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 산다는 것 낭만픽션 4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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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나 (후루타) 오리베도 다재다능했지만 마사카즈(고보리 엔슈)는 분야가 더 다양했다. 건축, 조경, 서책, 꽃꽂이, 시문 등에도 능했는데, 건축과 조경으로 그의 이력을 좁혀서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게이초 19년(1614) 빗추 마쓰야마 성을 수리하고 뇌구사賴久寺[라이큐지]의 정원을 조성했다. 이듬해에는 후시미성 혼마루의 서원 공사와 니조성 조경 공사를 총괄했다. 겐나 4년91618) 여원어전女院御殿 공사를 담당하고 6년에는 동복문원어전東福門院御殿 공사를 총괄했다. 겐나 11년에는 니조성 행행어전行幸御殿을 수리하고 그해에 오사카성 혼마루 비어전備御殿 건축을 총괄했다. 간에이 4년(1627) 남선사 금지원金地院의 다정茶亭을 짓고 이듬해 5월까지 선동어소 공사에 착수했다. 간에이 5년 니조성 니노마루 공사를 총괄하고 이듬해에는 에도성 니시마루의 다실과 정원 공사를 담당했다. (다음)

(이어서) 간에이 9년 금지원 정원을 완성했다. 10년, 선동어소의 정원을 만들고 니조성 혼마루 스키야(일본 전통 다실의 취향을 반영한 건축 양식)을 건축했다. 간에이 15년 시나가와 동해사東海寺[도카이지]의 다정 공사를 총괄하고 17년 신원新院(상황이 두 명 이상일 경우, 최근에 상황이 된 사람)의 궁을 지었다. 이즈음 가쓰라 이궁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그 구상에 조력했다. (고보리 엔슈)-207~208쪽

오래전 헤이안 시대의 침전식(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대표적 주택 양식) 정원은 귀족의 산책형 감상에 어울리게 설계되었다. 침전과 동쪽 대옥(침전식 주택에서 중심 건물인 침전 좌우에 배치된 건물)에 가설된 회랑 밑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지천池泉 정원이었다. 연못의 섬은 조전(침전식 건축에서 남쪽 복도 끝 연못가에 배치한 건물)을 두거나 홍예다리 혹은 사교斜橋로 연결한다. 자연을 모방했지만 어디까지나 우아한 놀이로서 감상할 뿐이다. 적막하고 씁쓸한 분위기는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문학적 관상觀賞 놀이를 위한 것에 불과했다. (고보리 엔슈)-211~212쪽

헤이안 시대에는 정원수 배치에 비교적 너그러웠다. 수목은 자연의 수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다소 손질하더라도 생육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수목은 성장하면서 당초의 풍경을 크게 바꾼다.
그래서 무로마치 시대에는 정원의 균형을 깰 만큼 성장이 빠른 나무를 기피하고 성장이 느린 나무를 선호했으며 철마다 전정 작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관리해도, 나무는 조금씩 생장하여 언젠가는 처음의 균형을 잃게 되므로 결국 수목은 일절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로 돌과 모래로만 구성한 정원, 모래만으로 구성한 정원, 혹은 초정草庭이나 이끼정원이라는 발상이 탄생했다. (고보리 엔슈)-212~213쪽

하지만 리큐의 다도는 요컨대 상인의 다도였다. 주코, 조오, 리큐, 소지 등이 모두 나라나 사카이의 상인 출신이다. 전국 시대의 교토 귀족이 그곳으로 피난했다가 상인층에 다도가 확산되었다고 한다. 다만 리큐의 ‘와비’는 상인의 예술이었다. 전 시대의 무상관과는 달랐다. 선학적禪學的 교양을 가진 무사계급은 당연히 정서적으로 반달했다. 그리하여 리큐 사후에 삼만오천 석의 다이묘 후루타 오리베가 리큐의 다도를 변혁하게 된다.
오리베는 다실 앞 정원을 밝게 만들었다. 자갈길에 넓적한 돌 조각들을 섞어서 깔아 둔 것처럼, 시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도록 만들었다. 다완만 해도 리큐가 검은색이나 주황빛 라쿠야키를 선호한 데 반해, 오리베는 시노산 자기의 하얀 바탕에 이국적 문양을 넣고 화려하게 채색했다. (고보리 엔슈)-214쪽

리큐가 정원 자체만으로 자연을 자아내고자 한 데 반해 마사카즈는 정원 주위의 실제 경관을 원경으로 포용했다. 수목도 한층 장신적인 형태로 다듬었다. 먼 산을 배로 보고 나무를 물결 모양으로 다듬거나 봉래를 떠올려 학과 거북 모양으로 다듬기도 했다. (고보리 엔슈)-215쪽

가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가 오쓰의 저택에 정원을 조성한 적이 있다. 석가산도 쌓고 연못도 만들었다. 도시쓰네가 집을 비운 어느 날, 마침 마사카즈가 그 정원을 구경하러 찾아왔다. 정원을 둘러본 마사카즈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군주의 풍류치고는 취향이 소심하시군. 저기 커다란 산과 호수가 보이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도시쓰네의 가신이 나중에 귀가한 주군에게 들은 대로 고하자 도시쓰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사카즈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연못을 메우고 석가산을 무너뜨려 돌만 남겨 두었다. 또 정원 건너편에 담을 세우되 중앙을 터놓고 그곳에 격자살을 세워 놓으니, 비와 호수를 비롯하여 히에이산, 호반의 경승지 가라사키, 미카사야마산까지가 한눈에 바라다보여서 웅대한 정원 전망이 확보되었다. 그러고 나서 마사카즈를 불러서 보여 주자 그는 손뼉을 치며,
˝가히 군주의 정원이군요!˝
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고보리 엔슈)-216~217쪽

마사카즈가 후시미에 있을 때 교토의 한 풍류인이 저택에 찾아온 적이 있다. 마사카즈는 오늘은 손님이 오실 예정이었으나 비 때문에 못 오시게 되었다, 마침 잘되었으니 정원을 돌아보시라, 차를 준비하겠다, 라고 말했다. 때는 6월 초라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비가 개고 나자 풍경이 매우 상쾌해 보였다.
풍류인이 안내를 받으며 객실에 들어가 보니 다다미방 벽감에 꽃은 없고 바닥에 살짝 물을 뿌린 자국만 있을 뿐이었다. 이건 무슨 취향일까, 하고 풍류인이 궁금해하는데 마사카즈가 들어오며 설명하기를,
˝오늘은 정원의 나무들이 비에 젖어서 저렇게 빛깔이 산뜻하니 방 안에 어떤 꽃을 꽂아 놓아도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꽃을 치워 두었습니다.˝
라고 하므로 풍류인은 오호라, 하며 감탄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도쿄의 다인들은 비만 오면 다다미방에 물을 뿌리고 꽃을 장식하지 않았다. 마사카즈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고보리 엔슈)-217~218쪽

일화를 들자면 끝이 없다. 이런 일화들은 그의 재능이 차, 다실, 정원, 다완, 다실의 꽃 장식, 도예, 다구 감정, 시가나 문장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다재다능은 종종 그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마사카즈는 덴쇼 7년 오미 국 사카다 군 고보리에서 태어나 22세에 빗추 마쓰야마성을 받았다. 겨우 만삼천 석이었지만 어쨌거나 다이묘가 된 것이다.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를 전란기 속에서 보냈지만, 특별한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 때는 빗추 지방의 쌀을 오사카로 운송하는 일을 맡았다. 또 후쿠시마 다카하루가 야마토 우다성 삼만 석을 몰수당할 때는 그 몰수 작업을 담당했다.
반슈 히메지나 단슈 후쿠치야마의 정무를 담당하기도 하고 기슈나 오미에 파견되는 등, 그저 그런 일들만 했다. 늘 곁길을 걷는 처지였다. 후시미부교로 이십 년을 재직했지만 봉록이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애초의 만삼천 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엔슈 태수 고보리 마사카즈는, 다회나 다구 감정, 조경에서만 재능을 발휘했다. (고보리 엔슈)-220쪽

그러나 마사카즈는 자신이 만든 다실이 칭송을 받고 정원이 찬사를 받을 때마다, 늘 마음속 아딘가에서 저미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히라노에서 이에야스의 차가운 시선을 불쏙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었다.
무인으로서는 아무런 역할도 없었다. 무공 하나 세운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특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는 텅 비어 버렸다. 종종 바람이 몸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적요를 느꼈다. 그것은 특기를 가진 자가 품는, 범인들은 이해 못 할 열등감이었다.
이에미쓰(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마사카즈에게 상을 세 번 내렸다. 한 번은 니시노마루의 정원을 만든 공으로 천 냥을 주었다. 한 번은 시나가와 숲속의 다정에서 마사카즈에게 차를 대접받고 청졸(중국 원나라의 임제종 승려)의 묵적을 주었다. 또 한 번은 동해사 정원석에 좋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면서 하오리를 하사했다. 돈을 주거나 물품을 하사는 것이 그의 특기에 걸맞은 값이라는 것이다. 평생 봉록을 천 석도 늘려 주지 않은 것을 보면 무인인 마사카즈를 머리에서 깡그리 말살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고보리 엔슈)-221~222쪽

간에이 9년(1632) 5월, 금지원 정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스덴이 재작년부터 마사카즈에게 의뢰한 일이었다. 마사카즈가 스즈키 쓰기타로에게 감정을 맡긴 정원석은 작년에 도착해 있었다. 정원수는 다니구치 구자에몬에게 물색하게 했는데 이 역시 그해 봄에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정원사 겐테이가 마사카즈의 설계대로 열심히 공사를 하는 중이었다.
이 정원의 설계도 실제로는 마사카즈의 예술적 욕망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스덴의 취향과 타협한 소산이었다. 마사카즈는 이에미츠나 다쿠안 같은 속물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다 내어 주지 않음으로써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그들에게 복수하는 기분을 맛보곤 했다.
마사카즈는 금지원에 시찰을 하러 갔다.
뜨거둔 여름 태양 아래 체구가 작은 겐테이가 볕에 탄 얼굴에 땀을 흘리며 인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겐테이의 본명은 요시로이며 후시미에 사는 천민 동산바치였는데, 황궁 조경 결과가 훌륭하다고 해서 고요제이 선황에게 겐테이라는 이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삼보원三寶院[산보인]의 정원 등을 조성했는데, 처음부터 마사카즈 지휘를 받으며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고보리 엔슈)-223~224쪽

대저 한 가지 예술에 능한 자가 다른 예술로 관심을 넓히는 것은 범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요. 다만 범인은 자신이 본령으로 정한 예술에만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기질이 강한 자는 그 밖에 한두 가지는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합니다. 범인은 자기 몫으로 정한 예술에만 웅크린 채 감히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자신만만한 자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일예가一藝家와 다예가多藝家를 가릅니다.
결국 일예의 마음은 다예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가 서예에 능하고, 차를 즐기는 자가 다완이나 조경에 해박하고, 금속 장식구의 의장을 궁리하는 자가 마키에도 궁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예의 마음이 경지에 다다르면 재능은 자유자재로 변통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혼아미 고에쓰)-234쪽

고에쓰의 기질을 알려면 누구와 교류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가라스마루 미쓰히로, 고노에 산먀쿠인, 쇼카도 쇼조 같은 고관귀족과도 교류하고, 에도의 쇼군 가를 비롯하여 도이 도시카쓰 같은 노중들, 소사대 사카쿠라님 같은 권력자와도 가까이 지내며, 가가 번의 마에다 가를 비롯한 여러 다이묘와도 친하고, 하이야 조에키, 차야 시로지로, 스미노쿠라 소안, 오가타 쇼하쿠 같은 부유한 상인들과도 친교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차야 시로지로는 정상政商(정권을 이용해 사익을 꾀하는 상인)이자 고에쓰의 경제적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난스럽게 권문귀족이나 대상인 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예술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늘 자신을 선전하고 자기가 이끄는 일파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모습이 모든 예술에서 만능이고자 하는 그 사람의 야심과 상통하지 않습니까. (혼아미 고에쓰)-236~237쪽

고에쓰의 재능 중에서 제가 인정하는 것은 서예뿐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정말 그건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구사하는 서체는 존조법친왕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비수肥瘦(획이 살찌거나 마른 정도)의 차가 격렬한 필획을 보면 저절로 선율이 흘러나오는 듯하며, 참으로 넉넉하고 부드러운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그 사람도 특히 그 점에서 자부하는 바가 컸는지,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고관 고노에 노부타다가 당대의 능서가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 고에쓰는 ˝먼저 최고가 있고, 그다음은 전하이시고, 그다음은 쇼카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최고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노부타다가 재차 묻자 ˝저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사람이 내놓음 직한 대답입니다. 세간에서는 고에쓰를 노부타다, 쇼카도와 함께 당대의 삼필이라 말하지만, 저는 역시 고에쓰가 월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고필古筆은 누구를 배웠는지 모르지만 왕희지나 구카이나 도후 등의 서풍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지금은 저렇게 자기만의 훌륭한 서풍을 확립해 놓았습니다. (다음)

(이어서) 하지만 그 글씨를 보면 역시 고에쓰의 성격이 배어납니다. 옛 시가를 쓸 때면 초필을 매우 굵게 시작하여 이내 가늘게 흘려 써 나갑니다. 참으로 자신이 넘쳐나고 망설임이 없는 필획입니다. (혼아미 고에쓰)-237~238쪽

여기서 굳이 도사파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도사파는 중국화에 맞서 일본화의 전통을 지켜왔지만, 가노파가 융성한 데 비교하면, 아니, 비교할 것도 없이 가노파에 압도되어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도사파가 옛 기법을 고집하여 작고 치밀한 그림을 그려 왔기 때문입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처럼 무로마치의 귀족과는 달리 대체로 배포가 큰 무가권력층에게 가노파의 장대함은 환영을 받았지만, 두루마리 그림으로 제한된 도사파는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사파의 색채 선명한 왕조풍의 장식성은 고에쓰의 취향에 꼭 맞았습니다. (혼아미 고에쓰)-242~243쪽

고에쓰는 시문 때문에 헤이안 시대를 동경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즐겨 쓰는 글귀는 늘 ‘고금집’이나 ‘신고금집’의 시였습니다. 서체도 사다이에체를 닮지 않았습니까? 도사파는 무로마치 이래로 회소繪所(그림을 관장하는 관청)의 의뢰를 받아 우아하고 아름다운 왕조풍 그림을 계속 그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에쓰가 좋아할 만한 그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사파의 전아한 장식성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립니다. 본래 고에쓰라는 사람의 취향은 장식성과 잘 맞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예술의 본질은 의장意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의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에쓰의 글씨가 어떠니 그림이 어떠니 다완이 어떠니 칠화가 어떠니 하지만, 결국 모두 의장일 뿐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장식 예술이라고나 할까요. 그건 그의 본업인 도검 분야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혼아미 고에쓰)-243쪽

하지만 중국화 기법으로 도사파의 색채를 구사하는 화풍이라면 (가노) 에이토쿠가 이미 하고 있습니다. 색채는 화려해졌지만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역시 딱딱합니다. 그래서 소타쓰는 도사를 중심으로 하되 가노를 받아들이는 시도를 했습니다. 도사의 색채에 가노의 선을 조화시키는 겁니다. 즉 선을 구사할 때는 딱딱한 초묵을 버리고 부드러운 담묵의 곡선을 구사하며 선과 색채에 동등한 가치를 두었습니다. 몰골법이라고 해서, 가능하면 견고한 윤곽선이나 생경한 색채를 피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분위기를 훨씬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우아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입니다.
고에쓰의 마음은 만사 의장에 가 있으므로 (다와라야) 소타쓰에게 그런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겁니다. 구도는 최대한 장식풍으로 잡게 했습니다. 색채도 짙은 색으로 화폭을 강렬하게 칠했습니다. 엷은 색이 전혀 없습니다. 바림만 해도 번짐을 이용하는 가노파와 달리 소타쓰의 그림은 운간법繧繝法(비슷한 계열의 색을 짙은 색에서 점차 옅은 색으로 층을 이루도록 그려나가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혼아미 고에쓰)-244~245쪽

의장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부채들을 그려 넣은 병풍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에쓰가 생각하는 의장화입니다. 마흔 여덟 개나 되는 부채들이 혹은 포개지고, 혹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 그것부터가 벌써 무늬입니다. 부채 속 그림의 소재는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 얽힌 일화에서 취했는데, 전투 장면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는 꽃 그림도 있고 ‘이세 이야기’ 그림도 끼워 넣고 사이교 법사 이야기 그림이 나오기도 합니다. 순수한 그림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육폭 병풍의 부채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도를 그린 바탕에 부채와 화선지가 흩어져 있습니다. 화선지 안에는 도사풍 세밀화를 그렸고, 부채 안에는 화조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개중에는 시를 적은 것도 있습니다. 그림이 아니라 문양 도안이지요. 의장이라는 면에서는 우리가 날밑이나 마키에를 세공하는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어쨌거나 모두 고에쓰의 의장이니까요. 소타쓰의 그림은 고에쓰의 공예인 겁니다. (혼아미 고에쓰)-247~248쪽

고에쓰의 손가락이라면, 아직 더 있습니다. 가도쿠라 소안은 고에쓰의 서예 제자인데, 이 부유한 상인은 조선에서 건너온 인쇄 도구로 출판을 하기로 결정하고, 다양한 색깔의 종이에 운모가루로 온갖 밑그림을 인쇄합니다. 이것도 고에쓰 일파가 잘하는 의장입니다. ‘요곡백번謠本百番’(게이초 시대(1596~1615)에 유행하던 노(能)나 노가쿠의 가사 백 편을 담은 목활자본) 같은 염색한 안피지에, 사슴, 나비, 달, 담쟁이, 나한송 등의 밑그림이 운모 가루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밑그림을 고에쓰가 그렸다고 말하는 자가 있지만 소는 소타쓰가 그렸다고 봅니다. 다만 제자題字는 고에쓰가 직접 쓴 것입니다. (혼아미 고에쓰)-252~253쪽

샤라쿠는 지금까지 반항 정신만큼은 지켜 왔다고 믿었다. 누구를 그리든 비슷한 생김새와 자세로 그리는 상투적인 배우 그림을 타파해 보려고 했다. 그는 배우의 특징을 잡아내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때문에 과장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도리어 진실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이 지닌 표정까지 그려내려고 궁리했다. 기존의 배우 그림에서 손은 죽은 것이었다. 말하자면 틀에 박힌 인형의 손같이, 상반신만 그리는 오쿠비에(배우나 미인 등의 상반신을 크게 그린 우키요에)에서는 대개 무릎 위에 놓인 채 죽어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게도 하고 팔뚝의 위치를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함으로써 오쿠비에의 단조로움에 구도상의 변화와 균형을 주었다. (샤라쿠)-282쪽

(그림이나 서책을 인쇄해 발행하는 업자인) 쓰타야 주사부로가 (샤라쿠의 그림에 대해) 칭송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육신의 선과 옷 주름의 윤곽은 담묵으로 긋고, 머리카락, 눈썹, 눈, 입과 목깃, 허리띠 등에는 농묵을 넣어서 억양과 역점을 표현했다. 이렇게 해서 그림에 입체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화폭에서 인물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 효과를 더 강화하기 위해 선묘는 최대한 복잡하지 않게 하고 단순하게 정리했다. 그것이 도리어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 주었다. (샤라쿠)-282~283쪽

장인이라는 존재는 후한 대우를 받는 대신에 정치적 권력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숙명을 안고 있다. (조불사 도리)-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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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사 법인法印 운케이는 교토 시치조 공방의 내실에서 76세의 병든 몸을 뉘어 놓고 있었다. 조오 2년(1223) 봄날 오후였다. 점심으로 온조(술지게미에 된장을 넣어 끓여 낸 죽)에 양하, 머위 초절임, 해초가 나왔지만 젓가락으로 매실장아찌만 건드리다 말았다. 입맛이 전혀 없었다. 조수가 차오르듯 자꾸 잠이 몰려왔다. (운케이)-9쪽

운케이는 작품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자신의 조불 역사를 반추했다. 먼저 이즈 니라야마의 원성취원願成就院[간조주인]의 부동명왕상과 비사문천상이다. 이 절은 호조 도키마사가 오슈 정벌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운케이는 이 두 작품으로 가마쿠라에 처음으로 존재를 알렸다.
물론 조불사 운케이라는 이름은 벌써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그때는 인손, 묘엔이라는 두 대가가 있었다. 이들의 광채 때문에 운케이는 물론이고 고케이도 존재감이 희미했다. 인손, 묘엔의 두 일문은 조초 이래로 전아한 전통을 고수하는 정통파였다. 사실 계보로는 고케이가 조초의 직계이지만 예풍에서는 방계인 그들이 도리어 직계였다. 예술은 계보를 따르지 않는다. (운케이)-24~25쪽

이런 (본존은 주문하지 않고 본존을 양 옆에서 모시는 협시만 주문하는) 변칙적인 의뢰(하지만 후에 본존 역시 운케이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후주에서 인용)가 운케이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운케이의 작풍은 움직임이 없는 본존불보다 역동적이고 거친 분노상忿怒像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힘으로 정권을 쟁취한 가마쿠라 무사인 것이다. 운케이가 연출한 동세動勢에 신흥 실력자는 이해보다 먼저 정신적 융합을 느꼈다. 당시의 상황은 훗날 조불사들 사이에 운케이가 대단한 정략가였다는 악평을 불렀다. (운케이)-25쪽

운케이는 불상을 살아 있는 모습으로 구상화하고자 했다. 눈동자에 수정을 박아 넣는 시법은 그 현실감을 한층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추상에는 뭔가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감지하기까지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반면에 사실寫實은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직관적으로 호소한다. 그것이 훌륭한 결과물일수록 소박한 감탄을 준다. 작가의 정신은 민중의 거리감 없는 감동에 녹아드는 것이다. 본래 신앙의 본질은 감동이 아니던가. (운케이)-27쪽

하지만 작가는 비평가에게 약점을 지적당해도 쉬 승복하지 않는다. 상대가 건드린 곳이 급소일수록 더 저항한다. (운케이)-29쪽

(운케이가 자신의 불상을 인간 냄새가 너무 진하다고 비평하는 조겐에게 반발하는) 모순은 (승려로서 동대사 재건 사업을 시행하는 대권진大勸進이었던) 조겐이 가이케이를 지지하는 이유를 운케이가 이해한다는 데 있다. 가이케이의 조형에는 조초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데, 조겐이 그 우아한 선에 끌리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 모습에서 조겐은 부처의 존엄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거다, 라고 이해했다. 조겐이 조초 양식에 끌리는 이유를 이해했다는 점에 운케이의 당착이 있었다. 운케이는 조초 양식을 파괴했지만 불상의 신비까지 파괴한 것은 아닐까. 불상을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실에 근접시키느라 상상의 여지마저 침해한 것은 아닐까.
운케이는 가이케이에게 어떤 시샘과 경멸을 느꼈다.
가이케이가 조겐에게 우대받고 있어서가 아니다. 또 조겐의 편애 아래 다양한 조소 작업을 의뢰받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혹은 가이케이가 조겐을 사숙하여 안나미라는 호를 지었을 정도로 양자가 친밀해서도 아니었다. 가이케이가 동적인 사실성을 지향하면서도 그런 정숙을 남기는 점에 시샘을 느꼈다. (운케이)-30~31쪽

작품은 가장 적합한 대상을 다룰 때 최고의 정채를 발한다. 특히 사실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운케이)-33쪽

운케이가 가이케이나 단케이, 조케이, 고벤, 고쇼 등의 일문을 이끌고 눈부시게 활약하는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를 대단한 독재자로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은 당대의 권력자에게 빈틈없이 아부하여 엄청난 주문을 따내는 ‘정치적 수완’이 있다는 평판과 연결되었다. 실제로 운케이의 세력은 경쟁상대인 인손의 인파, 묘엔의 엔파를 압도하고 당대의 주류가 되어 있었다. 그 인상이 세간에 확대되었다. 그자는 괴물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운케이)-34쪽

제아미가 고코마쓰 천황과 전前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앞에서 사루가쿠를 공연한 것은 오에이 15년(1408) 3월 15일 저녁이었다. (중략)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뿌렸지만 해 질 무렵이 되자 그쳤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고 늦게 핀 벚꽃이 빗방울을 묵직하게 매달고 있어 요염한 풍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제아미가 주연을 맡았다. 제아미의 나이 47세로, 기예에 자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창 물이 올랐을 때였다. 게다가 주상 앞에서 하는 첫 공연이므로 전력을 기울였다. 소싯적부터 요시미쓰의 총애를 받았던 만큼 용모도 훌륭했다. 제아미의 연기는 관람자들을 새삼 감탄케 했다. (제아미)-42쪽

사루가쿠는 본래 猿樂이라고 썼는데, 신사 등에서 공연하던 가구라의 여흥으로 선보이던 것이다. 9세기 중반경에는 이를 직업으로 삼는 자가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신사의 제례나 사원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상대로 공연하고 그 사례금으로 생활했다. 긴키 지방에는 유서 깊은 신사나 사찰이 많았으므로 자연히 사루가쿠도 긴키를 중심으로 발달했고, 마침내 동업자 조합인 ‘좌座’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제아미)-43쪽

그러나 제아미의 눈으로 보자면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예술을 보는 안목이 호사스럽다고 할 정도로 높은, 두려운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느슨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면 그 시선이 두려워 희미한 공포까지 느껴야 했다. (제아미)-49쪽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나 보호자를 잃는 것은 때로는 일종의 자기 상실마저 일으킨다. 단순히 낙담하는 정도의 사태가 아니다. 허공에 붕 뜬 듯한 허탈감에 빠진다. (제아미)-49~50쪽

생각해 보니 오에이 15년 봄날 기타야마에서 주상이 관람하는 가운데 사루가쿠 노를 공연했던 것은 제아미 평생의 정점이었다. 제아미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갈 때 비로소 그걸 깨달았다. (제아미)-51쪽

제아미는 자신을 치장해 주던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그렇게 살아 온 예술가는 번민이 이중으로 깊어진다. 소망을 이루지 못한 자보다 추락하는 자가 더 지독한 지옥을 맛본다. 초조감이 몸뚱이를 부르르 떨게 하고 활활 타오르게 했다. (제아미)-54쪽

‘꽃’이란 수사를 제아미는 좋아했다. 이는 관객을 따분하지 않게 하는 참신한 연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술은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꽃이란 관객에게 재미를 주려는 궁리히다. 노래와 춤이라는 양대 기예와 노인역, 여인역, 무인역이라는 세 가지 역할로 제약된 유환幽幻의 세계, 그리고 흉내 연기라는 세계에서 재미를 줄 수 있는 진정한 비결은 역시 수련을 쌓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재능을 타고난 자만이 가능하다. (제아미)-59~60쪽

‘(전략) 조아미는 가이코(신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극에서 상대역이 줄거리와 무관하게 당대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장생불로의 정치가 이 시절에 이루어지누나>라는 구절의 <이루어지누나>를 낮은 음조로 노래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축하의 음곡이라 할 수 없다. 세간에서는 조아미의 가이코가 재미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애수가 깃든 목소리 때문이다. 축하의 말을 노래하는 음곡에는 재미있다고 느낄 만한 곳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아미)-61쪽

저항할 수 없는 파괴는 때로는 장쾌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제아미)-65쪽

자신을 무시한 채 가까운 친족을 영광된 자리에 앉히는 것은 같은 길을 걷는 자에게 견디기 힘든 일이다. 예술 세계에서는 특히 그렇다. 타인보다 근친에게 패하는 것이 더 굴욕적이고, 질투마저 부른다. 원한은 한층 처절했다. (제아미)-65쪽

리큐는 눈을 맞으며 대덕사大德寺[다이토쿠지]에서 돌아왔다. 덴쇼 19년(1591) 윤정월 말. 70세의 메마른 몸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아내 소온이 맞아 주며 리큐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늘 보이던 뚱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광대뼈가 불거지고 볼이 패고 턱 언저리의 피부가 늘어져 있었다. 안색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그가 집을 비운 새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보낸 전복구이 이백 개가 도착했다고 소온이 고했다.
˝그래?˝
평소라면 당장 구경하겠다고 했겠지만, 그거 맛있겠군, 저녁상에 올려주시게, 라고만 이르고 다실로 들어갔다. (센 리큐)-75쪽

덴쇼10년(1582) 노부나가가 횡사했다. 전에 약속한 대로 노부나가가 하카타의 거상 시마이 소시쓰에게 그간 수집해 온 귀한 명품 다기들을 구경시켜 준 날 밤이었다. 노부나가는 그 대단한 명품들과 함께 화염 속에서 죽었다. (센 리큐)-83쪽

리큐가 이마이 소큐와 함께 노부나가의 다회에 처음 참석한 것은 마흔여덟, 아홉살 때였다. 그리고 쉰두 살 때는 노부나가의 다두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행동은 이런저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차에 관한 한 리큐는 노부나가가 좋았다. 차의 미에 대한 노부나가의 직감이 리큐의 심미안과 호흡이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무로마치 막부 체제를 철저히 파괴한 이 실력자의 근성이 리큐의 마음에 한 줄기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리큐와 노부나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합치했다. 아니, 리큐 쪽에서 먼저 노부나가에게 끌렸다고 해야 옳겠다. (센 리큐)-83쪽

마침내 리큐는 이 무장을 위해 처음으로 다실을 지었다. 묘희암妙喜庵[묘키안]에 마련한 이 다실은 리큐의 취향대로 다다미 두 장 크기의 작은 공간이었다. 히데요시는 참으로 와비(다도가 추구하는 근본 이념으로 쓸쓸함이 느껴지는 소박하고 절제된 미)가 있는 다실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이 공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잇는지 리큐는 의문이었다.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다실에서 이듬해 정월 조회를 열었다. 리큐와 소큐, 소호, 소니, 소규, 소안 등 여섯 명이 참석했다. 벽감에 허당선사(중국 남송의 고승)의 묵적을 걸고 명물로 알려진 쇼카 찻단지를 앞에 높았다. 천장에서 내린 고리에는 오토고제 차솥(‘오토고제’는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오고 이마가 넓은 추녀 탈을 말하는데, 그 탈과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차솥)을 걸고 풍로를 받쳤다. 물병은 남만의 토란머리형, 다완은 이도다완(고려다완의 다른 이름으로, 대부분 고려가 아닌 조선에서 넘어간 막사발들)이다. 리큐가 구성한 것이다. 이때도 히데요시는 매우 흡족해했다. (다음)

(이어서) 이름난 사카이 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은 히데요시는 다도에서도 노부나가를 계승했다고 만족해하는 듯했다. 차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만족감에 도취한 것처럼 보였다. 리큐의 마음에 과연 앞으로 이 무장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싹텄다. (센 리큐)-84~85쪽

(황금) 다실에 들어서는 히데요시의 복장도 차제구 못지 않게 화려했다. 상의로는 먼저 화려한 비단 고소데(오늘날의 기모노)를 입고, 그 위에 우치키(예복을 차려입을 때 고소데와 겉옷 사이에 입는 옷)를 다섯 벌 입되 옷깃을 밑까지 길게 댔으며, 겉옷으로는 민무늬 안감을 댄 하얀 가미코(전통 종이로 실을 자아서 짠 옷감으로 지은 옷)를 입고, 새빨간 허리띠를 한쪽이 길게 되도록 매듭지어 무릎 아래까지 늘어뜨렸으며, 머리에는 쪼글쪼글한 비단으로 만든 연둣빛 두건을 썼다. 고소데 밑단은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그런 모습으로 유유히 다다미 두 장 크기에 다실에 들어와 앉았다. (센 리큐)-90쪽

리큐는 사카이 상인 다케노 조오의 제자이다. 리큐도 사카이의 생선도매상 집 아들이니 두 사람은 지역을 매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대개 그런 식이다. 실제로 리큐를 조오에게 소개한 사람도 역시 사카이에 살던 도친이었다. 리큐는 조오에게 차를 배웠지만, 사실 그가 멀리서나마 따르던 사람은 다도의 개조開祖 주코였다. 리큐의 차는 주코를 계승한 내용에 궁리를 더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센 리큐)-91쪽

주코가 차제구 구성에 관하여 남긴 말 중, ˝허름한 초당에 명마를 매어 두어야 더 좋아 보인다, 소박한 방에 명물 다기를 놓아두어야 더 좋아 보인다. 그 정취가 더욱 재미있다˝라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그때까지 다회란 화려한 히가시야마풍 서원(히가시야마는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별장(은각사)이 있던 곳으로 이 시대의 문화 양식을 말함)의 고귀한 장식 속에서 치르는 예식으로 발달했다. 그것을 서민풍으로 바꾼 자가 주코였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다실은 그가 창안한 것이다. 무늬 없는 하얀 창호지를 바른 창, 무절재 삼나무판 천장, 너와지붕, 여섯 자짜리 상석, 거기에 선승의 물적을 걸고 다정자를 둔다. 바닥을 파 땅화로를 만들고 그 옆에 작은 다정자를 둔다. 탁자에는 향로, 일색一色의 꽃꽂이(한 종류의 화재(花材)로 구성한 꽃꽂이), 지필묵, 대체로 그렇게 장식된 공간이었다. 다다미 넉 장 반의 공간이 허름한 초당이요, 각종 도구가 명마였던 것이다. (다음)

(이어서) 누추한 방의 고귀한 명기-그 대조의 파격 속에 쓸쓸한 미를 만들었다. 물론 소박한 옷을 입고 호화로운 정신을 품는다는 선종의 영향이었고, 그런 자리에서는 필연적으로 마음이 일어났다. (센 리큐)-91~92쪽

리큐는 다다미 넉 장 반의 공간으로도 여전히 누추한 초당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석 장, 두 장 반, 두 장, 한 장 반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석 장도 너무 넓다고 후회한 적도 있다. 차를 더욱 간소한 것으로 만들었다. 간소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정신이 내부에서 부풀어 오른다. 형식의 압축은 관념을 다변多辯하는 것이다. 리큐는 자잘하고 번거로운 것들을 쳐냈다. 단순함을 한계까지 몰고 갔다. 그 결과물에 리큐는 만족했다. 이것이 와비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센 리큐)-93쪽

리큐는 화려함을 혐오했다. 요란한 몸짓을 혐오했다. 자연스러운 단순함이 그의 이념이었다. 무로마치 서원을 농민이 사는 초가로 바꾸어 버렸다. 뜰에 심은 나무들은 산속의 풍정을 닮았다. 사립문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농가의 출입문을 그대로 떼어다 달아 놓았다. 고마게타(굽을 따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목재로 전체를 깎아 만든 왜나막신), 셋타 등 서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품들을 스스럼없이 가져다 놓았다. 꽃꽃이 용기도 청동의 묵직함 대신에 대나무를 잘라 경묘한 꽃병으로 만들었다.
리큐의 차 예술이라는 것은 요컨대 그런 박묵薄墨의 미였다. 상인의 차였다. (센 리큐)-94쪽,

히데요시는 늘 더 높은 벼슬을 갈망했다. 관백 다음에는 태정대신 벼슬을 받았다. 첩도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만 골랐다. 아자이 씨 출신의 요도도노, 마에다 씰 출신의 가가노쓰보네, 교코쿠 씨 출신의 마쓰노마루도노, 가모 씨 출신의 산조노쓰보네, 오다 씨 출신의 산노마루도노가 모두 그렇게 들인 첩이었다. 출세한 자로서 스스로 치장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행태였다. 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센 리큐)-95쪽

히데요시는 물을 채운 황금 바리때와 봉오리 맺힌 홍매화 가지 하나를 리큐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꽃꽂이를 해 보라는 뜻이었다. 리큐는 대뜸 가지에 맺힌 봉오리들을 훑어서 가지와 함께 바리때 속에 던져 넣었다. 물을 채운 황금 바리때에 홍매화 봉오리들이 무수히 피어난 것처럼 흩어져 떠돌았다. 히데요시의 생각이 가소로웠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런 리큐의 얼굴을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센 리큐)-99쪽

한번은 히데요시가 대불전 내부를 다실로 가정하고 행다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리큐에게 물었다. 리큐가 다실 면적을 다다미 두 장으로, 다시 한 장 반으로 자꾸 좁게 만드는 것을 비꼰 것이다. 대불전 내부는 매우 넓다. 그렇게 넓은 곳에서는 너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넌지시 비꼰 것이다.
˝있지요, 제 아들놈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리큐는 대답했다. 내 아들 쇼안도 할 수 있다, 하물며 내가 못할까. 리큐의 대답은 언외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비웃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히데요시는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센 리큐)-99~100쪽

도요의 기량은 결코 빠르게 향상되지 않았다. 게다가 서투른 그의 솜씨로는 마무리를 도저히 말끔하게 해낼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종이 위에 먹물을 떨어뜨려 운무처럼 번지게 하는 바림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모호한 운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먹물이 고여 보기 흉한 반점이 남았다. (셋슈)-117쪽

이때 도요는 이미 셋슈라는 호가 있었다. 선승 초석의 명필 ‘설주雪舟’에서 얻은 호였다. (셋슈)-123쪽

셋슈가 스오의 오우치 노리히로를 찾아간 것은 교토만큼 번창한 곳이 서쪽의 야마구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곳은 고향 빗추와 가까운 곳이었다. 오우치 씨는 감합인(명, 조선 등과 교역하던 일본인들에게 발급하던 증서에 찍어 주는 확인 도장)을 얻어 대명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야마구치의 번창은 교토를 능가하고 있었다. 교토는 마침 오닌의 난(1467년에 무로마치 막부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각지의 다이묘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대립한 내란)이 일어나 민심이 흉흉했다.(셋슈)-124쪽

셋슈는 북경에 체류할 때 대가를 만나 보고 싶었지만 어떤 화가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일본에서 사숙했던 화가들은 목계, 하규, 고언경을 비롯한 송원의 고인들뿐이었다. 당대의 명나라 화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주위에 물어서 찾아가 만난 화가는 장유성과 이재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일본의 화가를 맞아서 거드름을 피우며 그림에 관한 이론을 들려주었다. 장유성은 언변이 유창했고 이재는 눌변이었다. 셋슈는 감격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내용 없는 말뿐이었다. 셋슈는 죽을 때까지 그들이 당시 이류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셋슈)-130쪽

어느날 오리베는 리큐에게 다도의 마음을 물었다. 리큐는 즉각,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는 이에게 산촌의 잔설 사이로 어린 풀이 움트는 새봄을 보여 주고 싶구나˝하고 ‘고금집古今集’의 한 수를 읊었다. ‘와비’가 다도의 이념이라고 말했다. 차가 곧 ‘와비’, 라는 말은 본래 리큐가 한 말이 아니다. 리큐의 스승 조오도, 또 그보다 앞선 주코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형태로서 완성한 이는 리큐이다. 주코도 허름한 초당에 명마를 매어 두어야 더 좋아 보인다고 했고, 소박한 방에 명물 다기를 놓아두어야 더 좋아 보인다는 말도 했다. 허름한 초당과 명기-이 대조가 빚어내는 분위기가 ‘와비’라는 것이다. (후루타 오리베)-145~146쪽

언젠가 히데요시가 리큐의 다다미 한 장 반 크기의 다실에 초대되었는데, 장식된 화병에 꽂은 올벚나무 가지 때문에 상좌에 앉기를 망설인 적이 있다. 히데요시가 마침내 상좌에 앉아 보니 올벚나무 가지들은 히데요시가 앉을 만한 공간을 정확히 비워 놓고 뻗어 나와 있었다. 이 한 치의 낭비도 없는, 공간을 쥐어 짜낸 듯한 긴밀함에 리큐가 추구한 예술의 완성이었다. 오리베는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힘에 눌려 리큐 앞에 납죽 엎드렸던 것이다. (후루타 오리베)-149~150쪽

오리베는 리큐의 다도에 도전했다.
다실에 귀인문(다실에서 귀인을 위한 문으로, 허리를 굽히지 않고 꼿꼿이 선 채 드나들 수 있음)을 되살렸다. 리큐가 만들어 낸 ‘무릎걸음문’만 두던 서민풍 양식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그는 이를 무가풍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릎걸음문도 리큐 때는 다실 구석에 두던 것을 중앙으로 옮겼다. 이를 통해 히데요시가 말하는 리큐의 ‘음침함’을 밝게 바꾸었다. (후루타 오리베)-160~161쪽

그림 기술에 자신감이 생기자 그(이와사 마타베에)의 시선은 풍속화로도 향했다. 풍속화는 회화의 정통에서 벗어난 양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화가가 답답한 그림에서 벗어나, 풍속화의 편안함에 손을 내밀곤 했다. 그것은 낙관을 찍는, 반듯한 화풍에서 일탈한 비밀스러운 숨 돌리기였다. 내밀하고 자유로운 충족감이 있었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풍속화를 그림으로써 정통 회화와 정해진 주제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었다. 고명한 화가들이 그린 낙관 없는 풍속화가 이즈음(모모야마 시대 말기~에도 시대 초기) 많이 나왔다. (이와사 마타베에)-182쪽

시대는 몰라볼 만큼 태평해져 있었다. 히데요시가 심은 화려한 기풍이 세상에 뿌리를 넓히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공기마저 달콤했다. (이와사 마타베에)-183쪽

아직 마타베에만의 그림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가노도 아니고 도사도 아니며, 그렇다고 운코쿠의 수묵에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유파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이즈음 이질적인 화가 두 명과 교류했다. 한 사람은 다와라야 소타쓰라는 교토 비단 상인의 아들이고, 또 한 사람은 하세가와 도하쿠라는 노토 나나오의 염색장이었다. 두 사람은 화풍이 전혀 달랐던 것처럼 기질도 정반대였다. 소타쓰는 자못 교토 상인답게 음전했고 그림은 장식풍으로 치밀하고 교묘했다. 도하쿠는 콧대가 높고 자신만만한 사람이라 스스로 셋슈 5세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림은 호방하고 필세가 넘쳐 종이를 더 붙여 주어야 했다. (이와사 마타베에)-184쪽

그것은 이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갑자기 에도 막부에 출두하라는 명이 떨어졌던 것이다. 부슈 가와고에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신사인 동조궁東照宮[도쇼구] 희다원이 한 해 전에 소실되어 재건을 하는데, 배전에 올릴 <삼십육가선도三十六歌仙圖>(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서른여섯 명의 그림)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중략) 하지만 마타베에는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곤혹스럽게 여겼다. 젊은 시절이라면 기꺼이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순 살이었다. 공명심도 야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회가 너무나 늦게 왔던 것이다. 눈보라에 시달린 고통스러운 인생이라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주름살에 묻힌 얼굴은 노추를 풍기기 시작했다. 불혹을 넘겨서 이룬 두 번째 가정도 떠나기 싫었다.
그러나 에도로의 소환령은 절대적이었다. 응하지 않으면 (후쿠이) 번주 다다마사도 곤란해질 것이다. 마타베에는 기량에 대한 자부심 하나만을 의지하여 무거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와사 마타베에)-192~193쪽

쓰루가를 출발하여 비와 호수를 지나 오쓰에서 묵고, 이튿날 오사카逢坂산을 넘으니 그리운 교토가 보였다. 저곳을 보고 싶은 마음에 에도로 가는 길을 우회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서른 아홉 살 때까지 살았던 교토는 잊을 수 없는 그(이와사 마타베에)의 고향이었다. 암울한 후쿠이의 시골에서 이십 년을 살면서 꿈에서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고향이랄지, 도읍이랄지, 보고 나니 참으로 기뻤다. 옛날에 번창했던 그 모습을 보니 과연 교토 땅은 고귀했다. 교토 니조 아부라노코지에 있는 지인의 집을 찾아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갖은 환대를 받고 각별한 감흥을 느끼며 열흘 남짓 머물렀다. 예전에 다니던 곳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먼저 기온, 마루야마, 쌍림사雙林寺[소린지], 남선사南禪寺[난젠지],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 등 여기저기 참배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붓끝을 핥아 가며 일기에 적었다. (이와사 마타베에)-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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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을 자유 - 우리가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서 테드북스 TED Books 6
피코 아이어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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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활기찬 일은 없으리라.

산만함의 시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호화로운 기분이 드는 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리라. -p.102

 

 봄의 시작일 거라 잔뜩 기대하고 도착한 2017320일의 교토는 겨울이 끝나기 직전의 서늘함이 가득했다. 벚꽃, 등나무 꽃, 수국을 모두 보겠노라 가득 욕심을 품고 도착한 곳에서 동백이며 매화까지 엿본 것은 순전히 그 덕이었을지 모른다. 80일의 꽃구경을 마치고 67일에 떠나오면서 갓 피어난 수국들도 많지는 않으나마 무사히 만났다. 어지간히 먼 곳이 아니면 거의 늘 걸어 다니면서, 그저 도시 곳곳에 피어난 많고 적은 꽃들과 구석구석에 자리한 빵집들을 두리번댄 느긋하게 바쁜 나날이었다. 딱히 대단한 일이 없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에서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실감한 봄날이었다. 그것이 가만히 앉아 있는 기분으로 이 도시를 거닌 덕분이었음을 이 책 덕분에 되새겼다.

 

결국 나는 꿈같은 생활을 떠나, 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뒷골목에 있는 작은 단칸방에서 1년간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뉴욕에서 활동의 성취와 자극을 실컷 맛보았으니, 이제 좀더 단순한 것을 섭취해 인생의 균형을 맞추고, 내 기쁨이 좀더 내면으로 향하고 오래 지속되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p.29

 

 이 작은 책의 저자인 피코 아이어를 케이티 머론이 엮은 도시의 공원』에서 처음 만났. 워싱턴 D.C.의 덤버턴 오크스를 주제로 쓴 빌 클린턴을 비롯해 여러 필자들이 저마다 세계 여러 도시의 인상적인 공원을 이야기한 이 책에서 그는 교토의 마루야마 코엔(円山公園)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 짧은 글 덕분에 30년 전부터 생활의 근거를 교토로 옮겨서 생활하는 이 영국 태생의 인도 혈통의 작가를 기억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의 단독 저서는 좀체 한국에 소개되지 않아서 아쉽던 차에, 이 책이 나와서 퍽 반가웠다. 마침 교토로 떠나기 직전에 찾아온 소식이어서 더 그러했다. 자신의 고유한 속도에 맞는 여행처럼 삶을 꾸리려는 사람에게 이 도시가 적절하다고 인정을 받은 기분이어서, 혼자서 조금은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하기 위해서 떠난 곳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쓴 유명한 글이 있다. “사람들의 불행은 전부 한 가지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사실이란, 사람들은 도무지 방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중략) 교토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무턱대고 아무거나 하지 마. 가만히 좀 앉아 있어.” -p.68~69

물론 소동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든 설탕이 범벅된 도넛에서 몸을 돌리는 것이든,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그러모아야 한다. -p.96~97


 그래도 역시 교토에 머물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그저 방에 머무는 것, 오직 그뿐이었다. 교토 사람들의 핀잔처럼 아무거나 할 것을 찾을 필요도 없이, 거처 밖으로 나가면 할 만한 놀이, 볼 만한 장소가 있는 까닭에 그저 조용히 머물며 지금 내가 바라던 이 도시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시간을 내고, 그 마음을 먹기가 참 어려웠다. 물론 교토 곳곳의 골목들을 찬찬히 걸으며 스치는 풍경들 속에서도 오직 이곳에서 스며드는 행복을 느꼈지만, 그 낱낱의 조각을 아우르는 이 도시에 머문다는 충족감과는 약간 달랐다. 그래도 며칠은 그저 방 안에 가만히 머물면서, 오직 교토의 하루를 온전히 맛보았다는 혼자만의 기쁨에 빠지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어느 곳도 가지 않은 날에,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때는 퍽 이상했는데, 이 책은 그 행복이 당연했다고 말한다.

 

 주로 비가 오던 날에 온종일 방에 머물렀지만, 하루인가 이틀 정도는 화창한 적도 있었다. 그중에는 비가 올지 알고, 나가지 않으려 부러 느지막이 일어났더니 맑게 갠 날도 없지 않았다. 밖에 나가도 행복했을 한나절을 고스란히 방 안에서 나고서야, 여행을 온 까닭에 여행하지 않을 자유가 온전해졌다는 생각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이 도시에서 내가 원하는 속도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 그 조용한 날들 덕분에, 방 밖에 나가서도 나에게 맞는 걸음을 지키며 지냈다. 여행하지 않을 자유는 여행할 수 없을 때만 아니라, 여행을 왔을 때도 더 없이 가치 있었다. 그때 느꼈던 그 흩어지지 않는 가벼운 기분의 정체를, 결국 돌아와서야 뒤늦게 알았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 이름도 모른 채 톡톡히 누린 자유여서 더 각별해졌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 중에 일상에서 자주 혹은 장기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러므로 아무데도 가지 않기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당일치기로 여행을 가거나, 낚시를 가거나, 매일 아침 30분 동안(이 정도면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중 고작 3퍼센트에 불과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고요에 도달한다는 것은, 굳이 성소나 산꼭대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고요함을 활동에, 이 번잡한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p.97~98

 

 이 책은 여행하지 않을 자유를 찾는 기술적인 방법을 상세히 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자유를 누릴 때의 기쁨이 얼마나 다채롭고 각별한지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저자가 경험한 수도원이나 선원, 피정이나 명상, 참선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설파하지 않은 까닭에, 이 책은 나가지 않고서도 여행하는 기쁨이라는 핵심에 충실했다. 어떻게 아무데도 가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한 방법을 찾겠다고 안달복달하기 전에, 먼저 지금 내가 그렇게 지금 이 장소에 가만히 머무는 여행을 진정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여행하지 않을 자유의 시작이고,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자는 그 사실을 통찰했기에, 이 자유의 광채를 먼저 보여 주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고요의 기술(The Art of Stillness)이다. 만약 이 제목 그대로, 피코 아이어가 아닌 다른 서구 배경 저자가 쓴 책이 있었다면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구인들이 차분하고 조용한 삶의 가치를 노래하며, 뉴에이지나 신비주의 계통의 요설을 늘어놓는 책만큼은 지금까지 꾸준히 불신했기 때문이다. 그저 마음 하나를 바꿔서, 딱히 바꿀 필요도 없는 멋진 삶이 더 멋지게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얄팍한 인세마저도 보태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 책은 그 주제에 더 부합하는 제목을 얻었고, 그 내용을 채운 사람은 그동안 계속 만나고 싶은 작가였다. 그는 떠나지 않는 여행의 아름다움을 명상과 참선 속의 깨달음보다 앞세울 만큼 예리하고 현명했다. 자칫 놓칠 뻔했던 책을 읽은 덕분에, 이미 행복했던 여행의 결이 더욱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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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을 자유 - 우리가 잃어버린 고요함을 찾아서 테드북스 TED Books 6
피코 아이어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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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코언이 내게 보여준 것처럼, 아무데도 가지 않기는 금욕이라기보다 자신의 감각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다. -24쪽

나는 그 산(샌게이브리얼 산맥)에서, 고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지속적인 명료함과 분별력, 환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24~25쪽

내 나이 스물아홉 살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삶을 손에 넣었다. 타임스스퀘어에서 네 블록 떨어진, 미드타운 맨해튼에 있는 건물 25층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아파트는 파크 애비뉴에서 갈라진 20번가에 있었다. 동료들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에 대해 ‘타임’에 글을 썼으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28쪽

결국 나는 꿈같은 생활을 떠나, 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의 뒷골목에 있는 작은 단칸방에서 1년간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뉴욕에서 활동의 성취와 자극을 실컷 맛보았으니, 이제 좀더 단순한 것을 섭취해 인생의 균형을 맞추고, 내 기쁨이 좀더 내면으로 향하고 오래 지속되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29쪽

2000년도 더 전에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다. -32쪽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그 경험이 의미를 획득하고 내 자아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다. 집에 가만히 앉아, 내가 본 것들을 오래 지속되는 통찰력에 차곡차곡 담을 때 비로소 그 경험은 내 것이 된다. -33쪽

‘정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동動’이야말로 가장 풍성한 감각을 이끌어낸다. -35쪽

천국이란 게 있다면, 다른 곳을 떠올리지 않게 만드는 바로 그곳이리라. -36쪽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수도사들이 불쑥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진짜 삶의 느낌을, 다시 말해 쉼 없이 변하는 생각 뒤에서 변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는 것을 찾아내려면 발견하지 말고 기억을 더듬으라고. 정말 그랬다. -37쪽

피정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면 내 생각이나 야망을,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38쪽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여행을 떠나면 그 여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끝이 날지 짐작할 수 없고 길은 한없이 이어질 텐데, 당신이 그 여정에서 보게 될 것이 무언지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이 이 여행의 미덕이다. -39쪽

글쟁이들은 직업이 직업인지라 아무데도 가지 않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창작력은 세상에 나가 인상을 수집하는 시간이 아니라 명상하듯 가만히 앉아서 수집한 인상들을 문장으로 바꾸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 우리의 일은 ‘동’으로 진행되는 삶을 ‘정’으로, 예술로 승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은 우리의 일터이자 전장이기도 하다. -42쪽

우리가 아무데도 가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 즉 우리 삶의 풍경은 아마 이럴 것이다. 비슷비슷해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이더라도 항상 새로운 색채와 풍경,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으리라. -51쪽

샌퀜틴에서 뉴델리에 이르기까지, 감금된 사람들은 명상을 배운다. 명상을 해야만 그들은 갇힌 곳에도 자유로운 지점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54쪽

예전에 나는 앨버타 산속으로 들어가 어느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내게는 자신의 집을 거의 떠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편지들만이 벗이 되어주었다. 글에서 느껴지는 시인의 열정이 어찌나 강렬한지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에서 받은 인상은 강렬했지만 새장에 갇힌 것처럼 갑갑하기도 했다. 그녀의 말들은 보석함에 든 폭발물이었다. -55쪽

설령 당신이 직접 목적지를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정했다고 해도 이 결정이 두려워질 수 있다. 그곳에는 숨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릿속에만 틀어박혀 있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계속 집에만 있으라고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와 단둘이 갇힌 채, 생각이라는 덫에 걸려 밖으로 나가거나 의지력을 그러모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력해질 수도 있다. -57쪽

고요를 추구하는 삶은 때로는 예술이 아니라 의심이나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빛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정작 수많은 긴긴 밤을 어둠 속에서 홀로 보내기를 서슴지 않을 수도 있다. 수도원을 찾아가면서, 그런 곳을 찾는 일이 너무나 간단히 도피로 변질되거나 혹은 오래 가지 않을 열병의 고통 속에서 경솔하게 내린 결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고요’와의 로맨스를 갓 키우기 시작할 즈음에는 그후 닥쳐올 고된 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57쪽

달변의 수도사였던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사색의 길은 길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누군가 그 길을 따라가 뭔가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사실 명상의 법칙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당신이 좋은 생각을 얻고자, 나아가 행복을 찾고자 그곳으로 들어간다면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어떤 의미에서, 포기하지 않고서는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주장이다. 선문답처럼 쉽사리 이해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충고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누구라도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당장 손에 넣지 못한 것들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당장 곁에 있는 것들은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일 테고 말이다. -58~59쪽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이 쓴 유명한 글이 있다. ˝사람들의 불행은 전부 한 가지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사실이란, 사람들은 도무지 방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중략) 교토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무턱대고 아무거나 하지 마. 가만히 좀 앉아 있어.˝ -68~69쪽

게다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정보가 늘어날수록 그 정보를 하나하나 처리할 시간이 줄어든다. 기술이 우리에게 절대 해줄 수 없는 일이 있다. 기술은 기술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을 귀띔해주지 않는다. -69쪽

참선을 이익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분명 금리는 매우 높지만 장기간에 걸쳐 수익을 받는 무형의 통장에 적립되어 있고, 부득이한 순간에만 꺼내 쓸 수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의사가 당신의 병실로 들어와 침통하게 고개를 젓거나 당신의 차 앞으로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드는 순간 말이다. -76쪽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장소는, 한동안 만나지 않은 친구를 금세 알아보듯 종종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이미 아는 곳으로 돌아가듯이 익숙한 감정에 휩싸여 다가간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썼다. ˝어떤 이는 교회에 가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킨다. 나는 집에 머무르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킨다.˝ -88~89쪽

˝사색하는 삶의 기이한 법칙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그저 앉아서 고민해봤자 문제의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젠가 저절로 해결된다. 혹은 언젠가 삶이 당신을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사색하는 삶의 권위 있는 탐험가 중 한 명인 토머스 머튼의 말이다. -95쪽

물론 소동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든 설탕이 범벅된 도넛에서 몸을 돌리는 것이든,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그러모아야 한다. -96~97쪽

어쨌든 우리 중에 일상에서 자주 혹은 장기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러므로 ‘아무데도 가지 않기’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당일치기로 여행을 가거나, 낚시를 가거나, 매일 아침 30분 동안(이 정도면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중 고작 3퍼센트에 불과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고요에 도달한다는 것은, 굳이 성소나 산꼭대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고요함을 활동에, 이 번잡한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97~98쪽

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가는 것보다 더 활기찬 일은 없으리라.
산만함의 시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호화로운 기분이 드는 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리라.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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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8-26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인용문들을 보니 저도 읽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ㅎㅎ 더운 여름 잘 지내시나요??

로렌초의시종 2017-08-26 22:59   좋아요 1 | URL
네. 그럭저럭 올해도 무사히 넘긴 것 같아서 다행스럽네요. 잘 지내셨죠? 책은 분량이 소략하지만 정성스러운 글이어서 한번쯤 보실 법하리라 생각합니다.
 
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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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목함을 중시하는 사람은 일단 피하고 본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것도 모자라, 화목한 가정에서 살면 자신의 이 문제는 해결되고 어떤 문제도 더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정도로 분별력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화하는 가정에서 성장하는 최대의 장점은 화목하면 쉽게 매몰되는 관계의 결을 읽게 되는 것인데, 그저 자신의 불행에 함몰된 채 아무것도 보지 않고서 보이지 않는 화목함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불화의 상처만 가득한데 성장하지도 못한 인간은 무고하며 순전한 자신을 동정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자신의 주변까지 상처 입히면서 불화의 고리로 밀어 넣을 뿐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다른 거 따질 거 없다. 그저 화목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여자가 제일이야. 그런 여자가 너도 위해줄 줄 알고 애도 반듯하게 키우는 거다. 그게 어머니가 말하는 배우자의 덕이었다. 양친이 있고, 그 양친의 사이가 좋고, 그런 부모가 저절로 심어준 세상과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빛깔 자체가 환한 여자. 그런 여자가 내 주위의 어딘가에 있기는 있었던 것 같지만 그들은 나와는 늘 다른 반, 다른 과, 다른 동네였다. 같은 지하철역에서 내려도 다른 빌딩으로 출근했다. 나는 해사한 형수를 볼 때마다 내가 그동안 사귀었던 음울한 여자들을 떠올렸다. 최은미(창 너머 겨울)-p.145~146

 

 이 작품집에 실린 여러 소설들 중에서도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을 읽을 때 가장 불편했다. 자신이 얼마나 음울하고 불화하는 인간인지는 한순간도 직시하지 못하면서도, 화사함과 화목함에 대한 집착마저 자기 연민의 이유로 삼는 화자의 모습이 시종일관 거북했다. 내 안에 저런 찌꺼기가 못내 남아 있으리라는 불안감이나, 자칫하면 내 꼴이 저리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의 탓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화자가 사촌 형수부터 동료 직원에 이르는 주변의 애정을 갈구하거나 자신에게 애정을 선사하지 않는(혹은 않을) 이들을 저주하며, 이런 자신은 항상 무고하다는 뒤틀린 확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써 사타쿠니의 가려움증이라는 알리바이를 마음껏 탐닉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가 이 음습한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간호사의 불친절이, 의사의 지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온갖 병원을 옮겨 다니고, 밤에는 사타구니의 가려움을 없애 준다는 무수한 배너 광고들에 낚이는 행태를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병원에도 다시 가지 않았다. 마지막 말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은미(창 너머 겨울)-p.136

 

 이 남자에게 자신의 질병은 언제나 너무도 소중한 알리바이였다. 스스로가 그나마도 없이는 용납될 리 없는 열등감과 욕정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만 알았기 때문이다. 화자의 내면과 주변의 묘사가 워낙 예리하고 선명했던 까닭에, 그처럼 자신의 음습함을 도리어 보호하며 피폐한 삶을 변명하는 수단으로 삼는 수많은 사람들을 연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병을 고치고 사느니, 병을 지키며 죽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구차한 내면을 낱낱이 보는 것은 깨닫는 만큼 괴로운 경험이다. 자신이 스스로의 질환에 얼마나 깊이 매몰되었는지 모르거나, 모른 척한 채 오로지 이런 자신을 사랑하거나 동정해 줄 사람을 찾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뿌리 깊이 뒤틀렸는지 새삼 떠올렸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화창한 날 무덤 위에서 나체로 햇살을 받으며 성기가 떳떳하게 맥동하던 무속적인 환상 속에만 존재한다. 의사와 간호사의 검증된 치료를 꾸준히 지속하는 대신, 그들이 건드린 자신의 성적 열등감에 집착하는 아들과 그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추억인 셈이다.

 

 7편의 소설이 모두 흥미로웠고 인상적인 대목도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다루기에는 이 나라의 여름이 버겁다는 핑계가 그리 과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었던 작품, 말해야 할 작품, 좋았던 작품을 하나씩 짚는 정도면 적당하겠다. 힘들었던 쪽을 이야기했으니, 말해야 할 쪽을 짚을 차례다.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가 2014년의 대상이었으니 피해 갈 수 없다. 언젠가 이 작품의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호기심이 일었던 기억도 난다. 뭔가 가늠이 되지 않는 제목이었다. 이 제목이 무엇인가 정보를 주긴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처음 읽을 때부터 이 이야기의 정보를 지워 버리는 듯했다. 어째서 제목이 하필 상류엔 맹금류인지, 그것이 화자가 들려주는 옛 남자친구 제희와 그 가족의 신산한데다 다정한 삶과는 어떻게 엮일는지 생각하느라 정작 그 삶의 결은 그리 깊이 더듬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꿈꿨던, 제희의 연인이었던 화자의 시선과 퍽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생각도 관계도, 깊다고 생각하는 꼭 그만큼 얕았다.

 

제희네 아버지는 감기 치료를 하러 병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았다. 암이 발견된 뒤로는 제희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을 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을 시도해볼 수는 있지만 가망은 별로 없다는 최종 진단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밤에 제희네 누나들이 마루에 모였다. 제희네 어머니와 제희까지 여섯 사람이 손을 잡고 둥글게 앉아서 이 고난을 잘 헤쳐나가자고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다짐했다. 그건 분명한 기도였지만 일방적인 위탁은 아니었고 서로간의 다짐이자 격려였다. 제희나 제희네 누나들에게는 신이 없었다. 황정은(상류엔 맹금류)-p.10

 

 하지만 연인과 그의 가족 사이로 좀 더 깊이 스미지 못한 것은 화자의 잘못도, 문제도 아니다. 고단한 사람들 사이로, 그 고단함을 모르는 이가 들어가기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 뿐이다. 화자의 노력 부족이 아니었다. 그가 끝내 제희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부 모두 6.25 실향민으로 시작해 건실한 시장 상인으로 자립했지만, 이를테면 보증을 잘못서서 결국 기울어 버린 제희네 가족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화자의 소망과 시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서, 이렇듯 먼 훗날까지도 그때 그들의 남루함을 끝내 견디지 못했던 자신의 얄팍한 명철함을 반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화자가 무사히 제희 가족의 일원으로 안착하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오직 그 혼자서 자신은 갈 수 없는 길을 망각하지 못하도록 이정표를 심기 위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오직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함께 갈 수 없는 사람과, 함께 갈 수 없는 곳을 알게 됐다.

 

 카트에 싣기도 곤란할 정도로 엉성하고 부산한 짐을 싣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끼워 맞추려다 짐을 묶는 고무줄 끝의 갈고리가 제희의 복숭아뼈를 가격하는 일련의 장면은 너무도 한결 같고, 그 가족의 삶과 잘 어울려서 괴로웠다. 그 너절한 상자 중 무엇 하나 빼놓지 못한, 꼭 그 무더기와도 같은 부모 중 어느 한 사람도 제희에게 사과하거나 그의 고통을 살피지 않는 것조차 참 스산했다. 고단한 까닭에 이 가족은 다정했으며, 꼭 그만큼 누추했다. 관계는 꼭 지속되거나 성공해야만 가치가 증명되지 않는다. 중단되고서야 의미가 드러나는 관계도 존재할 것이다. 처음부터 이 작품의 관계는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 깨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자는 남자친구라기보다는 자매나 친한 남매”(p.10) 같았던 제희와의 친밀감에 빠져서, 실은 자신이 그 가족과의 관계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괴롭거나 외로웠을 것이다.

 

 상류엔 맹금류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폐수 옆에서 쉬었음을 아는 사람들과 그 사실을 몰랐을 때부터 이미 그 물가에 앉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가족이 되기란 어렵다. 화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사람이었던 까닭에, 제희의 가족은 자신과 달리 말을 해야만 알아듣는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과 그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여서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좀 전까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억지로 쉬었던 계곡 상류에 맹금류 축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는 제희 가족의 일원이 되지 않았기에, 비로소 그들과 자신을 아울러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두 사람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고서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했다.

 

쇼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아주 작게 열고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최은영(쇼코의 미소)-p.261

 

 다만 좋았던 작품은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였다. 이 작가의 첫 단편집에도 실린 같은 작품을 읽은 이들의 호평을 적잖이 접한 까닭에 궁금하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저 좋은 이야기가 발등을 찰랑찰랑 적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즐거웠다. 화자처럼 지방의 소읍에서 자라난 까닭에, 그곳을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후련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 사실 자체에 뭔가 의미를 부여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이 작품은 내 기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다채로운 결을 지녔다. 즐거웠던 까닭은 오롯이 그 결에 있다. 쇼코는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p.245)라고 말했지만, 적어도 그 기분은 거슬릴지언정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것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면 답답하다. 나를 부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나 자신만 인정하게 되면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만큼 안온한 것은 찾기 어렵다.

 

 한국와 일본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외톨이 여고생 두 사람이 만나서 자신이 바로 상대와 같은 외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였다. 어디에 어떻게 있어도 한국의 소유와 일본의 쇼코는 비슷하게 밀려난 외톨이였기에, 그 사실을 수용하기는 도리어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내 이해의 수준이 오히려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다르지만 비슷한 대상과의 경험들이 서서히 내 속에 한 겹씩 스미면서 비로소 내가 어떤 인간(‘외톨이’)인지 받아들이는 과정은 지난하고, 끝난 후에도 딱히 편안해지지는 않았지만, 불현듯 내가 쉴 그늘이 드리워져서 나쁘지 않다. 말하자면 불편한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안도인 셈이다. 소유와 쇼코에게는 상대방과 그 관계에 누적된 기억이 그런 그늘이나 해변이다.

 

 소유에게, 쇼코에게 깃들었던 가족들의 온기가 얼마나 깊고 귀한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혹은 고모는 그들을 지켜준 만큼 붙잡았을 테니까. 두 사람은 끝내 가족이 그들을 멀리서 돌보고 축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한낱 관찰자인 나는 과거에 그들이 느꼈던 그 관계의 갑갑함을 지우고 싶지 않다. 실은 혈연의 안온함이란 누군가가 사라져야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 자체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서로가 결국 가족의 품 안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소유와 쇼코가 서로의 비슷함을 받아들였다는 점만큼이나, 정작 그들이 가족 안에서는 상대방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는 점이 내게는 또렷이 다가왔다. 어느 것도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거나 망각할 이유도 없다.

 

한국을 생각할 때면 늘 K군의 그 고즈넉한 분위기,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중년 여자들, 기다란 풀들이 우후죽순 솟아난 천변과 하루살이들이 떠올랐었어.” 최은영(쇼코의 미소)-p.296

 

 불화하는 가정, 혹은 불화를 자초한 가정을 버거워하면서도 화목함을 동경하지는 않은 까닭에 소유와 쇼코의 이야기를 더 아름답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화목함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보려던 시간은, 한없이 뒤틀리고서도 어떻게든 제자리에서 풀려 나갔다.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것처럼 꼬였던 시간과 관계 끝에서 소유와 쇼코가 만난 것은 두 사람 모두 억지로 자신에게 없는 화목함을 찾아 헤매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워할지언정 모른 척하지 않아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있었다. 괴로움의 결을 찬찬히 더듬는 손길이 그저 우악스럽지 않고 아름다워서 기뻤다. 사람을 기다려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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