 학문적[과학적] 탐구를 개방함으로써 또한 그에 대해[그동안의 편향에 대해] 균형을 맞춰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문자적 실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작지 않(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것이지요." 대충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 차연: "The gram as diff rance, then, is a structure and a movement no longer conceivable on the basis of the opposition presence/absence. Diff rance is the systematic play of differences, of the traces of differences, of the spacing by means of which elements are related to each other."

국역: "차이로서 문자는 그러므로 현전/부재의 대립에 의해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차이는 요소들이 서로를 참조하는 차이들, 혹은 차이들의 흔적의 그리고 공간화의 체계적 유희입니다."

나의 번역: "차연으로서의 그람[문자]은 그러므로 현전/부재[있음/없음]이라는 이항대립으로는 더 이상 헤아릴 수 없는[사유할 수 없는] 구조이며 운동입니다. 차연은 차이들의 체계적인 유희이고 차이의 흔적들의 유희이며, 개개의 요소들을 다른 요소들과 관계지어 주는 공간화[글자배열]의 유희인 것입니다."

이 공간화에 대한 부연: "This spacing is the simultaneously active and passive production of the intervals without which the "full" terms would not signify, would not function. It is also the becoming-space of the spoken chain - which has been called temporal or linear; a becoming-space which makes possible both writing and every correspondence between speech and writing, every passage from one to the other."

국역: "이러한 공간화는 그것이 없으면 '충만한' 항목들이 의미하거나 기능하지 않을 간격들의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생산입니다. 그것은 또한 언어연쇄 -시간적이고 선조적이라고 말했던 -의 공간화(그것만이 글쓰기와 말과 글쓰기 사이의 모든 상응과 서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화)이기도 합니다."

나의 번역: "이 공간화는 (문자들의) 간격(들)이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인데, 이 간격(들)이 없다면 이른바 '온전한' 단어[말]들이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게 되고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것은 또한 음성언어 연쇄(이것을 대개는 시간적이거나 선조적인 걸로 말해왔지만)의 공간화이기도 합니다. 이 공간화가 바로 문자(행위)뿐만 아니라 음성과 문자 사이의 모든 대응을 가능하게 하며, 이들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음성과 문자의 공통자질[혹은 조건]로서의 공간화가 이들간의 대응[주고받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차연에 대해서 조금 부연: "Differences are the effects of transformations, and from this vantage the theme of diff rance is incompatible with the static, synchronic, taxonomic, ahistoric motifs in the concept of structure."

국역: "차이들은 변형의 결과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차이의 주제는 구조라는 개념의 정적인·공시적인·계통적인·반역사적인 주제와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50-51쪽)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그러한 성격[모티브]에 의해서만 구조가 특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차연의 구조라는 것도 가능하다(데리다는 조금 완곡하게 "[차연이] 비구조적이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이것이 하는 일: "it produces systematic and regulated transformations which are able, at a certain point, to leave room for a structural science. The concept of diff rance even develops the most legitimate principled exigencies of "structuralism.""(28쪽)

국역: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구조적 과학을 낳게 하는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변형을 생산합니다. 차이의 개념은 심지어 '구조주의'의 가장 합법적인 원칙적 요구들을 개진하기까지 합니다."

나의 번역: "그것[차연]은 체계적이고 규칙적인 변형(들)을 생산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구조적 과학으로 정립될 수 있는 여지[가능성]를 남겨놓습니다. 차연이란 개념은 한술 더 떠서 '구조주의'의 가장 정당하면서도 원론적인 (당면)요구들을 제기합니다[더 밀고 나갑니다]."

데리다는 소쉬르가 '분류항들classifications'이라고 부른, 일반적인 모든 기호(학)적 약호[코드]를 차연(운동)의 결과로 본다. 그걸 조금 자세히 알아보자: "Nothing - no present and in-different being - thus precedes diff rance and spacing. There is no subject who is agent, author, and master of differance, who eventually and empirically would be overtaken by differance."

국역: "어떤 것도 -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어떠한 현전하는 존재자도 - 그러므로 차이와 공간화에 선행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산출하고 지배하는 동작주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차이는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경험적으로 주체에 덧붙여집니다."(52쪽)

나의 번역: "어떤 것도, 그러니까 차이와는 무관한 어떠한 존재자도 차연과 공간화에 선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연에는 주체가, 그러니까 작인이나 저자나 주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주체란 것은 결국에 가서는 보나마나 이 차연에 의해 발목이 잡히게 되는 겁니다[잡아먹히는 겁니다]."

이렇듯 우리의 차연이 모든 것을 잡아먹게 된다면 오직 존재하는 것은 차연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주관성도 객관성과 마찬가지로 일개 차연의 결과[효과], 차연의 체계에 기입된[등재된] 결과일 뿐이다. 우리의 경제라고 예의가 아니다: "Deferred by virtue of the very principle of difference which holds that an element functions and signifies, takes on or conveys meaning, only by referring to another past or future element in an economy of traces. This economic aspect of diff rance, which brings into play a certain not conscious calculation in a field of forces, is inseparable from the more narrowly semiotic aspect of diff rance."(29쪽)

국역: "어떤 요소도 흔적들의 경제 속에서 지나간 혹은 다가올 다른 요소들을 참조함으로써만 기능하고 의미하며 의미를 취하거나 부여하게 되는 차이의 원리 때문에 지연되는 것입니다. 힘들의 영역 속에 계산을 -의식하지 않은- 작용하게 하는 차이의 이러한 경제적 양상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호학적 양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저 번역을 해보자: "바로 이 차이의 원리(의 공덕)에 의해서 지연된다는 말은, 어떤 한 요소가 기능하거나 의미하는 것, 그러니까 의미를 취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오직 흔적의 경제[가두리] 내에서 과거나 미래의 다른 요소와의 관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차연의 이러한 경제적 측면은 힘(들)의 장 속에 명백하진 않더라도 모종의 계산을 도입하는 것이죠. 차연의 이러한 측면은 보다 좁은 기호적 측면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교환가치와 차연을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해체론과 맑시즘?).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모든 형이상학적 이분법(기표/기의, 감성적/초감성적, 문자/음성, 수동성/능동성 등)의 효력이 정지되고 모두가 차연의 발굽 아래 놓인다. 이제는 차연이 지배하는 탈형이상학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이제나저제나 언제나?

크리스테바의 세번째 질문은 기호학과 현상학에서 각기 말하는 '의미'에 차이가 있다고들 하는데 둘은 어느 만큼 공모되어 있는가, 또 기호학적 구상[프로젝트]은 어느 만큼 형이상학 내적인가, 이다. 먼저 의미에 대한 데리다 답변.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미의 외연은 일단 대단히 넓다는 것. 의식에 나타나는[드러나는] 모든 것을 현상학에서는 의미로 친다[다룬다]. 그래서 의미는 현상의 현상성으로 정의된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나타남의 나타남됨쯤으로 바꿔말할 수 있겠다. 지시적 의미(Sinn)와 언어적 의미(Bedeutung) 사이의 프레게식 구분에서 현상학적 의미와 기호학적 의미의 공모[결탁]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1)먼저, 후설의 경우: "Husserl, in order to isolate meaning (Sinn or Bedeutung) from the intention of signification (Bedeutung-intention) that "animates" enunciation, needs to distinguish rigorously between the signifying (sensible) aspect, whose originality he recognizes, but which he excludes from his logico-grammatical problematic, and the aspect of signified meaning (which is intelligible, ideal, "spiritual")."(30쪽)

국역: "후설은 언술의 의미 또는 언술을 '고무하는' 의미작용의 의도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그 독창성은 인정되지만 그 논리-문법적 방법론으로부터 그가 배제시킨 기표의 (감각적)측면과 기의의 의미의 (지적·관념적·'정신적')측면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나의 번역: "후설은 (지시적 의미건 언어적 의미건) 의미를 언술행위에 (불순하게) '바람을 넣어주는' 의미작용의 의도(지시적 의도)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 기표적인(감각적) 측면과 기의적인(초감감적, 이념적, '정신적') 측면을 엄격하게 구별하려 하지요. 그는 기표적인 측면의 고유성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논리적-문법적 문제틀[구도]로부터는 제외시킵니다." 즉 후설에게 문제된 것은 의미(기의)와 의도 사이의 긴장[관계]이다. 그에게서 기표는 문젯거리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Thus, whether or not it is "signified" or "expressed," whether or not it is "interwoven" with a process of signification, "meaning" is an intelligible or spiritual ideality which eventually can be united to the sensible aspect of a signifier that in itself it does not need."(31쪽)

국역: "이렇듯 '의미'는 그것이 '표현되거나' 또는 '의미되건' 그렇지 않건간에 의미작용의 과정에 '결부되건' 그렇지 않건간에 (경우에 따라서는 기표의 감각적 측면에 결합될 수도 있지만 그 스스로는 결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적 혹은 정신적 관념성입니다."(54쪽)

나의 번역: "그래서 (후설을 따르자면) '의미'란 것은 (그것이) 지시된 것이건 표현된 것이건, 의미(화)작용에 연루되어 있건 말건 하여간에[죽이건 밥이건 간에 어쨌든] 초감성적인, 즉 정신적인 관념(성)[이념(태)]인 것이지요. 이 관념성은 (후설이 보기에) 때에 따라선 기표의 감각적 측면과 결합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 자체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기호학자와 마찬가지로 현상학자도 기의의 혹은 의미의 직접성[현전(성)]을 믿는 것.

(2)"This layer of pure meaning, or a pure signified, refers, explicitly in Husserl and at least implicitly in semiotic practice, to a layer of prelinguistic or presemiotic (preexpressive, Husserl calls it) meaning whose presence would be conceivable outside and before the work of deff rance, outside and before the process or system of signification."

국역: "이러한 순수한 의미나 기표의 층위는 헤겔에서는 명시적으로, 기호학적 실행에서는 적어도 함축적으로, 전-언어학적인 혹은 전-기호학적인(후설에 의하면 전-표현적인) 의미의 층위를 지시하는데 그것의 현전은 차이의 작업이나 의미작용의 체계나 과정 이전에는 또는 그것을 벗어나서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54-55쪽) '기표의 층위'라고 한 것은 '기의의 층위'의 오역이고 '헤겔'은 '후설'의 오역이다(교정은 본 것일까?). 나머지도 모두 오역이다.

나의 번역: "순수한 의미의 층, 순수한 기의의 층은 전언어적, 전기호적(후설은 전표현적이라고 부른다) 의미의 층을 가정하는 것이다[가리킨다](이러한 가정은 후설에게서는 아주 명백하게 그리고 기호학에서는 암묵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차연의 작업[운동] (시간적 공간적) 바깥에서, 의미작용[의미화]의 체계나 과정 바깥에서 의미의 현전을 사유할 수[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가정[생각]은 틀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틀림[오류]은 아주 끈덕진 것이어서 간단하게 벗어날 수 없다. 기호학에서 의미/기호, 기의/기표의 관계가 외재성의 관계(기표는 기의의 외재성)가 되듯이 후설에게서 기호와 기표는 의미나 기의의 외재화( usserung)나 표현(Ausdruk)이 된다.

그런데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소쉬르에서처럼: "I have attempted to indicate elsewhere the consequences that link all of phenomenology to this privilege of expression, to the exclusion of "indication" from the sphere of pure language (of the "logicity" of language), and to the privilege necessarily accorded to the voice, etc."

국역: "나는 이러한 표현에 대한 특권이나 순수 언어(언어의 '논리성')의 영역을 벗어난 '지시'에 대한 배척, 목소리에 필연적으로 부여된 특권 등에 모든 현상학을 연결시키는 태도들이 지니는 결과들을 지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것도 좋은 번역이 아니다.

다시 옮겨보자: "나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언어를 표현으로서 규정한 결과) 현상학 전체[전부]가 이 표현의 특권과 연결되며, 순수 언어의 영역(언어의 '논리적 영역')에서 '지칭[대상과의 연관]'을 배제하려는 것과 연결되고, 또 당연히 목소리[음성]에 부과되는 특권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이다. 소쉬르에서처럼 현상학에서도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말하는 걸까. 언어표현에서 지시대상을 배제한 것은 현상학이 잘한 일이지만(후설은 먼저 수학자/논리학자[수리철학자]였다), 목소리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이런 식. 더 읽어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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