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를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후반부에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번역서에서 가장 무난하게 읽히는 장은 존 롤스와 더쇼비츠의 인터뷰이다(이 두 인터뷰는 원서와 대조하지 않아도 읽는 데 별로 무리가 없다).


나는 원서의 배열대로 차라리 존 롤스 편이 맨앞에 나왔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롤스에 이어서 퍼트남, 에코, 맨스필드 순이다). 일단 한 동료철학자에 따르면 롤스는 "우리 시대에 둘도 없을 훌륭한 사람"이다. 인터뷰에서도 그의 겸손한 인품이 확인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건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다.
"혹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제가 학생들에게 철학에 뛰어들라고 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철학의 결점을 더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래도 강렬히 하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철학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철학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철학을 잘하는 사람은 적어도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서 얻는 진정한 보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155쪽)
이 얼마나 훌륭한 충고인가! 학생들이 철학을 하겠다고 하면 최대한 말리겠다는 철학교수가 사실 우리 주변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롤스 정도 되는 철학자의 말인지라 감동적이다.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이다. 그리고 두번째 교훈은 더쇼비츠가 전해준다. 이번엔 사회적이고 공적인 교훈이다. 변호사계에서는 '성자 유다'로도 불릴 만큼 패소한 소송을 뒤집기로도 유명한 변호사 겸 법학자인데 미국의 사법체제에서 개선이 필요한 측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판사와 사법부입니다. 정의를 믿지 않고 속임수를 쓰며 거짓말을 일삼는 냉소적인 판사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그들을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선출되고 재선출되며, 임명되고 승진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결합은 재앙의 징조입니다."(211쪽)
아무리 짐작은 하더라도 이 역시 미국 최고의 변호사이자 법학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 감동적이다. 아마도 우리의 검찰을 미국의 사법부에 견줄 만하겠다. 그렇다면 왜 부적적할 판사가 선출되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 더쇼비츠가 드는 이유는 '인맥'이다(우리의 사법부는 미국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다. '인맥'에 좌우되는 검찰과는 달리 말이다).
"이 나라의 많은 지역에서 연방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상원의원 친구를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주지사를 친구로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판사를 뽑는 과정을 보면 혐오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문명화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최악의 과정 중 하나일 겁니다."(211쪽)
미국의 판사들은 아마도 상원의원의나 주지사 같은 이들이 추천하는 모양이다. 하니 그런 인맥을 탄 '질 낮은' 판사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고,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른다는 얘기. 왠지 좀 안쓰러우면서도 고소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 두 대목이 내가 읽은 이 책의 '건더기'다...
나머지 장들을 읽으면서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대목이 많았는데, 잘 읽히지 않는 대목들이 불편의 출처라면 어이없는 오역들은 불쾌의 원인이다. 굳이 불쾌하다고까지 한 건 너무도 부주의하거나 불성하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공역자의 지명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데, 그가 <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2010) 같은 수준급 교양서의 저자라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나로선 <인문 고전 강의>의 저자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역자가 동일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건 마치 '인지적 모순'처럼 여겨진다(합리적인 설명은 그가 일부 번역과 감수 정도에 관여했을 거라는 것이다). 롤스의 유명한 제안대로 '무지의 베일'을 쓰고서 이 두 책을 냉정하게 읽고 판단해본다면, 과연 두 사람이 동일인이란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지난번의 오역 지적에서 나는 이러한 인상을 충분히 피력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에 따라선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어설픈 번역비평가' 행세로도 비친 모양이다('번역비평'이란 말이 고깝다면 '번역시비'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인터넷 서평꾼'에 덧붙여 '번역시비꾼'이다). '공개적인' 비판에 유감을 표한 분들도 계신데, 이것도 '논쟁'이라고 한다면 굳이 비공개로 진행할 이유가 없다. 또 <장미의 이름> 번역 교정과 관련한 미담 사례를 제외하면 강유원씨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번역서의 오역에 대해서 공개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역자가 아니라 독자다(나는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판을 '소비자 권리운동'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유감의 사유를 적시했고, 그에 대한 이견이나 반박은 역자나 출판사쪽에서 또한 알아서 제시하면 될 것이다(쇄를 다시 찍을 때 교정할 수도 있고, 정오표를 만들어 온라인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판단은 이 책에 관심을 둔 독자들이 알아서 할일이고. 하지만 공연한 '침소봉대'로 독자를 선동한다는 비난도 없지 않아서 유감의 근거를 조금만 더 들추도록 한다. "강의와 글쓰기, 번역을 통해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쓰고" 있는 역자에게 누를 끼치는 게 돼 유감이지만, 나는 '하버드'와 '강유원', 그리고 '철학'의 이름값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오류들은 충분히 지적되고 교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솔직한 생각은 전공자의 감수하에 개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쪽이다). 길게 늘어놓을 것 없이 바로 몇 가지만 추가로 지적한다(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눈이 침침하군. 공연한 '공명심'은 너무 많은 걸 희생하게 만든다). 코넬 웨스트까진 넘어간 걸로 하고, 스탠리 카벨에 대한 소개를 보자.

"스탠리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전념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75쪽)
이 번역문이 말해주는 건 무엇인가? 일단 (1)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2)카벨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맞는가? 이렇게밖에 읽을 수 없다면 두 명제 사이의 관계는 역접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이러했다, 하지만 카벨은 저러저러했다. 하지만 당장 이어지는 문장은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한 일에서 해방의 의미를 찾으면서, 그를 철학의 거품을 빼 종말에 이르게 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를 펼친 매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철학자로 읽는다." 그런데, 어떻게 비트겐슈타인과는 정반대의 작업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건 자연스런 의문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대부분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A guiding theme in Stanley Cavell's work is Wittgenstein's commitment to replacing metaphysical or philosophical problems with our own ordinary needs."
그러니까 'A guiding theme'의 보어가 Wittgenstein's commitment'인 문장을 번역문은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를 보어로 잘못 옮긴 것이다(결과적으론 정반대의 뜻으로 옮긴 게 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콰인의 주장을 빌자면 '번역의 불확정성'을 이유로 이런 경우에도 오역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분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복잡하면 다 생략하고, "카벨의 주요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하던 문제들이다."라고만 해도 됐을 것이다. 독자를 그렇게 고려한다면 말이다.



카벨에게 주어진 첫번째 질문의 화제는 그가 정년을 앞두고 신참 교수와 함께 자신의 첫번째 책 <이성의 주장>을 강의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과의 결정적인 만남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라는 게 질문이다. 이에 대해 카벨은 그 책의 프랑스어 번역본(1996)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책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은퇴 전 마지막 학기를 기념하고 싶었다는 이유를 댄다.
"<이성의 주장>은 저의 박사논문으로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제가 가장 나중에 한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의 텍스트만 해야 한다면 그 책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고요."(79-80쪽)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번역이 얼마나 부주의한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서 인용했다. 원문은 가정법으로 하나의 텍스트만 골라야 했다면 그 책이어야 했다고 얘기한 후에 "I'm grateful it happened."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돼서 감사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었으면"이 아니다. 강의는 1996년에, 이 인터뷰는 1997년에 이루어졌다.
이 답변 이후에 연이어 질문자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해선 언급하면서 다른 후기 저작들은 업급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카벨은 이렇게 답한다.
"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성의 주장>에 대한 강의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저의 텍스트가 <철학적 탐구>에 나온 구절들에 대한 주석이라는 한계 때문이었고, 그것 때문에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어떤 점에서는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글에서 정말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80쪽)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관계였는지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읽을 수 있어야겠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항상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런 스토리라인인가? 카벨의 경우 여기서 맞는 건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뿐이다. 나머지는 다 엉터리 번역이다. 원문과 대조해본다.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 I don't find that teaching the course on The Claim of Reason, for all the extent to which tht text of mine is a commentary on passages from the Investigations, is taking me back Witttgenstein. Probably the reason is that in a sense I've never really left Wittgenstein's writing.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란 첫문장을 번역문은"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옮겼는데, 왜 그렇게 시제를 안 맞춰주는가. 이건 앞서의 첫 번째 질문(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에 대해서 대답을 다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여전히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카벨은 자신의 책 <이성의 요청>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 책이 <철학적 탐구>에 대한 주석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라고 한 건 거꾸로 옮긴 것이다.
왜 되돌아간 게 아닌가?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논리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이게 어떻게 해서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란 뜻이 되는가? 어이없는 일이다. 주어 'It'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온 'Wittgenstein's writing'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항상 가까이에 있었어요, 언제나 폭발 직전이었죠." '폭발 직전이었다'는 말을 나대로 의역하면, "언제나 내게 엄청난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정도다. 요컨대, 번역문은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 특별히 영화와 오페라에도 많은 관심을 내보인 카벨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해선 어떤가. 오페라의 어떤 면에 철학적으로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에 카벨은 오페라가 철학의 초점을 이동시킨다며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페라가 철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페라가 이전보다 더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는 주요하게는 니체와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데카르트 이전 세대가 일상 언어의 의미를,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들이 출현한 10년 동안에 오페라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90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 fact of opera and the celebration of the human voice, so one could say, in the call for opera during the decade which saw the appearance of the great tragedies of Shakespeare, a generation before Decartes expressed his sense of ordinary language as falsifying our relation to the world, means that my own sense of philosophy, in tracing the exiling of the human voice in philosophy, is something I have thought that fact of opera might bear on."
강조한 문장의 주어를 번역문은 '데카르트 이전 세대'라고 했지만 내가 읽기엔 그냥 데카르트다. 세익스피어(1564-1616)의 주요 비극은 데카르트(1596-1650)의 저작들보다 한 세대쯤 전에 발표되었다. 그래서 이 삽입절은 "일상언어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오도한다는 생각을 데카르트가 발표하기 한 세대 전이죠" 정도의 뜻이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목소리'는 (근대)철학에서 배제되었는데, 근대철학보다 한 세대 전에 출현한 오페라는 그 인간의 목소리를 보존하고 있는 예술장르다. 오페라와 철학의 문제적 관계가 성립되는 지점이다. 더불어, 카벨이 오페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오페라는 미합중국만이 창조할 수 있는 높은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급한 대중예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뮤지컬코미디, 재즈, 영화 같은 것에 대해 저에게 묻는 것은 미합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으며, 그런 물음은 저의 현재 저작 전반에 관한 물음인 것입니다."(91쪽)
오역만 지적하는 건 소모적이므로 이런 대목도 읽어둔다. 여느 '직업적'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카벨의 독특한 문제의식과 관심영역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카벨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 범주에 들어간다. 에머슨과 소로에서 시작된 미국 철학의 전통에 대한 의견도 참고할 만하다.
"저는 미합중국에서 철학과 문학이 제가 잘 알고 있는 현대의 어떤 문화에서보다 서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를 기대합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미합중국적인 차이를 동시적으로 고안하려 했던 에머슨이 필요로 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미합중국의 철학과 문학이, 특히 미합중국의 문학이 얼마나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에머슨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94쪽)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만약 -한다면, -할 것이다' 구문인데, 뒷부분은 "then you must be struck by the remoteness of literature, especially of Americn literature, from American philosophy since then."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충격을 받은 건 'you' 곧 '당신'이나 '우리'다. '에머슨'이 아니라. 이것도 고차원적인 '의역'인가.
여느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카벨이 로티처럼 분석철학계를 박차고 나온 것은 아니다. 카벨과 분석철학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작, 특히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서나, 그 시야에서 철학을 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은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91쪽)
요는 그가 분석철학의 관심이냐 시야를 넘어서는 자신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might seem a last and perverse place to look for it."이라고 카벨은 고백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하기엔 가장 어렵거나 도착적인 장소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카벨은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다! 그러니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는 삐뚤어진 번역이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란 마지막 문장은 "For me, for various reasons, in various ways, it has been inspiring."을 '풀어서' 옮긴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절했다면,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라고 해주는 게 더 좋았겠다. 핀트는 '분석철학 내에서'에 가 있으니까. 취향의 차이겠지만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는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로 옮기고 싶다...

이런 식으로 지적하자면, 며칠이 소요될지 모르겠다(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게 무슨 신나고 재미나는 일이라고 몸바쳐 하겠는가. 나대로 해야 할일은 따로 있기에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일단 마무리한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이런 류의 오역 지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식은 죽먹기'다. 그러니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각은 거꾸로다. 식은 죽먹기므로 좀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번역 수준을 좀 높이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독자들이 입 다물고 있으면 또 이런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게 우리가 경험해본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물론 아무래도 철학자들 인터뷰여서 구어체 대담치곤 어려운 대목이 드물지 않지만 영어문장을 좀 볼 줄 아는 독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대한 약간의 소양만 있다면, 이 번역서의 허다한 오류를 찾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Anglo-American philosophy'(영미철학)를 번역본은 한 군데인가를 빼고는 '북아메리카 철학'이라고 옮겼다. 영국과 미국을 가리키는 단어가 '북아메리카'인가? 'modern logic'을 '현대논리학'이 아니라 '근대논리학'이라고 옮긴 건 '관례'에 대한 무지라 쳐도 'priceless'(아주 귀한)을 '가치 없는'이란 식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가치 없는 번역이다. 경제 숙어인 'freedom from want'(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요로부터의 자유'로 옮긴 것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까? 'neural'(신경계)를 '중립적'(neutral'로 봤겠지)으로 착각하고,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people who have a belief in the Last Judgment)을 '최후의 심판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옮기고, '우선성'(priority)을 '선험성'으로 옮기는 수준이라면 수준 이하의 번역 아닌가?
이런 오역에 대해서 지적한다고 동료 번역자들이 같이 분개하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는다면 대단한 자기비하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이런 게 '남의 일'이 아니며 한국의 인문서 번역 수준이 다 이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번역에 대한 비판을 자주 제기한 바 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이라고 판단하진 않는다. 공역자인 강유원씨도 제대로 맘먹고 책을 다시 정독한다면, 나보다 더 많은 오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곧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박사가 아닌가. '동아시아학'을 전공한 역자와는 뭔가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게 될 것이다.
'인문철학자' 강유원을 아끼고 존경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도 그의 책을 다수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강유원은 우리가 아는 강유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올려놓은 이상, 이 책에서 뭔가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관한 조언'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쉽게 묻히는 다른 인문서와는 달리 이 책은 역자의 지명도와 '하버드'란 간판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짐작에 초판 정도는 소화가 되었을 듯싶다. 돌베개 출판사나 강유원씨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10. 08. 08.
P.S. 오래전 일이지만 지난 2004년 강유원씨가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2003)을 일간지 북리뷰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린비출판사의 유재건 사장이 반론을 제기하지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작을 비난하는 것이 저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까요? 저작을 비난하면 저작이 상처받는 것이지 저자가 상처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작이 상처받는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필자의 자존심’을 거론한 것은, 그것이 설혹 고미숙이라는 필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 해도 명시된 필자가 자기 저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규칙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출판계에 새로운 관행이 생겼다면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오리아나 팔라치의 ‘한남자’에나오는 글귀들이 떠올랐다. “영웅의 전설은 그 영웅을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화에 있어서나 현실에 있어서 위대한 공훈이란 모험의 시작, 사명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망각, 가중되는 고독, 고통의 무미건조한 반복만이 있을 뿐인 시련. 그러나 영웅이 이 두번째의 시련에 못 견딘다면 그에게 화가 미치리니.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사명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부디 ‘두번째 시련’을 견뎌내고 진정한 영웅들이 되시길.(문화일보)
그에게도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