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준-이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원룸텔' 생활도 하게 됐고. 한 평 조금 넘을 듯싶은 공간은 모스크바 체류시절의 기숙사 방보다는 약간 작지만 시설은 '호텔급'이다. 다만 창문이 없어 '전망'도 없다는 게 약간 흠인데(대신에 더 조용하다고 한다. 그럴 거 같지 않지만), '고급 감옥'으로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사실 도서관 시설이 잘 갖춰진 감옥은 내가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이 '감옥'은 이름도 '노블스 레지던스'다!). 엊저녁 입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무선 인터넷의 강도가 좀 약한 탓에 바로 글을 올리거나 하진 못했다(자주 끊기기까지 한다). 오늘은 시범삼아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4#).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 사건도 어제 있었지만 '바깥'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해 보인다. '이거 뭥미?'의 세상이다. 어제도 '촛불'은 계속되었으므로 칼럼에서 말하는 '이중 권력', 혹은 '이중 국가'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겠다. 우리는 과연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시사인(08. 06. 21)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2008년 6월 중순 현재, 많은 사람이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한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 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왕 체제의 기묘한 권력 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 전야? 에이, 설마!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어서이다.
‘민족’‘통일’은 강한 국가의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 가져
한편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더불어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따위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 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 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1000원짜리 김밥을 먹는 사람과 1만5000원 하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 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 국가가 문제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 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 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기가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이게 뭐야’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박권일/ <88만원 세대> 저자)
08. 07. 13.


P.S. '국가의 후퇴'와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책은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의 퇴각>(푸른길, 2001)이다. 저자의 <매드 머니>(푸른길, 2000), <국가와 시장>(푸른길, 2005) 등이 모두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교재형 책들이라 재미있지는 않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세계 경제발전의 정치적인 논리'를 다룬 <자본과 공모>(휴먼&북스, 2008)가 눈길을 끈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름길을 제시하는 책. 저자는 성장을 강화하거나 혹은 반대로 국가의 성장 전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정치적 동기들을 탐구한다. 리스크와 불확실성 사이의 경계선을 살피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경제 성장 추진 동력을 분석한다."고 소개돼 있는데, 이 경우 성장을 위해서 국가와 자본의 긴밀한 연루와 공모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국가의 귀환에 대한 논리는 곧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맞닿은 것이 아닐까 싶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 등이 떠오르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