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읽은 조간신문이 다소 '심심'했는데, 그나마 흥미를 끈 건 원로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 기사였다(유종호 선생에 대한 페이퍼는 이전에 한번 쓴 바 있다). 한국일보에서 읽었지만, 동아일보도 관련기사를 다루고 있어서 같이 옮겨놓도록 한다. 새로운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뒷북'처럼 읽히지만(물론 그의 발언은 하루키에 탐닉하는 세대에 대한 문학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평론가 유종호 씨 '무라카미 ‘노르웨이의 숲’은 음담패설집'”이란 호들갑스런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음담패설'이란 말을 쓰지 않겠지만(나는 나이브한 감상적 허무주의를 그냥 '포르노'라고 부른다), 그의 문학이 '데카당스'의 문학이라는 건 새로운 사실도, 지적도 아니다. 나는 좀 눅여서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이라고 제목을 바꿔단다. 이 제목이라면 한가할 때 비평문을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 초점은 '무라카미 문학'이 아니라 '무라카미 현상'이며, 나의 관심은 사회학적 관심이다.  

동아일보(06. 05. 25) 원로평론가 유종호(71·사진) 씨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 씨는 문예지 ‘현대문학’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라카미 바람’을 일으킨 책. 유 씨는 대학 초년생 중 가장 감명 깊게 혹은 흥미 있게 읽은 문학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드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자신이 본 바로는 “성적으로 격리된 수용소 재소자들이 일상적으로 나눔직한 성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 작품 속에 “성적인 문제로 좌절이나 일탈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성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성적인 얘기가 전경화되어 있고, 고교 3년 여학생의 자살을 위시해서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유 씨는 또 “소설의 화자가 대학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 등 등장인물들이 다소간 학교교육의 피해자 내지는 희생자란 함의를 풍기고 있다”며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주장했다. 유 씨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 줄 것”이라면서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씨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 없는 시대의 언어 상품”이라며 작품을 낳은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무라카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을 비하하거나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다만 그의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문학일 뿐”이라고 말했다.(*물론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즘의 학생들이 '고급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유 씨는 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상당수의 대학생이 문학적 위엄을 보여 주는 고전을 제쳐놓고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곤혹스럽고 우려가 되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유종호 교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우려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문학적 위엄'을 먼저 내팽개친 건 독자보다 문학계/출판계가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책에 대해서 '음담패설'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비록 음담패설이라고는 해도,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대로, 하루키의 음담패설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학이 아닌 상품의 자리에 서면, 하루키 문학은 타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한국일보(06. 05. 25)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가 우리 문학의 저급화와 교양 퇴조 풍조에 대한 고언(苦言)을 25일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그는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감상적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음담패설집”이며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청춘은 성(性)적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숙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 책은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에서 (작중 화자가 거론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대척점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대학 교육과 교육을 통해 축적한 인문적 교양이 신분의 표지였던 과거와 달리, 대학교육이 보편화하고 생활스타일이 다원화하면서 ‘교양’ 역시 ‘구제도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문학의 길이 ‘기쁨으로 출발하나 / 종당에는 낙망과 광기가 온다’고 했던, 낭만주의 시인 워드워스의 시 ‘결의와 독립’의 시행을 인용하며, ‘(이미) 낙망과 권태를 체험하고 있는 연구자나 교사의 비문학적 관심과 정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학의 매혹에 눈뜨게 하는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근거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문학계의 ‘이론’ 탐닉 현상을 들고 있다. “작품 읽기보다 이론 읽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정전 개념의 해체를 통해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고전기피 현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또 교수들의 연구업적 경쟁체제도 “교수들로 하여금 ‘이론’ 도입을 통한 논문 엮어내기를 강요하여 작품을 한갓 논문의 자료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했다.

(*)문학계의 이론 탐닉을 독자들의 하루키 탐닉에 견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요컨대, 작품 읽기/읽어내기를 기피하면서 논문 엮어내기에나 탐닉하는 문학 연구자들 또한 데카당스들이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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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25 11:55   좋아요 0 | URL
노르웨이 숲에 대한 유종호 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루키는 그 전에 단편집 읽어봤는데 꽤 좋았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에 도전했는데 좀 실망스럽더라구요. 그래도 먼 북소리를 비롯해서 한 두권은 더 읽어줄 마음도 있었는데, 지금도 마음 뿐이네요.

로쟈 2006-05-25 12:30   좋아요 0 | URL
하루키가 처음 붐을 탈 당시에 소개된 비평문들을 몇 개 읽었더랬는데(거기에 포함된 인용문들까지), 소위 괜히 폼잡는 '감상적 허무주의' 스타일이어서 이후론 눈길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 시절이었다면 혹 다르게 읽혔을지 모르겠지만...

보르헤스 2006-05-25 13:34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로써는 유씨의 '허드레 문학'이라는 정의에 동의하기 힘들군요. 평론가들의 문제는 언제든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잣대로 너무나도 쉽게 뭉뜨끄려 보인다는 점이지요. 그것이 철학이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말입니다. 평론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링 위에 올라가 보라고 말입니다. 비록 실컷 주어 터지더라도 말이죠...

로쟈 2006-05-25 14:28   좋아요 0 | URL
'독서는 일종의 오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오락'은 '허드레'보다는 나은 것인가요?..

보르헤스 2006-05-25 19:50   좋아요 0 | URL
감각적 쾌락만이 오락의 본질은 분명 아닐테지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글은 분명 읽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글을 읽는 독자의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든 표현되어 집니다. 비록 허드레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틀즈의 Yesterday가 구스타브 말러의 교향곡에 비해 작곡기법상으로 분명 '허드레' 할지는 모르나, 그것만으로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비록 폼만 잡는 감상적 허무주의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특별한 개인적 체험과 결합하여 어떤 의미로 한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는다면 그래도 그것이 아무 "가치"없는 일일까요?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로쟈 2006-05-25 20: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도프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만을 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 언제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만을 들을 수도 없는 법이죠." 맞습니다. 가끔씩 하루키를 읽거나 비틀즈를 들으면 되는 것이죠...

고영 2006-05-25 23:37   좋아요 0 | URL
근데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는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티코는 저급이고 벤츠는 고급이다. 아니면 많이 팔리면 저급 적게 팔리면 고급? 뭐 그런 건가요? 그리고 왜 많이 팔린다는 이유로 어느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비판 혹은 폄하 대상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하지만 전 고전이 고전이기 때문에 읽지는 않습니다. 동시대의 작품들보다 소위 고전이라 불리 우는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고 느낄것이 많기 때문에 읽죠. 고전을 따로 구분하는 것이 고전을 멀게만 하는 일이라 느껴집니다.

로쟈 2006-05-26 00:08   좋아요 0 | URL
고전을 '정전화'의 문제와 연계시키면,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가령, 무엇이 정전이며, 누가 정전을 말하는가, 라는 반문이 가능하니까요. 한데, 기준은 잠정적으로라도 필요하고, 제가 갖고 있는 기준은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사고하도록 해주는가, 삶의 근원적인 어려움과 대면하도록 해주는가 등입니다. '감상적 허무주의'나 '냉소주의' 등에 별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태를 단순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유행 같은 자살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눈팅 2006-05-26 00:37   좋아요 0 | URL
유종호 선생이 현실참여적인 비평을 하셨군요. 문학사상사에서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더 일찍 나왔어야 했을 비평입니다. 수많은 알라딘 리뷰가 별 네개를 주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비평가의 정당한 권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큰 잘못입니다. <창작과 비평> 봄호엔가 폴 오스터를 분석한 글도 주목할만 합니다. 폴 오스터의 소설도 결국 포스트모던 우파 계열에 속한다는 우려를 하더군요. 필자는 포스트모던이 잘못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좌파 소설가를 발굴하고 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알라딘의 독자리뷰는 양이나 질에서 상당한 수준이지만, 소설 분야의 독자평점은 좀 헤프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pax 2006-05-27 09:31   좋아요 0 | URL
음... 아마 책 자체를 통해 독자들의 성격마저도 간단하게 추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라고나 할까요? 또한 그 추리 자체의 맞고 틀림을 넘어서 윤리적으로도 그런 평가는 올바르다고도 보기 힘들 거 같습니다. 가령 그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자기 성숙을 준비하라는 도덕적 훈계와 함께 온갖 고전들을 처방하겠죠.

로쟈 2006-05-27 12:05   좋아요 0 | URL
현 비평계의 문제는 오히려 아무도 그러한 '처방'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작가나 독자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베스트셀러 추수적인 수사학만 남발하는 것이 비평의 책무는 아닙니다. 독자도 그러한 쓴소리에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구요...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는 얼마전 출간된 손호철 교수의 신간이다(생각만큼 팔리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마침 프레시안(06. 05. 22)에 자세한 서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한데, 기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에 주로 할애돼 있다). 필자는 강이연 기자이고, 타이틀은 '노무현 정부, YS와 똑같은 비극 반복'으로 돼 있다. 그 '비극'의 내용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현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걸 보면, 뭔가 '반복'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해서 내년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비판적 개방과 공세적인 세계화 전략이 한건주의와 결합해 나라를 거덜 낸 비극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도 노무현 정부는 YS와 너무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집권 4기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모하고 무비판적인 공세적 세계화 전략의 전형으로서 YS의 OECD 가입을 빼닮았다"는 것(*한국일보의 칼럼에서 그가 종종 내비치던 의견이다).
  
-손 교수는 "정말 안타까운 것은 YS는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YS의 경험을 생생하게 목격한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스승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미련한 것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고 쏘아붙였다.
  
-한발 나아가 손 교수는 "'내가 세계경제를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한 결정에 국민들은 무조건 따라오면 된다'는 계몽군주식 정책 결정은 박정희 시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사람은 농민이건, 영화감독이건, 교사건 '변화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으로 모는 오만은 오히려 군사독재보다 더 심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손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해방 50년의 한국정치>(새길, 2005) 이후 10년 만에 새롭게 펴낸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은 단순히 최악의 사회적 양극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의 발전모형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조직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의 두 가지 과제로 내세운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 추진은 모순된 처방이라는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미 FTA일 뿐이어서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건설은 선거용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은 과연 한미 FTA를 체결하라고 표를 던져준 것일까?" 손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이런 모순과 한국 사회의 갈등양상을 두 가지 전선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하나는 냉전적 보수(수구) 세력과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및 진보세력 사이에 있는 '민주 전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대립이 보여주듯 민주개혁을 둘러싼 이 전선은 자유주의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연합이 냉전적 보수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FTA 문제에서 이를 지지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와 냉전적 보수세력이 연대해 이것에 반대하는 진보세력과 대립하는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두 개의 전선을 분리하면 노무현 정부가 외쳤던 '개혁'의 성격이 명확해진다고 했다.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은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정부들과 차이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민주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혼재된 개념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개혁적'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 교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97년 체제의 연속이라고 해석했다. 97년 체제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사회를 구분 짓는 개념이다. 극우반공 체제였던 48년 체제,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61년 체제, 그 61년 체제의 정치적 독재 부분을 6월 항쟁으로 해체한 87년 체제를 거쳐 세계화 전략과 IMF 사태로 국가주도형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한 것이 97년 체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서 핵심으로 남은 건 신자유주의 정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97년 체제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을 4개의 구간으로 시기구분해 이를 설명했다. 손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제1기(출범~2004년 총선 전까지)는 탄핵 등으로 민주개혁도, 노동운동 등의 반대로 신자유주의 개악도 제대로 못한 시기다. 제2기(총선~2005년 초까지)는 총선 승리에 기초해 민주개혁을 추진한 시기로 봤다. 그 후 제3기(2005년 초~2006년 전까지)는 전략 부재로 국보법 폐지에 실패한 뒤 사실상 민주개혁을 포기하고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개악을 주로 추진했으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 상징되는 시기라고 구분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노 대통령이 사회적 양극화를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로 거론하며 해소를 위한 조치를 할 가능성을 시사한 시점을 계기로 4기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개악이 기본 골격이라는 점에서 손 교수는 오히려 "3기의 연속일 뿐 4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 전선에서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한노연(한나라당+노무현정부 연합)을 깨고 '노노연(민주노동당+노무현 정부 연합)'을 복원해 민주전선을 유효화하라"는 주문 속에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동안 수행해야 할 바에 대한 손 교수의 고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감하게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이런 궤도전환을 모색할 수 있을까? 손 교수 역시 이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다(*그럼 뭐, 정권교체는 필연적인 대세이겠다. 그런데, 현 진보정당은 내년까지 집권을 위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 혹은 맨날 죽만 쑤는 것일까?).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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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24 11:05   좋아요 0 | URL
손호철의 처음 질문 왜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정부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무현 정부에게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진보세력은 설득력있는 답을 주지 못하고 그나마 설득당한게 한미FTA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상가집에서 애기하다 공통된 의견은 한나라당이 한 10년 정권잡을 생각가지고 가야겠다였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개혁만으로 해결이 될런지.

pax 2006-05-24 11:25   좋아요 0 | URL
윗분에게//음... 그러니까, 님의 말씀은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새로운 발전 모델은 우리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집약된다? 혹시 한미 FTA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의 연장으로 간주 될 수 있을까요?

로쟈 2006-05-24 11:32   좋아요 0 | URL
어제오늘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진보세력'은 소위 이 '반동적인' 50%에 대해서(대개는 '먹고사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죠) 어떤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건지 저도 궁금합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라고 생각하니까 거의 70% 되겠네요. '당신들의 진보'로 만족하는 건지, 70%에 대한 '인간개조' 계획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를 내세우지만(소위 '강철 같은' 품성을 갖춘 인간), 도덕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미담사례'에 속할 만큼 예외적이며, 사회적 진보는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들(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대충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간주하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pax 2006-05-24 11:31   좋아요 0 | URL
혹시 그 개혁으로는 해결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논리와 무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누군가 잘먹고 잘사는 목표 실현을 위해 누군가가 못먹고 못살아야만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도 그 "먹고사는 문제"에 포함이 되는 것이며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인가 뭔가 하는 것이 고려하는 문제인지? 현실의 이미 요란하게 선전되고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이 그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당위적 차원에서 포함해야하는 것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인지? 결국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은 '개혁'(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과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지? 에구... 복잡하다 복잡해...

pax 2006-05-24 11:38   좋아요 0 | URL
로쟈님에게//로쟈님이 품고 계신 의문은 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것에는 유보적이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먹고사니즘 비판"은 아니며 더더욱 '영웅적인' 도덕성을 타인에 대한 우월함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가령 저 역시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70%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천하다고 말할 이유는 저에게도 그리고 다수의 '진보'에게도..... "원칙적으로"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혹 진보진영 내부에 님이 그동안 줄기차게 비판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yoonta 2006-05-24 12:52   좋아요 0 | URL
진보진영에 있으면 모두 강철인간인가요? 진보를 하려면 모두 강철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전 로쟈님의 풍부한 식견과 지식에는 늘 탄복하는 편이지만 정치적 판단에는 문제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수 없네요. 지난번 김규항씨관련 님글을 보면서도 느낀겁니다. 저도 님이 말씀하시는 진보진영의 도덕적 우월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소위 진보가 그것만으로 추동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자본주의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고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어쩔수없는것 아니냐...라는 저의 말에...
그것은 "실천적 허무주의"일수도 있다..라는 코멘트...

이 말에 저는 매우 공감했습니다..그것은(그러한 저의 공감)은 저의 도덕적 우월감때문도 아니고..저의 품성이 강철같아서도 아닙니다.

로쟈 2006-05-24 16:43   좋아요 0 | URL
yoonta님/ '강철인간'으로서 품성 없이 진보를 자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로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물렁하고 게으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까요?). 님은 진보라는 걸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동일시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설 경우에 '진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나요, 혹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대한 '상상'에 있는 것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진보는('변화'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의 일상적 의식과 삶이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년의 자영업자이면서 한나라당 지지자인 '평균치'의 한국인에게서 현재 어떤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말씀하지만, 현체제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혹은 미-래의 어떤 체제에서든 그 구성원은 지금의 '우리들'입니다(이 중 70%는 보수라고 분류될 수 있는). 박근혜와 정동영과 노회찬도 다 공존하는.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 자체이며, 자업자득으로 언젠가 붕괴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얼굴을 마주볼 사람들은 지금 서로가 다 지겨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변화되는 것인가요? (소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혹은 열망을 갖고 있지 않은, 혹은 그럴 필요를 갖고 있지 않은) '현재의' 인간들은 소위 '인간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살 만한 자격이 있는 건가요?(그런데, 누가 해방되는 것인지요? 혹 죽음이란 인간 조건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사실, 이런 물음들이 얼마나 공소한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 몇몇의 의식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적당한 선량한 사람들의 삶과 행복입니다. 저는 많은 부분 우리 자신이기도 한 그들이 삶을 훨씬 더 복잡하고 진지하게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나이브한 관념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최근 정세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당 지지자가 50% 이상이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절반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진보야, 나는 아니야!'라는 건 면책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나야, 우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yoonta님과 관련한 건 아니지만) 최근의 정세에 대한 냉소와 조롱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특권처럼 남용하는 건, 더불어 모든 걸 '노무현 정권'과 '낙후된 사회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유치한 일입니다...

biosculp 2006-05-24 16:53   좋아요 0 | URL
물질적 이해관계라는게 이렇게 징그러운것일줄은 예전엔 정말 미쳐 몰랐었습니다.
지금 지방선거에서 민노당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을 보면 정말 물질적이해관계는 도외시하는것은 아닌지, 그 물질적 이해조건의 외부에서 사고하면서 물질적이해조건을 변경시킬려는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좀 허공에 떠있는 공약들.

저도 한미 FTA에 찬성하는 쪽은 아닌데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없으면 해야되지 않나 뭐 그런쪽입니다.

다시 화두랄까요. 왜 김영삼 정부의 비극을 노무현 정권이 반복할까요. 이 비극의 반복이 지금 민노당이 들어선다고 비극의 주인공이 안될까요.
이래야 된다라고 쓰면서 이래야 되려면 이렇게 하라도 할수있어야되지 않을까 뭐 그런생각입니다.
그리고 돈벌기가 생각을 지우면 그리어렵지는 않지만 생각을 가지고 돈벌려면 이거 쉽지 않은 일인데 진보진영에 보면 돈벌이는 전혀 생각하는것 같지 않고요.

pax 2006-05-25 02:33   좋아요 0 | URL
오히려, 딱히 진보가 아니어도 '강철인간'을 요구하는게 요즘 사회의 트렌드가 아닐련지... 극한의 자기계발과 헌신 인내 그리고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련지... 저로서는 로쟈님이 우려하고 있는 사태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이 것이 "젊은이의 나이브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특권처럼 이용하는 사람(예컨대, 진중권?)들이 모든 것을 사회의식과 노무현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님의 말씀대로 유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사 세상에 대해 삐딱한 태도로 냉소와 조롱을 던질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일상 지겹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직결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전체가 낯설고 기괴한 것으로 비추어질지라도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신뢰할 수는 있고 그들 속에서 충분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설사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이 딱히 그들이 강철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네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했지만 이건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너무 나이브한가요? 아니면.....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단한 원한감정을 가지고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강철인간들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설사 지금 진보가 30%이고(이마저도 안될지도 모르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50%라 할지라도 딱히 그들 모두에게 원한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오버일지도 모르죠. "당신네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던 노동자대중(혹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당신들의 눈에 원래는 당신들과 함께여야할 이들마저도 개혁대상인가?"라고 누군가 빈정거릴도 모르겠지만 그런 빈정거림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그들을 개혁대상, 계도의 대상으로 놓고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놓는 한가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미 진보로서의 자격 상실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아니, 진보운동이든 뭐든 한다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한가한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고, 그들 한나라당으로 돌아선 집단을(로쟈님이 보기에 그것이 일반 대중의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본성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확고부동한 실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한 것이고, 의식적 차원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다시금 진보진영과 연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쟈님은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설정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확실히 이는 매우 현실적인 날카로움을 갖춘 안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충분히 선량하지도 못한 동시에 충분히 이기적이지도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선량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히려 좌파나 진보진영의 세계관에 있을 수 있는 지나친 선량함이 수반하는 자기극기, 자기 채찍질과 같은 우스운(어쩌면 숭고한) 요소들은 이미 현 사회에서 충분히 넘쳐나지 않나요?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는 주체는 진정으로 이기적인가요? 어떻게 보면 로쟈님의 말씀이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되네요... 문제는 적당하게만 이기적인 것일지도...

에궁... 잡설이 길어졌네...

pax 2006-05-25 02:27   좋아요 0 | URL
아참, 이건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꼴인데,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올바른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맥락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참고로 로쟈님과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라는 매우 사려깊은 행동이 자칫하다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드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올바른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증오로 흐를 위험에 대한 로쟈님의 감수성만큼의 경각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습니다...

로쟈 2006-05-25 18:39   좋아요 0 | URL
정치 얘기만 나오면 말씀들이 길어지시는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든가 해야겠지만, 아무튼 제 관심은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더 맞춰져 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듯이 추상적인 이념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그런 것들이 저에겐 기만이거나 알리바이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경우, 제 관심은 '일관성'입니다. 자신의 모토와 이념에 맞게 일상적 삶을 모두 재구조화하는 것. '말'은, 정치인들의 말이 웅변적으로 보여주지만, 믿을 만한 게 아닙니다. 좌파건 우파건 상투적인 정치적 구호들에 제가 염증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눈팅 2006-05-26 02:11   좋아요 0 | URL
학자들의 현실 분석은 너무 조심스러워 핵심을 비켜가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문제를 아무리 제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수화 내지 반동적으로 변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병들면 논리적인 분석이나 학문은 무력할 뿐입니다. 대중이 노무현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좌향좌가 아니라 오히려 우향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바뀌려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개인들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개인들 각자가 유토피아적 동경을 꿈 꿀 수 있도록 예술이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은 별로 결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 설득보다는 도덕적 진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눈팅 2006-05-26 02:38   좋아요 0 | URL
강철같은 품성이나 도덕적 우월주의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란 개념이 불투명하듯이 도덕적이란 개념도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해관계가 사람들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도덕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도덕은 이해관계를 떠난 습관화된 가치 평가일겁니다. 도덕을 떠나면 이기적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단지, 좌파와 우파의 도덕 유형은 아주 판이한 것 같습니다. 우파는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고 좌파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비유는 지난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습니다만...또 다른 버전으로는, 우파는 공동체의 통합과 조화를 강조하고 좌파는 공동체 내의 적대를 드러낸다는 지젝의 언급이 있습니다.

biosculp 2006-05-26 17:12   좋아요 0 | URL
도덕적 진실을 구현하기위해 정치적 설득력이 있어야 된다. 뭐 이런 애기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덕적 진실은 있는데 정치적 설득력은 없고 건드릴수록 덧만 나게 하면 참 답답해지는것이죠.
집값버블 애기에 1주만에 제가 사는 동네쪽에 1억이 집값이 떨어진게 아니라 올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부동산들어가보면 이제 왠만큼 큰평수도 전세가 아니라 월세로 돌리고 있습니다.
바라는 사회는 적절한 집값이 되는 사회가 좋지만 건드릴수록 집값만 올려버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적진실은 애기조차 못꺼내고 저건 완전 무능아냐 이런애기밖에 안나옵니다. 좌파우파 뭐 가릴게 있나요. 제일 집값잘잡은 정권은 노태우정권같더군요. 그때는 토지 공개념이니 신도시 건설이니 해서 제일 안정적인 집값으로 되었었는데.
도덕적 진실은 기본이고 정치적 설득까지 갖추어야 세금받아먹을 자격이 있는것은 아닐런지요.

로쟈 2006-05-28 21:41   좋아요 0 | URL
모비딕님/ 사회주의적 인간형, 내지는 품성론은 제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핵심입니다. 주체사상은 그 품성론의 김일성 버전이라고 생각하구요. 중국의 '문화혁명'이 바로 그러한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인간 개조운동이었다고 봅니다(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러한 '개조'의 다른 편이 자유주의적 '개량'이 아닐까요? 저는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개조'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biosculp님/ 이전에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모스크바 통신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참조하시길. 개인적으론 도덕과 정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정치적 리더십을 사람들은 대개 도덕성에서 찾곤 하니까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의 '이재현의 가상 인터뷰' 꼭지는 최근에 <모크샤>(싸이북스, 2006)가 출간됨으로써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 편을 다루고 있다.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이 '가상 인터뷰'들 가운데 내가 전문을 다 읽은 건 이번 헉슬리 편이 처음이다. 그건 그만큼 이 신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코너에서 번듯하게 소개하려고 했지만, 지난 주말 한겨레의 리뷰를 비롯해서 언론에서 비교적 크게 다루고 있기에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해서 몇 마디 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해서, 일단은 그 '대안'으로 이 가상 인터뷰를 옮겨오고 몇 마디 군소리를 덧붙인다.

-영국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 그의 대표작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고전 소설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ㆍ1932)이다. 원래 이 소설은 그의 친구인 생물학자 홀데인(J. B. S. Haldane)이 에세이 <다이달로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the Futureㆍ1923)에서 미래 사회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묘사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쓰여졌다.

-헉슬리보다 먼저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도 에세이 <이카로스 혹은 과학의 미래>(Icarus, or The Future of Scienceㆍ1924)에서 홀데인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로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려고 시도한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가상적 미래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953년 헉슬리는 정신과 의사 입회 하에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이래 10년에 걸쳐 메스칼린 네 번, LSD 네 번, 사일러사이빈 두 번 등 총 10번의 환각제 복용에 의한 환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메스칼린은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이 애용했던 페요테 선인장에서, LSD는 맥각균으로부터, 사일러사이빈은 멕시코 무당들이 신성시했던 버섯으로부터 합성 추출해낸 환각 물질이다. 헉슬리는 자신의 환각 체험에 기대서 사이키델릭 문화의 고전, 또는 히피의 경전이라고 이야기되는 에세이 <지각의 문>(1954), <천국과 지옥>(1956) 등을 집필했다(*<지각의 문>에서 그룹 '도어즈'이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헉슬리는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와 더불어 20세기 사이키델릭 문화의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최근 한국에서 선생님의 저서가 번역되었습니다. <모크샤>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약물 복용에 의한 환각 체험을 다룬 각종 에세이, 칼럼, 강연, 인터뷰, 서신, 르포 등을 엮은 책이지요. ‘환각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헉슬리: 모크샤(Moksha)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해방 또는 해탈을 뜻한다네. 내가 말년에 쓴 다른 소설 <섬>(1962)에서 가상의 섬 주민들이 복용하는 환각제의 이름이기도 하지.



현: <멋진 신세계>의 등장 인물들은 ‘소마’(Soma)라는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소마와 모크샤는 어떻게 다른가요?

헉슬리: 소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통치 수단이고, 모크샤는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중독성이 있는 소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도피를 하게 만들지만 모크샤는 그렇지 않네.

현: 선생님의 관점이 바뀐 것이로군요. 그 사이에 선생님의 환각 체험들이 있었던 것이구요.

헉슬리: <지각의 문>에서 썼던 것처럼 우리 지각의 문은 평소에 흐려져 있네. 내 주장의 요점은 환각 체험에 의해서만 그 흐려진 지각의 문이 열린다는 거지.

 

 

 



현: <지각의 문>이라는 구절은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인용한 것이고, 록 그룹 도어즈의 이름은 바로 선생님의 글 <지각의 문>에서 따온 것이지요?

헉슬리: 판타지 소설 <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알려진 C. S. 루이스의 <위대한 이혼>도 바로 블레이크의 그 작품과 연관이 있네만, 블레이크의 원작에서의 해당 대목은 이러 하다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인다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나타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를 이미 닫아버렸기에/ 그의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현: 블레이크는 <신곡>의 단테나 <실락원>의 밀튼과는 달리, 지옥을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장소로 보았던 거로군요.

헉슬리: 그렇지. 블레이크의 관점에서는 천국이야말로 지각이 통제되어 있는 권위주의적인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지. 블레이크의 목적은 관습적인 윤리와 제도적 종교의 억압적 성격을 사람들에게 밝히려고 했던 거야. 그 당시로서는 매우 전복적이고 선구적인 주장이었지.

현: 그럼, 선생님은 환각제의 복용을 옹호하시는 겁니까?

헉슬리: 나는 환각제 복용이 부정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고 중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고해 왔네. 다만 우리의 제한된 지각의 틀을 넘어서는 초월의 계기를 환각제 복용이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지.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환각제를 복용하면 좋다는 얘기야. 환각제를 달리 정신 활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현: 그러니까, 선생님의 주장은 일부 환각제가 술이나 담배, 혹은 의사가 처방해주는 각종 수면제나 진정제보다도 훨씬 더 그 사회적, 문화적 효용이 뛰어나다는 것인가요?

 

 

 


헉슬리: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도 덜하고 부정적 효과도 없다네(*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옹호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가끔씩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마초 파동'은 도덕적 알리바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 인류는 알콜 중독으로 인해서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리고 있어. 이러저러한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금지한다고 해서 환각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환각제를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게 내 주장이야. 내가 해 본 바로는 메스칼린, LSD, 그리고 사일러사이빈은 대마초보다도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덜한 반면 그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난 환각제일세.



현: 저는 해보지 않아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헉슬리: 환각 체험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초월은 인간 정신 속의 또 다른 가능 세계로 가는 것이네. 이 세계는 평소에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인데, 환각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일세.

현: 그 초월적 환각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체험에 의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 건지요?

헉슬리: 크게 보면 한편으로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종교나 예술에서의 초월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 반면에 환각제는….

현: 그렇지만 환각제의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헉슬리: 아까 얘기한 대로 그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담배나 술보다 덜 하다니까 그러는군, 자네는. 문제는 그것들에 빠져서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길을 찾는 거야.

현: 하지만 환각제 복용은 한국에서 아예 토론의 여지가 없는 이슈예요. 무조건 나쁘다는 거지요.

헉슬리: 그것은 사회문화적 관습에 해당하는 것이네.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과학적, 심리학적, 정치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한국에서는 애당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일 뿐이네. 내 관점에서는 의사가 처방해주는 신경안정제야말로 아편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라네. 어쨌든 간에 모든 마취제, 흥분제, 진정제, 환각제들은 원시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태고적부터 쓰인 것이지. 그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편은 인민의 종교”라고 했던 것이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저작이 오오키 고오스케의 <마약-뇌-문명>(정신세계사, 1991)이다. 요점은 우리 뇌 안에 마약 수용체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마약복용도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마약에는 체내마약과 체외마약이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마약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한가지는 체내마약으로서의 도파민이 문명의 산파라는 것.  

현: 그 말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패러디한 것인데요.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헉슬리: 아닐세. 내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로운이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버나드 쇼와 마르크스, 레닌에 대한 내 평가를 담고 있는 인물들일세.

현: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사회주의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환각제의 복용은 사상적인 범죄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으로 처리가 되어왔습니다.

헉슬리: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네. 내 관점에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 한다든가 배기량이 더 큰 차를 사려고 한다든가 아이들을 일류대학 보내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중독 현상이라네.

현: (허걱!) 선생님 말씀은 마치 그런 일들이 범죄일 수도 있다는 걸 함축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헉슬리: 그렇게 타협적, 패배주의적으로 얘기해버린다면 자네는 ‘짝퉁’ 지식인에 불과한 거라네. 내 주장은 이 모든 것에 관해서 편견 없이 차근차근 제대로 따져보자는 것일세.

현: 글쎄요?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짝퉁이 명품보다 더 인기가 있어요.

헉슬리: 그럴수록 환각 체험이 더 필요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네. 내 책에서 말했듯이 “환각 체험은 아름다움과 참됨,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라네.

현: (헉) 더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선생님 주장은. 아무튼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06. 05. 23.

 

 

 

 

P.S. 참고로, 한국대중문화의 키워더 가운데 하나인 '대마초 사건'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대중예술평론가인 이영미이며, '한겨레21'(546호, 2005. 02. 02)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노래 군기, 확실히 잡다'.

-1975년 대마초 사건은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기막힌 사건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포크나 록을 하던 가수 윤형주·김세환·신중현·김추자·이장희 등과 영화감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 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중예술인들을, 대마초를 피웠다고 구속하고 공식 활동을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대마초 바람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이즘에서 우리나라 청년문화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것과 일치했으나 미국의 반전과 평화, 반청교도주의를 표방했던 ‘60년대 정신’과는 달리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의 새로운 대중문화·생활문화 세대교체 바람이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말하자면 미국 청년문화에서 대마초나 마약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월남전 징집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던 것에 견줘,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회의식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젊은이들이 대마초에 대해 마약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삼베의 재료인 대마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담배 피우듯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호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의 청년문화가 그다지 높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전 사회를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어했던 유신정권으로서는 그 정도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허용할 수 없었다. 파시즘은 취향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왔으며, 노래나 영화 같은 예술은 물론이고 패션이나 언어습관까지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미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외래어로 된 가수 이름은 양파들(어니언스), 토끼소녀(바니걸즈), 김세나(김세레나) 등으로 바꿔야 했고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토요일밤에>)의 가사가 “긴 머리 분홍치마”로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어떻게든 이 체제에서 살아남아 활동을 계속해보려던 이들의 노력은 확연했다. 조영남은 방송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태양은 묘지 위에”를 “대지 위에”로 바꿔 불렀고, 쉐그린은 아예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 나갔죠.… 바로 그때 이것 참 큰일났군요. 아저씨가 오라고 해요./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짧은 치마 입고 명동 나갔죠.”(<어머님 말씀>) 같은 ‘건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일찌감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건전가요를 지었던 신중현은 1975년에 나온 음반에서 <뭉치자> 같은 노골적인 건전가요를 지어 부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그는 대마초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구속됐다.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대중예술사의 전·후반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이전까지는 일부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포크와 록이 1974년 드디어 어니언스의 <편지>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으로 남진과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요가 되고, 영화계에선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던 상황은, 대마초 사건으로 급전직하의 국면을 맞이했다. 상당수의 대중예술인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포크와 록은 트로트 등 기성의 취향과 결합해 기성 가요계로 편입됐다. 이제 가수들은, 청바지가 아니라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대마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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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24 10:26   좋아요 0 | URL
**님/ 퍼가셔도 됩니다. 한데, 이미지 하나가 먹통이 됐네요...

비로그인 2008-09-03 08:57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읽은 오늘자 한국일보(06. 05. 17)에서 하종오 피플팀장의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은 '하류사회'. 얼마전 같은 제목의 책이 번역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말에 편입된 용어이다(그 이전엔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있었다). '돈 밝히는 아이들'이란 기획기사가 한국일보에는 어제오는 실렸는데, 이건 시간날 때 따로 빼서 다루려고 한다.

 

 

 

 

-한때 한국의 신문이란 신문들이 온통, 소위 중산층 이상을 타깃으로 한 지면 제작에 열을 올리던 때가 있었다. ‘위켄드’ 같은 영문 이름이나 혹은 ‘떠나자’ 어쩌구 하는 타이틀을 달고는, 중산층이라면 적어도 이런 브랜드의 옷은 입어야 되고 주말이면 저런 레스토랑에는 가야 되며 평소에 고상하게 요런 정도 라벨의 술을 들이켜고 틈나면 남국으로 해외여행도 떠나는 삶의 멋이 있어야 한다고 부추기는 별지들이었다.

-한 신용카드회사의 광고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 마디로 신나게 먹고 마시고 입고 놀아라는 것이 그런 지면에 실린 기사의 주요내용들이었는데, 그게 언제냐 하면 10년쯤 전이다. IMF사태 직전이었다. 그러다 한국의 중산층은 망했다.



-일본의 중산층도 망한 모양이다. 일본에서 2005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하류사회(下流社會)>라는 책이 며칠 전 국내 번역됐다. 마케팅 전문가인 이 책의 저자 미우라 아츠시는 2002~2005년 일본인들의 소비행동ㆍ생활패턴 등에 대한 실증적 조사결과들을 바탕으로 지금의 일본을 ‘하류사회’라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1950년대말부터의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9할 이상의 국민들이 자신을 중류계급으로 간주하던 소위 ‘1억 총 중류’의 일본사회가 1990년대 이후의 10년 불황을 거치면서 하류사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득 격차로 인해 학력의 격차도 커지고, 그 결과 계층 격차가 고착화되면서 유동성을 잃어가고 있다. 희망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일본의 잣대를 한국에 그냥 들이대기는 어렵다. 원체 신조어 만들기에 귀재로 소문난 일본인들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두 나라의 차이가 여전히 크다. 일본의 이극화(二極化)가 한국의 양극화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눈에 띄는 것은 ‘희망의 격차’라는 현상의 풀이 때문이다. 미우라 아츠시는 하류의 본질을 단지 ‘돈의 유무’가 아니라 ‘의욕의 유무’에서 찾고 있다.

-그는 중류에서 하류로 떨어진 인간들을 마르크스처럼 생산수단 즉 소유의 여부에서가 아니라 의식의 측면에서 분류한다. “중류가 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류이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중류 혹은 상류사회에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인간들이 대다수가 돼버린 사회, 소수의 엘리트가 국부를 창출하고 대다수 국민은 별 의식 없이 대충 먹고 놀며 사는 사회가 하류사회라는 이야기다.

 

 

 



-한국은 어떤가. 나는, 당신은 하류일까 아닐까. 의식 혹은 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들은 하류 중의 하류로 쩔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욕을 갖고 삶과 맞닥뜨리기보다는 ‘부자 되기’라는 미명 하에 돈독이 오를 대로 올라 초등학생인 자식들에게 주식투자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젊었을 때 빨리 돈을 번 다음 조기 은퇴해서 편하게 사는 게 꿈”이라는, 하류도 못되는 천민적 사고를 꿈이라고 말하게끔 만든 사회가 지금의 한국이다.

-“~떠나라”던 기업들이 지금은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들으면 기가 찰 문구를 광고로 내건다. 비록 몰락한 재벌 회장의 말이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포부가 요즘 젊은층에게는 “인생은 길고 돈 벌 시간은 짧다”는 금언으로 바뀌었단다. 이런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어른이 돼 득시글거릴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의식의 하류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小年易老富難成? 젊음은 오래 가지 않고 돈벌기는 어려우니, 초딩때부터 부지런히 벌어두어야 한다! 데카당스가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06. 0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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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신간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에 대해서는 몇 개의 관련 페이퍼를 쓴 바 있는데,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창비주간논평'에 책에 대한 논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 필자는 시인이자 <창작과 비평>의 편집위원인 이장욱이다. 이 논평의 제목은 '카라따니 코오진과 근대문학의 '종언''(06. 05. 02)인데, '가라타니 고진'을 굳이 '카라따니 코오진'이라고 표기해주는 것은 창비사의 표기관행이자 '실천'이다. '에세이'를 '에쎄이'라고 애써 표기하는(가령, 배수아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에쎄이스트의 책상'이라고 표기하는) 이 관행/실천이 창비의 자부심이자 고집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나는 비록 동의하지 않지만). 논평의 결론은 그러한 '고집'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의 제목은 (근대)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종언'이다. 수많은 문학 위기론들이 있지만, 카라따니의 '종언'은 확실히 치열하면서도 담백한 데가 있다. '위기'라는 표현에는 어떤 각성에 대한 촉구 혹은 안간힘이 담겨 있지만, '종언'에는 그게 없다. 그의 생각에, 문학의 종언은 "단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맥락이 담겨 있다. 하나는 매체의 발달 등 다양한 역사적 변화 때문에 오늘의 문학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향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문학 자체가 왜소해졌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의 것은 역사적 조건의 문제고, 뒤의 것은 비평가를 포함한 창작자들의 주관적 상황 문제다. 물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돼 있으며, 그래서 시대적 · 윤리적 과제를 감당했던 문화적 주류로서의 (근대)문학은 제 역사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판명된다. 카라따니에 따르면, 오늘의 인간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문학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시대는, "끝났다."

-아마도 이 주장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하나는 본래의 문학이 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데 동의하고 문학을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 우리가 직면해 있는 수많은 난제들을 감당해내기 위한 운동의 영역으로. 이것은 실제로 카라따니 자신이 (비록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뉴 어쏘씨에이션 운동"(NAM)을 통해 자본주의사회의 내부로부터 다른 삶의 방식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의 종언론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삼스럽다는 느낌까지 듦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이 실천적인 지점이다. 그는 '위기론'이나 들먹이며 제 존재를 확인하려는 나약한 비평가가 아닌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말 문학을 떠나야 한다는 데 나는 동의한다. 확실히 문학에 초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상적 관념에는 과거의 문학이 후광으로 남아 있으며, 이 후광에 의지해서 시인, 작가, 비평가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만족을 얻는 것은 곤란하다.

-두번째는 "종언" 같은 극단적인 표현의 문제를 지적하고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문학이 당대사회에 대해 과거처럼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운동으로서의 문학"이 그 계몽적 소임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독자적인 "내면성"을 상실하고 "그저 오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대소설의 전성기였던 저 19세기에도 그러했듯이, 문학은 이질적인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당대에 스며들고 당대에 접속하며 당대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자층의 이탈 등 오늘의 객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문학의 '죽음'이 확실해 보인다면?

-이 사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미 주변화된(죽어버린) 시와 소설들은, 오히려 그 주변성(죽음)으로 인해서, 더 첨예하게 삶과 세계를 대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아가, 이 주변성(죽음)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정확하게 오늘의 문학이 지닌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농담처럼, 이렇게 말해보자. 근대문학이 죽었다, 그러자 완강한 체제를 끈질기게 교란하는 유령의 문학이 태어났다! 유쾌하고 불편한, 유령으로서의 문학. 그것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 유령의 존재 자체가, 그가 교란하려는 거대한 씨스템의 일부라는 데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주관적 반성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 실제로 카라따니의 종언론은 오늘의 문학에 대해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지적 · 도덕적 요청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성에 잠식된 문학에 대한 질타이며, 리스먼(D. Riesman) 식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타인지향형" 문학에 대한 질타이다. 이 질타에서 창비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주류 문학정론지로서의 <창작과비평>은 그 위상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지난 시대의 "후광효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작자로서 나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에 이르고자 했는가? 허망한 차이를 유의미한 개성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에는 "시차"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런 이질적인 생각들이 혼재된 상태에서 나는 책을 덮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반응과는 별개로, 카라따니식 종언론을 돌파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문학 자체'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종언"을 확신하게 된 계기를 한국문학의 사례에서 찾고 있지만, "종언"이라는 자극적인 단정으로 우리 문학이 온전히 규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의 문학은 저 불가피했던 계몽과 독백의 시대를 넘어서, 아니 그 시대들을 등에 지고, 여전히 전진중이다.

-오늘의 서정시는 압도적으로 규격화된 도시적 삶의 '바깥'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언어로 환기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언어를 탈피한 시들은 다양한 일탈자들의 영혼을 새로운 언어에 각인시키는 중이다. 소설은 어떤가. 오늘의 삶과 역사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수행하는 소설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시점과 인칭을 통해 스스로 ‘질문’이 된 소설들이 있으며, 또 유희 자체를 부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소설들도 있다. 이들은 서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 문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하는 중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카라따니가 쓴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한국문학은 여전히 끊임없는 "이동(移動)"과 "전회(轉回)" 중에 있다.

-이런 신뢰와 애정은 문학을 떠날 수 없는 자의 자기위안에 불과한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라따니의 표현을 변용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문학으로 돌아오라.

(*)"이 책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식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주관적 반성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일 터이다"라는 데 이 논평의 핵심이 있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그러한 방식이 왜 '가장 생산적'인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역사적 조건'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창작자들의 주관적 상황'의 문제는 대개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문제는 이 '진정성'의 존재 자체가, 그가 돌파하려는 거대한 시스템(종언적 상황)의 일부라는 데 있겠지만 말이다...

06.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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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5 14:10   좋아요 0 | URL
카라따니 코오진 이라고 하나봐요.?

페일레스 2006-05-05 14:30   좋아요 0 | URL
자꾸 때리다님/ からたに こうじん을 '가라타니 고진'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쓴 것이죠. 제2장 '표기 일람표'를 보면 어두에서 'か'를 '가'로 읽는다고 되어 있고, 제3장 제6절 '일본어의 표기'를 보면 '장모음은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Karatani Koujin이 가라타니 고진이 된 겁니다. 반면에 창비 표기법은 그 외국어의 음을 그대로 살린 거라고 볼 수 있겠죠.

yoonta 2006-05-05 17:05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고진이나 카라따니 코오진이나...외국어음을 그대로 살린 표기라고는 별수없죠..외국어음을 그대로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그 나라문자로 번역하지 말고 쓰는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우리 나름의 룰 대로 발음하는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런점에서 로쟈님의 의견(창비식 표기에 동의할수없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로쟈 2006-05-06 00:14   좋아요 0 | URL
현지음에 가깝게 표기해준다는 '원음주의'는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한 가지 '원칙'이긴 하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원칙은 아니며 온전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밝히자면, 가령, 발음에는 '강세'를 비롯해서 갖가지 발음규칙들이 개입하는데, 그걸 반영하기 위해서 형태 표기를 포기한다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표기의 대원칙은 '현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파리(Paris)'의 창비식 표기는 '빠리'인데, 이게 현지음에 가까운 것도 아닙니다. '빠히'라고 해야 아마 더 가까울 것입니다. 즉, '빠리'는 '파리'와 '빠히' 사이의 어정쩡한 표기일 따름입니다. 문제는 그걸 대단한 '원칙'인 양 과시/과장할 때입니다. 굳이 '에쎄이스트'를 고집하는 건 보기에 불편합니다...

페일레스 2006-05-06 00:00   좋아요 0 | URL
yoonta님, 로쟈님/ 제가 쓴 댓글에 어폐가 좀 있군요. 창비 표기법은 그 외국어의 음을 그대로 살린 거라고 (창비에서 생각하는) 거겠죠. 저는 얼마 전에 '원음주의'란 닿을 수 없는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외래어 표기법으로 전향(?)했습니다. 저도 로쟈님 의견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