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는 격주로 김우창칼럼이 연재된다. 오늘자 칼럼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이었는데, 아침 지하철에서 두 번 읽고 덮어두었다. 최근의 칼럼 가운데 아무래도 인상적인 건 '현시국의 위기적 성격'이란 제목의 지난회 칼럼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아도 이에 대한 논평을 찾을 수 없다(나 혼자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인가?). '장기화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현시국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칼럼에서 언급되는 레닌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또 김우창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바로 옮겨놓지 않고 묵혀두었는데, 생각난 김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7. 03) [김우창칼럼]현시국의 위기적 성격
장기화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부가 의학적·정치적 영향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불충분하고, 지연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시위의 구호와 요구가 달라졌다. 사태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로만, 또는 그에 대한 일정한 타협안의 제시로만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열기에 찬 시위 현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의 성토장이 되었다. 요즘 쓰이는 비유로 ‘아고라’가 된 것이다. 불만과 문제의식의 표현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현실적 행동에는, 일반적 정치의식 이상의 실천 항목, 그리고 목표의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촛불시위가 표현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시정에 대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현실 조건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하여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답변은 ‘가부’ 둘 중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가’이기 쉽다. 어떤 경우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극단적인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임이다. 이 요구는 그 다음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 ‘역사의 역전’에 갈등 불가피 -
20세기 초에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문서가 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혁명은 대중의 자연 발생적 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혁명적 정당, 다시 말하면, 지도부의 선도(先導)에 의해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전위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도 배제한다고 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모순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여러 모순을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까지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려고 한 이론이라고 비판된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러한 생각에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치 행동의 요건이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목표와 방법, 조직과 계획 그리고 이것들의 일관성(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배타적인 지도부를 요구하는가 어떤가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끈질긴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적 정치 열기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촛불시위의 요구는 그간에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더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로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쇠고기 문제 아래에는 넓은 정치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경제 일변도의 그리고 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에 대한 깊은 불만이 있다. 또 근년에 심화된 빈부 격차에서 오는 계급적 불만이 있다. 그리고 갈등의 요인으로 여러 다른 정치 세력과 집단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데에는 이러한 불만의 바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그 성장 우선 정책에 있어서, 그리고 그 지지기반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복고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 공식 절차가 어떻게 되었든, 피차에 여러 측면에서 현상을 인정하고 그것에 타협하면서 민주정부가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 다시 한 번 대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진보·보수 다시 대타협 필요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선거가 통상적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전환을 나타낸다고 하면, 우선 이 전환이 잠재적으로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위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부는 그 정책이나 인적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정치 노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정부의 노선과 정책과 민주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참작하고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념적으로나 현실로나 기존 질서가 된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면서 그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 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그 세력도 세대나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그 전의 민주화 세력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정치 이념과 현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닌 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 업적으로서의 민주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결단이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적 헌정질서를 대신하는 다른 혁명적 대안은 역사적 후퇴를 의미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적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곳이 국회이다. 지금의 정치적 난국을 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회의 정상화가 하나의 방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야당 책무의 하나는 국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시국의 위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여당은 이것을 위하여 적절한 양보를 준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정치 행동은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와 현시점에서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7. 17.
P.S. 오늘이 마침 제헌절이기도 한 만큼 '민주적 헌정질서 vs 혁명적 대안'이란 선택지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요점만 간추린다. 먼저, '장기화된 촛불시위'가 의미하는 바, 또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번주 한겨레21의 표지기사 '촛불의 지구전'(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을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레닌과 현시국에 대해서는 어제 올려둔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2189868)를 참고할 수 있다. 페이퍼에서 언급된 토론회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사는 '촛불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8/20080710/20080710040800.html)을 참조. 더불어, 현시국과 관련하여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11123)를 일독해볼 만하다.
그리고, 이제 김우창 교수의 칼럼에서 흥미로운 대목들 혹은 지점들을 짚어보자. 일단 그는 현시국에 대한 이해 자체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된다면, 일단 정치적 행동으로서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인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 가령, (1)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이냐 (2)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냐. 후자라면 '혁명'을 뜻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게 김교수가 궁금해하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한 방책으로 김교수는 지난 대선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실 이 대목이 의외로 흥미롭다. 그는 보수쪽에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민정부'부터 카운트하고 있지만, 87년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은 직선제를 통해서 성립한 노태우 정부부터이다. 소위 '87년 체제'를 가리키며, 이것이 '민주혁명'의 성과이다. 한데, 이번 이명박 정부는 그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서 벗어나 성립한 정부이며,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전? 전두환의 군사정권과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있었다. 이명박정부는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 과감한 지적 아닌가? 김교수는 바로 유보를 단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라는 점에서는 군사독재나 유신독재와는 다르다(그럼에도 이 정부의 인사에서 과거 국보위 참여 전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다('민주화 세력'에 대하여 이들은 자칭 '산업화 세력'이다). 때문에,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견해 아닌가?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 그러니까 김우창교수에 따르면, '문민정부'(김영삼)에서 '국민의 정부'(김대중)로의 정권교체는 유사 정권교체이다. 그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계승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군사독재 이후 진짜 정권교체는 이명박정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비록 복고적/퇴행적이라 하더라도). 20년만이다! 물론 이러한 '복귀'에 따르는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여기서 김우창 교수의 '현자적' 예지는 '대타협의 정신'을 주문한다. 그런데 그 모델이 재미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는 것. 구체적으로 그 '대타협'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제시돼 있지 않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6.29 선언 같은 것이다. 어쨌거나 국민적 요구사항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전면적인 파국은 면하게 했던 것이니까 '대타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대타협의 자세를 이제 현정치권에도 다시금 요청하는 것이다. 즉, 이 정부는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고 (자칭)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해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래야지만 현상황에서 '민주체제'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이 현시국에 직면하여 김우창교수가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해 찾은 답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