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좀 더 다녔던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둔 지 2달 정도 지났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80일 동안 교토로 떠난다.

벚꽃이 필 무렵 들어가서 수국이 필 무렵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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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njoo 2017-03-27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on Voyage!
 
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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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퍼거슨)을 이길 수 없어요.˝ 로저가 비통하게 말했다. ˝돈도 가졌고, 가문도 가졌잖아요. 내가 (거트루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리 진심이었다고 해도요.˝ -467쪽

˝하지만 그 사람(퍼거슨)은 이미 작위가 있잖아요.˝ 재스미나가 말했다.
˝스코틀랜드 작위는 사실 별 볼 일 없어요.˝ 소령이 말했다.
˝특히나 인터넷으로 산 것은요.˝ 로저가 덧붙였다. -468쪽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조에 빠뜨려 죽였지.˝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늘 끝으로 잔디밭에 원을 그렸다. ˝난 봤어. 아버지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수조에 밀어넣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거든. 어머니는 카펫과 구리 솥을 팔러 온 남자와 웃었고, 우리 할머니의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담아 자기 손으로 직접 건넸지.˝ 그녀가 다시 일어섰다. ˝난 항상 아버지와 아버지의 희생이 자랑스러웠어.˝
˝우리는 문명화된 사람들이에요. 과거에 메달린 시골의 소작농 가족이 아니라고요.˝ 재스미나는 공포로 목이 메었다. -481~482쪽

˝그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할 거야.˝ 소령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 하든.˝
˝흥분부터 하지 마세요. 고환은 아직 치료중이잖아요.˝ 로저가 말했다. -497쪽

˝나는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에게 내가 대단해 보일 날을 간절히 원했어.˝ 소령이 말했다. ˝난 오만했다. 유전적인 것인가봐.˝ -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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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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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재스미나, 너도 있었네?˝ 소령은 그 여자(사디아 칸)가 미시즈 알리를 의도적으로 멸시하기 위해 이름을 부른 것을 깨달았지만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이 정말 기뻤다. 그렇게 노골적이고 악의적으로 불리는데도 그녀의 이름은 매혹적으로 들렸다. -177쪽

그렇게 바닥이 보일 때까지 삶이 솎아지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190쪽

˝당신(샌디)은 미국인치고는 아주 예의가 바르네요. 원래 유럽 출신 가문이죠?˝ 미시즈 오거스피어가 말했다. -197쪽

˝진실한 사랑이 확실한 재정적 동기와 결합하면 못 넘을 장해가 없죠.˝ 미시즈 알리가 말했다.
˝당신네 (파키스탄) 속담인가요?˝ 그레이스가 물었다. ˝아주 적절한데요.˝
˝아뇨, 그냥 소령님을 놀리는 말이에요.˝ 미시즈 알리가 말했다. -202쪽

˝난(아미나) 정말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과 그저 나를 경멸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요.˝ -214쪽

˝하지만 내(소령) 생각에 요즘에는 서로 지나치게 고백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문제를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 문제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오.실은 그 문제를 가지고 걱정해야 하는 사람의 수만 늘어나는 건데.˝ -215쪽

˝(골프)클럽에서 점심시간에 일하는 여자애들 중에 (댄스파티의 공연에서) 폭도 역할을 할 폭도 같이 생긴 남자친구가 있는 애들이 있을 거예요.˝ 데이지가 말했다. -221~222쪽

˝(무굴제국을 주제로 한 골프클럽의 댄스파티에서) 모자걸이 옆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맞아줄 여신이 필요했거든요.˝ 앨마가 말했다. ˝그리고 미시즈 알리는 순수한 인도인, 아니면 적어도 파키스탄인이잖아요.˝
˝사실 난 케임브리지 출신이에요.˝ 미시즈 알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립병원 3병동 출신이죠. 와이트 섬보다 멀리 가본 적도 없고요.˝ -224~225쪽

˝친척이 늘어나면 쓸모가 있죠. 가족파티 때 브리지게임을 할 사람도 늘어나고 신장을 기증해줄 수도 있고.˝ 그(소령)가 횡설수설했다. -228쪽

˝(전략)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작은 프로젝트 한 가지만 제외하면 환경보호론자예요. 그 프로젝트는 변화를 별로 조장하지 않는다고 확언하면서도. 그리고 어느 날 온 마을에 다락 창문과 차가 두 대 들어가는 차고와 시어머니를 위한 별채 들이 나타나는 거죠.˝ -236쪽

(소령은) ‘신성한 땅’이라는 문구를 생각했다가 그 땅이 교회 땅과 혼동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에 ‘오래된 땅’으로 (편지의 문구를) 바꾸었다. -237쪽

˝낭만적인 관계에 관한 한, 인류는 다 똑같아. 놀랍도록 선명한 충동 조절의 부재가 완벽한 근시안과 결합한 거지.˝ 소령이 말했다. -262쪽

˝시골에서는 누구나 바보 같아 보여요.˝ 로저가 말했다. ˝문제는 그 바보들한테 의심받지 않도록 한데 섞여 있어야 한다는 거죠.˝ -265쪽

˝당신 아버지(소령) 너무 멋져.˝ 샌디가 말했다. ˝가끔은 진실한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아.˝ -266쪽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지. 그래야 당신(로저)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잖아.˝ -267쪽

설명은 협상으로 이어지곤 했다. -268쪽

˝어째서 항상 내 기를 꺾으시는 거예요? 나를 좀 밀어줄 수는 없어요? 지금 내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로저는 요란하게 찻잔을 내려놓더니 뒷짐을 지고는 고개를 돌려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널 초대한 사람이 딱 맞는 여분의 총을 준비해두었을 거야. 소령이 말했다. 게다가 초보인 네가 그런 귀한 총(처칠)을 쏘아대면 우스워 보일 게다. 우스꽝스러워 보일 거야.˝
˝고맙습니다, 아버지. 내 한계에 대해 평소처럼 솔직하게 얘기해주시다니 친절도 하시네요.˝ -269쪽

˝음, 내 부탁은요, (처칠) 총들을 팔고 나서 아버지에게 필요없는 공돈을 내게 조금만 달라는 거예요. ˝ 로저가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런던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돈이 드는지 모르시죠. 옷에 레스토랑에 주말의 하우스파티에...... 요즘에는 출세하려면 투자를 해야 하고 솔직히 샌디한테 맞추기도 힘들어요.˝ 그는 주저앉았고 어깨가 축 처졌다. 잠깐 동안 쭈글쭈글한 십대처럼 보였다.
˝네가 기대치를 조금 낮춰야 할 것 같구나.˝ 소령이 정말 걱정스럽게 말했다.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부유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야.˝
˝그거야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한테나 하는 말이고요.˝ 로저가 침울하게 말했다. -271~272쪽

˝부치지 않은 편지는 무거운 짐이죠.˝ -280쪽

˝(전략) 사람은 모두 종교를 고르고 선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나요?˝ -282쪽

˝삶은 종종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소령이 맞장구를 쳤다. -288쪽

˝하지만 신앙을 따르는 삶은, 신 앞에서 첫번째 미덕이 겸손임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292쪽

˝하지만 한 가지 여쭤봐야겠어요. 부적절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건지 정말 아시나요?˝
˝친애하는 젊은이(압둘 와힛), 사랑이란 늘 그런 것이 아니겠나?˝ -292쪽

˝(전략) 보통은 자기들이 뭔가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내버려두는 편이 가장 좋더군요.˝
˝경험이 많으신 것 같네요.˝ 소령이 말했다.
˝요즘에는 그 동네의 반대파들을 들쑤시지 않고는 10억 제곱피트의 땅을 개발할 수가 없거든요.˝ 퍼거슨은 소령의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혐오감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통제, 봉쇄, 진정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어요.˝ -317쪽

˝거트루드는 영리한 아이라고 했잖아, 퍼거슨.˝ 대거넘이 말했다. ˝내 누이인 이애의 엄마는 대단한 여자였지. 나만큼 그애를 사랑한 사람은 없어.˝ 그는 냅킨으로 눈가를 두드렸다. 소령은 이런 말은 예상도 못했다. 메이 대거넘은 새파랗게 젊은 가수와 달아난 뒤 가족에게 거의 의절당한 것으로 마을에 알려져 있었다. -320쪽

˝소령도 알다시피 그애의 엄마(메이 대거넘)는 대단한 미인이었어요. 하지만 거트루드는 마구간에서 분뇨를 치우면서 가장 행복해합디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걸로 족했지만 요즘 남자들은 아내가 정부만큼이나 매혹적이기를 바라죠.˝
˝충격적이네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아내와 정부를 구분한답니까?˝
˝내 생각도 그래요.˝ 대거넘은 소령의 빈정거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329쪽

˝(전략) 화려함과 악취미를 잘 구분해야 한다고 로저에게 경고했는데.˝ 샌디가 말했다.
˝실수했군요.˝ 소령이 말했다. ˝둘은 같은 거요.˝ -337쪽

˝어느 파티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멋지다는 말에 누군가는 반대를 할지도 모릅니다. 소령이 말했다. ˝바로 파티장에 들어가기 직전 말이에요.˝ -338쪽

소령은 가십이란 부조리한 거짓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사악하게 속삭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363쪽

˝보세요, 진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의 것 아니겠습니까?˝ 퍼거슨이 말했다. ˝우리는 신문에 그 은쟁반과 함께 우리 모두의 사진이 실린 것을 보겠죠, 더블 디. 그러면 이 댄스파티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사소한 말썽은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378쪽

˝재미있지 않나요?˝ 미시즈 알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부색과 부모의 모국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커플인데도 세상 사람들은 어울린다고 생각하잖아요.˝ -381~382쪽

국교회 교구 주민들은 오랫동안, 같은 지역의 성당 신자들과 함께 마을 회관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종교를 망라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였다. -389쪽

˝(전략) 후회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못을 거짓말과 뒤섞지 않는 거야.˝ -391쪽

˝임대한 집에 공을 많이 들였군요.˝ 더 칭찬하는 말을 하고 싶었던 소령은 낡고 비판적인 말이 제멋대로 나와버린 것에 짜증이 났다. ˝그러니까, 당신(샌디)이 이 집에서 계속 지냈으면 좋겠단 뜻으로 한 말이라오.˝ -399쪽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샌디가 말했다. 그(소령)는 그녀의 얼굴에 언뜻 스쳐가는 표정을 보며 그녀에게 혼자만의 크리스마스들이 있었음을 알았다. -401쪽

˝때로는 세상을 쫓아가는 게...... 우리 자신을 쫓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소령님은 모르세요. 난(샌디) 잠시 동안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했던 것 같아요.˝ -402쪽

항상 뒤에 홀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소령)가 느낀 감정은 상실감이 아니라 부당함이었다. -402쪽

소령은 그녀(샌디)가 새로 화장을 하고 산뜻한 슈트를 입고 1등석에서 승무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의 균열을 메우고 계속 나아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403쪽

˝그러게요.˝ 소령이 샐러드에서 통통한 황금빛 건포도를 골러내면서 말했다. 건포도는 그가 질색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그레이스와 있을 때는 건포도를 골라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다음에는 건포도를 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12쪽

˝거트루드에게 진짜로 격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너희 두 사람을 족쇄에 함께 묶는 일은 하지 마라. 두 사람 모두 외로운 삶을 살게 될 테니까.˝ -425쪽

산업화 시대의 명암을 보여주는 이들 건물들 사이에는 2차 대전 이전에 야심찬 중산층을 위해 지은 2세대 주택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세 개의 침실, 두 개의 응접실, 옥내 화장실을 갖추고 출퇴근 하녀들이 관리하던 주택들이었다. -433쪽

그녀(미시즈 알리)가 구이용 철판으로 펜을 덮는 동안 소령은 자신이 좋아했던 다른 장소를 한 곳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온 세상이 이 오두막 안으로 완벽하게 축소된 것 같았다. -453쪽

˝(전략) 나(소령)는 항상 묻힐 자리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삶을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453쪽

˝차에 갔다 올게요.˝ 그(소령)가 말했다. ˝비상용 세면도구 가방에 여분의 칫솔이 있어요.˝
˝작은 브랜디 통과 셰익스피어의 책도 함께요?˝ 그녀(미시즈 알리)가 물었다. -455쪽

˝열정은 아주 좋지만 차를 쏟으면 안 돼요.˝ -4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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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3-16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은근히 재밌죠..^^

로렌초의시종 2017-03-16 18: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 정말 ‘은근히‘ 재밌었어요ㅎㅎㅎ
 
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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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버티)이 죽었어요.˝ 그(페티그루 소령)이 말했다. 그녀(미시즈 알리)가 돌아섰다. ˝동생이 죽었어요.˝ 그가 다시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전화를 받았어요. (신문값을 챙길) 시간이 없었어요.˝ 전화벨이 울렸을 때 하늘은 분홍빛이었고 집 서쪽 벽에 기대선 거대한 주목나무 틈에서는 이른 아침의 새소리가 아직 들려오고 있었다. -8쪽

(동생 버티는 죽었지만) 물론 호감이 가지 않는 제수 마저리가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처럼 소령도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요란하고 생각이 뒤틀린 여자로, 무딘 면도날처럼 고막을 긁어대는 북쪽 사투리를 썼다. 소령은 그녀가 지금보다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쪽

페티그루 소령이 가게에 있을 때 내기를 벌인 어린 남자애들이 문에 커다란 귀를 들이밀고는 ˝파키스탄 놈, 꺼져!˝라고 외친 적도 몇 번 있었다. 소령이 고함을 지르고선 더듬더듬 사과의 말을 건네면 (가게 주인이자 미시즈 알리의 남편이었던) 미스터 알리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 광기는 결국 수그러들었다. 밤 아홉시에 엄마가 우유가 떨어졌다고 하면 장난쳤던 녀석들도 살그머니 가게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12쪽

마을의 상류층은 여러 위원회에 소속된 숙녀들의 주도로 알리 부부에게 널리 경의를 표함으로써 하류층의 무례를 보상해주었다. 소령은 많은 숙녀들이 에지컴세인트메리가 다문화적 이해의 유토피아라는 증거로 자랑스럽게 ˝우리 친애하는 파키스탄 가게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2쪽

(소령은) 머리 주위가 뻣뻣하고 목이 조금 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슬픔이 주는 무딘 아픔이었다. 흥분보다는 소화불량 같은. -14쪽

아이들이 둥지를 떠나 자신의 집을 꾸리자마자, (소령의 아들인) 로저의 경우에는 템스 강을 망친 퍼트니 근처의 고층건물에 자리한 검은빛과 구릿빛으로 번쩍이는 펜트하우스에 자신의 집을 꾸리자마자, 부모를 아이 취급하면서 부모가 죽거나 적어도 요양원에 들어가기를 바라기 시작하는 거야 좌절스러울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아주 그리스적이지, 소령은 생각했다. -15쪽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아무도 진심으로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지, 소령은 생각했다.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다른 선택들을 할까? -19쪽

미시즈 알리는 모퉁이마다 공격적으로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아가면서 작은 혼다로 언덕들을 넘으며 남자처럼 운전했다. 살짝 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장밋빛 실크 머리스카프가 물결쳤고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작은 구름다리 위로 뛰어오르듯 차를 급하게 몰면서 성급하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녀가 물었고, 소령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살짝 멀미가 나긴 했지만, 롤러코스터에 탄 어린 소년들이 느끼는 흥분되고 유쾌한 멀미였다. -22쪽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라면 영국 북부에서 사는 것도 견딜 만하겠죠.˝ (미시즈 알리에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페티그루 소령은 자신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23쪽

진한 색깔의 값비싼 슈트에다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넥타이를 맨 로저는 매력적이고 부드러웠다. 반질반질하게 윤을 낸, 볼이 좁은 구두는 지나치게 말쑥해서 이탈리아제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런던에서 로저는 세련된 유럽 대륙풍에 물든 것 같았다. (아버지인) 소령은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29쪽

미시즈 알리는 날아오르는 돌고래가 조각된 철문 바로 안쪽에 혼다를 주차해두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차에서 내려 그를 맞았다. 손에는 책 한 권과 알록달록한 기름종이로 싼 치즈버거 반쪽을 들고 있었다. 소령은 병원과 해안 지구 사이의 보기 흉한 도로를 점차 점령해가는 끔찍한 페스트푸드점들을 독기 품고 반대했지만 미시즈 알리가 햄버거를 먹는 모습은 어딘지 매력적이었다. -32쪽

미시즈 알리는 소령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오르더니 자갈이 튀도록 크게 호를 그리며 차를 돌렸다. 소령은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왠지 진실하지 않은 것 같아서 팔뚝을 들다 말았다. 미시즈 알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34쪽

˝로저는 정말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어요.˝ (로저의 애인) 샌디가 말했다. ˝실내 장식가를 해도 됐을 거예요.˝ 로저가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오?˝ 소령이 말했다. ˝비난이 꽤나 심하구려.˝ -40쪽

˝잘 보고 걸으세요, 아버지.˝ 로저가 그의 뒤에서 말했다. ˝보안등을 설치하시지그래요. 그 왜, 움직이면 켜지는 등 있잖아요.˝
˝정말 근사한 생각이구나.˝ 그가 대답했다. ˝우리 이웃인 오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주위에는 토끼들도 있는데, 네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디스코텍처럼 되겠어.˝ -44쪽

소령은 어두운 현관으로 들어가 기도문을 중얼가리며 전등 스위치를 켰다. -45쪽

˝전화할게요. 샌디하고 제가 일정을 짜서 이 주마다 뵈러 내려올 수 있어요.˝
˝샌디? 아, 그래. 그거 정말 기쁘구나.˝ 아들이 활짝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소령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말투에 스민 냉담함을 들키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그는 마주 손을 흔들면서 아들이 행복하게, 나이들어가는 아버지가 자신의 방문을 고대하고 들떠 있다고 확신하며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45~46쪽

그(소령)는 그레이스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여 거실을 살피는 것을 보고는 (함께 찾아온 동네 사람들인) 세 여자가 (6년 전 상처한) 그와 그의 집에서 태만과 쇠락의 기미를 찾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50쪽

˝마지막은 가족과 함께였나요?˝ 그녀(그레이스)가 소령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뇨, (동생인) 버티는 빈집에서 홀로 죽어 몇 주 만에 옆집 청소부에게 발견되었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의도적인 잔인성이라는 손톱으로 김빠진 대화에 마침표를 찍으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51쪽

(소령은) 비탄이 수학 책에 나오는 그래프처럼 직선으로 또는 완만한 곡선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님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대신, 몸이 묵직한 흙덩이와 뾰족한 가시덤불-그가 마음을 푹 놓고 있을 때 그를 찔러대곤 하는-이 가득한 커다란 정원의 쓰레기 더미가 된 것 같았다. -53쪽

목요일 아침 소령은 주먹으로 처마를 두드리는 듯한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는 화가 날 만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내면서 목재가 삭기 시작한 창턱까지 방울방울 적셨다. -61쪽

그(소령)는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스스로를 욕했다. 아마 진화의 결과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의 비가 올 것이 확실함에도 태평하게 야외로 나갈 계획을 세우는 영국인의 적응력 높은 유전자. -61~62쪽

대개 소령은 (이동도서관보다) 서재의 책을 읽는 쪽을 좋아했다. 그의 서재에서 키츠와 워즈워스는 부드러운 친구들이었고, 새뮤얼 존슨도 자만심이 강하긴 했지만 항상 도발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67쪽

˝프랑스어 말고 다른 언어들도 할 수 있어요?˝ 소령이 물었다.
˝프랑스어 정말 못해요. 독일어가 더 능숙하죠. 그리고 당연히 우르두어도요.˝
˝(파키스탄 출신인) 당신 가족의 모국어인가요?˝
˝아뇨. 우리 가족의 모국어는 영어라고 해야겠죠. 아버지가 유럽어를 고집했거든요. 어머니와 할머니가 우르두어롤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하셨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는 UN이 세계정부로 진화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계셨죠.˝ 그녀는 고개를 젓고는 왼손을 운전대에서 들어올리더니 앞유리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우리는 외교에 쓰이는 언어를 사용하고 세계시민으로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야.’˝ 그녀가 진지하고 단조로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걸 끝까지 믿다가 돌아가셨어요. 언니와 나는 아버지를 기리면서 6개 국어를 독학했죠.˝ -68쪽

˝고전을 읽는 데는 쓸모없는 것이 없어요.˝ -69쪽

소령은 갑작스러운 온기에 얼굴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80쪽

소령은 유언장을 고치고 지시 사항들을 정확하게 적어두는 것을 항상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장교로서(위험 속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작은 철제 금고를 열고 두툼한 유언장을 펼쳐서 재산 목록과 분배 목록을 읽으면 대단한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성취를 읽는 기분이었다. -86쪽

˝난 수십 년 동안 그 사람(키플링) 책을 읽지 않았어요.˝ 미시즈 알리가 말했다. ˝제국의 의미를 전혀 재고하지 않으려는 사람 같았거든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철학적으로 좀 엉성해지고 싶더라고요. 젊은 시절의 엄격함을 계속 지키기란 참 어렵지 않나요?˝ -90쪽

기억은 무덤에 그리는 그림과 같다고 소령은 생각했다. 시간이 쌓아올린 진흙과 모래가 아무리 여러 겹이라도 색깔만은 여전히 선명한 그림. -93~94쪽

˝죄송해요. 요즘에는 한심한 늙은 여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친애하는 미시즈 알리, 나라면 당신보고 늙었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 나이라야 여성의 성숙함이 한껏 피어난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거창한 말이긴 했지만 소령은 그녀가 놀라서 얼굴을 붉히기를 바랐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르익은 중년의 주름과 지방층 위로 그렇게 두꺼운 아첨을 바르시다니, 소령님. 들어본 적도 없는 아첨이시네요.˝ -94쪽

˝이미 벌어진 일은 다들 정확하게 알고는 있지만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족은 그 일을 신발에 들어간 모래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짜증나는 비밀로 간직하겠죠.˝ -100쪽

소령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미시즈 알리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이 동의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101쪽

˝소령님. 책을 다 읽고 나서 키플링에 대해 소령님과 이야기를 좀더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미시즈 알리)가 물었다. 하늘이 굵은 빗방울을 뱉어내기 시작했고 차가운 한줄기 돌풍이 먼지와 쓰레기를 그의 다리로 몰아왔다. 슬픔은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눈부신 날인가.
˝친애하는 부인, 정말이지 기쁘군요. 당신 뜻에 기꺼이 따르리다.˝ -102쪽

네 번째 남자(프랭크 퍼거슨)는 낯설었다. 소령은 넓은 어깨와 불쾌한 분홍 골프셔츠를 보고는 미국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주 동안 두 명의 미국인이라니, 끔찍한 전염병이라도 돌려는 건가, 그는 생각했다. -116쪽

˝안타깝게도 가족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소령. 소령의 동생(버티)처럼 좋은 사람을 잃다니 유감이군요.˝
˝고맙습니다, 각하.˝ 소령이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대거넘 경은 느닷없이 나타났는데도 마을의 최근 소식을 모두 아는 것 같았다. 소령은 런던에 있는 그가 대리인을 통해 정기적으로 마을 소식을 담은 팩스를 받아보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대거넘 경의 말에 아주 감동했다. 대거넘 경은 그를 편하게 페티그루라고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보답의 의미로 소령도 친지들 사이에서나 그의 등뒤에서 결코 그에 대한 뒷말을 하지 않았다. -116~117쪽

˝당신네 영국인들 앞에서는 대단한 척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네요. 당신들은 블러드하운드가 토끼 냄새를 맡듯이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알아차리니까요.˝ -117쪽

그(휴 웨트스톤)는 모든 사람의 족보를 캐내려 들었다. 나중에 그들에게 불리하게 써먹기 위해서였다. -118쪽

사람들은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항상 기억한다. 그래서 몇 년 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당신의 얼굴에 단단히 붙어서, 당신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음성에도, 당신의 손을 잡는 손길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닫게 된다. -121~122쪽

그녀는 대거넘 경이 세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아이들을 위한 작은 기숙학교에 대저택의 부속건물을 빌려주고 대부분의 땅은 묵힌 채 유럽연합의 보조금이나 받는 쇠락한 귀족임을 모를 것이다. 소령은 대거넘 경의 작위를 백작으로 올린 다음 그의 초대가 온 가문에 영광이 될 거라고 말하면 (죽은 동생 버티의 아내인) 마저리가 감동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22쪽

그(소령)는 그녀(그레이스)의 눈에서 죽은 가족(동생인 버티)를 핑곗거리로 내세우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 못지않게 그걸 써먹을 자격이 있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런다. 다들 장례식 이후 며칠부터 두어 달까지는 죽은 친척을 핑계로 써먹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일 년 후에도 세금을 늦게 내거나 치과 예약을 깜빡한 것을 죽은 친척들 탓으로 돌린다. 그는 결코 그러지 않지만. -124~125쪽

때때로 대거넘 경은 대거넘 가의 유산들을 경매에 내놓기 위해 기꺼이 물건들을 실어나갔다. 작년에는 무늬가 새겨진, 조지 2세 시대의 주목나무 책상을 크리스티 경매장에 보냈다. 클럽에서 대거넘 경이 어느 러시아 수집가에게 최고가를 받고 물건을 넘겼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을 소령은 예의바르게 들어주었다. 하지만 다리에 가느다란 소용돌이 장식이 있는 널찍한 책상이 낡은 펠트 담요와 접착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 이삿짐 트럭에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매우 괴로웠다. -137쪽

˝그 사람이 (처칠 총 한 쌍을 사기 위해) 얼마나 낼까요?˝ 이렇게 (소령의 조카인) 제미마는 공개적으로 돈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마저리)의 성향이 세대를 따라 진화해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제미마의 아들인) 꼬마 그레고리는 나중에 자라서 틀림없이 옷에 달린 가격표와 독일 스포츠카 창문에 붙은 제조사의 스티커를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138쪽

소령은 두 잔째 차를 따르면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더는 거실을 가로지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를 바랐다. 이제 금세 황금빛 띠가 반대쪽 벽의 책장에 닿으면서 미시즈 알리에게 시간이 늦었음을 알려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낭독을 멈출까봐 두려웠다. -154쪽

소령은 위로하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가 그녀(미시즈 알리)의 아버지와 맥주를 한잔 마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하는 취지의 말을. 그러나 그도, 그의 지인 어느 누구도 미시즈 알리의 남편에게 술을 마시자며 술집에 불러낼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어색한 사실 앞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물론 피부색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적으로 사회적인 상황이었다고 소령은 생각했다. 게다가 미스터 알리 스스로도 서먹함을 깨려고 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정신적으로 소령은 낚시에 걸린 잉어였다. 쓸모없는 산소에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156~157쪽

˝사람은 단조로운 일상에 빠져들기 마련이죠.˝ -162쪽

소령은 디저트(라스말라이)를 한 스푼 떠 먹었다. 부드러운 치즈와 담백한 시럽의 맛이 느껴졌다. 그는 그 담백함, 맛이라기보다 향기라고 해야 할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흥분했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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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와 나무 -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 인문학자의 아주 특별한 나무 체험
고규홍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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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말 혹은 음악의 텍스트가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도 음악처럼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p.193

 

 나무가 아니라 슈베르트에 끌려서 읽은 책이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책의 중심에는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제목에 어느 단어가 앞에 놓여 있었는지는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단지 나무 칼럼니스트인 저자 고규홍이 시각 장애를 가진 피아니스트 김예지에게 나무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나무를 들려주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들이 나무에서 들었던 소리를 한데 엮은 선율을 선물처럼 남겨 준 사람이기도 했다.

 

 책의 흐름은 일종의 역순행적 구성이다. 저자가 김예지와 함께 준비한 시각과 청각이 함께 하는 콘서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고가 무색하게도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1번에 맞춰 준비했던 나무 영상은 중간에 노트북 에러와 함께 무대 전면에 거대한 블루 스크린이 뜨는 사고와 함께 막을 내린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외부 행사에서 노트북이나 다른 기자재가 문제를 일으켜서 난감해졌던 경우가 있었던 까닭에, 순식간에 그 낭패감을 체험하고 말았다. 더구나 저자로서도 즉흥곡이 연주되는 분초에 맞춰서 영상을 정교하게 진행시키는 작업은 처음이어서, 이미 거듭해 리허설을 하며 준비했음에도 김예지의 연주가 이어지는 중간에 영상은 끊어져 버렸다.

 

 이야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두 사람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그들이 어떤 여정을 거쳐서 그 영상이 준비됐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결말부터 본 덕에, 시각을 잃은 피아니스트가 나무 칼럼니스트와 함께 나무와 가까워지는 이 책의 여정을 보다 가볍게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책의 끝에서 시각을 활용할 수 없는 김예지가 고규홍처럼,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본인이 생각했던 만큼 활용하지 못했던 고규홍이 김예지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방식으로 나무를 보는 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무거운 기대를 놓게끔 이끄는 서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정해진 정답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암시였던 셈이다.

 

(목련) 꽃봉오리의 솜털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던 김예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생애를 마친 열매는 아주 단단해요. 그리고 새로 다음 생애를 시작하려는 꽃봉오리는 말랑말랑하네요. 꽃봉오리 안쪽에는 틈이 많은가 봐요.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그런 틈,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p.118

 

 나무를 비키지 않는 장애물로 생각했던 김예지와, 시각 너머에 있는 나무의 의미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던 저자는 이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서로의 감각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이 책에 담긴 1년간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의 감각을 받아들일 틈을 찾는 과정과도 비슷했다. 시각을 갖지 못한 김예지는 저자가 관념적으로 추측했던 것 이상으로 청각, 촉각, 후각, 미각과 같은 다른 감각이 대단히 세밀하고 정교했고, 저자는 시각을 지녔지만 그가 김예지에게 건넬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본 나무의 형상들이 아니라 그동안 그가 키워왔던 나무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나무와 함께 살아온 경험들이었다. 서로가 지닌 감각의 차이는 이 책이 시작하기 전에 저자 자신이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까닭에, 함께 다가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났을 때, 그 나무는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의미를 담고 서 있었다.

 

시각을 활용하는 데에 서투른 건 이 시대의 흠이 되지만, 다른 감각이 무딘 것은 그리 큰 흠이 아니다. 미각이 둔감하거나 후각이 예민하지 못한 건 그냥 내놓고 자신의 단점이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각은 그렇지 않다. -p.308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갔을 때, 잉그리드 헤블러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D.935를 들었다. 몇 년 전에 구입했지만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음반인데, 지금 듣는 것이 잘 어울릴 듯했다. 마침 저자가 김예지의 연주회를 위해, 각각 네 곡으로 구성된 두 작품의 첫 곡들을 위해 준비한 영상 시나리오를 읽은 후였다. 김예지가 상상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표현한 글을 보면서,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의 절망과 그 끝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듯했던 희망을 담은 곡의 의미를 선연하게 드러내는 나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그 영상을 실제로 보지 못했고, 내가 들은 슈베르트는 다른 연주자의 것이었지만, 이 선율 속에서 여러 나무들이 자라고 사라지는 숲에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감각을 음악으로 표현한 피아니스트와 나무에 깃들인 선율을 찾으려는 저자와 함께한 덕분에, 감각 사이의 거리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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