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한 부여 답사

일시, 장소 : 2011. 7. 26 서울 역사 박물관 7시.  

역사박물관 강당을 9시까지는 비워줘야 하기 때문에 박경철 씨가 청중을 대변해서 질문을 하는 것에 양해를 구했다. 얼마든지요! 



박경철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을 통해 다시 돌아온 감회가 어떤가요?

유홍준 :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숭례문 화재로 죄인의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1년간 자숙하며 지냈다.
나의 본업은 미술사. 따라서 한국 미술사 강의 책부터 냈다. 분량상 3~4권 나올지 아직 모른다.
답사기는 충북, 경기, 제주, 서울 답사 못 써서 부채감 있다.

박경철 : <한국미술사강의>는 곰브리치처럼 재미없을 것 같다. 청중들 대부분 못 읽었을 거다. 나도 못 읽었다.

유홍준 :재미도 없고 피겨로 치면 쇼트 프리 같은 지정 종목인지라 순서대로 가야 한다. 삼국시대 나오면 고려, 그 다음에 조선... 이런 식으로... 답사기는 아이스쇼. 국보순례는 갈라쇼로 비교할 수 있다.
곰브리치 책 제목 story of Art다. history 말고 story 들어간 책으로 읽으라고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조언을 들었다. 강단의 언어보다 대중의 언어가 큰 영향력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미술사 강의 영어 제목은 story of Korean art로 했다. 이 책이 책상에 앉아 읽는 게 아니라 소파에 기대서 읽는 책이 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긴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 미술사를 아이스 쇼나 갈라 쇼 수준으로 재미있게 소개하는 것이다. 국민들로 하여금 한국 미술사를 통해서 한국 문화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내 인생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박경철 : 답사기의 히트 이후 사람들이 유홍준의 프레임으로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여기에 대한 부담은 없으신지?

유홍준 :교육은 모방을 전제로 한다. 모방이 축적되어 자신의 것이 된다. 제가 제시한 프레임만 보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 따라하는 것은 충실한 생도라고 할 수 있다. ^^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상권에 보면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사가 있다.

"한때 유홍준의 신도였던 적이 있다. 그가 좋다고 말한 곳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가 느낀 것과 똑같이 느끼고자 했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했으니까. 이제는 좀 다르다.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좋은 것은 좋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이라도 독자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것이 우리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것을 방해하던 온갖 잡스런 것을 걷어내 준 그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여러 곳을 답사하고 온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쪽 문화재보다는 그쪽 사람들에 관해 언급한 것에 더 관심이 갔던 이유도 그의 이런 뛰어난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박경철 : 그걸 뛰어넘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려면, 끊임없는 관심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 그러나 보통 그저 한 번 소비하고 버리는 문화적 허영심 짙지 않은가? 왜 우리가 우리 문화유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득이 잘 안 된다. 국수주의 시각으로 굳이 우리 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정말 더 아름답다고 여기는지?

유홍준 :그동안 우리는 남의 것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남의 것만큼 우리 것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93년도에 마이카 시대에 돌입했다. 당시 마이카족은 외국에 다녀와 본 사람들이었다. 나가보니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를 알아야겠다는 욕구가 솟은 것이다. 그때 이 책이 가이드 라인이 되었다.

박경철 : 60년대는 서구 중심주의가 팽배했던 때. 그럼에도 민족주의적인 길이 가능했는지...  주류가 아닌 소수자, 어찌 보면 낙오가 되기 쉬운 선택의 동기는?

유홍준 :정수일 씨도 같은 질문을 했다. 4.19 이후 민족주의가 외가닥으로 흘러왔다(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쌩으로 7년 반을 재학했던 김지하 씨(군대 다녀와서가 아니라..;;;), 조동일 씨 등. 서울대 미학과에 67학번으로 입학하니 칸트 헤겔 등 관념주의 철학 가득. 지루했다. 졸업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첫구절 하나 밖에 기억도 안 난다. 당시 연극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김지하가 연출하면서 창작극을 올렸다. 선배가 꼬셔서 무대장치를 맡았다. 아서 밀러의 ‘다리 위에서의 조망’ 이런 걸 해야 연극이지 천승세의 ‘만선’을, 창작극을 한다는 건 촌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김지하가 와서 만선을 올렸다.

박경철 : 대체 미학이 뭡니까? 터무니없는 학문 아닌가?

유홍준 :8월 중순에 방송될 무릎팍 도사에서 강호동 씨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  
 

(무릎팍은 박경철이 선배! 내일 방송은 박정현이 출연하니 유교수님은 다음주나 다다음주 쯤 나오시지 않을까? 무척 기대된다!)

수없이 들은 질문이다. 꼭 몰라도 될 사람이 물어보더라. (ㅋㅋㅋ)그거 골치 아파 미술사로 옮겼는데, 한 마디로 미학은 미와 예술에 관한 학문이다.


진지하게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얘기해 보겠다.
사람의 이성적 사유를 체계화한 것이 논리학이다. 사람의 삶 속에는 감성적인 것이 있다. 그것을 미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어는 ‘감성학, 감성적 인식론’이란 뜻이다. 이성적 논리학이 최고 형태로 나타난 것이 진리라면, 감성적 인식론의 최고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름다움’. 감성적 인식론이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으로 바뀐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관념과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예술이다. 모든 철학자의 마지막 저서, 혹은 미완성 책은 그래서 ‘미학책’이다. 미학자라는 독립된 인간 개체는 사실 서구에 없다.

철학 말고 예술... 있는 것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난 관념 말고 실체를 갖고 얘기하고 싶었다. 서양 미술사 공부하다가 우리 미술사에는 이런 재밌는 것이 없나, 컨텐츠가 부족한가, 해석이 부족한가... 이런 것을 알고 싶어서 이 길로 와서 아직까지 못 나가고 있다.

(박경철씨는 영남대 학생으로 교수님과 사제지간이기도 한데, 교수님은 영남대를 떠나게 된 사정도 얘기하셨다.)

유홍준 :  미술사학과라는 이름을 교육부가 인가해주지 않았다. 어디에서건 미술사학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 김원룡 선생님이 서울대에 고고학과를 만들면서 ‘고고미술사’라는 이름으로 미술사학과를 서자처럼 끌어안았다. 어느 학교든 인문대학에서 미술사학과를 만들면 가겠다고 결심했는데, 명지대에서 2000년에 토목공학과 20명을 빼서 우리 과를 만들어주었다.

박경철 : 교육부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유홍준 :너희 과 안에서 자체로 하는 것은 괜찮지만 새로 신설하는 것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어느 과에서도 자기 과 인원을 빼주려고 하지 않는다. 당시 명지대 총장이 토목과 출신이어서 토목과에서 빼서 해준 거였다. 지금은 30명이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은 100명이다. 사회적 수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성락 박사(아주대 피부과). 작년에 은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입학. 인생 90까지라니 20년 어떻게 살까 세컨 라이프 설계하다가, 의학박사가 있어서 석사 건너뛰고 박사로 오셨다. 대표적 논문이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역사박물관에도 초상화 전시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초상화를 그릴 적에 되도록 예쁘게 하는데 우리나라 초상화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 다섯 살에 천연두 앓아서 마마자국이 있는데 그의 초상화에 곰보 자국이 그대로 있다. 절대로 안 지워준다. 한국의 초상화만이 그런 논문을 가능하게 했다. 미술사는 피부과 의사마저 포용하더라.(웃음) 미술사학과를 만들기 위해서 영남대를 떠났는데 많이 울었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더하거나 빼지 않는 정신, 놀랍다!)

박경철 : 시대를 고민하는 청년이셨다. 당시 서울대 분위기란 김지하가 등장하면서 안 봐도 분위기가 선하다.

유홍준 :당시 해마다 4.19 선언을 했다. 그런데 69년 3선 개헌 분위기 속에서 4.19 선언하기 힘들었는데 선배 꼬임에 넘어가 4.18에 초혼제 주도하다가 7월에 무기정학을 받았다. 미술사 공부하려 마음 먹었는데 정치적인 일에 연루되어 감옥까지 갔다. 그래서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하하!)

박경철 : 홍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 전문기자와 미술 비평가로 활동도 했다. 비평적 시각으로 바라보다 보면 역사인식을 갖게 되고, 그 속에서 계승과 보전해야 할 것이 있지만 나아가서 반성과 진화의 관점에 설 수밖에 없지 않나. 전통의 맹목적 계승보다는 개혁, 진보 이런 개념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평소에 이런 걸 주장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로서는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데, 전통문화를 어떻게 ‘개혁’합니까?

유홍준 : 우리는 보통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엇을 전통의 본질로 여긴다. 그러나 전통은 변한다. 그 시대에 맞게 변하기 때문에 이어진다. 언어도 그렇게 변했다. 우린 항상 전통을 고수, 지켜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전통을 개조해서 그 본뜻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전통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 다시 말해서 실력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발음은 중국의 천 년 전 당나라 송나라 때의 고어다. 갸들은 바꿔도 전래받은 사람은 못 바꾼다. 살아서 움직일 때 바꾼다.
안동의 제사가 얼마나 쎄냐!

박경철 : 징그럽죠!(ㅋㅋㅋ)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에 불천위 제사 나온다. (책을 꼭 참고하시라!) 과거에 퇴계 이황 등 절대로 위패를 옮길 수 없는 분들의 불천위 제사를 지낼 적에는 그 지방의 문중들이 다 모였다. 한 300명 쯤 왔다. 그런데 다 서울로 가 버리면서 30~50명밖에 안 오게 됐다. 제삿날이 음력으로 돌아오잖나. 그게 화요일일지 목요일일지 모르니 올 수 있는 사람이 적었던 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고집쟁이 양반 집안에서 불천위 제사를 당일이 아닌, 그 주 토요일 저녁에 지내도록 했다. 그랬더니 다시 100명, 200명으로 참석자가 느는 추세다. 본뜻을 살리기 위해서 변화를 주었더니 오히려 전통을 살릴 수 있었던 거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 제사 문제를 유연하게 대처했다면 그 정도로 핍박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황청의 책임이 크다.)

이런 예도 있다. 워낙 종갓집 보존에 관심이 많아서 문화재청장 되기 전부터 '전국 맏며느리 사무총장 협의회'를 만들 생각까지 있었는데, 문화재청장 된 뒤에도 기억에 남아 '맏며느리 간담회'를 열었다. 60명이나 되는 맏며느리들을 만나 애로사항을 들었다.

맏며느리로서 문화재를 지키고 있어서 구속받는 것 힘들어 했다. 거기서 "제사상 음식에 전을 빼면 일이 반으로 줄어들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랬더니 어느 집 맏며느리께서 "우린 할배 때부터 전 없애부렸어예." 하는 거다. 그랬더니 다른 한 분도 "우리 집도 안 부처예. 대신 피자를 올려예. 그랬더니 손주들이 좋아해예" 라고 거들었다. 뼈대 있는 종갓집이니까 전을 빼고 피자를 올릴 수 있는 거다. 제사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변화를 준 거다.

살아있는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 개조, 개선해야지 인습적으로 고수해서는 안 된다. 한옥도 현대인이 살 수 있게 만들어야 계승할 수 있다. 일년 열두 달 불도 안 때면서 구들장을 지킬 수 없다. 전통에 대한 오해, 이해 부족이 문화재 지키는 데에 문제로 작용한다.

박경철 : 역시 누가 말씀하시는가에 따라 다르다.
유홍준 : 나도 어머니께 전 부치는 것을 없애자고 했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아냐..;;;
박경철 : 모든 개혁은 실력 있는 사람이 해야 진행이 잘 되는데, 대개 힘 있는 사람은 향유만 한다..;;;;(그러게 말입니다..ㅜ.ㅜ)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려 하지만 중국에 가면 주눅 들고, 일본에게 큰소리 내는 모양새는 아닌지?

유홍준 : 한국 미술사 강의 서문에 적었다. 내 책을 안 읽어서 이런 질문하는 거다! (찔립니다!)

(객석에서 책 갖고 있는 사람에게 책을 받아 직접 읽어주셨다. 소름이 돋았다!!)

 

 

이 책은 비록 입문서이지만 한국미술사의 通史이기 때문에 나의 미술사관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동아시아 미술사 전체 흐름’ 속에서 한국미술사를 이해하는 점이다. 기존의 한국미술사 책 첫머리는 대개 한국미술의 특질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미술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밝히는 노력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과 비교해볼 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장마다 당시 중국·일본과 비교해볼 때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장마다 장시 중국·일본과의 교류를 이야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미술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간혹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의심받고 때론 문화적 열등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적 영향이란 저절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수용자의 적극적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다. 중국이 제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은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로 가름되지 않는다. 유럽 중세의 기독교 문화를 아무도 유대문화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미술이 인도에서 왔다고 낮게 평하는 일이 없다. 한국의 불교 미술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동아시아의 제 민족들은 역사상 이름만 남기고 다 사라져버리거나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세계문화사를 보면 하나의 문화권은 중심부 문화와 주변부 문화로 구성된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지만 독일과 네덜란드의 문화적 정체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독일과 네덜란드의 동참으로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고 말한다.
19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한 중심부는 중국이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몽골 등이 중요한 일원이었다. 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동아시아 문화는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고려 사람마저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세계 청자의 역사는 중국 청자의 역사 하나로 끝날 뻔했다. 한국이 빠진 동아시아 문화사는 불완전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당당한 지분율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이다. 

 

(우렁찬 박수!!!!! 이 책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는데 상품 미리보기에서 이미지를 다운 받아 한글로 옮겼다. ^^;;)

유홍준 : 주식 전문가니까... 이걸 액면가로 할 것인가 시세로 할 것인가... 고려청자의 생산량은 중국의 1/20정도. 그러나 세계 청자의 역사에서 고려청자의 지분은 25%는 된다고 본다. 종목에 따라서 지분율을 주장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박경철 : 저는 총기가 있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데, 오늘날 재벌들의 노력으로 이만큼 잘 사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도 지분이 있다는 것과 상통하겠네요. (옳소!)

박경철 : 학자는 묵묵히, 관료는 결재를! 학자와 관료가 하는 일이 참 다른데, 학자로서 고민하던 부분이 있을 텐데, 문화재청장을 하면서 나아진 부분이 있는지... 소회 어떠신지?

유홍준 : 개인적으로 이미지 관리로는 손해다. 노대통령은 당선 전에 본 적이 없던 분이었다. 대통령이 답사기 재밌게 보시곤 인수위에서 찾아오셨다. 문화재청은 답답한 곳이다. 참여정부에서 나를 쓸 의사가 있다면 차라리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달라고 했다.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장도 일급으로 되어 있어서 힘을 못 쓰니 차관급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 500가지를 박물관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 공무원들의 자기 방어 의식. 그래도 끝까지 어필하면 될 수 있었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1급 공무원이었는데 이걸 차관급으로 올리게 했다. 해방 이후 박물관 사람들의 50년 숙원이었는데 이걸 왜곡시켜버렸다. 그래서 사퇴해 버렸다. 문화재청 안 하려는 이유가 뭐냐? 해서, 박물관은 동산 문화재이고 문화재청은 부동산문화재이다. 동산은 미술사적 실천이 가능하지만 부동산은 움직이지 못해서 관리만 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래서 나에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답사기 쓸 때 문화재청 뭐하는 거냐고 많이 말하지 않았냐! 그래서 한다고 했더니 문화재청은 헌법기관이어서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차관청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여소야대 형국이어서 1년 동안 단 한 개의 안건동 통과되지 못했고, 그 다음엔 탄핵 정국이었다. 다시 1년 6개월을 기다리고 나서야 임명. 그래서 사실 3년 6개월 근무했다.   

청장이 되고 문화재청 관리에 큐레이터십을 적용했다. 개방할 것은 개방하도록 했다. 대표적인 것이 경회루. 경회루 등 갇혀 있던 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국제 행사 만찬장으로 활용했다. 또 전국의 가치 있는 문화재들을 찾아내 국보, 보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아무리 뛰어난 문화재라도 과거에 신청한 것들만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더 가치 있는 문화재들이 숨어있던 경우가 많았다. 초상화, 고지도, 달항아리 등등... 전국 늙은 매화를 조사해서 천연 기념물로 지정하고 전국 돌담길에서 복원 가능한 것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원 없이 일하고 원 없이 얻어터졌다. 내 잘못보다 참여정부 흠집 내기 위해 엄청나게 당했다. 덕분에 문화재청 인지도가 엄청 올라갔다. 지금은 조용하다.(어느덧 쓸쓸한 존재감...) 나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로 인해서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다.

박경철 : 답사 기획은 처음에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유홍준 : 인생이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계간 미술 기자를 하다가 어느 대학에서 석사 학위만 있으면 교수에 뽑는다고 했는데 전공이 적용되는 유일한 사람이어서 될 거라고 여겼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원을 조회하니 ‘민청학련 긴급조치 4호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형 집행으로 사면되었으나, 복권이 되지 않은 자'여서 사립대학 교수가 될 수 없는 신원이었다. 그래서 다시 회사로 들어갈까 하다가 엎어진 참에 쉬어 가자고, 미술 평론가로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평론가지, 사실상 백수였다. (웃음)

그때 마침 주변에서 민중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어쩌다 나도 신촌에 있는 '우리마당'에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라는 포스터를 미술대학교에 붙여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꽤 많은 학생들이 왔는데, 8주 계획이었는데 그때도 하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고려도 안 가고 끝나버렸다. 다시 8주를 연장했다가 사설 강습법 위반으로 또 걸렸다 (웃음) 당시 학생들을 한국미술사로 전도하기 위해서 현장에 답사를 가곤 했는데, 그 중엔 판화가 이철수와 만화가 박재동도 있었다. 충실한 생도들이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온 얘기들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된 것이다. 리허설, 임상실험을 그때 한 셈이다.

91년에 민주화되고 한길사에서 나오던 <사회와 사상>이란 월간지가 폐간되자 진보적 친구들이 각출해서 월간 <사회 평론>을 창간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교수만 하던 친구들이라 사업 망하는 것을 생각 안 해서 쫓아다니면서 말리다가 덜컥 문화 담당 편집위원장이 되었다. 잡지니까 재밌어야 하는데 원고료도 없으니 소설도 없고 팔리지 않아... 그래서 친구들이 버스 안 이야기를 쓰라는 얘기가 나왔다. 영악한 계산인지 몰라도 원고 청탁에 대해 하는 계산은 하나다. 이게 나중에 묶어서 책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다음에 수락한다. 난 서울놈.(깍쟁이란 소린가보다. ^^;;) 조건을 달았다. 매수는 80매. 내 글 고치지 말 것. 그때 쓰기 시작한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93년에 책이 되어 나왔다. 근데 회사는 망했다. 우연이 운명이 된 것이다.

박경철 : 듣고 보니, 저도 책 안 되는 원고 끊어야겠습니다.

박경철 :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인문학의 재발견, 붐... 답사기가 불씨가 되었다. 인문학 재조명, 재발견...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산 불리기도 아니고, 일생에 도움 안 되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다. 자칫하면 돈 쓰는 얘기인데... 이런 현상들에 어떻게 보십니까? 다양성의 측면입니까, 필연적인 움직입니까?

유홍준 : 공부 못하는 아이를 족집게 과외해서 15등까지 올릴 수는 있어도 거기서 한 등수 꺾기는 힘들다. 국영수만 갖고는 안 된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주요 20개국(G20)에 들었지만, 그 안에서 이탈리아, 캐나다 같은 나라들을 꺾을 수 있겠나. 우리에게 그런(인문학적)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알게 된 거다. 삼성전자에서 인문학 강의를 해 달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왜 찾아왔냐고 했더니 전자 제품이나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거다. 직원들도 기계공학과 출신만 뽑는 게 아니라 심리학, 역사학, 인류학 전공자들도 뽑아 같이 일한다고 하더라. 소비자가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야 결국 제품의 질도 더 높아진다고 하더라. 그동안 우리가 몰라왔던 거라고.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그동안 우리가 인문학적 연구 성과가 없었던 게 아니다. 대중에게 전달이 안 됐던 거다. 알기 쉬운 '이야기'로, 또 독자들이 원하는 형태로 생산해내지 못했던 게 이유다.

인문학자들의 자체 반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평전 없는 문화에 대해서. 나는 늘 전기(biograph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나라는 전기 전통이 너무 약하다. 서양의 베스트셀러는 전기 문학이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존경하는 이들의 전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화폐에 들어있는 세종대왕 전기, 이순신 전기, 율곡 전기? 없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다.

전문가들끼리 통하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감화할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엔 인물의 삶과 학문, 예술, 삶 속의 정치 이야기와 그가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다 들어 있다. 이기이원론은 수능시험용이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삶의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출판에 전기의 전통이 살아나야 과거, 그리고 사람과의 교감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 20명의 전기를 쓰는 일이다. 그 첫 결과물이 <화인열전>이다. 거기서 여덟 명을 다루고 아홉 번째로 쓴 것이 <완당 평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박수근 전기도 써야 하고, 동시대 민중미술 작가인 신학철의 전기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계속 해나갈 것이다. 나는 인문학의 성과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기라고 생각한다. 


 

 


 

박경철 :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목민심서>는 자주 들어봤어도 정약용의 전기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그런데 전통 시절에는 불충으로 보이지 않았는지?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 보면 선조가 율곡 이이에게 매월당 김시습의 전기를 써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전기가 요즘 A4 용지로 치면 세장이 안 된다. 그 속에는 매월당의 일생뿐 아니라 율곡의 평가까지 들어가 있다. 이이는 김시습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세상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며,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수습할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의 기상이 맑기는 해도 무게가 모자란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도 썼다. 어떻게 보면 논쟁적이란 얘긴데, 임금이 이런 인물에 대해 써 오라고 할 정도로 전기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쓴 '열녀 박씨전'이라는 천하의 명문이 있다. 거기에 어느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사람이 선조 중에 과부가 있어서 청직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는 얘기를 듣고 한 과부가 자기 아들에게 동전을 하나 꺼내더니 이렇게 말한다. 이 동전 끄트머리가 마모돼있고 글씨가 다 사라져 있는데 왜 그런 줄 아느냐, 나도 널 키우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내 몸인들 욕정에 뒤척이지 않았겠느냐, 한 여름에 비는 주룩주룩 오고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그걸 달래기 위해 동전을 쥐고 몇 번이나 돌리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잤다. 이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전기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나 이 얘기 속엔 그 당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이 시대엔 적어졌는가.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러 사람들의 전기인 셈이다. 많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독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바이오그래피의 전통을 확립해야 한다. 서양에는 아예 전기 작가라는 직업군이 있다.

(시골 살게 된 배경은 노대통령 덕분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을 참조하시길! 엄청 재밌다!)

박경철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깜짝 놀라게 할 것인가?

유홍준 : 한국 미술사 강의는 4권까지 나올 것 같다. 현재 <월간 중앙>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계속 연재 중이다. 다음번에 묶여 나올 7권은 제주도 문화재에 대해서만 다뤄질 것 같다. 8권에선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문화재에 대해, 9권에선 중국, 일본 다니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본 문화재와 교류의 흔적에 대해 이야기 할 계획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갈라 쇼'에 해당하는 '국보 순례'가 8월에 책으로 묶여 나온다. 국보지정이 400개인데 100개 정도 다뤘다. 미술사 전도사로 충실히 살겠다. 선수권, 아이스 쇼, 갈라 쇼 모두 체력이 닿는 데까지 하겠다.  

(국보순례, 지난 주에 일주일 연기됐는데 오늘은 나오는 것 맞습니까??)

박경철 : 말씀 들어보니 정말 청년이다! 꿈이 있어야 청년인데 반성도 많이 했다. 좋은 강의, 말씀 잘 들었다. 재미를 위해서 버릇없는 투로 말씀 드린 것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고맙습니다. 박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어서 긴 장화를 신었음에도 신발 안으로 비가 들이치던 날이었다. 비를 뚫고 달려간 보람을 충분히 느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박경철 씨의 안동 사투리가 엄청 진했는데, 두 분의 입담이 쿵짝이 잘 맞아서 더 재밌었다. 사실 그날 콘서트 7080에 이승환 출연으로 신청했는데 떨어졌다. 그런데 당일에 누가 표가 생겼다고 데리고 간다고 했는데 유홍준 박경철 대화에 참여하려고 거절했다. 무려 9곡이나 불렀다고 해서 무척 속이 쓰리긴 했지만, 그 시간을 포기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만족감을 주었다. 교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하실 때까지, 건강히 오래 사시기를!!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만들어주신 작업물들을 열심히 소화시키겠다. 지금도 보관함이 빵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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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경철이 유홍준에게 묻다
    from 꿈이 있는 자유님의 서재 2011-08-14 00:25 
  2. 박경철이 유홍준에게 묻다
    from 꿈이 있는 자유님의 서재 2011-08-14 00:26 
    http://blog.aladin.co.kr/trackback/manoa/4987205
  3.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 한 창비 남도 답사 여행 첫째날!
    from 그대가, 그대를 2011-09-05 00:17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7월와 8월에 걸쳐 삼재가 꼈나 싶을 만큼 되는 일도 없고 뒤로 엎어져도 코가 깨지는 형상이 비롯되더니만, 그런 불운들을 다 엎어버릴 행운이 내게 찾아왔다. 바로 유홍준 교수님과 함께 하는 창비 답사 여행에 가게 된 것이다.계간 창비 인문사회팀과 편집 위원 교수님과 그들의 가족분들, 그리고 답사여행기 디자인을 맡은 비타 팀과 명지대 미술사학과 조교님들, 그리고 또 다른
  4. 유홍준 교수와 함께 하는 창비 답사 여행 둘째날!!
    from 그대가, 그대를 2011-09-18 13:30 
 
 
마노아 2011-08-0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락이 또 다시 제멋대로 이동을 열 번도 더 수정을 한 것 같다. 수정하다 지쳤다. 오타가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점검해야겠다..ㅜ.ㅜ

비로그인 2011-08-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걸 다 어떻게 치셨어요?
저도 요기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글로나마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고맙습니다 :)

마노아 2011-08-10 12:12   좋아요 0 | URL
좀 오래 걸렸어요. 어제 새로 다른 강연회를 가게 되어서 잊기 전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순오기 2011-08-0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짝짝짝!!!
이걸 녹음했어요? 메모했어요?
나도 후기 꼼꼼하게 쓰는 편이지만 이 정도는 못해봤어요. 대단해요 마노아님!!
정말 다녀온 듯, 함께 자리한 듯 생생후기 감동입니다!!

마노아 2011-08-10 12:13   좋아요 0 | URL
현장에서 메모해 온 걸로 1차 정리하고, 녹음한 걸 다시 들으면서 빠진 부분을 채웠어요.
이중으로 했더니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근데 단락이 제멋대로 이동하는 오류가 또 발생해서 그거 수정하느라 또 오래 걸렸답니다. 털썩!

세실 2011-08-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어쩜 이리도 생생하게 쓰셨을까요? 궁금해하는 세번째 사람.
무릎팍도사 꼭 챙겨봐야 겠네요^*^


마노아 2011-08-10 12:13   좋아요 0 | URL
무릎팍 도사 기대되어요. 오늘 박정현도 기대되구요.^^

순오기 2011-08-10 23:20   좋아요 0 | URL
요 댓글 보고 TV켰더니 황금어장 할려고 광고하네요.
앗싸~~~ 안 놓치고 처음부터 보겠당!^^

마노아 2011-08-11 00:2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댓글을 보고서야 TV를 틀었어요. 앞에 조금 놓쳤지만 그래도 볼 수 있었답니다.
다음주가 더 기대되어요. 유홍준 교수님 편은 덕분에 한 주 더 밀리겠지만요.^^

코코죠 2011-08-1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자리 저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녹취하셨나 봐요@,@;;; 귀로 들은 저도 기억이 다 안 나는 이야기를;;; 이걸 메모와 메모리로 썼다면 마노아님은 천재!!!

마노아 2011-08-10 12:14   좋아요 0 | URL
놓치고 싶지 않아서 녹음도 같이 했어요. 메모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는데 그래도 자세한 얘기는 아무래도 도움을 받았죠.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ㅎㅎㅎ

섬사이 2011-08-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
덕분에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받은 것 같아요.
국보순례, 저 책, 무지 끌려요. ^^

마노아 2011-08-10 12:14   좋아요 0 | URL
출고완료 문자가 왔어요. 내일쯤 도착하지 싶어요. 무척 기대하고 있답니다.^^

블루데이지 2011-08-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의 열정에 큰 박수를 곱배기로 얹어서....보내요~~
덕분에 호강한 1人

마노아 2011-08-10 16:17   좋아요 0 | URL
좋은 강연은 같이 듣자구요.^^

paviana 2011-08-1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깜놀랐어요.너무 수고하셨어요.
마노아님의 수고덕분데 좋은 말씀 듣고 갑니다.
감사해요.

마노아 2011-08-10 16:18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저도 기뻐요. 헤헤헤헷^^

무스탕 2011-08-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웬일이래요!!! 마노아님이 한 타 한 타 찍어주시고 올려주셔서 내 집에 앉아서 강의 다 들었네요.
박경철과 안철수의 자분자분 나누는 대화도 재미있는데 이것도 정말 재미있어요.
감사해요~ :D

마노아 2011-08-10 18:24   좋아요 0 | URL
헤헷, 우리가 좋은 강연을 같이 공유하고 있어요. 기뻐요.^^ㅎㅎㅎ

자하(紫霞) 2011-08-10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강연회가려고 준비 다 하고 있었는데...그날따라 비가 엄청나게 왔지요.
저희 동네는 천둥, 번개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못 갔어요.
너무 아쉬웠는데 마노아님이 글 올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노아 2011-08-10 23:15   좋아요 0 | URL
이날 정말 무섭도록 비가 왔어요. 그나마 저는 가까운 편이어서 다행이었는데,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엄두가 안 났을 거예요. 그날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니 기뻐요.^^

風流男兒 2011-08-11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날 옷 다 젖어 갔었는데, 그새 거의 다 잊혀진 기억을 확실히 다잡아주시니 그저 감사하네요.

굉장히 재밌었던 후기로는, 박경철 선생이 스스로 총기있음을 공표하는 대목에서 뭔가 깨달았던 표정을 함께 지으셨는데 대기업과 노동자와 관련하여 유홍준 선생의 가치이야기를 더해 그 주 토요일인가 경향신문에 관련 글을 실으셨더라구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281859045&code=990000
아마 요 글이었던듯해요(이미 보셨다면 ;;;)
정말 발빠르게 글 쓰신 걸 보고 또 한번 놀래버렸더랬지요.

아 그리고 소름 돋으셨다는 그 왜 독자의 책을 받아 읽으셨다는 때, 저는 그 책주인 바로 뒤에 앉아 있었는데요,
뭐라해야하지.. 그냥.. 보기드문 광경이라 참 신기하더군요.

어쨌거나, 다시 대화를 복기하게 되니 기분이 좋아서 초면에 주접이 많았습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감사합니다 ^^

마노아 2011-08-11 21: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풍류남아님! 반갑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강단 가까운 쪽에 앉으셨군요.
저는 비에 쫄딱 젖은 채로 늦게 도착해서 좀 뒤쪽에 앉았더랬어요.
옆에서 자꾸 과자를 먹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답니다...;;;;

링크 걸어주신 기사는 그 주에 읽었는데 강연에 대한 작용으로 나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지금 다시 읽어봐도 딱히..^^ 그냥 평소 생각이란 생각을 했거든요. 아하하핫^^
강연회를 종종 갔지만 녹음까지 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다시 곱씹어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시간을 더불어 가졌어요. 우리의 행운입니다.^^

風流男兒 2011-08-12 09:27   좋아요 0 | URL
아 그쵸 ;;; 네 물론 평소에 이런 생각을 안하실 분은 절대 아닌데,
그냥 뭐라하지.. 그냥 인터뷰를 보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글이 올라온 걸 보다보니
괜히 그 때 짓던 표정이 급 떠올라서 요런 생각을 조금 더 강하게 했었나봐요 ㅎㅎ

(사실 저도 늦게 왔는데, 도저히 뒤에는 앉을만한 자리가 없어서 쪽팔려도 일단 가다보니
앞에 앉게 되었어요 ;;;)

여튼 좋네요 ㅎㅎ

마노아 2011-08-12 10:48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당당히 앞자리에 가서 앉으시고, 진정 용자십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음은 앞에 가고 싶었는데 저는 슬며서 뒤쪽으로 앉았어요.
사진 찍을 때 보니 확실히 너무 뒤쪽이라 앞사람 머리도 나오고 그랬지 뭐예요.^^ㅎㅎ

희망찬샘 2011-08-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은 글이네요. 나갈 일 있어 다 못 읽고 갑니다.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어요. ^^

마노아 2011-08-12 14:33   좋아요 0 | URL
좀 길지요? 나중에 찬찬히 읽어보셔요.^^ㅎㅎ

복호 2011-08-14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히 미안한 말이지만 유홍준씨는 ,<답사기>의 많은 판매부수 이후 교양과 양보를 잃어 버리고 교만해 졌음이 문화계의 중평이다. 먼저 인간이 되고 나서 좋은 책을 저술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만이 제일 많이 안다고 우쭐함은 정말 보기 좋은 것이 아닐것이다. 오동명의 <당신 기자 맞아>란 책을 읽기를 권하면서.

마노아 2011-08-14 23:14   좋아요 0 | URL
이런 말을 남기는 분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음이 참으로 유감이네요.

책거미 2011-08-1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것은 좋은 대담이다! 옮기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노아 2011-08-15 00:14   좋아요 0 | URL
더불어 누릴 수 있어서 저도 기뻐요.^^

tsc 2011-08-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일하려고 나온 사무실.. 첫업무로 늘 메일을 확인하는데.. 다른 날 같으면 그냥 읽은편지 처리였을 테지만 광복절이라 읽다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마노아님 덕분에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아요.^^;

마노아 2011-08-15 12:00   좋아요 0 | URL
일하는 휴일이군요. 기분이 좋아졌다니 저도 기뻐요. 광복의 하루를 보내셔요.^^

ob1hyuks 2011-08-1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연휴 마치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해 놓으셔서 재미있게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

마노아 2011-08-16 00:13   좋아요 0 | URL
연휴 끝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주었다면 좋겠어요.^^

2011-08-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kan 2011-08-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 참석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 달래네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좋은 대담을 한자 한자 옮겨주시느라 너무 애쓰셨어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1-08-16 19:39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같이 누렸으면 하는 좋은 강연이었어요. 제 보람이 큽니다.^^

달사르 2011-08-1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이나 읽어도 잼있어요! 고 박완서 선생님의 귀여우신 추천사에 공감도 되구요.
마노아님의 노고 덕분에 강연회 가지 않은 사람들도 강연회에 간듯한? ^^ 잘 읽고 있어요~ 몇 번 더 읽을 거 같애요. ㅎ

마노아 2011-08-16 19:40   좋아요 0 | URL
우와, 몇 번이나 읽으셨어요? 저보다 많이 읽으셨을 거예요. 저는 쓰다가 지쳤어요.^^;;;

구름마법사 2011-08-1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집에는 3권의 책도 다시 한번 더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전 이 시리즈가 6권까지 있는지 몰랐네요 6^^
오후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11-08-18 23:21   좋아요 0 | URL
전 이제야 나의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다 읽어가요. 내일 조금만 더 읽으면 마무리가 될 거예요.
차분히 앞권부터 잘 봐야겠습니다.^^

oren 2011-09-07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 긴 글이네요. 뒤늦게 와서 빠짐없이 재미있게 다 읽었습니다. ㅎㅎ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安東高' 동기 녀석들끼리 와장창 모여서, 10월 초에 안동에서 1박2일로 진행될 예정인 '졸업 3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한답시고 '안동 사투리'로 엄청 시끄럽게 떠들다가 왔는데, 마노아님의 서재에 와서 박경철 원장의 안동 사투리까지 잔뜩 듣고 갈 줄은 몰랐네요..ㅎㅎ

마노아 2011-09-07 10:51   좋아요 0 | URL
오, 안동분이시군요. 저는 박경철씨 얘기하는 걸 글로만 보고 무릎팍에서는 사투리를 잘 안 서서 몰랐는데 작정하고 쓰면 억양이 엄청 세다는 걸 알았어요.^^ㅎㅎㅎ
지난주 금요일의 강연은 가지 못했지만 녹음만 부탁했는데 녹취가 잘 되었는지 아직 확인도 못했네요. 시장 출마 얘기가 나온 직후의 안철수-박경철 강연이라 더 관심이 가는데 요며칠 바빠져버렸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