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는 격주로 김우창칼럼이 연재된다. 오늘자 칼럼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이었는데, 아침 지하철에서 두 번 읽고 덮어두었다. 최근의 칼럼 가운데 아무래도 인상적인 건 '현시국의 위기적 성격'이란 제목의 지난회 칼럼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아도 이에 대한 논평을 찾을 수 없다(나 혼자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인가?). '장기화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현시국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칼럼에서 언급되는 레닌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또 김우창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바로 옮겨놓지 않고 묵혀두었는데, 생각난 김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7. 03) [김우창칼럼]현시국의 위기적 성격

장기화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부가 의학적·정치적 영향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불충분하고, 지연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시위의 구호와 요구가 달라졌다. 사태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로만, 또는 그에 대한 일정한 타협안의 제시로만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열기에 찬 시위 현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의 성토장이 되었다. 요즘 쓰이는 비유로 ‘아고라’가 된 것이다. 불만과 문제의식의 표현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현실적 행동에는, 일반적 정치의식 이상의 실천 항목, 그리고 목표의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촛불시위가 표현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시정에 대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현실 조건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하여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답변은 ‘가부’ 둘 중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가’이기 쉽다. 어떤 경우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극단적인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임이다. 이 요구는 그 다음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 ‘역사의 역전’에 갈등 불가피 -
20세기 초에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문서가 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혁명은 대중의 자연 발생적 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혁명적 정당, 다시 말하면, 지도부의 선도(先導)에 의해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전위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도 배제한다고 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모순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여러 모순을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까지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려고 한 이론이라고 비판된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러한 생각에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치 행동의 요건이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목표와 방법, 조직과 계획 그리고 이것들의 일관성(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배타적인 지도부를 요구하는가 어떤가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끈질긴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적 정치 열기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촛불시위의 요구는 그간에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더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로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쇠고기 문제 아래에는 넓은 정치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경제 일변도의 그리고 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에 대한 깊은 불만이 있다. 또 근년에 심화된 빈부 격차에서 오는 계급적 불만이 있다. 그리고 갈등의 요인으로 여러 다른 정치 세력과 집단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데에는 이러한 불만의 바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그 성장 우선 정책에 있어서, 그리고 그 지지기반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복고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 공식 절차가 어떻게 되었든, 피차에 여러 측면에서 현상을 인정하고 그것에 타협하면서 민주정부가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 다시 한 번 대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진보·보수 다시 대타협 필요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선거가 통상적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전환을 나타낸다고 하면, 우선 이 전환이 잠재적으로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위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부는 그 정책이나 인적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정치 노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정부의 노선과 정책과 민주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참작하고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념적으로나 현실로나 기존 질서가 된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면서 그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 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그 세력도 세대나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그 전의 민주화 세력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정치 이념과 현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닌 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 업적으로서의 민주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결단이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적 헌정질서를 대신하는 다른 혁명적 대안은 역사적 후퇴를 의미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적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곳이 국회이다. 지금의 정치적 난국을 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회의 정상화가 하나의 방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야당 책무의 하나는 국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시국의 위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여당은 이것을 위하여 적절한 양보를 준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정치 행동은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와 현시점에서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7. 17.

P.S. 오늘이 마침 제헌절이기도 한 만큼 '민주적 헌정질서 vs 혁명적 대안'이란 선택지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요점만 간추린다. 먼저, '장기화된 촛불시위'가 의미하는 바, 또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번주 한겨레21의 표지기사 '촛불의 지구전'(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을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레닌과 현시국에 대해서는 어제 올려둔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2189868)를 참고할 수 있다. 페이퍼에서 언급된 토론회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사는 '촛불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8/20080710/20080710040800.html)을 참조. 더불어, 현시국과 관련하여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11123)를 일독해볼 만하다.

그리고, 이제 김우창 교수의 칼럼에서 흥미로운 대목들 혹은 지점들을 짚어보자. 일단 그는 현시국에 대한 이해 자체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된다면, 일단 정치적 행동으로서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인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 가령, (1)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이냐 (2)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냐. 후자라면 '혁명'을 뜻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게 김교수가 궁금해하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한 방책으로 김교수는 지난 대선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실 이 대목이 의외로 흥미롭다. 그는 보수쪽에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민정부'부터 카운트하고 있지만, 87년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은 직선제를 통해서 성립한 노태우 정부부터이다. 소위 '87년 체제'를 가리키며, 이것이 '민주혁명'의 성과이다. 한데, 이번 이명박 정부는 그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서 벗어나 성립한 정부이며,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전? 전두환의 군사정권과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있었다. 이명박정부는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 과감한 지적 아닌가? 김교수는 바로 유보를 단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라는 점에서는 군사독재나 유신독재와는 다르다(그럼에도 이 정부의 인사에서 과거 국보위 참여 전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다('민주화 세력'에 대하여 이들은 자칭 '산업화 세력'이다). 때문에,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견해 아닌가?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 그러니까 김우창교수에 따르면, '문민정부'(김영삼)에서 '국민의 정부'(김대중)로의 정권교체는 유사 정권교체이다. 그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계승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군사독재 이후 진짜 정권교체는 이명박정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비록 복고적/퇴행적이라 하더라도). 20년만이다! 물론 이러한 '복귀'에 따르는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여기서 김우창 교수의 '현자적' 예지는 '대타협의 정신'을 주문한다. 그런데 그 모델이 재미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는 것. 구체적으로 그 '대타협'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제시돼 있지 않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6.29 선언 같은 것이다. 어쨌거나 국민적 요구사항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전면적인 파국은 면하게 했던 것이니까 '대타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대타협의 자세를 이제 현정치권에도 다시금 요청하는 것이다. 즉, 이 정부는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고 (자칭)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해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래야지만 현상황에서 '민주체제'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이 현시국에 직면하여 김우창교수가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해 찾은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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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꾼 2008-07-19 00:25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최근에 레닌, 트로츠키, 마오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반가운 글이네요. 왠지 혁명을 준비해야 할 분위기가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
예전에 박노자 선생 얘기로는 레닌에 비해 트로츠키가 훨씬 뛰어난 문장가라고 하시던데 제 경우에는 레닌에게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예상치 못한 유머와 비꼼등이 있어 읽으면서 몇번 웃었습니다
박종철 출판사 판 '무엇을 할 것인가?'의 꿈과 현실의 관계(222쪽)는 지젝이 인용하기 좋을만한 문구 같습니다

로쟈 2008-07-19 10:55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도 방대한 저작을 남겼지만 레닌도 엄청납니다. 소련시절에 나온 '전집'에 55권짜리가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웬만한 전업작가보다도 많은 분량인데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 등은 제대로 된 장정으로 다시 나왔으면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23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이번 <시대정신> 여름호 건국6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했더군요.경향신문에 정기기고하는 사람이 뉴라이트 계간지에...조금 이상했어요.

로쟈 2008-07-20 12:03   좋아요 0 | URL
기본적인 입장은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와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먼 거리는 아니죠. 최장집 교수도 그렇지만 '중도'라고 해야겠습니다(현자들은 보통 중용의 길을 선호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30   좋아요 0 | URL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에선가 최장집 교수는 시민단체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를 보이지 않더라구요.진보 이론가를 연구하고 소개하긴 했지만 진보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조선일보가 사상검증인가 뭔가 해가지고 좌익으로 알려졌지만.

로쟈 2008-07-21 10:21   좋아요 0 | URL
시민단체를 신뢰한다고 좌파나 진보가 되는 건 아닌 듯한데요(한국적 특성상). 그리고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엘리트 학자가 '좌파' 행세를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글샘 2008-07-21 11:08   좋아요 0 | URL
소통의 문제라고 그렇게 강조를 해 왔잖아요. 진즉에 대타협이 이뤄졌더라면 촛불은 벌써 꺼졌겠죠. 지금 전대협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면의 촛불이 타오르는 데 기름을 부은 이들은 정부입니다. 쇠고기에다가 독도에다가 끝없는 말바꾸기뿐인 반성... 강행에다가 폭행... 이런데도 연구실에 앉아서 음, 이건 혁명의 조건에서 뭐가 부족한 걸가...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거나 비양심적인 일이거나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7-21 21:57   좋아요 0 | URL
문제는 '어리석거나 비양심적인' 사람들까지도 끌어모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진보가 정말로 헤게모니를 쟁취하려 한다면...

드팀전 2008-07-22 11:5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얌전하게 댓글을 달고 마셨군요.남의 집 페이퍼라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담론 영역에 계신 분들이니까 정당한 댓글조차 비겁한 변명처럼 보일 것을 우려해서가 아닐까 착각에 가까운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연구실에 있지 않은 제가 반대의견을 좀 올릴까 합니다. 좀 넓게 생각하면 글샘님의 의견은 '이론/실천'의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작금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반이론적 정서'가 있지 않나싶습니다. 여기에는 이론이 고담준론화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게 된데 -역사적-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상아탑에 틀어박혀서 먹을거리를 위해 '이론'을 반찬삼았던 경향에 대한 반감같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반감은 반면에 '지식인'에 대한 기대감이-전통적으로 존재해 왔던- 실망으로 바뀌면서 고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특히 몇 십년전부터 강준만을 필두로 시작된 '지식인 실명비판'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강준만은 실명비판을 통해 '강단좌파'들을 보수세력에 맞먹는 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맞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유념해야될 것은 이것이 '이론'과 '실천'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준만이 주로 비판한 사람들은 -좀 거칠기는 한데- 급진좌파적 이론과 이율배반적인 우파적인 실천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일상적 파시즘론이 나왓을 때 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에 대한 수렴과 또 비판이 있었던데 반해 강준만은 예를 들어 임지현교수가 조선일보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를 비판했습니다.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면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을 상호관계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거리의 경험은 가끔 '실천'의 흥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니지만 상호침투적 과정 조차 망각하게 되는 경우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적인 사건에는 이론적 전위가 있어왔습니다. 또한 가장 훌륭한 혁명가들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닌이 대표적인 경우겠지요.

저는 상아탑이 '대중의 언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늘 불만입니다.빌헬름 라이히가 좌파가 형이상학과 개념화에 열중하느라고 대중의 언어를,대중의 심리를 놓치는 우를 범했다고 이의 복구를 주창한 말에 동의합니다. 또한 호치민이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중화실패'를 지적해야하는 바이지 '담론공간' 자체에 대해 비판할 것은 아닙니다. 즉 글샘님의 진보를 향한 의지와 행동은 존중하지만 '진보'와 '참여'의 범위에 조금 더 다양성의 측면이 보강되어야 할 듯 보입니다.

아시겟지만...전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로쟈 2008-07-22 10:2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댓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론/실천의 이분법은 사실 제가 염두에 둔 초점은 아니구요(그 정도는 우리도 벗어나 있다는 판단도 듭니다), 제 고민은 '다수성'의 문제입니다. 민주정에서 왜 '다수'의 지배가 관철되지 않는가(책도 나와 있죠, 왜 80이 20에게 지는가, 요즘 같아선 20도 안되는데). 한데, 이 '다수'가 보면 TV 드라마 보고, 아이들 학원 보내고, 게임하고, 주식하고, MB 욕하고,집값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대협의 '강철대오'가 변화를 가져올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수적인(혹은 중도적인) 다수가 움직여야 하고, 다수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지구전입니다.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제 관심은 그 지구전에 있습니다...

드팀전 2008-07-22 16:35   좋아요 0 | URL
네...저는 마지막 문장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합니다. 제가 댓글을 단 것은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로쟈님은 이미 넘어섰다고 말씀하시지만-여전히 존재하는 '이론/실천'의 이분법과 '반이론적 분위기'에 대한 '비이론가'의 '이론에 대한 옹호' 같은 것입니다.

제 회사에도 진보적인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의외로 상황별 대응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을 보편화하고 정식화하여 나아갈수 있는 과정 자체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마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운동처럼 말입니다. 로쟈님이 지구전을 말하셨고..제가 그람시의 진지전을 이야기한 것도 하루벌어 하루 사는 운동말고 지속적이고 실제적 변화를 이루는 과제를 고민해보자는 차원이 아닐까 합니다.

전 요즘 행여 짤릴 경우 부업으로(아니 그때가 되면 생업이 될까요? ^^) 뭘해야하나..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그런데 제길..할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절망적인데요.

ㅜㅜ 아이는 땡글 땡글 영글어가는데..푸우..이제 점심먹으러 갈까요? 식사 잘 하세요.

로쟈 2008-07-22 22:48   좋아요 0 | URL
조만간 <파이트클럽>에서처럼'자기구타'의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아이들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