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비록 입문서이지만 한국미술사의 通史이기 때문에 나의 미술사관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동아시아 미술사 전체 흐름’ 속에서 한국미술사를 이해하는 점이다. 기존의 한국미술사 책 첫머리는 대개 한국미술의 특질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미술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밝히는 노력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볼 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장마다 당시 중국·일본과 비교해볼 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장마다 장시 중국·일본과의 교류를 이야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미술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간혹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의심받고 때론 문화적 열등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적 영향이란 저절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수용자의 적극적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다. 중국이 제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은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로 가름되지 않는다. 유럽 중세의 기독교 문화를 아무도 유대문화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미술이 인도에서 왔다고 낮게 평하는 일이 없다. 한국의 불교 미술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동아시아의 제 민족들은 역사상 이름만 남기고 다 사라져버리거나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세계문화사를 보면 하나의 문화권은 중심부 문화와 주변부 문화로 구성된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지만 독일과 네덜란드의 문화적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독일과 네덜란드의 동참으로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고 말한다.
19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한 중심부는 중국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몽골 등이 중요한 일원이었다.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동아시아 문화는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고려 사람마저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세계 청자의 역사는 중국 청자의 역사 하나로 끝날 뻔했다. 한국이 빠진 동아시아 문화사는 불완전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당당한 지분율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이다.
(우렁찬 박수!!!!! 이 책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는데 상품 미리보기에서 이미지를 다운 받아 한글로 옮겼다. ^^;;)
유홍준 : 주식 전문가니까... 이걸 액면가로 할 것인가 시세로 할 것인가... 고려청자의 생산량은 중국의 1/20정도. 그러나 세계 청자의 역사에서 고려청자의 지분은 25%는 된다고 본다. 종목에 따라서 지분율을 주장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박경철 : 저는 총기가 있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데, 오늘날 재벌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잘 사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도 지분이 있다는 것과 상통하겠네요. (옳소!)
박경철 : 학자는 묵묵히, 관료는 결재를! 학자와 관료가 하는 일이 참 다른데, 학자로서 고민하던 부분이 있을 텐데, 문화재청장을 하면서 나아진 부분이 있는지... 소회 어떠신지?
유홍준 : 개인적으로 이미지 관리로는 손해다. 노대통령은 당선 전에 본 적이 없던 분이었다. 대통령이 답사기 재밌게 보시곤 인수위에서 찾아오셨다. 문화재청은 답답한 곳이다. 참여정부에서 나를 쓸 의사가 있다면 차라리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달라고 했다.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일급으로 되어 있어서 힘을 못 쓰니 차관급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 500가지를 박물관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 공무원들의 자기 방어 의식. 그래도 끝까지 어필하면 될 수 있었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1급 공무원이었는데 이걸 차관급으로 올리게 했다. 해방 이후 박물관 사람들의 50년 숙원이었는데 이걸 왜곡시켜버렸다. 그래서 사퇴해 버렸다. 문화재청 안 하려는 이유가 뭐냐? 해서, 박물관은 동산 문화재이고 문화재청은 부동산문화재이다. 동산은 미술사적 실천이 가능하지만 부동산은 움직이지 못해서 관리만 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답사기 쓸 때 문화재청 뭐하는 거냐고 많이 말하지 않았냐! 그래서 한다고 했더니 문화재청은 헌법기관이어서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차관청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여소야대 형국이어서 1년 동안 단 한 개의 안건동 통과되지 못했고, 그 다음엔 탄핵 정국이었다. 다시 1년 6개월을 기다리고 나서야 임명. 그래서 사실 3년 6개월 근무했다.
청장이 되고 문화재청 관리에 큐레이터십을 적용했다. 개방할 것은 개방하도록 했다. 대표적인 것이 경회루. 경회루 등 갇혀 있던 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국제 행사 만찬장으로 활용했다. 또 전국의 가치 있는 문화재들을 찾아내 국보, 보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아무리 뛰어난 문화재라도 과거에 신청한 것들만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더 가치 있는 문화재들이 숨어있던 경우가 많았다. 초상화, 고지도, 달항아리 등등... 전국 늙은 매화를 조사해서 천연 기념물로 지정하고 전국 돌담길에서 복원 가능한 것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원 없이 일하고 원 없이 얻어터졌다. 내 잘못보다 참여정부 흠집 내기 위해 엄청나게 당했다. 덕분에 문화재청 인지도가 엄청 올라갔다. 지금은 조용하다.(어느덧 쓸쓸한 존재감...) 나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로 인해서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다.
박경철 : 답사 기획은 처음에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유홍준 : 인생이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계간 미술 기자를 하다가 어느 대학에서 석사 학위만 있으면 교수에 뽑는다고 했는데 전공이 적용되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될 거라고 여겼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원을 조회하니 ‘민청학련 긴급조치 4호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형 집행으로 사면되었으나, 복권이 되지 않은 자'여서 사립대학 교수가 될 수 없는 신원이었다. 그래서 다시 회사로 들어갈까 하다가 엎어진 참에 쉬어 가자고, 미술 평론가로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평론가지, 사실상 백수였다. (웃음)
그때 마침 주변에서 민중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어쩌다 나도 신촌에 있는 '우리마당'에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라는 포스터를 미술대학교에 붙여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꽤 많은 학생들이 왔는데, 8주 계획이었는데 그때도 하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고려도 안 가고 끝나버렸다. 다시 8주를 연장했다가 사설 강습법 위반으로 또 걸렸다 (웃음) 당시 학생들을 한국미술사로 전도하기 위해서 현장에 답사를 가곤 했는데, 그 중엔 판화가 이철수와 만화가 박재동도 있었다. 충실한 생도들이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온 얘기들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된 것이다. 리허설, 임상실험을 그때 한 셈이다.

91년에 민주화되고 한길사에서 나오던 <사회와 사상>이란 월간지가 폐간되자 진보적 친구들이 각출해서 월간 <사회 평론>을 창간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교수만 하던 친구들이라 사업 망하는 것을 생각 안 해서 쫓아다니면서 말리다가 덜컥 문화 담당 편집위원장이 되었다. 잡지니까 재밌어야 하는데 원고료도 없으니 소설도 없고 팔리지 않아... 그래서 친구들이 버스 안 이야기를 쓰라는 얘기가 나왔다. 영악한 계산인지 몰라도 원고 청탁에 대해 하는 계산은 하나다. 이게 나중에 묶어서 책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다음에 수락한다. 난 서울놈.(깍쟁이란 소린가보다. ^^;;) 조건을 달았다. 매수는 80매. 내 글 고치지 말 것. 그때 쓰기 시작한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93년에 책이 되어 나왔다. 근데 회사는 망했다. 우연이 운명이 된 것이다.
박경철 : 듣고 보니, 저도 책 안 되는 원고 끊어야겠습니다.
박경철 :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인문학의 재발견, 붐... 답사기가 불씨가 되었다. 인문학 재조명, 재발견...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산 불리기도 아니고,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다. 자칫하면 돈 쓰는 얘기인데... 이런 현상들에 어떻게 보십니까? 다양성의 측면입니까, 필연적인 움직입니까?
유홍준 : 공부 못하는 아이를 족집게 과외해서 15등까지 올릴 수는 있어도 거기서 한 등수 꺾기는 힘들다. 국영수만 갖고는 안 된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주요 20개국(G20)에 들었지만, 그 안에서 이탈리아, 캐나다 같은 나라들을 꺾을 수 있겠나. 우리에게 그런(인문학적)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알게 된 거다. 삼성전자에서 인문학 강의를 해 달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왜 찾아왔냐고 했더니 전자 제품이나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거다. 직원들도 기계공학과 출신만 뽑는 게 아니라 심리학, 역사학, 인류학 전공자들도 뽑아 같이 일한다고 하더라. 소비자가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야 결국 제품의 질도 더 높아진다고 하더라. 그동안 우리가 몰라왔던 거라고.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그동안 우리가 인문학적 연구 성과가 없었던 게 아니다. 대중에게 전달이 안 됐던 거다. 알기 쉬운 '이야기'로, 또 독자들이 원하는 형태로 생산해내지 못했던 게 이유다.
인문학자들의 자체 반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평전 없는 문화에 대해서. 나는 늘 전기(biograph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나라는 전기 전통이 너무 약하다. 서양의 베스트셀러는 전기 문학이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존경하는 이들의 전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화폐에 들어있는 세종대왕 전기, 이순신 전기, 율곡 전기? 없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다.
전문가들끼리 통하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감화할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엔 인물의 삶과 학문, 예술, 삶 속의 정치 이야기와 그가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다 들어 있다. 이기이원론은 수능시험용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삶의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출판에 전기의 전통이 살아나야 과거, 그리고 사람과의 교감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 20명의 전기를 쓰는 일이다. 그 첫 결과물이 <화인열전>이다. 거기서 여덟 명을 다루고 아홉 번째로 쓴 것이 <완당 평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박수근 전기도 써야 하고, 동시대 민중미술 작가인 신학철의 전기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계속 해나갈 것이다. 나는 인문학의 성과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기라고 생각한다.





박경철 :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목민심서>는 자주 들어봤어도 정약용의 전기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런데 전통 시절에는 불충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 보면 선조가 율곡 이이에게 매월당 김시습의 전기를 써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전기가 요즘 A4 용지로 치면 세장이 안 된다. 그 속에는 매월당의 일생뿐 아니라 율곡의 평가까지 들어가 있다. 이이는 김시습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세상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며,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수습할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의 기상이 맑기는 해도 무게가 모자란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도 썼다. 어떻게 보면 논쟁적이란 얘긴데, 임금이 이런 인물에 대해 써 오라고 할 정도로 전기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쓴 '열녀 박씨전'이라는 천하의 명문이 있다. 거기에 어느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사람이 선조 중에 과부가 있어서 청직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는 얘기를 듣고 한 과부가 자기 아들에게 동전을 하나 꺼내더니 이렇게 말한다. 이 동전 끄트머리가 마모돼있고 글씨가 다 사라져 있는데 왜 그런 줄 아느냐, 나도 널 키우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내 몸인들 욕정에 뒤척이지 않았겠느냐, 한 여름에 비는 주룩주룩 오고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그걸 달래기 위해 동전을 쥐고 몇 번이나 돌리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잤다. 이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전기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나 이 얘기 속엔 그 당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이 시대엔 적어졌는가.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러 사람들의 전기인 셈이다. 많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독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바이오그래피의 전통을 확립해야 한다. 서양에는 아예 전기 작가라는 직업군이 있다.
(시골 살게 된 배경은 노대통령 덕분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을 참조하시길! 엄청 재밌다!)
박경철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깜짝 놀라게 할 것인가?
유홍준 : 한국 미술사 강의는 4권까지 나올 것 같다. 현재 <월간 중앙>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계속 연재 중이다. 다음번에 묶여 나올 7권은 제주도 문화재에 대해서만 다뤄질 것 같다. 8권에선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문화재에 대해, 9권에선 중국, 일본 다니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본 문화재와 교류의 흔적에 대해 이야기 할 계획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갈라 쇼'에 해당하는 '국보 순례'가 8월에 책으로 묶여 나온다. 국보지정이 400개인데 100개 정도 다뤘다. 미술사 전도사로 충실히 살겠다. 선수권, 아이스 쇼, 갈라 쇼 모두 체력이 닿는 데까지 하겠다.
(국보순례, 지난 주에 일주일 연기됐는데 오늘은 나오는 것 맞습니까??)
박경철 : 말씀 들어보니 정말 청년이다! 꿈이 있어야 청년인데 반성도 많이 했다. 좋은 강의, 말씀 잘 들었다. 재미를 위해서 버릇없는 투로 말씀 드린 것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고맙습니다. 박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어서 긴 장화를 신었음에도 신발 안으로 비가 들이치던 날이었다. 비를 뚫고 달려간 보람을 충분히 느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박경철 씨의 안동 사투리가 엄청 진했는데, 두 분의 입담이 쿵짝이 잘 맞아서 더 재밌었다. 사실 그날 콘서트 7080에 이승환 출연으로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그런데 당일에 누가 표가 생겼다고 데리고 간다고 했는데 유홍준 박경철 대화에 참여하려고 거절했다. 무려 9곡이나 불렀다고 해서 무척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 시간을 포기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만족감을 주었다. 교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하실 때까지, 건강히 오래 사시기를!!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만들어주신 작업물들을 열심히 소화시키겠다. 지금도 보관함이 빵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