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구호 같지만 거꾸로 MB의 구호다. 아침에 읽은 기사 중에 이명박 리더십을 염려하는 칼럼들이 눈에 띄어서 옮겨놓는다(오히려 화두는 'MB 트라우마'다).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란 구호는 실패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것을 부정/부인하려는 제스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데 비교적 온건한 아래 칼럼들에서도 기본 정조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란 '자신감'에서 처칠과 오바마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파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불운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시국인 듯싶다.

한국일보 [임철순 칼럼/7월 25일] 이 대통령의 첫 휴가

이명박 대통령의 휴가는 참 옹색하다. 26일부터 30일까지 4박5일간 쉰다는데, 행선지는 군대 내의 휴양시설이다. 미국이나 일본에 갈 수 없고 금강산도 갈 수 없고, 휴가를 갈 만한 곳이 별로 없다. 그나마 취소하려다가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휴가를 하되 통상 1주일인 기간을 5일로 줄였다니 옹색하기 그지없다. 그런 이 대통령이 휴가에 앞서 청와대 직원 300여 명에게 선물한 책이 눈길을 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외손녀 실리아 샌디스가 쓴 <돌파의 CEO 윈스턴 처칠: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이다. 이 대통령은 원래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등 리더십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려진 분이다.

처칠평전 일독을 권한 대통령
책의 원제는 <We shall not fail>이며, 부제가 ‘the inspiring leadership of Winston Churchill’이라고 돼 있다. 이 제목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였던 1940년 6월에 행한 하원연설에서 따온 것으로, 그야말로 힘이 있고 국민에게 용기를 심어준 웅변이었다. 제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는 ‘inspiring’이다. ‘고무하는, 분발케 하는, 감격시키는’이라는 단어가 리더십이라는 말과 어울림으로써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다짐에 힘을 넣고 있다.

취임 초기부터 실수 실착으로 낭패를 본 이 대통령은 무엇으로 힘을 스스로 회복하고 국민을 고무ㆍ분발ㆍ감격케 할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은 언어적 감성이나 재치 논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만 못하고, 연설의 힘이나 카리스마에서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잡기 어렵다. 목소리, 특히 말끝이 퍼지지 않아 알아 듣기 힘든 경우가 있고 전달력이 약하다. 말은 못하는 편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잘한다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여러 곳에 남긴 방명록의 휘호는 어법이 안 맞거나 맞춤법 띄어쓰기가 틀려 웃음을 사고 있다.

그러니 개인의 노력과 시스템의 도움으로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을 고무ㆍ분발ㆍ감격케 하는 리더십을 창출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은 전적으로 연출돼야 한다. 그것은 조작과 다르다. 방명록의 휘호도 혼자 알아서 하면 안 된다. 왜 각종 연설문은 미리 작성해 여러 사람이 검토하면서 방명록은 대통령 혼자 쓰게 하는지, 그래서 맞춤법과 어법이 틀리게 내버려 두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국민과 부하가 매력에 반하게 하는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부하는 반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처칠의 경우 불독처럼 생긴 얼굴에 굵은 시가를 입에 문 모습이 국민에게 자신감을 불러 넣었고, 연설은 국민을 안심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총리가 된 뒤 첫 의회연설에서 처칠은 저 유명한 ‘피와 수고와 땀과 눈물’의 연설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유있게 승리의 V자 사인을 하거나 실크 해트를 지팡이에 걸고 뱅뱅 돌려 청중에 답례하던 개구쟁이 같은 표정도 귀여웠다. 처음 의원선거를 치를 때 만날 늦게 일어나는 게으름뱅이라고 상대가 비난하자 “나처럼 아내가 예뻐 봐. 일찍 일어날 수 있나”하고 응수했던 처칠은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이 대통령은 과연 매력적인가, 재치가 있나, 유머가 있나, 멋진가, 귀여운가. 그리고 이 대통령을 보면 즐겁고 안심을 하게 되는가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을 고무하는 리더십 절실
1주일 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90회 생일을 맞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만델라를 표지인물로 싣고 그의 리더십 8가지 교훈을 소개했다. 맨 처음이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inspiring이 나온다. 각국 지도자들이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연출을 하는지, 국민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살펴야 한다. 모처럼의 휴가에 이 대통령이 이런 것들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국일보 [이유식 칼럼/7월 29일] MB 정권의 트라우마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위원의 매력과 마법에 유럽이 흠뻑 빠지고, 독일 프랑스 영국 정상들이 앞 다퉈 그를 영접하는 데 열을 올렸다는 뉴스가 지난 주 외신의 머리를 장식했다. 특히 독일 베를린 중심부 공원의 승전탑 앞에서 가진 행사에는 20만명의 인파가 운집해, 40여년 전의 존 F 케네디를 연상시키는 그의 면모와 연설에 열광했다. 하이라이트는 ‘미국 시민이자 세계 시민’ 자격으로 연단에 오른 오바마가 국가ㆍ인종ㆍ종교 등의 장벽을 뛰어넘는 화합과 테러ㆍ기후변화ㆍ빈곤 등의 지구적 도전에 맞서는 용기를 강조하며, 바로 지금이 지구시민 모두가 책임감을 발휘할 때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메시지 실패로 정국 반전 못해

아직은 대통령 후보일 뿐인 오바마의 순방에 대해 유럽이 록 콘서트 같은 축제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부시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에 대한 염증과 새로운 세계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 함께 빚어낸 결과일 게다. 오바마는 이 점을 정확히 짚었고, 유럽인들이 그리는 지도자상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비판론자들은 그의 분명하지 않은 정책과 저급한 포퓰리즘으로 한 판의 정치쇼를 벌였다고 공격하나, 세계를 향해 던진 화합ㆍ희생ㆍ용기ㆍ책임의 메시지는 이미 ‘케네디 향수’를 뛰어넘고 있다.

오바마가 세기적 도전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공동 대응을 강조하며 영국에서 유럽방문 일정을 끝냈을 즈음에, 이명박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윈스턴 처칠 전 영국총리의 리더십을 다시 떠올렸을 듯 싶다. 휴가 직전 청와대 직원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의 연설로 유명한 처칠의 일대기를 그린 책을 선물하며, “다들 어렵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실수는 해도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함께 전했다고 해서다. 이런 각오를 다지는 듯, 최근 대통령의 말수가 줄어드는 것과 반비례해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각종 개혁과제를 차질 없이 이뤄내겠다는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하지만 메시지의 힘과 효과에서 이 대통령은 실수가 아니라 실패하고 있다. 머리의 메시지와 입의 메시지가 다르고, 혼란스런 메시지를 실천할 손과 발마저 따로 놀기 때문이다. 결과는 ‘쇠고기 트라우마(trauma)’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공직사회의 무기력과 눈치보기이고, 당정 사이에 일상화한 정책의 혼선과 갈등이다. 관료들은 국민보다 괴담이 무서워 몸을 사리고, 기업은 널뛰듯 하는 정책방향을 가늠하지 못해 움츠리며, 가계는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어 바닥을 긴다.

무엇보다 딱한 것은 이 대통령이 정책의 일관성과 계속성을 내세워 경제팀을 유임시키는 무리수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오히려 커지고 있는 점이다.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고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못한 바둑의 짜증스런 행마처럼, 경제사령탑이 권위와 신뢰를 잃고 모멸에 가까운 추궁을 받는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리 없다. 4대 원칙 운운하며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야수의 무리에게 던져진 먹이처럼 된 공공기관 개혁방안은 단적인 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메시지는 여전히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엊그제 그는 공무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몇 달간 우리의 신뢰자산이 얼마나 취약한지 충분히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타개할 비전과 전략을 담은 메시지를 내놓지 못한다. 경제든 외교든 안보든 일만 터지면 헛발질이고 안팎의 망신을 산다. 이 대통령과 주변의 인적 진용의 한계와 부실을 자인한 셈이다.

국민 두려움 해소할 전략 화급
<…저는 이 소중한 땅에 기회가 넘치게 하고 싶습니다. 가난해도 희망이 있는 나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라,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대한민국의 지도를 세계로 넓히겠습니다.…선대의 기원이고 당대의 희망이며 후대와의 약속입니다.…> 이 대통령의 취임사 한 대목이다. 그를 선택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낸 말일 것이다. “두려워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했다. 대통령의 언약을 못 믿는 지금, 국민은 정말 두렵다.

08. 0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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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9 22:26   좋아요 0 | URL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는데 바다하리를 검색해 보세요.누구와 얼굴이 상당히 닮았어요.

로쟈 2008-07-30 01:14   좋아요 0 | URL
권투선수 말인가요? 오바마랑 닮은 건가요??

김상호 2008-07-30 01:50   좋아요 0 | URL
오바마랑 닮았다는 말씀이시죠? 제가 좋아하는 바다하리가 MB랑 닮았다고 하시는거면 슬프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30 12:33   좋아요 0 | URL
킥복서인데요.태권도 유단자이기도 합니다.단 WTO소속이 아니고 ITF소속입니다.격투기 선수들이 익힌 태권도는 모두 이 단체의 것입니다.일명 북한 식인데 주먹으로 안면 공격이 허용되니까 격투기에 적응이 쉽죠.ITF간부 한 명이 바다하리가 자기 단체 유단자라고 자랑이 대단하더군요.이번 8월호 신동아를 보면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쟈 2008-07-30 18:02   좋아요 0 | URL
신동아도 읽으시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30 12:41   좋아요 0 | URL
인문학자로서 요즘 많이 나오는 리더십 관련 서적에 대한 느낌은 어떠신지요? 저는 왠지 미덥지가 않아요.엘리트의 심리에 모든 걸 돌리는 일종의 심리학적 환원주의가 아닌가 해서요.

로쟈 2008-07-30 18:04   좋아요 0 | URL
<부시의 정신분석> 같은 책도 마찬가진데, 한편으론 주체로서의 '개인'의 역할을 무시할 수만도 없지요. '히딩크 리더십'을 봐도 그렇고.^^

노이에자이트 2008-07-30 22:0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정기구독했는데 동아일보 끊으면서 안 보구요,지금은 도서관에 가서 읽죠.월간조선,시대정신,한국논단 등 강경매파 매체 들도 자세히 봅니다.

로쟈 2008-07-30 22:06   좋아요 0 | URL
북한 관련으로는 읽을 거리들이 오히려 더 많을 것도 같군요. 색만 좀 빼면...

노이에자이트 2008-07-30 22:28   좋아요 0 | URL
시대정신이 가장 수준이 높고 한국논단은 좀 민망한 글도 많이 올라와요.발행인인 이도형 씨가 좀 민망한 말을 마구 내뱉는 사람이라서.하하하...근데 북한 관련 글은 이런 우익지보단 역사비평에 더 많아요.아...이번 신동아에 탈북자들이 북한의 교육제도에 대해 털어 놓은 기사가 있는데 북한 찬양 죄에 걸리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칭찬 일변도예요.한 번 읽어보세요.
송두율 씨가 썼다면 당장 조선일보에서 난리를 쳤을 정도입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탈정치에 반대하여' 장에서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그의 행적이 너무나도 유사한 또 다른 사례를 떠올리게 하기에, 지난달에 읽은 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5#). 대략 지난번 총리 재임시절 베를루스코니의 '방송장악' 시도가 현 이명박 정부의 유사 행태를 앞질러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베를루스코니의 과거가 이명박의 미래라는 것. 그러니 좀 주의해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네그리나 아감벤보다도 먼저 베를루스코니를!.. 

시사인(08. 06.21) 이탈리아 과거는 한국의 미래?

우리 세대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이탈리아 영화를 묻는다면 아마도 <인생은 아름다워>가 꼽힐 것이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비극 상황에서도 해학과 낙관의 가르침을 전해준 로베르토 베니니의 열연이 감동적이었다. 그 로베르토 베니니가 정치 운동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2005년 10월15일 인터뷰차 이탈리아 공영방송 라이(RAI)TV를 방문한 베니니는 저녁 8시 뉴스가 시작되자 카메라가 비추는 앵커 뒤로 돌진해 깡총깡총 뛰면서 “총리가 방금 사임했대요”라고 외쳤다. 물론 총리는 사임하지 않았지만 국민은 그의 ‘깜짝 풍자’에 웃었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문화 예산을 35% 삭감하는 식의 정책을 펴자 이에 반대하며 시위를 주도해온 터였다. 그가 라이TV 뉴스를 ‘퍼포먼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정권의 입’이 된 공영방송을 비판하려는 뜻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선대위 상임고문을 지낸 인사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데 이어 YTN 사장,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아리랑TV 사장, KBS 사장까지 대통령 측근이 임명되거나 하마평에 오르면서 정권의 방송 장악 우려를 낳고 있다. 이명박 시대의 방송 미디어를 미리 보려면 ‘이탈리아의 이명박’이라는 베를루스코니의 사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13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우파연합이 승리했다. 베를루스코니가 부활한 것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7개월 동안 총리를 지냈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총리를 역임한 거물이다. 그의 재임 시절 공과를 두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가 이탈리아 미디어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베를루스코니의 귀환에 이탈리아 언론인이 잔뜩 긴장하는 이유다.

베를루스코니는 CEO 출신이라는 점이 이명박 대통령과 닮았다. 선거 슬로건이 ‘경제 살리기’라는 것도 이명박 대통령과 닮은 점이다. 베를루스코니는 피닌베스트, 미디어셋 등의 미디어 기업과 일간지 ‘일 지오르날레’, 방송 채널 ‘이탈리아 우노’ ‘레테 콰트로’ 등을 거느린 ‘이탈리아의 루퍼트 머독’이다. 이탈리아 방송 시장은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셋 채널과 공영방송 라이 채널이 양분한다. 라이1 채널은 한국의 KBS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데 그것도 이제 베를루스코니 것이 됐다. 파이낸셜 뉴스는 6월19일자 기사에서 이탈리아 미디어 노출의 90%가 베를루스코니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됐다고 썼다.

공영방송 수호 시위도 닮은꼴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공영방송 관리는 의회가 의석 수만큼 나눠 맡는 방식이었다. 대체로 라이1 채널은 기독교민주당, 라이2는 사회당, 라이3은 공산당이 관리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정치 집단이 보도 내용에 관여하거나 압력을 넣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언론사 운영 경험으로 방송을 잘 아는 베를루스코니는 2001년 집권하자마자 라이 길들이기에 나섰다. 그는 이사 5명 중 3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채운 것도 모자라, 2003년 2월 이사회 운영에 자기가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삐딱한’ 시각을 가진 기자는 쫓겨났다. 엔조 비아지·미첼 산토르·다니엘레 루타치 등이 그랬다. 라이 뉴스는 이상해졌다. 2003년 7월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독일 출신 유럽의회 의원에게 “나치 강제수용소를 다룬 영화의 간수 역할에 완벽하게 어울린다”라고 농담을 했다가 외교적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라이TV는 “총리가 던진 농담에 유럽의회 의원들이 반발했다”라는 식으로 짤막하게 보도했다. 2003년 11월, 라이TV에 15년이나 출연해온 국민 여배우 사비나 구잔티는 정치 풍자 코미디 <RAIOT>를 시도했다. 1회 방송에서 구잔티는 베를루스코니로 분장해 총리를 풍자했으나 바로 출연 정지를 당했다. 미국의 보수 단체 프리덤하우스는 베를루스코니 집권 시기 이탈리아의 언론 자유는 세계 77위라고 발표했다.

물론 베를루스코니의 방송 장악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라이 이사회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라이 회장에 자기 심복을 심는 데는 몇 번이나 실패했다. 5년 동안 라이 회장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고 그 중에는 임명은 됐지만, 회장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일주일 만에 물러난 사람도 있었다(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서동구씨가 8일 만에 KBS 사장에서 물러난 일과 비슷하다). 2005년에도 (베를루스코니가 임명한) 방송통신부 장관이 추천한 회장 후보가 번번이 여론과 야당의 퇴짜를 맞자 결국 좌파 성향의 언론인인 페트루치올리가 회장이 됐다.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던 베를루스코니도 실제 공영방송 회장에 자기 사람을 앉힌 기간은 2년뿐이었다. 



국민의 저항도 심했다. 개악 방송법이 통과되고 라이 경영진이 전격 교체된 뒤인 2002년 3월 초, 전국에서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로마 시민은 라이 방송국 건물을 둘러싸고 인간띠를 만들며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외쳤다. 마치 요즘 한국의 촛불시위대가 KBS 수호에 나선 풍경과 비슷했다. 2006년 5월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중도좌파연합에 패배했다. 약속과 달리 베를루스코니 재임 기간에 이탈리아 경제성장률은 0.2%로 유럽에서 꼴찌 수준이었다. 새 총리가 된 로마노 프로디는 라이 회장 클라우디오 페르루치올리를 교체하지 않았다.

5월8일 베를루스코니가 취임한 이후 라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아직 라이 회장은 페르루치올리 그대로다. 이탈리아 밀란에서 활동하는 독일 저널리스트 커스틴 하우센은 <DW-World>에 쓴 칼럼에서 “요즘 이탈리아 언론인 중에는 정치적 압력을 의식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라며 “새로 정권을 잡은 베를루스코니는 어떤 식으로든 라이TV의 경영권을 교체하려 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신호철 기자)

08. 07. 28.

 

 

 

 

P.S.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지젝의 분석을 잠시 따라가본다. <지젝이 만난 레닌>의 545-549쪽, 그리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206-207쪽을 참조한 것이다(영어판을 옮긴 <지젝이 만난 레닌>과 독어판을 옮긴 <혁명이 다가온다>는 예전에 지적한 대로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지젝이 만난 레닌>의 542쪽 두번째 문단부터 547쪽 첫문단까지는 <혁명이 다가온다>에 들어 있지 않다). 인용은 <지젝이 만난 레닌>을 따르며 읽기의 편의를 위해서 약간 수정하기도 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2001년 5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면, 진짜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제3의 길 좌파'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승리에 관하여 피해할 될 주된 유혹은 그것을 보수-좌파 문화비평가의 전통(아도르노에서 비릴리오까지)에 따라 또 한번의 연습의 구실로 이용하는 것이다. 즉, 조작된 대중의 어리석음과 비판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의 소멸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승리의 의미를 과소평가하자는 뜻은 아니다. 헤겔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두 번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것도 그 한 예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도 두 번 선거에서 이겨야만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단순한 우연적 호기심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지만, 두번째는 우리가 더 깊은 필연성과 만나고 있음을 보여준다.(545-6쪽)

인용에서 "베를루스코니도 두번 선거에서 이겨야만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부정확하다. 이미, 1994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7개월간 총리를 역임한 바 있기에, 2001년의 승리는 그의 두번째 승리다. 원문도 "And it seems that Berlusconi also had to win the election twice for us to become aware of the full consequences of this event."이므로 "베를루스코니도 선거에서 두 번 이긴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사건의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정도로 이해해야겠다. 여기서 '사건'이란 대중 영합적 우파의 승리를 말한다(한데, 그는 이번 봄에 세번째 승리를 거두고 또 다시 총리가 됐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정도면 '이탈리아 좌파'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베를루스코니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그의 승리는 정치에서 도덕성의 역할에 관한 우울한 교훈을 준다. 커다란 도덕적-정치적 카타르시스(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했던 집권 기민당과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양극 체제를 파멸로 몰아넣은 10년 전의 반부패 운동, '깨끗한 손'의 궁극적 결과가 권자에 앉은 베를루스코니다. 이것은 루퍼트 머독이 영국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과 비슷하다. 머독은 기업 홍보 사업을 하듯이 정치 운동을 했다.(546쪽)

'10년 전의 반부패운동'이란 "1992년 부패 고위 공직자와 의원들을 추방한 ‘마니풀리테(깨끗한 손)'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 이후에 기독민주당과 공산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수많은 군소 정당으로 분열됐고, 계파와 지역 중심 의회 구성 방식 때문에 여ㆍ야당 어느쪽도 압도적 과반확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졌다고. 그런 정치적 상황의 최대 수혜자가 베를루스코니인 것이니 거의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승리를 루퍼트 머독의 경우와 비교했는데, 머독이 토니 블레어를 지지한 것은 알지만 자신이 소유한 언론을 베를루스코니처럼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동원했는지는 모르겠다. "머독은 기업 홍보 사업을 하듯이 정치 운동을 했다"의 원문도 "a political movement run as a business-publicity enterprise."인데, 일반적인 경향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베를루스코니 이후 이탈리아 정치는 아주 노골적인 '비즈니스의 장'이 되었다. 그가 이끄는 당이 '전진 이탈리아(Forza Italia)'당인데, '포르차 이탈리아!'란 말 자체가 축구의 응원 구호라고 한다(우리로 치면 '필승 코리아'당쯤 되겠다). 그러고 보니 베를루스코니 자신이 축구클럽 AC밀란의 구단주이다!

베를루스코니의 '전진 이탈리아(Forza Italia)'는 이제 정당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스포츠 팬클럽에 가깝다. 과거의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스포츠가 직접 정치화 되었다면(동독이 최고의 운동 선수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이제는 정치 자체가 스포츠 시합이 되어버렸다. 이런 비유를 더 밀고 나갈 수도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산업을 국유화했다면, 베를루스코니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 자체를 사유화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승리 밑에 잠복한 네오 파시즘의 위험에 대한 좌파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우려는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시즘은 여전히 결연한 정치적 기획이지만, 베를루스코니의 경우는 밑에 잠복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감춰놓은 이데올로기 기획은 없다는 말이다. 그냥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자신이 더 잘할 것이라는 뻔뻔스러운 확언만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베를루스코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탈정치다. 모든 서방 국가에서 '탈정치'의 궁극적 증거는 정부를 경영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 올바른 정치적 수준을 박탈당한 채 경영적 기능으로 재고안되고 있다.(546-7쪽)

"그냥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갈 것이며, 자신이 더 잘할 것이라는 뻔뻔스러운 확언만 있을 뿐이다."란 대목에서는 자신이 당선되면 주가지수가 두달 안에 3천까지 오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한 'CEO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명박은 베를루스코니와 마찬가지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탈정치다(이 '탈정치'의 한국식 표현이 '탈여의도 정치'이다). 이 '탈정치'는 '탈이념'이기도 해서, 베를루스코니와 마찬가지로 "감춰놓은 이데올로기 기획은 없다". 그걸 '실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주먹구구'에 가깝다. 거기에 적반하장격으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들리는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이다.  

베를루스코니식의 탈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인내해야 할까? 지젝의 전망은 낙관적이지 않다. "가까운 미래는 장-마리 르펜이나 팻 뷰캐넌 같은 노골적인 우익 선동가들의 것이 아니라, 베를루스코니나 하이더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대중 영합적 민족주의라는 양가죽을 쓴 이런 세계 자본의 옹호자들의 것이다. 그들의 '제3의 길 좌파' 사이의 투쟁은 세계 자본주의의 과잉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저지할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이다. '제3의 길'의 다문화주의적 관용이냐 아니면 대중 영합적 동성애 혐오냐? 이런 따분한 양자 택일이 전 지구화에 대한 유럽의 대답일까?"(549쪽) 여기서 '제3의 길 좌파'의 한국식 표현은 '좌파 신자유주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양자 택일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어지는 대목은 다시 <지젝이 만난 레닌>에만 포함돼 있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는 최악의 형태의 탈정치다. 반좌파 자유주의의 완고한 목소리를 내는 <이코노미스트>조차 어떻게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자가 총리가 될 수 있느냐고 신랄한 질문을 던지자, 베를루스코니는 이 잡지가 '공산주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했다! 이 말은 베를루스코니에게는 그의 탈정치에 반대하는 모든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옳다. 그외에는 그에게 진정으로 반대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건 '제3의 길' 좌파건 나머지는 모두 기본적으로 베를루스코니와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때깔이 다를 뿐이다. '제3의 길' 좌파가 과연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에 전 지구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따라서 베를루스코니의 편집적인 인식론 지도의 두 번째 측면 역시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즉 그의 승리가 더 급진적인 좌파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인식 말이다.(549쪽, 강조는 나의 것)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의 한국식 표현은 알다시피 '빨갱이들의 음모' 혹은 '주사파들의 음모'이고 '배후'이다. 이제까지 쇠고기 재협상에서 이명박 퇴진을 외치는 촛불의 목소리에 배후는 없었다. 하지만, 자유주의나 제3의 길 좌파가 우리의 배후가 될 수 없다면, 중요한 건 이제라도 보다 급진적이고 강력한 '배후'를 조직하는 일이다(촛불의 지구전과 조직화에 대해서는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 참조). 즉, 그들의 편집증적 망상에 사후적으로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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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용 대통령, 꿈만은 아니다!
    from 일체유심조 2008-08-18 16:52 
    정주영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유럽에서 완벽하게 성취한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당신들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라는 선거 구호로 세번 째 총리에 등극한 사람. 그는 1600 만 명 내외의 철벽 ...
 
 
노이에자이트 2008-07-29 22:25   좋아요 0 | URL
이태리는 공산당 및 좌파가 상당히 강한데 이런 인물을...하기야 공산당 및 좌파가 강한 프랑스도 사르코지 같은 인물이 당선되니까요.지젝이 이런 글도 썼군요.

로쟈 2008-07-30 01:14   좋아요 0 | URL
지젝이 주로 이런 글을 씁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30 12:34   좋아요 0 | URL
오호...그렇군요.

김상호 2008-08-04 21:41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네요. 진짜 섬뜩한건 이명박에게도 '그에게 진정으로 반대하는 자가 없진 않지만 거의 드물것'일 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사실 참여정부가 '정말로' 명박과 반대되는지 전 모르겠읍니다. 오히려 참여정부의 옹호자들은 '진정한' 시장경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하는 현실이거든요.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더욱 신자유주의에 천착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명박의 불평은 이해가 갑니다. '당신은 신자유주의를 하라고 해놓고 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것인가요?' 이런 식이겠죠.
 

촛불집회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의 조사가 마무리된 모양이다(조사결과는 오늘 발표되었다). 이번 조사를 위해 한국에 온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과의 인터뷰기사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개인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한데, 인터뷰 동영상은 원기사에서 볼 수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9489.html).

한겨레(08. 07. 18) [단독인터뷰] 앰네스티 조사관 “촛불집회는 위대한 피플파워”

“한국의 촛불집회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위대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이다.” 노마 강 무이코(41) 국제 앰네스티 조사관은 두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촛불집회를 지켜 본 느낌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촛불집회 조사결과 발표에 앞서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며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이코 조사관은 경찰이 방패와 물대포, 분말 소화기 등으로 시위대를 공격적으로 진압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와 곤봉은 살상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며 “내가 조사한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에 맞은 상처가 있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도망가다가 맞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주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신할 수 없다”며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무이코 조사관은 “시민들이 버스를 흔들고 밧줄을 매달아 끄는 행위도 명확한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이 전경 버스를 흔들 때 경찰이 버스 안에 전경들을 남겨 놓는 것을 보고 매우 불편했다”며 “버스 안 전경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해가 진 뒤 집회를 금지한 한국의 집시법과 관련해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라며 “시민들이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한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어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대화를 통한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입국해 촛불집회 현장의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했던 무이코 조사관은 18일 조사결과를 발표한 뒤 앰네스티 본부가 있는 영국으로 떠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국제 앰네스티가 특정 사안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했다. 한국에 조사를 나온 이유는 뭔가?

=나는 조사관으로서 한국에 자주 온다. 적어도 1년에 한번씩 온다. 앰네스티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특정 사안을 조사하러 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앰네스티 사무국이 지난 5월부터 촛불집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앰네스티 사무국이 나를 직접 한국에 보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경찰이 행사한 공권력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아직도 이 촛불집회가 위대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나는 ‘한국 촛불집회가 평화적’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나는 70~80년대 한국에서 자랐다. 당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며 경찰과 시민 사이에 더 공격적이고 위험한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촛불집회에서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전반적으로 이번 시위대는 평화로웠고, 대부분의 경찰 역시 전문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찰이 조사에 협조를 잘 해줬나?

=경찰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경찰 당국은 제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갈 수 있게 해줬다. 경찰병원에 입원한 경찰들도 만났고, 경찰의 작전 중에 폴리스라인 뒤에서 내가 선택한 경찰들과 인터뷰를 허락했다. 또 경찰서에서 연행된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다만 법무부가 나의 구치소 방문 및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고 경찰도 전역신청한 이아무개 상경에 대한 접견을 거부했다.

-한국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와 소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보나?

=물대포는 위험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 한다. 내가 조사해보니 물대포는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었다. 물대포를 사용하더라도 필요한 수칙을 지켜야 한다. 물대포를 맞는 사람과의 거리, 각도 등은 물론 수압 역시 규정에 맞아야 한다. 소화기는 70년대와 80년대에도 사용됐다. 그러나 그것은 불을 끄려는 용도였다. 지금은 화염병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화기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경찰은 소화기를 자주 쓰고 있다. 우려스럽다. 경찰이 소화기를 시민들의 얼굴에 직접 뿌려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군중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써 적절치 않다.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

-한국 경찰은 방패로 시민들을 때리기도 했다.

=(경찰에게) 방패와 곤봉은 방어용이다. 살상용이 아니다. 자기 방어용으로만 써야지 절대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내가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를 들어봤는데 아주 무겁고 튼튼했다. 이것을 눕혀서 수직으로 머리 등을 때리면 극히 위험하다. 내 조사에서 얼굴에 심각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을 맞은 상처가 선명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민들이 앞으로 나오다 맞은 것이 아니고, 도망가다 맞은 것을 의미한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경찰이 버스로 거리 행진 자체를 막거나 광장 진입을 통제하는 것은 어떻게 보나?

=국가마다 장애물을 설정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방식을 활용한다. 한국에선 버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공격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일반적 장애물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시청 광장을 봉쇄하는 것 또한 경찰의 권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청 광장을 빼면 모일 공간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시위대와 경찰이 절충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반대로 한국에선 시민들이 경찰 버스를 흔들거나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는 시위를 한다.

=경찰이 보여준 동영상으로 시위대가 경찰 버스에 줄을 매달아 끄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명확하게 불법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버스를 끌 때, 경찰(전경)이 그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러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매우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버스 안의 경찰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이 버스를 흔드는 행위를 알고 있었다면 버스에 경찰을 놔두면 안된다.

-다른 나라의 집회와 촛불집회를 비교한다면?

=국제사면위원회는 절대로 각국의 인권 상황을 비교하지 않는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모든 나라는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해가 진 후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이 판단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해가 진 뒤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다. 어떤 날은 해가 진 뒤에도 한참 동안 집회를 여는 것을 허용한다. 또 어떤 날은 원천봉쇄한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지 혼란스럽다.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면 규정과 법은 필요하다. 모든 나라가 집회를 규율하는 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해가 진 뒤 집회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해가 진 뒤에도)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민들이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방해받지 않고 집회를 열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당신이 거주하는 영국에선 경찰이 시위 관리를 어떻게 하나?

=영국 경찰은 시위자들이 시위를 할 수 있게 하고 (시위대의) 안전을 지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리 수집한 정보에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것이란 확신이 서면 경찰은 다른 근무복을 입는다.경찰은 평화시위가 가능하도록 시위대를 돕는 것이 주 업무다. 영국 경찰관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브리핑을 받게 된다. 브리핑의 뼈대는 ‘시민들이 정부에 반대하려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지, 경찰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불필요하게 무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교육을 받는다. 모든 경찰 활동은 합법적이고 전문적이며, 적절하면서도 참을성있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교육한다.

-영국에서 연행에 관한 지침은 어떤가?

=영국 법은 ‘연행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체포도 꼭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경찰관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보호장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구의 사용에 앞서 충분한 설명을 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 ‘시위자와 대화를 하라’는 내용이 브리핑 내용에 포함돼 있다. 그리고 과잉 대응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에선 인도에서 시위하는 시민도 연행한 사례가 있다.

=평화적으로 인도에 있던 시민들을 잡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인도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잡혀갔거나 심지어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구경하고 있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이들의 죄목이나 기소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인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자의적 체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시민들과 경찰 모두에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해선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서 믿음과 이해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허재현기자)

08.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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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는 격주로 김우창칼럼이 연재된다. 오늘자 칼럼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이었는데, 아침 지하철에서 두 번 읽고 덮어두었다. 최근의 칼럼 가운데 아무래도 인상적인 건 '현시국의 위기적 성격'이란 제목의 지난회 칼럼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아도 이에 대한 논평을 찾을 수 없다(나 혼자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인가?). '장기화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현시국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칼럼에서 언급되는 레닌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또 김우창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바로 옮겨놓지 않고 묵혀두었는데, 생각난 김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7. 03) [김우창칼럼]현시국의 위기적 성격

장기화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부가 의학적·정치적 영향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불충분하고, 지연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시위의 구호와 요구가 달라졌다. 사태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로만, 또는 그에 대한 일정한 타협안의 제시로만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열기에 찬 시위 현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의 성토장이 되었다. 요즘 쓰이는 비유로 ‘아고라’가 된 것이다. 불만과 문제의식의 표현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현실적 행동에는, 일반적 정치의식 이상의 실천 항목, 그리고 목표의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촛불시위가 표현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시정에 대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현실 조건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하여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답변은 ‘가부’ 둘 중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가’이기 쉽다. 어떤 경우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극단적인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임이다. 이 요구는 그 다음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 ‘역사의 역전’에 갈등 불가피 -
20세기 초에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문서가 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혁명은 대중의 자연 발생적 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혁명적 정당, 다시 말하면, 지도부의 선도(先導)에 의해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전위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도 배제한다고 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모순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여러 모순을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까지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려고 한 이론이라고 비판된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러한 생각에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치 행동의 요건이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목표와 방법, 조직과 계획 그리고 이것들의 일관성(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배타적인 지도부를 요구하는가 어떤가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끈질긴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적 정치 열기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촛불시위의 요구는 그간에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더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로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쇠고기 문제 아래에는 넓은 정치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경제 일변도의 그리고 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에 대한 깊은 불만이 있다. 또 근년에 심화된 빈부 격차에서 오는 계급적 불만이 있다. 그리고 갈등의 요인으로 여러 다른 정치 세력과 집단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데에는 이러한 불만의 바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그 성장 우선 정책에 있어서, 그리고 그 지지기반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복고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 공식 절차가 어떻게 되었든, 피차에 여러 측면에서 현상을 인정하고 그것에 타협하면서 민주정부가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 다시 한 번 대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진보·보수 다시 대타협 필요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선거가 통상적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전환을 나타낸다고 하면, 우선 이 전환이 잠재적으로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위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부는 그 정책이나 인적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정치 노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정부의 노선과 정책과 민주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참작하고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념적으로나 현실로나 기존 질서가 된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면서 그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 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그 세력도 세대나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그 전의 민주화 세력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정치 이념과 현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닌 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 업적으로서의 민주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결단이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적 헌정질서를 대신하는 다른 혁명적 대안은 역사적 후퇴를 의미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적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곳이 국회이다. 지금의 정치적 난국을 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회의 정상화가 하나의 방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야당 책무의 하나는 국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시국의 위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여당은 이것을 위하여 적절한 양보를 준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정치 행동은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와 현시점에서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7. 17.

P.S. 오늘이 마침 제헌절이기도 한 만큼 '민주적 헌정질서 vs 혁명적 대안'이란 선택지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요점만 간추린다. 먼저, '장기화된 촛불시위'가 의미하는 바, 또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번주 한겨레21의 표지기사 '촛불의 지구전'(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을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레닌과 현시국에 대해서는 어제 올려둔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2189868)를 참고할 수 있다. 페이퍼에서 언급된 토론회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사는 '촛불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8/20080710/20080710040800.html)을 참조. 더불어, 현시국과 관련하여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11123)를 일독해볼 만하다.

그리고, 이제 김우창 교수의 칼럼에서 흥미로운 대목들 혹은 지점들을 짚어보자. 일단 그는 현시국에 대한 이해 자체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된다면, 일단 정치적 행동으로서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인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 가령, (1)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이냐 (2)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냐. 후자라면 '혁명'을 뜻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게 김교수가 궁금해하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한 방책으로 김교수는 지난 대선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실 이 대목이 의외로 흥미롭다. 그는 보수쪽에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민정부'부터 카운트하고 있지만, 87년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은 직선제를 통해서 성립한 노태우 정부부터이다. 소위 '87년 체제'를 가리키며, 이것이 '민주혁명'의 성과이다. 한데, 이번 이명박 정부는 그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서 벗어나 성립한 정부이며,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전? 전두환의 군사정권과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있었다. 이명박정부는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 과감한 지적 아닌가? 김교수는 바로 유보를 단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라는 점에서는 군사독재나 유신독재와는 다르다(그럼에도 이 정부의 인사에서 과거 국보위 참여 전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다('민주화 세력'에 대하여 이들은 자칭 '산업화 세력'이다). 때문에,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견해 아닌가?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 그러니까 김우창교수에 따르면, '문민정부'(김영삼)에서 '국민의 정부'(김대중)로의 정권교체는 유사 정권교체이다. 그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계승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군사독재 이후 진짜 정권교체는 이명박정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비록 복고적/퇴행적이라 하더라도). 20년만이다! 물론 이러한 '복귀'에 따르는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여기서 김우창 교수의 '현자적' 예지는 '대타협의 정신'을 주문한다. 그런데 그 모델이 재미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는 것. 구체적으로 그 '대타협'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제시돼 있지 않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6.29 선언 같은 것이다. 어쨌거나 국민적 요구사항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전면적인 파국은 면하게 했던 것이니까 '대타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대타협의 자세를 이제 현정치권에도 다시금 요청하는 것이다. 즉, 이 정부는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고 (자칭)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해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래야지만 현상황에서 '민주체제'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이 현시국에 직면하여 김우창교수가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해 찾은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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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꾼 2008-07-19 00:25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최근에 레닌, 트로츠키, 마오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반가운 글이네요. 왠지 혁명을 준비해야 할 분위기가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
예전에 박노자 선생 얘기로는 레닌에 비해 트로츠키가 훨씬 뛰어난 문장가라고 하시던데 제 경우에는 레닌에게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예상치 못한 유머와 비꼼등이 있어 읽으면서 몇번 웃었습니다
박종철 출판사 판 '무엇을 할 것인가?'의 꿈과 현실의 관계(222쪽)는 지젝이 인용하기 좋을만한 문구 같습니다

로쟈 2008-07-19 10:55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도 방대한 저작을 남겼지만 레닌도 엄청납니다. 소련시절에 나온 '전집'에 55권짜리가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웬만한 전업작가보다도 많은 분량인데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 등은 제대로 된 장정으로 다시 나왔으면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23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이번 <시대정신> 여름호 건국6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했더군요.경향신문에 정기기고하는 사람이 뉴라이트 계간지에...조금 이상했어요.

로쟈 2008-07-20 12:03   좋아요 0 | URL
기본적인 입장은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와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먼 거리는 아니죠. 최장집 교수도 그렇지만 '중도'라고 해야겠습니다(현자들은 보통 중용의 길을 선호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30   좋아요 0 | URL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에선가 최장집 교수는 시민단체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를 보이지 않더라구요.진보 이론가를 연구하고 소개하긴 했지만 진보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조선일보가 사상검증인가 뭔가 해가지고 좌익으로 알려졌지만.

로쟈 2008-07-21 10:21   좋아요 0 | URL
시민단체를 신뢰한다고 좌파나 진보가 되는 건 아닌 듯한데요(한국적 특성상). 그리고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엘리트 학자가 '좌파' 행세를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글샘 2008-07-21 11:08   좋아요 0 | URL
소통의 문제라고 그렇게 강조를 해 왔잖아요. 진즉에 대타협이 이뤄졌더라면 촛불은 벌써 꺼졌겠죠. 지금 전대협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면의 촛불이 타오르는 데 기름을 부은 이들은 정부입니다. 쇠고기에다가 독도에다가 끝없는 말바꾸기뿐인 반성... 강행에다가 폭행... 이런데도 연구실에 앉아서 음, 이건 혁명의 조건에서 뭐가 부족한 걸가...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거나 비양심적인 일이거나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7-21 21:57   좋아요 0 | URL
문제는 '어리석거나 비양심적인' 사람들까지도 끌어모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진보가 정말로 헤게모니를 쟁취하려 한다면...

드팀전 2008-07-22 11:5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얌전하게 댓글을 달고 마셨군요.남의 집 페이퍼라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담론 영역에 계신 분들이니까 정당한 댓글조차 비겁한 변명처럼 보일 것을 우려해서가 아닐까 착각에 가까운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연구실에 있지 않은 제가 반대의견을 좀 올릴까 합니다. 좀 넓게 생각하면 글샘님의 의견은 '이론/실천'의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작금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반이론적 정서'가 있지 않나싶습니다. 여기에는 이론이 고담준론화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게 된데 -역사적-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상아탑에 틀어박혀서 먹을거리를 위해 '이론'을 반찬삼았던 경향에 대한 반감같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반감은 반면에 '지식인'에 대한 기대감이-전통적으로 존재해 왔던- 실망으로 바뀌면서 고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특히 몇 십년전부터 강준만을 필두로 시작된 '지식인 실명비판'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강준만은 실명비판을 통해 '강단좌파'들을 보수세력에 맞먹는 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맞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유념해야될 것은 이것이 '이론'과 '실천'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준만이 주로 비판한 사람들은 -좀 거칠기는 한데- 급진좌파적 이론과 이율배반적인 우파적인 실천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일상적 파시즘론이 나왓을 때 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에 대한 수렴과 또 비판이 있었던데 반해 강준만은 예를 들어 임지현교수가 조선일보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를 비판했습니다.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면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을 상호관계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거리의 경험은 가끔 '실천'의 흥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니지만 상호침투적 과정 조차 망각하게 되는 경우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적인 사건에는 이론적 전위가 있어왔습니다. 또한 가장 훌륭한 혁명가들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닌이 대표적인 경우겠지요.

저는 상아탑이 '대중의 언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늘 불만입니다.빌헬름 라이히가 좌파가 형이상학과 개념화에 열중하느라고 대중의 언어를,대중의 심리를 놓치는 우를 범했다고 이의 복구를 주창한 말에 동의합니다. 또한 호치민이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중화실패'를 지적해야하는 바이지 '담론공간' 자체에 대해 비판할 것은 아닙니다. 즉 글샘님의 진보를 향한 의지와 행동은 존중하지만 '진보'와 '참여'의 범위에 조금 더 다양성의 측면이 보강되어야 할 듯 보입니다.

아시겟지만...전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로쟈 2008-07-22 10:2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댓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론/실천의 이분법은 사실 제가 염두에 둔 초점은 아니구요(그 정도는 우리도 벗어나 있다는 판단도 듭니다), 제 고민은 '다수성'의 문제입니다. 민주정에서 왜 '다수'의 지배가 관철되지 않는가(책도 나와 있죠, 왜 80이 20에게 지는가, 요즘 같아선 20도 안되는데). 한데, 이 '다수'가 보면 TV 드라마 보고, 아이들 학원 보내고, 게임하고, 주식하고, MB 욕하고,집값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대협의 '강철대오'가 변화를 가져올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수적인(혹은 중도적인) 다수가 움직여야 하고, 다수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지구전입니다.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제 관심은 그 지구전에 있습니다...

드팀전 2008-07-22 16:35   좋아요 0 | URL
네...저는 마지막 문장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합니다. 제가 댓글을 단 것은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로쟈님은 이미 넘어섰다고 말씀하시지만-여전히 존재하는 '이론/실천'의 이분법과 '반이론적 분위기'에 대한 '비이론가'의 '이론에 대한 옹호' 같은 것입니다.

제 회사에도 진보적인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의외로 상황별 대응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을 보편화하고 정식화하여 나아갈수 있는 과정 자체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마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운동처럼 말입니다. 로쟈님이 지구전을 말하셨고..제가 그람시의 진지전을 이야기한 것도 하루벌어 하루 사는 운동말고 지속적이고 실제적 변화를 이루는 과제를 고민해보자는 차원이 아닐까 합니다.

전 요즘 행여 짤릴 경우 부업으로(아니 그때가 되면 생업이 될까요? ^^) 뭘해야하나..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그런데 제길..할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절망적인데요.

ㅜㅜ 아이는 땡글 땡글 영글어가는데..푸우..이제 점심먹으러 갈까요? 식사 잘 하세요.

로쟈 2008-07-22 22:48   좋아요 0 | URL
조만간 <파이트클럽>에서처럼'자기구타'의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아이들도 있는데...
 

며칠간 준-이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원룸텔' 생활도 하게 됐고. 한 평 조금 넘을 듯싶은 공간은 모스크바 체류시절의 기숙사 방보다는 약간 작지만 시설은 '호텔급'이다. 다만 창문이 없어 '전망'도 없다는 게 약간 흠인데(대신에 더 조용하다고 한다. 그럴 거 같지 않지만), '고급 감옥'으로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사실 도서관 시설이 잘 갖춰진 감옥은 내가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이 '감옥'은 이름도 '노블스 레지던스'다!). 엊저녁 입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무선 인터넷의 강도가 좀 약한 탓에 바로 글을 올리거나 하진 못했다(자주 끊기기까지 한다). 오늘은 시범삼아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4#).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 사건도 어제 있었지만 '바깥'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해 보인다. '이거 뭥미?'의 세상이다. 어제도 '촛불'은 계속되었으므로 칼럼에서 말하는 '이중 권력', 혹은 '이중 국가'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겠다. 우리는 과연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시사인(08. 06. 21)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2008년 6월 중순 현재, 많은 사람이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한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 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왕 체제의 기묘한 권력 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 전야? 에이, 설마!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어서이다.

‘민족’‘통일’은 강한 국가의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 가져
한편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더불어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따위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 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 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1000원짜리 김밥을 먹는 사람과 1만5000원 하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 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 국가가 문제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 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 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기가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이게 뭐야’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박권일/ <88만원 세대> 저자) 

08. 07. 13.

P.S. '국가의 후퇴'와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책은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의 퇴각>(푸른길, 2001)이다. 저자의 <매드 머니>(푸른길, 2000), <국가와 시장>(푸른길, 2005) 등이 모두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교재형 책들이라 재미있지는 않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세계 경제발전의 정치적인 논리'를 다룬 <자본과 공모>(휴먼&북스, 2008)가 눈길을 끈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름길을 제시하는 책. 저자는 성장을 강화하거나 혹은 반대로 국가의 성장 전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정치적 동기들을 탐구한다. 리스크와 불확실성 사이의 경계선을 살피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경제 성장 추진 동력을 분석한다."고 소개돼 있는데, 이 경우 성장을 위해서 국가와 자본의 긴밀한 연루와 공모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국가의 귀환에 대한 논리는 곧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맞닿은 것이 아닐까 싶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 등이 떠오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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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3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8-07-13 20:02   좋아요 0 | URL
책들을 이사보내시더니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는건가요?^^

로쟈 2008-07-13 20:3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들도 호강하고 있고 저도 나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호텔급'이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4 00:15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긴 쉽지만 마무리가 어려워요.촛불집회도 마찬가지죠.촛불 이후에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촛불 시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도 견해가 엇갈리는데 그 원인은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지 합의가 안 되었거나 생각을 안 했거나 했기 때문입니다.정말 어려운 문제죠.
그리고 저도 서재에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로쟈 2008-07-14 00:17   좋아요 0 | URL
바로 즐찾을 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