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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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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글 탄생의 배경을 다각도로 조망할 뿐만 아니라, 한글이 문자로서 갖는 특성에 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처럼, 세종의 한글 창제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한문과 그로 인한 지식의 독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 지식의 보존과 전승을 유지하고자 했던 기득권층과, 문자의 대중화를 꾀하고자 했던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이념적 대립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한글 자체의 '신묘함'에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기존에 존재하는 말에 사용할 문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뜻을 형상화한 글자가 아닌 소리를 형상화한 표음문자를 택하고, 그러면서 초성 중성 종성을 분간해 내고, 음소 단위로 분절되어 있으면서도 음절 단위로 결합되어 있는(ㄱ, ㅏ, ㅇ 이지만 동시에 '강'), 따라서 의미단위까지 글자 자체로 보존할 수 있는(오로지 소리나는 대로 '무를 마시다'라고 쓰는 대신 '물을 마시다'라고 쓸 수 있어 '물'의 의미단위가 문자의 차원에서 보존된다), 실로 위대한 문자 체계를 고안해 냈다.


기존 지식체계의 존속과 전승이냐, 아니면 보다 대중적인 새로운 지식체계의 창출이냐를 두고 격돌했던 최만리파와 세종과의 대립에서 우리는 비단 한 시대,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인류에 보편적인 거대한 사상적 대결을 본다. 그리고 기존에 존재하는 말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고안하고 마침내 훈민정음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에서, 우리는 각종 소리와 음절, 단어를 인지하고 분별해 낸 뒤 이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인간 이성의 고유한 능력이 극한으로 발휘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보급하겠다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의지, 그래서 사대부의 물건인 붓으로 쓰는 글씨가 아니라 흙바닥에 작대기로 쓸 수 있는 모양의 글씨를 만들어낸 그 의지(최초 훈민정음은 붓글씨의 삐침과 흘림이 없는, 밋밋한 고딕체에 가까운 글씨체로 쓰였다. 궁서체는 후일 붓으로 한글을 쓰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에서는 따뜻한 마음씨를 느낀다.


'훈민정음'의 후서에 정인지가 쓴 글,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바로 이렇게 굳은 의지를 갖고 극한으로 발휘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전율하게 된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맨 뒤에 서문을 달면서 이렇게 썼다.


"바라건대 <(훈민)정음>을 보는 자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치게 되기를."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의 고택에서 발견되었을 당시에 지붕 밑 다락에 잠들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소장자에 의해 여성들의 한글 교육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은-'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편히 쓰게 하고자' 했던 세종 임금의 뜻대로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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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 이마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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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L. Heilbroner, The Worldly Philosophers, Touchstone, 1999.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2010.
John Maynard Keynes,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Chapter 24)
Paul Krugman,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 Penguin Books, 2008.


사회는 수많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 맡은바 일을 수행할 때에만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 원시 사회처럼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거나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라면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 별다른 조직 방법을 고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스로의 몸을 자연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 어느 정도 수월해지고 사회의 규모가 확대되어 더 이상 구성원들 모두가 혈족관계에 있지 않게 되면,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협력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인류는 이제껏 사회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존속시킬 수 있는 조직방법을 세 가지 찾아냈다. 최초에는 세대를 걸쳐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을 사회의 조직원리로 사용했고, 그 후에는 지도자의 명령과 이에 대한 복종을 통해 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시장을 사회 조직방법으로 사용한다. 억지로 협력을 강요하는 대신에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끔 내버려 둠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시장 제도의 역설적이면서도 찬탄할 만한 특징이다. 자원의 배분과 재화의 생산, 그리고 생산된 재화의 배분까지도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자율에 맡기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 제도가 사회의 조직방법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세상에 등장했다.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The Worldly Philosophers'은 이처럼 인간 사회의 조직방법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시작한다. 그 뒤를 이어서는 새롭게 등장한 '경제학'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걸어 온 여정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주었고, 경제학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또 몇몇은 기초가 닦인 경제학의 길을 넓히고, 바닥을 다져 더 오고가기 편한 길로 만들었다. 그리고 몇몇은 때로는 도발적인, 때로는 위협적인 질문을 던지며 경제학의 길에 갖가지 굴곡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경제학의 길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 중에는 누구 하나 독특한 매력이 없는 사람이 없다. 별로 힘 안 들이고도 위대한 학문적 성취와 명예를 손쉽게 일궈낸 것 같은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 케인즈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대함을 갈구하고 누구보다 노력했으나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 기인(奇人) 생시몽 같은 사람도 있고, 고난으로 가득찬 비참한 인생을 살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현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괴물같은 예언을 토해낸 마르크스 같은 사람도 있다.

하일브로너는 이들 '세속적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상을 조망해 나가면서 결코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성격을 먼저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맨 먼저 이들이 '인간 사회의 조직방법'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짚고 넘어간 데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한 사람의 사상을 그 사람이 놓여 있던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삶의 경험과 무관하게 고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독자들은 흥미진진한 전기를 읽는 기분으로 지루한 줄 모르고 경제학의 역사를 따라갈 수 있으니 깊이와 재미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서술방식이다.

스미스에서 맬서스와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를 만나고, 뒤이어 빅토리아 시대의 경제학자들에 이르러 우리는 '정치경제 Political Economy'가 '경제학 Economics'이 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이제껏 언제나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였던 경제학은 사회적 요소들을 모두 사상한 채 무색무취한 기호와 깔끔한 그래프로 표현되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닮고 싶어하는 학문이 되었다. 수식에 의해 결론이 명쾌하게 도출되고 논리필연적으로 타당한 증명이 이루어지는 작업을 하면서, 경제학자들이 진리를 찾아내고 있다는 뿌듯함에 약간은 너무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일브로너는 최근의 경제학에 나타난 뚜렷한 경향으로 '과학화'를 이야기한다.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일브로너는 이와 같은 경향에 우려를 금치 못한다. 알프레드 마셜이 말했던 것처럼 "경제학은 항상 변화하는 미묘한 인간의 작용을 다루기 때문에 정확한 물리적 과학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드는 첫번째 이유고, 두번째는 "인류의 사회적 삶은 그 본성상 정치적"이라는 것, 즉 "모든 사회는...귀족제도에서 노예제까지, 계급에서 카스트까지, 재산권에서 빈곤의 불이익에 이르기까지 이익과 불이익의 분류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도 이 일반적인 명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부의 재분배의 수준은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또는 세금과 상속제도와 같은 제도가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논의를 거쳐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할 성질의 것(=정치적인 것)이지, 결코 중력과 같은 자연적 법칙에 의해 결정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경제학이 자연과학이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착각하는 문제에 대해 하일브로너가 지적한 위의 두 가지 (타당한) 반론에 더하여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애초에 자기 스스로 파레토 최적을 달성해 낸다는 '완전자유시장'은 현실에서 그 전제조건을 모두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나머지 조건을 최대한 완전시장에 가깝게 한다고 해서 파레토 최적에 가까운 결과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점, 즉 어차피 완전시장의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나머지 조건들도 완전시장에 맞지 않도록 변형시키는 것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낫다는 점(이른바 '차선의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이다.

경제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채택하게 되면서,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 사회가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자연세계와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하일브로너의 문제제기는 분명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나타나고 있는 우려스러운 현상은 비단 인간사회와 자연세계를 혼동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시장경제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시장의 법칙'을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불변의 법칙으로 여기는 현상 또한 나타나고 있다. 전문 경제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시장의 법칙'에 따르는 상태가 유지되는 데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정치적으로 선전하면서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인간의 지성과 인류 문명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설사 '시장의 법칙'이 자연법칙처럼 절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위에서 보았듯이 이 가정부터가 틀린 것이긴 하지만), 인간이 그 법칙에 무조건 순응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길들여 온 역사다. 멀쩡히 나뒹구는 돌을 붙들고 서로 부딪혀 불을 만들어 냈고, 전기를 가두고 저장해서 온갖 기계장치를 움직이게 하는 법을 고안해 냈으며,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들었고, 중력을 거슬러 처음에는 아교로 접붙인 깃털날개를 달고, 나중에는 목이 긴 새 모양을 닮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간은 그의 행복과 욕망에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는 법칙에 굴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인간은 그 장애물을 부수고, 에둘러 피해가는 길을 만들어내면서 수천 년간 오늘날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궈냈다. 이제와서 인간이 '시장의 법칙'에 맞서 우리의 행복에 더 기여할 수 있도록 시장을 고치고 길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하준의 (술술 읽히면서도 유익한 내용으로 가득한)'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세상 중 가장 나은 세상이 아니다."

자유 시장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시장의 법칙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는 식으로 패배주의적 반론을 펴것은 결국 인간성 그 자체(humanity)에 대한 모욕이다. 올바른 문제제기는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하이에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학이 시장의 작용을 모두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이듯이,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시장을 완벽하게 조종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오만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자유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시장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힘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인간이 국가를 통하여 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자유가 지나치게 축소될 위험이 있고,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케인즈가 하이에크의 책 '노예의 길'을 읽고 그에게 쓴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 계획도 없는 것, 심지어 계획을 줄이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계획이라고 나는 거의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행되는 사회는 지도자이든 추종자이든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최대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도덕적 견해[=자유의 중요성, 인용자 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적절한 수준의 계획은, 그 계획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이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올바로 잡혀 있다면 충분히 안전할 것입니다."

자유의 중요성과 자율이 낳는 창조적 힘을 온전히 인식하고 존중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적절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 케인즈의 이와 같은 신중한 입장은, 그의 가장 유명한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에 대한 일반 이론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의 마지막 장에 잘 드러나 있다.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은 짧고, 경제적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나같은 사람이 이해하는 데도 지장이 없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격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롭고 세심하며 건조한 문장이지만(그러면서도 유려하다는 게 시기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케인즈는 실로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하일브로너의 책은 생소한 단어가 쉬지않고 등장하는 나머지 그 내용이 단숨에 읽어내려가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어를 찾느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인즈의 글은, 유려한 문장이 언제나 어느 정도는 그렇듯이 쉽다고 할 수는 없다. 구어체에 가까운 평이한 문장으로 좋은 책을 써내는 건 폴 크루그먼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를 맞아 기존의 책에 내용을 추가하여 낸 "불황의 경제학 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은 90년대 초반 남미의 통화위기, 90년대 후반 아시아의 통화위기와 일본의 장기 경기침체를 분석한 뒤, 2008년의 금융위기를 그 강도와 범위에 있어서 가공한 것으로 만든 이유를 비은행 금융권의 확대와 자본의 세계화 경향이라고 진단하고, 그에 대하여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통해 현재의 불황을 타개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비은행 금융권을 은행과 비슷한 수준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놓는다. 이 책은 하일브로너나 장하준의 책처럼 경제학 자체에 대한 논의('메타경제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에 중점을 둔 책이 아니고, 경제학의 틀 안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해 분석하고 처방을 내놓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진행되는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 논의를 관통하는, 경제 문제에 관한 크루그먼의 기본적인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얻어야 하며, 적절한 개입을 통해 시장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 이는 하일브로너나 케인즈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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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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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찾아가는, 끝나지 않을 여정에 더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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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eaks of the Game (Paperback)
David Halberstam / Hyperion Books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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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셔너리닷컴(Dictionary.com)에서 ‘breaks’를 검색하면 일흔일곱 번째 항목에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the breaks, informal. the way things happen; fate.” 직역하면 “사태가 벌어지는 모양새, 숙명” 정도가 된다. 그렇지만 ‘숙명’이라는 말은 우리말 어감상 적절한 번역어는 아닌 듯하다. ‘사태가 벌어지는 모양새’를 좀더 자연스런 말로 옮기면 ‘일이 돌아가는 꼴’이 되겠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말하는 경기(the Game)는 농구, 보다 정확하게는 미국 프로농구(NBA)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NBA가 돌아가는 꼴”이 된다.

이 책은 NBA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Portland Trail Blazers 구단의 1979~80 시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핼버스탬은 이 시즌동안 트레일블레이저스 팀과 생활을 같이하면서 선수들과 감독들을 비롯한 구단 관계자들을 인터뷰했고 현장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1979~80 시즌 트레일블레이저스 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핼버스탬은 그들을 통해 당시 NBA의 모습, 그 리그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그려낸다. 무엇이 그 당시 NBA를—농구선수들, 감독들, 수카웃들, 구단주들—을 움직이고 있었는지, 그 사람들은 변화하는 리그 환경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고, 그것은 또 리그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 이야기는 단지 한 팀의 한 시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NBA의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막 열리려 하고 있던 순간에서 바라본 리그의 역사 전체의 이야기이자 리그 구성원들 모두의 이야기이다.

NBA는 바뀌고 있었다. 미디어와 프로 스포츠가 서로 손을 잡으면서 프로 스포츠 세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TV 방송사가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야구(MLB)와 미식축구(NFL)였다. 미디어 자본이 프로 스포츠 리그에 유입되자, TV 중계료가 구단들에게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더 이상 구단들의 주 수입원은 티켓 판매가 아니었다. 구단의 수입이 증가하자 그에 발맞춰 선수들의 연봉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NBA는 MLB와 NFL에 비하면 후발주자였지만,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70년대 초, 거대 TV 방송국이 NBA와 중계 계약을 맺었고, 그에 따라 구단주와 선수들이 버는 돈은 대폭 상승했다. 돈이 된다는 이야기가 돌자 더 많은 사람들이 농구팀 경영에 뛰어들었다. 신생 구단이 빠른 속도로 생겨났다. 여덟 팀에 불과했던 리그는 스무 팀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자본의 유입은 단지 리그의 양적 팽창만을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선수들이 농구를 대하는 태도와 서로를 대하는 태도 또한 바뀌었다. 계약을 갱신하거나 새로 리그에 들어오는 선수들은 예전에 비해 훨씬 높은 금액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선수들, 이미 전성기가 지나 선수생활이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새로 큰 돈에 재계약을 할 수 없는 선수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보다 실력이 못한 선수가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선수들은 재계약에 응해 주지 않는 구단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리그가 양적으로 팽창하기 전, NBA는 말이 프로 리그였지 사실상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실력을 겨루는, 아마추어 냄새가 짙은 소규모 동네 리그나 다름없었다. 프로농구 선수가 되는 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기에는 수입이 너무 적었고, 선수생활이 오랫동안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농구를 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힘든 프로 생활을 견뎌냈다. 같은 팀의 선수들 사이, 선수들과 감독 사이에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존재했고 끈끈한 전우애가 있었다. 그들은 비좁은 버스를 함께 타고 원정 경기를 떠났고, 작은 모텔에 함께 묵으며 시즌을 보냈다. 감독은 가부장과 같은 권위를 갖고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팀을 이끌었다. 60년대를 주름잡았던, 빌 러셀Bill Russell과 레드 아이어바흐Red Auerbach의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가 바로 그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선수들은 진정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농구를 대했다. 그들에게 프로농구는 다른 무엇보다도 직장이었고, 돈을 버는 수단이었다. 선수들은 보다 많은 연봉을 받아내기 위해 구단주와 지리한 계약협상에 나서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변호사를 고용해서 연봉협상의 대리인으로 세우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감독들보다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되고, 구단 내에서 선수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감독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선수들을 휘어잡고 그들을 지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경기 외적인 요소에 의해 선수들이 타 구단으로 트레이드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연봉재계약 협상이 틀어져서, 혹은 좀더 많은 관중과 TV중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선수들을 보내고 팀 전체의 분위기와는 무관하게 기록이 뛰어나고 인기가 좋은 선수들을 불러모으는 구단이 많아졌다. 선수들 사이에 끈끈한 전우애는 더 이상 없었다. 오로지 형식적인 직장 동료 관계만이 남았다.

자본의 유입만이 NBA를 변화시키는 동력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60년대 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 때부터 프로 스포츠계에 흑인 선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70년대에는 스포츠계에 흑인 선수들의 진출이 대폭 확대되고 그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농구는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빨리, 그리고 더 많이 ‘검게’ 변한 스포츠였다.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농구에서 흑인들은 백인들을 압도하는 운동 능력을 자랑했다. 더 빠르고, 더 높이 뛰는 흑인 선수들은 미국 농구계를 사실상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경기의 모습도 바뀌었다. 정적이었던 과거의 농구경기는 사라지고, 스피드가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동시에 경기의 무대는 지상에서 공중으로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었다(NBA는 8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완전히 공중 경기로 자리잡았다. 84년에 리그에 들어온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이라는 선수가 그 변화의 정점에 섰다).

미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표면화된 인종 갈등으로 몸살을 겪고 있었다. 흑인들의 진출이 다른 사회 분야에 비해 더 빠르고 광범위했던 NBA에서 인종 문제는 더 첨예하게 나타났다. 모두 백인 뿐인 구단주와 감독들, 그리고 흑인이 대부분인 선수들 사이의 갈등에는 언제나 인종 문제가 덤으로 끼어들었다. 선수들 사회 내부에서도, 백인 선수들과 흑인 선수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존재했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인종 문제는 일견 그와는 무관해 보이는 갈등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자본의 유입, 그리고 흑인 선수들의 진출 확대로 인해 NBA는 분명 격변기였다. 그에 더해서, 격변기가 아닌 때에도 언제나 존재했던 문제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선수들은 리그의 살인적인 경기 일정 때문에 체력적으로 시달렸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선수들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리그에서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신체적 조건과 운동능력만을 보고, 잠재력에 기대를 걸고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순위로 선택된 어린 선수들이 주변의 높은 기대치로부터 오는 중압감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팀 내에서 확고한 자리를 보장받을 정도의 실력은 안 되는, 특출난 장점이 없는 선수들은 언제 엔트리에서 제외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를 감내해야 했다.

리그의 양적 팽창 또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 리그에 유입되는 속도보다 리그에 신생 구단이 생겨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한정된 인재 풀에 있는 선수들이 스무 개가 넘는 팀으로 흩어지다 보니, 각 팀의 전체적인 실력은 하향평준화되었다. NBA의 경기 수준이 저하되었다. 경기력의 저하는 농구경기의 재미를 떨어뜨렸고, 이는 TV 시청률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NBA는 방송국의 편성에서 점차 우선순위가 밀려났다. 1979~80 시즌의 결승전은 당시 리그의 후원 방송국이었던 CBS에서 생방송을 타지도 못했다. 황금시간대를 한참 벗어난 심야시간에 녹화방송으로 중계되었을 뿐이었다. TV자본의 유입을 맞아 성급하게 팽창을 추구한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리그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1976~77년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같은 팀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그 블레이저스는 ‘완벽한 팀’이었다. 센터 빌 월튼Bill Walton(지금은 농구중계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LA 레이커스 선수인 루크 월튼Luke Walton의 아버지다)을 주축으로 한 그 팀은, 새로운 시대의 농구를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수들은 개인적인 기록을 앞세우기보다는 팀 전체를 위해 뛰었다. 철저한 연습과 체력관리를 바탕에 둔 조직적이고 탄탄한 수비, 월튼을 비롯한 빅맨들의 리바운드, 가드들이 달려나감과 동시에 뿌려지는 패스, 그에 이은 속공. 조직력과 팀의 단합이 스피드와 더해지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 농구가 가능한지를 보여 준 팀이었다. 그만한 키와 체구에 비해 경이로운 패스 능력과 시야를 보유한 월튼의 특출난 재능이, 그 재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동료들과 어우러지고, 여기에 철저한 연습과 규율을 통해 조직력과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감독 잭 램지Jack Ramsey의 지도력이 결합한 결과물이었다. 77년, 블레이저스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규시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결국 그해 우승을 차지했다.

‘완벽한 팀’은 오래 가지 못했다. 팀은 우승한 다음 시즌인 1977~78 시즌 막바지에 월튼이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전력상 완벽을 보여 준 팀이었지만, 그 팀이 돌아가는 모양새 또한 70년대 말 여느 NBA 팀과 마찬가지였다. 몸상태가 좋을 때 누구보다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 주었던 빌 월튼은 만성적인 발 부상에 시달리면서 예전의 모습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부상은 결국 팀 의료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결국 월튼은 78년 시즌이 끝난 후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월튼의 부상과 팀 이탈을 기점으로 그 동안 잠복해 있던 문제점들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력 파워포워드 모리스 루카스Maurice Lucas(월튼은 루카스의 애칭을 따서 자신의 셋째아들의 이름을 ‘Luke’라고 지었다고 한다)와 스몰포워드 라이오넬 홀린즈Lionel Hollins는 적은 연봉액수에 불만을 표시했다.
연이어 드래프트에서 훌륭한 신인선수 발굴에 실패하면서 월튼처럼 부상을 당하거나 떠나간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지도 못했다. 결국 우승컵을 들어올린 지 2년 남짓한 기간 만에 1976~77년의 ‘완벽한 팀’의 멤버였던 선수들은 모두 부상으로 은퇴하거나 다른 팀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완벽한 팀’의 증발은 그 출현만큼이나 갑작스러웠다.

분명 이 책이 쓰여진 1980년 당시 NBA는 위기였다. 경기의 질이 저하되고 인기가 떨어지면서 TV 방송국의 후원도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NBA는 격변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잘 알듯이 NBA는 몰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80년대에 중흥기를 거쳐 90년대에 전례 없는 인기를 누렸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세계 무대로 시장을 넓혀 가고 있다.

NBA를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80년대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유입된 출중한 선수들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이 책이 다룬 1979~80 시즌에 80년대 NBA 중흥기를 선두에서 이끈 두 명의 선수가 리그에 들어왔다. 그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화려함과 정교함을 갖춘 실력, 경기에 대한 열정, 스스로보다 팀을 앞세우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경기력 저하에 신음하던 리그를 새로 일으켜 세우는 견인차가 되었다. 신생 구단이 늘어나고 선수들이 재배치됨에 따라 사라져가던 팀들 간의 라이벌 구도에 그들은 다시 불을 지폈다. 그들은 흡사 미국 사회의 근저에 존재하면서 NBA를 위협하던 갈등축을 모두 다 둘이서 봉합해 버리겠다는 듯이, 한 명은 흑인, 다른 한 명은 백인이었다. 한 명은 동부, 다른 한 명은 서부의 주요 도시를 연고지로 삼은 팀에 들어갔다. NBA가 무너져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던 바로 그 1979년, 두 사람의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매직 존슨(Magic Johnson), 그리고 래리 버드(Larry Bird)였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는 리그에 들어오기 전 대학 시절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NBA에 들어오자마자 그 즉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블레이저스의 1979~80 시즌을 밀착해서 관찰한 핼버스탬 또한 당연히 그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아직 두 사람이 장차 NBA를 구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두 선수가 보기 드문 비범함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던 모양이다. 핼버스탬은 래리 버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Bird was the rarest kind of media player, someone even better than advertised. Every player on the Celtics improved when he was on the court. … His sense of the court was absolute. He seemed to know where every player was at every moment. … He was, with that eyesight and those huge hands, perhaps the best passer ever to play forward. If a teammate got free, the ball came to him. Though he was a seemingly limited player physically, with a body that was weak by NBA standards, and had limited flex in his feet (which made him run up and down the court like an elderly woman) he was nevertheless one of the league's top rebounders."  

 [버드는 가장 희귀한 중개적 선수였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오히려 더 뛰어났다. 그가 코트에 서면 셀틱스 모든 선수들의 실력이 향상되었다. … 그는 코트를 보는 감각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매 순간 모든 선수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그 시야와 거대한 손 덕택에, 그는 어쩌면 역사상 가장 패스를 잘하는 포워드일지도 몰랐다. 팀메이트가 오픈되면, 그에게 볼이 배급되었다. NBA 기준으로 보면 약한 몸을 가진, 신체적으로는 제한된 선수였고 발의 유연성 또한 제한되어 있었지만(그 때문에 코트를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모습이 흡사 나이든 할머니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바운드에 있어서 리그 상위권이었다.]

핼버스탬은 79년, 신인이었던 버드를 두고 “4~5년에 한 번 나오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가진 선수(a player of rare ability, the kind who comes into the league every four or five years)”라고 평가했다. 아니었다. 버드는 40~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우리 생에 다시 볼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리고 그건 매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80년대 중반 리그에 대거 유입된 유례 없는 우수한 인력(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들이 82~87년에 NBA에 들어왔다. 클라이드 드렉슬러Clyde Drexler, 하킴 올라주원Hakeem Olajuwon, 패트릭 유잉Patrick Ewing, 데이비드 로빈슨David Robinson, 찰스 바클리Charles Barkeley, 칼 말론Karl Malone, 존 스탁턴John Stockton, 스카티 피펜Scottie Pippen, 아이제아 토마스Isaiah Thomas, 조 두마스Joe Dumars. 그리고 90년대 NBA의 전성기에 황제로 군림한 마이클 조던까지.)과 함께 고사 직전에 있던 리그를 부활시켰다. 물론 이 책은 81년에 쓰여졌기 때문에, 이들 슈퍼스타들에 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책을 탈고한 이후, 농구를 좋아했던 핼버스탬은 아마 이들을 보며 누구보다 즐거워했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로 이름을 날리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2007년 4월 23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 책은 프로 스포츠와 스포츠 저널리즘이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로 발달한 미국에서도 스포츠 저널리즘의 모범으로 꼽힌다. 한 농구팀의 한 시즌을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그 이면에 놓인 선수들, 구단주들, 감독들의 고민과 갈등,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당대의 사회적 문제들까지 드러내는 날카로움 때문이리라. 농구의 팬으로서, 그리고 스포츠의 팬으로서 아직 스포츠 저널리즘은 물론이고 프로 스포츠도 비중 있는 문화영역으로 정착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실정을 떠올리며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웠다. 새삼 저자의 때이른 죽음이 안타깝다. 핼버스탬의 유작은 다름아닌 한국전쟁을 다룬 'Coldest Winter'라는 책이다. 이 책과 함께 주문해 두었다. 이 책만큼만 역량을 발휘했다면, 읽어 볼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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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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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이 없다. "북한이 막강한 화력과 잘 훈련·편제된 병력을 갖고 전면적으로 38선 전역을 돌파·남진했다는 점," "그리고 이 같은 전면공격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조직되었다는 점도 확실했다." 그러나 누가 먼저 38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는냐에 대하여는 전쟁이 시작한 직후부터 논란이 점화되었다. 북한은 전쟁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부터 남한이 6월 25일 새벽 전면적인 북침을 감행하였고, 북한은 이에 대해 반격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북침의 증거로 서울을 점령한 후 경무대와 육군본부를 뒤져 노획한 문서들을 제시했다. 문서들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의 북침 의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남한은 북한이 6월 25일 새벽에 38선을 넘어 전면적으로 기습 남침해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측이 제시한 문서들에 대해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전쟁 과정에서 노획한 북한 측 문서들이 남침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한이 그 문서들은 가짜라고 반박했다.

개전 초기부터 진행된 논란은 이후에도 해결점에 이르지 못했다. 남북한과 미국은 각자 자신의 입장을 담은 공식 전쟁사를 간행했다. 남한의 공식 한국전쟁사는 한국전쟁을 '불의의 기습남침'이라고 규정했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따른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고 기술했다. 미국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남침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한국전쟁은 이러한 북한의 공격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보의 실패'라고 보았다.

그 후 "한국전쟁에 대한 남북·미소의 입장이 대립하는 와중에서 국제학계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견해를 도출해냈다." 한국전쟁을 북한의 기습남침이라고 보는 전통주의적 입장과, 남한 및 미국 측에 개전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수정주의적 입장이 대립각을 세웠다. 수정주의적 입장은 1952년 스톤(I. F. Stone)이 주장한, 미국과 남한이 공모하여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였다는 이른바 '남침유도설'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들 가운데 굽타(Kupta)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등이 주장한 이른바 '해주공격설'이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주공격설'은 옹진반도에 주둔하던 남한의 군대가 6월 25일 새벽 38선을 넘어 해주를 선제 공격함으로써 남한이 북한의 공격을 앞당겼고, 이를 통해 남한은 미국의 전면적인 개입을 이끌어 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사에 대한 연구 가운데 브루스 커밍스가 내 놓은 연구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다른 많은 연구자들과 달리 "커밍스는 오랜 문서관 연구에 기초해 광범위한 자료를 분석·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미군정기 자료와 북한 노획문서를 검토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1980년대 초반) "걸음마 단계에 있던 한국현대사 연구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때까지 학계에 제시된 많은 견해들은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초적인 자료 정리보다는 이론틀과 가정에 집중"한 것이었고, 음모론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자료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를 기반으로 한 커밍스의 연구는 한층 높은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커밍스의 '수정주의' 사관이 한국현대사 연구를 지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생겼났다. (그러나) 커밍스의 저작이 연구 초입에 있던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제시한 관점과 내용이 한국 학자들의 역사관을 결정했다는 설명은 과한 것이다." 학문 사회 내부에서 "진지하고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통하여 커밍스에 대한 진정한 비판과 극복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학문사회 외부에서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서로 주고받은 메아리 효과로 수정주의를 비판하면 할수록 커밍스의 영향력이 증폭하는 기현상이 연출되었다."

역사 연구의 출발점은 객관적인 사료의 확보 및 이에 대한 분석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주요 행위 주체인 미국, 북한, 소련의 자료가 공개될 때마다 전쟁사 연구는 충격의 파고를 넘어 격렬히 진행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 미국 측의 주요 자료가 공개되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고 미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수정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구소련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북한과 소련이 한국전쟁의 개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이른바 후기수정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연구 경향이 본격화되었다.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인 구소련 문서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들 새 자료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이전의 한국전쟁 연구가 도달한 지점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한국전쟁사 연구가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이 책은 그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공개된 미국 자료, 소련 자료, 북한 자료(미국이 노획한 북한 문서들을 말한다) 등 한국전쟁의 주요 행위 주체였던 3개국의 자료를 비교·교차·분석하는 것을 주요 방법론으로" 삼는다. 이 책이 이와 같은 광범위한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하여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해주공격설·유도설에 관해서 수십 년 묵은 논쟁·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고, 둘째는 미·소 양국의 38선 분할과 한반도 점령정책, 이에 영향을 받은 남북한의 적대적 동화 과정, 그리고 1949년 정점을 찍은 남북한 사이의 38선 무력 충돌 양상과 1950년 6월 25일의 개전 상황에 이르기까지,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한반도 정세를 38선 문제를 중심축으로 삼아 살펴 봄으로써 한국전쟁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가 사용하는 전쟁의 '형성'이라는 용어는, "전쟁은 특정 시점에서 특정 세력에 의해 돌출적으로 창조·결정된 산물이 아니라, 미소·남북·좌우의 대립과 길항 과정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소라는 세계 패권국가의 대립, 남북한 간의 지역적 분립, 좌우익 간의 이념적 대결 등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이처럼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게 되면, 미소 냉전에서부터 시기상으로는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요소들이 한국전쟁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 특히 38선에 주목하면서 특히나 1949년의 대규모 38선 무력 충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남북한과 미국이 추후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는 시각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왜 같은 전쟁을 남한은 '불의의 기습남침', 북한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미국은 '정보의 실패'라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는지(저자는 이를 '전쟁관'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에 대한 해답이 바로 1949년의 38선 충돌에 있다는 것이다.

북침은 없었다. 북한이 증거로 제시한 문서들은, 당시 남한과 미국이 주장한 것처럼 위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1949년 당시 남한 수뇌부들이 전쟁의지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이 사실은 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개시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한 당국 또한 무력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남침에 의해 한국전쟁이 개시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1949년 남한은 38선에서 대규모의 무력 충돌을 먼저 유발한 적도 있었다.)을 보여 줄 뿐이지, 1950년 6월 25일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나아가 1950년 6월의 현장에서 이승만이 공격을 명령하거나 지시한 증거는 단 하나도 노획되지 않았다."

반면,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내린 공격명령과 작전명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이 전쟁 당시 노획한 이들 문서를 공개하자 북한은 이들이 위조품이라고 맞섰지만, 공개된 구 소련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이들 문서 또한 진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구 소련의 문서들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는 과정, 그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무기를 공급하고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공격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제공하는 과정 등을 드러내고 있다. 남침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자료는 명백하다.

해주공격설 또한 사실과 다르다. 분명 6월 26일 남한의 언론은 옹진 반도에 주둔하던 국군 부대가 해주를 점령하였다고 대서특필했고, 이는 미군에도 보고되었다. 이에 대한 이제까지 남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 보도는 지휘관의 말이 와전되어 발생한 오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편한' 해명만으로 의혹이 가라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해주공격설은 한국전쟁사 연구에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해주공격설이 제출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무려 30여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연구는 오보설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인 탓이 크다.

그러나 해주공격설은 오보나 와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현재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에게는 유사시를 대비해 작성해 둔 방어계획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방어계획은, 옹진반도에 있는 17연대는 북한군의 침공이 있을 경우 육지로 역공하여 해주를 거쳐서 서울로 퇴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옹진반도는 38선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어 바다를 이용한 퇴각 외에는 38선 이북으로 역공하여 우회해서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 당시 육군본부는 이 방어계획에 따라 실제로 17연대에게 해주 공격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즉, "6월 25일 일느 새벽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있은 후인 6월 25일 오전에 내려진 방어 계획의 일환"으로 해주 공격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전황상 17연대는 해주로 반격을 하기는커녕 바다로 철수조차 어려웠다. 따라서 실제로 해주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17연대의 병력 일부가 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고, 본부에서는 그 병력이 명령대로 해주로 진공하였을 것이라는 낙관과 희망 속에서 잘못된 보고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저자는 남침유도와 해주공격의 증거로 제시된 자료들의 신빙성을 검토함과 동시에 반대증거를 제시하면서 남침유도설과 해주공격설을 반박해 나간다. 나는 한국전쟁사 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자료를 분석한 내용이 다른 사료에 비추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평범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저자의 논증은 자료와 이성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설득력이 있다.

38선은 본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경계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한국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군정을 실시하는 쪽으로 한반도 정책을 펴 나갔고, 여기에 미국과 소련 사이의 반목과 대립이 더해지자 38선은 본래의 국제법적 효력과 범위를 넘어서서 남북을 분단시키는 사실상의 국경선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이 38선과 그들의 38선 정책이 남긴 유산을 고스란히 둔 채 철수해 버리자, 38선상에서는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었다.

"38선을 일종의 국경선으로 고착화하고 사소한 월경이나 침범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미소 양군이었다. 충돌의 기본적 골격과 원인은 이들이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미소 양군은 38선에서 철수했고, 나아가 남북한에서 철수했다. 이들은 철수하면서 남북한에 각각 10만을 헤아리는 군대와 경찰을 조직했고, 막대한 무기와 군수품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미소의 갈등은 곧 남과 북, 좌와 우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남북한은 서로에 대한 적대심과 증오심을 키워 갔고, 이는 38선에서의 무력 충돌로 폭발했던 것이다.

38선이 생겨난 이래로 남북한 간의 무력 충돌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그 규모 면에서 1949년의 충돌은 예전과는 달랐다. 남북한은 연대급 이상의 병력과 중화기를 동원해서 서로를 공격했다. 1949년에는 특히 남한이 적극적인 공세를 폈다. 이처럼 1949년에 남한이 주도한, 대규모 38선 무력충돌이 훗날 남한의 '불의의 기습공격', 북한의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미국의 '정보의 실패'라는 한국전쟁관을 낳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무력에 의한 통일을 마음먹고 있던 김일성은 "1949년의 상황, 즉 남한의 표면적인 공격 태도와 '북침' 위협, 이에 대비되는 북한의 방어·수세적 입장이 전쟁의 진실인 것처럼 꾸몄다." 김일성은 남한의 무력 침공 위협을 들어 소련에 무기 공급을 요청했고,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스탈린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한편 스탈린은 북한의 무력 침공을 승인했지만, 이를 남한의 공격에 대한 반격전으로 포장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고 싶어했다. 1949년 남한이 보인 공세적인 태도는 북한에게 남침을 반격전으로 포장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개전 직후부터 서둘러 자신들의 공격은 남한의 북침에 대한 반격이었다고 국제사회에 선포하면서 한국전쟁을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으로 포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한국에선느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가한 '진정한 불의의 기습공격'만이 기억되었고, 1949년 남한측의 공세와 공격적 편성·방어 부재는 기억되지 않았다. 즉 한국군이 '공격 의지를 가진 방어형 군대'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군의 초기 붕괴는 북한의 병력·화력 우세 때문이었지만, 그 효과를 배가시킨 것은 '진정한 불의'의 공격을 가능하게 한, (1949년부터 1950년까지의) 한국군의 방어 부재 및 공격형 의도 및 편성이었다."

미국의 경우, 1949년 당시 남한이 보인 공격적인 태도를 보고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해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남한에게 제공한 중화기를 회수해 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괴뢰국가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소련의 직접적 지시 없이는 결코 북한이 독자적으로 남침을 실행할 의지가 없으며, 소련은 미국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에게 남침을 지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두 가지 정세판단이 겹친 결과, 미국은 1950년 상반기 북한의 임박한 남침을 가리키는 수많은 징후를 포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북한이 남한의 공세에 대비해서 무장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상황을 오판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기습공격이 성공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명백한 '정보의 실패'였다.

이 책은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 덕에 사료에 대한 분석은 꼼꼼하고, 미시적인 사실관계까지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세세한 사실관계까지 모두 주의를 기울이며 읽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에 대해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한국전쟁사와 관련한 여러 견해와 주요 논란거리를 짚으며 한국전쟁사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첫 번째 장과, 그 논란거리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마지막 장이 가장 유익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자료에 근거해서 사실을 추론해 나가는, 성실한 역사 연구의 모습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가 쓴 서문에서는 역사 연구에 대한 저자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전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글자들 뒤에 숨어 있는, 단단하고 꽉 찬 실사구시의 학문적 태도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책을 끝까지 읽은 뒤 정리를 위해 앞부분을 다시 읽을 때, 서문의 마지막 글귀가 빛을 뿜어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나는 언제나 이 말을 기억해왔다. 모교의 휘장에 써 있어 늘 가슴에 울리던 그 말,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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