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6권을 예약 주문해 놓고도 정작 답사 전날 부여 부분을 다 못 읽어서 졸린 눈을 부릅뜨며 사투를 벌이다가 새벽 2시에 고꾸라졌다. 5시 20분에 기상해서 전날 못 읽은 부분을 마저 읽었지만 여전히 내 눈이 내 눈이 아닌 상태. 집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원했던 압구정 역이 아닌 광림 교회에서 멈춘다기에 혹여 헤맬까 걱정되어서 지하철을 탔다. 그 새벽에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이 빼곡해서 무척 놀랬더랬다. 다들 참 열심히 사는구나...
우리를 실어다 줄 버스에 유홍준 선생님도 함께 승차하셨다. 하핫, 왠지 우린 1진이 되어버린 것 같고 괜히 어깨가 으쓱!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으시고는 그 달변을 발휘하시어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내려놓으셨다. 참여 정부 이야기도 해주시고, 어쩌다가 부여에 제2 고향을 잡게 되었는지의 긴 여정이었다. 잠이 부족해서 어느 순간 정신줄을 놓을 뻔했지만 재밌어서 열심히 경청했다. 노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으로 가시는 게 마땅하다고 했더니 대통령님은 선생님께 시골로 내려가라고 권해 주셨단다. 이런 분들이 내려가서야 함께 발전할 수 있다며 가급적 섬을 권하셨지만, 차마 섬까지는 가지 못하시고 정착한 곳이 바로 부여였다. 주5일은 도시에서, 그리고 주말은 시골에서라는 의미로 5도2촌을 실천하고 계시는 선생님.
버스 안에서 창비 출판사와 눌와 출판사 담당자 분들의 소개를 듣고 수십 년째 함께 답사 여행을 진행 중이신 마기사님 소개까지 들었다. 도착 시간까지 아주 잠깐의 여유가 생겨서 불시에 들르게 된 곳은 궁남지.
백제의 별궁 연못인 궁남지는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다가 용과 통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선 7월에 연꽃 축제가 열리던데 아직은 축제 철이 아니어서인지 무척 한산했다. 우리는 가볍게 눈도장을 찍고 바로 버스에 탑승, 집결지로 출발했다.
집결지에는 부여문화원에서 접수를 받은 회원들과 강남구청 평생 교육원에서 출발한 회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선생님은 버스를 갈아타시고 우리는 그 뒤를 쫒아갔다. 그리하여 첫 번째 답사지는 장하리 3층 석탑. 원래 시기상으로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먼저 보아야 하지만, 너무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먼저 볼 경우 다른 탑들이 모두 시녀로 전락해버리는 단점이 있기에 제일 마지막으로 밀려버리고 말았다. 원래 가장 특별한 요리는 나중에 나오는 법!
이곳에서 출발한 고장이 어디인지 지역 조사를 했는데 우리는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귀여운 항의를 하기도 했다. 고려 중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1층과 2층의 가느다란 홈이 3층에서만 위쪽 반만 깎인 것이 특징인데 그것이 곧 매력 포인트가 되고 말았다. 석탑에서는 귀여운 사리장치가 출토되었는데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일정을 다 마치고 나면 박물관에 들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대조사.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사찰에서 키우는 꽃사슴과 산딸나무였다.
산딸나무꽃은 나뭇잎 위로 피어나기 때문에 아래쪽부터 위에서 내려올 때 더 잘 보이는 꽃이었다. 보통의 꽃잎은 다섯 장이지만 이 꽃은 네장이어서 더 특별해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 변한 것인데 자세히 보면 하얀 꽃받침으로 보인다. 이곳 대조사 말고도 곳곳에서 산딸나무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참 반가웠다. 초록의 계절에 가장 눈에 잘 띄는 흰색이 반가웠다.
이번 답사에서는 곳곳에서 무수한 꽃들과 열매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저마다의 매력에 홀딱 반해버렸다. 다양한 곳의 사진들을 한데 모아봤다. 아는 꽃 몇 개 있는지 세어보시라. 그렇지만 내가 알지 못하므로 정답은 확인해 줄 수 없음...^^
(클릭하면 커지는 건 알죠?)
처마 너머로 은진미륵이 수줍게 보인다. 계단을 부지런히 올라가니 제법 큼에도 불구하고 2등신으로 보이는 까닭에 참으로 귀여운 미륵불이 우리를 반긴다.
법당 뒤쪽 벽에 유리창을 두어서 예불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미륵보살의 얼굴 부분이 창을 가득 메운다고 해서 무척 보고 싶었는데 때마침 스님이 예불을 하고 계시기에 차마 들어가보지 못했다. 아쉬워라...
미륵불은 56억 7천 만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는 미래불. 그때 땅을 뚫고 올라온다고 해서 머리 위의 저 네모난 판떼기가 땅의 형상에 해당된다. 뭐랄까... 참 무거워 보인다. 고생 많으시구나...
대조사에 왔으니 명물 꽃사슴 해탈이를 놓칠 수가 없다.
사람 사이에서 성장한 해탈이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낯도 가리지 않는다. 된장을 좋아해서 여러 집 장독을 깨뜨리기도 했다던데 절에 있던 장독들이 염려스러웠다. 사람들이 마구 다가오자 스타 행세를 하며 빠르게 사라져버린 해탈이. 어느새 저편으로 건너가 무언가를 따먹고 있다. 멀어서 보진 못했지만 열매 등을 먹은 것일까? 내 평생 사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후훗, 뿔이 있었으면 더 근사했으려나?
이어서 원래 답사 일정은 아니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기로 했다. 중간에 공사 구역이 나와서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는데 어떻게 우회를 했는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거대해서 사진이 잡히질 않아 한참을 뒤로 뒤로 후퇴해야만 했다.
둘레가 총 9미터 30cm이고, 높이는 35미터. 백제 26대 임금 성왕 때의 전설이 남아 있어서 수령을 대략 150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세상에, 1,500년이라니... 아득하고 아득한 시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 나간 청년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니, 정말 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천연기념물 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축 처진 가지들을 부축해 주기 위해 대나무 지지대를 곳곳에 세워뒀는데 그 중 한 통에 은행나무 씨앗이 떨어졌는지 아주 작은 가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여쁘기도 하여라. 이어서 찾은 민들레꽃. 하나는 우리나라 것이고 하나는 서양 것이라고 같이 간 나의 야곱이 말해주었는데 어느 사진인지 까먹었다. 왼쪽이 우리나라 것이고 오른쪽이 서양 것이던가???
어느덧 시간은 무르익어 배꼽 시계가 꼬르륵 거릴 때. 무량사 사하촌 식당가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들아간 곳은 은혜 식당. 소박한 외관이지만 음식 맛까지 소박할 거라고 여기면 오산!
비빔밥에 메밀전, 도토리묵과 청국장에 각종 나물까지, 하나같이 일품인 반찬들이었다. 우리쪽 테이블은 금세 사라진 메밀전이었건만 옆 테이블엔 저 맛있는 것을 무려 남기지 뭔가. 것 참 소식하는 분들일세...;;;;;
메뉴가 탁주 한 사발 들이키면 딱 좋을 모양새건만 우리의 선생님은 음주를 아니 하시는 분. 답사하면 음주가 연결되건만 그걸 하지 않으시니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여 오셨나보다. 식사 일찍이 마치시고 사인하기 바쁘신 유선생님. 관광버스 한 대에 딱 한 명만 책을 샀다고 해서 무척 구박을 받았단 강남구청 팀은 뒤늦게 창비가 들고 온 책을 현장 구매해서 사인을 받았더랬다. 정작 책을 샀던 나는 집에 두고 가서 사인을 못 받았지만...ㅜ.ㅜ
일정이 바쁘니 빨리 빨리 움직여야 했다. 다음 코스는 당연히 무량사!
천왕문을 다 통과하기 전에 시선을 들면 정면에 극락전이 보이고 그 앞의 탑과 석등까지가 한 줄로 보인다. 그 명장면을 액자처럼 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천왕문이 해준다.
보물로 지정된 것만 모두 6점에 해당하는 무량사에서 아무래도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드물게 중층 건물인 극락전이다.
현대의 기술로는 재현해낼 수 없는 저 고색창연한 단청 빛깔이 마음에 들어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그의 영정이 남아 있다. 새로 지은 손님방 청한당은 현판 글씨에서 한가할 한(閒)자를 뒤집어 쓰는 유머를 보여주었는데 쥐20 그림의 그래피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정도의 유머도 승화하지 못하는 꽉 막힌 사회라니 씁쓸할 뿐이다.
돌아나오는 길 사천왕이 각별해 보여서 크게 한 컷 찍었다.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오히려 해학적으로 보이는 사천왕 되시겠다.
나올 때는 출입구에서 비켜난 샛길을 잠시 다녀왔다. 학생들 데리고 다니실 때는 입장료 안 내려고 이렇게 둘러가기도 했다 하신다. 우리야 그 길을 한 번 밟아본 것뿐. 물이 흐르는 길도 예쁘고 울창한 나무들도 근사하기만 하다.
여길 지날 때 토양의 종결자 서어나무 얘기를 잠시 하셨는데, 자꾸만 언급하시는 나무들이 모두 궁궐의 우리나무에 나오는 이야기란다. 이거 이 책도 바로 보관함으로 직행하게 생겼다.
일단은 오늘 도착한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을 먼저 봐야되겠지만...
그밖에 매월당 김시습 사리탑을 잠시 감상하고 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이어서 살 곳은 성주사터. 지금은 건물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오히려 비어 있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오래 전에 만복사지를 갔을 때는 그 황량함에 오히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이곳 성주사지에서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충만감이 있었다.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으로 잔뜩 마모되어 시멘트로 땜질이 되어 있었다. 어쩐지 바보 별명 갖고 계시던 김수환 추기경 님을 떠올리게 하는 인상이어서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성주사지에 이어서 외산 반교마을 돌담길을 차분히 걸어갔다. 햇볕은 쨍쨍했고, 반바지 입은 나는 정강이가 화상 입은 것처럼 후끈거렸지만 돌담의 예쁜 미소까지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는 선생님이 반교리의 주민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와 유난히 돌이 많은 이 지역과 그리하여 돌담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까지의 에피소드 등이 소개되어 있다. 충청도 사투리로 읽는 돌담사는 구수함에 유머까지 더해져서 오래오래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저 돌담길을 돌아서 도착한 어느 아담한 집의 흙을 밟는 순간 악 소리가 나왔다. 책에서 보고 무장 부러워했던 선생님의 집 '휴휴당'이 아닌가!
땅을 고를 때 나온 돌을 가지고 돌담을 쌓았다는 선생님의 예쁜 세칸 집은 아담한데도 눈이 부셨다. 계곡과 숲을 모두 집 안으로 끌어들인 선생님은 진정 욕심쟁이 우후후!!
방문객이 많아 다들 한 호기심을 증명해 보인듯 구멍난 창문의 한지가 웃음을 자아낸다.
주말에 잠깐 내려오면 잡초 뽑는 일로 해가 졌다는 선생님의 바쁜 나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 부러운 걸!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아무리 주문을 외어보아도 너무너무 근사해서 샘이 나서 혼났다. 선생님도 직접 배 아플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두 손 두 발 다 든셈. 노대통령께서는 이곳에 와보셨냐고 질문을 드렸는데 애석하게도 오지 못하셨다고 한다. 무척 와보고 싶어하셨다는데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그분의 삶이 너무 짧았다. 또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울컥 들고 말았다. 이 좋은 곳을 눈에 한 번 담아보지도 못하셨다니....ㅜ.ㅜ
방문 앞과 대문 앞의 푯말이 귀엽기 그지 없다. 사모님은 이곳에서 지내실 때 너무 바빠서 쉬는 것을 오히려 쉬는 집이라고 부르셨다는데 그 역시 충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들이다. 돌아나오면서 혹시 청지기 필요 없냐고 나의 야곱은 재차 물었지만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노코멘트! 그런 질문 많이 받으셨을 것이다.
왼쪽은 양파가 심겨져 있고 오른쪽은 마늘이다. 선생님이 책 속에서 바늘로 마늘쫑 뽑는 법에 대해서 소개를 하셨는데 그 모습을 재현해 보는 모습이다. 그냥 뽑으면 뿌리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오히려 안 좋고 바늘로 마늘대 밑에서 서너번째 마디를 콕 찌르고 당기면 쑥 빠진다고 한다. 연대 공과대학 민옥기 교수님은 이것을 전문용어로 '응력집중'이라고 표현했다. 어려운 설명은 내가 못하겠으니 책을 읽으시라.^^
나오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는데 폐교를 수리해서 유스호스텔로 만든 건물이 나왔다.
근사한 변신이다. 초등학교가 분교로 전락하고 다시 다른 학교와 통합되어 사라지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그 터를 살려둔 것은 다행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저 풀은 갈대인가 억새인가.... 그 차이점을 작년 가을에 설명 들었는데 그새 또 까먹었다. 아시는 분 설명해 주세요~
이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답사의 대미를 장식해줄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2006년에 세워진 정림사지 박물관 주변 곳곳에는 백제를 상징하는 무늬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무척 기품이 있어 보였다.
소문이 자자했던 정림사지 5층석탑은 소문에 눌리지 않을 만큼 진정 아름다웠다. 압도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고, 백제 석탑 특유의 말려 올라간 옥개석의 모서리도 버선코처럼 가볍고 정갈했다.
탑신에는 나당연합군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 새긴 기공문이 남아 있다. 이 아름다운 걸작에 저런 걸 써 놓다니, 무식한 놈!
뒤쪽으로는 고려 때 만들어진 많이 마모된 석불 좌상이 남아 있는데 정림사지 오층 석탑의 위용에 많이 비교가 되었다.
박물관도 같이 구경하고 싶었지만 출발 시간이 다 되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에 올라타야 했다. 그리고 차창 너머로 저것을 발견하는 순간 비명이 새어나왔다.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기니까 줄여서 얘기하자. 백제금동대향로!
아뿔싸, 부여까지 왔는데 부여 국립 박물관을 가지 못했군. 못 갔으니 저 명품도 보지 못했구나! 지나치게 아쉬워서 한숨이 나왔다. 부여를 꼭 다시 와야 하는 이유가 그렇게 생겨버렸다. 하루에 끝내긴 아쉬운 곳임을 이렇게 확인시켜 주는구나.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아마도?) 모두가 곯아 떨어졌다. 나와 나의 야곱은 서로 고개를 떨구며 서울까지 내내 지당하십니다를 온 몸으로 표현하며 돌아왔다.
서로가 일들에 치여 몹시 피곤한 컨디션이었지만, 다녀와서 안도가 되었던 하루의 답사길이었다.
행사를 준비한 부여군과 창비/눌와 직원들과 우리들의 안내자 역할을 기꺼이 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께 무척 고마운 마음이다. 남겨진 아쉬움은 책을 보며 달랠 것이다. 그리고 그 독서는 필시 또 다른 답사로 나를 안내해줄 테지. 20대 1의 경쟁률이었다고 하셨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운이 내게로 와서 무척 기쁘다. 아무래도 내가 복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